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이색의 쇼우군[軍]이었다. 13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검술의 달인이었던 것이다. 츠카하라 보쿠덴[塚原卜伝]에게 비기 [히토츠노타치(太刀)]를 전수받았을 정도의 실력이었다.

 달리 생각하면, 전란 다발하던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으로써의 자기단련이었다. 1546년에 쇼우군[軍]이 되면서부터 요시테루에게는 하루라도 평온한 날이 없었던 것이다.

 

 요시테루 치세인 1546년부터 1565년에 이르는 20년간은 중세의 암흑기에서 근세의 여명기로 이어지는 과도기였다. 일본에 온 하비에르[각주:1]처음으로 기독교를 전파하였고, 노부나가[信長]가 오케하자마[間]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를 쓰러뜨린 것도 이 시기였다. 그 격동기의 고뇌를 요시테루는 혼자 짊어지고 있었다.

 

 어렸을 적 부친 요시하루[義晴]와 함께 전란의 쿄우[京]에서 피신하여 오우미[近江]에 있었던 요시테루는, 쇼우군[軍]이 되어 쿄우[]로 돌아와서도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 晴元] 미요시 쵸우케이[三好 長慶]의 다툼에 휘말려, 부평초[浮萍草]처럼 양 세력 사이를 떠도는 존재밖에 되지 않았기에 그 이후에도 몇 번이나 오우미로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되었. 그러나 결국 미요시 쵸우케이의 실력에 굴복하여 미요시 체제에 옹립되는 형태가 되었다. 이때가 1558 11.

 쿄우()로 돌아온 요시테루는 이것이 정말로 기뻤던 듯, 어소[御所][각주:2]의 마당에 서서는 밤하늘을 향해서 환호성을 올렸다고 한다.


 이 즈음, 그제서야 칸파쿠[白]였던 코노에 타네이에[近衛 稙家]의 딸과 결혼식을 올렸다. 모친인 케이쥬인[寿院]이 오랫동안 권해왔던 이야기였다. 요시테루의 마음에 안정이 생겼다는 것을 말해 준다.[각주:3]


 미요시 쵸우케이가 죽자, 요시테루는 지금이야말로 막부(幕府)의 실권을 회복할 좋은 기회라 생각하여, 붕고[豊後]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이나, 에치고[越後]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등 여러 다이묘우[大名]에게 접근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쇼우군의 의도는 죽은 쵸우케이의 모신(謀臣)이며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아시카가 요시히데[足利 義栄][각주:4]를 새로이 쇼우군으로 세우려고 하는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가 간파하기에 이른다. 히사히데는 같은 쵸우케이의 가신이었던 미요시 삼인중[三好三人衆]과 상담한 후 선수를 쳐 요시테루의 어소(御所)를 습격하기로 한다.

 

 1565 5 19.

 때는 장마의 계절,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그 빗속을 마츠나가, 미요시 군세는 갓과 우비를 입고서, 키요미즈 사[寺]를 참배한다는 명목으로 쿄우[京]로 올라가고 있었다.

 히사히데는 밤이 되기 직전에 일부러 어느 소송(訴訟)에 대한 서장을 어소에 제출했다. 응답에 시간이 걸렸다. 그것이 노림수였다. 그 사이에 히사히데의 무리들은 어둠에 섞여 어소 안으로 잠입하여 마루나 복도 밑에 몸을 숨겼다.

 

 갑자기 함성이 울려 퍼졌다. 궐기의 신호였다. 어소에는 사무를 보는 몇몇 외에 사람이 없었다.

 사태가 명확해지자, 검호 쇼우군답게 각오를 정하여 금생의 이별 주연(酒宴)을 열었다. 호소카와 타카요시[細川 隆是]가 여관(女官)코소데[小袖]를 뒤집어 쓰고 춤을 추었다.

 이때 요시테루는, 그 코소데 위에 사세구(辭世)의 시를 적었다고 한다.

지금 내리는 비는 이슬인가 눈물인가,

내 이름을 알려라 구름 위에까지

五月雨は露かかほととぎす

わが名をあげて雲の上まで

 그때부터 요시테루의 활약은 눈부셔 몇 자루나 되는 칼을 마루에 꼽고서는 날이 무뎌지면 계속해서 바꾸어가며 달려드는 적을 마구 베어 쓰러뜨렸다.

