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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

 오히로이(お拾い=히데요리)는 세 살이 되었다.

 이 해는 1595년이다. 그 7월 15일에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공식 후계자로 인정받고 있던 칸파쿠(関白) 히데츠구(秀次)가 모반을 꾀했다는 석연찮은 혐의로 자살을 강요 받았고 그의 처첩이나 자식들은 카모() 강변에서 끌려 나와 천민들의 손에 살해당하여 이를 듣고 본 천하의 사람들은 모두 창백해졌다.
 - 믿을 수가 없다.
 고 히데요시(
秀吉)의 과거를 아는 노인들은 모두 그렇게 말했다. 과거 히데요시는 그렇게나 많이 전쟁터에 나갔으면서도 아군을 쓸데없이 사지로 몰아넣는 일 없이, 적을 쓸데없이 죽이는 일 없이 될 수 있는 한 적을 항복시키고 항복시킨 후에는 그에 걸맞은 봉록과 지위, 체면을 유지시켜주었다. 이런 불살주의(不殺主義)는 책략이라기 보다는 성격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난세를 진정시키는 데는 크게 힘을 발휘하여 적들도 또한 안심하고 히데요시에게 몸을 맡기는 자들이 많았다. 히데요시의 그런 성격이 - 오히로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이런 식으로 완전히 변했다. 양자 히데츠구와 그 가족들을 마치 풀이라도 뽑아 없애듯이 멸절시키는 인물을 도저히 이전의 히데요시와 동일인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 육체도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이 히데츠구 사건보다 조금 전인 이 해의 4월 15일 밤에 히데요시는 실금(失禁)하여 이불에 엄청난 양의 오줌을 싸고 말았다. 더구나 그것을 곧바로 알아채지 못했고 일어나서야 자신의 몸이 이렇게까지 쇠약해진 것에 충격을 먹었다. 이쯤부터 히데요시는 피부가 검어지고 거칠어졌으며 활력을 잃고 식욕이 없어져 자주 설사를 하였다.
 - 배에 병이 있으시다.
 라는 소문과 이 실금은 곧바로 성안에 퍼졌다. 후시미(伏見) 성 아래에 저택을 가진 제후들도 그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야스(
家康)도 당연히 알게 되었다.
- 히데요시는 얼마 남지 않았군.
이에야스는 남몰래 자신의 앞길이 밝아지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이에야스와는 다른 반응을 가진 사람들은 토요토미 가문 오우미(近江) 파벌의 관리들 이었다. 이시다 미츠나리(
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들로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 사실만큼이나 앞날을 어둡게 만드는 것은 없었다. 그들은 토요토미 가문의 집정관이며 겸해서 히데요시의 비서관으로 더해서 동시에 요도도노(淀殿)와 히데요리(秀頼)를 위해서는 장래의 보좌관이 될 만한 위치에 있었다. 히데요시가 죽으면 그들 측근 권력집단은 정치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신하여 칸파쿠 히데츠구와 그 측근들 – 키무라 히타치노스케(木村 常陸介) 들 –이 정권의 주도권을 쥘 것이다.

 "그 때문에 칸파쿠(히데츠구)님은 살해당한 것이다"

 라고 이에야스조차 칸파쿠 히데츠구 사건은 오우미 파벌의 중추인 이시다 미츠나리 등의 책모, 참언에 의한 것이라 믿었다.
 정실인 키타노만도코로(
政所)도 믿었다. 세간도 믿었다. 특히 히데츠구 사건으로 가장 피해를 입은 것은 히데츠구와 친했던 다이묘우(大名)들인데 그런 다이묘우 중 대표격인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도 그리 믿었다. 타다오키는 히데츠구 모반이라는 의혹에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 필사적이었다. 아슬아슬하게 같은 벌을 받을 뻔하였다. 이때의 미츠나리에 대한 원한 – 실제로는 히데요시와 그 정권에 대한 원한이 히데요시 사후 타다오키를 이에야스 쪽으로 달려가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미츠나리에게 있어 억울한 누명일 것이다. 그들은 어쩌면,

 "히데츠구님은 히데요리님의 장래를 위해서 살려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라고 히데요시에게 말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이전에 히데요시 자신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런 것만을 온 종일 생각하였다. 자신의 노쇠를 깨닫고 겸해서 히데요리의 나이가 어리다는 생각이 겹쳐졌을 때, 이 천성적으로 인정미 넘치는 인물이 – 더구나 이성(理性)을 받치고 있던 기둥이 무너져버린 심신미약자가 – 빠지게 되는 함정은 하나밖에 없었다. 히데츠구를 죽여 후환을 끊는 일일 것이다.

 이것과는 다른 일이지만 비슷한 사건이 후에 일어났다. 히데요시가 죽는 해인 1598년. 히데요시는 오오사카 성(大坂城)에서 잠잤다가는 깨고 또 자는 노쇠인(老衰人)의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이 즈음 히데요리는 자신의 늙은 아비와 같이 있지 않았고 어쩌다 쿄우(京)에서 히데요시가 옷 갈아 있을 때 이용하는 저택에 있었다. 히데요리는 여섯 살이 되어 있었다. 불과 여섯 살이면서도 그의 늙은 아비의 희망과 주청에 의해 곤츄우나곤(
権中納言)으로 승진해 있었다. 여섯 살의 곤츄우나곤은 긴 조정의 역사에서도 이례적인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일상이 수많은 시녀들에 둘러싸여서는 그 시녀들을 놀이상대로 매일 저택을 떠들썩하게 하며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보통 아이들의 일상과 다를 바 없었다. 발육은 보통 이상이었다.
아이에게도 당연히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있어 시녀 중 네 명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키츠(おきつ), 오카메(おかめ), 오야스(おやす), 오이시(おいし)의 네 명으로 히데요리는 그녀들을 어려워하였고 시녀들도 히데요리의 난폭함에 애를 먹었다. 이것이 오오사카(大坂)에 있는 히데요시의 귀에 들어갔다. 히데요시는 곧바로 붓을 들어 히데요리에게 편지(아직 글자를 읽지는 못하지만)를 썼다.

츄우나곤 님께.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네.
돼먹지 못한 것들이니 그 네 명을 새끼줄로 한꺼번에 묶어 이 아빠가 쿄우(京)에 갈 때까지 어딘 가에 던져놓고 있으렴. 내가 가서는 전부 때려 죽여주마.
용서할 수 없도다.

 결국 죽이지 않았다. 추방시켰다. 유모인 우쿄우노다유우(右京太夫)에게도 엄중히 주의를 주며 [츄우나곤님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자가 있다면 안 죽을 정도로만 때려놓으면 좋아질 것이다]고 써서 보냈다.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시기 일본에 있는 무사들 중 반이 바다를 건너 조선의 각지에서 명나라의 구원군과 조우하여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고생하고 있었으며, 국내에서는 그런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백성들을 쥐어짜 도탄에 빠뜨리고 있었고, 쿄우(京)-오오사카(大坂)의 사람들은 쌀값이 폭등하여 엄청난 생활난에 빠져있었지만 히데요시의 관심은 이미 히데요리밖에 없었다.

 "저 아이의 존재가 천하를 어둡게 만들고 있다"

 고 당시 학자인 후지와라 세이카(藤原 惺窩) 등은 그늘에서 소근거리며 히데요시와 그의 신임을 받고 있던 다이묘우(大名)에게는 가령 초빙을 받더라도 가지 않았다. 참고로 세이카는 후시미 성(伏見) 성 아래에 살고 있던 전시포로인 조선인 학자('강항(姜沆)'을 말한다. – 역자 주)와 필담하며, "지금 천하는 입으로는 말하지 않지만 이 토요토미 정권을 저주하고 있소이다. 만약 명나라의 군사와 조선의 군사가 하카타(博多)에 상륙하여 가는 곳마다 관용에 넘치는 선정을 펼치며 진군해 간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뻐하며 당신네 군사들을 맞이하고 다이묘우(大名)들도 당신들에게 달려가 북쪽 오우슈우() 시라카와노세키(白河[각주:1])에 갈 때까지 파죽지세처럼 곧바로 평정되어 버릴 것이오"[각주:2]라고까지 말하였다. 명나라빠인 세이카다운 과장이 있다고는 하여도 이 정치학자가 보기에 토요토미 가문에는 더 이상 이 시세와 국정을 담당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오로지 어린 후계자와 그것을 낳은 요도도노(淀殿)의 이익 지키기에만 정치가 쏠려 있는 상태이기에 모든 정치악(政治惡)은 거기서부터 나오고 있다고 보고 있었다. 그런 정치악을 조장하고 정책화하고 있는 것은 세이카가 보기에 히데요시의 측근인 이시다 미츠나리 등 오우미(近江) 계열의 문벌관료들이며 그들이 히데요시에게 받치는 헌책은 전부 [히데요리님을 위해서]라는 것으로만 집중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히데요리의 장래를 위해서라며 일부 다이묘우의 봉지(封地)를 바꾸거나 혹은 바꾸려고 하여 여러 다이묘우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춘추필법을 따르자면 히데요리는 이제 여섯 살의 나이로 이 포악한 정치의 책임자인 것이다"

 라고 까지 세이카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세이카에겐 요도도노의 출현과 그녀가 낳은 적자의 출산에 따른 토요토미 가문의 변모야말로 이 정권과 천하의 재앙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히데요시 혼자만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였다.

