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치스카 코로쿠 마사카츠(蜂須賀 小六 正勝)의 이름은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도적 두목이었던 코로쿠가 소년 시절의 히데요시 즉 히요시마루(日吉丸)와
야하기(矢作) 다리[각주:1]위에서 만났다. 다리 위에서 자고 있던 부랑아 히요시마루의 머리를 발로 차서 깨우자 소년을 대담하게도 “무례하구나! 이리 와 사과하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코로쿠는 그 호방함에 반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시바 료우타로우(司馬 遼太郎) 선생의 글에 나오는 것인데, 선조가 도적이라는 것에 옛
아와(阿波) 번주인 하치스카 후작은 창피를 느꼈다고 한다. 메이지(明治) 시대에 귀족원 의장을 지낸 하치스카 가문의 당주 모치아키[각주:2](茂韶) 후작은 어느 날 메이지 텐노우(明治天皇)를 알현하였을 때 테이블에 진귀한 담배가 있었기에 2~3개를 품 안에 넣었다. 도중에 자리를 뜬 텐노우(天皇)가 그것을 알아차리고는 “역시 선조는 속일 수 없구만”하고 크게 웃었다고 한다. 텐노우(天皇)까지 하치스카 코로쿠가 도적이었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각주:3]
 
그러나 이 불명예스러운 전설은 쇼우와(昭和) 초기 와타나베 요스케(渡辺 世祐) 박사의 고증으로 인해 사라지게 된다. 무엇보다 당시 야하기바시 다리는 걸려있지 않았다는 것이 명확해 진 것이다.[각주:4]

 하치스카 가문은 도적 따위가 아닌 오와리(尾張) 아마 군(海部郡)의 호족으로, 현재도
렌게 사(蓮華寺)라는 이름있는 절이 남아있어 그곳에는 하치스카 가문에 관한 문서가 전해지고 있다.

 히데요시와 연을 맺게 된 것이 히데요시의 떠돌이시절인지 오다 가문(織田家) 내에서 만나면서부터인지 확실치 않지만 코로쿠 마사카츠가 세상에 얼굴을 내밀게 된 계기가 된 것은 히데요시의 스노마타(墨俣) 축성으로 인해서이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는 자신의 영지(領地)인 오와리(尾張)와 사이토우 가문(斉藤家)의 미노(美濃)와의 국경에 성을 쌓아 전선기지로 만들려고 하였지만 사이토우 군의 방해로 인해 그 시도는 참담한 결과로 끝나 거의 불가능이라 여겨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오다 가문에서도 미관말직이던 토우키치로우(藤吉郎=히데요시)가 단번에 만들어 버렸다. 세상에서 말하는 ‘스노마타 일야성(墨俣一夜城)’이다. 이를 계기로 토우키치로우는 크게 출세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성공의 뒤에서 활약한 것이 코로쿠 마사카츠이다.[각주:5] 코로쿠는 휘하의 도적들을 거느리고 스노마타 축성 공사와 수비에서 활약하였다. 스노마타 성이 완성되자 코로쿠는 오다 가문에 고용되어 성주가 된 토우키치로우를 돕는 역할을 하게 된다.

 코로쿠 마사카츠에게도 무공담은 전해지지만 그의 본질은 정략(政略)에 있었다.
 히데요시의 전투 방식은 상대를 죽이지 않고 항복시키는데 있었다. 상대를 이익으로 꼬시는 것인데 그 역할을 코로쿠가 담당하였다. 히데요시의
츄우고쿠(中国) 정벌에서 비젠(備前), 빗츄우(備中), 미마사카(美作), 호우키(伯耆)등의 여러 성을 공략했을 때 대부분 마사카츠의 외교절충으로 무혈 개성시켰다. 세토 내해(瀬戸内海)의 해적들도 코로쿠의 뛰어난 외교로 히데요시의 산하가 되었다.

