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의 세상이 된 다음의 일이다. 
 어느 날,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의 거성 치쿠젠[筑前] 후쿠오카 성[福岡城]에서 무사들이 모여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한 무사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사무라이 대장[侍大将] 시마 사콘[島 左近]은 정말 무서웠지. 지금도 눈 앞에 있는 듯 생생하게 기억난다니까”고 몸서리치며 말하자, 그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자기들도 그러하다며 수긍하였다. 
 그러나 그 시마 사콘이 당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각자의 기억들이 달라 서로 맞지가 않았다. 그래서 마침 쿠로다 가문에 있던 미츠나리의 옛 가신(家臣)이었던 사람을 불러다 물어보았다. 그 가신의 말에 따르면 투구의 앞장식[立物]은 삼 척(尺)[각주:1] 정도 되는 텐츠키[天衝]를 붙이고, 갑옷은 옻칠을 한 가죽 몸통갑옷[溜塗り桶革胴], 연황색 목면의 전포[陣羽織]를 입고 있었다고 한다.(링크:당시 시마 사콘이 입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갑옷 - 위에서 두 번째 것이 시마 사콘의 갑옷
 이것을 듣고 모여있던 쿠로다 가문의 무사들은, “보통 그렇게 눈에 띄는 모습을 하고 있으면 잊지 못할 터인데… 더군다나 우리 쿠로다 가문은 이시다 가문과 정면으로 맞붙어 싸웠잖아. 정말 그렇게 가까이서 사콘을 보았으면서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니, 우리는 정말 당황했었나 보군, 정말 쪽 팔린 일이로세”하고 개탄하였다. 그래도 그 중 하나가, “아니지. 그렇게 온몸의 털이 다 설 정도로 공포에 떨었으며, 자칫하면 우리들 목도 사콘의 창에 꿰였을 수도 있을 터인데, 기억이 안 난다고 하더라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시마 사콘 – ‘미츠나리에게 과분한 것이 두 개 있으니, 시마 사콘과 사와야마의 성[佐和山城]’이라 일컬었을 정도의 무장이지만, 그의 이력은 확실하지 않다. 일설에 따르면 처음엔 야마토[大和]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의 성주 츠츠이 쥰케이[筒井 順慶]를 섬기었으며, 쥰케이의 가신 마츠쿠라 우콘[松倉 右近]과 쌍벽을 이루며 ‘우콘-사콘’이라 칭해진 전술가(戰術家)였다. 후에 낭인이 되어 오우미[近江] 타카미야[高宮]에 은거하고 있을 때, 사콘의 장재(將材)를 높이 산 이시다 미츠나리의 거듭된 부탁에 꺾여 미츠나리를 섬겼다. 그때 미츠나리는 4만석의 소령(所領) 중 반분 가까운 1만5천석을 사콘에게 주었다고 한다.[각주:2]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도 이런 사콘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기에, 히데요시[秀吉]가 죽은 뒤 미츠나리와 사이가 나빠지자, 검술사범 야규우 무네노리[柳生 宗矩]를 사콘에게 파견하여 사콘의 뱃속을 살피게 하였다. 무네노리와 사콘은 동향 출신이었으며, 또한 무네노리 역시 츠츠이 가문[筒井家]을 섬긴 적이 있어 사콘과 친분이 있었던 것 같다.[각주:3] 
 잠시 잡담을 나눈 후 무네노리는 사콘에게 천하의 향방이 어찌될 것 같은지에 대해 물었다. 사콘은 웃으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지금은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처럼 지모와 결단력 있는 인물이 없기에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는 자신의 주군 이시다 미츠나리가 지모는 있어도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돌려서 말한 것이다. 사실 사콘은 몇 번이나 미츠나리에게 중대한 결단을 촉구했으며, 그럴 때마다 각하 당했다.