 6월 16일은 한 여름의 축제라고 할 수 있는 카죠우(嘉祥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부터 시작된 명절. 전염병에 걸리지 않기를 바라며 음력 6월 16일에 16개의 떡이나 과자를 신에게 바친 다음에 먹었다. 무로마치 시대에 화폐로 통용되던 가정통보(嘉定通寶)의 약칭인 가통(嘉通)의 일본식 발음(かつう)이 '이긴다'는 뜻의 동사 'つ(かつ)'와 비슷했기에 무가에서는 특히 중히 여겼다. – 역자 주)의 날이었다. 이 1598년의 이날, 히데요시는 병상에 있었지만 등성(登城)한 다이묘우(大名)들을 인견()기 위해서 주치의의 도움을 받으며 일어나 인견의 자리에 나갔다. 일부러 쿄우()에서 불러들인 히데요리를 자신 옆에 앉혀두고 오늘은 좋은 날이라며 직접 과자가 담긴 그릇을 들고 다이묘우들에게 과자를 나누어주며,

 "아아~ 이렇게 슬플 수가…. 적어도 이 히데요리가 15살이 내가 살아 오늘처럼 여러 다이묘우들을 알현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싶었는데 내 생명은 꺼져가는구나. 그것을 어찌 할 수도 없어"

 하고 도중에 울먹였고 결국에는 남들이 보는 앞에서 소리 높여 울기 시작했다. 자리를 가득 메운 다이묘우들은 목을 숙이고 숨을 삼키며 고개를 쳐들 생각도 안 했다. 그들의 가슴 속은 제각기 복잡했을 것이다. 그들은 히데요시가 죽은 뒤의 토요토미 가문은 물론 그 사후에 일어날 것임에 틀림이 없는 정변 속에서 자기 가문을 어떻게 지켜가야 할 지가 훨씬 절실했다.

이 해의 8월 18일.
히데요시는 죽었다.

  1. 링크 된 구글맵을 보면 어째서 이런 어중간 한 곳을 거론하였는지 하고 이상히 여기겠지만, 7세기 일본 율령제가 실시된 당시 일본령 최북단인 오우슈우(후대의 오우슈우의 남반부만 있었고 작았다)의 세 관문(奥州三関) 중 하나이다. 그 의미가 이어져 그냥 일본 최북단을 표현하는 관용어가 되었다. [본문으로]
  2. 원문은 日本生民之憔悴. 未有甚於此時. 朝鮮若能共唐兵弔民伐罪. 先令降倭及舌人. 以倭諺揭榜知委. 以示救民水火之意. 師行所過.秋毫不犯. 則雖至白河關可也. - 강항의 간양록(看羊錄) 중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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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88. 미야[] 12살이 되었다.

 이 해의 봄, 히데요시[秀吉]는 이 나라의 궁정이 생긴 이래 가장 성대한 유흥을 기획하였다.

 흔히 말하는 쥬라쿠테이 행행[第 行幸]이다. 히데요시의 쿄우토[京都] 저택인 쥬라쿠테이에 텐노우[天皇] 이하 궁정사람들을 초대하여 무신(武臣)들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자는 것이었다.


 미야도 당연히 초대를 받았다. 미야는 히데요시의 쥬라쿠테이[第]를 예전부터 보고 싶어하였기 때문에, 이 기획을 들은 날부터 당일까지가 너무 길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이 쥬라쿠테이[第]라는 성곽과 저택을 겸한 장대하고 아름다운 건조물은 작년 가을에 쿄우[京]의 우치노[野]에 준공하여, 큐우슈우[九州] 정복을 끝낸 히데요시는 개선 후에 거기서 살며 새해를 맞이하였다. 그 장대하고 아름다움은 수도 안에 또 하나의 수도가 생긴 것과 같았으며, 어떤 화가(畵家)의 붓으로도 그것을 표현할 수 없었다고 한다.

 

 4 14일이 그 당일이었다.

 그날 아침. 히데요시는 직접 텐노우를 마중하러 나왔다. 텐노우[天皇]시신덴[紫宸殿]에서 출어(出御)하여 봉련(鳳輦)까지 걸어가는 동안 히데요시는 그 배후로 돌아가 텐노우의 옷 끝자락을 들고 모셨다.

 어소(御所)에서 쥬라쿠테이[第]까지 약 1636미터이다. 1636미터의 길을 경비하던 무사들의 수는 육 천명이었으며, 그 사이를 화려한 행렬이 지나갔다. 미야[]도 겉을 옻칠한 상자와 같은 가마(塗輿)에 타고 텐노우[天皇]의 뒤를 따랐다.

 

 건물 주위에 둘러친 해자(垓子)에 붉은색 다리가 세워져 있어 다리를 건너 쥬라쿠테이[第]의 성문 안으로 들어섰을 때, 미야는 별천지에 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이 웅대하고 화려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한단 말인가? 기품 속에 화려함이 있어, 지금까지 대건축물의 상징인 사원(寺院)들과 같은 축축함이 없었고, 어디까지나 현세(現世)를 한 없이 즐기고자 하는 히데요시의 마음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자칫하면 그것이 실속 없는 아름다움으로 격하될 지도 모르는 것을, 히데요시의 다도취향(茶道趣向)이 요소요소에 배치되어서는 실속 없는 아름다움을 억눌러 새어 나오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 호우칸파쿠[=히데요시]이니 할 수 있는.

 이라고 미야는 후년까지 이때의 감동을 잊지 못했다. 미야가 생각하기에 불도를 닦는 승이 그림으로 자신의 기개(氣槪)와 품격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과 같이 히데요시는 건축으로 그것을 하고자 하려는 것 같았다.

 

 텐노우[天皇]가 준비된 자리에 들어섰다. 히데요시가 나아가 착석의 의식을 치렀고 곧이어 주연(酒宴)이 시작되었다.

 연회가 행해지는 자리의 서쪽은 활짝 개방되어 있어 그 앞에는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정원은 온통 새싹들의 향연이었다. 거기에 철 늦은 벚꽃, 일찍 핀 진달래, 제철인 황매화, 제비붓꽃 등이 색을 더해, 그 근방에서 피어오르는 꽃내음 속에서 연회가 진행되었다. 연회 중간에 히데요시가 수많은 헌상품을 받쳤다. 밤의 연회는 음악이 중심이었다. 텐노우는 굉장히 기분이 좋았는지 직접 소우[]라는 악기를 옆에 누이고 멋지게 연주하였다.

 

 연회는 3일간 이어졌다. 3일로 끝날 예정이었지만 텐노우[天皇]는 더 즐기고 싶었는지이틀 더 있고 싶다고 말하였다. 유사이례 예가 없었던 일로 군신들은 놀랐다.

 미카도[帝]도 히데요시가 좋으신 것이다

 하고 미야는, 형인 텐노우와 좋아하는 점이 일치했다는 것에 날뛰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기뻤다. 미야는 이 텐노우[天皇]필시 역사상 어느 텐노우[天皇]보다도 교양이 높았을 이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를 평생 존경하였다. 텐노우는 미야의 스승이기도 하였다. 중국 시학(詩學)의 재미를 가르쳐 준 것도 이 텐노우였으며, 백씨문집[白氏文集]의 기초를 쌓아 준 것도 이 고요우제이[後陽成]였다.

 히데요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하고 미야는 신경이 쓰였지만, 신경을 쓸 필요도 없이 이 연기(延期)를 가장 기뻐한 이는 당연히 히데요시 자신이었다. 그는 너무 기쁜 나머지 자기 휘하의 다이묘우[大名]들을 텐노우[天皇] 앞에 모이게 하였다. 예정에 없었던 일이었다. 소집된 자는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서 삼위[三位][각주:1] 이상의 계급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였다. 이들보다 위계가 낮은 자들은 별실에 모여있었다.

 

 히데요시는 앞으로 나아가,

 - 성은이 하해와 같사옵니다.

 라는 말과 함께 다이묘우[大名]들에게 훈계를 하였다. 그 훈계의 주된 내용은,

 

 지금 이처럼 우리들 같이 무신(武臣)같은 것들에게 텐노우와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있게 허용해주신 이번 행행(行幸)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일생의 영광이다. 이 기쁨에 우리들은 몸 둘 바가 없도다. 그러나 우리들 자손은 어떨까? 성은을 잊거나 혹은 무()를 내세워 텐노우에 대해 무례를 꾀하는 자가 나타날지 두렵다. 그러니 서약서를 제출하여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텐노우에 대해 배신하는 일 없도록 맹세하도록

 

 라는 것이었다.