 특히 가장 커다란 외교적 무대가 된 것은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 공략 시의 절충이었다.
 츄우고쿠(中国)의 실력자 모우리 씨(毛利氏)와의 강화(講和)가 이번 공성전의 처리 결과에 달려 있었다. 마사카츠는
쿠로다 칸베에(黒田 官兵衛)와 함께 모우리의 외교승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惠瓊)와 화의 교섭을 거듭하고 있었는데 하필 그때 혼노우 사(本能寺)의 변보가 전해진 것이다. 노부나가가 횡사했다는 소식이 모우리 측에 전해지면 강화는커녕 오다의 원군을 기대할 수 없기에 히데요시의 군은 모우리의 총공격에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패했을 것이다. 마사카츠는 이 중대한 위기 속에서 타카마츠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清水 宗治)를 할복시키며 화의를 성공시킨 것이다.

 하치스카 가문은 후에 아와(阿波) 토쿠시마(徳島) 25만 7천석으로 막말까지 이어진다.

[하치스카 마사카쓰(蜂須賀 正勝)]
오와리(尾張)
하치스카 출신. 처음엔 그 지역의 소영주(小領主)였지만 오다 가문(織田家)을 섬겨 노부나가(信長)의 명령으로 히데요시(秀吉)에게 배속[각주:6]. 1581년 하리마(播磨) 타츠노(竜野) 성주가 된다. 1586년 오오사카(大坂)에서 죽었다.

  1. 링크된 맵은 야하기 야하기바시 역(矢作橋駅). 오른쪽에 흐르는 것이 야하기가와 강(矢作川). 다리는 역에서 동북쪽 근처에 있었다 한다 [본문으로]
  2. 이 책에서는 ‘시게아키’라고도 루비가 되어 있지만 ‘茂’라는 글자는 14대 쇼우군 토쿠가와 이에모치(徳川 家茂)의 모치(茂)를 물려 받았으니 모치아키가 정확하다. [본문으로]
  3. 모치아키의 부친 나리히로(斉裕)는 에도 바쿠후 11대 쇼우군 토쿠가와 이에나리(徳川 家斉)의 아들로 하치스카 가문에 양세자로 들어갔기에 혈연적으로 이어져 있지는 않다. [본문으로]
  4. 야하기바시 다리는 1601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참고로 히데요시는 1598년에 죽었다. [본문으로]
  5. 이 이야기는 주로 무공야화(武功夜話)의 기술에 따른 것이라고 하는데, 그 책에는 현대에나 쓰는 말이나 당시에는 없었지만 마을끼리 합병되면서 만들어진 지명, 교차검증에 따라 틀린 기술이 많은 점 등으로 인해 근년 무공야화는 위서(僞書)가 아니냐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본문으로]
  6. 1573년에 아자이 가문을 멸망시킨 노부나가가 히데요시에게 옛 아자이 가문 영지를 하사하였을 때 히데요시에게서 1600석의 영지를 받았다고 하니 이 즈음부터는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볼 수 있다고 본다. [본문으로]

 사서는 타케나카 한베에(竹中 半兵衛)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모략 있는 인물이었지만 얼핏 보기에는 여성을 보는 듯 했다]
 흰 피부에 나서지 않는 성격이었던 듯하다.
 전투에 임해서도 위압감을 풍기는 듯한 인물이 아니었다. 말가죽으로 된 갑옷을 입고 목면으로 된 겉옷(
羽織)를 걸쳤으며 투구의 장식이 이치노타니()[각주:1]라는 평범한 것이었다.

 한베에에게는 기묘한 버릇이 있었다.
 평소에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다리를 자주 움직였으며 추울 때는 손을 파리처럼 비벼댔다. 자신의 주군인 히데요시(
秀吉)[각주:2]의 앞이라 하더라도 다리를 정신 사납게 떨거나 바꾸었다. 매우 의아히 여긴 어느 사람이 그 이유를 물었다. 한베에의 대답은 이러했다.
 "이것은 단순한 버릇이 아니야. 갑작스런 사태가 일어났을 때 막상 다리가 저리거나 손이 얼어서 움직이지 못하면 어처구니가 없잖아? 조금 버릇없이 보일지는 몰라도 급작스런 때를 의해서 이러고 있는 것이지"
 체면을 신경 쓰지 않는 성격임을 알 수 있는 이야기이다.

