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

1579 8 28일 병사 61

1573 ~ 1597.

무로마치 바쿠후(室町 幕府) 15대 쇼우군().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옹립되어 쇼우군이되었다. 노부나가와 사이가 틀어져 병사를 일으키지만 패하여 무로마치 바쿠후는 기능이 정지. 모우리(毛利)()를 의지하여 쿄우토(京都) 복귀를 노리지만 실패하였다. 후에 출가하여 쇼우산(昌山)이란 이름을 칭했다.









칸파쿠()와 쇼우군()이라는 위치


 [토요토미 칸파쿠(豊臣 )]의 위광을 쿄우토(京都) 구석구석까지 알린 - 쥬라쿠테이(聚落第)로 천황을 초대하여 연 잔치의 열기가 여전히 식지 않은 1588 9 10일.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오오사카(大坂) 저택에 있었다. 하지만 오전 10시가 되기도 전에 실외의 마당까지 내려와 공손히 예를 갖추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고 서국(西)에서 으뜸가는 거대 다이묘우(大大名) 7월 하순에 첫 상경(上京)하여 한달 정도 쿄우()에서의 생활을 즐기다 돌아가는 길에 히데이에에게 초대 받아 같은 저택에 머물고 있던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도 곧바로 문 밖의 다리 위에까지 나가 의관을 가지런히 하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름아닌 오전 10시 즈음에 히데이에의 저택을 방문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칸파쿠] 토요토미노 히데요시를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요시아키라고 하면 종삼위(從三位)에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으로 무문(武門)의 최고 권위(權威)였다. 이 해의 정월 13일에 모우리(毛利)()의 영국(領國)에서 쿄우()로 돌아와선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쇼우산(昌山)]이라는 도호(道號) [도우케이(道慶)]이라는 법명을 쓰는 것과 동시에 산구우(三宮)에 준하는 지위를 얻었다.(쥰산구우(准三宮))=쥬고우(准后)[각주:1].

 그런 요시아키가 히데요시가 방문하는 자리에 예를 갖추고 맞이한 것이다.


 어떠한 심경이었을까?

 요시아키와 히데요시는 1568년에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이 되기 위한 상경전(上京戰) 때 부터의 관계였지만, 그것은 쇼우군과 오다 가문(織田)의 일개 부하 장수로서의 히데요시 - 즉 주군(主君)과 배신(陪臣[각주:2])이라는 주종(主從)의 관계에서, 칸파쿠와 쇼우군이라는 동급으로 변하기는 했어도 주종의 관계가 뒤바뀐 것은 아니었던 만큼 주위의 시선은 아무래도 특이하게 비추어졌을 것이다.


 사실 이 즈음 요시아키(쇼우산)는 오오사카에 저택을 가지고 있는 한편 예전 머물던 야마시로(山城) 마키노시마(槇島)에 따로 저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히데요시의 방문 같은 행사에 행동을 같이 하고 있었다. 쿄우토(京都) 다이고(醍醐)() 산보우(三宝)()의 몬제키(門跡[각주:3])인 기엔(義演)에 따르면, 정월에 요시아키가 출가할 때 히데요시에게서 1만석을 하사 받아 오오사카에 저택을 세웠다고 하는 것을 보면 아마 무문(武門)의 상징적인 존재로써 토요토미 칸파쿠 정권의 권위를 세우는데 공헌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점에서 칸파쿠 히데요시의 방문에 따라 예를 올리는 모습도 그런 역할의 일환으로 자존심 덩어리와 같은 요시아키가 기분 나빠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히데요시와 그의 정권에 권위를 세워주는데 적극적으로 공헌하고 있다는 자부심 쪽이 강했음이 틀림 없다.


너무도서글픈 죽음


 확실히 오오사카에 저택을 가지면서부터 요시아키는 당시 토요토미 정권 최대의 군사, 외교적 안건이었던 대륙 침공 계획 등에 남보다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1591 8월.

 쇼우코쿠()()의 로쿠온(鹿苑)()의 전 원주(院主)인 사이쇼우 죠우타이(西笑 承兌)가 히데요시에게서 [카라이리(唐入[각주:4])]에 따른 수행을 명령 받았다는 이야기를 - 이 다음 달인 9 18 마키노시마(槇島)의 저택을 방문해 온 로쿠온(鹿苑)()의 현() 원주(院主) 유우세츠 즈이호(有節 瑞保)에게 전해들은 요시아키는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鹿苑日錄].

