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의 비극은 부친 신겐[信玄]이 너무나도 거대했던 것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신겐이 죽은 뒤 그 대단했던 다케다 가문[武田家]에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오직 신겐이라는 거인과의 끈으로 이어져 있던 노신(老臣)이나 숙장(宿將)들 사이에 어린 카츠요리[勝頼]를 얕보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신겐이 죽은 지 11일째에 카츠요리는 숙장들에게 '소홀함이 없도록 하겠다'는 기청문(起請文)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카츠요리에게는 초조함이 있었다. 빨리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어서 노신들의 콧대를 꺾고 싶었다.

 신겐은 “3년간 죽음을 숨겨라. 병사를 일으키지 말고 영토를 지켜라”하고 유언을 남겼지만, 카츠요리는 그것을 기다릴 수 없었다.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도발해왔기 때문이다. 타케다 측의 미카와[三河] 전선기지인 나가시노 성[長篠城]을 점거한 것이다. 이것을 보고 츠쿠데 성[作手城]의 오쿠다이라 노부마사[奥平 信昌][각주:1]가 토쿠가와 측으로 돌아서 버렸다. 격노한 카츠요리는 노부마사의 부인과 동생을 십자가에 메달아 옆구리를 찔러 죽였다.

 1575년. 이 오쿠다이라 노부마사가 나가시노 성주가 되었다. 이제 카츠요리는 이것을 묵과할 수 없었다. 노신들의 간언(諫言)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카츠요리가 정병 1만5천을 이끌고 나가시노를 향해서 코우후[甲府]를 출발한 것이 이 해의 4월 5일이었다.

 운명의 갈림길이었다.
 타케다 군은 나가시노 성(城)을 포위하였지만 함락시키지 못하였고 그러던 중 오다-토쿠가와의 원군이 도착. 결전의 장소는 나가시노 성 밖의 시타라가하라[設楽原]로 옮겨졌다.

 노신들은 주저하였다.
 “결전을 피하고 우선은 병사를 거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카츠요리는 듣지 않았다. 막무가내로 오다-토쿠가와와의 결전을 정했다.

 1575년 5월 21일.
 이날 나가시노 성 밖의 시다라가하라에서 펼쳐진 전투는 일본역사상 획기적인 전투로써 너무나도 유명하다. 정예를 자랑하는 카이[甲斐]의 기마대가 출격했다. 아침안개 속에서 중앙대, 우익의 바바 노부후사[馬場 信房] 부대에서 함성이 일었다.

 선두가 오다-토쿠가와의 마방책(馬防柵)을 향하고 돌입하여 단번에 유린하고자 했던 그 순간 엄청난 굉음의 총성이 일었다.
 오다 군의 일제사격이었다. 일천 정의 총이 불을 뿜은 것이다. 카이[甲斐]의 인마(人馬)가 연달아 쓰러졌다. 보통이라면 이런 후 적과 아군이 뒤섞여 백병전으로 이어질 터였다. 그런 때야말로 카이의 기마 병단은 가공할 위력을 발휘한다. 최초의 사격으로 상처를 입지 않은 기마대가 개의치 않고 돌진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또다시 천 정의 총이 불을 뿜은 것이다. 아무리 용맹하다 하는 타케다 기마대도 이 새로운 전법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것은 노부나가가 고안한 전법이었다. 노부나가는 아시가루[足軽]의 철포집단 3천명을 3대로 나누어, 천 정씩 교대하며 쉴 틈 없이 일제사격을 반복하게 한 것이다. 당시 유효 사정거리는 기껏해야 100미터였는데, 노부나가는 카이[甲斐]의 군세를 마방책 앞으로 충분히 끌어들인 다음에 섬멸한 것이다.[각주:2]

 타케다 군은 도망. 사상자 1만여에 더해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 昌景], 바바 노부후사 등 유명한 무장들도 다수 전사하는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물러났다. 그야말로 멸망의 서곡이라고 할 수 있는 일전이었다.