 하지만 결국 다구리에는 장사가 없었다. 한 적병이 문틈에서 창으로 발을 걸어 넘어뜨리자 요시테루는 넘어졌다. 거기에 적병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장지문으로 몸을 누르고는 그 위에서 창으로 내리 찔렀다. 그때 불길이 한꺼번에 번져 요시테루의 목을 베지 못한 채, 건물은 화재로 무너져버렸다고 한다.(에이로쿠의 변[永禄の変])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

1536년생. 첫 이름은 요시후지[義藤]. 12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 義晴]의 아들. 1546년 아시카가 제 13대 쇼우군이 되었다.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 晴元]를 칸레이[管領=쇼우군의 보좌역]로 임명 하였지만, 호소카와 우지츠나[細川 氏綱], 미요시 쵸우케이[三好 長慶] 등이 이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켰고, 미요시 측이 승리를 거둠으로써 바쿠후의 실권은 쵸우케이가 쥐게 된다. 쵸우케이가 죽자 실권을 쥐고 있던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에게서 정권탈환을 기도하지만 히사히데 등에게 습격 받아 살해당했다. 1565년 당시 아직 30살이었다.
  1. 일본에서는 ‘자비에르[ザビエル]’ 로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2. 높은 귀인의 거처 겸 정무소. [본문으로]
  3. 여담으로 요시테루의 모친 ‘케이쥬인’은 장인인 ‘코노에 타네이에’의 여동생이다. 즉 요시테루는 외사촌과 결혼한 것이다. [본문으로]
  4. 아시카가 바쿠후 14대 쇼우군, 요시테루와는 할아버지가 같은 사촌지간. [본문으로]

 '살무사 도우산'이라는 별명으로 알 수 있듯이, 사이토우 도우산의 평판은 굉장히 안 좋다.

 타이라노 마사카도[門][각주:1],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등과 함께 악인(惡人)의 전형적인 인물로 일컬어지고 있다.

 같은 시대에도 도우산을 비난하는 아래와 같은 낙서가 유행했다고 한다.

주인을 베고, 사위를 죽이는 것은 몸의 파멸. 옛날엔 오사다, 지금은 야마시로

主を斬り、聟を殺すは身のおわり、昔はおさだ、いまはやましろ

 미노오와리(()のおわり)미노[美濃]오와리[尾張]를 말하는 것으로, 주군 토키 요리요시[土岐 芸]가 도우산에게 추방 당하여 미노에서 오와리로 쫓겨난 것을 말하며, ‘오사다 [헤이지의 (平治)]에서 주군인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 義朝][각주:2]를 죽인 오사다 타다무네[長田 忠致]를 지칭하는 것이다. ‘야마시로는 사이토우 야마시로노카미 도우산[斎藤 山城守 道三]을 말한다. 어느 쪽이건 주군을 배신한 극악인(極惡人)이라고 세상 사람들은 손가락질했던 것이다.


 잔혹한 행동도 기록되어 있다.

 [도우산은 작은 죄를 지었더라도 거열형(車裂刑)에 처했으며, 혹은 솥에 죄인을 넣어 그의 부인이나 부모형제에게 불을 피우게 하여 사람들 앞에서 삶아 죽이게 하였다.]


 적수공권(赤手空拳). 일개의 기름 상인에서 미노[美濃] 일국(一国)의 태수로 출세했을 만큼 젊었을 때부터 두뇌의 명석함은 발군이었다.

 쿄우토[京都]의 묘우카쿠 사[妙覚寺]에서 수행할 때는 '배움은 부처의 가르침에 통달하였으며, 변설(辯舌)부루나(富樓那 석가의 제자로 변설가)에도 뒤지지 않을 것이며, 내외(內外)를 잘 깨닫고 있으니 훗날 굉장한 명승(名僧)이 될 것이다'고 촉망 받았다. 묘우가쿠 사()에서는 호우렌보우[法蓮坊]라는 이름이었다. 이 시절에 알게 된 난요우보우[南陽坊]가 훗날 도우산이 출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난요우보우는 미노의 호족 나가이 토시타카[長井 利隆]의 동생으로, 후에 미노[美濃]명찰(名刹) 죠우자이 사[常在寺]의 주지(住持)가 되어 '니치운 상인[日運上人]'이라 불리게 된다.


 도우산의 전반생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들이 있어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쿄우토[京都]의 교외에 있는 니시노오카[西]의 낭인 마츠나미 모토무네[松波 基宗]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마츠나미 가문은 대대로 '북면의 무사(北面武士 상황(上皇)의 거처를 지키는 무사)' 집안이었다고 한다.