 미츠나리가 무공파 칠장[각주:4]에게 공격받아 이에야스의 중재로 사와야마에 은퇴하게 되었을 때, 사콘은 일전불사를 주장하며 이런 작전을 세웠다. “사와야마를 1천의 병사로 수비하고, 2천의 병사를 거느리고 후시미[伏見]의 성 밑 마을[城下町]에 불을 질러 혼란을 일으키고 그 틈에 이에야스를 죽여버립시다.”고 진언하였다. 미츠나리는 때가 아니라며 그 책략을 쓰지 않았다. 또한 이 이후 이에야스가 아이즈의 우에스기 정벌[上杉征伐]에 향하던 도중 오우미[近江] 미나구치[水口]에 머문다는 정보가 들어왔을 때도 사콘은 야습을 진언했지만 미츠나리는, “그에 대해서는 미나구치 성주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에게 맡겨두었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1600년 9월 14일 세키가하라 결전의 하루 전. 아이즈 정벌군을 회군한 동군(東軍)의 총수 이에야스가 미노[美濃] 아카사카[赤坂]에 도착하자, 오오가키[大垣]에 있던 서군(西軍)은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다. 이때 사콘은 아군의 사기를 여기서 높이지 않으면 단번에 무너질 것이라 보고, 500 정도의 병사를 이끌고 오오가키와 아카사카 사이에 흐르는 쿠이세 강[杭瀬川]까지 진출하여 동군의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 一氏], 아리마 토요우지[有馬 豊氏]의 군을 유인해서는 쳐부수어 서군의 사기를 높였다. 이어서 그날 밤 작전회의에서 야습을 진언했지만 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콘은 자신의 진소(陣所)에 돌아가서는 가신들을 모아, 가신들의 목숨을 자신에게 맡기라고 전했다 한다.

시마 사콘[島 左近]
이름은 키요오키[清興]. 일반적으로 카츠타케[勝猛]가 유명하다. 츠츠이 가문[筒井家] 다음에는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의 아들[각주:5] 히데야스[秀保]도 섬긴 적이 있다고 한다.

  1. 약 91cm. [본문으로]
  2. 미츠나리가 미나구치 성[水口城] 4만석일 때 이러했다고는 하나, 미츠나리는 미나구치 성의 성주가 된 적이 없었으며, 시마 사콘은 미츠나리가 사와야마 성[佐和山城] 19만석의 영주일 때 얻었다는 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본문으로]
  3. 거기에 더해 사콘의 딸은 무네노리의 조카이며 후에 오와리 야규우[尾張柳生]의 시조인 야규우 토시토시[柳生 利厳]의 부인이다. [본문으로]
  4. 일반적으로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를 말한다[関原始末記], [徳川実記]. 다만 그 인물 구성은 기록마다 틀려 '전국무장의 말년과 최후 - 토요토미 히데요시 편'에 잠깐 이름이 나온 이타자카 보쿠사이[板坂 卜斎]의 메모[板坂卜斎覚書]에는 이케다 테루마사가 빠지고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가 있으며, 미츠나리를 습격한 무장 일곱명에게 보낸 편지인 [윤3월5일자 이에야스의 편지(閏三月五日付家康書状)의 수신인은 이케다 테루마사, 카토우 요시아키가 빠지고 대신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 家正],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가 포함되어 있다. [본문으로]
  5. 양자. [본문으로]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가장 비밀스런 모의를 할 때 상담을 나누던 모신(謀臣)이다. 이에야스는 마사노부를 아예 친구와 같이 대했다 한다.

 “백성의 재산을 남지도 않게 부족하지도 않게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
 는 말로 유명한 [본좌록[本佐[각주:1]]은 마사노부가 썼다고 한다.[각주:2]

 사츠마[薩摩]의 시마즈 이에히사[島津 家久[각주:3]]가 부친 요시히로[義弘]에게 보낸 편지에,
“이에야스 님은 정치에 관해 사슈우[佐州=마사노부]하고만 상담을 나누는 것 같이 보입니다”
라고 쓴 것을 보아도 마사노부가 이에야스 정권에서 중추적인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던 듯 하다.

 이에야스가 살아있을 때 이런 말이 유행했다 한다.
 “카리 님, 사도 님, 오로쿠 님[雁殿、佐渡殿、お六殿]”라는 말로, 카리 님은 매사냥을 말하며[각주:4], 오로쿠 님은 측실 중 한 명[각주:5] 그리고 사도 님은 마사노부를 이른다.
 이렇게 이에야스에게 두터운 신뢰를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사노부는 불과 2만2천석의 영지를 받는 것에 만족하였다. 미움 받기 쉬운 자신의 존재를 잘 이해하고 있어 많은 영지를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사서에 따르면 마사노부의 용모는 매독으로 인하여 피부가 떨어져 나가 어금니가 보일 정도로 심했다 한다.

