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나 모리우지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4. 11. 16. 09:33 Posted by 발해지랑

아시나 모리우지(盧名 盛氏)

1580 6 17 병사(病死) 60.

(그림은 KOEI의 천하창세)


1521 ~ 1580년.

므츠(陸奧)() 아이즈(会津) 쿠로카와(黒川)성주. 아시나(盧名) 16대 당주(当主).

다테(伊達), 유우키(結城)씨와 혼인관계를 맺고 주변의 호족과 무장을 복속시켜 아시나씨 전성기를 이끌었다. 한 번 은퇴하였지만 후계자인 적자 모리오키(盛興)가 어린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복귀. 18대의 모리타카(盛隆)를 후견했다.


카마쿠라(鎌倉)시대 부터의 명가



 아시나(盧名)씨는 카마쿠라 막부에게 아이즈(会津) 슈고(守護)에 임명 받은 칸토우(関東) 미우라 씨(三浦氏)의 후손이다. 그 사이에 남북조 동란 이후 하극상(下剋上)의 시대를 거쳐 격동의 시대를 헤쳐 나온 일찍부터 센고쿠 다이묘우(戦囯 大名)이기도 하다. 특히 칸토우(関東), 토우호쿠(東北)는 카마쿠라 막부 붕괴의 영향을 받아 센고쿠(戦囯)의 모습을 띠는 것이 빨랐다. 그러한 곳에서 200여 년을 살아 남은 것이다.


 선조 이래 쿠로카와(黒川)를 거점으로 하여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는데 모리타카(盛高), 모리시게(盛滋)의 부자간의 싸움이 일어나 한 때 내란상태에 빠졌으나 모리시게의 동새 모리키요(盛舜) 1521년 가독을 이은 후부터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이 짧은 시간의 평화가 모리키요의 아들 모리우지(盛氏)의 커다란 비약을 가능하게 했을 지도 모르겠다.


모리우지 역사의 무대에 등장


 모리우지 자신이 영토 확장의 욕심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지금에 와서는 알 수가 없지만 아이즈(会津)슈고(守護)라는 직책에 앉아 있는 이상 주변 영토 다툼에 관여할 수 밖에 없었다. 슈고로써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권익이라는 것이 있다. 1543(천문 11) 원래는 가신의 위치에 있던 야마노우치 키요미치(山內 舜通)에치고(越後)의 나가오 타메카게(長尾 為景)와 손잡고 아시나의 군세를 궁지에 몰아 넣었다. 이 당시 충분히 힘을 기르고 있던 모리우지가 스스로 병사를 이끌고 이들을 철저히 응징했다. 에치고가 배후에 있다는 것이 아이즈의 아시나씨에 있어서는 바다로 통하는 길이 막힐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모리우지는 전형적인 센고쿠 다이묘우(戦囯 大名)의 행동을 취해 역대 아시나씨의 지배 영역을 훨씬 넘어서 영토를 넓히고, 외척인 시라카와(白川) 유우키(結城), 스카가와(須賀川)의 니카이도우(二階堂), 니혼마츠(二本松)의 하타케야마(畠山), 타무라군(田村郡)의 타무라(田村)씨까지도 신종 시켰다고 한다. 이 시기의 지배영역은 아시나씨의 긴 역사 속에서도 최대의 규모에 달했다고 한다.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이 죽은 후, 에치고의 [오타테(御館)의 난[각주:1]]의 틈을 타서, 오가와(小川)의 오다기리(小田切)씨 영토 주변을 탈취, 영토를 확대하였다. 이렇게 지배영역의 확대에 성공한 모리우지는 북쪽으로는 다테(伊達)씨와, 남쪽으로는 사타케(佐竹)씨와의 접촉이 늘어만 갔다. 특히 사타케씨와의 관계는 잠시도 방심할 수 없을 정도로 되어 간다.


생각처럼 되어가지 않는 말년.


 1568년 즈음 모리우지는 [止止斎=시시사이]라는 호를 칭한다. 쿠로카와성을 세자인 모리오키(盛興)에게 물려주고 새로이 은거할 성으로 만든 오오누마 군(大沼)에 있는 이와사키(岩﨑)성에 은거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모리오키는 병에 자주 걸리는 몸인 듯, 그 후에도 모리우지는 이와사키성에 있으면서 모리오키의 정무(政務)를 도와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1574년. 결국 모리오키는 부친보다 먼저 병에 쓰러진다. 향년 26세라 추정된다.