 이 이야기를 들은 요시아키가 갑자기 [속세의 명예심을 드러내 종군(從軍)할 결심](오쿠노 타카히로(野 高廣)가 쓴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을 하기 시작했는지 아니면 이미 예정 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다음해인 1592년 정월 5일에 여러 다이묘우(大名)에게 출진 명령을 내린 히데요시가 3 26일을 기해서 쿄우토(京都)를 출발함에 따라 히데요시 본진의 제 2진으로 요시아키도 종군하게 된 것이다.


 이 달(3) 20일에 입경(入京)한 요시아키는 다음 날 로쿠온(鹿苑)()의 남문(南門) 밖에 깃발을 휘날리며 로쿠온원()에 들어가 이곳을 주둔지로 삼는 한편 출진을 준비하였다.

 26일 출진식에서 요시아키는 금칠을 한 보로(母衣[각주:5])를 등에 멘 차림을 하였고, 금문(禁門)을 통과할 때에는 너무도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고 하니 더욱 눈에 뛰었을 것이다.

 총대장인 히데요시는 제 5진이었다. 환송에 나선 고요우제이(後陽成) 텐노우(天皇)의 좌석 앞에서는 말에서 내려 예()를 올렸다. 셋케([각주:6]), 신노우케(親王家[각주:7]), 몬제키(門跡)들 전부 서서 구경하여 평민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열기를 짐작할 수 있다.


 히데요시가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 ()에 도착한 것은 4 25일로 요시아키는 3500명의 장병을 이끌고 성의 외곽에 포진하였다.

 오오사카로 되돌아 온 것은 히데요시가 오오사카로 되돌아 옴에 따른 1593 8월 하순을 지나서라고 보여지는데, 이 원정의 장식물로써의 역할이 끝났는지 그 후의 모습은 확실치 않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597 8 28일.

 요시아키는 종기를 원인으로 하는 병때문에 20일 가까운 투병 끝에 죽었다. 하지만 그 죽음은 지금까지 쇼우군이라는 자존심으로 일관해 온 생전과는 달리, 히데요시에게 장례를 주관하도록 명령받은 죠우타이(承兌) 쿄우토쇼시다이(京都所司代[각주:8]) 토쿠젠인(德善院 마에다 겐이(前田 玄以))에게 관과 화장(火葬)하는 곳을 만들기 위해서 목수 두 명을 신청하여, 한 명밖에 허가 받지 못할 정도로 서글펐다.

  1. 쥬고우(准后)라는 것은 태황태후(太皇太后),태황후(皇太后),황후(皇后)의 지위에 준하는 위치나 봉록을 받는 것을 이른다. 요시아키의 선조 3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 義満)가 무가(武家)로는 처음 받은 이후 무로마치 쇼우군가(家)는 이 자격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부하의 부하를 이른다. [본문으로]
  3. 황족이나 귀족의 자제가 뒤를 잇는 절 또는 사람을 말함. [본문으로]
  4. 나중에 임진왜란이 된다. [본문으로]
  5. 등에 메는 풍선과 같이 생긴 화살막이. [본문으로]
  6. 칸파쿠를 낼 수 있는 다섯 가문. [본문으로]
  7. 텐노우(天皇)와 핏줄이 이어진 가문. [본문으로]
  8. 쿄우토(京都)의 치안과 행정을 맡은 직책. [본문으로]

아자이 나가마사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6. 11. 19. 09:58 Posted by 발해지랑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
1573
8 28
할복 29

1545 ~ 1573.

오우미(近江) 오다니(小谷) 성주(城主).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여동생인 오이치()를 처로 맞이하여 동맹을 맺지만, 맹우 아사쿠라(朝倉)()를 노부나가가 공격하였기 때문에 배반. 아사쿠라 요시카게(義景)와 함께 아네가와(姉川)의 전투를 벌이나 패배. 후에 오다니 성을 공격당하여 할복했다.






부인과 자식을 사랑하는 호북(湖北)의 용장(勇將)


 아자이 가문은(浅井)초대(初代) 스케마사(亮政)가 주가(主家)인 쿄우코쿠(京極)()를 하극상(下剋上)으로 밟고 올라 와 히사마사(久政), 나가마사로 3대가 이어져 소위 [호북의 패자(覇者)]가 되어있었다. 특히 나가마사는 조부의 기질을 이어 받아 뛰어난 무략(武略)을 발휘하여 가문의 기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1567년.

 오와리(尾張) 키요스(淸州) 성주 오다 노부나가의 동생 오이치를 처로 맞이하여 아자이 가()의 위세는 안정되게 되었다. 오이치와의 사이에 2 3녀를 두었고 이 행복이 영원이 이어질 것이라고 꿈꾸고 있었다.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받들어 상경(上京)할 때 나가마사는 망설임 없이 노부나가와 함께 롯카쿠(六角)()를 싸워 추방시켰다.


