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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간지 켄뇨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7. 6. 23. 23:16 Posted by 발해지랑

혼간지 겐뇨(本願寺 顕如)

1592 11 24일 병사 49

1543~1592.

쟁토진종(爭土[각주:1]) 혼간 사(本願)의 승() - 이하 혼간지로 통일 -. 11세 종주(宗主)가 되어 혼간지를 세습하였다. 이시야마(石山) 혼간지에서 물러나길 원하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 충돌. 후에 키이(紀伊)() 사기노모리(鷺森)로 물러났다. 12세 쿄우뇨(教如)와 의절한 것이 후에 혼간사()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노부나가와의 10년전쟁


 [켄뇨(顕如)]는 법명(法名)으로 이미나([각주:2])는 코우사(光佐) 일반적으로는 [혼간지 켄뇨(本願寺 顕如)]라 불리고 있다. 혼간지 10세인 쇼우뇨(証如)의 첫째 아들로 13살에 제 11세가 되어 종주가 되었다.


 1559
년. 오오기마치(正親町) 텐노우(天皇)의 즉위 비용을 헌상하여 승정(僧正[각주:3])이 되어 몬제키(門跡[각주:4] )에 준하게 되었다. 뇨슌니(如春尼) - 그녀의 언니는 타케다 신겐(武田信玄)의 부인 와 결혼하여 쿄우뇨(教如)나 쥰뇨(准如) 등의 아이들을 얻었다.


 1570년. 오오사카(大坂) 이시야마에 있는 혼간지에서 퇴거(退去)를 요구하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든 이후 10년에 걸친 싸움에 도전하여 자주 노부나가를 고난에 빠뜨렸다. 켄뇨는 노부나가와 대립하는 동안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 아자이 나가마사(長政),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 모우리 씨(毛利)와 동맹을 맺고 또한 각 지역의 문도(門徒)들을 동원하여 노부나가와 대결하였다. 그러나 타케다 신겐이나 아자이 나가마사 등의 죽음으로 인하여 동맹은 와해되었으며 각지의 문도 집단도 괴멸. 거기에 이시야마 혼간사()가 포위당하기에 이르르자 1580 3월에 오오기마치(正親町) 텐노우(天皇)의 칙명에 따라 노부나가와 화해하고 다음 달인 4월 키이(紀伊)의 사기노모리(鷺森)로 거처를 옮긴다.


 이때 철저항전을 주장하는 첫째 아들인 쿄우뇨와 대립하여 부자(父子) 관계를 의절했다. 이 의절이 중신이나 문도 사이의 대립을 낳아 후에 혼간지가 동서로 분열되는 원인이 되었다.


혼간지 재흥(再興)과 발병


 노부나가가 죽은 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는 켄뇨에게 접근하여 문도 집단의 회유(懷柔)를 꾀했다. 히데요시는 우선 켄뇨를 이즈미(和泉) 카이즈카(貝塚)로 옮긴 후 키이의 사이카(雑賀)()을 공략하여 혼간사지 세력이 강한 땅을 빼앗았다.


 이시야마 혼간사()가 있던 곳에 오오사카 성()을 쌓은 히데요시는 텐마(天満)에 절터를 주어 혼간지를 재흥시켰다. 켄뇨와 그의 부인인 뇨슌니는 히데요시나 키타만도코로(北政所[각주:5])에게 때때로 다회(茶會)에 초대받는 등 친교를 맺었다.
 텐마의 혼간사
() 예전과 같이 슈고(守護)의 힘이 미치지 않는 등
[각주:6]의 특권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며 히데요시 정권의 지배 아래 놓여졌다. 켄뇨도 히데요시 권력의 비호(庇護) 아래 들어가는 감으로써 혼간사()의 존립을 꾀하려 했던 것이다. 히데요시는 종교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서 1591년에 혼간지를 쿄우토(京都)의 호리카와(堀川) 로쿠죠우(六条)로 옮겨가도록 명령했다. 1년 후 현재의 니시혼간지(西本願寺)의 땅에 건립되었다.


 그 동안 켄뇨는 자주 병에 걸려 아리마(有馬)의 온천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그 병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절에 대한 사무를 보는데 지장은 없었던 듯하다.


혼간사(), 동서(東西)로 나뉘다.


 1592 11 20일.
 켄뇨는 새벽 수행을 끝내고
불전 청소를 끝낸 후에 갑자기 쓰러졌다. 본사(本寺) 이전에 따른 마음의 피로가 쌓였던 것일까? 병명은 [중풍]이었다.


 켄뇨와 친했던 쿠교우(公卿)인 야마시나 토키츠구(山科 言継)의 일기 [토키츠구 경기(言繼卿記)]에는,

11 20일. 몬제키[각주:7]. ()시에 큰 중풍에 걸리다. 즉시 여러 명의(名醫)를 불러 치료하게 했지만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회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발병한지 4일 후인 24일. 명의들의 치료도 보람 없이 [()시에 죽다](言繼卿記)고 쓰여있는 것을 보면 점심 지나서 죽은 듯하다. 향년 49.