 모리우지는 서둘러 모리오키의 부인(다테 하루무네(伊達 晴宗)의 딸)을 양녀로 삼아, 니카이도우(二階堂)씨의 모리타카(盛隆)를 사위로써 받아 들이기로 한다. 모리타카는 니카이도우씨의 인질로써 모리우지가 어렸을 때부터 교육시켜 온 인물로써 우선 안심할 수 있기는 했지만 모리우지는 이와사키 성을 나와 쿠로카와 성으로 돌아와 어린 모리타카의 정무(政務)를 감독하게 되었다. 그렇게 함과 동시에 정무의 방침도 그 때까지와는 약간 바뀌었다. 그 때까지는 니카이도우씨와 시라카와(白川)의 유우키(結城)씨와 협력해서 북상하는 사타케씨와 대결하는 자세를 견지해 왔지만 1577년 즈음부터는 양 씨를 설득해서 사타케씨와의 협조노선을 펴게 된다.


 이것에는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사후에 최대의 적이 없어진 호우죠우 우지마사(北条 氏政)가 칸토우(関東) 통일을 목표로 활발한 군사 행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

 또 하나는 같은 해 겐푸쿠(元服[각주:2])를 한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가 차츰 오슈우(奧州) 남반부 제패의 야망을 나타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히 다테-타무라(田村) 연합군의 위협에 대해서는 아시나, 사타케를 중심으로 한 니카이도우, 유우키, 이시카와(石川), 이와키(岩城)의 결속을 급속히 모으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배치를 끝낸 1580년 6월 17일. 아시나 모리우지는 쿠로카와 성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향년은 60세라 전해진다.


 물론 모리우지의 뒤를 이은 모리타카는 모리우지의 정책을 계승했다고 한다. 모리우지의 치세기(治世期)에 아시나씨의 지배영역이 최대가 되었고 지배체제도 또한 굳건해 진 것은 후계자들이 계속해서 [止止斎]라는 인감을 사용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1. 우에스기 켄신 후계자 싸움. 두 양자인 친족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와 호우죠우(北条)씨에서 온 우에스기 카게토라(上杉 景虎) 사이의 내란. [본문으로]
  2. 무장이 성인식을 치루는 것. [본문으로]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

1636 5 24 병사(病死) 70.

1567~1636

센다이(仙台) 번조(藩祖). 하타케야마 씨[畠山氏]를 물리치고 '스리아게하라(摺上原) 들판의 전투'에서 사타케[佐竹], 유우키[結城] 연합군을 격퇴. 아시나[芦名]를 멸망시켰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오다와라[小田原] 공격에 참가하지만 늦게 참진하는 바람에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게 된다. 세키가하라[関ヶ原] 전쟁에서는 동군에 가세하여 우에스기(上杉)와 싸웠다.









화려한 다테 씨(伊達氏)의 전통


 현대에서도 [다테수가타=だて姿-멋진 모습]라던가 [다테메가네=だて眼鏡-멋내기 위해 쓰는 테만 있는 안경]라는 단어는 멋을 낸다거나 화려함을 뜻하는 의미로 통용되는데 이 단어의 기원은 이외로 오래되었다고 한다.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 3대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 義滿]의 시대. 다테 모치무네[伊達 持宗]라는 오우슈우[奧州]의 호족이 일부러 쿄우토[京都]까지 상경해서는 화려하고 진기한 토산품들로 인사하고 다녔다. 이후 다테씨는 쇼우군이 바뀔 때마다 상경해서 화려하게 물품을 뿌리고 갔다.

 모치무네의 아들 나리무네[成宗]의 행동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일부를 소개해 보자면, 쇼우군[将軍] 요시히사[義向]와 전대 쇼우군[前将軍] 요시마사[義政]에게는 명마 20두 씩과 사금 백 냥 씩을 각각 받친 것 외에 쇼우군의 생모 히노 토미코[日野 富子]를 시작으로 주요한 사람들에게 총 말 95,도[刀] 28자루, 사금 380냥과 그 외의 명산품 등을 합쳐 막대한 양의 물품을 헌상했다. 그 이후로도 쇼우군이 바뀔 때마다 되풀이 되었기에 쿄우토에서 다테라고 하면 화려함의 대명사가 되어있었다.


 다테씨는 그 후에도 쇼우군의 이름 중에 한자를 받아 적자에게 히사무네[尚宗], 타네무네[稙宗], 하루무네[晴宗], 테루무네[輝宗]등으로 이름을 지어왔다. 단지 테루무네의 즈음에는 쇼우군의 권위가 떨어져서인지 마사무네에게는 다테씨 중흥의 선조 이름을 붙여주었다.