 1582년에 오다 군의 진공이 시작되자 타케다에 속해있었던 장수들의 배반이 이어졌다. 특히 키소 요시마사[木曽 義昌]의 모반은 타케다 가문 붕괴에 박차를 가했다. 요시마사는 카츠요리의 여동생을 부인으로 두고 있는 소위 친족이었다. 그 외에도 타케다의 앞날이 어둡다 보고 적에게 달려가는 가신들이 속출하였다.

 결국 타케다 가문의 본거지 신푸 성[新府城] 최후의 날이 왔다.
 성에서 도망치는 초라한 카츠요리의 모습을 당시의 기록자는, [산길을 맨발로 걸었기에 발은 붉게 물드니, 도망자의 모습 애처롭도다.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 없으니….]라고 전하고 있다.

 1582년 3월 11일.
 카츠요리 일행은 불과 100여명. 무사는 그 중 43명이 되어 있었다. 후에후키가와[笛吹川] 천을 거슬러 올라 최후의 거점으로 정해두었던 텐모쿠잔[天目山] 산으로 향했다. 산허리의 협곡에 있는 마을 타노[田野]까지 갔지만, 여기도 안주의 땅은 아니었다. 다음날 수천의 오다 군이 함성을 지르며 공격해 왔다. 좁은 계곡은 눈뜰 수 없을 정도의 참상이 되었다.

 이때 츠치야 소우조우 마사츠네[土屋 惣蔵 昌恒]는 바위 뒤에 몸을 숨겨, 외길을 타고 공격해 오는 적병을 활로 쏘아 수십 명을 쓰러뜨렸으며, 다음에 칼을 쥐고 싸워 '소우조우 한 손 베기[惣蔵片手斬り][각주:3]'라는 용명(勇名)을 후세에 남겼다. 코미야마[小宮山], 아키야마[秋山] 등의 용사들도 달려드는 군세 속에서 칼춤을 추며 수십 명을 베었다.

 전멸은 이제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카츠요리의 아들 노부카츠[信勝]도 십문자[十文字] 창을 들고 눈부신 분전을 펼쳤지만 허벅지에 총탄을 맞아 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판단. 일족인 승려(僧侶)와 서로를 찌르는 식으로 자결했다고 한다.

 일족의 최후였다. 카츠요리는 부인[각주:4]에게 살아서 도망칠 것을 권했지만 부인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자신의 각오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렸다. 19살의 그녀는 법화경(法華經)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 난 후 사세구(辭世句)를 읊은 뒤 자신의 가슴에 몸칼을 찔러 자결했다.

 카츠요리는 자결하는 여성 16명의 자살을 일행의 장로(長老)가 도와주는 것을 다 지켜보았다. 더 이상의 미련은 없었다. 카츠요리는 배를 가르고 자결했다.

[다케다 가쓰요리(武田 勝)]
1546년생. 신겐[信玄]의 넷째 아들로 1573년에 가독(家督)을 이었다. 미노[美濃]에 침공하였고, 토오토우미[遠江], 미카와[三河] 등에도 진출하지만, 나가시노[長篠]의 패전 이후 회복하지 못하였고, 텐모쿠잔[天目山] 산에서 오다 군[織田軍]과 싸우다 죽었다. 37세였다.

  1. 당시는 아직 사다마사[貞昌]. 나가시노 전투에서의 공적으로 노부나가[信長]에게 이름자 하나를 하사 받은 뒤에 ‘노부마사[信昌]’가 되었다. [본문으로]
  2. 이상의 이야기는 오제 호안[小瀬 甫庵]의 신쵸우키[信長記]에서 거론된 픽션으로 지금은 의문시되고 있다. [본문으로]
  3. 좁은 외길에서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덩굴을 한 손으로 잡고 한 손으로만 싸웠다고 해서 붙은 이름, ‘한 손 천명 베기[片手千人切り]’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4.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의 6번째 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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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다 가쓰요리[武田 勝]

1582 3 11일 할복(割腹) 37.

