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6년 5월.
토쿠가와 막부 3대 쇼우군[将軍] 이에미츠[家光]는,
이슬비가 흩날리는 날씨에 센다이 번[仙台藩] 에도 저택[각주:1]으로 발길을 옮겼다.
목적은 병문안이었다.

침실로 안내받은 이에미츠를
잠옷을 걸친 노인이 맞이하였다.
창백한 피부가 이제 노인의 생명이 그리 길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노인은 간신히 등을 등걸이에 기대며, 괴로운 듯이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다.

이에미츠에게 있어서, 
노인의 오른쪽 눈을 감싸고 있는 안대가 이렇게까지 안스러운 적은 없었다.
"이런 누추한 곳에 와 주셨지만 이러한 몰골이라 창피하옵니다"
노인의 목소리는 완전히 갈라져 그르렁 거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편안히.. 편안히.."
이에미츠의 짧은 말에는 깊은 염려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목이... 망가졌습니다. 식사조차 목을 넘가가지 않고 목소리도 이런 꼴..."
자조적인 미소를 띠우며 목을 쓰다듬는 노인의 말에 걱정스러운 듯 이에미츠는 노인의 말을 막고 말했다.
"신군 이에야스공은 나의 부친 히데타다의 후사를 부장군에게 맡겼소. 그리고 나의 아버지도 또한 나의 후사를 당신에게 맡겼을 터."
이에미츠는 포동포동한 볼에 보조개를 띄우며 말했다.
"그러니 부장군. 당신의 역활은 나의 은거까지 끝나지 않았을 것이오"
하며, 부드럽게 노인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부장군[副将軍]'
이에미츠의 부친이 쇼우군[将軍]일 때부터 노인은 그렇게 불려 왔다.
"자... 눕는 것이 좋겠군"
노인의 귀로 들어오는 이에미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 갔다.
눈이 감기고 곧 기분좋게 잠의 세계에 빨려 들어갔다.

1590년 봄.
세 번에 걸친 상경명령에 응하지 않고 있던 호우죠우[北条]를 멸하기 위해,
토요토미노 히데요시는 여러 장수들을 이끌고 20만의 대군과 함께 칸토오(関東)로 왔다.
전년 아시나(蘆名)를 물리쳐 명실공히 오우슈우의 패자가 된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는 히데요시의 이 오다와라 공략전에 지각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늦게 온 마사무네가 청원하는 알현의 청을 무시하고 하코네에 있는 창고에 근신을 명했다.
'원숭이녀석, 나와 만날 생각은 없는 것인가? 그렇다는 것은.... 아버지 때보다 더욱 넓혀진 나의 영토를 전부 쳐먹을 흑심인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
마사무네는 겨우 비공식 알현을 허용받았다.
눈아래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서 의자에 앉은 히데요시가 손에 쥔 지팡이로 지면을 가리켰다.
엄숙히 예를 표한 마사무네는 지팡이가 가리킨 곳으로 가 앉았다.
앉아 있는 마사무네의 복장에 열석해 있던 장수들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머리를 가지런히 늘어뜨렸고, 하얀 마(麻)로 된 겉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죽고 나서 관에 들어갈 때 입는 복장이었다.
'이녀석....'
마사무네는 사자(死者)의 복장으로 히데요시에의 복종을 나타내면서도 자신의 개성을 강렬히 어필하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그 호담함에 히데요시는 자신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웃어 버렸다면 이 순간, 이 곳에서는 히데요시의 패배인 것이다.
'이겼다.....!'
확신하던 마사무네의 목에 히데요시의 지팡이가 와 닿았다.
"조금 더 늦었더라면 이곳이 위험했단다"
그 시선에는 친근한 원숭이의 얼굴은 사라지고 오히려 쥐와 같은 날카로운 집착심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틀 후...
마사무네는 카타쿠라 코쥬우로우[片倉 小十郎]와 함께 정식으로 알현식을 갖게 되었다.
거실과 같은 곳에 토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등 천하의 명장들이 얼굴이 나란히 하고 있었다.

"먼저 번에 보았을 때는 몰랐지만 너의 오른쪽 눈은 누구에게 주었느냐?"
히데요시는 당당한 마사무네가 왠지 맘에 들지 않았다.
"옛! 추하게 튀어 나왔었기에 뒤에 앉아있는 이 코쥬우로우에게 단도로 찔러 터트리게 했사옵니다."
"찔러 터트리게 했다!?"
제후들은 깜짝 놀랐고 곳곳에서 경탄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히데요시가 할 수 있는 것 이라곤 간신히 코웃음 치는 것 뿐이었다.