 호우렌보우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환속하여 기름 상인이 되었다. 나라야[奈良屋]데릴사위로 들어가, 야마자키야 쇼우고로우[山崎屋 庄五郎]라는 이름을 칭었다.


 미노[美濃]의 성 밑 마을(城下町)에서 기름 행상을 하고 있을 때의 에피소드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손님을 모으기 위해서 일종의 퍼포먼스를 보여준 것이다. 기름을 에 담아 손님의 항아리에 옮기는데 깔때기를 사용하지 않은 채 일문전(一文銭[각주:3])의 구멍을 통해서 흘려 넣은 것이었다. 한 방울도 구멍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구멍 주위에 한 방울이라도 묻는다면 공짜로 주겠다고 하였기에 그에게는 손님들이 잔뜩 모여들었다고 한다.

 어쩌다가 이 퍼포먼스를 미노[美濃]의 호족 나가이 토우자에몬[長井 藤左衛門]의 가신 중에 한 명이 보게되었다.

 굉장한 기술이군. 저 묘기를 무예로 살린다면 필시 뛰어난 무사가 될 수 있을 텐데……”


 이 나가이 가문의 무사가 한 말이 도우산을 무사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도우산은 기름 상인을 관두고 창() 수련에 정진하기 시작했다. 3간반(間半=약 6미터40센티[각주:4])이라는 굉장히 긴 창(=나가야리(長槍))을 만들어, 그 창 끝에 바늘을 달아서는 대나무 가지에 매단 일문전의 구멍을 뚫는 연습을 하였다. 필사의 수련 끝에 구멍을 뚫을 수 있었고 이어서 백발백중의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나가야리[長槍]는 센고쿠[戦国]전투에는 필수인 것이 되었는데 도우산이 그것의 발명자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또한 철포()의 실력도 또한 굉장했다고 한다[각주:5].
 이리하여 무예가 숙달된 도우산은 예전 묘우가쿠 사()에서 함께 수행했던 난요우보우=니치운 상인[日運上人]의 연줄로 나가이 토우자에몬 나가히로[長井 藤左衛門 長弘]를 섬기며, 마츠나미 쇼우고로우[松波 庄五
郎]라는 이름을 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도우산이 가진 다른 매력적인 면으로 나가이 씨()에게 접근한 것은 아닌가 하는 말들도 있다. 기름 상인이라고 하여도 조그만 가게를 운영했던 것이 아니라야마자키 하치만 궁[山崎八幡宮]전매권(專賣權)을 가진 기름 조합(油座)에 속해있던 상인으로 대단히 큰 규모의 가게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기름 조합의 상인은 관소(關所[각주:6])를 통과할 때도 세금을 면제받는 특권상인이었던 것이다.


 곧이어 도우산은 미노 슈고[美濃守護] 토키 모리요리[土岐 盛頼][각주:7]의 동생인 요리요시[芸]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이 즈음부터 그의 야망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는 요리요시를 꼬드겨 자신을 멀리하고 있던 당주인 모리요리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당주가 된 요리요시는 도우산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도우산은 요리요시의 애첩 미요시노[深芳野]까지 자신의 부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의 독선적 행위가 두드러지기 시작하자 노신(老臣)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특히 도우산을 천거했던 나가이 토우자에몬이 가장 강하게 반발한 것이다. 그러자 도우산은 은혜를 입었던 이 토우자에몬을 모살(謀殺)해 버린다. 이미 나가이 신쿠로우 토시마사[長井 新九朗 利政]로 이름을 바꾸고 있던 도우산은 이렇게 나가이 가문을 완전히 빼앗은 것이다. 일시적으로 나가이 일족의 반발을 사 공격을 받아, 주군 요리요시 밑으로 도망쳤으나 오우미[近江]의 슈고다이묘우[守護大名] 사사키 씨[木氏][각주:8]의 중재로 겨우 지위를 보전하였다.

 이후 도우산은 또다시 성()을 바꾸어 사이토우 성[姓][각주:9]을 칭하였다. 쇠약해져 있던 사이토우 씨()의 양자로 들어가 사이토우 야마시로노카미 히데타츠[藤 山城守 秀竜]라는 이름을 쓴 것이다. 착실히 그는 출세의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야망은 끝없이 커져만 갔다. 다음 목표는 미노[美濃]의 주인 자리였다.


