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모반에는 아마도 그의 성격적인 면이 하나의 요소로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노부나가(信長)는 그의 중후한 체하는 얼굴이 들지 않았다. 이마에 새겨진 듯한 교양이 눈에 거슬렸다. 히데요시(秀吉)처럼 자신의 몸을 낮추어 귀여움 받으려는 재주가 없었다.

 노부나가와 미츠히데의 관계를 상징하는 듯한 이야기가 있다.
 술 자리에서 노부나가가 엄청나게 거대한 큰 잔을 내와 여기에 술을 가득 붓고는 미츠히데에게 마시라고 하였다. 미츠히데가 도저히 안 되겠다고 하자 노부나가는 갑자기 칼을 번득이며 "술을 마실 수 없다면 이거를 목에 처넣어주마"하고 미츠히데의 얼굴 앞으로 겨누었다. 어쩔 수 없이 미츠히데가 큰 잔을 비우자 노부나가는 "역시 목숨은 아쉬운가 보군"하고 비웃었다고 한다.

 코우슈우(甲州) 정벌 때였다.
 시나노(信濃) 스와 군(諏訪郡)에 있는 어느 절에 본진을 두었을 때 미츠히데가, "정말로 경사스러운 일이옵니다. 우리들의 뼈를 깎는 듯한 오랜 노력이 이제야 결실을 맺어 스와 군에 있는 모두가 우리 편이 되겠다고 알려왔습니다" 하고 노부나가에게 축하의 말을 올렸다. 그 뽐내는 듯한 얼굴이 노부나가의 역린을 건드렸다. "메야? 네 놈의 어디 뼈가 깎였고 무슨 공을 세웠다고 하는게냐? 자기 혼자서만 분골쇄신한 것처럼 말하는 그 말투가 맘에 안 든다" 라고 외치며 아랫자리에 있는 미츠히데에게 거침없이 다가가 돌연 미츠히데의 머리를 난간에 뭉개며 "이 대머리녀석!"하고 심하게 팼던 것이다. 미츠히데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의 굴욕에 실로 분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고 한다.[각주:1]

 성격적으로는 맞지 않았지만 노부나가는 미츠히데의 재능을 인정하고 있었다. 미츠히데에게는 우선 오다 가문(織田家)의 다른 무장들에게는 없는 외교관적인 특질이 있었다. 장수로서의 기량도 뛰어나 전략, 포술, 행정, 축성 등 그 재능은 다방면에 걸쳐 넘칠 듯하였다. 노부나가는 신참자인 미츠히데를 예가 볼 수 없을 정도로 중용하여 출세시켰다. 1571년 히에이잔 섬멸(比叡山討) 후 오우미(近江) 남부의 시가 군(滋賀郡)을 하사하고 사카모토 성(坂本城)의 성주로 임명한 것이다. 거의 10만석에 달하는 봉록이었다. 이 시기 아직 히데요시조차 영지(領地)가 없는 야전부대장에 지나지 않았다. 성격적으로는 맘에 들지 않았지만 미츠히데의 우수한 능력을 높이 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츠히데의 마음은 서서히 노부나가에게 멀어지기 시작했다. 사람을 도구로밖에 보지 않고 쓸모가 없어지면 냉혹히 버리는 그런 노부나가의 방식에 견딜 수 없게 되었다.
 1578년에 이런 일이 있었다. 미츠히데의 동료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가 돌연 노부나가에게 모반을 일으킨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패한 무라시게는 홀로 츄우고쿠(中
)로 도망쳤는데 그 일족에 대한 노부나가의 처리가 너무도 잔혹했다. 122명의 여성을 십자가에 매달아 창으로 찔러 죽이고 가신 512명을 해안가에 있는 집 네 곳에 가두어 불을 질러 태워 죽였다.

 노부나가의 이런 가혹함을 미츠히데 자신도 맛보았다.
 1578년 탄바(丹波) 야카미 성(八上城) 하타노 히데하루(波多野 秀治)를 설득하기 위해 미츠히데는 자신의 모친을 인질로 보내어 항복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이런 고심에 찬 미츠히데의 인질작전을 아무렇지도 않게 뭉갰다. 아즈치(安土)로 데려간 하타노 형제를 십자가에 매달아 창으로 찔러 죽여버린 것이다. 약속을 어긴 것에 분노한 야카미 성은 보복으로 인질인 미츠히데의 모친을 죽였다.[각주:2]

 그리고 천하를 진동시킨 1582년이 왔다.
 미츠히데는 이 해의 5월 15일 아즈치 성을 방문한 토쿠가와 이에야스(
川 家康)를 접대하는 직책에 임명 받았다. 당시 미츠히데는 전투에 종사하지 않고 휴가 중이었던 것이다. 이 당시 오다 가문은 5개의 군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 하시바 히데요시, 타키가와 카즈마스(川 一益) 그리고 아케치 미츠히데가 각각의 사령관이었다. 미츠히데는 15일~17일까지 이에야스의 접대에 임했지만 17일에 빗츄우(備中)에 있던 히데요시에게서 원군을 요청하는 소식이 노부나가에게 전해졌다. 히데요시는 타카마츠 성(高松城)을 한창 수공으로 밀어붙이던 중에 모우리(毛利)의 대군이 타카마츠 성을 구원하러 몰려들었던 것이다.