 하지만 나가마사는 노부나가의 이기적인 면을 꽤 뚫어 보지 못했다. 아니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부인이나 자식들을 너무 사랑하여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었을 것이다.노부나가는 나가마사의 사람 좋은 것을 이용하여 약속을 위반하였다.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 공격이었다.


노부나가와 갈라서다.


 나가마사는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을 때 - 에치젠의 아사쿠라씨()는 조부 스케마사의 시대부터 친밀한 관계이니 자신한테 알리지 않고 아사쿠라씨()를 공격하지 않는다. 만약 아사쿠라씨()를 공격할 때에는 사전에 나가마사의 이해를 구하도록 굳게 약속했다.

 그러나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은 노부나가를 싫어하여번히 쿄우()로 올라오도록 한 요청에도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다의 속성(属城)인 테즈츠(手筒), 카나가사키()를 빼앗아 버린 것이다. 노부나가는 격노하여 나가마사에게 통보하지 않고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의 원군과 함께 에치젠 공격을 감행했다. 1570 2월이었다.


 그야말로 오다군의 선봉이 아사쿠라의 본거지인 이치죠다니(一乗谷)를 포위하려 할 즈음 노부나가는 나가마사가 배반하여 요시카게에게 가담한 것을 알게 되었다. 옛 의리를 중요시 하는 부친 히사마사의 설득에 의한 것이었다고도 하지만 거기에는 나가마사의 논리가 있었으며 맹목적으로 노부나가를 섬길 수 없다는 오우미(近江) 무사의 의지도 있었을 것이다. 노부나가는 에치젠에서 철수를 명하고 쿄우()로 돌아갔다. 앞뒤로 협격 당하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사태는 같은 해 6월의 아네가와(姉川) 전투로 발전했다.

 이부키(伊吹)산에서 비와코(琵琶) 호수로 흘러 들어가는 아네가와 천을 사이에 두고, 오다-토쿠가와 연합군과 아자이-아사쿠라 연합군이 싸웠다. 선전했지만 노부나가 측의 머릿수에 눌려 나가마사 측은 패배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나가마사는 거성(居城)인 오다니 성을 중심으로 끊이지 않고 노부나가 진영을 공격하여 괴롭혔다.


부인과 자식을 도망시키고 철저항전


 부인과 자식을 가진 인간은 자식이 성장함과 동시에 보수적인 자세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

 필시 나가마사도 그랬음에 틀림이 없다. 오오기마치(正親町) 텐노우(天皇)의 명령를 바탕으로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중개에 나서자 나가마사는 간단히 화의(和議)에 응했다. 성립은 1570년 12월 14.

 이것을 좋지 않게 생각한 나가마사 휘하의 무장도 있었다. 이소노 카즈마사(磯野 員昌) 등의 부하 장수들이 나가마사에게는 더 이상의 가망성이 느낄 수 없다고 단념하며 뒤를 이어 노부나가에게 항복하였다. 나가마사의 수동적인 모습에 실망을 느꼈기 때문이다.


 노부나가는 집념이 강하다. 자신을 거역한 자를 방치해 두는 성격이 아니다. 우선 1573 8월에 에치젠을 공격하였고, 20일에는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자살로 몰았다. 일족인 아사쿠라 카게아키라(朝倉 景鏡)의 배반이 원인이었다. 그리고 노부나가는 이 공격의 기세를 이용하여 나가마사의 오다니 성을 포위하였다.


 8 26일.

 노부나가는 오우미(近江)의 토라고젠(虎御前)산에 포진하고, 후와 카와치노카미(不破 河內守)를 사자로 하여 나가마사에게 항복을 권고하였다. 요시카게를 쓰러트린 지금 나가마사에게는 원한이 없으니 항복한다면 나쁘게는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나가마사가 거절하자 이번엔 야마토(大和) 일국을 주겠다고 하였다.

 나가마사는 1568년 오우미(近江) 침공부터 6년 간 노부나가의 동향을 빠짐없이 관찰해 왔다. 아무래도 목숨을 구해 줄 것 같은 상대가 아니다. 나가마사는 다시 거절했다.

 이 이야기는 결국 오다니성에 농성하는 무장들을 동요시켜 전투의욕을 잃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졌다.


 카와치노카미가 돌아가자 부인인 오이치노카타(市の方)를 설득하여 딸 세 명(챠챠([각주:1]), 오하츠(お初), 오고우(お江[각주:2]))과 함께 노부나가에게 보냈다. 아들인 만부쿠마루(万福丸)와 이쿠마루(幾丸[각주:3])는 도망치지만 만부쿠마루는 잡혀서 살해당한다.


