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우죠우 소우운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4. 11. 26. 04:14 Posted by 발해지랑

호조 소운[北条 早雲]

1519 8 15 병사(病死) 64.

1456 ~ 1519.

처음은 이세 신쿠로우[伊勢 新九郞]라는 이름을 칭했다. 이마가와 씨[今川氏]의 외척(外戚)이 되어, 스루가[駿河] 코우코쿠지 성[興国寺城]의 성주가 되었다. 이즈[伊豆]를 장악한 후 오오모리 후지요리[大森 藤頼]에게서 사가미[相模]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을 탈취하여 후 호우죠우 씨[後北条氏] 발전의 기초를 쌓았다.








[祿寿応穏]의 도장


 1518년 10월 8자로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에서 이즈 국[伊豆国] 키쇼우[木負]에 있는 오오카와 가문[大川家]에 한 통의 문서를 가진 사자(使者)가 도착했다. 편지를 본 오오카와 가문의 당주(当主)는 처음 보는 모양을 신기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 편지의 날짜가 써 있는 행에는 가로, 세로 7센티 정도의 크기의 도장이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빨간 인주로 찍혀 있는 글자는 [祿寿応穏 녹수응은]이라 쓰여 있었는데, '인민이여, 모두 함께 평온히 살자'라는 뜻이라 여겨진다. 이 글자의 상부에는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모양이 조각되어 있어 '호랑이 주인장(朱印狀)'이라 불리고 있다. 현재 '호랑이 주인장'은 약 천 통 이상 발견되어 역사연구자들에게 활용되고 있다. [호랑이 주인장]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라 생각되어지는 것이 바로 이 오오카와 씨에게 보낸 것이다.


 호우죠우 소우운[北条 早雲] 즉 이세 모리토키[伊勢 盛氏] 후에 입도(入道[각주:1])하여 소우운안소우즈이[早雲庵宗瑞] 는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아들인 우지츠나[氏綱]에게 가독(家督)을 물려주면서 함께 물려 준 것이 '호랑이 주인(朱印)'이었다. 이후 호우죠우 씨[北条氏] 4대에 걸친 가인(家印 가문의 도장)으로 1590 7월까지 사용되었던 것이다.


 호우죠우 소우운은 빗츄우[備中] 타카코시 성[高越城]에서 태어났으며, 젊었을 때 쿄우[京]에 가서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에서 일하였고,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즈미[足利 義澄]의 명령으로 이즈[伊豆]를 침공하였다. 이즈 평정에는 5년간 시간을 소비하였으며, 5년째인 1498년 8월 25 토우카이오키[東海沖]를 진원지로 하는 토우카이오키 대지진이 발생하여 이 때의 대해일로 인해 이즈 반도 서해안의 어촌은 큰 피해를 입었다. 계속되는 전란과 거대 지진, 대해일의 습격으로 이즈의 사람들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즈의 주민들은 지배자의 통치력이 부족하기에 이러한 재해를 불러왔다고 생각하며 새로운 지배자를 강력히 원했을 것이다.


연공(年貢)을 내린 영주(新領主)



 이러한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소우운은 1498 9월에 아시카가 챠챠마루[足利 茶丸]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이즈의 지배자가 된 것이다. 소우운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우선 해일로 인한 어촌의 병자들의 치료를 지원하고, 옛 지배자가 부과했던 연공을 낮추어 사공육민(四公六民[각주:2])으로 하였다. 사람들은 이런 신영주에게 감사하고 기뻐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앞에서 언급한 1518 10 8일자의 [호랑이 주인장]에는 향촌에 부과했던 대나무나 목재, 어패류의 납입에는 반드시 이 [호랑이 주인]을 찍은 문서로 명령하며, 호우죠우 씨 이외에는 멋대로 물품을 부과시키는 것을 금지하였다. 만약 이 규칙을 어겨 불법을 행하는 무장이 있으면, 주민의 대표자가 그 무장의 이름을 적은 문서를 가지고 오다와라 성[小田原]의 관청에 직소(直訴)해도 좋다고 하였다. 소우운은 주민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어서 직소를 인정한 것이다.


 소우운은 쿄우토[京都]에 있을 때 다이토쿠 사[大德寺]에 들어가 수행할 정도로 불교를 신앙했으며 신불(神仏)을 숭배하였다. 거성(居城)인 니라야마 성[韮山城]에노시마벤텐[江ノ島弁財天][각주:3]을 모시고 신앙하였다. 소우운이 자손에게 남긴 문서의 첫번째가 신불을 경애하라고 할 정도로 소우운의 깊은 신앙심은 오늘날에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소우운의 사망연령


 소우운은 64세가 되자 이제는 죽음이 가까워 졌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1519년 4월 28에는
사남인 키쿠슈우마루[菊寿丸][각주:4]에게 자기의 소령분(所領分) 4465관이라는 광대한 향촌(鄕村)을 물려주고 하코네곤겐 사[箱根權現社]의 사령(社領)도 확정했다.
 