 그의 독선적인 행동이 또다시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미노의 호족들이 반 히데타츠 연맹군을 조직하여 공격해 왔다. 그러나 운 좋게 오우미[近江]의 사사키 씨(), 에치젠[越前] 아사쿠라 씨[朝倉氏]의 중재로, 큰일이 터지기 전에 화해하였다. 이때 히데타츠는 그 죄를 사죄한다는 의미로 머리를 밀고 불문에 들어가 이때부터 도우산[道三]이라는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도우산의 덫이었다.

 15425. 갑자기 도우산은 요리요시의 거성 오오가 성[大桑城]을 습격하여 주군을 추방하여 명실공히 미노[美濃]의 태수(太守)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도우산은 곧이어 이웃나라 오와리[尾張]의 오다 노부히데[織田 信秀]의 공격을 받게 되지만, 딸인 노히메[]를 노부히데의 적자 노부나가와 결혼시켜 평화협정을 맺었다.

 당시 얼간이라는 말을 들으며 무시를 받고 있던 노부나가를 한번 보자마자,

 안타깝게도 이 얼간이 집 앞에 내 자식들은 말을 메게 되겠구나[각주:10]

 라고 탄식했다는 유명한 이야기는 이 즈음의 일인데, 도우산은 멍청함을 가장한 노부나가의 얼굴에서 일찍부터 후년 천하의 패자(覇者)가 가진 재능을 꿰뚫어 본 것이었다. 역시 예언은 적중하여, 도우산의 손자 타츠오키[興] 때가 되어 사이토우 가문은 노부나가에게 멸문 당해 버린다[각주:11]

 

 도우산의 말년은 비참했다.

 그는 주군 요리요시의 복수를 받게 된다. 그의 부인이 된 미요시노는 도우산에게 왔을 때 이미 요리요시의 씨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도우산의 적자 요시타츠[]였다. 이 설의 진위는 확실치 않지만 도우산의 애정은 이 장자에게는 박했고, 둘째인 마고시로우[孫四郎], 키헤이지[喜平次]에게만 쏠려 있었다.

 

 도우산은 요시타츠에게 가독을 물려주어 킨카잔 성[金華山城][각주:12]에 있게 하고, 자신은 나가라가와[長良川] 강 건너편에 있는 사기야마 성[鷺山城]에 은거하였다.

 요시타츠는 한센병을 앓고 있었고 65(195cm)이라는 큰 키였으며 성격도 굉장히 과격했다고 한다.

 부자간의 사이는 좋지 않아 날이 갈수록 험악해 져 갔다. 도우산은 요시타츠를 없애고 둘째인 마고시로우에게 가문을 물려주려고 은밀히 꾀했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요시타츠가 선수를 쳤다. 꾀병을 부려 숨이 있는 동안 유언을 하고 싶다고 하여 두 동생을 성에 불러들여 죽인 것이다.

 도우산은 격노하였다. 두 아들을 단번에 잃은 실망도 컸다. 이리하여 아비와 아들이 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1556 4.

 결국 둘은 전쟁을 벌인다. 도우산은 63세가 되어 있었다. 젊은 요시타츠의 적수는 되지 못하였다. 패하여 키다이 사[城田寺]로 도망치던 도중, 요시타츠의 가신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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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시타츠의 아들 타츠오키가 노부나가에게 패하여 사이토우 가문에 종지부가 찍히는 것은 이로부터 11년이 지난 1567년이었다.

 

[사이토 도산(藤 道三)]
이름은 토시마사[利政], 후에 히데타츠[竜]. 말년에 불문에 들어가 도우산[道三]이라는 이름을 칭했다. 미노 슈고[守護] 토키 씨[土岐氏]의 가신이 되었고, 1542년 주군 요리요시를 추방하여 미노 슈고가 된다. 1556 4 20일 적자 요시타츠와 싸워 전사(戰死).