 마사노부는 하급무사로 매조련사[ 출신이라고 한다. 1563년 미카와[三河]에서 봉기한 잇코우잇키[一向一揆][각주:6]는 이에야스에게 처음으로 찾아 온 시련이었는데, 마사노부는 이 잇코우잇키 군의 참모가 되어 이에야스에게 반항하였다.
 반란군 측과 토쿠가와 가문[徳川家]과의 사이에 화의가 맺어지자 마사노부는 쿄우토[京都]로 탈출, 일시적으로 마츠나가 단죠우 히사히데[松永 弾正 久秀] 밑에서 지냈다.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를 살해한 이 효웅도 마사노부를 보고 “평범한 인물이 아니다”며 기량을 인정했다 한다. 그 후 마사노부는 카가[加賀], 에치고[越後]를 유랑한 후 유명한 오오쿠보 히코자에몬[大久保 彦左衛門[각주:7]]의 형이며, 이에야스의 중신인 오오쿠보 타다요[大久保 忠世]의 추천으로 다시 토쿠가와 가문에 복귀할 수 있었다고 한다.[각주:8]

 전쟁터에서의 활약 같은 것은 마사노부에게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마사노부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타케다 가문[武田家]이 멸망하면서 부터로, 당시는 외교관적인 자리에서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리고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이 일어나기 전날 밤부터 오오사카 농성전[大坂の陣]에 걸쳐 마사노부의 모략적인 재능은 풀가동하게 된다. 이에야스가 천하를 손에 넣느냐 마느냐 하는 중대한 시기였다.

 히데요시[秀吉]가 죽자, 그때까지 히데요시의 측근 행정관으로서 권세를 떨쳐왔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를 미워하고 있던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등 무공파의 면면들이 결국 미츠나리를 없애기 위하여 움직였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미츠나리를 구했다. 이것도 마사노부의 헌책이었다.
 “미츠나리를 살려두면 타이코우[太閤[각주:9]]에게 은혜를 느끼고 있는 다이묘우[大名]도 미츠나리를 너무 원망하는 나머지 언젠가 토쿠가와 편을 들 것입니다”
 하고 이에야스에게 진언하였다.

 오오사카 농성전에서도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을 멸망으로 이끄는 스토리는 거의 마사노부 혼자서 쓴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겨울에 일어난 농성전[大坂冬の陣] 강화 조건으로써 오오사카 성[大坂城]의 외측 해자를 메우게 되었는데, 토쿠가와 측은 세 번째 성곽[三の丸]뿐만 아니라 내측인 두 번째 성곽[二の丸]까지 마구 메워버린 것이다. 토요토미 측이 몇 번이나 항의하였지만 공사 책임자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마사노부의 아들]의 답변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회피하여 전혀 진전이 없었다. 참다 못한 요도도노[淀殿]가 쿄우토의 마사노부에게 사자를 파견하자, 마사노부는 오오고쇼[大御所[각주:10]]가 감기에 걸려 있으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며 답변을 회피하였다. 더구나 그 후에는 자신이 감기 걸렸다며 역시 답변을 회피하였다. 그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오오사카 성의 내측 해자도 전부 메워 버렸다. 마사노부는 적당한 때를 살펴 오오사카 성으로 향했다.
 이때 마사노부의 말이 기발했다. 메워진 내측 해자를 보고,
 “이런 기괴한 일이 다 있나”
 고 말하며 공사 책임자인 자기 아들 마사즈미의 죄가 가볍지 않다며 화를 낸 것이다. 철저한 오리발 작전으로 오오사카 측을 가지고 논 것이다.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
1538년생. 1590년 사가미[相模] 타마나와[玉縄] 2만2천석.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의 노중(老中)이 된다.[각주:11] 1616년 6월 죽다. 59세.