1546 ~ 1582.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넷째 아들. 스와 씨[諏訪氏]를 상속하지만, 신겐이 죽자 타케다 가문[武田家] 상속. 나가시노 전투[長篠合戦]에서 오다[織田]-토쿠가와[川] 연합군에게 패한 이후 일족, 중신들에게 계속해서 배반당하여 텐모쿠잔 산[天目山] 산기슭인 타노[田野]에서 부인과 아들 노부카츠[信勝]와 함께 자살.








비극의 무장


 명장(名將) 신겐의 뒤를 이었던 타케다 카츠요리의 비극은 1575 5월 나가시노 전투 때 이미 선명히 나타나고 있다. '그 전투는 구식인 활과 화살로 무장한 타케다 군이 신병기 철포로 무장한 오다-토쿠가와 연합군에 졌다'는 식으로 간단히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진상(眞相)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카츠요리에게 통솔력이 부족했음을 한탄한, 신겐을 오랫동안 섬기며 싸워 왔던 사무라이다이쇼우[侍大将]들이 오히려 나가시노 전투에서 죽음을 선택한 것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카츠요리의 멸망은 전투의 치졸함보다도, 부친 신겐이 쌓아 올린 군단을 유지할 수 없었던 통솔력 부족이 전면적으로 나왔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카츠요리가 막 타케다 가문을 상속 받았을 때 강력한 지지기반이었던 시나노[信濃] 군단이, 멸망에 가까워질 즈음에는 모두 배반하여 반기(反旗)를 든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또한 1581년에 들어서 신푸 성[新府城]을 축성했지만, 성에 있었던 것은 불과 3개월하고 보름. 공격태세를 취하기 보다 방어태세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에도 비극이 있었다. 더구나 자기 영지(領地)로 적을 끌어들여 물리친다는 그 자세가 너무도 후수(後手)로 인식된 것이다. 때문에 그 멸망은 카츠요리에게 있어서 태어날 때부터 가진 비극성을 포함하고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카츠요리 부인의 기원(祈願文)


 그 멸망의 모습을 전해주는 사료로써, 카츠요리의 부인 호우죠우 씨[北条氏]-19-타케다 하치만 신사[武田八幡神社]에 올린 기원문과 비구니인 리케이니[理慶尼][각주:1]가 쓴 '타케다 멸망기[武田滅亡記]'[각주:2]가 유명하다. 부인이 하치만 사[八幡社]에 올린 기원문을 의역해 보면,

신이시여,

카츠요리는 운을 하늘에 맡겨 제 목숨 아끼지 않고 적진을 향하였습니다. 이렇게 궁지에 몰린 와중에 가신들 중에는 정의(正義)를 모르는 사람도 있어 그들의 마음은 자신들의 안위에만 있사옵니다. 특히 키소 요시마사[ 義昌]는 조그만 이익에 (눈이 멀어) 신의 뜻을 더럽히고 있으며 불쌍하게도 가족까지 버리고[각주:3], 모반의 병사를 일으켜 버렸습니다. 또한 타케다 가문 누대(累代)에 걸쳐 은혜를 받았던 후다이[譜代] 가신들 까지도 모반인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카츠요리에게 반항하려 하고 있습니다.

라고 누대에 걸쳐 은혜를 받은 자들까지 모두 배반해 버렸다고 신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에 마음이 아플 따름이다. 이 부인이 신에게 호소한 것을 보면 카이[甲斐]의 산천과 카이의 사람들에게 보내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원망과 분노가 타오르는 것을 알 수 있다.