 한베에는 센고쿠(戦国) 굴지의 천재군략가로서 유명하다. 그 병법의 묘를 완벽한 작품으로써 살려 세상에 이름을 날린 것이 미노(美濃) 이나바야바 성(稲葉山城) 쿠데타이다.
 1564년 한베에는 21살. 도우산(
道三)의 시대부터 사이토우 가문(斉藤家)에게 보호를 받고 있었지만, 이 당시의 사이토우 가문 당주는 도우산의 손자 타츠오키(竜興)였다. 암우하며 주색에 허우적대는 인망이 없는 당주였다.
 한베에의 장인인 안도우 이가노카미(
安藤 伊賀守)[각주:3]가 행실을 올바로 하라고 충언을 하자 타츠오키는 도리어 화를 내며 근신 처분을 내렸다. 그러자 타츠오키의 측근들은 안도우 이가노카미의 사위인 한베에도 무시하기 시작하여 어느 날 술 마시고 있던 요시오키의 총신()은 망루에서 등성하고 있던 한베에에게 오줌을 쌌다. 이때 한베에는 얼굴색 하나 안 바뀌고 그대로 그 자리를 떠났지만 마음속으로는 주군 타츠오키를 시작으로 한 이나바야마 성 안에 있는 자들의 콧대를 꺾어 놓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한베에는 타츠오키의 시동인 동생 큐우사쿠(久作)[각주:4]에게 꾀병을 부리라고 하여 그 간병을 핑계로 의약품을 실은 수레를 성 안에 들여보냈다. 그 안에는 무구를 숨겨 놓았다. 이렇게 한베에와 그 부하 17명은 성 안 깊숙한 곳에 있는 큐우사쿠의 방에 들어가 거기서 날이 저무는 것을 기다렸다. 곧이어 밤이 되자 한베에 일당은 재빨리 전투준비를 마치고 그 중 한 명이 성 안에 위급을 알리는 북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북을 쳤다. 갑작스런 북소리에 성 안 모두가 당황했다. 그 순간 숨어있던 한베에의 부하들이 숙직하는 무사들을 습격했다.
 처음 약속한대로 다시 북을 치자 한베에의 장인인 안도우 이가노카미가 수하 천여 명이 이끌고 단번에 성안으로 들어왔다. 당황한 타츠오키는 여성들과 함께 서둘러 도망쳤다.

 한베에는 뛰어난 지략으로 순식간에 이나바야마 성을 손에 넣은 것이다. 그러나 원래부터 빼앗을 생각은 없었기에 그 뒤 순순히 성을 타츠오키에게 건넸다.[각주:5] 그리고 자신은 모반을 일으킨 사람이라며 거성인 보다이야마 성(菩提山城)를 동생 큐우사쿠에게 물려주고는 오우미(近江) 이부키야마(伊吹山) 산기슭에 은거해버렸다. 거기서 세상과 연을 끊고 독서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한베에가 다시 전란의 세상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3년 후였다. 1567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공격받은 사이토우 타츠오키가 이세(伊勢)로 도망쳐 미노(美濃)는 노부나가의 것이 되었다. 한베에도 장인 이가노카미의 주선으로 오다 가문을 섬겼고 다음 해인 1568년에는 키노시타 토우키치로우(木下 藤吉郎)[각주:6]에게 파견되어 이후 히데요시의 참모로서 그 지능을 한껏 발휘하게 된다.

 1570년 오다 노부나가는 아자이(浅井)-아사쿠라(朝倉) 연합군을 아네가와(姉川) 전투에서 물리쳤고 그와 동시에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의 거성 오다니 성(小谷城)의 지성(枝城)인 요코야마 성(横山城)를 점거하여 히데요시에게 수비를 명했다.
 다음 해인 1571년.
 아자이 나가마사는 이 요코야마 성을 탈취하기 위해서 히데요시가 없는 틈을 타 7000의 군사를 이끌고 맹공을 가했다. 한베에가 수성의 지휘를 맡았다. 한베에는 일부러 성안 병사가 적게 보이도록 만든 뒤 적이 깔보고 성에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기다려 일제히 사격했다. 아자이 군의 기세가 죽어 물러나면 쫓는 일 없이 제자리를 지켰고 또 공격해 오면 총과 활을 쏘는 전법을 거듭했다.
 곧이어 해가 저물자 아자이 군은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한베에가 기다리던 바였다. 미리 성 밖에 수백 명의 저격병을 숨겨 놓았던 것이다. 그들의 총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성에서도 추격대를 내보냈다. 협공에 아자이 군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오다니 성으로 도망쳤다. 한베에는 깊이 쫓는 일 없이 성으로 돌아왔다. 곧이어 히데요시가 소식을 듣고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와 아자이 나가마사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이 즈음의 한베에에 대해서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날 군대 이야기 하는 자리에서 한베에는 아들인 사쿄우(
左京)[각주:7]와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 사쿄우가 잠깐 자리를 떴다. 화장실에 갔다 온 것이다. 한베에는 그런 자세를 못마땅해 하며 화를 냈다.
 "소변이 마려우면 앉아서 싸라. 무도(
武道)의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바지에 오줌을 쌌다고 하면 칭찬을 들을지언정 누가 비웃겠느냐!?"