 마사무네의 젊었을 때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방불케하는 면이 있다. 모친에게 사랑받는 동생을 살해해서 영내를 통일하고 주변을 침략하여 세력을 넓혔다. 마침내 숙적 아이즈[会津]의 아시나[盧名]를 물리쳤으나 이미 중앙에선 토요토미노 히데요시가 오다와라 공격을 계획하며 천하인(天下人)가 되려 하고 있었다. 마사무네가 천하를 잡기에는 30년이나 늦었던 것이다. 마음을 정한 마사무네는 전신 백색으로 된 죽어서 입는 옷을 입고서 히데요시를 만나러 갔다. 이런 의표를 찌르는 마사무네의 행동에 히데요시는 마사무네의 결의를 읽고 늦게 참가한 것을 용서해 주었다. 그 뒤에도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인해[각주:1] 마사무네는 또 한번 백색으로 된 옷을 입고 히데요시를 만나러 가게 되었는데 이 때는 화려한 사형대를 세워 들고서는 쿄우토로 갔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가 천하를 쥔 것은 늙어서였다. 토요토미씨에게서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동안 다테 마사무네는 토우호쿠[東北] 지방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실은 이것이 이에야스와 마사무네의 연계 전략이었던 것이다. 이에야스가 서일본을 평정하기 위해서는 마사무네가 동일본 전체에서 동란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불가결했다. 이러한 전국적인 평정이 우선 이루어지자 이에야스는 안정을 위해서 무장들의 영토를 바꾸는 일에 착수한다. 당초 만석을 약속받았던 다테씨였지만 이에야스의 눈을 피해 뒤에서 행한 조그만 음모[각주:2]가 폭로되어 오우슈우[奧州] 60만여석을 받는데 그쳤다.


 그러나 그것으로 백만석의 꿈을 포기한 마사무네가 아니었다. [千代=센다이]라고 하는 숲과 습지대에 둘어쌓인 토지를 [仙台=센다이]로 이름을 바꿔서 성과 성 밑 마을의 건설을 착수했다. 동시에 1605 황무지의 토지조사[検地]를 명했다. 이 후 때때로 검지를 행해 병농지를 늘려 갔다. 거기에 키타가미[北上], 하자마[], 에아이[江合] 3대 하천에 개수를 행하고 이시노마키[石卷]에 항구를 열어 산물이 모여들게 했다. 이런 토목사업에 의해 새로운 농지 개발을 진행했을 뿐만 아니라 센다이 번[仙台藩]에서는 매미제도[買米制度]라고 하는 세금[年貢] 이외에 남은 쌀을 번[]이 사주는 독특한 시스템을 만들어 농민들의 의욕을 높였다. 이렇게 증산된 쌀은 배편으로 이시노마키 항에 모여져 에도[江戶]로 가져가 팔아 치움으로써 번의 재정을 윤택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오모테다카(表高[각주:3])는 낮았지만 실질 백만석을 달성했던 것이다.


최후의 봉공[奉公[각주:4]]과 죽음


 마사무네는 이에야스가 죽을 때 센다이에서 순푸[駿府]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바쿠후의 관료 중 일부는 '다테씨의 모반인가?'라며 긴장하는 일막도 있었다고 한다. 2대 쇼우군 히데타다[秀忠]가 죽을 때도 에도로 달려갔다. 이에야스도 히데타다도 막부의 후사를 마사무네에게 맡겼다.


 1636 2월. 70세를 맞이한 마사무네는 자신이 주최한 마지막 사냥에 모인 사람들에게 후사를 잘 부탁한다며 눈물을 섞어 가며 접대를 했다고 한다. 4월에 에도로 출사하여 3대 쇼우군 이에미츠[家光]를 알현하였는데 안색이 너무도 나쁘다고 하여 이에미츠는 의사를 파견시키는 한 편, 5 21일에는 이에미츠 자신이 병문안을 했다. 그러나 3일 후인 24일. 에도 사쿠라다 번저[桜田藩邸]에서 숨을 거두었다.

흐림 없는 마음의 달을 앞세워
세상의 어둠을 밝혀 간다.

りなきだてて
らしてぞ[각주:5]
 마사무네가 죽을 때 남긴 시이다.