  1. 939년에 칸토우(関東)에서 반란을 일으켜 [새로운 텐노우(新皇)]를 자임하였으나 진압당하였다. [일본 3대 원령(怨靈)] 중의 하나. [본문으로]
  2. 카마쿠라 바쿠후[鎌倉 幕府]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頼朝]의 부친. [본문으로]
  3. 우리 나라의 엽전처럼 구멍이 뚫려 있다. [본문으로]
  4. 아시가루(足軽)가 아닌 일반 무사의 창은 1간반(약 2.7~3미터)~2간(약 3.6~4미터)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일본에 철포가 전래된 것은 1543년이라고 하니 이 당시는 아직 철포에 대해서 몰랐을 것이다. 말년(도우산 1556년 몰) 즈음의 이야기 일 것이다. [본문으로]
  6. 당시는 각 지방의 실력자(영주, 절, 신사 등)들이 재정 확충을 위해서 자신의 영지(領地)를 통과하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거두는 곳이 많았다. [본문으로]
  7. 요리타케(頼武), 마사요리(政頼)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8. 보통 롯카쿠[六角]로 많이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9. 사이토우 씨(氏)는 대대로 미노[美濃]의 슈고다이[守護代]였다. [본문으로]
  10. 얼간이 집 ‘가서’ 인사를 올리거나 지시를 받으러 가야 한다는 의미. [본문으로]
  11. 멸문은 당했지만, 도우산의 막내 아들인 사이토우 토시하루[利治]는 노부나가의 부하가 되었고 후에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타다[信忠] 부속 가신 되어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때, 노부타다와 함께 싸우다 니죠우 성[二条城]에서 죽게 된다. [본문으로]
  12. 이 시대에는 이리 불렸다 한다. 후에 이나바야마[稲葉山]를 거쳐 노부나가 시대에 기후[岐阜]라는 이름으로 바뀐다. 또한 이 성이 있는 산의 이름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쓰쓰이 준케이[筒井 順慶]

1548 8 11일 병사 35

1549~1584.

야마토[大和] 코오리야마[郡山] 성주. 부친인 쥰쇼우[順昭]가 죽자 2살에 가독을 이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 대립하자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도와 마츠나가를 멸망시켜 야마토를 영유(領有). 야마자키 전투[山崎 合戦]에서는 미츠히데를 버리고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에 섰다.







승의(僧衣)의 무장


 츠츠이 쥰케이의 부친인 쥰쇼우는 나라[奈良]의 코우후쿠 사[興福寺]의 승병이었다. 쥰쇼우는 소에시모 군[添下郡]의 츠츠이 성[筒井城]을 본거지로 삼고, 야마토 지역에서 최강인 무사단을 이끌고 야마토 전역을 거의 평정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1551년, 아직 쥰케이가 2살일 때 쥰쇼우가 병으로 죽었다.


 주변 가신들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하여 18세에 코우후쿠 사[興福寺] 세이신 원[成身院]에서 득도(得度)하여 '요우슌보우 쥰케이[陽舜坊 順慶]'라는 이름을 자칭하였다. 승의의 무장이 된 쥰케이는 쇼우죠우히[猩[각주:1]]로 물들인 두건을 쓰고 금색의 가사(袈裟)를 걸치고 출진했다고 한다.


 쥰케이는 시기산 성[信貴山城]에 웅거하는 마츠나가 히사히데에게 여러 번 압박 받던 중 아케치 미츠히데의 주선으로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게 되었다. 노부나가는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히사히데보다 쥰케이를 신뢰하여 야마토를 맡긴 것이다.[각주:2] 이에 불만을 품은 히사히데는 돌연 시기산 성에서 모반을 일으켜 자멸하였다.


 1580년.

 쥰케이는 성을 야마토[大和]의 코오리야마[郡山]에 축성한다. 미츠히데가 성의 건물 배치를 맡았다고 하니 둘의 관계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알 수 있다[각주:3].


갑자기 찾아온 복통(腹痛)


 하시바 히데요시와 미츠히데가 싸운 야마자키 전투에서는 미츠히데의 필사적인 출진 요청에도 불구하고 '호라가토우게 고개[洞峠]'에서 어느 쪽에 붙을지 고민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는데, 실제로는 출병하지 않고 코오리야마 성()에서 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전투가 끝난후 곧바로 히데요시의 진()으로 달려가 천하의 명기(名器)인 이토 차완[井戸茶碗]을 헌상하고 공순(恭順)의 뜻을 나타내어 야마토 일국(一国)의 영유를 허락받았다.


 1548 1월.

 오오사카 성[大坂城]에서 히데요시에게 신년인사를 한 후 후나바[船場]의 자택에서 체재하고 있던 2월 중순. 쥰케이는 갑자기 칼로 쑤시는 듯한 고통이 수반하는 복통을 일으켰다. 소강상태를 지나 3 2일에 코오리야마 성()에 돌아와 몸을 추스르고 있을 때 히데요시에게서 출진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가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와 손을 잡고 싸움을 걸어 온 것이다. 이 전쟁은 후에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戦い]이라 불리게 되는 전쟁이 된다.