같은 해 7월에는 미우라[三浦] 반도의 끄트머리인 미사키[三崎]를 유람하던 중 소우운은 감기에 걸려(塔寺八幡宮長帳), 8 15일 니라야마성에서 죽었다. 향년은 88세라고 유포되고 있다.


 유포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에도 시대[江戶時代]에 만들어진 군기물(軍記物)에 쓰여져 있는 것으로 그것이 통설이 되어 유포되었다는 의미이다. 최근의 연구성과로는 이 88세 사망설은 소우운의 부친이라 전해지고 있던 이세 사다후지[伊勢 貞藤] 실은 소우운의 외할아버지인 이세 사다쿠니[伊勢 貞囯]의 차남. 즉 외삼촌- 가 태어난 1432년을 소우운이 태어난 년도와 헷갈린 것으로 실제로 소우운이 태어난 해는 1456년으로 64세에 죽은 것으로 수정되고 있다.(小田原市史)


 소우운의 유체는 슈우센 사[修禅寺]에서 화장되어 하코네[箱根]의 소우운 사[早雲寺]에 안장되었다.
 
법명(法名) [早雲寺殿天岳宗瑞]가 되었다.


 1519 9 15일.

 소우운이 죽은 후 1개월째에 이세(후에 호우죠우[北条]) 우지츠나[氏綱] 자택에 많은 손님을 초대하여 제사를 지냈다. 여기에 출석한 호우린칸도우[芳琳乾幢]는 제문을 통해서,
 '
소우운은 천하의 영웅으로 좋은 부인을 만나 자손도 많으며 조부의 유업(遺業)을 이었고 덕은 만고(萬古)에 빛나평화속에 칸토우를 정복했다'
고 기록되어 있다.

  1. 불문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본문으로]
  2. 전체 수확량의 40%를 세금으로, 60%를 농민이 소유함. 당시 대부분 육공사민이었으며, 좋아야 오공오민이었다고 함. [본문으로]
  3. 칠복신 중 하나, 음악과 지혜, 변설, 복덕의 신. [본문으로]
  4. 후에 호우죠우 겐안(北条 幻庵) [본문으로]

나오에 가네쓰구[直江 兼続]

1619 12 19 병사(病死) 60


1560 ~ 1519.

에치고[越後] 요이타[与板] 성주 히구치 가문[樋口家] 출신.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중신 나오에 씨[直江氏]를 이었다.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섬겨, 죠우다이카로우[城代家老][각주:1]로써 정무을 도맡아 보았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 손을 잡고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 타도를 계획. 그 때에 이에야스에게 보낸 '나오에장[直江状]'은 유명.










굳은 결속으로 맺어진 주종(主從)


 카네츠구[兼続]의 성은 나오에 가문[直江家]에 사위로 들어간 다음부터 성(姓)을 '나오에'라 칭한 것으로, 생가(生家)는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가 태어난 가문인 우에다 나가오 가문[上田 長尾家]의 구신(舊臣)이다. 키소 요시나카[木曽 義仲][각주:2]의 사천왕 중의 한 명인 '히구치 지로우 카네미츠[樋口 次郞 兼光]'의 후예로 일컬어지는 나오미네[直峰] 성주 '히구치 이요노카미 카네토요[樋口 伊予守 兼豊]'의 첫째 아들로 이름은 요로쿠[与六]라 했다.
 1560
년생으로 어렸을 적부터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의 양자가 된
카게카츠
를 근시(近侍)하였다. 우에스기 켄신이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채 급사했기 때문에 두 명의 양자인 카게카츠[景勝], 카게토라[景虎] 사이에서 후계다툼이 일어났고, 그때 19세의 요로쿠[与六] 5살 연상의 주군 카게카츠를 위해 분투하였다.


 카게카츠의 시대가 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1582 10월. 후다이[譜代[각주:3]]의 중신으로 요이타[与板] 성주인 '나오에 요헤에 노부츠나[直江 与兵衛 信綱]'가 카스가야마 성[春日山城]에 있을 때, '모우리 나사에몬 히데히로[毛利 名左衛門 秀広]'의 칼에 죽는 바람에 명문가의 단절을 아쉬워한 카게카츠의 명령에 따라 3살 연상인 노부츠나의 부인[각주:4]에게 장가를 가서 이때부터 '나오에 야마시로노카미 가네츠구[直江 山城守 兼続]'라는 이름을 칭하게 된다.