"내 듣기에 네가 이곳으로 오기 전에 너의 모친은 독을 탄 식사로 널 죽이려 했다고 하더구나. 너는 동생을 베어 죽였다고도 들었다. 이렇게 슬픈 일이 있을 수가.."
이번에는 굉장히 슬픈듯한 목소리였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마사무네에게 창피를 주고 싶었다.

"그것은 칸파쿠 전하가 잘못 들으신 것. 어머니는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고 시험해 본 것입니다. 독이 탄 식사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어리석음으로는 다테 가문을 짊어 질 수 없다...라는 뜻으로... 동생은 어리석게도 그릇에 손을 대었기에 베어 죽였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이렇게 어머니께 단련받았기에, 지금 이렇게 전하의 앞에서도 겁을 내지 않음이옵니다."
막힘이 없는 차분한 말투였다. 아연해 있던 히데요시는 더 이상 말문을 열 수가 없었다.
이 대결에서 마사무네는 당당히 한판승을 따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슬비가 그치고 태양이 저물기 시작했다.
"부장군, 웃고 있군"
말을 건 이에미츠의 음성은 어디까지나 부드러웠다.
"타이코우[太閤] 전하[각주:2]와 만났던 날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방금 전 과는 다르게 마사무네의 목소리에는 생기가 돌고 있었다.
"타이코우 전하라...... 그 토요토미 가문[豊臣家]도 이제는 없군."
"그러하옵니다. 토요토미 가문 다음은 저의 차례라고 생각했건만 뚜껑이 열어보니 이에야스공. 그렇다면 그 다음이야 말로~ 하고 노렸지만 천하는 쇼우군 부친[각주:3]의 손에. 그리고 지금은 쇼우군 전하. 결국 내 차례를 오지 않는가... 하고 포기하고 있던 참이었지요.....!! "
"포기.....하고 있었지만....이라고!?"
순간,
이에미츠는 자신의 뒤쪽으로 싸늘한 무언가를 느끼고 마사무네의 침상에서 튀어 물러났다. 어느새 노인이 이에미츠 앞에 위풍당당히 서 있었다.
야규우[柳生][각주:4]에게 교육받은 이에미츠였기에, 단번에 노인의 전신에서 굉장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사무네의 외눈은 생기를 되찾았고 그 모습은 천하를 삼키려 하는 용처럼 당당했다.
.
.
한 순간의 침묵이 오고 간 뒤..
"히데타다님으로부터 부장군이라는 분에 넘치는 직함을 받았습니다만 이제는 그 역할도 더 이상 맡을 수가 없군요"
카카~하고 웃으며, 칼걸이에서 꺼리낌없이 단도를 집어, 이에미츠의 발 앞에 정중히 놓았다.
그리곤 절을 했다.
"이 노인에게 간단히 당할 정도라면 천하는 또 다시 시끄러워진다고 생각했지만 이런이런~ 전하는 역시 야규우의 검호(剣豪)이옵니다. 이제 토쿠가와 쇼우군 가문의 안태는 영원한 것! 이 노친네도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가 있겠군요."

어디까지가 마사무네의 진심이었을까?
진심으로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것일까?
이에미츠는 헤아려 보았지만 마사무네의 어린아이와 같은 미소에 빨려 들어 화 내는 것 조차 잊어 버릴 수 밖에 없었다.
"부장군도 오래 살아 주시구려"
황급히 침실에서 떠난 것은 역시 공포심에서 일 것이다.

그것을 보고 있던 노인은 큰 소리로 가신들에게 명했다.
"이제는 되었다. 물러가도 좋다 "
마루 사이와 벽 뒤 등 어둠에 숨어 있던 완전 무장한 자객들이 아쉽다는 듯이 자리를 떠 사라졌다.
"목숨을 뺐을 수 있었지만 뺐지 않았다. 늙어서가 아니다! 그 때 천하는 내 손안에 굴러 들어 왔었다. ...그것으로...된 것이다."
아무도 없는 침실에서 중얼거리있는 노인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어딘가 아쉽다는 빛이 있었다.

3일 후.
노인은 만족한 웃음을 띤 채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을 떠났다.