 나가마사는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고 성 밖으로 나가 용감하게 싸웠다. 그리고 8 28일. 성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아카오 미마사카노카미(赤尾 美作守)의 저택에서 할복하였다. 향년 29.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는 사람이 많았다.

  1. 후에 요도도노(淀殿). [본문으로]
  2. 후에 에도 바쿠후(江戸幕府) 2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의 부인. [본문으로]
  3. 갓난 아기였기에 절로 보내져 중이 되었지만 후에 호소카와(細川)씨의 가신이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나오마사[井伊 直政)]

1602 2 1 전상사(戰傷死[각주:1]) 42

1560 ~ 1602.

이마가와 씨[今川氏]에게 쫓겨나 방랑의 몸이 되나 후에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를 섬기며 '이이의 적비대[井伊の赤備え[각주:2]]를 이끌고 용명을 떨쳤다.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에서 도주하는 시마즈[島津] 군세를 추격하지만 이 때 입은 상처가 원인이 되어 죽었다.










이이의 적비대


 에도 시대[江戸時代], 토쿠가와 쇼우군 가문[将軍]후다이[譜代] 다이묘우[大名] 필두의 지위를 점하고 있었던 것이 이이 가문[井伊]의 '오우미[近江] 히코네[彦根] 30만석'이었는데, 이이 문이 당시엔 신참의 가문이었다는 것은 이외로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지위는 전적으로 초대 나오마사[直政]가 발군의 활약을 펼쳤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이 가문은 토오토우미[遠江] 이이노야[井伊谷]의 호족으로 대대로 이마가와 씨[今川)]를 섬겼다. 그러나 1562년에 부친 나오치카(直親)가 이마가와 씨에게 살해 당하자, 2살인 나오마사는 이이노야에서 도망쳐 각지를 전전한다.


 1575년.

 15살에 이에야스[家康]을 섬기며 이이노야의 옛 영지를 되찾게 된다. 이후 나오마사는 이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하타모토(旗本[각주:3])의 측근으로 많은 전투에 참가한다.


 혼노우 사[本能]의 변 직후 이에야스 최대 위기인 이가도피행[伊賀越え[각주:4]] 때도 함께 했으며, 그 후 코우슈우[甲州] 공략에도 참가[각주:5], 그 공적으로 타케다 가문[武田]에서도 용맹함을 자랑하던 츠치야 중[土屋], 야마가타 중[山県], 오바타 당[小幡] 등을 부하로 거느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타케다 가의 적비대[赤備]를 모방하여, 갑옷부터 깃발[], 등에 꽂는 작은 깃발[指物], 갑옷 위에 입는 덧옷[陣羽織]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붉은 색으로 통일했다. 나오마사는 이 적비대를 이끌고 선봉을 다투었고,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 전투에서의 활약으로 인하여, '붉은 귀신[赤鬼]'라는 이명으로 두려움을 얻게되었다. 이후 이에야스가 가는 곳엔 항상 선봉을 맡아 돌진하는 나오마사와 적비대가 있었다.


 그 결과 이에야스를 섬긴 지 10년 만에 미카와 후다이[譜代]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사카키바라 야스마사[原 康政] 등과 함께 이에야스의 삼걸(三傑)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1590년 이에야스가 칸토우[]로 이봉 되었을 때에는 코우즈케[上野] 미노와[箕輪 - 후에 타카사키(高崎)로 옮김) 12만석을 받았다.

 12살 연상인 타다카츠, 야스마사를 뛰어넘어 불과 15년 만에 토쿠가와 가신단 중 최고의 영지를 영유할 수 있었던 것은, 이에야스가 가문이나 문벌에 구애 받지 않고 능력만을 평가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이이 가문의 후다이[譜代] 필두라는 지위는 에도 시대를 통해서도 변함이 없었다.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무단 돌진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나오마사는 혼다 타다카츠와 함께 동군(東軍) 선봉의 군감(軍監[각주:6])으로 참가했다. 이 때 40세였다.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 토요토미[豊臣]계 유력 무장을 중심으로 한 동군에서, 히데타다[秀忠]가 거느린 토쿠가와 본대(本隊)가 도착하지 않은 당시, 토쿠가와 가문의 주력은 사실상 나오마사와 그의 사위이자 이에야스의 넷째 아들인 마츠다이라 타다요시[松平 忠吉] 휘하 약 6천의 병력이었다.