 이후 마지막까지 카게카츠에게 반항하던 아가키타[揚北]의 시바타 시게이에[新発田 重家] 4년의 시간을 들여 멸망시키거나 사도[佐渡]를 평정. 히데요시[秀吉]의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5]에 참전하여 호우죠우[北条]의 하치오우지 성[八王子城]을 함락시키는 등 대활약을 펼친다.


 인재 욕심이 많은 히데요시는 그러한 카네츠구에게 반하여, 카게카츠를 에치고[越後]에서 아이즈[会津] 120만석으로 이봉(移封)할 때 그 중 데와[出羽] 요네자와[米沢] 30만석을 배신(陪臣[각주:6])인 카네츠구에게 하사하여 명목상 직신(直臣)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카네츠구는 어디까지나 카게카츠의 신하라는 자세를 견지하였다.


이에야스[家康]에게 도전장


 히데요시가 죽은 뒤 잠시 동안은 평화로웠지만 반년이 지나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가 병으로 죽자 오대로(五大老)의 필두 이에야스의 전횡이 눈에 띠게 늘어났다. 카게카츠 - 카네츠구 주종은 신영토 관리라는 이유로 영지 아이즈[会津]로 돌아 와서는 만일을 대비하여 임전태세를 갖추었다.


 '아이즈 츄우나곤[中納言 - 카게카츠의 관위]에게 모반의 징조'

 라는 고소를 받은 이에야스는 카게카츠에게 변명과 굴종을 위한 상경을 요구했지만 응하지 않았기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힐문했는데, 카네츠구의 달변에 아무 것도 못하고 돌아 왔다. 이때 사자는 카네츠구의 오랜 친구인 승() 죠우타이[承兌] 카네츠구에게 보낸 서장(書狀)을 지참하고 갔었다. 그 내용은 사자의 힐문 내용을 각 조에 걸쳐서 글로 쓴 것으로 옛 친구를 걱정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에야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쓴 것이라 간파한 카네츠구는 죠우타이[承兌]에게 답서를 썼다. 이것이 후에 [나오에장(直江状)]라 불리는 도전장이다. 하나하나씩 구체적으로 대응한 후에,

참소(讒訴)를 믿고 있는 나이후님[內府様 이에야스의 관위] 옳은지, 상락[上洛 상경(上京)을 뜻함]을 거부하고 있는 카게카츠가 옳은지는 세상의 평판을 기다려 보자

 고 세간의 여론을 들어보자는 태도를 표명한 후에,

, 나이후 사마가 허튼 소리를 받아들여 계속 이렇게 나오면 어쩔 수 없다. 맹세도 서약도 거기서 끝이다.

 고 대놓고 큰소리를 쳤다. 그야말로 선전포고였다.


우에스기(上杉)()의 존속을 위하여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대승(大勝)한 이에야스는 패권을 쥐자 전후 처리에 착수하였다.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에게 항복을 신청한 후 카게카츠와 함께 다음해 7월 상락한 카네츠구는 이에야스를 만나서,

 "나이후 사마에게 거역한 것은 이 야마시로[山城 = 카네츠구] 혼자서 한 일이오니 마음대로 처분해주시길 바랍니다."

 고 사죄도 하지 않고 당당했다.

 카게츠구의 소령(所領)인 요네자와[米沢] 30만석은 몰수되어 대신 대감봉(大滅封)된 주군 카게카츠가 이봉해 와서막번체제(幕藩體制)에서 요네자와 번조(藩祖)가 되었다.


 카네츠구는 카게카츠 6만석 지급하려는 것을 거절하고 5천석만 받아 세키가하라[関ヶ原] 때의 책임을 졌다. 그리고 자신의 자식으로 '헤이하치 카게아키[平八 景明]'가 있으면서도 동생인 '오오쿠니 타지마노카미 사네요리[大国 但馬守 実頼]'의 딸을 양녀로 삼아 1604 8월 전후처리의 교섭으로 친밀해진 이에야스의 총신(寵臣) 혼다 사도노카미 마사노부[本多 佐渡守 正信]에게 부탁하여 그의 둘째 아들 사헤이지[左平次][각주:7]를 데릴사위 겸 양자로 맞아들여[각주:8] 이름을 '나오에 야마토노카미 카츠요시[直江 大和守 勝吉]'로 칭하게 했다.
 우에스기 가문의 가명을 지키기 위해서였지만
 그 카츠요시[勝吉] 1611 5월 에도[江戶]에 돌아가서는 다음해 마에다 가문[前田家]를 섬겨버리고, 친자식 카게아키[景明] 1615 18살에 병으로 죽는다. 4년 후인 1619년 12 19 에도에 있던 카네츠구도 60세에 세상을 떠났다.