 히데요시에게 충심을 나타낼 절호의 기회로 본 쥰케이는 병든 몸을 이끌고 3월에 오우미[近江]로 출진하였고, 거기서 이세[伊勢] 마츠가시마[松島]에서 싸운 후 쉴 틈도 없이 6월에 미노[美濃]의 타케노하나[竹鼻]로 이동하였다. 양군이 대치한 상태가 된 7월이 되자, 복통은 더욱 심해져 제대로 먹기조차 힘들어지는 것에 더해 한 여름의 더위까지 겹쳐 몸은 갈수록 말라 갔다.


명의(名醫)의 치료도 보람없이


 코우후쿠 사()의 중도(衆徒)로서는 제일 높은 자리인 호우인 소우토[法印 僧都]가 되어 있던 쥰케이의 병 쾌유를 기원하기 위해 코우후쿠 사(), 카스가 대사[春日 大社]에서는 여러 가지 기도가 행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효과는 없어 결국엔 쿄우토[京都]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쿄우토에는 오오기마치 텐노우[正親町天皇]의 병을 고친 명의(名醫) 마나세 도우산[曲直瀨 道三]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우산의 치료에도 진전이 없어 격통이 멈추지는 않았다. 쥰케이의 병은 요즘으로 말하면 악성 위궤양 혹은 위암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회복될 기미가 없다고 판단하여 고향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고 생각했는지 코오리야마 성()으로 돌아왔다.

코우야 산[高野山]에 있는 쥰케이의 묘.

 흔들리는 가마에 타고 오기에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고 오는 도중 우치[宇治]나 나라[奈良]에서 정양(靜養)해 가면서 귀성한 것은 8 7일이었다. 그 동안에도 쥰케이는 계속 고통을 느꼈다. 또 다시 코우후쿠 사()나 카스가 대사[春日 大社]에서 기도가 행해졌지만 역시 효험은 없었다.


 이렇게 되자 쥰케이도 죽음을 각오했을 것이다.

 10일에는 머리맡에 일족들과 중신들을 불러 츠츠이 가문[筒井家]의 후사를 부탁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인 11일. 모친 오오이카타 토노[大方殿] 등이 보는 앞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35.


 쥰케이는 츠츠이 가문의 앞날을 걱정하였지만 뒤를 이은 사다츠구[定次][각주:4], 죠우케이[定慶][각주:5] 둘 다 뛰어나지는 못하여 토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카이에키[改易][각주:6], 단절(斷絶)[각주:7] 당하게 된다.

 사다츠구는 이가[伊賀] 우에노[上野]로 영지가 옮겨져 20만석을 영유하고,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戦い]에서는 토쿠가와 이에야스 쪽에 속했으나 후에 카이에키가 되어 이요[伊予]로 유배당한다.

 또한 그 다음 대인 죠우케이[定慶]에게는 코오리야마 성() 1만석이 주어졌지만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大坂夏の陣]에서 오오사카 측에 너무도 간단히 성을 빼앗긴 일로 무가(武家)로써 어울리지 않다하여 가문이 끊겼다.

 

 
  1. 파란 빛을 띤 진홍색을 말함. [본문으로]
  2. 이전까지만 해도 히사히데가 쇼우군[将軍] 요시아키[義昭]의 휘하였기에, 히사히데의 적인 쥰케이는 요시아키의 명령을 받은 노부나가의 군세에 공격받아 위기에 빠지나, 1571년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뜬금없이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노부나가를 거역하더니 쇼우군 요시아키 휘하 장수들의 영지를 공격. 이에 요시아키는 히사히데의 적이었던 쥰케이를 옹호하게 된다(자연스레 요시아키를 옹립하고 있던 노부나가도 쥰케이를 옹호). 이후 요시아키와 노부나가의 사이가 벌어지자 히사히데는 요시아키 측에 붙고, 쥰케이는 히사히데에게 대항하기 위해 노부나가에게 붙는다. 덧붙여 요시아키를 쫓아낸 후 히사히데와 쥰케이의 상위에 자신의 측근 반 나오마사[塙 直政]를 두었으나 전사. 이후에 비로서 야마토를 지배하게 된다. 본문의 글처럼 미츠히데의 힘이라기 보다는 이전부터 노부나가를 성심성의껏 섬긴 쥰케이 노력의 결과라 봐야 할 듯. [본문으로]
  3. 성 안의 건물 배치는 극비이기 때문에 신뢰하는 사람이 아니면 맡기질 않았다. [본문으로]
  4. 쥰케이에게는 사촌이며, 외조카(모친이 쥰케이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5. 확실하진 않으나 쥰케이와는 이종사촌지간인 듯. [본문으로]
  6. 무사의 신분을 빼앗기고 평민으로 강등 됨. [본문으로]
  7. 가문이 끊김. [본문으로]