  1. 카사이-오오사키 반란[葛西大崎一揆] 때 뒤에서 반란군을 책동했다는 의혹. [본문으로]
  2. 와가 타다치카[和賀 忠親]를 지원하여 이에야스 측에 선 난부[南部]씨의 영토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한 것. [본문으로]
  3. 막부에 신고 된 공식 석고(石高) [본문으로]
  4. 막부가 다이묘우에게 부과한 일. [본문으로]
  5. 정확하지 않다. 단어의 뜻에 불구하니 유념하시길. [본문으로]

다테 하루무네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4. 11. 11. 08:46 Posted by 발해지랑

다테 하루무네(伊達 晴宗)

1577 12 5 병사(病死) 59.


1519~1577.

다테(伊達)씨 제 15대 당주(当主). 동생 사네모토(実元)에치고(越後) 우에스기(上杉)()에 양자로 들어가는 문제로 부친인 타네무네(稙宗)를 유폐하여 [텐분(天文)의 난]을 일으킨다. 가중에서는 권력의 강화에 힘썼고, 외교에서는 11명의 자식들로 동북 여러 가문들과 연을 맺어 다테 씨의 지위를 높였다.






부친은 토우호쿠(東北) 호족들의 영웅.

 

 1522년.

 그 전년에 쇼우군(将軍)이 된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 義晴)는 대대로 쿄우()에 올라와 인사를 해 온 다테 타네무네에게 므츠(陸奧)국 슈고쇼쿠(守護職)의 임명서를 주었다. 타네무네는 일약 바쿠후(幕府)의 관직을 얻어 일개의 호족에서 다이묘우(大名)로 출세를 할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서 자신의 아들에게 장군의 이름 한자를 얻어 하루무네(晴宗)로 이름 짓는 것도 허락 받았다.


 원래 토우호쿠(東北)지방은 토지의 생산성이 낮아 말을 키워 헌상하는 것 외에는 산물을 받칠 수가 없었다. 헤이안(平安) 즈음부터 금()을 산출할 수 있게 된 후 후지와라(藤原) 4대의 화려한 시대가 지난 후부터 차츰 촌락이 발달해 조정의 관직도 임명 받게 되고 바쿠후(幕府)에서도 오우슈우탄다이(奧州 探題)가 설치 되었다. 탄다이의 핏줄을 잇는 오오사키(大崎), 모가미(最上)의 양 가문이 다른 슈고쇼쿠(守護職)의 후예와 함께 차츰 센코쿠 다이묘우(戦囯 大名)가 되어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다이묘우(大名)다른 지방에서 임명, 파견된 자들의 후손들이었기에 오우슈우(奧州) 지방의 토박이인 다테씨가 슈고쇼쿠를 받은 것은 전대미문의 일이었던 것이다.


 타네무네는 다테군() 외에 10개의 군()을 지배하에 두고 있었는데 이들을 통치하기 위해 [진카이슈우(塵芥集)]라는 법령집을 만들었다. 이것은 전시대인 카마쿠라(鎌倉)막부의 [어성패식목(御成敗式目)]과 똑같다고 하기에 문화적인 후진성은 부인할 수 없지만 내용은 당시 토우호쿠지방 독특한 농촌사정도 반영되어 171개조에 걸쳐 세분화되어 있다. 이렇게 군사, 정치, 경제, 재판권에 걸쳐 영지 지배의 기반을 세워 올렸다.


하루무네와 텐분의 난.


 타네무네의 명예욕은 더욱 커져 모친 쪽의 가문인 에치고(越後)의 슈고(守護) 우에스기 사다자네(上杉 定実)에게 친아들이 없자 자신의 차남 토키무네마루(時宗丸)를 양자로 보내는 공작을 하여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즈음 슈고다이(守護代) 나가오 타메카게(長尾 為景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의 부친)에게 불순한 움직임이 있어 분쟁이 진정될 때까지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1542(천문 11) 6월.