 노부나가는 지금이야말로 모우리와 자웅을 정할 때라 여기고 직접 출진하고자 하였다. 여러 장수들에게 동원령이 내려졌다. 미츠히데는 그 구원군의 선봉이었다. 지휘하에 들어온 다이묘우(大名)는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츠츠이 쥰케이(筒井 順慶),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들이었다.
 이때 미츠히데의 심경은 복잡했다. 츄우고쿠 공략은 말하자면 히데요시가 메인이며 나중에 달려가는 자신은 그 보조적인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설사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오로지 히데요시의 명성만 높여주기만 할 뿐이 아닌가?

 그런 마음의 동요에 더욱 박차를 가한 것이 노부나가의 명령이었다. 빗츄우 출진을 명령 받은 직후에 노부나가의 사자가 와,
"이즈모(出雲), 이와미(石見)를 새로이 하사하시며 대신 탄바(丹波), 오우미(近江)의 영지(領地)를 거두신다고 하십니다"
 고 전한 것이다. 지금 가진 영지(領地)를 몰수하고 대신 적국의 영지를 준다는 것이다. 영지 몰수나 마찬가지인 명령이었다. 이때 미츠히데의 뇌리에 예전 노부나가에게 추방당한 오다 가문의 중신 하야시 미치카츠(林 通勝)나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나에게도 그런 일이 닥칠 줄은……"

 5월 26일.
 거성(居城) 탄바 카메야마 성(
山城)에 입성한 미츠히데는 다음 날인 27일 아타고야마(愛宕山) 산에 올라 기도를 하고 신전 앞에서 2~3번 제비를 뽑으며 길흉을 쟀다고 한다. 후세의 사가들은 이때 대체적으로 그가 모반 결의를 굳혔다고 보고 있다.

 날이 밝아 28일.
 아타고야마 산에서 렌가(連歌) 모임이 개최되었다. 당대 렌가계 제일인자인 사토무라 쇼우하(里村
紹巴), 사토무라 쇼우시츠(里村 昌叱)가 열석하였다. 곧이어 모임이 시작되어 발구(發口)를 미츠히데가 읊었다.

때는 지금 하늘이 내리는 5월 비려나
時はいま、天が下しる五月かな

 쇼우하는 깜짝 놀랐다.
 '때는 지금'은 결의를 의미하며, '때(토키)'에는 또한 미츠히데의 출신인 미노(美濃)의 '토키' 씨(土岐氏)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이 내리는(天が下しる)'은 '천하를 다스린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토키(아케치)가 천하를 통치할 때가 온 것이다' – 쇼우하는 이렇게 해석하여 전율한 것이다.
 렌가 모임은 이틀간에 걸쳐 행해졌는데 미츠히데는 자리에서 간식으로 나온 대나무 잎에 싸서 찐 떡인 쫑즈(粽)를 잎도 벗기지 않고 그냥 입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카메야마 성으로 돌아온 미츠히데는 가장 신뢰하는 아케치 사마노스케 히데미츠(明智 左馬助 秀)를 침실로 불러 모기장 안으로 불러들여서는 모반할 뜻을 밝혔다.

 미츠히데가 츄우고쿠 공략을 위해 전군을 지휘하여 카메야마 성을 출발한 것은 6월 1일 오후 6시였다.
 전군 쿄우토(京都)로 향했다. 이 시점에서 미츠히데는 아직 장병들에게 본심을 밝히지 않았다. 쿄우토에서 노부나가 앞에서 열병식을 치른다고 속였다. 전군이 쿄우토 근교 카츠라가와(桂川) 강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전투준비의 명령이 전군에게 하달되었다.
 "말의 재갈을 풀고 보병인 자는 새로운 짚신으로 갈아 신으라. 철포를 소지한 자는 화승을 1척5촌으로 자른 다섯 줄에 불을 붙여 꺼지지 않게 꺼꾸로 들고 있으라"
 이렇게 세부적인 명령은 전쟁터에서만 행해지는 것이었다. 전군은 처음으로 미츠히데의 결의를 알게 되었다.