미요시 나가요시[三好 長慶]

1564 74일 병사 43

1522~1564.

칸레이[각주:1](管領)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 晴元)의 집사(執事) 이즈미(和泉), 카와치(河内), 셋츠(摂津)를 지배. 이어서 쿄우토(京都)에 들어가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를 추방. 또한 주군 하루모토(晴元)도 추방하여 킨키(近畿[각주:2]) 8개국을 영유하며 전성기를 누리지만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에게 실권을 빼앗겼다.







절정기의 나가요시


 전성기의 미요시 나가요시는 야마시로(山城), 야마토(大和), 카와치(河内), 이즈미(和泉), 셋츠(摂津) 등 킨키 지역에 더해 탄바(丹波)의 대부분과 하리마(播磨)의 일부 그리고 시고쿠(四石) 지역의 아와(阿波), 사누키(讃岐), 아와지(淡路), 이요(伊予)의 일부에 이르는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조정(朝廷)에게서 종사위하(従四位下) 슈리노다이부(修理大夫)에 임명받았고, 바쿠후의 직책으로는 쇼우반슈우(相伴衆[각주:3]) 중 하나로 임명된 나가요시는, 1561 3 30 자신의 저택으로 13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방문을 실현시켰으며 또한 옻칠한 가마(輿[각주:4])오동나무의 문장(桐紋[각주:5]) 사용도 텐노우(天皇)에게 허가 받는 등 인생의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적자(嫡子) 요시오키(義興)나 동생인 요시카타(義賢)도 쇼우반슈우(相伴衆)에 이름을 올렸다. 그야말로 이 1561년 즈음은 미요시씨()의 절정기였다.


 나가요시의 절정에 달한 모습은 오동나무의 문장을 새긴 히타타레(直垂[각주:6])모습의 그림(다이토쿠(大徳)() 쥬코(聚光)()에 있다)에서도 알 수 있다.


운이 쇠퇴한 말년


 그러나 킨키와 시고쿠(四石) 지역에 위세를 떨치던 나가요시의 말년은 불행했다.

 영화(榮華)에서 곧바로 나락의 길로 떨어진다는 것은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우선 [오니소고우(鬼十河[각주:7]]라는 이명(異名)으로 아와(阿波)의 배후인 사누키(讃岐)를 휘어잡고 있던 막내 동생 소고우 카즈나가(十河 一存) 1561 4월 즈음에 병사했다. 사이가 좋지 않던 마츠나가 히사히데에 의한 독살이라는 설도 있다.


 다음으로 나가요시의 한 팔이기도 하며 본국 아와를 확실히 지배하고 있던 미요시 요시카타(호는 짓큐우())가 다음 해인 1562 3 5 [쿄우토(京都) 주변에서는 비할 바 없는 큰 싸움(近国無双大合戦)][속응인후기(続応仁後記)]이라 일컬어진 이즈미 쿠메다(久米田)의 싸움에서 하타케야마 타카마사(畠山 高政)에게 패하여 한창 일할 나이인 37살에 전사해 버렸다.


 이렇게 상황이 악화되어가는 시기에 미요시 내부에도 커다란 불씨가 존재하였다.

 그 불씨란 나가요시의 비서관(右筆)으로 시작하여 출세한 마츠나가 히사히데를 말한다. 히사히데가 얼마나 권세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1561년 즈음에 루이스 프로이스[각주:8]가, [히사히데는 미요시의 부하이지만 나가요시에게서 재판권과 통치권을 빼앗아 천하의 지배권을 손에 넣었다(日本史)]'등에서 평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조정(朝廷)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아첨하는 히사히데는 미요시 내부에서 언젠가는 반드시 터질 폭탄이 되어있었다.