 향후의 천하를 판가름하는 결전이라 생각한 나오마사는 토요토미계 다이묘우[大名]에게 선봉의 공을 빼앗꼈다간, 토쿠가와의 천하가 되더라도 후환이 남을 것이라 생각하여 이에야스와 타다카츠에게 설명하고 일부러 무단 돌진을 감행하기로 한다.


 15일 이른 아침. 휘하의 적비대[赤備え]에서 추리고 추린 30()를 이끌고, 이번 전투가 데뷔전인 타다요시와 함께 한 나오마사는 선봉인 후쿠시마의 선두 부대장인 카니 사이조우[可児 才蔵]의 제지를 물리치고[각주:7] 빠져나가 맨 앞까지 진출하여 서군(西軍)에게 철포를 쏘았다. 이것으로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 싸움에서 나오마사와 타다요시의 활약이 뛰어났는데 특히 전대미문의 적중돌파(敵中突破)를 시도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를 추격하여, 그의 조카인 토요히사(豊久)를 죽이기 까지 했다. 이 때 시마즈 대()의 결사적인 반격에 타다요시가 부상을 당했고, 나오마사도 투구와 오른손 엄지손가락, 거기에 오른 팔과 타고 있던 말에 총격을 받아 낙마하여 한때는 실신했다고 한다. 본진으로 돌아온 둘을 맞이한 이에야스는 직접 나오마사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며오늘 싸움에 있어서 제일 큰 공을 세웠다며 극찬하였다.


 전후 처리로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본거지였던 오우미[近江]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의 공략, 서군의 총대장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항복의 알선, 토사[土佐]의 쵸우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 盛親]에 대한 대응 등 군사적인 면뿐만 아니라 외교, 통치 등의 면에서도 큰 공적을 올렸다.


너무도 이른 죽음


 세키가하라 전쟁 후의 논공행상으로, 1601 2 이에야스는 나오마사에게 이시다 미츠나리의 성이었던 오우미[近江] 사와야마 성 새로이 6만석을 더해 합계 18만석을 하사했다. 그리고 서국 다이묘우[大名] 감시와 쿄우토[京都]의 조정 수호라는 특별임무를 부여했다. 10월에 나오마사는 타카사키[高崎]에서 새로 보수한 사와야마 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나오마사는 이시다 미츠나리의 통치를 존중하여 민정의 안정을 꾀하는 한 편, 신영주 이이 의 거성 만들기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의 겨울부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얻은 오른 손 엄지의 총상이 차츰 악화되어 다음 해인 1602년 2월 1 42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화장(火葬)을 한 후 유골은 히코네[彦根]의 세이료우 사[淸凉]에 묻혔다.


 비노니. 아들의 아들의 아들까지 마지막까지 지켜다오 대지의 신들이여
 
るぞよ 子のすへの 末までも まもれあふみの 国津神
 라는 시를 남겼는데, 귀신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맹장도 13살의 어린 장남 나오카츠[直勝][각주:8] 등의 장래와 이이 가문의 존속을 대지의 신들에게 빌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토쿠가와 바쿠후[幕府]를 세우는 도중에 쓰러진 나오마사의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나오마사 부인의 양아버지이기도 한 이에야스도 특별히 신경을 썼다. 그리고 가신단(家臣團)도 또한 확실히 그의 뜻에 응하였다.

  1. 전쟁터에서 얻은 상처로 인한 죽음 [본문으로]
  2. 무구 일체를 전부 붉은 색으로 통일한 부대. [본문으로]
  3. 직속 부하를 말한다. [본문으로]
  4. 이에야스가 사카이(堺)에서 본국으로 돌아가는 도중 이가(伊賀)라는 지방에서 죽음을 각오할 정도로 고생했다는 것을 말함 [본문으로]
  5. 노부나가[信長]가 죽은 1582년 당시 카이[甲斐] 등 옛 타케다 가문의 영지를 막 손에 넣었던 터라, 오다 가문[織田家]의 영주들은 거의 적의 땅이나 다름 없던 옛 타케다의 영지에서 도망쳐 자신들의 본거지로 돌아간 터라 빈집이나 다름 없었다. [본문으로]
  6. 부대가 싸우는 모습이나 배반하는 지를 감시하는 역할. [본문으로]
  7. 이 때 나오마사는 처음 전장에 나서는 타다요시에게 전장의 분위기를 익히게 하기 위해서 구경하고 온다고 말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8. 나오마사의 장남이나 병약했기에 후에 가독과 히코네 번을 배 다른 동생 나오타카[直孝]에게 양보하고 안나카 번[安中藩] 3만석에 봉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병약했다지만 나오카츠는 72살까지 산 반면 나오타카는 69살에 죽었다. [본문으로]

이시카와 가즈마사 (石川 数正)

1592 12월 병사? 연령 불명

? ~ 1592 ?