 정예병을 이끌고 에치고에 가려고 했던 타네무네를 장남 하루무네가 반대하여 갑자기 부친을 유폐해 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이 단순한 부자간의 싸움이 아니었던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 내란이 점차 근린으로 확대되어 타무라(田村), 니혼마츠(二本松), 소우마(相馬), 모가미(最上), 카사이(葛西), 오오사키(大崎), 쿠로카와(黒川), 이와키(岩城) 등의 다이묘우나 오우우(奥羽)의 여러 호족들까지 끌어 들여서는 7년에 걸쳐 싸우게 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어째서 이러한 사태가 되었느냐를 간단하게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인척관계에 의한 동맹은 일대(一代)로 끝나는 것으로 다음 세대가 되면 그대로 동맹이 이어진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것은 단지 다테씨만의 문제가 아닌 다른 곳도 비슷한 사정이었기에 결국은 세대간의 항쟁의 모습을 보여주게 된 것이다. 이렇게까지 복잡해 지면 대개혁이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하루무네(다테씨 15대 당주)는 우선 본거지를 대대에 걸쳐 지켜왔던 다테군()에서 데와(出羽) 오이타마(置賜)군의 중심지 요네자와(米沢)성으로 옮겨 다테씨가 명실공히 일신되었다는 것을 내외에 알렸다. 거기에 1553(천문 22) 1월 내란의 논공행상이라는 명목으로 영지 재편을 단행하였다. 반항했던 신하의 영지는 몰수하는 식으로 가신들의 영지를 대담하게 맞바꾸었다. 이것은 후에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가 행한 전국적인 영지 바꾸기의 소규모이지만 선행판(先行版)이라 할 수 있는 효과를 올려 일족(一族), 일가(一家), 토자마(外様)라는 가신단의 서열을 확립했다.


말년은 오우우(奥羽)지배의 포석


 영내의 정비에 성공한 하루무네는 말년까지도 오우우 일대에 다테가문을 위한 발판을 만들어 갔다.

 하루무네 자신의 정실은 아시나(盧名)씨의 출신이며, 아시나씨에게는 여동생이 시집가 있었기 때문에 아이즈(会津)의 유력 다이묘우와는 2중의 인연으로 맺어져 있었다. 그 위에 자매의 연으로 소우마(相馬), 니카이도우(二階堂), 타무라(田村), 카케다(掛田)씨와는 인척이었다. 이러한 배경이 갖추어지자 하루무네는 세자인 테루무네(輝宗)를 모가미 씨의 딸과 결혼[각주:1]시켰고, 이와키성에는 차남 치카타카(親隆), 루수(留守)씨에게는 삼남 마사카게(政景), 이시카와씨에게는 아키미츠(昭光), 코쿠부(囯分)씨에게는 모리시게(盛重) 등등 정치력을 배경으로 한 강제적으로 양자를 들여보냈고, 딸들을 사다케(佐竹)씨와 니카이도우(二階堂)씨에게 시집보냈다.


 타네무네, 하루무네 2대에 걸쳐 다테씨는 오우슈우(奧州)의 패권을 쥐기 위한 싹을 틔우려고 했을 터였다. 그러나 1565년 가독을 상속받은 아들 테루무네(輝宗) 조부나 부친의 미지근한 센고쿠(戦囯) 다이묘우(大名)제를 거부해서 부친 하루무네와 대립한다. 테루무네는 인척관계에 의존하는 동맹을 맺지 않고 아들인 본텐마루(梵天丸 후에 마사무네(政宗))와 함께 전쟁터로 나가 세력을 확대해 가는 것을 하루무네는 은거한 시나오(信夫)군 스기노메(杉目)성에서 계속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1577년 12월 5 59세의 나이로 죽었다. 테루무네는 불행하게도 뜻을 펼치는 도중에 죽게 되나 그 뒤를 마사무네가 이어받아 무력에 위한 오우슈우 제패를 향해 달려가게 된다.

  1. 이들과의 사이에나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가 태어났다 [본문으로]

난부 노부나오(南部 信直)

159910 5일 병사(病死) 54.


1546 ~ 1599

무츠[陸奧] 탓코[田子]성주 이시카와 타카노부[石川 高信]의 아들. 종가(宗家) 난부 하루츠구(南部 晴継)의 뒤를 이어 26대 당주(當主)가 되었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협력을 얻어 쿠노헤 마사자네(九戶 政実)의 난을 진압하였고, 새로이 모리오카(盛岡)성을 쌓아 후에 난부 번[] 24만석의 기초를 쌓았다.










오산으로 알게 된 시대의 종언.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에 호응하여 난부 노부나오[南部 信直]는 일천의 병사를 이끌고 참진하였다. 츠가루 타메노[津軽 為信]에게 난부 가문[南部家의 영지였던 츠가루[津軽] 일대을 빼앗긴 원한이 뼈에 사무칠 정도인 노부나오에게 있어서 참진은 영토를 탈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을 터였다. 그러나 원수 타메노부는 불과 18기의 기마 무사만을 대동한채 노부나오가 오기 3일전에 히데요시를 만나서 영지 소유권을 받아 낸 상태였다.