 모두 서약서를 제출하였다.

 미야는 그 자리의 처음과 끝을 그 눈으로 보았다. 보면서 위복(位服) 속에서 몸을 부들부들 떨며 히데요시의 행동에 감격하였다. 미야의 조부(祖父)에 해당하는 선대 오오기마치 텐노우[正親町天皇]가 나이 어렸을 시기, 무가(武家)는 황실 같은 것이 있는 줄도 몰랐으며, 어소는 평소 수라(水剌)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빈곤하였는데 그때와 비교해 보면 지금 히데요시와 같이 황실을 생각해 주는 인물이 나타난 것 자체가 기적이지 않은가?

 

 물론 히데요시는 히데요시대로의 꿍꿍이가 있었다. 히데요시 휘하의 다이묘우[大名]들은 예전 그 자신과 동격이거나 아니면 오다 노부카츠,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같이 그 자신보다도 상격(上格)에 있던 자들이 많았지만, 앞으로도 토요토미 가문이 그런 그들을 통제하는 한편 히데요시가 죽은 후에도 계속 이어지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텐노우[天皇]의 신성함을 빌려, 그 신성함을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에게 철저하게 주입시켜서는 그로 인해 신하 중 제일인 칸파쿠 가문이 얼마나 중한가를 교육하여, 텐노우[天皇]를 따르는 것과 같이 토요토미 칸파쿠 가문을 따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야는 그렇듯 심술궂게 이 현상을 관찰할 정도로 성숙해 있지 않았으며 거기에 무엇보다도 미야는 히데요시 빠돌이였기에 히데요시의 순수함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미야는 토쿠가와 다이나곤[大納言] 이에야스라는 인물을 보았다. 이에야스는 극히 최근까지 히데요시와 싸우고 있던 토우카이[東海]의 패자(覇者), 히데요시도 이 인물에게는 조심하여 휘하 다이묘우[大名]이면서도 빈객(賓客)을 대하는 것과 같이 응대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었다. 목이 두꺼운 인물이었다.

 구레나룻이 엷고 볼통통한 얼굴이었으며 동작에 지장을 줄 정도로 뚱뚱하였다. 하지만 어디에도 히데요시의 군사를 물리쳤다는 무인의 거만함 없이 공손하고 정중하여 그 행동거지나 풍모는 아무리 보아도 은거한 거상(巨商)과 같았다. 이에야스도 서약서를 써 제출하였다.

 

 시를 읊는 시회(詩會)의 행사도 행해졌다.

 참석자는 상급귀족(公卿) 측에서 24, 무가 측은 히데요시를 포함한 4명으로 합계 28명이었다. 자리순은 히데요시가 최상석으로 이어서 미야[], 말석에서 두 번째가 토쿠가와 이에야스였다. 각각의 무릎 앞에는 직접 지은 시를 필사하기 위한 벼루와 종이가 놓여졌다. 시회의 진행에 필요한 역할도 정해졌다. 시회 진행자[御歌奉行], 주제를 선정하는 사람[다이샤(題者)], 시가 쓰인 종이를 정리하여 낭독자[코우시(講師)]에게 전해주는 사람[도쿠시()], 낭독자 뒤에서 가락을 넣는 사람[핫세이(発声)] 등의 역할이다. 텐노우의 시가 적힌 종이를 옮기는 것[師]은 히데요시가 직접 하였다.

 텐노우[天皇]의 시는 정말 군자(君子)답다는 그의 인격에 어울리는 가락의 산뜻함이 갖추어진 것이었다.

그리도 오늘까지 기다린 보람이 있으니 소나무 가지에

온 세상의 언약을 매달아 보면서

わきて今日待つ甲斐あれや松が枝の

の契りをかけてみせつつ

 미야가 그것에 화답시를 만들었고, 거기에 히데요시도 그것의 화답시를 지었다. 히데요시의 그것은,

만대에 걸쳐 임금이 놀러 오시는 것을 익숙한 풍경으로 한다.

나무가 높은 건물에 쓰이는 것과 같이

よろづ代の君がみゆき(行幸)になれなれむ

みどり木高玉松 


 ‘이에야스는 어떨까?’

 하고 미야는 말석에 가까운 이에야스를 보았다. 미야는 이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영웅이라는 소문을 예전부터 듣고 있었기에 관심을 안 가질래야 안 가질 수 없었다. 메노토[傅人]인 카쥬우지 하루토요[修寺 晴豊]의 말에 의하면, 히데요시와 같은 예술적 취미를 일체 가지고 있지 않은 인물이라고 한다. 화려한 의상을 좋아하지 않고 화려한 건축을 좋아하지 않기에, 그 거성(居城)하마마츠 성[浜松城]도 극히 실용적이며 소박한 건조물에 지나지 않아, 성안에는 다실(茶室)도 없다고 한다. ()를 이에야스는 좋아하지 않는다는 소문도 있으며, 와카[和歌] 등도 일체 읊는 적이 없는 인물이라고 한다.

 그런 사나이가 시회에 섞여 있었다. 읊었을 턱이 없는 와카를 저 뚱뚱한 사나이는 어떻게 읊을 것일까?

 

 미야는 계속 관심을 가졌다. 곧이어 이에야스는 품 안에 손을 집어넣어 작은 종이쪽지를 꺼냈다. 그것을 한자한자 옮겨 적기 시작했다.

 옮겨 적다니!’

 하고 미야는 놀랐다. 필시 대작(代作)일 것이다.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斎]임에 틀림이 없다고 미야는 생각했다. 왜냐면 이 이에야스가 재작년 10, 히데요시와 강화를 맺어 그 휘하에 들어오기 위한 의식을 치르러 오오사카[大坂]에 왔을 때, 그 회견석의 접대역을 예식(禮式)에 밝은 유우사이가 맡았다. 그것을 미야는 유우사이에게 직접 들었었다. 그 이래 유우사이는 이에야스와 친교를 두터이 하고 있다고 한다. 대작을 했다고 하면 필시 유우사이일 것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조금 남의 눈을 피하면서 베껴 적으면 좋을 것을 이에야스는 당당히 종이쪽지를 펼쳐 거리낌없이 베껴 적고 있었다. 그 모습에 미야는 위화감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 취했던 공손한 태도와는 대략 다른 뻔뻔스러움이 있어, 과장되게 말하면 텐노우[天皇]의 앞에 있다는 경외감(敬畏感)같은 것을 조금도 가지지 않은 듯 했다. 곧이어 읽는이[講師]가 그 이에야스의 시를 읽었다.

녹색 창연한 소나무 잎마다 임금의

천 년을 언약으로 본다.

たつ松の葉ごとにこの君の

を契りてぞ見る 

 라는 것이었다. 소나무의 잎은 수없이 많다. 그 수많은 소나무 잎마다 텐노우[天皇] 천 년의 번영을 빌었다는 정도의 의미일 것이다. 시가 만약 지은이의 심정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에야스도 또한 이 시에 따라 궁정의 번영을 보증했다 - 는 것이 될 듯했다.

 

 1590년이 되었다.

 미야는 이제 성인식을 치러 '토모히토 친왕[智仁 親王][각주:2]'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이 14세였다.

 그 전해에 토요토미 가문에 친자식이 태어났다. 츠루마츠[鶴松]였다.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는 칙사를 오오사카[大坂]로 내려 보내어 축하선물로 큰 칼[太刀]을 하사하였다. 이후 화제는 자연스럽게 미야를 토요토미 가문 유자(猶子)라는 신분에서 풀어놓아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논으로 이어졌다. 히데요시에게 친자식이 생겼고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에게는 아직 자식이 없었다. 이 기회에 미야를 원래의 순수한 궁정인으로 되돌려놔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렇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한때 자신의 유자였던 이 미야를 위해서 어떤 보답이건 해 주고 싶었다. 생각 끝에 독립된 궁가(宮家)를 창설시키자는 것으로 생각이 미쳤다. 궁가를 창설하기 위해서는 영지(領地)와 저택이 필요했다. 우선 영지(領地) 3000석을 주었고, 이 새로운 가문의 명칭을 [하치죠우노미야 가문[]]으로 하였으며, 그 저택을 하치죠우[条] 강변[河原]에 마련해 주었다.

 

 이해의 정월.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3] 준비로 매우 바빴지만, 틈을 보아 입궐해서는 미야를 저택공사지로 데려갔다.

 

 미야의 저택 건물배치는 제가 해 드리겠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여전히 건축을 좋아했다. 히데요시는 미야를 저택의 예정지로 데리고 가서는 현장에 토목(普請), 건축(作事) 담당관리(奉行)와 장인(匠人)들을 불러 우선 기본방침을 세웠다.