 12세 종주의 자리에는 장자(長子)인 쿄우뇨가 계승하지만 곧이어 뇨슌니가 '켄뇨는 셋째인 쥰뇨를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양도장(讓渡狀)을 히데요시에게 제출함에 따라 사태는 급변하였다. 그 결과 히데요시의 판정에 따라 쿄우뇨는 은거의 몸이 되었고 17살인 쥰뇨가 혼간지의 법주 자리를 잇게 되었다.


 이 판정에 불만을 품은 쿄우뇨와 문도들은 세키가하라(ヶ原) 전투 후에 권력을 장악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에게 접근하여 그 비호 아래서 카라스마루(烏丸) 로쿠죠우(六条)에 절(현재의 히가시혼간(東本願寺))를 건립하게 된다.


 켄뇨는 혼간사()의 분열을 우려하여 쿄우뇨와 화해했지만 이시야마 혼간사()의 퇴거를 둘러싼 싸움은 켄뇨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은 후에 교단을 둘로 나뉘는 대립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사기노모리(鷺森)에 있는 니시혼간사(西本願)사(寺)별원(別院)[和歌山市]>
  1. 한 번이라도 진실된 마음으로 염불을 외우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여,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던 하층민이나 농민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함. [본문으로]
  2. 실제 이름. 그러나 실제 이름은 영적인 것이라 하여 생전에는 부르지 않았다. [본문으로]
  3. 일본 승위승관(僧位僧官)의 관리 중 하나. [본문으로]
  4. 황족 혹은 귀족이 출가한 절 또는 주지를 말한다. [본문으로]
  5. 히데요시의 정부인. [본문으로]
  6. 즉 세금이나 부역에 종사하지 않아도 되었다. 수호불입(守護不入)이라 한다. [본문으로]
  7. 켄뇨를 이름. 이 당시 몬제키에 준하는 위치를 점하고 있었기에 이 때부터 몬제키는 혼간사의 주지를 이르는 속칭이기도 했다. [본문으로]

기타바타케 도모노리(北畠 具敎)

1576 11 25 암살 49

1528~1576.

이세(伊勢) 고쿠시(国司[각주:1]) 키타바타케 씨() 8대 당주. 남부 이세 5()이가(伊賀), 야마토(大和)의 일부를 지배. 검호(劍豪) 츠카하라 보쿠덴(塚原卜)에게서 [히토츠노 타치(一の太刀)]를 전수 받았으며 와카(和歌)에도 뛰어났.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둘째 아들 노부카츠(信雄)를 양자로 받아들여 은거하지만 옛 신하에게 암살당했다.

<그림은 http://homepage1.nifty.com/kitabatake/kitabatake21.html에서 불펌...>






노부나가에게 항복하다.


 무라카미(村上) 겐지(源氏)의 명류이며, [神皇正統記[각주:2]]를 쓴 것으로 유명한 키타바타케 치카후사(親房)와 그의 셋째 아들인 초대 이세 고쿠시 키타바타케 아키요시(北畠 顕能)가 남북조시대에 이세, 이가, 야마토 3국의 요충지인 타게고쇼(多芸御所)와 키리야마(霧山)에 성을 세운 다음부터 키타바타케 가(家)는 8대 토모노리까지 남부 이세 5()을 다스렸다.


 토모노리는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와도 친밀했으며 , 검법, 와카에도 뛰어난 문무양도의 달인으로 쿠교우(公卿)인 야마시나 토키츠구(山科言継)나 야마토의 야규우 세키슈우사이(柳生 石舟斎)등 문인(文人), 검호가 토모노리의 저택에 자주 방문하여 함께 풍류를 즐겼다. 특히 잠시 동안 머물던 츠카하라 보쿠덴에게서는 신토우(新当)류의 비전인 [히토츠노타치(一の太刀)]를 전수받아, 동문인 무로마치 바쿠후 13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를 지칭하는 [검호 장군(劍豪将軍)]을 빗대 [검호 국사(劍豪 国司)]라 칭송되었다. 후에 이 두 명 다 암살대와 칼을 맞댄 끝에 참사를 당한 것은 아이러니컬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풍류를 좋아하여 와카나 렌가(連歌) 모임을 개최했으며, 검의 타류시합(他流試合)도 하였다. 영내(領內) 20여개의 성이나 요새를 쌓아 정병(精兵)을 키우고 있었지만 천하를 향한 야망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1568 41살 때.

 천하 평정을 목표로 하는 오다 노부나가가 3만의 대군을 이끌고 갑자기 이세로 침공하여 유서있는 칸베(神戶)(), 코츠쿠리(木造)()를 자기 진영에 끌어들이고 키타바타케 가()를 공략할 준비를 시작했다.