역자 가필: 카네츠구가 죽었을 때, 주군인 카게카츠

주군보다 먼저 죽는 놈이 있을까”하며 눈물을 흘렸다 한다.

  1. 참근교대로 성주가 에도에 갔을 때 영지에 남아 영지를 다스리던 가로. 한 마디로 No.1 가로. [본문으로]
  2. 카마쿠라 막부[鎌倉幕府]를 세운 미나모노토 요리토모[源 頼朝]와는 사촌지간이다(부친끼리 배다른 형제. 사족으로 요시나카의 부친은 요리토모의 큰형[悪源太]에게 살해당했다). 겐페이 쟁란기(源平爭亂) 때 토벌 명령이 내려진 헤이케[平家]를 누구보다도 빨리 쿄우[京]에서 몰아냈다. 키소[木曽]는 묘우지[苗字]이며 본성(本姓)은 미나모토[源]. 보통 '미나모토노 요시나카[源 義仲]'로 알려져 있다. 요리토모의 부하뻘이었지만,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며 나대다가 그 꼴을 못 본 요리토모가 정벌군을 파견하자 정치적 우위를 세우기 위해 코시라카와 법황[後白河法皇]을 협박하여 쇼우군이 되었다. [본문으로]
  3. 대대로 신하인 집안 [본문으로]
  4. 오센노카타(お船の方). 그녀가 나오에 씨의 핏줄을 잇고 있었다. [본문으로]
  5.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6. 원래는 중국에서 제후의 신하가 천자에게 자신을 부를 때를 지칭한 일인칭 대명사라고 한다. 그 뜻이 이어져 일본에서는 신하의 신하를 지칭할 때 쓴다. [본문으로]
  7. 혼다 마사시게[本多 政重] [본문으로]
  8. 이것은 두번에 걸친 결혼으로, 첫번째는 카네츠구의 친딸인 오마츠[於松]와 결혼시켰고, 그녀가 죽자 동생의 딸인 아토라[阿虎]를 양녀로 들여 그의 후실로 보냈다. [본문으로]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 景勝]

1623 3 20 병사(病死) 69

1555 ~ 1623.

나가오 마사카게(長尾 政景)의 차남. 외숙부인 켄신(謙信)의 양자가 되어 가독을 상속.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의 오대로(五大老)가 된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서군에 속해 토우호쿠[東北]에서 다테 가문[伊達家], 모가미 가문[最上家]과 싸우지만 서군의 패배로 항복. 아이즈(会津)에서 전봉(転封)되어 요네자와 번[米沢藩]의 번조(藩祖)가 되었다.










후계자 다툼에서 승리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은 죽을 때까지 독신이었기 때문에 친자식이 없었지만 양자는 두 명이 있었다. 한 명은 누나가 시집간 동족의 우에다[上田] 사카토 성[坂戶城]의 성주 나가오 마사카게[長尾 政景]의 둘째 아들 카게카츠[景勝] 1559 카게카츠의 나이 5살 때 양자로 삼았다.

 또 한 명은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 7남 우지히데[氏秀] 처음엔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에게 양자로 보내졌으나 호우죠우와 타케다의 동맹이 끊어지면서 본가로 돌아온 것을 다시 우에스기와 동맹을 맺을 때 다시 인질로 온 것을 불쌍히 여긴 켄신이 자신의 전 이름[카게토라(景虎)]를 주어 양자로 삼아 카게카츠의 여동생과 결혼시켰다.


 켄신은 카게카츠를 두번째 성곽[二の丸]에 살게 하며 '御中城様[고츄우죠우사마]'라 부르게 하고 군사를 이끌게 했기 에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확실하게 정하지 않고 급하게 죽었기 때문에 두 사람간에 후계자 다툼이 일어났다.


 무력대결이 되면 형으로 호우죠우 우지마사[北条 氏政], 매제인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를 빽으로 두고 있는 카게토라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고 여겨졌으나, 카게카츠는 재빨리 카츠요리와 불가침조약을 맺고 오다와라[小田原]의 원군이 미쿠니토우게 언덕[三国峠]을 넘어 도착하기 전에 단기 결전에 임해 카게토라를 사메가오 성[鮫ヶ尾城]으로 몰아 자살시키고 승리했다.


토요토미[豊臣] 은고(恩顧)의 다이묘우[大名]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치고, 남보다 한 발 앞서 주군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원수를 갚은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 천하 평정을 목표로 에치젠[越前]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에게 공격을 시도하기에 앞서 카게카츠와 동맹을 맺으려 했다. 이때 저울질 하지 않고 곧바로 응하여 히데요시의 신뢰를 얻은 카게카츠는[각주:1] 1598년 1월 10 에치고[越後] 91만석에서 아이즈 120만석으로 이봉(移封)되었고,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揮元],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와 함께 오대로(五大老)가 되었다. 히데요시는 그 해 3 15다이고 사[醍醐寺]에서 꽃구경(花見)를 개최한 뒤에 병으로 쓰러져 8 18일에 후시미 성[伏見]에서 죽었다.