 

 굉장히 어렵게들 생각하는군

 

 하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친왕의 주거지이기에 어소(御所) 풍의 - 즉 토노모 형식[主殿造り][각주:4]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경쾌함이 결여된다. 채광(採光)도 나빴고 무엇보다 너무 고풍스러웠다. 거기에 신흥(新興)의 스키야 형식[奇屋造 다실(茶室) 풍의 건축]도 가미하라 - 는 것이 히데요시의 주문이었다.

 

 미야도 무언가 말씀하시길

 

 하고 히데요시는 말했지만, 미야는 아직 건축에 대해 잘 몰라,

 

 모두 공(公)에게 맡기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히데요시는 장인에게 도면을 그리게 하여 오오사카[大坂]에 돌아가서 그것을 받아보고서는 직접 붉은 먹을 먹인 붓으로 수정을 한 뒤,

 - 미야께도 보여드려라

 고 명했다. 미야는 그 도면을 보았다. 히데요시의 것은 너무 다도(茶道)의 취향이 드러나 있는 듯 했다. 미야는 그 점에 대해 그다지 불만이 있지는 않았지만, 희망을 말하자면 위로 매달아 열어 햇빛이나 비를 막는 시토미[蔀] 등을 사용한 왕조(王朝) 풍의 요소도 다소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말했다. 이 즈음 형인 텐노우[天皇]와 함께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의 고찰에 몰두하고 있던 미야로서는 그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공간이 하나 있었으면 했을 것이다. 그 의견이 히데요시에게 전해졌다. 히데요시는,

 

 지당하신 말씀이다

 

 라며 마지막 붉은 선을 그려 넣고서는 오다와라 정벌을 향해 출발하였다. 하지만 오다와라의 진영에서도 건축 진행 상태를 신경 써 하나하나 보고시켰다.

 미야도 자주 건축현장에 가서는 장인들 틈에 섞여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 미야가 차츰 건물과 건축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은 이 하치죠우[条] 저택의 건축부터일 것이다.

 

 연말에 건물이 거의 완성되었다. 히데요시는 오다와라에서 그것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맹장지에 그려지는 그림()만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그것을 후원하던 화가 카노우 에이토쿠[狩野 永徳]에게 재촉했다. 그 해의 마지막 날 전에 그것이 완성되어 저택에 설치되었다.

 그림의 주제는 노송나무였다.

 큰 화면 가득 짙은 묵의 선을 달리게 하여 노송나무를 그렸고 거기에 농후한 색채의 물, 하늘, 바위를 곁들인 그야말로 히데요시가 좋아하는 - 말하자면 쥬라쿠테이[第] 풍의 호화장려(豪華壯麗)한 구도로 히데요시가 만들어 낸 이 시대의 정신을 상징하고 있는 듯 했다.

카노우 에이토쿠[狩野 永徳]의 그림. 현재는 병풍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참고로 화가인 카노우 에이토쿠는 그 해의 10월(1590년 10월)에 사망하였기에, 완성을 한 것은 아마 제자일 것이라고 한다.

  새해가 되자, 미야는 이 새로운 저택으로 옮겼다. 이어 9월에 히데요시는 동방에서 개선한 뒤에 이 저택에 들렸다.

 

 잘 만들어진 것 같군요

 

 히데요시는 저택 안을 확인해 보면서 몇 번이나 말하였는데, 단지 정원만이 맘에 들지 않은 듯 직접 지휘를 해서는 바위를 이곳 저곳으로 옮겼다.

 

  1591년은 토요토미 가문에 불행이 이어졌다. 정월에 히데요시의 동생인 야마토다이나곤[大和大納言] 히데나가[秀長] 죽었으며, 8월에는 츠루마츠가 죽었다.

 토요토미 가문은 다시 후계자를 잃었다. 히데요시는 결국 결심을 하여, 이 해의 11월 조카인 히데츠구[秀次] 받아들여 자로 삼고, 그 다음 달에 칸파쿠 직책을 이 양자에게 물려주었다. 그 후 조선 침략이 시작되었지만 히데요시는 이 즈음부터 몸의 심이 부러졌는지 갑자기 노쇠하기 시작했다.

  1. 이 삼위(三位)가 되면 당상가라 하여 궁궐에 입궐할 수 있었고 이때부터 공경(公卿)라 하여 상급귀족이 되었다. - 사족으로 정사위(正四位) 산기[参議]에 임명된 자는 사위(四位)임에도 특별히 공경이 되었다. [본문으로]
  2. 위키에는 ‘토시히토’라고 한다. [본문으로]
  3. 칸토우[関東] 호우죠우 씨[北条氏]와의 전쟁. [본문으로]
  4. 그 건물 안에 여러 행사나 침식 등을 모두 행할 수 있는 다목적 슈덴(主殿)이라는 건축물이 저택의 중심에 있는 저택형식.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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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

 이 오기마루[於義丸]라는 인질은 히데요시[秀吉]를 크게 기쁘게 하였다. 무엇보다 토쿠가와 가문[徳川家] 있어서 가장 연장자인 남자 아이이며, 이에야스에게 있어서도 소중한 자식임에 틀림이 없었던 만큼 인질로서의 가치는 컸다.

 “그런가~ 이에야스 님은 오기마루를 주시는 건가? 그렇다면 내 자식으로 귀여워하겠으며, 좋은 대장(大將)으로 키우마. 기량에 따라서는 나중에 이 하시바 가문[羽柴家]을 이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고 히데요시는 중개자에게 말했다. 곧이어 그 오기마루가 토쿠가와 가문의 가로(家老) 이시카와 카즈마사[石川 数正]의 아들 카츠치요[勝千代[각주:1]], 지금까지 오기마루를 키워왔던 혼다 사쿠자[本多 作左]의 아들 센치요[仙千代]와 함께 이 해의 12월 12일 하마마츠[浜松]를 출발하여 오오사카[大坂]로 올라왔다. – 라기보다는 그 기구한 운명으로 출발을 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오오사카 성(城)에서 양부(養父)-양자(養子)의 대면이 행해졌다. 상단에 앉아있는 히데요시라는 양부는 오기마루가 여태까지 본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여어~ 내가 너의 아비란다. 이쪽으로 오렴”

 하고 큰 목소리로 손짓 하였지만 오기마루가 삼가며 가만히 있자, 히데요시는 직접 내려와 오기마루의 어깨를 손을 얹었다. 히데요시는 다른 사람의 어깨나 머리에 손을 올리는 것을 좋아했으며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자신에게 넘어오게 만들곤 했다. 이 경우도 그러했다.

 “오늘부터 너는 이 집의 아이다. 여러 가지를 많이 배워두도록”

 하고 말했다. 오기마루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소년의 직감으로 말하자면 실재 아비인 이에야스보다 이 양아비 쪽이 훨씬 부친다운 내음을 가지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시간을 들이는 일 없이 그날 안으로 별실을 마련하여 오기마루를 하시바 가문의 자식으로서 성인식(元服)을 치르게 하였다.

 이름은 히데요시가 '히데야스[秀康]'라고 지었다. 하시바 히데야스[羽柴 秀康]라고 했다. 양아비의 ‘히데[秀]’, 친아비의 ‘야스[康]’가 취해졌다. 천하에 이보다 사치스러운 이름은 없을 것이다.

 “이름의 영향을 받는다면 일본 제일의 무사가 될 수 있단다”

 하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히데요시는 조정에 주청(奏請)하여 히데야스를 위해서 관위(官位)를 받아다 주었다. 히데야스는 종오위하(從五位下) 지쥬우[侍従] 겸 미카와노카미[三河守]에 임명 받았다. 영지(領地)도 하사 받았다.
카와치[河内]에 1만석으로 아직 더부살이를 하는 소년으로서는 적지 않았다. 히데야스는 토쿠가와 가문에 있을 때보다도 모든 것이 좋아졌다.

 1587년의 히데요시의 큐우슈우[九州] 정벌에 히데야스는 14살로 종군하였다.
 다음 해인 1588년 4월, 양아비 히데요시가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를 자택으로 초대한 [쥬라쿠테이
행행(聚楽第 行幸)]의 성대한 의식이 치러질 때는, 불과 15살의 나이로 코노에쇼우쇼우[近衛少将]가 되어 다른 고관들과 함께 봉련(鳳輦)의 바로 뒤를 따르는 역할을 맡았다. 그때 그와 함께한 면면들은 카가 쇼우쇼우[加賀 少将]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고(故) 노부나가의 적손인 지쥬우[侍従] 오다 히데노부[織田 秀信], 거기에 그와 같은 히데요시의 양자인 쇼우쇼우[少将] 하시바 히데카츠[羽柴 秀勝[각주:2]], 역시 쇼우쇼우[少将]인 히데아키[秀秋]라는 토요토미 가문의 귀공자들이기에 히데야스에게 있어서 이 날 자신의 화려함은 온 생애에 있어서도 잊기 힘든 것이었다.