 억울함에 흥분하는 노부나오에게 "분노를 참고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 다독거린 것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였다. 노부나오는 이렇게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의 종언을 깨닫게 되었다. 히데요시가 발령한 [칸토우, 오우우 총무사령(関東,奥羽惣無事令)]- 즉 사투금지령[私鬪禁止令]을 어기면 난부가의 존립이 위험할 터였다.


 힘에 의존한 타메노부 토벌에서는 몇 번이나 밀렸기에 뛰어난 무장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노부나오지만, 대세판단의 정확함에 있어서는 남들보다 뛰어난 면이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죽은 뒤 천하의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해,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유력해진 히데요시에게 접근하기 위해 그의 신임이 두터운 토시이에에게 줄을 대고 있었다. 그 방법은 그때까지 말이나 매의 헌상을 매개로 하는 오우우[奥羽]의 여러 호족들의 방법[각주:1]에 더하여 기청문(起請文-서약서(誓約書))까지 토시이에에게 받아냄으로써 정치적 의도를 명확히 한 획기적인 것이었다.


 타메노부의 반란 후 노부나오는 일문의 효웅 쿠노헤 마사자네[九戶 政実]에게 배반당한다. 타메노부의 경우에는 사투금지령이 노부나오의 발목을 죄는 덫이 되었지만 마사자네의 경우는 노부나오를 구하는 마법의 지팡이가 되었다.


쿠노헤의 난과 오우우 처리(奥羽再仕置)


 노부나오는 난부가 24대 하루마사[晴政]의 사촌동생이었다. 처는 하루마사의 장녀였다. 하루마사의 양자로 들어가 후계자 자리를 약속 받았지만, 하루마사의 애첩에게서 하루츠구[晴継]가 태어나자 입장이 미묘하게 되었고 더구나 처가 먼저 죽었기에 후계자 후보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1582 1월.

 하루마사가 죽자 하루츠구가 당주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러나 그 20여일 후 부친의 장례식을 끝내고 산노헤 성[三戶城]으로 돌아오던 도중 자객에게 습격 당했다고도, 독살 당해 죽었다고도 한다. 그리하여 가독(家督) 상속 문제가 대두되어 가문이 둘로 나뉘는 바람에 무력에 위한 싸움은 없었으나 가문 내부에 석연치 않은 앙금을 남기게 되었다. 노부나오는 키타 노부치카[北 信愛], 하치노헤 마사요시[八戶 政栄]들의 지지를 얻어 26대 당주가 되었다. 나이 37세였다.


 한편 '노부나오는 두려워 할 가치도 없다'며 적의를 보이는 마사자네 초대 미츠유키[光行] 때 부터 갈라져 나온 난부 가문의 명문으로 쿠노헤[九戶], 니노헤[二戶]의 양 군()을 영유하고 있던 가문 내에서도 높은 신분이었다. 일촉즉발의 위기를 내부에 품고 있으면서도 평화를 유지하고 있던 난부 일족에게 결정적인 분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오우우 처리(奥羽仕置)[각주:2]때문이었다. 처리(仕置)는 오다와라성 공격에 참여하지 않았던 여러 제후들에 대한 본보기였는데, 가지고 있던 영토를 빼앗긴 무장의 원한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군사들이 떠나자 구영주(舊領主)들과 이들과 관계를 맺고 있던 사람들에 의한 반란이 오우우[奥羽] 각지에서 계속해서 일어나 히데요시의 계획은 어긋나 버렸다.


 이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마사자네 후계문제에 불만을 품고 있던 무장들에게 격문을 날려 호응을 얻자 5천의 병사를 이끌고부 종가에게 반란을 일으켜 자신의 거성(居城) 쿠노헤 성에서 농성했다. 1591년의 가을이었다.


 노부나오의 구원 요청에 응해 히데요시는 마사자네의 봉기를 사투(私鬪)로 판단하여, 재처리(再仕置)를 통해서 천하 통일을 과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히데츠구[秀次]를 총대장으로 하는 원군을 파견. 여기에 오우우의 여러 무장의 병사들을 더한 10만의 대군으로 쿠노헤성을 포위. 4일간의 공성전 후 모략에 의해 마사자네 일당을 섬멸했다.


난부가 중흥의 시조


 노부나오는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 종군.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에 있던 중 하치노헤 마사요시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이곳에 모여 있는 모두가 피로해 있다. 이것을 히데요시에게 직언하면 처분 받을 것 같기에, 이를 두려워 하여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다. 이것만 보아도 이곳이 어떤지 알 수 있겠지
 고 하며 히데요시의 광기(狂氣)를 전하고 있다. 이 또한 노부나오의 통찰력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의 권유를 받아, 거성을 북쪽으로 치우친 산노헤 성[三戶城]에서 중앙부의 모리오카[盛岡]으로 옮기는 것을 허락 받은 것은 이 나고야 재진 중의 일이었다.