  1. 마사노부의 성 혼다[本多]의 앞 글자 本과 관도명 사도노카미[佐渡守]의 佐를 따서 만든 것으로, 이렇게 앞 글자씩을 따와 두글자로 상대를 부르는 것을 카타묘우지[片名字 혹은 片苗字]라 부르며 상대에게 경의를 표할 때 쓴다고 한다. [본문으로]
  2. 2대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의 물음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정치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관해 7개조로 쓴 책이라 한다. 혼다 마사노부가 쓴 것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당시 유명한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카[藤原 惺窩]가 작성했다고 전해지는 가명성리(仮名性理)라는 책과 거의 같은 내용이라, 손을 댄 후 마사노부의 이름을 사칭해서 나온 책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3. 사츠마 번[薩摩藩] 초대 번주이자 요시히로[義弘]의 아들인 시마즈 타다츠네[島津 忠恒]를 말한다. 처음엔 타다츠네 였으나 1606년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이름 한 글자를 하사 받아 이에히사[家久]로 개명. [본문으로]
  4. 사냥을 뜻 하는 狩り와 기러기를 의미하는 雁는 둘 다 발음이 '카리'이다. 이에야스는 매사냥의 장점으로 하루 종일 사냥하느라 뛰어다니면 배가 고파져 식사도 더 맛있어 지고 밤에는 피곤하기에 일찍 잘 수 있어 자연스레 빠구리도 안 할 수 있기에 건강에 좋다고 말했다 한다. [본문으로]
  5. 이에야스 측실 중 가장 똑똑했다는 에이쇼우인[英勝院 - 여담으로 만화 '영무자 이에야스'의 여주인공 같은 역으로 나왔다]의 하녀 같은 존재였으나, 이에야스의 눈에 들어 그의 측실이 되었다. 이에야스가 죽은 뒤에 칸토우 쿠보우[関東公方]의 한 갈래인 오유미 쿠보우[小弓 公方]의 피를 잇는 아시카가 요시치카[足利 義親]에게 시집간다. 29살에 닛코우에 있는 이에야스의 묘소[日光東照宮]에 참배하여 분향하였을 때 향로가 터져 파편에 맞고 죽었다고 한다. 에도 쇼우군 가문의 여성들을 다룬 '막부조윤전[幕府祚胤伝]'이라는 책에 따르면, 당시로서는 당연시 되던 남편 죽은 뒤 머리 밀고 비구니가 되는 일 없이 미모를 너무 뽐냈기 때문이 아닌가? 라고 쓰여 있다. [본문으로]
  6. 혼간지[本願寺] 문도들을 바탕으로 한 그 지역 무사, 농민들의 종교 반란. [본문으로]
  7. 오오쿠보 타다타카[大久保 忠教]. 토쿠가와 가문이 천하를 손에 넣는데 큰 공적을 세운 무공파들보다 신참이며 주판알 잘 굴리는 문치파들을 중용하는 체제를 비판하며 토쿠가와 가문이 걸어온 길과 자기 오오쿠보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설파한 미카와모노가타리[三河物語]를 써서, 당시 문치파에 밀려 불만 많던 무공파 가신들의 지지를 얻었다. [본문으로]
  8. 관정중수제가보[寛政重修諸家譜]에 따르면 7년 뒤,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의 번한보[藩翰譜]에 따르면 19년 뒤에 토쿠가와 가문으로 되돌아 왔다고 한다. [본문으로]
  9. 타이코우란 칸파쿠[関白]자리를 자기 자식에게 물려준 사람에 대한 경칭. 즉 여기서는 히데요시를 말함. [본문으로]
  10. 에도 시대에는 살아서 쇼우군[将軍] 자리에서 은퇴한 전 쇼우군을 지칭. 즉 여기서는 이에야스를 말한다. [본문으로]
  11. 아들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는 이에야스의 측근으로 이에야스의 곁에 있었기에 이에야스의 의향을 히데타다에게 전하는(강요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듯 하다. [본문으로]

 눈치보기의 대명사 '호라가토우게 고개[洞ヶ峠]'라는 에피소드[각주:1]로 유명한 쥰케이[順慶]는 원래 불문(佛門) 출신이다. 유식론(唯識論 – 법상종(法相宗)의 중요한 경전))에 정통하고 와카[和歌]나 다도(茶道)에도 능한 문화인이었다.

 언제나 성성이의 가죽을 테두리로 한 두건을 쓰고, 금으로 수를 놓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부적주머니를 비스듬히 어깨에 걸치고 전쟁터로 향했다고 한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야마토[大和] 코우후쿠 사[興福寺]의 승병대장을 맡아온 호족이었다. 야마토에는 츠츠이 가문 외에도 오치[越智], 토이치[十市], 와카오[若尾] 등의 승병대장이 있어 츠츠이를 포함하여 '사인방(四人衆)'이라 일컬어졌는데 츠츠이의 세력이 가장 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비호아래 야마토[大和]를 지배하게 된다.

 '호라가토우게 고개'라는 에피소드는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오다 노부나가를 쓰러뜨린 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 야마자키[山崎]에서 싸웠을 때 생긴 말이다. 일반적으로 유포된 이야기에는 이때 츠츠이 쥰케이가 호라가토우게 고개에 올라가 아케치와 하시바의 싸움을 방관하다가 하시바 측이 명백히 유리해진 것을 확인하고 난 뒤 그제서야 아케치를 공격했다는 내용이다. 진상은 이것과 꽤나 다르다. 호라가토우게 고개에 오른 것은 아케치 미츠히데 쪽이었던 것이다.