 이 시기, 작은 사건이 있었다.
 히데야스는 토요토미 가문의 직속 신하[旗本]들에게 반드시 존숭(尊崇) 받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랬다. 형식상으로는 히데요시의 양자이며 관위도 보통의 다이묘우[大名]보다 위였다. 그러나,
 - 저 분은 인질이다.
 라는 관념이 사람들 태도의 밑바탕에 깔려 있어 성안의 말단 관리들의 응대에도 어딘가 무례함이 있었다.
 히데야스는 그것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15~6살이 되면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주변과는 어떤 관계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남보다 배는 더 자존심이 센 성격이었다.

 어느 날.
 성안에서 말단 관리가 히데야스에게 소홀함이 있었다. 라기 보다는 싸가지 없는 얼굴을 했다.

 “게 섰거라! 다시 한번 그 표정을 지어 보거라”

 하고 히데야스는 복도에서 뒤돌아 서자마자 날카롭게 외쳤다. 말단 관리는 여전히 뻔뻔히 서있었다. 히데요시는 일갈하며 팔을 들어 뒷덜미를 잡아 마루에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말해 두마. 나는 불초(不肖)하지만 이에야스의 아들이며 이 가문의 양자이다. 그러니 다른 자들에게도 알려라. 앞으로 무례한 자는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겠다는 것을!”

 그 관리는 공포로 부들부들 떨었다. 곧이어 이 말이 히데요시의 귀에도 들어갔다. 히데요시는 이 소년이 이외로 호탕한 기질을 숨기고 있었음에 놀랐다.

 “그런가~ 히데야스가 그렇게 말했는가? 미카와노카미(=히데야스)가 하는 말은 지당한 것이다”

 하고 성안 부하들에게 훈계하는 한편 그때까지 허용하고 있지 않던 토요토미 가문의 문장(紋章)도 허용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히데요시는 은근히 히데야스에게 경계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다른 가문의 자식은 될 수 있는 한 우둔한 편이 히데요시에게는 바람직했다.

 그 후 히데요시가 주의해서 관찰해보니, 역시 소년기를 탈피하기 시작한 히데야스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여 얼굴 생김새마저 위풍당당해졌다. 행동거지에 위엄이 있어, 토요토미 가문의 다른 양자인 예를 들면 히데츠구[秀次], 히데아키[秀秋],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와는 확실히 차원이 다른 사나이가 되려 하고 있었다. 혈연인 히데츠구는 너무 경박(明博)했으며, 마누라의 친척 히데아키는 우매하였고, 우키타 가문[宇喜多家]의 히데이에만은 다소 화려했지만 실속이 없는 편으로 어찌 보면 평범했다.

 이 중 단 하나 이에야스의 씨인 히데야스만은 전쟁터에서 삼군(三軍)을 지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쟁터에 있어 일개 병졸 하나하나까지 그 위령(威令)에 따르게 하기 위해서 장수인 자는 높은 위덕(威德)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데, 히데야스에게는 그 위덕인(威德人)으로써 소질이 있는 듯 했다.
 어쩌면 히데야스는 스스로 신경 써서 그러한 기량을 자신의 안에서 기르고 있는지도 몰랐으며, 의식해서 한 것이라면 더더욱 예사로운 기량이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았을 즈음, 히데야스는 후시미 성[伏見城] 내의 마장(馬場)에서 말을 길들이고 있는 중이었다. 이 마장은 토요토미 가문의 전용 마장이기에 히데요시나 토요토미 가문의 귀공자들밖에 사용하지 않았으며 당연히 히데야스에게는 그 사용할 권리가 있었다.

그러던 중 히데요시의 전용 말을 담당하는 마장 관리인이 말을 운동시키기 위해 마구간에서 끌고 나와 그 근처에서 달리게 하였고, 곧이어 말을 달리고 있던 히데야스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달렸다. 토요토미 가문의 귀공자에 대해서 이렇게 무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장 관리인조차 히데야스를 그 정도밖에 보지 않았다. 히데야스는 얼굴을 그 남자에게 향했다. 말을 달리면서 칼을 뽑자마자,

 “무례한 놈!!”

 하고 외치며 칼에 피 뭍을 새도 없이 안장에서 베어 죽여 버렸다. 그 재빠른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더구나 이 어마어마한 기개(氣槪)는 또 뭐란 말인가? 마장은 대소동이 일어났다. 어쨌든 피해자가 타고 있던 것은 히데요시의 전용 말이었다. 전용 말이라는 것만으로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히데야스는 거리낌없이 그 말을 피로 더럽혔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히데요시의 거소(居所)를 더럽혔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경우도 히데요시는 화를 내지 않고 반대로 이 양자의 강기(剛氣)를 칭찬하였다. 거기에 기술도 칭찬했다. 말을 달리며 상대를 베어 죽이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을 듯하면서, 그러나 이외로 쉽지 않다. 그것을 히데야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냈다.

 이 즈음 이미 토요토미 가문의 막하 다이묘우가 되어 있던 이에야스는, 이 소문을 듣고,
 - 역시 내 피군.
 하고 목소리 낮추어 근신들에게 살짝 말했다. 이에야스는 이 시기부터 확실히 히데야스를 달리 보기 시작하여 세자(世子)인 히데타다[秀忠]보다 뛰어난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이제 와서 히데야스를 돌려달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아깝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이에야스에게 있어서 히데야스라는 아들은 가끔 머릿 속에서만 활동하는 존재였다.

 어쨌든 히데야스라는 젊은이가 시간이 흘러 만인을 뛰어넘는 기량을 갖춘다고 하여도 그 기량은 사용할 곳이 없었다. 토요토미 가문에 어떤 일이 일어나건 이에야스의 자식에게 천하를 물려줄 턱이 없을 것이며, 태어난 곳인 토쿠가와 가문에도 이미 히데타다라는 후계자가 있는 이상 히데야스는 쓸모가 없었다. 히데야스라는 인물은 기량이 있으면 있을수록 공중에 붕 뜬 기묘한 존재가 되어 갈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1. 카즈마사의 차남. 후에 야스카츠(康勝) [본문으로]
  2. 히데요시의 조카로 나중에 토요토미노 히데카츠[豊臣 秀勝]. 참고로 그의 친형은 살생관백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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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


 얼마 안가 츠루마츠[鶴松]가 죽었기에, 히데요시는 그 비탄(悲歎) 속에서 외정(外征)의 지령을 내렸다.

 - 원숭이 녀석 죽을 장소를 잃어서 미쳤나!?

 토자마[様][각주:1]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등은 어떠한 필연성도 생각할 수 없는 이 대규모 외정에 대해 뒤에서 그렇게 욕을 퍼부었다.

 대다수 다이묘우[大名]의 마음 속도 비슷했음에 틀림이 없다. 우지사토뿐만 아닌 거의 대부분의 다이묘우는 봉토(封土)를 얻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영민(領民)과는 아직 친숙하지 않았고, 또한 전란(戰亂)이나 검지(地)[각주:2]로 인해 받은 상처에서 백성들은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에 막대한 외정의 전쟁 비용을 어떻게 조달하라는 것인가?

 '봉행(奉行) 녀석들이 부추기고 있다.'

 라는 소문이 네네의 귀에도 들어왔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봉행들이 히데요시라는 노망난 독재자에게 슬픔을 외정으로 달래라고 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설마……’

 하고 네네는 생각했지만, 진실을 판단하기 위한 자료를 가지지 못할 정도로 그녀는 이미 토요토미 가문의 정치라는 곳에서 멀어져 버린 것이다. 지금은 미츠나리, 나가모리[長盛], 마사이에[正家]라는 오우미[近江] 사투리를 사용하는 재간꾼들이 히데요시를 자신들의 것으로 삼아, 그 무리가 토요토미 가문 내의 대소사, 인사, 천하의 형법(刑法)과 같은 것들을 집행하고 있었다. 이 현상을 네네 주위에 있는 여관(女官)들의 여자의 눈으로 보면,

 - 요도도노[淀殿]는 요즘 권세(權勢)가 있으시다.

 는 것이 될 것이다. 사실 그러했다. 근래 토요토미 가문은 오우미[近江] 사람들에게 독차지 당해 있었다. 네네가 돌봐주고 있는 오와리[尾張] 계열의 다이묘우들은 중앙에 대해서 아무런 발언권도 가지질 못하고 있었다. 토요토미 가문의 중심은 이미 키타노만도코로[政所]가 아닌 요도도노에게 옮겨가고 있었다.

 

 이것이 가문 내에서 자주 화제(話題)가 되었다. 매일 네네가 듣는 화제는 모두 이것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오우미 파벌에게 따돌림 당하고 있는 여러 다이묘우, 토요토미 가문의 직속 신하, 거기에 측실이나 여관들까지도 네네에게 와서는 울분이나 불만을 표하였다. 그들은 네네에게 매달리는 것 이외에 기댈 만한 곳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요도도노가 나쁜 것은 아니다

 히데요시에게 사랑 받고 있는 이 측실의 험담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네네는 이 점에 관해서만은 냉철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요도도노는 그 특출한 미모를 제외하면 어디를 보아도 평범한 자질을 가진 여성이며, 단지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 다소 권세욕이 있을지도 모르나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나서서 정치 세력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은 없었다.