 노부나오가 난부 가문 중흥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이유는 천하인 히데요시를 따르며 난부 7()을 안도 받아 성 밑 마을(城下町) 모리오카로 전국의 상인이나 직인(職人)을 불러 모아 우대하여 번영시킨 것도 있지만, 거기에 더해서 카즈노[鹿角]의 산 등에서 금을 캐내어 재정을 풍부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1599, 노부나오는 모리오카성에서 발병. 쿠노헤 성을 수리, 복구하여 이름 바꾼 모리오카 성으로 옮긴 후에 죽었다. 나이는 54. 가독은 토시나오[利直]가 이었다.

  1. 이 방식은 노부나가에게 귀순한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노부나가가 만들어낸 방법이었다. 즉 이 오우우, 즉 토우호쿠[東北] 지방 뿐만 아니라 큐우슈우[九州]의 시마즈[島津]나 오오토모[大友]도 노부나가에게 매를 헌상하여 노부나가에게 귀순하였다. [본문으로]
  2. 히데요시는 참전하지 않았던 토우호쿠[東北=오우우[奥羽]] 무장들의 영토를 빼앗아, 자기 가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본문으로]

구노헤 마사자네(九戶 政実)
1591년 9월 20일 처형 56세.

이곳에 가면 쿠노헤 마사자네가 그려진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링크)

1536~1591.
무츠
[陸奧] 쿠노헤[九戶]성주. 쿠노헤씨는 난부[南部]씨의 분가. 종가(宗家)의 난부 노부나오((南部 信直)에 대항하여 거병, 농성하지만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아사노 나가마사[淺野 長政] 등이 이끄는 토요토미 씨[豊臣氏]의 오우슈우 평정군[奧州仕置軍]에 진압되어 일족 전원이 처형 당했다.

봉기결단의 배경

 1591년. 쿠노헤 성주 마사자네는 종가(宗家)의 난부 씨 26대 당주인 노부나오에게 모반을 일으킨다. 당시 마사자네는 56세의 노장이었다. 따라서 봉기는 최후의 도전이었으며, 모든 것을 건 일생일대의 도박이었던 것이다.
'나야말로 난부의 정통후계자이다'라고 공언하며, '노부나오는 듣보잡'[각주:1]이라 말하며 마사자네는 오랫 동안 쌓아 온 주변의 여러 호족들과의 우호, 동맹관계에 더하여 일족의 두령으로서의 신망을 바탕으로 그 동안 종가에게 쌓인 반목과 불화를 총결산하는 결단이었다.

 암군(暗君)이라고 평가받던 난부 가문 24대 하루마사[晴政]가 1582년 1월에 죽자, 하루마사 첩의 아들인 하루츠구[晴継]가 13세의 나이로 가독을 잇게 되었다. 그러나 하루츠구는 당주의 자리를 이은 지 20여일만에 급사한다. 부친의 장례 종료 후 눈바람이 심한 밤에 산노헤[三戶]성으로 귀성 중에 자객에게 습격받았기 때문이다. 한 편으론 독살의 소문도 돌았다.

 이 사건을 꾸민 것은 평소의 거동으로 보았을 때 쿠노헤 일족임에 틀림이 없다고 단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가문은 둘로 나뉘어지기에 이르렀다. 후계자로서 마사자네의 이름을 거론하는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정작 마사자네는 동생인 쿠노헤 사네치카[実親]를 추천한다. 사네치카가 하루마사의 둘째 딸과 결혼한 것과 쿠노헤 일족이 난부가 19지족(支族)중에 필두임을 이유로 들었다.

 한편 키타 노부치카[北 信愛]등은 23대 야스노부[安信]의 동생 이시카와 타카노부[石川 高信 - 츠가루 지방 당담관(津軽 郡代)]의 아들인 노부나오[信直]를 추천하였다. 노부나오의 부인은 하루마사의 첫째 딸이었다. 한 때 하루마사의 양자가 되어 후계자 자리에 있었지만, 첩에게서 하루츠구가 태어났기 때문에 차츰 하루마사와 사이가 벌어졌고, 거기에 처도 죽는 바람에 후계자의 지위를 반납하고 있었다.