생몰년; 1567~1636
관위; 미마사카노카미[美作守], 지쥬우[侍従], 에치젠노카미[越前守], 우코노에쇼우쇼우[右近衛少将],
        므츠노카미[陸奥守], 산기[参議], 곤츄우나곤[権中納言]

  1. 각 번은 참근교대 때의 번주[藩主]나 무사들, 혹은 번주 가족들의 숙소로 에도[江戸]에 저택을 두었다. [본문으로]
  2.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지칭. [본문으로]
  3. 2대 쇼우군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 [본문으로]
  4. 아마도 에도 야규우[江戸柳生]의 창시자 야규우 무네노리[柳生宗矩]를 말하는 듯. [본문으로]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

1611 6 4일 병사(病死) 65

1547 ~ 1611

시나노[信濃] 우에다 성[上田城] 성주. 처음엔 타케다 씨[武田氏]를 섬겼지만 타케다 씨 멸망 후 자립한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서군(西軍)에 속해 우에다 성에서 농성하여 토쿠가와 히데타다[德川 秀忠]를 괴롭히지만, 서군의 패배로 인하여 항복 개성(開城)하였다. 코우야 산[高野] 자락의 쿠도야마[九度山]에 유폐되었다.










하산(下山)하고 싶은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 대한 의리를 갚기 위해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우에다 성[上田城]에서 농성하며 토쿠가와 히데타다[德川 秀忠]를 농락하였지만, 서군의 패배 후 아들 노부유키[信之]의 구명 운동으로 목숨을 건진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 유키무라[幸村 = 노부시게[信繁]] 부자가 시나노 우에다에서 16인의 동반자들과 함께 유배지인 키이[紀伊] 코우야 산으로 향한 것은 1600년 10월 13이었다. 당시 마사유키는 54, 유키무라는 34세였다.


 코우야산에 도착한 마사유키 일행은 사나다지방의 숙방(宿坊[각주:1])인 렌게죠우 원[華定院]에 일년 넘게 체제하였으며 곧이어 쿠도야마에 완성된 사나다 저택으로 옮겼다. 죄인이라고는 해도 유배 생활은 완전 자유로 등산이나 사냥, 수영, 뱃놀이도 즐길 수 있었다. 그러한 유배 생활을 계속하면서도 마사유키의 마음 속에는 유배에서 풀려나는 꿈만을 키워갔다.


 1603년 3월 15신코우 사[信綱寺]로 보낸 편지에, 3년 후의 여름에는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가 이에야스[家康]에게 잘 말하여 유배에서 풀려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거나, 또한 몇 년도의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 편지의 전후로 생각되어지는 가신 쇼우츠 신고로[称津 神五郞]에게 보낸 정월 3일의 편지에도 '새해도 되어 우리들에게 곧 하산의 명령이 내려질 것 같다' 근거 없는 기쁨을 전하며 하산의 명령을 계속 기다렸다.


고향에 돈을 요구.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하산의 명령이 내리지 않은 채 세월만이 흘러갔다.

 이에야스조차도 두려워 한[각주:2] 무장의 의지도 차츰 꺾여 갔다. 더욱이 동반자나 하인들을 포함한 유배생활은 대가족이었기에 돈이 많이 들었다. 생활비는 노부유키[信之]가 보내주는 돈과 렌게죠우 원[連華定院]에서 바치는 적은 세금, 거기에 감시역인 와카야마 성[和歌山城]의 성주(城主) 아사노 나가아키라[浅野 長晟]에게서 매해 보내지는 50석뿐이었다. 이것만으로는 대가족의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어 마사유키는 자주 노부유키에게 돈을 요구했다.


 연도는 불명이지만 정월 5일의 편지에 셋째 아들 마사치카[昌親]에게서 40냥 중 20냥을 확실히 받았지만, 빚이 많아 살림을 꾸려나갈 수 없어 힘드니 남은 20냥도 하루속히 보내주길 바라며 빨리 보낼 수만 있다면 5~6냥도 좋다고 할 정도로 마사유키는 빚에 찌들린 힘든 나날들을 유배지에서 보내고 있었다.

 마사유키의 계속된 돈 요구나 재촉에 노부유키는 그때마다 보내주었고 또한 정월이 되면 돈과 물품을 보냈으며 편지도 왕성히 오고 갔다. 편지의 왕복이야말로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마사유키에게 있어서 유일한 위안이었을 것이다.