 쿄우토(京都)에 돌입한 아케치 군세가 혼노우(本能)사(寺)에 있던 노부나가를 죽인 것은 다음 날 새벽이었다. 그러나 모반으로 세워진 아케치의 천하는 이어지는 일 없이 10일 후의 야마자키 전투(山崎合)에서 상경한 히데요시에게 패함으로써 무너졌다.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1528년 생. 미노(美濃) 토키 씨(土岐氏)의 지족이라고 한다. 전반생이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를 섬겼다는 말이 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가신이 된 것은 중년이 지나서인 것 같다.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
)와 함께 쇼우군(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노부나가에게 알선하여 공적을 인정받았다. 1570년 오우미(近江) 사카모토(坂本) 성주가 되어 탄바(丹波) 경영을 일임 받았다. 1575년 코레토우(惟任)라는 성(姓)과 휴우가노카미(日向守)를 제수 받았다. 1582년 6월 2일 혼노우(本能)사(寺)에서 주군 노부나가를 죽였지만 야마자키(山崎)에서 히데요시(秀吉)에게 패하여 도주 중 오구루스(小栗栖)에 이르렀을 때 그 지역 백성에게 살해당했다.

이전 번역글.

2008/01/29 -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 아케치 미츠히데

  1. 이때의 일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루이스 프로이스는 미츠히데가 노부나가에게 발길질 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적고 있다. [본문으로]
  2. 회본태공기(絵本太功記)의 창작이라 여겨지고 있다. 야카미 성은 긴 포위에 지친 성 수비병들이 성주인 하타노 형제를 잡아다 받쳤다고 한다. [본문으로]

구로다 요시타카[ 孝高]

1604 3 20일 병사(病死) 59.

1546 ~ 1604.

()인 죠수이[如水]가 더 알려져 있다. 통칭 칸베에[官兵衛].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를 섬기며 타케나카 한베에[竹中 半兵衛]와 더불어, [하시바의 두 명의 베에(羽柴兵衛)]라 일컬어 졌다. 히데요시의 큐우슈우[九州] 제압 후 부젠[豊前] 나카츠[中津] 성주(城主)가 되었고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동군에 속하여 큐우슈우[九州]의 서군과 싸웠다.








천하인(天下人)에의 야망과 좌절


 1604 3 20일.

 야마시로[山城] 후시미[伏見]의 저택에서 쿠로다 요시타카는 59세의 생애를 마쳤다.

 세키가하라[ヶ原]로부터 4 늦은 봄의 이별이었다.


 요시타카가 세상을 떠날 때, 아들인 나가마사[長政]에게 유언으로 남긴 내용이 [무공담 모음집(咄聞書)]에 전해지고 있다.

 “나는 도박을 잘하지만 너는 못한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세키가하라[ヶ原] 이에야스 공[家康公]과 지부[冶部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100일 정도 서로 싸우게 냅두면, 그 동안 난 츠쿠시[筑紫[각주:1]]를 제압한 후 쿄우토[京都]로 올라가 천하를 잡을 수 있었을 터였다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가 하루 만에 끝나질 않고 이에야스와 미츠나리가 100일 간 싸웠다면 자신은 얼른 큐우슈우[九州]를 평정하여 승기(乘機)를 타 츄우고쿠[国]의 모우리[毛利], 우키타[宇喜田]의 서군 세력을 물리치고 쿄우[京]에 올라가 어느 쪽이건 승자와 대결하여 천하를 잡을 수 있었다고 - 죽기 직전에 나가마사에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10월 15일.

 세키가하라[ヶ原]에서 천하를 손에 넣은 이에야스는 오오사카 성[大坂城]에서 논공행상을 행하며 공이 있는 다이묘우[大名]들에게 영지(領地)를 배분했다.

 카토우 기요마사[加藤 正]에게는 히고[肥後] 54만석, 나가마사에게는 치쿠젠[筑前] 50 2416석이라는 큰 영토가 주어졌지만 요시타카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없었다. 이에야스는 요시타카의가 천하를 손에 넣으려 했던 숨겨진 야망을 꿰뚫어 보았던 것은 아닐까?

 치쿠젠[筑前]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가 된 나가마사는 부젠[豊前] 나카츠 -그때까지의 영지 18 2천석 - 에서 치쿠젠[筑前] 나지마[名島] 입성하였다.


 나지마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 쌓인 요해(要害)였지만 원래는 타치바나 무네시게[立花 宗茂]의 영지에 있던 조그만 요새에 불과하였고 더구나 마을을 만들 땅이 좁아 성 밑 마을(城下町)을 발달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다음 해에는 나카 군[那珂郡] 후쿠사키[福崎]에 새로이 성을 만들어 쿠로다 씨[黒田氏] 발상(發祥)의 땅인 비젠[備前] 오쿠 군[邑久郡] 후쿠오카[福岡]의 이름을 따와, [후쿠오카]라고 이름을 붙였다.

