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카카게[隆景]가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의 후계자가 된 데에는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모략이라는 덫이 작용하고 있다.
모우리 가문[毛利家] 발전을 위해서는 세토 내해[瀬戸内海] 연안의 호족 코바야카와 가문을 빼앗는 것이 긴급한 과제였던 것이다.
코바야카와 가문은 당시 누타[沼田]와 타케하라[竹原]라는 두 가문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 중 타케하라 가문의 당주인 오키카게[興景]가 병으로 죽었다. 운 좋게 모토나리의 조카가 죽은 오키카게의 부인이었다. 곧바로 모토나리는 당시 9살인 토쿠쥬마루[徳寿丸=후의 타카카게]를 후계자로 밀어 넣었다.
그 직후 이번엔 누타 가문에서 당주 마사히라[正平]가 죽었고 거기에 그의 아들인 마타츠루마루[又鶴丸]에게 눈이 머는 불행이 찾아왔다. 모토나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처음부터 누타 가문의 중신 노미 씨[乃美氏]를 꼬셔놓은 상태에서 은밀히 모략을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모토나리는 강제로 누타 가문을 타케하라 가문에 합병시키고는 그 당주에 타카카게를 앉혔다. 더불어 합병 반대파인 누타 가문의 가신들 하나하나를 숙청한 것이었다. 누가 보아도 일련의 당주 사망사건에는 모토나리의 검은 모략의 냄새가 풍기고 있다.
어쨌든 이런 어두운 모략에 의해 탄생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이지만, 모우리 가문 발전의 방향타를 쥐고서는 전란의 세상에서 그 지모를 아낌없이 발휘하여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継], 시마 사콘[島 左近] 등과 더불어 센고쿠[戦国]의 삼대지장 중 한 명으로 손꼽히게 된다.
타카카게가 죽었을 때,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는,
"일본에서 지혜로운 사람 한 명이 사라졌다. 이 인물은 모우리 가문이라는 거대한 배를 조종하는 뱃사공과 같았다…"
하고 회상하였다.
또한 이런 이야기가 있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상급귀족[公卿]인 키쿠테이 하루스에[菊亭 晴季]와 바둑을 두다가 어려운 국면을 맞이하자 자기도 모르게
“이건 타카카게라도 풀 수 없겠지……”
라고 혼잣말을 한 것이다. 옆에서 관전하고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도
“정말 그렇겠군요”
라며 끄덕였다고 한다.
거슬러 올라가 소년시대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타카카게가 형인 모토하루[元春]와 각각 아이들을 데리고 편을 갈라 눈싸움을 하였을 때, 처음엔 모토하루의 돌격에 패하였지만, 두 번째는 부하를 몇 명인가 복병으로 숨겨 놓아 모토하루의 허를 찔러 승리하였다고 한다.
타카카게가 처음으로 전쟁터에 나선 것은 1547년 그의 나이 15살 때에 칸나베 성[神辺城]공략전이었고, 1555년 이츠쿠시마 전투[厳島合戦]에서는 일찍부터 후년 천하 삼대지장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은밀한 상륙작전에는 아무래도 세토 내해의 수군인 노지마[能島], 쿠루시마[来島] 수군의 응원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들과 교섭하여 현실화시킨 것이 타카카게인 것이다.
이러한 외교적 수완뿐만이 아니라 실전에서도 민첩한 기동성을 보여주었다. 별동대를 이끌고 대담하게도 적의 정면인 이츠쿠시마 신사(神社) 오오토리이[大鳥居] 가까이에 배를 대었다. 스에 타카후사[陶 隆房]의 군사들은 설마 적측인 모우리의 군사들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그냥 수상히 여기고 있자, ‘큐우슈우(九州)에서 원군으로 온 수군이다’고 속이고는, 적이 보는 앞에서 당당히 상륙하여 스에 군의 본진 토우노오카[塔ノ岡]의 허리쯤에 진영을 세웠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의 결전에서는 스에 군의 배후에서 습격한 부친 모토나리 등의 주력과 호응하여 스에 군을 협공하였다. 타카카게 자신도 3개소의 상처를 입으면서 분전. 적 부하장수인 야마토 오키타케[大和 興武]를 포로로 잡았으며, 적 대장인 타카후사를 추격하여 자살로 몰아넣었다.
크게 보기 < 이츠쿠시마의 전투 >
1570년 6월.
부친 모토나리가 이 세상을 떠나자 타카카게는 모토하루와 함께 테루모토[輝元]를 잘 보좌하여 [모우리의 양천(毛利の両川)]으로서 존재감을 발휘하였다. 그러는 한편 모우리 본가에 대한 충성심도 두터워, 조카인 테루모토가 머물고 있는 방을 지날 때는 반드시 무릎을 굽혀 예를 다하며 지나갔으며, 테루모토가 없을 때도 그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천하통일을 목표로 서쪽으로 진격을 해 온 오다 군[織田軍]과의 격돌에서 그의 군략가로서의 특질이 발휘된다.