 아케치 미츠히데가 노부나가에게 모반을 일으킨 것은 1582년 6월 2일이었다.
 노부나가에게 히데요시의
츄우고쿠[中
国] 공략에 원군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은 직후의 거병이었다. 이 당시 쥰케이는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등과 함께 미츠히데 휘하 다이묘우[大名]로 츄우고쿠로 출진하기 위해 거성(居城) 야마토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에서 출진하여 쿄우토[京都]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 도중 혼노우사의 변보를 접한 것이다.

 쥰케이의 입장은 미묘했다. 단순한 아케치 휘하 다이묘우가 아니었다. 친족관계였던 것이다. 미츠히데의 넷째 아들은 쥰케이의 양자로 들어와 있었다[각주:2]. 거기에 미츠히데는 츠츠이 가문[筒井家]의 은인이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에게 빼앗겼던 야마토의 츠츠이 가문 영지(領地)를, 노부나가가 마츠나가를 정벌한 후에 미츠히데가 잘 말해주어서 영지(領地)를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각주:3]

 그런 것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고 있던 쥰케이는 당초 미츠히데가 모반을 일으키자 미츠히데 측에 붙어있었다. 오다 노부타카[織田 信孝 – 노부나가의 셋째]의 출병요청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고, 야마시로[山城] 마키노시마[槇島] 성주 이도 요시히로[井戸 良弘][각주:4]와 함께 병사의 일부를 떼내어 아케치의 오우미[近江] 평정에 참가시켰다. 그러나 쥰케이 자신은 코오리야마 성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이 시점부터 쥰케이의 행동은 미묘하게 변해간다. 미츠히데의 요청을 받고 카와치[河内]에 출진할 예정이었던 것을 취소시키고 더구나 성 안에 식량을 쌓기 시작한 것이다.
'히데요시가 미츠히데를 벌하기 위해서 산요우
[山陽]를 맹렬히 올라오고 있다 – '
 쥰케이에게는 이미 이 정보가 들어간 듯 했다.

 6월 10일.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상경한 히데요시의 군세는 이제 쿄우토의 코앞이라고 할 수 있는 효우고
[兵庫][각주:5]까지 와 있었다. 미츠히데는 이 너무도 빠른 움직임에 앙천했다. 이제 인기가 떨어진 아케치 세력은 1만 수천밖에 없었다. 쥰케이의 가세가 절실했다.

 미츠히데는 쿄우토를 나와 야마자키 하치만[山崎八幡]에 있는 구릉의 일각인 호라가토우게 고개에 진을 쳤다. 이 고개는 눈 아래로 쿄우토-오오사카[大坂] 간의 평야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요충지였다. 야마토 코오리야마까지는 약 20여km. 미츠히데는 "가세하지 않으면 코오리야마를 공격하겠다"고까지 말하여 쥰케이에게 엄포를 놓았지만 쥰케이는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았다.
 미츠히데는 계속 기다렸지만 이때 쥰케이는 이미 히데요시와 서약서를 교환한 상태였던 것이다. 쥰케이의 조심스러움은 그래도 여전히 눈치를 보는 태도를 유지하게 만들어 14일이 되어 그제서야 코오리야마 성을 나온 것이다. 이때 미츠히데는 이미 오구루스[
小栗栖] 마을에서 그곳 백성들에게 살해당한 뒤였다.

 쥰케이는 1천의 병사를 이끌고 타이고[醍醐]에 있는 히데요시의 진영으로 가서 승리를 축하하였다. 히데요시는 그렇게 눈치를 본 태도를 책망하였지만 그대로 용서했다고 한다. 쥰케이는 이때 히데요시의 마음을 풀기 위해서 츠츠이즈츠[筒井筒]라는 이름 높은 고려차완(高麗茶碗)을 헌상하였다고 한다.

[쓰쓰이 준케이(筒井 順慶)]
1549년 생. 대대로 코우후쿠 사[
興福寺]의 중도(衆徒)로, 환속한 후에 후지시로우 후지마사[藤四郎 藤政]라는 이름을 칭했다. 1559년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에게 츠츠이 성[筒井城]에서 쫓겨나지만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도움으로 영지(領地)를 회복하고 야마토[大和]를 영유하게 된다. 1584년 죽었다. 36세.