 다음 해(1599) 3 3일에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까지 병으로 죽자 이에야스[家康]의 전횡이 심해져 갔다. 카게카츠는 새로운 영토를 정비한다는 이유로 아이즈[会津]로 귀국해서는 토요토미 가문의 장래를 걱정하며 새로이 성을 쌓고 군비를 증강해서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임전태세를 갖추었다.


아이즈[会津]공격에 대응하다.


 카게카츠는 에치고 호리 히데하루[堀 秀治]의 고소로 인한 이에야스의 힐문과 상경(上京) 요구를 뻣뻣한 태도로 거절했기 때문에 화가 난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공격을 결의하여 6 18일 후시미 성에서 출진한다. 하지만 시모츠케(下野) 오야마[小山]까지 진군한 7 24일에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거병하여 미노[美濃] 오오카키[大垣]로 출진했다는 급보가 도착했으므로, 이에야스는 둘째 아들인 유우키 히데야스[結城 秀康]를 우에스기의 대비책으로 우츠노미야 성[宇都宮城]에 남겨 놓고 재빨리 에도[江戶]로 돌아갔다.[각주:2] 남겨진 유우키 히데야스는 키누가와 강[鬼怒川]을 사이에 두고 우에스기 군()과 대치하며 도발해 왔으나 카게카츠는
 "
나이후도노[內府殿[각주:3]]가 공격해 왔기에 응한 거다. 되돌아 갔다면 이 쪽도 군을 물린다. 우에스기는 빈집털이는 하지 않는다"
 고 말하며 돌아 갔다고는 하지만
실은 배후에 있던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의 진공(進攻)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가명(家名)을 남기다.


 이런 시원시원한 카게카츠의 태도가 맘에 든 히데야스[秀康]는 전후 처리의 자리에서 중신들과 함께 카게카츠를 변호하여,
 
"
카게카츠의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대한 모반은 확실치 않으며, 미츠나리와 미리 짜고 우리에게 공격한 것도 아닙니다. 우에스기[上杉]는 후지와라[藤原]의 분가로 카마쿠라 시대[鎌倉時代] 이래의 명문. 카게카츠는 타이코우[太閤][각주:4]를 섬긴 이래로 사리에 맞는 행동을 해 온 정직하고 의리가 두터운 사람입니다. 징벌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가명(家名)만은 존속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 조명()에 힘써 이에야스[家康] 설득시켰다. 이에야스는 할 수 없이 아이즈[会津] 120만석에서 데와[出羽] 요네자와[米沢] 30만석으로 감봉(滅封)시키는 것으로 카게카츠를 용서했다.


 1603 2월 막부에게 에도[江戸]의 소토사쿠라다[外桜田]에 저택을 하사 받은 카게카츠는 이곳을 요네자와 번저[米沢藩邸[각주:5]]로 삼았다. 카게카츠 나이 49세에 막번 체제(幕藩 體制)하에서 초대 번주(藩主)가 되었다. 그 후 오오사카 공성전 겨울의 진[大坂の陣 - 冬の陣]과 여름의 진[夏の陣]에도 참전하였고, 평화로운 시대가 된 에도 시대[江戸時代]에서 20년을 살다 이에야스의 죽은 지 7년 후인 1623년 3월 20 요네자와성에서 병으로 죽었다. 향년 69세였다.

  1. 사실 응하기만 했을 뿐 히데요시를 도우지는 못했다. 카게카츠는 사방의 적들과 시바타 씨[新発田氏]의 반란으로 인해 외침을 할 능력이 없었다. 때문에 종전 후 히데요시는 카게카츠에게 왜 참전하지 않았냐며 따지는 편지를 보냈다. [본문으로]
  2. 사실 처음엔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가 대비책으로 남겨졌으나, 히데타다가 세키가하라로 이동명령을 받자 그제서야 남겨진 것이 유우키 히데야스. [본문으로]
  3. 이에야스의 관도명, 즉 이에야스를 지칭. [본문으로]
  4. 타이코우(태합)은 관백[関白]에서 물러난 사람을 지칭. 즉 여기서는 히데요시를 말함. [본문으로]
  5. 번저는 각 번(藩)이 에도(江戶)에 세워 둔 연락소 겸 참근교대 시의 숙박소. 지금의 대사관이나 영사관이라 보면 될 듯. [본문으로]

사타케 요시노부[佐竹 義宣]

1633 1 25일 병사(病死) 64


1570 ~ 1633.