텐모쿠잔[天目山]의 이슬


 이리하여 모든 것을 잃고 신푸 성()을 불태운 뒤 그 성을 뒤로 한 카츠요리 일행 7백 여명은 하루 동안 이동하여 카시오야마 산[柏尾山山]다이젠 사[大善寺]에 이르렀는데, 여기서 하룻밤 다케다 일족의 리케이니[理慶尼]에게 신세를 졌다. 여기서 츠루 군[都留郡]의 이와도노 성[岩殿城]을 목적지로 하였는데, 여기서 재기(再起)를 꾀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사고토우게[笹子峠] 고개의 입구에서 반기를 든 오야마다 노부시게([小山田 信茂]에게 자신의 영지로 들어오는 것을 저지당한 카츠요리 일행은 어쩔 수 없이 텐모쿠잔 기슭의 타노[田野]에서 자신들 운명의 마지막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타노에는 '한 손 베기[片手切り]'[각주:4]라 불리는 사적이 있는데, 이 근방에서 아군에게 배신당하거나 오다 군[織田軍]의 습격을 받은 카츠요리(37)가 부인(19), 노부카츠(16) 들과 함께 자살했다고 한다. 마지막을 맞이한 때 카츠요리 부인은,

검은 머리 나부끼듯 흔들리는 세상에서,

가없는 마음에 떨어져 지워지는 이슬 방울의 흔적.

[黒髪れたる世ぞ,はてしなき思いに消ゆる露の玉の]

라는 사세구(辭世句)를 남겼다고 [코우란키()]는 전하고 있다.


 그 후 리케이니[
理慶尼]는 카츠요리 일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타노[田野]에 가서 죽은 사람들의 넋을 하나하나 기렸다고 한다.

케이토쿠 원[景徳院]에 있는 카츠요리의 묘(墓) [야나나시 현[山梨県] 야마토 촌[大和村]

  1. 타케다 신겐과는 사촌(신겐의 아비인 노부토라의 동생(카츠누마 노부토모[勝沼 信友]의 딸)이며, 카츠요리의 유모(乳母)였다. [본문으로]
  2. 다른 이름으론 '리케니기[理慶尼記]'. [본문으로]
  3. 인질로 바쳤던 70세의 모친, 13살의 장남, 17살의 장녀 모두 사형. [본문으로]
  4. 카츠요리의 측근 츠치야 마사츠네[土屋 昌恒]가 좁은 외길에서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덩굴을 한 손으로 잡고 한 손으로만 싸웠다고 해서 붙은 이름, ‘한 손 천명 베기[片手千人切り]’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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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18 13: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버지 만한 아들 없다지만 이런 기량 부족은..ㅎㄷㄷ...

    그래도 오토모 소린 아들보다야 낫군요. 이쪽은 칼한번 못빼들고 카이에키니..(-_-..)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18 22: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오히려 신겐보다 카츠요리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만... ^^
    (다만 時의 운이 따르지 않았을 뿐이라고...)

    예전에 잠깐 생각했던 것인데..
    노무현 = 카츠요리, 정동영 = 아나야마 바이세츠... 란 구식이 뜬금없이 들더군요.
    도자마(부산)인 당주(대통령)와
    타케다의 피가 더 진하게 흐른다는(호남 맹주) 친족중 우두머리(당의장).
    전략상 중요한 스루가(통일부 장관)을 맡겼지만 결국 배반(당 해산).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19 07: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선 때 카츠요리를 끌어안았어야 됐단 말이오!'(;;;;;)