 나지마 성[名島城]을 없애고 후쿠오카에 새로 성을 축성하기로 결정이 나자 요시타카는 은거하여 모든 것은 나가마사에게 맡기고, 나지마 성에서 나와 다자이후[太宰府[각주:2]]에 임시 거처를 만들어 거기로 옮겨 살았다.

 다자이후 텐마 궁[宮] 경내(境內)에 세워진 초가집에서 매일매일 풍류를 즐기며, 다도(茶道)와카[和歌], 렌가[連歌] 등의 소양을 쌓았다.


문인으로써의 풍류의 나날


 예전에 멀리 떨어진 조정[遠の朝廷=발음은 とおのみかど’]”라고 불렸던 다자이후.

 그곳의 초가집에서 풍류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던 요시타카는 렌가 사[連歌師]인 키야마 죠우인[木山 紹印]에게 땅을 하사하여 살게 해서는 예전에 융성했던 다자이후 렌가의 부흥을 꾀했다.

 또한 다자이후 덴마궁()2천석을 기부하여 아치형 다리(太鼓橋), 석등(石燈)을 만들어 받치고, 큰 칼[太刀] 외에 [텐진엔기 에마키[天神絵巻[각주:3]]] 세 권과 렌가를 봉납함과 동시에 궁 사무 책임자인(宮司務別) 오오토리이 신간[大鳥居 信岩]과 친교를 맺었다.


 1601 1 17일.

 오오사카[大坂] 텐마 궁[宮]에서 개최된 렌가회()에 오오토리이 신간과 함께 참여했다.

 이 모임에서는 중앙 렌가계()의 중심적 존재인 사토무라[里村] 일문(一門)의 총사() 쇼우하[紹巴[각주:4]]나 쇼우시츠[昌叱[각주:5]], 마에다 겡이[前田 玄以] 등이 자리를 함께했다.


 다음 해인 1602 1 16.

 다자이후 덴마궁()에서 아들 나가마사, 신간[信岩], 렌가 사[連歌師]인 키야마 죠우인[木山 紹印] 등과 렌가회()를 열어, 예부터 큐우슈우[九州] 문화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다자이후 문예의 부흥을 꾀한 것은 특필할만하다고 할 수 있다.


 다인(茶人)으로써도 뛰어났다.

 센노 리큐우[千 利休]와 친교를 맺고 그의 다도관을 몸에 익혔으며, 다이토쿠 사[寺]의 슌노쿠 화상[春屋和尙]을 참선(參禪)의 스승으로 삼아 다도에도 선()의 정신을 가미하여 깊이를 더해 갔다.


 1601 5월.

 이에야스가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개최한 잔치에 참가했던 요시타카는 그곳에서 가장 큰 차 가루를 넣어 두는 단지인 [葉茶壺]를 그냥 들고 나와 그 호방함에는 이에야스도 놀랐다고 한다[각주:6].


 2년간의 다자이후 생활 후 일부 완성된 후쿠오카 성 세번 째 성곽[丸] 은거 저택으로 옮긴 요시타카는 부인인 코우엔[幸圓]과 소박한 생활을 보냈다. 평생 부인 한 사람만 사랑한 그는 경건한 크리스천 다이묘우[大名]이기도 했다. ‘돈 시메온이라는 세례명을 가지고, [SIMEONJOSUI]라 쓰여진 로마자 도장을 사용했다.

 유해(遺骸)는 쿄우토[京都] 다이토쿠 사[寺]에 매장되었고, 하카타[博多]의 소우후쿠 사[崇福寺]에도 분골(分骨)[각주:7]되었다.



  1. 큐우슈우(九州)의 옛 이름. [본문으로]
  2. 과거 일본 조정이 힘이 있을 때의 큐우슈우[九州]와 부속 도서(島嶼)를 관장하던 관직인 다자이[太宰]의 정무소가 있던 곳. [본문으로]
  3. 일본에서 학문의 신으로 받들고 있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 道真]'의 일생과 그가 죽은 뒤에 텐진[天神]으로 신앙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그림과 설명이 쓰여진 두루마기. [본문으로]
  4. 당시 렌가계(界)의 일인자. 여담으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가 혼노우 사[本能寺]의 반역을 일으키기 직전에 아타고[愛宕]에서 연 렌가회의 사회자로 참가했었다. [본문으로]
  5. 죠우하의 아들. [본문으로]
  6.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훔쳤다는 뜻. [본문으로]
  7. 유해를 두 개소 이상으로 나뉘어 매장하는 것.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