약해져 버린 과거의 지장(智將)


 노부유키쪽에서의 편지를 마음속으로 기다리면서 마사유키는 차츰 늙어가는 자신에 대한 한탄을 내뱉게 되었다.

 연도는 알 수 없지만 말년이라고 여겨지는데 첫째 아들 노부유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가오는 세월의 파도로 인해 무엇을 해도 끈기가 없어 지쳐만 간다고, 왕년의 지장(智將)이 이제는 완전히 체념한 듯한 약한 소리를 내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최후의 말년에는 자주 병이 걸려, 1609년 혹은 1610년 즈음으로 추정되는 4 28일자 우에다[上田]의 유우안 호우인[夕庵法印]과 가로(家老) 오오쿠마 호우키노카미[大熊 伯耆守]에게 보낸 편지에, 노부유키의 병이 쾌유가 된 것을 기뻐하면서도 자신의 병이 재발했다고 하며 다음에는 발이 빠른 말을 한 마리 보내주길 바란다고 적혀 있다. 말은 병중의 위로로 하고 싶다고 했는데 이것도 병으로 인하여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약해진 마음을 지탱하기 위해 또는 과거 말을 탄 자신의 용맹했던 모습을 생각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유배지에서 11년.

 1611 6 4일.많은 무공(武功)과 무명(武名)을 남겨둔 채, 사나다 아와노카미 마사유키[真田 安房守 昌幸]는 저승으로 여행을 떠났다. 향년 65.

  1. 불공을 드리러 온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절의 숙박소. [본문으로]
  2. 여담으로 후에 이에야스가 토요토미 가문을 멸하기 위해 일으킨 오오사카 공방전에서 마사유키의 아들 유키무라가 오오사카에 입성했다는 소식을 보고받은 이에야스는 손을 걸치고 있던 창문이 소리가 날 정도로 떨며 '아비냐 아들이냐?'라고 두번이나 물을 정도로 당황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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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 義淸)

1573 1 1 병사(病死) 73

1501 ~ 1573.

시나노(信濃) 카츠라오(葛尾)성주(城主). 맹장으로 이름 높아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과 싸워 토이시(戶石)성 합전(合戰)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북부 시나노(信農), 에치고(越後)로 세력을 확대하였으나 후에 신겐에게 패해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에게 도망. 이후 객장(客將)이 되어 카와나카지마(川中島) 합전 등에 참가하였다.

(그림은 태합입지전V에서)






신겐(信玄)에게 두 번 패배를 안기다.


 전성기의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 義淸)는 대단히 강했다.

 부와 북부 시나노(信濃)일대의 장병을 이끌고 사카키(坂城)의 카츠라오(葛尾) 성을 본거지로 삼아 타케다 하루노부(武田 晴信 = 信玄)와 승부를 벌였다.

 1548 2월 우에다하라(上田原)의 전투에서는 이타가키 노부카타(板垣 信方) 등을 패사(敗死)시켰을 뿐 만 아니라 신겐에게도 심한 부상을 입힐 정도로 대승하였으며, 1550년의 토이시(戶石)성 합전에서도 후세 사람들에게 신겐에게 [토이시 붕괴(戶石崩れ)]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이 따라 붙게 할 정도로 괴멸적인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수많은 승리를 이끌어 온 요시키요의 무운(武運)도 여기까지였다. 신겐의 사키카타슈우(先方衆) 사나다 유키타카(真田 幸隆)에게 토이시성을 빼앗기자 유력한 휘하의 무장들이 계속해서 신겐쪽으로 돌아서는 바람에 본거지인 카츠라오 성의 방어 체제가 무너져버렸다. 이렇게 되자 시나노(信濃)의 용장 요시키요도 어쩔 수 없이 1553년 4월 9 카츠라오성을 버리고 8살의 외아들 쿠니키요(国淸)와 함께 에치고(越後)의 나가오 카게토라(長尾 景虎 =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에게 의지하기 위하여 도망가게 된다.


에치고(越後)의 객장


 요시키요가 에치고로 망명한 목적은 켄신(謙信)의 원조를 받아 옛 영토를 회복하는데 있었다. 이것이 카와나카지마(川中島) 전투의 원인이 되었는데, 카츠라오 성을 뒤로한지 14일 후인 4 23일에는 켄신의 원군을 얻어 카츠라오성을 탈취하였고 치이사가타(小県)()의 시오다(塩田)성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주변은 이미 확고한 신겐의 영지가 되어 있었기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에치고(越後)로 군사를 후퇴시켰다.