 만약 나쁘다고 한다면 그녀의 주위에 있는 옛 아자이 가문[浅井家]에서 온 늙은 시녀들이었다. 이 무리들이 요도도노가 츠루마츠의 [생모]가 된 것을 기회로 정실인 키타노만도코로에게 대항하고자 하여, 이시다 미츠나리를 시작으로 하는 토요토미 가문의 봉행들과 적극적으로 결합하는 한편, 미츠나리 등도 요도도노를 추대함으로써 히데요시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토요토미 가문의 중추에 계속 자리잡고자 하고 있었다. 그런 소위 주변 인물들이 요도도노를 정치적 존재로 만들어 가고자 함에 틀림이 없었다. 네네는 그렇게 보고 있었다. 네네가 보기에 나쁜 것은 그들이었다.

 

 네네는 마음속 깊이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저 무리들은 히데요시님이 돌아가신 다음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 상상도 하고 싶지 않지만 히데요시가 죽은 뒤 츠루마츠와 요도도노가 이 토요토미 가문의 제일 윗자리에 앉아 미츠나리 이하 오우미 파벌의 다이묘우를 측근으로 거느린다. 자연히 키타노만도코로는 후퇴하고 그녀를 의지하고 있던 창업(創業)의 공신들은 힘을 잃어 갈 수밖에 없다. 네네는 그래도 상관 없지만 오와리 출신자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꿈에서도 신음 소리를 낼만한 미래상일 것이다. 물론 일이 일인만큼 모두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을 뿐, 누구도 이 두려운 미래에 대해서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1592 4.

 외정군은 조선에 상륙하였다.

 제1군은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2군은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를 선봉으로 하여 각지의 성을 함락, 앞을 다투며 북상하였다.

 당초는 파죽지세라 할만 했지만, ()나라의 대군이 정면의 적이 됨에 따라 진공(進攻)은 정체되고 각지에서 부대가 고립되어 때로는 고전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또한 유키나가와 키요마사는 사이가 나빠 서로 돕기는커녕 무엇이건 서로 으르렁거렸기에, 상대방도 그것을 알고 거기에 파고들어서는 반격하였고, 이 때문에 아군의 작전에도 자주 차질을 빚었다.

 

 이런 종류의 사태를 조절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기관으로 히데요시는 군감(軍監)이라는 자신의 대리인을 파견하였다.

 후쿠하라 나오타카[福原 直高], 오오타 카즈요시[大田 一吉] 등 작은 영지(領地)의 다이묘우들이었다. 이들은 전부 오우미 파벌이었으며, 그런 군감의 총책이라고 할 만한 존재가 이시다 미츠나리였다. 미츠나리는 조선에 상주(常駐)하지는 않고 전선을 시찰하고서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에서는 히데요시의 곁에서 현지의 군감들이 보내오는 보고서를 정리하여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이런 군감단(軍監)의 면면들은 이시다 당()이었기 때문에 유키나가에게는 좋고 키요마사에게는 냉엄했다. 때로는 키요마사의 언동을 무뇌아처럼 보고하였다.

 예를 들면 평화 교섭 단계에 들어갔을 때, 키요마사는 토요토미의 성()을 하사 받지 않았음에도 명나라 사자에게 보낸 공문서에 '토요토미노 키요마사[豊臣 ]'라고 서명하였다고 보고되었다. 또한 명나라 사자에게

 

 "당신들 대명인(大明人)은 코니시 유키나가라는 자를 일본국의 무사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저것은 무사의 무자도 모르는 사카이[堺]의 상인(商人)이다. 겁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키요마사의 언동이 조선에 있는 군사들을 혼란 시키며, 적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보고를 히데요시는 준공 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받았다. 히데요시는 분노하여 키요마사라면 그럴 것이다, 곧바로 불러들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곧바로 급사(急使)가 조선으로 건너가 키요마사에게 그 뜻을 전하였다.

 키요마사는 자신의 군단을 전선에 남겨두고 장교 50, 일반 병사 300명이라는 적은 수의 병사를 데리고서는 부산에서 배를 타고 세토 내해[瀬戸海]를 거쳐 오오사카[大坂]에 직행한 후 후시미에 도착했다.

 

 히데요시는 알현을 허락하지 않았다. 키타노만도코로에게라도 내알(內謁)할까 생각하였지만 히데요시의 노여움을 사고 있는 몸이기에 그것도 불가능하였다. 키요마사는 여장(旅裝)도 풀지 않고, 오봉행(五奉行)의 한 사람인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의 저택을 방문하여 성안의 사정을 듣고자 하였다.

 

 지부쇼우[冶部少=미츠나리]놈이 꾸민 참언(讒言), 덫일 것이다. 필시 그럼에 틀림이 없다

 

 고 키요마사는 굉장히 화가 났는지, 나가모리가 한마디의 설명을 하기도 전부터 고개를 흔들어대며 소리를 질렀다.

 군감(軍監)의 면면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후쿠하라 나오타카는 미츠나리의 친척[각주:3]이며, 오오타 카즈요시, 쿠마가이 나오모리[能谷 直盛], 카키미 카즈나오[垣見 一直] 등은 모두 미츠나리에게 알랑거린 덕분에 출세해 온 오우미[近江] 파벌 사람들로 당연 자신들의 파벌인 유키나가를 옹호하고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려 하고 있다. 이렇게 된 바에야 지부쇼우놈의 목을 뽑고 자신도 죽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나가모리는 서둘러 진정시킨 후,

 

 지금에 와서는 지부쇼우의 권세에 견줄 만한 자가 없네. 그러한데 무슨 말을 하시는 겐가? 그와 화해를 하시게. 하지 않으시면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일세. 우선 그 화를 가라앉히게. 졸자가 자리를 주선할 테니 내일이라도 지부쇼우와 만나시게

 

 라고 말하자, 키요마사는 무가의 신이시여!! 라고 갑자기 방바닥을 치며 노성(怒聲)을 터뜨리고는,

 

 신불(神佛)도 굽어살피소서.

 그자와는 평생 화해 따위 하지 않겠소. 졸자는 조선팔도에 쳐들어가 수십 번 싸워 대명(大明)도 물리치고 추위와 더위를 참았으며, 때로는 굶주림도 겪었소이다. 그에 비해 지부쇼우놈은 편안하게 성안에 있으면서 더구나 히데요시 전하의 총애를 내세워 우리처럼 전쟁터에서 일하는 자들을 멸하려 한다. 그렇게 좆 같은 녀석들하고 우리들이 화해를 할 수 있을까? 할 수 없소이다!”

 

 라고 말하였다. 이 때문에 모처럼 둘의 사이를 좋게 하고자 했던 나가모리도 발을 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때가 1596 1월이었다. 그대로 아무런 추가조사도 없이 키요마사는 근신을 명령 받아 후시미[伏見]의 자택에 유폐 당했다. 이후 아무런 기별도 없었다.

 

 이보다 1년 반 전에 요도도노의 배에서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나, 때문에 이때까지 토요토미 가문 후계자였던 히데츠구[秀次]의 영향력은 저하되었다. 히데츠구는 앞날에 불안을 느끼고 난행(亂行)을 계속 저질렀기에 토요토미 가문은 그 정권이 성립된 이래 가장 어두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이미 왕년의 똑똑한 인물이 아니어서 사람이 변한 듯 노망이 나, 생각하는 모든 것이 히데요리의 앞날에 대한 것뿐이었고, 그 설계를 미츠나리 등에게 연구시켰으며, 미츠나리 등도 이 토요토미의 천하가 무사히 히데요리에게 상속되는 것만을 연구하여 히데요시에게 헌책하였다. 곧이어 히데츠구는 죽음에 이르지만, 이 키요마사가 귀국했을 때까지만 해도 아직 히데츠구는 살아 있었다.

 

 사실 미츠나리는 키요마사에 관한 놀랄만한 풍문이 조선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군감(軍監)의 보고로 알고 있었다. 명나라 쪽에서 키요마사의 무용을 두려워하여 그를 자기네 편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1593 5.

 키요마사가 울산 서생포에 주둔하고 있을 때, 명나라는 장군 유정(劉綎)을 통하여 키요마사와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때 유정이 보낸 사자(使者)의 입으로,

 

 "히데요시가 지금 일본 60여주를 다스리고는 있지만, 영걸(英傑)이라고 하여도 수명의 길고 짧음은 예측할 수가 없다. 그가 죽은 후 일본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또한 아무리 히데요시가 장수를 한다고 하여도 그는 당신을 미워하여 당신이 공적을 세우는 것을 싫어한다."