 초대 미츠유키[光行]부터 시작되는 난부 분가 중 명문가의 리더[각주:2]이고 또한 쿠노헤, 니노헤[二戶]의 양 군(郡)을 소유하면서 주변 여러 호족을 휘하로 두고 있던 마사자네조차 "노부나오는 예전 하루마사 공에게 미움 받기는 했지만 일시나마 후계자로 인정받았다. 또한 장녀는 죽었다고는 해도 그녀의 남편이기도 했던 사람"이라 말하며 물러났지만 맘속으로는 후일을 기약하게 되었다.

봉기군 각지에서 우세.

 모반을 일으킨 마사자네가 처음부터 농성전을 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노부나오가 자신의 적자 토시나오[利直]를 히데요시[秀吉]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하자, 히데요시는 마사자네가 사투금지령(私闘禁止令)을 위반했다고 판단. 휘하 장병과 오우우(奥羽) 다이묘우의 세력을 규합하여 10만의 오우 평정군([奥羽仕置軍]을 파견했기 때문에 농성에 이르게 된 것이다. 히데요시는 이 사건을 천하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과시하기 위한 표적으로 삼은 것이다.

 후세에 [쿠노헤의 난]이라 일컬어지는 이 반란은 오우우 평정군이 도착하기 전 1월에서 8월말까지 난부령 각지에서 종가 군과 쿠노헤 군과의 사이에서 격전이 펼쳐졌다. 전체적으로 봐서 종가군은 패색이 짙었고, 형세에 따라서는 - 하면서 방관하고 있던 여러 호족들도 전부 쿠노헤군에 가담하여 총세 약 5천으로 증가했다. 그에 비해 종가군은 3천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예전에 멸망시킨 시와[志波]의 시바 씨[斯波氏]의 잔당들까지도 봉기를 해서 노부나오는 위기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9월 1일 오우우 평정군이 도착하였다.

모략에 당하다.

 아무리 무용이 뛰어나다고 소문난 쿠노헤 일족이라도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가 이끄는 대군과 야전에서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 천연의 요해인 쿠노헤성에서 농성하며 무문(武門)의 의지를 나타내고자 하였다.

 평정군 진영에는 츠가루 타메노부[津軽 為信]의 군 3천이 있었다. 타메노부는 마사자네의 지원을 받으며 츠가루의 영주가 될 수 있었다. 마사자네는 자신도 권모술수을 잘 부려왔던 사람이기에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같은 평정군 진영에 있던 노부나오는 어처구니 없었다. 노부나오의 부친 타카노부는 바로 타메노부의 기습을 받아 자결했기 때문이다. 불구대천의 원수임에도 불구하고 손을 잡고 마사자네를 물리쳐야 했다.

 쿠노헤 일족은 용감히 싸웠고, 시골의 작은 성이라며 무시한 평정군은 무수한 사상자를 낼 뿐이었다. 이렇게 되자 공성군은 하나의 계책을 세우게 된다. 모략은 전투에 항상 있는 것이다. 쿠노헤 가문의 묘소가 있는 쵸우코우 사[長興寺]의 사츠텐[薩天] 화상이 모략인 줄도 모르고 권항사(勸降使)가 되었다.

 무장들 중에는 사네치카[각주:3] 한 명만이 끝까지 투항에 반대했다. 후세에 [쿠노헤의 학살(=九戸のなで斬り)]이라 칭해지는 살육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사네치카는 성밖으로 달려 나가 싸우다 죽었다. 그리하여 평정군의 공성전은 9월 1일에 시작해서 4일에 끝났다.

 속임수에 빠진 항장(降將) 마사자네 등 8명은 9월 20일 다테[伊達] 영내에 있는 히데츠구의 본영 이와가사키[岩ヶ崎]로 보내져 참수되었다. 다테의 영지에서 처형한 것은 마사자네와 사이가 좋으며 야심가인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에 대한 본보기 이기도 했다.

 동장군(冬將軍)이 가까이 왔는데도 화해를 선택한 마사자네의 생각이 어리석었다고 힐난하는 역사가도 있다. 마사자네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오천의 장병을 구하기 위해서 천하인의 도량을 재어 본 것이다. 무참한 결과만을 보고 정치적인 동찰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단지 아쉬운 것은 마사자네가 전국의 무대로 올라가는 것이 너무 늦었다는 것이었다.

  1. 노부나오는 난부 가문의 분가인 이시카와 타카노부[石川 高信]의 서장자이다. [본문으로]
  2. 쿠노헤 씨는 미츠유키의 여섯째 아들 유키츠라[行連]부터 시작된다. [본문으로]
  3. 난부가의 후계로 추대되었던 마사자네의 동생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