 이후 요시키요는 옛 영토회복의 꿈을 계속 가슴에 품으며 도합 5회에 이르는 카와나카지마 전투에 4번 참가하였다. 1561 9월의 네 번째가 되는 하치만바라(八幡原)의 사투[각주:1]에서는 시나노(信濃)의 병사 2000여기()를 이끌고 처음 전쟁터에 나서는 쿠니키요(国淸)와 함께 선봉으로써 용감히 싸웠는데 이때 요시키요의 나이는 이미 61세의 나이였다.


 고향 사카키(坂城)로의 복귀도 반쯤 포기하고 있던 1562년.

 신겐의 친족중(親族衆)인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 梅雪)의 사자라고 하는 승() 쿠우안(空庵)이 길보(吉報)를 카스가야마(春日山)성에 가지고 왔다.

 신겐이 적자(嫡子) 요시노부(義信)를 폐하고 서자 카츠요리(勝頼)를 후계자로 삼고자 하니 만약 켄신이 요시노부를 양자로 삼는다면 바이세츠도 켄신을 따르겠으며 곧바로 시나노(信濃)는 켄신(謙信)의 것이 되고 요시키요도 옛 영토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요시키요는 맘 속으로 크게 기대하였으나 쿠우안(空庵)의 이야기를 들은 켄신은 크게 화를 내며 쫓아버렸다고 한다.[名将言行錄]


 1564 5회째가 되는 카와나카지마(川中島)의 합전에 63세라는 고령으로 참전하지 못하였고 대신해서 아들인 쿠니키요(国淸)가 출진하였다. 이 즈음의 일을 지칭하는 것 같은데 [上杉将士書上]에는 요시키요를 지칭해 [우에스기(上杉)()에서 그렇게 뛰어난 활약도 하지 못한다]며 호된 지적을 하고 있다. 그래도 요시키요는 켄신에게 객장(客將)으로써 계속 대우받았다.


 소령(所領)은 칸바라(蒲原)군(郡)의 야마우라(山浦)와 우오누마(魚沼)() 내에 가지고 있었으며 켄신이 만들어 준 나오에츠(直江津)의 저택에서 살았다고 한다. 또한 켄신은 다음해인 1565 3월 그다지 활약도 하지 않는 요시키요를 네치(根知)성주로 앉히고, 쿠니키요(国淸)를 토쿠아이(德合) 성주로 발탁하였다. 네치(根知)성은 엣츄우(越中)와 시나노(信濃)의 국경 사이에 있는 성으로, 그 성의 관할로 마츠모토(松本)가도(街道)라던가, 치쿠니(千国)가도가 있어 옛날부터 소금의 운송로이면서 또한 군사상의 요지이기도 했다. 켄신이 65세라는 말년의 요시키요에게 네치성을 맡긴 것도 카와나카지마 전투 후 신겐에 대한 대비와 함께 세이와겐지(淸和 源氏) 무라카미(村上)씨의 후예이며 시나노 명문족(名門族)인 무라카미의 명예를 존중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켄신은 요시키요에게 네치(根知)의 경비를 엄중히 할 것을 명령하며 어류나 소금을 네치를 통해 시나노로 운송시켰다. 요시키요는 이런 중요한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면서도 1568 68세가 되자 스스로 노령을 이유로 켄신에게 가증(加增)받은 야마우라(山浦)와 오야마(飯山)의 소령(所領)을 쿠니키요(淸国)에게 물려준 후 다음 해인 1569년에 중이 되었고 70세에는 은거. 1572년에는 병으로 쓰러져 다음해인 1573년 정월 두 번 다시 고향의 땅을 밟아 보는 일 없이 네치 성에서 죽었다. 73세였다. 원수인 신겐(信玄)이 죽은 것은 그로부터 3개월 후였다.


아들 쿠니키요의 그 후


 요시키요가 남긴 야마우라 4만관() 등은 1573 12 쿠니키요에게 안도(安堵)되었다.

 쿠니키요도 켄신과 그 후계자인 카게카츠(景勝)에게 중용되어 카게카츠가 시나노의 북부를 진압한 1583 8 카이즈(海津)성의 성주 대리(城代)가 되었다. 여덟 살에 부친 요시키요의 손에 이끌려 에치고로 도망 친 후 30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1. 일반적으로 카와나카지마 전투라고 하면 이 제 4차를 말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