토쿠가와(德川) 후다이(譜代)의 가신으로 이야야스를 섬기며 외교, 내정에서 활약하지만,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의 합전 후 갑자기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로 달려가, 시나노(信濃) 마츠모토(松本) 10만석에 봉해진다. 분로쿠의 역(文禄の役[각주:1])에서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으로 출진하지만 이 곳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림은 태합입지전 V>







오해 받아온 역사


 이시카와 이즈모노카미(出雲守) 카즈마사(후에 야스마사(康正))는 처음에 토쿠가와 이에야스를, 후년에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를 섬긴 무장이다.

 이에야스에게서 히데요시로 말을 갈아탄 이유가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변절자와 같은 오해를 주기 때문인지 일반에게는 그다지 인기가 없다. 토쿠가와 바쿠후(幕府)의 관리나 학자의 저서에서도 가벼운 취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에야스가 인질이 되었던 시기부터 그를 위해 힘쓴 공적은 크며 또한 토쿠가와 가문의 일익을 담당한 중요한 중신(重臣)이었던 것만은 틀림 없다.


 태어난 해가 확실치 않지만 이에야스보다도 10살 정도 연상이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이에야스와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동맹을 성립시킨 것을 시작으로 외교, 내정 양쪽에서 수 많은 공적을 올렸고, 노부나가가 죽은 혼노우(本能)()의 변 때는 이에야스를 지키며 이가 도피행(伊賀越え[각주:2])을 함께 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가 가족과 일족을 이끌고 이에야스의 진영에서 빠져나와 히데요시의 가신이 된 것은 1585년 11월 13 이었다.

 당시 그는 이에야스를 대리해서 미카와(三河) 오카자키(岡﨑) 성을 지키고 있었다. 그 전해인 12월에는 자신의 장남인 야스나가(康長)와 차남 야스카츠(康勝)에게 명하여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는 이에야스의 차남 오기마루(於義丸 히데야스(秀康))를 보호하여 히데요시에게 보내는 역할을 맡겼다. 이렇듯 이에야스의 절대적인 신임를 받던 카즈마사가 이에야스에게 한계를 느끼고 떠날 것이라고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듯 하다. 코마키-나가쿠테 전투 후의 평화 교섭을 담당하는 등 히데요시와 접할 기회도 많았던 카즈마사를 히데요시가 많이 꼬드겼을 것이다.


 히데요시의 진영으로 말을 갈아탔을 당시 그는 50세 전후였다고 추정된다. 사망한 것은 그로부터 7년 후인 1592년이기에 이미 말년에 해당한다. 히데요시 휘하에서도 처음부터 중신의 대우를 받으며 통 크게 이즈미(和泉) 내에 10만석의 소령(所領)이 주어졌다(소령의 크기에는 이설 있음). 그리고 큐우슈우(九州) 평정이나 오다와라(小田原) 호우죠우(北条)() 공략에도 참가했다. 그 공적에 대하여 4년 후인 1590년에는 시나노 마츠모토 10만석(실제는 8만여석)에 봉해진다.

 연령은 50대 중반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편안한 은퇴 생활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마츠모토 성 주변은 그때까지 이에야스의 영지, 적지 한가운데에 던져진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카즈마사에 대한 적개심이 강한 주민을 다독거리면서 본거지인 마츠모토 성을 개축하는 것도 급선무였다. 은거는 커녕 지금보다 더 정력적으로 자신의 새로운 영지를 돌아다니며 정무에 몰두했다.


확실치 않은 죽음의 전후


 그러나 새로운 영지에서 차분히 통치를 할 틈도 없이 히데요시에게 중대한 명령을 받았다. 히데요시는 예전부터 꿈꿔왔던 명국 정벌의 제 일보로써 1592년 정월 조선으로의 출병을 결심하며 카즈마사에게도 출병을 명령한 것이다.

 명령을 받은 지 2개월 후인 3월 하순. 카즈마사는 5백명의 병사를 이끌고 큐우슈우(九州)로 내려가 히젠(肥前)의 나고야에 도착하였다. 카즈마사의 옛 주군인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1 5천 명의 대군을 동원해 온 것은 격이 다르니 그렇다 치더라도 같은 시나노(信濃)의 다이묘우(大名)인 센고쿠 히데히사(仙石 秀久)도 천 명을 인솔해 왔다. 그에 비하면 카즈마사의 군단은 작았다.