  1. 관용어로 "洞ヶ峠を決め込む"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기회를 엿보다"는 뜻이다. [본문으로]
  2. 그런 이야기가 오고 갔다고 하나[호소카와 가문 기록[細川家記]] 결국 실현까진 이르지 못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야마토[大和]는 무로마치 시대에도 막부가 슈고[守護]를 두지 않았던 유일한 곳으로, 이곳은 코우후쿠 사[興福寺]의 왕국이라고 할 정도로 코우후쿠 사의 영향력이 굉장히 강한 곳이었다. 노부나가도 처음엔 자신이 키웠다고 할 인재 중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이고 있던 반 나오마사[塙 直政]에게 야마토를 지배하게 하나, 나오마사가 전사하자, 야마토에서 가장 세력이 크고 노부나가를 성심성의껏 섬기던 코우후쿠 사의 승병 출신인 쥰케이를 야마토의 지배자로 임명한 것이다. 이는 노부나가의 판단이었지 결코 미츠히데 덕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본문으로]
  4. 그는 부인은 쥰케이의 딸이다. [본문으로]
  5. 코우베[神戸]의 옛 이름. [본문으로]

<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일본판 >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난세를 위해서 태어난 듯한 인간이다. 출신이 수수께끼이며 더불어 악역무도(惡逆無道)의 전형적인 인물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1570 4.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의 니죠우(二条) 어소(御所)에서 성대한 사루가쿠(猿楽)의 공연이 행해졌을 때였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에게 한 사람의 노장(老將)을 소개했다. 그것이 마츠나가 히사히데였다.

 이 분은 보통의 인간으로써는 절대 할 수 없는 짓을 세 번이나 하였지. 우선 주가(主家)인 미요시(三好) 가문을 멸망시킨 것, 다음으로는 쇼우군()을 살해하였고 거기에 나라(奈良)의 대불전(大佛殿)을 불태워 버렸다

 노부나가의 거리낌 없는 막말에 주변은 일순 긴장했다고 하는데 이 말에는 히사히데가 걸어온 길이 축약돼 있다.

 그러나 [분별(分別), 재각(才覺)은 남들보다 뛰어났으며 무용(武勇)은 무쌍(無雙)하며 또한 굉장히 욕심이 많았다]는 동시대 사람의 평도 있다.

 

 근세 성곽 건축의 선구자로써도 이름이 높다.

 1567년에 쌓은 나라(奈良)타몬야마(多聞山)성(城)은 외국인 선교사도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 정도로 웅장하고 화려했다. 근세 성곽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흰 벽에 주택 형식의 타몬야구라(多聞櫓[각주:1])는 히사히데의 타몬야마 성에서 처음 만들어졌기에 그런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성 안에는 아름다운 색으로 칠해진 벽화가 있는 호화로운 쇼인(書院[각주:2])도 있었다고 한다.

 

 히사히데의 주인 미요시 쵸우케이(三好 長慶)도 또한 난세의 인물로, 주가인 호소카와(細川) 가문을 하극상에 의해 제치고 올라서서는 쇼우군까지도 압도하는 실력자였는데 그 과정에서 음지에서 활약한 히사히데의 힘도 컸다. 이 시기에 쿄우토(京都) 행정관(奉行)으로써 힘을 기른 것이 나중에 도움이 되었다. 이 즈음 쵸우케이의 장남 요시오키(義興)가 병사하였는데 이는 히사히데의 독살에 의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 쵸우케이가 죽자 히사히데의 마음 속에 쇼우군() 타도의 음모가 싹을 틔었다. 미요시 삼인중(三好三人衆)이라 불리는 미요시 가문의 중신들에게 쇼우군 요시테루(義輝)가 미요시 가문 토벌을 꾀하고 있다고 하여 불안을 조장시켰다. 쵸우케이의 양자(養子) 요시츠구([각주:3])를 지키자는 것이, 히사히데가 미요시 삼인중에게 불어 넣은 대의명분이었다.

 이리하여 미요시-마츠나가의 군세는 1565 5 19일 쇼우군 어소를 습격한 것이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히사히데는 이 쇼우군 암살을 함께 했던 미요시 삼인중과 사이가 틀어지는 바람에 쫓겨나 사카이() 도망친다. 히사히데는 예전에 이곳의 대관(代官) 적이 있었으며, 이곳의 대표자들인 나야(納屋)()과도 교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히사히데는 사카이 나야중에 도움을 받아 재기할 있었고 곧이어 야마토(大和)에서 미요시의 군세를 쳐부수었다. 토우다이(東大)() 대불전을 불태운 것은 시기의 일이다.

 

 이로써 14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히데(足利 ) 후견인으로써 위세를 떨치게 되지만 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오다 노부나가로 인해 종지부가 찍힌다.