히타치[常陸] 오오타[太田]성주. 아키타 번[秋田藩]의 번조(藩祖).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무사시[武蔵]로 출진. 부친인 요시시게[義重]의 활약에 힘입어 히타치[常陸]를 통일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때는 움직이지 않고 중립을 선택했기 때문에 데와[出羽] 아키타[秋田]로 전봉(転封)되었다.










아키타 전봉(転封)의 이유


 사타케 가문[佐竹家]이 히타치 미토[水戶] 54만석에서 데와[出羽] 아키타[秋田] 20만석으로 전봉된 것은 1602 7 27일이었다.

 이에야스[家康]에게서 온 명령서에는 데와[出羽]의 아키타[秋田]와 센키타[仙北]로 가라는 말만 있을 뿐 석고(石高)가 명시되지 않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요시노부[義宣]를 시작으로 가신들은 깊은 실망에 빠졌다. 이에야스[家康]가 내린 징벌 좌천 인사였던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요시노부는 서군 총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의 깊은 친분으로 마음이 흔들렸기에 요시노부를 의심한 이에야스에게 칸토우[関東]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진 것이었다.


 미츠나리와의 깊은 관계라 함은, 요시노부의 맹우였던 우츠노미야 쿠니츠나[宇都宮 国綱]카이에키[改易[각주:1]]에 휩쓸려 사타케 가문이 처분받을 뻔한 때에 미츠나리 덕분에 위험에서 피할 수 있었으며, 반대로 요시노부는 히데요시가 죽은 뒤 토요토미[豊臣]의 여러 다이묘우[大名] 간의 내분으로 인해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淸正] 7명의 무장이 미츠나리를 습격했을 때에는 요시노부가 구출했던 때도 있었다.


역전의 발상


 히타치 54만석은 히데요시의 주인장(朱印狀)에 의한 것이지만 그 중에 요시노부의 영지 20만석. 거기에 은거한 부친 요시시게[義重]에게 5만석, 사타케 3가의 하나인 히가시 요시히사[東 義久]에게 6만석, 그 외는 요리키 다이묘우[与力 大名][각주:2]들의 영지 등으로 인해 '나라 안에 나라'가 있는 상태였다.


 요시노부는 아키타 전봉을 이러 변칙 체제의 타파와 자신의 권력기반을 확립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지금까지의 영지는 전부 무시하고 아키타에서 새로 영지를 분배하였고 그것을 봉급으로 했다. 요시히사의 아들 요시카타[義賢]에게는 10분의 1 6000석만을 지급했다. 가신중에서도 200석 이상은 불과 25명 이었다. 이것이 여태까지의 가격(家格[각주:3]), 관례에 구속 당하지 않는 새로운 정략의 실시를 가능케 하여 새로운 인재 등용도 가능하게 했다.


 신천지에서 우선 영내(領內)의 안정에 힘써 쿠보타 성[久保田城] 축성과 안도우 씨[安東氏], 아키타 씨[秋田氏]에게서 이어 받은 성 밑 마을[城下町]의 정비에 힘을 쏟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농지를 개척하고 광산 개발에 힘썼다.


 한편 막부가 일으킨 오오사카 겨울 전투와 여름 전투[大坂の陣]의 군역(軍役)은 물론 계속되는 막부의 요청에 의한 토목공사에도 나서서 응했다.

 요시노부의 아키타 번에 30년 간 부과되어진 주요한 토목 공사에는 에도 성[江戶城] 수리를 시작으로 우치사쿠라다[內桜田]의 칸다바시 문[神田橋門]의 수리, 소토사쿠라다[外桜田] 코우지마치[麹町]의 토라 문[虎門]과 이어지는 담 공사 등 도합 5.

 군역(軍役)은 오오사카의 진[大坂の陣]외에 유리[由利]()의 인수, 에치젠[越前] 마츠다이라 타다나오[松平 忠直]의 카이에키[改易][각주:4]에 동원 등 합계 4, 쇼우군[将軍]이 쿄우토[京都]에 갈 때 같이 간 것이 4, 그 외에 19번의 참근(参勤[각주:5])이 있었다. 한 시도 맘을 놓을 수 없는 봉공(奉公)의 연속이었다.