 

 고 말하게 한 후, 유정의 자필 편지를 키요마사에게 전하였다. 그에 따르면,

당신은 굉장히 뛰어난 인물이지만 일개 지방관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때가 되어 우리에게 온다면, 나는 맹세코 대명 황제 폐하에게 말씀을 올려 당신이 대관(大官)에 봉해지도록 보증을 서겠다. 어째서 이 좋은 일을 하지 않으려는 건가?
 라고 되어 있었으며, 또다시 사자의 입으로 넌지시 명나라와 힘을 합쳐 히데요시에게 반격을 하자고 암시하였다. 단 키요마사는 종군승에게 글을 쓰게 하여 이것을 거부하였다. 그 편지 속에서,

물론 당신이 말하고 있는 대로 나는 한가한 무리들에게 무고를 받고 있다[각주:4]. 그러나 나는 태합(太閤=히데요시)의 충신이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다.

라는 말을 덧붙여 보냈다.

 

 어쨌든 이렇게 명나라와 키요마사가 주고받은 편지의 대략적인 내용은 미츠나리의 손에 들어와 있어, 이 건에 대해서는 아무리 미츠나리라도 히데요시에게 보고하는 것을 주저케 하여 자신의 선에서 뭉갰다.

 하지만 미츠나리는 다른 측면에서 이것을 처리하였다. 키요마사가 이 이상 조선에서 큰 공을 세우는 것은 다음 세대인 히데요리에게 있어서는 좋지 않을 것이다. 외정(外征)을 하러 나간 장군이 무훈(武勳)을 세워 거기서 강대한 세력을 얻을 경우, 반대로 그 무력이 중앙 정권을 위험하게 하는 것은 멀리 당()나라의 현종(玄宗) 황제를 배신한 안록산(安祿山)의 예까지 갈 것도 없이 바로 가까이에 히데요시라는 예가 있었다.

 

 오다 가문[織田家]츄우고쿠[国] 방면 사령관이었던 히데요시가 거기서 노부나가[信長]의 급사를 듣고 병사를 되돌려 미츠히데[光秀]를 물리치고는, 그 무력으로 오다 가문의 남겨진 자식들을 압도하여 토요토미 정권을 세웠다. 키요마사에게 그 정도의 야심이나 정치력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그 무훈을 더욱 키워줄 필요가 없었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죄를 만들어 전쟁터에서 물러나게 한 것이다.

 

 하지만 네네는 거기까지 이 사태의 진상에 대해서 알지 못하였으며 알 필요도 없었다. 네네는 단순하면서도 직선적으로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었다.

 네네가 보기에 미츠나리는 네네를 보호자로 하는 오와리[尾張] 파벌의 무장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움으로써 네네의 날개를 꺾어 요도도노 모자(母子)의 권세를 강화해 가려고 하고 있을 것이다.

 필시 그럴 것이다

 네네는 그렇게 생각하였지만 키요마사를 구할 방도가 없어 시간만 보내었다. 키요마사는 반년간 유폐 생활을 하였다.
  1. 여기서는 직속 부하가 아니라 나중에 히데요시에게 항복하거나 군문에 들어온 다이묘우[大名]를 지칭. [본문으로]
  2. 정확한 수확량을 측정하여 세금을 낼 양을 정함. 그 전보다 더욱 많은 양을 내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불만이 많았다. [본문으로]
  3. 미츠나리 여동생의 남편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4. 예기(禮記)의 태학(大學)에 이르길 ‘소인은 한가하면(할 일이 없으면) 좋지 않은 짓을 하려고 한다(小人間居爲不善)’는 부문에서 따 온 것 같다…. 아마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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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해인 1598 4.

 히데아키[秀秋]는 귀환 명령을 받아 어쩔 수 없이 키요마[清正] 이하 수비군을 전장(戰場)에 남겨둔 채 후시미[伏見]개선(凱旋)하였다. 히데아키는 전쟁터에서 얻은 햇볕에 멋지게 그을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시기가 그의 생애에서 가장 멋진 때였을 것이다. 출발할 때는 아직 공사 중이었던 후시미 성[伏見城]은 완성되어 있었다. 히데아키는 가슴을 펴고 입성하여 히데요시를 배알(拜謁)하였다.

 

 그러나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히데요시[秀吉]의 노성(怒聲)이 머리 위로 쏟아진 것이다.

 히데요시는 울산성 구원 때 히데아키가 졸병들과 함께 창질이나 한 것에 땅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로 호통을 치며,


  나는 너 같은 놈을 상장(上將)으로 삼을 것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까지 말하여 히데아키의 공적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 뭔 일이래

 처음엔 멍했다. 이어서 이거야 말로 조선에 있는 여러 장수들 모두가 원망하고 있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참언(讒言)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히데아키는 천성이 소심한 탓인지 격앙()하여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말을 더듬었다. 더듬은 탓인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그것이 양아버지였으면서 이모부를 공갈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렇지 않아…아니…않사옵니다. 전하는 트린 틀린 보고를 받으신 거다 아니 겁니다.”

 

 라고 외치곤,

 

 그렇다면 여기에 감찰관들을 불러 주십시오. 그 지부노쇼우[冶部少=미츠나리] 놈도 불러주세요. 전하의 앞에서 흑배 아니 흑백을 가릴 테니

 

 니 뭔 말을 한다냐?”

 

 히데요시도 오와리[尾張]의 사투리로 히데아키보다 더 큰소리를 질렀다. 큰 소리에 비해 히데요시는 이미 (老衰)해 있어 그 쇠약함에는 죽음의 그림자 조차 드리워져 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한때 역사를 창조했던 그의 이성(理性)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고, 단지 감정(感情)만이 그의 몸을 가늘게 흔들고 있었다.

 히데요시에게 있어선 이 괴이한 소년을(이라고는 해도 21살이었지만) 귀족으로 만들어 주며, 거대 다이묘우도 만들어 준 것도 모두 자기 자신이었다. 그런 은혜를 망각하고 이 늙어 살 날 얼마 남지 않은 노인에게 큰소리 치며 공갈을 하다니 이 무슨 배은망덕이란 말인가.

 

 히데요시는 혓바닥을 잃어버린 듯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슬픔과 분노가 그를 지배하여 호우(설명, 그림) 속에서 떨었다. 히데요시가 이런 적은 지금까지 없었다. 원래 말이 많았으며 재치가 뛰어났고, 너무나도 풍부한 표현력을 가지고 있던 히데요시는 - 그런 점에서도 지금까지의 히데요시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무 말 않은 채로 자리를 차고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잠자리에 들겠다

 

 히데요시는 시중드는 신하에게 그리 말했다. 먼젓번에는 몸이 쇠약한 나머지 잠자리에서 오줌을 지려 몸이 오줌으로 적셔진 적도 있었다. 오늘의 히데요시는 잠자리에서 눈물을 흘렸다. 분했고 불안했다. 저 배은망덕한 놈이 히데요리를 보호하기 위한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니, 이 상태로는 죽어도 눈을 감을 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히데요시는 히데아키의 처분을 새삼 결심하였다.

 

 한편 히데아키는 아직도 성안에서 큰소리를 질러대며 히데요시의 측근들에게 욕설을 퍼부는 식으로 지랄하고 있었다. 미츠나리를 이리 내오라~ 고 하였다.
 그
미츠나리가 나왔다.

 

 킨고님 부르셨습니까?”

 

 미츠나리는 양 눈을 똑바로 쳐들고, 히데아키의 시선을 받아들이며,

 

 히데아키님의 지금 상태로는 히데요시님의 분노가 당장 풀릴 것 같지가 않사옵니다. 나중에 히데요시님의 기분이 풀리시면 다시 한번 자리를 만들겠사오니 오늘은 일찍 자택으로 돌아가시옵소서

 

 라고 조금도 떨림 없이 말했다.

 

 ……지부쇼우!!”

 

 히데아키는 작은 [脇差]의 칼자루를 쥐고 달려 들었다. 진짜로 벨 생각이었다. 하지만 스승이며 가로(家老)인 야마구치 겐바노카미 마사히로[山口 玄蕃頭 正弘]가 제지했다. 그 손을 히데아키는 떨쳐버리고서는,

 

 네 놈도 저 지부쇼우와 한 편이냐?”

 

 라고 소리질렀다. 이 폭언에는 아무리 마사히로라도 참을 수 없어, 이 일이 있은 뒤 히데요시에게 청하여 스승 겸 가로의 자리에서 물러나, 그의 영지(領地)카가[加賀] 다이쇼우지 성[大聖寺城](6만석)으로 돌아갔다.