    뭐 망할거 같으니 다 버리는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군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20 12: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쵸~ 망할거 같으면 다 그런 거죠!!!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xjapan1231 BlogIcon 나오 2008.01.20 16: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타케다 신겐이 이미 다 망해가는 타케다가를 카츠요리에게 물려준 거고..
    카츠요리는 물론 오다 노부나가를 뛰어넘을 선지안이라던가 실력이 없으니 졌을 뿐인데..
    카츠요리가 욕먹는거 보면 불쌍함..ㅎㅎㅎ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21 16: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패자(敗者) 집단의 생존자들이 쓴 책들이야 아무래도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2차대전 후의 독일군들이 쓴 자서전 & 회고록도 실제와는 다른 부분들이 생각 외로 많다고 하더군요.
    그런 의미에서...정말 카츠요리는 불운했고 비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xtaiji83 BlogIcon 심플리진 2008.07.16 18: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담아갑니다 ㄳ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17 16: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링크만 허용하고 있습니다.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deadsushi BlogIcon 리더쉽 2008.08.21 00: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카츠요리 볼때마다.. 카게무샤에서 카츠요리 역을 맡은 하기와라 켄이치씨가 생각나네요.
    일본 전국시대의 매력에 늦게 빠진 저로썬 최근에서야 전국시대 관련 일드를 보고있는데..
    무인토시이에에서의 미츠히데가 켄이치씨라는걸 최근에서야 알게됐음.. ㄷㄷ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8.21 01: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누군가 싶어서 검색해 보았던니(저 그 드라마 안 보아서...) 아~ 그 아저씨군요. 젊었을 때는 상당한 호남이었군요.
    개인적으로... 미츠히데의 초상화가 너무 쫌생이처럼 그려져서 인지... 영상물에서의 미츠히데 역과는 매치가 되지 않더군요.
    기대하는 것으로는.... 나중에 키무라 타쿠야가 대하드라마의 노부나가로 나오고(어렸을 적의 단편드라마는 있지만요), 같은 그룹 SMAP의 나카이가 아케치 미츠히데 역으로 나왔으면~ 하고 있습니다.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asterist BlogIcon 엔하운스 2008.08.23 00: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능력이 모자랐다기 보다는.. 두 가지. 천시, 지리를 전혀 타지 못했다는 것. 영지래봐야 고작 20만석의 가이. 그외 80만석 정도는 직할이라기 보다는 강성한 호족들로 인해서 나눠먹기 수준이었고... 게다가 북에는 개인적으로 군주로서의 자질은 겐신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경승이. 남에는 너구리. 동에는 어?든 인물인 호죠. 서에는 자칭 마왕....... 능력도 있었고, 외교도 잘했고, 전쟁의 판단도 나쁘지 않았는데.... 신겐은 정말 인물 보는 눈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만.. 바이세쓰 뉴도 & 기소 요시마사 모두 사위 & 배반크리군요..

  1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8.23 19: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변이 적 투성이가 된 것은 신겐의 유산입죠.
    그나마 호우죠우씨라는 북(카게카츠가 아닌 카게토라)와 동의 위협은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그 놈의 돈이 뭔지... 정세가 카츠요리의 능력범위(카츠요리는 나름 능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를 넘어섰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뭐...바이세츠 같은 경우, 부친 신겐 조차도 그를 평하길...제대로 일은 안 하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라 치면 언제나 술잔치 벌이고 얼버무린다고 할 정도이다 보니. 능력이 안 되면서 태어나면서 가진 권세만을 내세워 카츠요리와는 사이가 벌어진 것 같습니다.

    요시마사도 뭐 신겐 시대에 힘으로 누르고 강제로 인척으로 끌어들인 곳인지라...

    뭐 다 이유는 있다고 봅니다.

  13. 본다충승 2009.05.01 16: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불쌍한 카츠요리... 카츠요리도 평가절하된 케이스 겠죠? 신겐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았으면 하네요.
    카게무샤에서 카츠요리가 하기와라 켄이치 씨가 맞군요. 무인 토시이에 서 아케치 미츠히데 역 하실때 목소리 톤이 상당히 특이했는데, 카게무샤에서 특이한 톤의 목소리가 나오더라니 역시....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5.09 03: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아는 한에서는...

      카츠요리는 나아질 면(...이라기 보다는 재평가는 예전부터 이루어지고 있습지요)이 있을지 모르지만 신겐은 워낙 과대평가(뭐 지방 군벌에서는 나름 뛰어났지만요)가 되어 있던 인물이라 떨어지는 것은 있어도 나아지지는 않을 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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