 거기에 막부에게 쓸데없는 의심 받을까 하여 성에는 천수각도 담도 쌓지 않는 철저함을 보였다. 적이 공격해 오면 어떻게 하겠냐는 부친 요시시게[義重]의 물음에, "나가서 공격할 뿐입니다. 이런 작은 성에서 농성해서는 운도 트일 리 없습니다."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중앙집권화에 따른 정치 체제의 변화와 전술의 진보에 따라 축성에는 큰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이다.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하에서 이에야스[家康]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로쿠다이쇼우(六大将[각주:6])]로 평가되어 온 요시노부가 이렇게까지 막부에 대해 신경을 썼기에, 의심이 많은 이에야스도 요시노부를 인정할 수 밖에 없어 "이 세상에 사타케 요시노부 만큼 정직한 사람은 본 적이 없다"며 칭찬하면서도, "그래도 너무 정직해서도 곤란해"하며 충고할 정도였다.


병법가, 다도가(茶道家)로서의 일면


 요시노부는 화약의 조제법을 연구해서 책을 쓸 정도의 병법가였다. 한 편 취미인 차를 즐기는 것도 달인의 영역에 달했었다.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따라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에 재진 중일 때 영지로 보낸 편지에 자기 스스로 칸토우[関東] 제일의 다도가라고 할 정도였다. 요시노부는 후루타 오리베[古田 織部]에게 직접 전수받은 다도를 말년에 즐겼다.


 요시노부는 16331 25. 에도의 칸다[神田]의 저택에서 죽었다. 향년은 64.

 [정월 7일부터 산기(疝氣)를 앓으셨다.] [羽陰史略]에 적혀 있다. 산기라는 것은 대장 또는 소장 혹은 허리부분이 아파지는 병이라고 한다. 죽음을 앞두고 유언으로 순사(殉死[각주:7])를 금했다. 막부가 순사 금지령을 발포하기 30년 전이므로 영단이라 할 수 있다.


 17살에 가독을 이은 요시노부는 24살 때 일찍 죽은 정실과 나중에 맞아 들인 부인에게서도 아들을 볼 수 없었다. 때문에 동생인 이와키 사다타카[岩城 貞隆]의 첫째 아들을 양자로 받아들여 요시타카[義隆]로 이름 지어 세자로 삼았다. 아키타 6() 20만석의 영지가 확정된 것은 요시노부가 죽은 다음해 였다.

  1.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킴. [본문으로]
  2. 배하(配下)의 다이묘우[大名]. 즉 요시노부가 명령권을 가진 다이묘우. [본문으로]
  3. 가문의 등급. [본문으로]
  4. 이에야스[家康]의 2남 유우키 히데야스[結城 秀康]의 장남.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에서 발군의 활약을 펼쳤으나 은상이 적은 것(차항아리[茶壷] 한 개)에 불만을 표하고 참근교대도 안 하였기에 카이에키. [본문으로]
  5. 1년 터울로 에도와 자기 영내를 오고 가는 것. [본문으로]
  6. 여섯 개의 큰 가문. 토쿠가와, 마에다[前田], 모우리[毛利], 시마즈[島津], 우에스기[上杉]와 더불어. [본문으로]
  7. 주인이 죽으면 자살하는 것을 말함. [본문으로]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
1614년 1월 19일 병사(病死) 69세.

1546년 ~ 1614년.
데와[出羽] 야마가타[山形]성주. 쇼우나이[庄內] 지방에 진출해서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들과 싸웠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호우죠우 씨[北条氏]의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을 공격하자 참진(參陣)한 덕분에 본령(本領)을 안도받았다. 세키가하라[関ヶ原] 전쟁에서는 동군(東軍)에 속해서 우에스기 카게카츠와 싸웠다.




효장(驍将)의 전환기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는 가독(家督)을 놓고 싸운 동생 요시토키[義時]를 죽였고 순종하지 않는 자는 일족이라고 해도 용서를 하지 않았다. 후환을 남기는 것 보다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반면 항복한 무장에게는 잘 대해주었기 때문인지 근린의 무장들은 요시아키를 효장이라며 두려워 했다.

 이런 요시아키에게 전환기가 찾아 온 것은 1590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 때 였다. 참진을 명령 받은 여러 무장들은 앞다투어 참진하여 소령 안도장을 받아 내었으나 요시아키는 부친인 요시모리[義守]의 장례식 때문에 늦어 6월달이 되어서야 겨우 착진할 수 있었다. 그 전에 히데요시가 발령한 사투금지령을 위반하고 쇼우나이[庄內]에서 영토 쟁탈전을 계속해서 벌여 온 요시아키는 히데요시의 눈밖에 나서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요시아키는 예전부터 연락을 하고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에게 부탁해 그의 중재 덕분에 겨우 소령(所領)을 안도 받을 수 있었지만, 요시아키처럼 늦은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는 소령에서 아이즈[会津]를 빼앗겼고 참진하지 않았던 오우우[奥羽]의 여러 호족들과 무장들은 소령을 빼앗기게 되었다. 이 일은 요시아키를 놀라게 했다. 때는 요시아키 45세. 1571년 가독을 이은지 20년만에 처음으로 모가미 가문(最上家] 위급존망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환심(歡心)가로 변신