 다음 해인 1568.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입경한 것이다. 히사히데는 싸워보았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노부나가에게 항복한다. 그러나 히사히데는 속으로 계속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부나가가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 공격에 애를 먹게 되자 히사히데는 갑자기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혼간지 측이 츄우고쿠() 모우리(毛利) 카이(甲斐) 타케다(武田), 에치고(越後) 우에스기(上杉)와도 연락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자 대놓고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것이다.

 히사히데는 거성(居城) 시기산(信貴山)()에서 병사를 일으켰다. 성도 일본 텐슈(天守) 시조라 일컬어지는 근세형의 성곽이었다.

 하지만 시대의 패자(覇者) 노부나가의 기세에는 대항하지 못하였고 노부나가 휘하의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 츠츠이 쥰케이(筒井 順慶)의 군세에 패배를 당한다.

 

 그 낙성에 관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에 빠져있던 노부나가가 탐내던 천하의 명기 [히라구모의 차 솥(平蜘蛛茶釜[각주:4]]을 손수 깨 부수고 성에 불을 질러 자인했다는 것과 또한 막 낙성이 되기 직전에 평소 앓고 있던 중풍때문에 머리에 뜸을 떴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렇게 되었는데도 또 목숨이 아까워서 그러냐는 부하에게 자인을 하게 되었을 때 행여라도 중풍이 발작되어 몸을 못 움직이는 것을 남들이 배 가르는 것이 두려워서 꾀병을 부린다고 할 것 같아 미리 방지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히사히데다운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일화이다.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

미요시 쵸우케이의 유우히츠(右筆[각주:5])에서 입신 출세하였다. 쵸우케이의 대리인으로써 쿄우토(京都)에 머물며 여러가지 일을 처리했다. 기독교의 교회를 파괴하였으며 토우다이(東大)()의 대불전을 불태웠다. 1577 9 10일 야마토 시기산 성()에서 자해.

  1. 링크는 후쿠오카(福岡)성(城)의 것. [본문으로]
  2. 무가(武家)에서는 손님 접대나 여러 행사를 치르는 건물을 지칭한다고 한다. [본문으로]
  3. 부친은 쵸우케이의 동생으로, 무용이 뛰어나 ‘오니소고우(鬼十河)’라는 이명을 가졌던 소고우 카즈나가(十河 一存)이다. [본문으로]
  4. 구모(蜘蛛)는 일본어로 거미를 말한다. 거미가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平) 모습이라 이런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5. 문서, 기록 담당관. [본문으로]

 미요시 쵸우케이는 당시의 쇼우군() 부자를 쿄우()에서 추방하는 등 킨키(近畿) No.1의 실력자로 올라섰지만 음모가(陰謀家)라기 보다는 오히려 섬세한 문화인(文化人)이었다.


 고전(古典)을 즐기고 와카(和歌)렌가(連歌)를 읊으며, 다인(茶人)들과 함께하는 풍아(風雅)한 면이 있었다. ()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다이린소우토우(大林宗套) 화상(和尙)에게 지도를 받았다. 특히 사카이()의 호상(豪商)들과는 다도(茶道)와 선()을 매개로 하여 강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에도 깊은 이해를 가졌다고 한다.


 렌가의 자리에서는 마치 신이 들린 듯이 굉장히 신비로운 태도로 일관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쥘부채(扇子)를 이용하거나 할 때도 예법에 한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왼손으로 거들어 오른손으로 조용히 펼치고 접어서 놓을 때는 원래 있던 곳에서 한치도 어긋나지 않게 놓았다고 한다. 범상치 않을 정도로 세세한 신경의 소유자였다.


 당시 가톨릭 포교자의 눈에는 일본의 지배층이 다음과 같이 비쳐졌다고 한다.

수도의 통치는 삼 인이 행한다.

1의 사람은 쿤보우사마(=쿠보우(公方),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라고 일컬어지는 일본 전국의 왕.

2의 사람은 미요신도노(=미요시 쵸우케이)’라고 하는 쿤보우사마의 신하.

3의 사람은 마스만가(=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라고 하는 미요신도노의 신하이다….

 이런 정도의 실력자이면서 쵸우케이는 관위(官位)를 바라지 않고 종사위(從四位) 슈리노다이부(修理大夫)에 머물렀으며 바쿠후(幕府)에서의 역직(役職)도 쇼우반슈우(相伴衆 바쿠후의 중신)에 만족했다고 한다.