 그 이후 전국에서 동원된 여러 다이묘우(大名)는 자신의 군세를 이끌고 계속해서 바다를 건넜다. 그러나 카즈마사가 조선으로 건너갔다는 기록은 없다. 히데요시의 신변을 경호 또는 군의(軍議)를 주제하는 참모로서 나고야에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는 히젠 나고야에 있던 중에 병에 걸려 그것이 원인이 되어 죽은 듯 하다.

 무슨 병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일설에는 복어를 먹다가 잘못되어 죽었다고 한다. 정확한 사망일도 알려져 있지 않은데 나고야(名護屋)에 있던 1592년 늦은 시기 - 12월 즈음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같은 해 12 14일에 쿄우()의 시치죠우 강변(七条 河原)에서 장례식이 행해졌기 때문이다.


 카즈마사는 나고야에서 병이 나 치료를 위해서 쿄우까지 돌아왔다가 죽었다고도 한다.

 다른 한편으론 출정 중인 것도 있어 나고야의 진중에서 죽어 유체는 같은 곳에서 화장되고, 유골만이 쿄우토로 옮겨졌다는 설도 있다. 일년 후인 1593년이 되어서 죽었다는 설도 있어, 카즈마사의 말년의 모습과 죽음의 전말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점이 많다. 인품이나 사상도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카즈마사는 히데요시에게 냉우(冷遇)받았다는 설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가 이에야스를 배반하고 히데요시에게로 달려간 것을 안 좋게 생각한 사람도 있어 그것이 이러한 기록 말소나 혼란을 초래한 듯하다.

  1. 일본에서 임진왜란을 지칭하는 말 [본문으로]
  2. 이에야스가 사카이(堺)에서 본국으로 돌아가는 도중 이가(伊賀)라는 지방에서 죽음을 각오할 정도로 고생했다는 것을 말함. [본문으로]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康政)

1606 5 14 병사 59

1548 ~ 1606.
어려서부터
토쿠가와 이에야스
[德川 家康]를 섬겼으며, '토쿠가와 사천왕[徳川 四天王][각주:1]'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아네가와[][각주:2], 나가시노[長條][각주:3] 전투 등에서 활약하였고, 이에야스가 칸토우(関東)로 이봉(移封)되자, 코우즈케[上野] 타테바야시[館林] 10만석에 봉해진다. 히데타다[秀忠][각주:4]의 보좌역을 맡으며 그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무공파(武功派) 의 대표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의 가문은 야스마사의 조부 키요나가[淸長]가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부친 마츠다이라 히로타다[松平 広忠]를 섬긴 이래의 미카와[三河] 오카자키 후다이[岡﨑 譜代[각주:5]]이다.


 1560년의 오케하자마 전투[桶狭間の戦い][각주:6] 직후에 마츠다이라 가 씨사(氏寺[각주:7])인 다이쥬[大樹]에서 이에야스를 배알하였다. 이 때 야스마사 13. 이에야스보다 6살 연하였다. 이후 이에야스의 측근으로 많은 전투에서 무공을 세웠고 혼노우[本能]의 변[각주:8] 직후 이에야스 최대의 위기 '이가 도피행[伊賀越え]' 때도 함께 있었다고 한다. 야스마사의 [야스()]는 이에야스에게 일자배령(一子拜領[각주:9])을 받은 것으로 이러한 공적에 대한 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의 전투에서는 히데요시의 행동을 비난하는 격문을 돌려 히데요시를 크게 화나게 했다. 이 즈음부터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와 더불어 이에야스에게 [삼걸(三傑)이 있다]고 칭송 받게 되었다.


 1590년 칸토우 입국에 따라 코우즈케 타테바야시 10만석이 주어져, 역시 카즈사[] 오오타키[大多喜]에 10만석을 받은 타타카츠와 함께 이이 나오마사에 버금가는 후다이 직신(直臣) 2위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이 때 나오마사 43세였다. 이후 16년간 성 밑 마을(城下町)의 정비나 민정에 조력하여 타테바야시 번()의 경영에 힘 썼다.


미토[水戶] 전봉[転封] 사퇴


 1600년.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에서 53세의 야스마사는 토쿠가와 본대(本隊)를 이끈 히데타다 군의 선봉장으로 토우산도우[東山道]를 거슬러 진군하였다. 그러나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 노부시게[信繁[각주:10]] 부자(父子)시나노[信濃] 우에다[上田城] 공략에 시간을 너무 지체하여, 결국 결전에 참가하지 못하는 추태를 범했다. 젊은 지휘관 히데타다가 공을 서두른 것이 첫째 원인이지만, 선봉장이면서 전투의 스페셜리스트였던 야스마사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난 뒤 논공행상에서 야스마사가 빠진 이유도 이런 점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단, 논공행상에 대해서 '사카키바라 계보[榊原 系譜]'에는 다음과 같은 이설(異說)이 쓰여져 있다.