 한편 주변도 하타케야마 씨()나 네고로 사(根来)의 중도(衆徒)를 시작으로 한 반() 미요시 세력이 물밑에서 힘을 키우고 있었다. 쇼우군 요시테루도 겉으로는 미요시 씨()의 보호 아래 있는 척을 하면서도 반 미요시세력을 응원하고 있었다. 조정 내부에서도 미요시마츠나가를 불쾌히 여기는 귀족(公家)도 많았다.


불행이 이어진 마지막


 이렇게 힘든 시기에 나가요시에게 있어 인생 최대의 불행이 찾아왔다.

 적남 요시오키의 죽음이었다. 1563 8월 병에 걸려 같은 달 25일에 아쿠다가와 성(芥川)에서 2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소문으로는 히사히데가 [조부나 부친에 버금가는 기량(父祖らず器量勝)][続応仁後記]이라 일컬어지는 요시오키의 뛰어난 재능을 두려워 하여 먼저 손을 써 독살했다고 한다.


 그리고 1564 5 9일.
 요시나가는 자기 손으로 수군을 이끌고 있던 아와지(淡路)의 동생 아타기 후유야스(安宅 冬康)를 이이모리(飯盛)()에서 죽여버린 것이다. 가인(歌人)임과 동시에(茶道)에도 뛰어난 문화인(文化人). 거기에 의리와 인정이 두터운 자비심 깊은 인물이기도 하였으며 나가요시의 오만함이나 남을 경시하는 것을 보고, 방울벌레를 보내 '여름 벌레라도 자애로운 마음으로 기르면 겨울까지 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더욱 그러합니다'라고 충고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후유야스의 인망(人望)은 카즈나가(一存), 요시카타(義賢), 요시오키(義興)의 계속된 죽음으로 인해 더욱 높아만 갔다. 모반(謀叛)의 야망이 있다던가, 반역의 기운이 있다는 풍설을 전하는 히사히데의 참언(讒言)을 믿고 나가요시는 후유야스를 죽였다.


 확실히 미요시 가문에서 유일하게 남은 실력자를 히사히데가 없애려 한 것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후계자로 선택하여 맞아들인 요시츠구(義継 = (소고우 카즈나가(十河 一存)의 아들)가 너무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그의 앞길을 생각하여 나가요시가 꾸민 일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불과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적남 요시오키 그리고 소고우 카즈나가, 미요시 요시카타, 아타기 후유야스라는 자신을 지탱해 온 유능한 동생들을 전부 잃어버린 불행이 이어진 것이다.


 후유야스가 불운한 죽음을 당한 불과 40여일 후인 1564 6 22일.
 요시츠구는 가문 상속에 관한 허가를 내려준데에 대한 답례를 하기 위하여 4000여의 무리를 이끌고 쿄우토(京都)에 갔다. 요시츠구는 이이모리 성()으로 곧바로 돌아왔는데 10일 후인 7 4 나가요시는 성 아래의 저택에서 병사했다. 43세였다.

 나가요시는 1561년 즈음부터 자주 병에 걸렸다고도 하는데 적남 요시오키의 죽음에 많이 낙담한 나가요시는 후유야스의 죽음 이후 병이 더욱 깊어졌다고 한다. 또한 말년은 렌가(連歌)에 빠져 살았다고 한다. 확실히 어지럽게 변하는 정치세계에서의 생활이 나가요시의 마음을 황폐화 시켰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1.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의 역직으로 굳이 따지자면 '정승'이라고 할 수 있음. [본문으로]
  2. 쿄우토(京都) 주변. 즉 수도권. [본문으로]
  3. 쇼우군이 궁궐에 입궐하거나 여러 곳을 방문할 때 함께 갈 수 있는 사람들을 지칭. 칸레이(管領) 다음 가는 권위를 가졌다. [본문으로]
  4. '누리고시'라 읽는다. 상자에 옻칠을 한 가마로 쇼우군이나 몬제키(門跡 – 황족이나 높은 쿠게(公家)가 출가한 특별한 절)만이 이용할 수 있었다. [본문으로]
  5. 원래는 황가의 문장으로, 텐노우(天皇)에게서 공이 있는 사람에게 하사되었다. [본문으로]
  6. 무가(武家)의 예복. [본문으로]
  7. 악마와 같은 소고우. 즉 악마라 불릴 정도로 맹장임을 나타낸다. [본문으로]
  8. 포루투갈의 선교사로 당시 일본에 대하여 쓴 日本史가 당시의 여러 사정을 알려주는 귀중한 사료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