 미요시 가문의 가계(家系)는 원래 아와(阿波) 슈고(守護) 호소카와 씨(細川)의 지배하에 있는 일개 토호(土豪)에 지나지 않았다. 증조부 유키나가(之長)의 대()부터 일약 쿄우토(京都)의 중앙 정계에 등장하는데, 이후 피로 점철된 3대의 역사였다. 3대는 전부 이불 위에서 죽지 못했다.


 부친 모토나가(元長)의 마지막은 무시무시하다.

 모토나가는 12대 쇼우군 요시하루(義晴[각주:1])를 받들고 있던 호소카와 타카쿠니(細川 高)에 대항하여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 晴元)와 함께 요시하루의 배다른 형제인 요시츠나(義維[각주:2])를 내세워 싸움을 계속하였지만 후에 하루모토에게 버림받아 사카이의 켄폰(本)사(寺)에서 자살을 강요 당했다. 이 때 모토나가는 너무도 분한 나머지 자기 손으로 장()을 끄집어 내어 천장에 던져 죽었다고 한다.
 
이 때 쵸우케이 불과 10. 은밀히 복수의 칼날을 가며 성인이 되었다.


 1542.
 
드디어 그 기회가 찾아온다.
시코쿠()에 내려가 아와지(淡路), 아와(阿波)의 병사들을 동원해서 다시 되돌아 와서는 키자와 나가마사( 長政)카와치()에서 죽이고 이어서 하루모토의 부하이며 같은 일족인 미요시 마사나가(三好 政長)셋츠()에서 전사시켰다.

(이에 대해서는 초코벌레님의 이 곳을 함 가보시길……

호소카와 미요시의 싸움(http://blog.naver.com/chocoworm/30006940287))


 쵸우케이의 무위(武威)는 이제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각지의 토호가 앞다투어 쵸우케이 밑으로 모여들었다. 쵸우케이의 킨키(近畿) 제압에 맞추어 시코쿠()에서는 동생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미요시 유키야스(之康[각주:3]), 소고우 카즈나가(十河 一存[각주:4]), 아다카(아타기) 후유야스(安宅 冬康)의 세 명이다.


 이 일족은 아와(阿波), 사누키()세토 내해(瀬戸内)에 세력을 확대했다.

 이리하여 미요시 가문의 하인이나 하인이라 할지라도 팔꿈치를 펴고 어깨를 흔들거리며 쿄우()의 대로를거들먹거리며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쵸우케이에게는 권력자로써의 비정함이 결여되어 있었다. 자신을 암살하려고 한 호소카와 하루모토를 용서하는 등 문화인적인 허술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허술함에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파고든다.

 1562. 적자 요시오키(義興)가 급사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독살이라고들 한다. 이 적자의 죽음을 시작으로 쵸우케이는 갑자기 소극적이 되어 히사히데의 참언(讒言)을 믿고 동생 후유야스까지 죽여버리고 만다. 그리고 얼마 후 쵸우케이도 죽었다.


 그 장례식 광경을 쿄우토(京都) 쇼우코쿠()사(寺)의 중 사이쇼우 쇼우(죠우)타이(西笑 承兌)가 그의 일기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 목메어 울었고 한탄하며 슬퍼했다. 쵸우케이가 생전에 베푼 은혜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고 기록하였다.


[미요시 쵸우케이(三好 長慶)]

1522년생. 어렸을 때의 이름은 센쿠마마루(千熊丸-'치쿠마마루'라고도 읽는다), 후에 노리나가(範長). 칸레이(管領) 호소카와 하루모토의 집사(執事)가 되어, 이즈미(和泉), 카와치()를 대관(代官)이라는 형식으로 지배. 쿄우토(京都)의 병권을 잡자 그 세력은 킨키(近畿), 시코쿠() 8개국에 이르렀다. 1564년 죽었다. 43.


Ps; 長慶나가요시로 읽으나, 이 책은 존중해서 이름을 읽어주는 유우소쿠요미(有職)’쵸우케이로 쓰여있기에 계속 쵸우케이로 하였다.

  1. 검호 쇼우군 13대 요시테루의 부친. [본문으로]
  2. 그의 아들인 요시히데(義栄)는, 검호 13대 쇼우군 요시테루가 죽자 마츠나가 히사히데에게 옹립되어 14대 쇼우군이 된다. [본문으로]
  3. 요시카타(義賢)를 말한다. [본문으로]
  4. 카즈’나가’는 카즈’마사’라고도 읽는다고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