 토모노리는 격노하여 산 속에 있는 타게고쇼(多芸御所)를 나와 이세 평야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오가와치(大河內)성에 본진을 두고 철저 항전의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노부나가군 3만에 대하여 키타바타케군은 5천.

 전투 경험이 풍부한 오다의 병사들에 비하여 2백여 년간의 평화로 인해 전의도 낮았다. 그럼에도 50여 일간 버텼지만 그러는 동안 수많은 희생자가 생겼으며 화살과 식량도 떨어졌고 노부나가의 조략으로 배신자가 나와 물길도 끊어졌다. 노부나가 군에도 피해가 생겼기에 노부나가는 타키가와 가즈마스(川 一益)와 타케나카 한베에(竹中 半兵衛)의 진언에 따라 싸움을 멈추기로 하였다.


 노부나가쪽의 내건 조건은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인 챠센마루(茶筅丸 = 후의 오다 노부카츠) 토모노리의 딸인 유키히메(雪姬)의 남편으로 삼는 것과 동시에 양자가 되어 키타바타케가()를 상속하게 한다. 그 외의 처벌은 없다는 관대한 제안이었다.

 이걸로 개성(開城). 얼마 지나지 않아 양 가문의 혼례가 치러졌고 키타바타케가()의 가독을 이어받아 당주가 된 노부카츠는 마츠가시마(松ヶ島)성에 입성했다.

 [이젠 전쟁으로 이세의 사무라이나 백성들을 고생시키지 않아도 된다. 키타바타케의 가명만 남으면 그걸로 만족한다]

 라는 토모노리는 오다 가문을 증오하는 키타바타케의 가신들을 다독거리며 자신도 오가와치성에서 남서로 약 20킬로 떨어진 미세()의 저택에 은거했다. 그 곳은 해자로 둘러 쌓인 1만여 평의 작은 성이었지만 몇 몇의 종자들과 함께 자연을 노래하며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토모노리 암살 지령


 그렇지만 노부나가는 노부카츠에게 토모노리의 암살을 명하였고 노부카츠는 이미 자신의 충실한 부하가 되어있던 키타바타케 일족인 타키가와 사부로베에 카츠토시(川 三郞兵衛 雄利 토모노리의 동생인 코츠쿠리 토모마사(木造 具政)의 서자로 타키가와 카즈마스(川 一益)의 양자)에게 실행을 명했다.


 이리하여 1576년 11월 25 이른 아침.

 타키가와와 옛 신하였던 카루 사쿄우(加留 左京), 나가노 사쿄우노신(長野 左京進)등 몇 명이 미세의 저택을 방문하여 면회를 청했다.

 측근인 사사키 시로사에몬( 四郞左衛門)이 타키가와 등이 왔다는 소식을 토모노리에게 전하자 토모노리는 굉장히 반가워하며 그 들을 자신의 방으로 직접 오게 한 후 세 살인 토쿠마츠기미(德松君)를 무릎에 앉힌 채로,

 [잘 오셨네. 편히 쉬다 가게나. 내 딸이나 사위께선 건강하시겠지?]

 라고 미소를 지으며 차를 권했다.


 이때 토모노리가 윗몸을 내밀어 차 그릇을 권하는 순간. 카루가 소매에 감추어 두었던 테야리(手槍[각주:3])를 꺼내어 토모노리의 가슴팍을 향해서 찔렀다. 깜짝 놀란 토모노리는 검호 국사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뒤 편에 있던 칼걸이에서 칼을 뽑아 맞섰지만, 타키가와 등의 암살대는 계획대로 토모노리를 제압하여 세 살짜리 토쿠마츠기미까지 죽였다.

 한 사람이 목을 들고서 도망쳤지만 토모노리의 무사들이 뒤쫓아 난투를 벌였고, 양쪽에서 사상자가 나왔지만 카루와 나가노는 도망쳤다고 전해진다.


 당시 토모노리에게는 1572년 상경을 목표로 하는 카이(甲斐)의 타케다(武田)군과 연락을 취하며 노부나가를 공격한다는 소문이 퍼져 의심 많은 노부나가가 암살을 시도한 것 같다. 방심하고 있던 토모노리만 불쌍할 따름이다.


 토모노리 암살을 알게 된 충성심 깊은 키타바타케 무사 약 400명은 각지에서 키리야마(霧山)성으로 모여들어 노부나가의 대군과 싸우다 12 5일 패했다. 이리하여 키타바타케씨가 이세에 들어온 이래 8 2 4십 여년 이어진 영광스런 역사도 막을 내렸다.

  1. 무로마치 바쿠후(幕府)와는 별도로 예전부터 쿄우(京)의 조정에서 임명. [본문으로]
  2. 일본의 남북조시대에 키타바타케 치카후사가 속한 남조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쓴 역사서. [본문으로]
  3. 손잡이가 짧은 단창.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