1575년 오다 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던 오오사카[大坂]의 혼간지[本願寺]와 손을 잡은 모우리는 같은 해 7월 혼간지에 식량을 해상 수송하였는데, 그때 총지휘를 한 것이 타카카게였다. 모우리의 수송선단은 요격하러 나온 오다 군과 키즈가와 강[木津川] 하구에서 격전을 벌인다. 그러나 이쪽은 이츠쿠시마 이래의 전통을 자랑하는 코바야카와 수군이다. 오다 측의 수군을 능숙하게 포위한 후 철포, 불화살을 쏟아 붙는 듯이 공격하여 수 백 명을 죽이는 대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제 츄우고쿠[中国] 모우리의 명성은 시코쿠[四国], 큐우슈우[九州]에까지 이르렀다. 더구나 모우리는 그 이전에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통해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카이[甲斐]의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도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들과 호응하여 오다[織田]를 동서에서 협격하고자 하는 대전략이었다.
이러던 중 오다-모우리 대결 최대의 고비가 되는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 공방전에 이르게 된다.
이 전투는 타카마츠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清水 宗治]의 할복을 조건으로 강화를 맺게 되는데,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의 변 소식이 전해지자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죽음을 숨긴 채 다음 날 무네하루를 할복시키고는 급히 쿄우토[京都]로 군사를 돌려던 것이다. 노부나가가 죽었다는 소식은 모우리 군에게 있어서 다시 오지 않을 반격의 기회였다. 여기서 히데요시를 추격한다면 물리치는 것은 쉬웠다. 대부분이 이 의견에 찬성하였다. 하지만 타카카게는 결사반대를 외쳤다.
타카카게 외교감각의 탁월함이 여기서 멋지게 발휘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타카카게는 히데요시가 장래 반드시 천하를 쥐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추격하지 않고 히데요시에게 아케치[明智] 토벌을 성공시키면 반드시 히데요시는 모우리에게 호의를 갖고 감사하게 될 것이다. 모우리의 장래를 위해서도 그러는 편이 훨씬 이득이라고 설득한 것이다.
히데요시의 정권장악은 타카카게의 이 추격반대 덕분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후년 히데요시는 이때의 타카카게 배려에 깊은 감사를 하여, 모우리 씨[毛利氏]에게 이때의 은혜를 갚음과 동시에 특히 타카카게를 본가의 테루모토와 동격으로 올려, 대로(大老)의 한 사람으로 발탁하였다. 영지(領地)도 치쿠젠[筑前] 전부와 치쿠고[筑後]와 히젠[肥前]에 각각 2개군(郡)을 하사하여 거대 다이묘우[大大名]로 만들어 주었다.
한편 타카카게가 모우리 가문에 얼마나 헌신적이었는가는 히데아키[秀秋]를 양자로 받아들인 것에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세자가 없는 모우리 가문에 히데요시의 양자 히데아키가 후계자 후보로 거론된 것이다. 타카카게는 경악했다. 아키[安芸] 명문가의 피가 히데요시의 친척이라고는 하여도 기껏해야 잡병[足軽]이나 맡을 인물에게 더럽혀진다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저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타카카게 필사의 노력이 시작되었다. 히데요시의 주치의인 야쿠인 젠소우[施薬院 全宗]에게 히데요시의 의향이 어떤지 묻자, 히데아키를 모우리에 보낸다는 건은 아직 결정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타카카게는 이때 자기 가문을 희생시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52만석의 영지(領地)를 킨고 츄우나곤[金吾中納言] 히데아키 님에게 물리 드리고 싶습니다"
는 요청하였다.
모우리의 분가라고는 하여도 코바야카와 가문은 카마쿠라 시대[鎌倉時代]때부터의 명문가였다. 이런 명문가가 히데아키 따위에게 더럽혀 지는 것 또한 참기 힘들었다. 더구나 타카카게에게는 이미 동생인 히데카네[秀包]를 양자로 하고 있었음에도, 그를 분가시키면서까지 히데아키를 양자로 받아들이고 싶다며 간청한 것이었다. 타카카게의 모우리 가문 안녕을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오히로이[お拾=후의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나자 양자 히데아키의 처우에 곤란해 있었던 히데요시는 타카카게의 신청에 굉장히 기뻐하였다고 한다. 타카카게에게는 은거료(隠居料)로써는 파격적인 빙고[備後] 미하라[三原] 3만석이 주어졌다.
이보다 앞선 1593년 1월.
타카카게는 조선에서 전군을 그 지휘하에 두고서 명(明)나라의 병력 30만을 상대로 싸웠다. 적의 대장은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던 이여송(李如松)이었다. 이 명나라 장수는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를 패주시킨 기세를 타고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타카카게는 이를 격파하는 대공을 세운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에 있던 중 병을 앓았고 귀국하여 미하라에서 요양을 하였지만 1597년 뇌혈관 장애로 졸도하여 일생을 마쳤다.
참고로 코바야카와 가문은 히데아키의 대가 되어서 자식이 없어 단절되지만,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에 이르러 당시 모우리 가문의 당주인 모우리 타카치카[毛利 敬親]가 일족 중의 한 명에게 코바야카와 가문을 잇게 하였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 隆景)]
1533년 태어났다.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삼남. 부친 모토나리, 조카 테루모토[輝元]를 도와 츄우고쿠[中国]를 경략. 미하라[三原]를 본거지로 하여 세토 내해[瀬戸内海]에 강력한 수군을 편제하였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와 강화한 후, 히데요시의 시코쿠[四国], 큐우슈우[九州], 오다와라[小田原] 정벌에 참가. 조선의 역에서는 1593년 명(明)나라의 대장 이여송(李如松)의 대군을 개성(開城)에서 물리쳤다. 히데요시의 양자 킨고 츄우나곤 히데아키[金吾中納言 秀秋]를 세자로 받아들였으며, 1597년 6월 20일 죽었다. 65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