 1575년 한베에는 나가시노 전투(長篠い)에 참전하였고 그 후 히데요시가 츄우고쿠() 정벌의 사령관에 임명되자 그의 참모로 종군하였다. 특히 히데요시가 벳쇼 나가하루(別所 長治)의 하리마(播磨) 미키 성(三木城)을 [말려 죽이기(干殺し) 전법]으로 나가게 만든 것은 한베에의 헌책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결과를 보기도 전에 한베에는 죽었다. 결핵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은 병간호를 위해 쿄우토(京都)에 갔었지만 전황이 걱정된다며[각주:8] 다시 하리마(播磨)로 돌아와 거기서 결국 돌아오지 않는 길을 떠났다.

[다케나카 한베에(竹中 半兵衛)]
1544년 미노(
美濃) 이케다 군(池田郡)[각주:9]에서 태어났다. 부친 시게모토(重元)가 죽어 10살의 나이[각주:10]보다이야마 성(菩提山城) 성주가 된다. 사이토우 도우산(斉藤 道三), 요시타츠(義竜), 타츠오키(竜興)의 삼대를 섬겼지만 미노(美濃)가 노부나가(信長)에게 넘어가자 오다 가문(織田家)을 섬기다 1579년 하리마(播磨) 미키 성(三木城) 포위 중 병으로 죽었다. 36세.

  1. 겐페이(源平)가 싸우던 시대에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 義経)가 깍아 세운 듯한 절벽을 타고 내려와 이치노타니(一ノ谷)에 있는 헤이케 군을 물리친 것에서 본받고자 만든 투구의 장식. 임전무퇴를 상징하는 것으로 결코 평범한 것은 아니었다. 보통 링크를 누르면 볼 수 있는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의 투구가 유명한데 이것이 원래 타케나카 한베에의 투구였다고 한다. 죽을 때 유품분배로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에게 전해졌고 이것이 임진왜란 때 조선에 함께 있던 쿠로다 나가마사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2. 히데요시는 주군이 아니다. 한베에의 주군은 어디까지나 노부나가(信長)로, 히데요시에게는 파견을 나가있었음에 지나지 않는다. [본문으로]
  3. 미노 삼인중(美濃三人衆)의 하나인 안도우 모리나리(安藤 守就) [본문으로]
  4. 타케나카 시게노리(竹中 重矩). 아네가와 전투(姉川の戦い)에서 노부나가 군 행세를 하며 본진으로 들어와 노부나가의 목숨을 노리던 엔도우 나오츠네(遠藤 直経)를 죽인 인물. [본문으로]
  5. 실제로는 약 1년 가까이 계속 점령하며 이제 미노는 내꺼임~ 이라는 푯말과 세금고지서를 날리는 식으로 노력했지만 다른 호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성을 내놓고 본거지로 퇴거. [본문으로]
  6. 초창기 토요토미노 히데요시의 이름 [본문으로]
  7. 타케나카 시게카도(竹中 重門). 후에 '토요카가미[豊鏡]'라는 히데요시 일대기를 저술. [본문으로]
  8. 무사는 전쟁터에서 죽어야 한다며 돌아왔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9. 현재는 이비군(揖斐郡)에 통합되어 있다. [본문으로]
  10. 16세~20세까지 여러 설이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