 1601년에 이에야스에게서 히타치[常陸] 미토[水戶] 25만석으로의 전봉이 타진되었지만, 야스마사는 거부하였다. 그 이유로 미토는 오우슈우(奧州)를 제압하는 요충지이기 때문에 여차할 때에 성을 비우고 출진하기가 쉽지가 않다. 또한 예전 칸파쿠[関白]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가 히데요시에게 멸망 당했을 때 이에야스의 명령을 받고 단 하루만에 이에야스의 본진을 따라 잡을 정도로 신속히 행동을 취할 수 있었던 것도 타테바야시에 있었기 때문이다. 미토라면 3일은 걸릴 것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선봉을 맡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의 진위는 확실하지 않지만 무공만으로 토쿠가와 가문을 크게 만들어 왔다는 자부심을 강하게 가지고 있던 야스마사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다.


체념과 반골


 한편 세키가하라의 전투를 계기로 무력으로 토쿠가와 가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사라졌다. 그리고 막부 성립 후는 타다카츠나 야스마사 등 무공파를 대신하여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 등 문치파(文治派)가 이에야스에게 중용 되는 것이 시대의 추세였다.

 사실 야스마사는 세키가하라의 전투 이후 이에야스 측근의 지위에서 물러나 타테바야시의 경영에 힘을 쏟아 막정(幕政)의 무대에 나서지 않게 되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제 야스마사 등 무공파가 나설 곳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들을 대신하여 등장한 혼다 마사노부 등의 문치파 세력과 마찰을 일으켜 토쿠가와 가문의 내분이 천하에 알려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막정에 대해 참견하지 않도록 힘 쓴 결과라고 한다. 야스마사가 단순한 [저돌적인 멧돼지 무사]가 아닌 세상의 변화를 구별할 수 있는 눈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이,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의 평가이다.


  죽을 때가 되어서 장염이 악화되었을 때 쇼우군[将軍] 히데타다와 오오고쇼[大御所] 이에야스에게서 병문안의 사자가 파견되었지만 대응에는 명확한 차이를 두었다고 한다.

 히데타다의 사자에게는 누워 있던 이불에서 나와 예복을 차려 입고 감사의 말을 전했다.

 한편 이에야스의 사자에게는 이불에 누운 채로 '장이 썩어서 얼마 안가서 죽을 것'이라고 전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히데타다에게는 세키가하라 전쟁에서 쓰디쓴 경험을 맛보게 했다는 자책의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신하로서 정중한 태도를 끝까지 잃지 않았다. 토쿠가와 가문에서 '인품 제일'이라 평가 받던 야스마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한편 이에야스에게는 시대의 흐름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많은 피를 흘려 온 무공파를 대신해서 문치파를 중용하는 이에야스에 대한 반발심이 자신도 모르는 새에 나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이 썩었다'는 것은 예전 야스마사가 마사노부를 욕할 때 사용하던 말이었다.


 이에야스와 히데타다의 사자가 온 지 얼마 안 된 1606년 5월 14일.

 야스마사는 타테바야시 성에서 59세로 죽었다.

  1.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 혼다 타다카츠(本多忠勝),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등의 토쿠가와가(家)를 지탱한 네 명의 공신을 지칭. [본문으로]
  2. 1570년에 오다-토쿠가와[織田・徳川] 대 아자이-아사쿠라[浅井・朝倉]간에 벌어진 전투. [본문으로]
  3. 1575년 오다-토쿠가와[織田・徳川] 대 타케다[武田] 간에 벌어진 전투. 보통 타케다의 기마 돌격을 오다 3단 철포로 물리쳤다는 떡밥으로 유명한 전투. [본문으로]
  4. 이에야스의 아들. 후에 에도 막부[江戸幕府} 2대 쇼우군[将軍] [본문으로]
  5. 마츠다이라 가문(=토쿠가와 가문)이 오카자키에 자리를 잡았을 때 마츠다이라 가문의 부하가 되어 대대로 섬긴 가문. [본문으로]
  6. 1560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를 물리친 전투. [본문으로]
  7. 문의 위패를 모신 절. [본문으로]
  8. 1582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쿄우토[京都] 혼노우 사[本能寺]에 머물다 자신의 부하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반란에 살해당한 사건. [본문으로]
  9.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자신의 이름 중 한 글자를 내리는 것. [본문으로]
  10. 보통 사나다 유키무라[真田 幸村]로 유명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