 어쨌든 이때 부속 가로인 스기하라 시게마사[杉原 重政]가 지랄하는 히데아키의 등 뒤에 매달리며 말렸다. 그러는 사이 이러한 소동을 알현(謁見)에 동석하고 있던 토요토미 가의 대로(大老)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있었다. 곧이어 일어서서는,

 

 킨고님, 졸자는 성을 나서려 합니다. 함께 나가시지요

 

 라고 조용히 말하자, 히데아키는 일종의 위압감에 굴복했는지 분노에 부들부들 떨던 몸이 일순간에 멈추어지며 얌전해졌다. 이 광경은 익살스러울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야스는 이 즈음 무게감있고 의지할만한 장로의 풍모로 토요토미 가문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자신의 뱃속은 히데요시가 죽은 뒤 반드시 올 것인 정변(政變) 만을 고려하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예전부터 키타노만도코로[政所]에게 신뢰를 받고 있었던 운도 있기에, 키타노만도코로를 통해 그녀를 따르는 다이묘우[大名]들의 신뢰를 얻고자 틈만 나면 은혜를 팔려고 하였다. 히데아키는 어리석다고 하여도 52만석의 거대 다이묘우이며, 키타노만도코로의 조카이기도 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에야스는 이 젊은이에 대해서 과분할 정도의 친절함을 보이기 시작했다.

 

 히데아키는 이에야스에게 껴안기 듯 성을 나왔다. 자택에 돌아가 술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3~4잔 정도로 숨 쉬는 것을 괴로워할 정도로 취했다. 원래 이 남자는 술에 약했다.

 자택에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히데요시에게서 히데아키에게 사자(使者)로 코우조우스[主]가 파견되었다. 코우조우스에 대해서는 제 1 [살생관백]에서 언급하였다. 토요토미 가문 가정 내의 것들을 다스리는 여관장(女官長)이다. 히데아키는 토요토미 일족의 예우를 받고 있었기에, 사자도 딱딱한 관리가 아닌 토요토미 가문의 여관장이 맡았다. 히데츠구의 쥬라쿠테이[第]에서 물러나게 설득한 것도 이 비구니였다. 사람됨이 둥글둥글하여 누구에게나 경애 받았다. 그 비구니가 토요토미 가문의 두 양자인 경우에는 2번 다 저승사자가 되었다. 비구니는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치쿠젠[筑前]과 그 외의 영지(領地)들은 몰수 되었습니다. 어여 빨리 에치젠[越前]으로 옮기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외치려 하였다. 하지만 말문이 막혀 입만 뻐끔대며 숨이 거칠어 졌다. 코우조우스는 이런 모습에 두려움을 느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도망치고자 하였다. 하지만 히데아키가 비구니의 소매를 붙잡았다.

 

 이봐~ 내는 죄가 없다

 

 전하의 말씀이십니다. 얌전히 따르시는 것이 신상(身上)에 좋습니다

 

 죄가 어없단 말이다. 그런데

 

 히데아키의 뇌리에, 형 뻘이었던 히데츠구와 그 처첩들의 비참한 최후가 떠올랐다.

 도 죄라고 하던 모반의 사실 등은 없었을 것이다. 이제가 되어서야 그것을 알았다.

 

 나를 죽여라

 

 라고 외쳤다. 미친 것은 아니었다. 히데아키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지금이 가장 냉정하다고 생각하였다.

 

 죽여 주길 바란다. 살아 있는 동안은 전하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에치젠[越前]에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죽음을 내리신다면 더 이상 명령에 따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비구니! 그렇게 전해주게. 차라리 이 킨고[金吾]를 죽이라고

 

 코우조우스는 도망치듯이 저택을 나왔지만, 그러나 이런 상태로 성으로 돌아가 아까 본 모습을 보고할 순 없었다. 곤란한 나머지 타고 있던 가마를 재촉하여 큰 길의 서쪽으로 가 이에야스의 저택으로 향했다. 이에야스에게 구원을 청하고자 한 것이다.

 

 어찐 일이신가?”

 

 이에야스는 잘 여문듯한 볼에 미소를 만들며 말했다.

 

 킨고님에 대한 것입니다

 

 킨고님?”

 

 킨고님은 어릴 때부터 성질이 사나워 한번 신경을 폭발시키면 우리들로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사옵니다

 

 라고 히데아키의 상태를 고한 뒤 힘이 되어주길 바란다고 하였다. 이에야스는 수긍하여 부하에게 구두로 계책을 알려 코바야카와[小早川] 저택으로 보냈다. 이에야스의 계책은,

 

 신상을 위해서입니다. 우선 이봉(移封)을 받아들이십시오

 

 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히데아키는 치쿠젠[筑前]에서 곧바로 옮기지 말고, 또한 중신들도 옮기지 않으며, 우선은 부속 다이묘우[大名]의 부하들이나, 신규 채용한 부하들을 몇 명씩 에치젠[越前]으로 보내십시오. 한줄 요약하면 옮기는 척만 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버는 동안 졸자(이에야스)가 어떻게든 타이코우[太閤=히데요시] 전하에게 부탁하여, 명령을 철회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이에야스의 이치에 맞는 더구나 마음이 담긴 조언에는 히데아키도 감격하여,

 

 어떻게든 잘 부탁 드립니다

 

 라고 모든 것을 맡겼다.

 

 다음 날 이에야스는 등성하여 누가 보아도 급한 일이 있는 듯이 히데요시에게 내알(內謁)을 청했다. 히데요시는 자리로 나왔지만 이에야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불쌍한 척을 하며 눈을 내리깔고 침묵하였다. 그 후 두 마디 정도 날씨나 계절에 관한 이야기를 한 후 물러났다.

 다음 날도 똑같이 내알을 청하였고 그러나 역시 똑 같은 짓을 하였다. 3일째도 그러했다. 히데요시는 수상히 여겨,

 

 나이후[内府=이에야스]께서는 뭔가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 같은데?”

 

 라고 물었다. 히데요시는 항상 이에야스에 대해서만은 부하라기 보다는 손님의 예를 취하여 다른 제후와는 다른 말씨를 사용했다.

 이에야스는 애처로운 미소를 지으며,

 

 킨고 츄우나곤님에 대한 것입니다. 어떻게든 해 드리고 싶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알현을 청하였으면서도 막상 말할 때가 되면 전하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은 듯하여 이렇게 말씀도 못 올리고 있습니다.”

 

 ~ 그일 때문인가

 

 히데요시는 갑자기 기분이 나빠져 그 후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이에야스는 굳이 말하려 하지 않고 그대로 물러났다. 다음 날도 성에 올랐으며 또한 그 다음 날도 알현하여 끈질기게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왜 그러신가? 아직도 킨고 때문에 고생하고 계신가?”

 

 몇 일 지나 히데요시는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이에야스의 대답은 먼젓번과 같았다. 히데요시는 결국 참지 못하고,

 

 히데아키의 죄는 명백. 그러나 처분에 대해서는 나이후에게 맡기겠소

 

 라고 말했다. 이에야스는 희열에 찬 표정을 만들어,

 

 그렇다면 토요토미 가문의 먼 장래를 위해서 좋은 계책을 내 놓겠습니다.”

 

 고 절을 하며 대답했다. 히데요시는 그 말 만으로도,

 

 아아~”

 

 하고 눈물을 흘리며,

 

 나이후의 그 말 한마디. 부처님의 목소리처럼 성스럽게 들렸습니다. 부탁 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부탁 드리겠다는 말은 히데아키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히데요리를 말한 것이다. 히데요리를 위해서 히데아키의 처분을 잘 해주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이에야스는 성을 나와 자택에 코바야카와 가문의 가로들을 불러 모아 히데요시의 말을 전했다.

 모두 이에야스의 호의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또한 이에야스는,

 

 나는 공의(公儀=정부(政府))의 대로(大老)로서 킨고님의 처분을 행하게 되었다. 본심을 말하자면 영지(領地)에 대해서는 예전과 같이 치쿠젠의 영지를 그대로 인정하고 싶다. 그러나 손바닥을 뒤집듯이 곧바로 그럴 수는 없다. 히데요시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송구스럽다

 

 는 것이었다. 이에야스의 처분은 세심했다.

 

 우선 각각의 자택에서 근신(謹愼)할 것

 

 이라는 것과,

 

 그 후 좋은 소식을 기다릴 것

 

 이라고 이에야스는 말했다. 이에야스가 보기에 히데요시의 생명은 길지 않을 것이다. 죽어버리면 그 뒤는 흐지부지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에야스의 이 처분은 사무면에서 다소의 혼란을 만들었다. 이미 히데아키의 치쿠젠[筑前]의 옛 영토는 토요토미 가문의 직할령이 되었기에, 미츠나리 등은 코바야카와 가문에게 비우라고 재촉을 하였다. 히데아키는 다시 이에야스에게 울며 매달렸다. 이에야스는 이에 대해서,

 

 조금씩 반환하시길

 

 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코바야카와 가문은 영지(領地)를 조금씩 반납했다. 때문에 일부의 가신들은 코바야카와 가문에서 받았던 영지(領地)를 잃었기에 낭인(浪人)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 낭인들이 100명 정도 생겼을 즈음 히데요시가 죽었다. 히데아키가 죄를 얻어서부터 4달이 지난 1598 8 18일이었다. 이에야스의 예상대로 히데아키는 그대로 옛 영토에 눌러앉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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