 천하인의 강대한 무력과 중앙 집권 정치의 진정한 모습을 눈으로 확인한 요시아키는 오우우[奥羽]의 여러 호족의 힘이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를 깨닫게 된 것이다. 남의 영토를 빼앗는 것에 정신을 팔 때가 아니라는 것을 통감하였으며 주변의 영주들과 싸우는 데 정신이 팔린 결과 중앙 정권과 끈을 이어 놓는 것에 게을리 한 것을 후회했다[각주:1]. 요시아키는 센고쿠[戦囯]의 시대가 끝나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때부터, 요시아키의 진면목이 발휘된다.

 요시아키는 천하인에게 열심히 봉사할 것을 마음먹고 무슨 짓을 해서든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히데요시가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고 실시한 것이 태합검지(太閤検地[각주:2])이다. 특히 다른 지역에 비해 실정에 맞지 않는 오우우[奥羽]를 주요 목표로 한 것이었다. 사회의 발달이 늦어져 다른 지역보다 향촌제(鄕村制)가 미발달한 오우우에서 이것을 강행할 경우 각지에서 호족의 내란과 농민들의 발발이 예상되었기에 히데요시도 상당한 각오로 임한 것이었다. 검지가 성공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복속해 있던 무장과 호족들의 어떻게 나오느냐에 달려 있었기에 커다란 위험이 예상되었지만, 요시아키는 솔선해서 처자를 동반하여 히데요시가 머물고 있던 아이즈의 코우토쿠지[興德寺]에 가서 알현했다. 이 때의 일이 [다테 가문 문서(伊達家文書)]에 남겨져 있다. 참고로 요시아키는 다테 가문[伊達家]와 싸우기도 했지만 당주인 마사무네[政宗]는 요시아키의 여동생 요시히메[義姬]와 선대 테루무네[輝宗] 사이의 적자이니 요시아키는 마사무네의 외삼촌이 된다.

 [다테 가문 문서]에는 요시아키의 충성스런 모습에 어처구니 없어하며 혀를 차는 다테 가문과 굉장히 기뻐하는 히데요시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아사노 가문 문서(浅野家文書)]에도 다테와 모가미 가문은 자신들 영내의 호족들의 처자들을 스스로 쿄우토(京都)로 보내 살게 했다고 한다. 남들보다 먼저 처자를 인질로 바친 요시아키와 마사무네는 오우우의 여러 무장들의 모범으로 평가 받았고 다른 무장들도 이것에 따르라는 요청받게 된다. 한 때 히데요시에게 냉우받았던 요시아키는 면목을 세우게 된 것이다.

후회로 점철된 말년

 환심을 사는 방법으로 영국(領国)의 안태를 지켜 토쿠가와 정권에서는 52만석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가 된 요시아키이지만 비극은 이 수법으로 인해 생긴다.

 요시아키는 사랑스런 딸인 코마히메[駒姬]를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에게 측실로 받쳤고, 차남 이에치카[家親]를 이에야스의 부하로 사용해 주길 바란다고 보내어 이에야스를 기쁘게 했으며, 셋째 아들 요시치카[義親]는 토요토미노 히데요리[秀頼]를 섬기게 했다. 그야말로 물 샐 틈 없는 포석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러나 코마히메는 [살생관백(殺生関白)]이라는 악평을 남기고 자결한 히데츠구에 휘말려 다른 처첩들과 함께 니죠우 강변[二条 河原]에서 사형 당했다.

 요시아키는 자신도 부친에게 미움 받았으면서도 자신 역시 같은 일을 벌이게 된다. 30세가 되어도 가독을 잇지 못한 장남 요시야스[義康]에게 모반의 징조가 있다고 이에야스가 언질을 주자 분노한 나머지 모살해버린다. 요시야스가 죽은 후 유품에서 부자간의 사이가 화목하도록 절실히 기도한 기원문이 발견되었다. 후회막심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는 이에야스 쪽에 붙어 우에스기 씨[上杉氏]와 싸운 후 부터 요시아키는 병에 자주 걸리게 되었다. 병든 몸을 이끌고 순푸[駿府]의 이에야스를 방문해 모가미가의 안태를 부탁한 후 야마가타로 돌아와 죽었다. 1614년 1월 19일 향년은 69세. 노환에 따른 병이라고 한다.

  1. 1580년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살아 있을 시에 노부나가에게 매와 말을 한 마리 씩 보내 줄을 놓고 있었다. [본문으로]
  2. 일종의 토지조사. 정확한 수확량을 선출하여 세금과 부역할 양을 정하였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