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의 분수령이 대전투의 승패를 배반이라는 행위로 결정짓게 한 인물 – 때문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는 ‘사상 최대의 배반자’라는 오명을 역사에 남기고 있다.

 히데아키는 히데요시[秀吉]의 부인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의 오빠 키노시타 이에사다[木下 家定]의 아들[각주:1]로 태어났지만, 히데요시 부부에게 자식이 없었기에 양자가 되어 키타노만도코로의 손에 키워졌다. 이 즈음에는 히데토시[秀俊]라는 이름을 썼다.

 1588년. 히데요시는 쥬라쿠테이[聚楽第]에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 天皇]의 행행(行幸)을 주청하여 성사시켰는데, 7살의 히데아키도 이 영광스런 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다. 이 즈음 히데아키는 히데요시의 후계자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각주:2] 하지만 다음 해인 1589년에 히데요시의 애첩 요도도노[淀殿]가 남자아이를 낳았다. 이때부터 히데아키의 운명은 어긋나기 시작한다.

 히데요시는 이 첫 아들에게 츠루마츠[鶴松]라는 이름이 지어주었다. 하지만 이 아이는 불과 3년을 살았을 뿐이었다. 히데요시는 츠루마츠 사망이라는 충격을 잊으려는 듯 조선 침략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히데아키도 또한 히데요시의 총애를 되찾은 듯이 보였다. 그러나 조선 침략이 한창이던 1593년, 요도도노는 또다시 남자아이(히데요리[秀頼])를 낳았기에 히데요시의 히데요리에 대한 눈먼 사랑이 시작되어, 우선 관백(関白)인 히데츠구[秀次]를 실각시켰다. 히데아키의 신분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는 히데요시의 의중을 헤아려, 히데아키를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양자로 들여보내는데 성공하였다.[각주:3]

 정유재란 때 히데아키는 일군의 대장으로 출진하였다.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의 농성으로 유명한 울산성(蔚山城)에 대규모 구원군을 이끌고 갔을 때의 일이었다. 도망치는 명나라 군사를 쫓아 총대장인 히데아키가 직접 창을 꼬나 쥐고 휘두르며 짐승을 쫓는 사냥꾼처럼 학살하고 다녔다고 한다. 대장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행위였다.

 다음 해인 1598년. 돌연 히데아키는 귀국 명령을 받았다. 히데아키는 득의만만한 얼굴로 히데요시에게 출두하였다. 필시 조선에서의 활약에 대한 칭찬해 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히데아키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것은 의외로 조선에서의 경거망동을 질타하는 히데요시의 노호였다. 히데요시는 “네 녀석과 같은 놈을 대장으로 삼다니 내 눈이 삐었구나”라고 까지 말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북부 큐우슈우[九州] 33만 6천 석을 삭감하여, 에치젠[越前] 15만석의 이봉이라는 가혹한 결정까지 내렸다.
 히데아키는 이 사태가 모두 군감(軍監)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참언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라고 골똘히 생각한 끝에 결론 내렸다. 하지만 지금은 뾰족한 수도 없었다.

 이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준 것이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였다. 온화한 얼굴로 히데아키의 불평을 들어주고서는, 히데요시에게도 가 히데요시의 분노가 풀리도록 노력하였다.

 1598년 8월. 히데요시가 죽었다. 이에야스의 조처로 감봉에 따른 이봉을 피한 히데아키의 처우도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인해 흐지부지해졌다. 히데요시 사후 천하를 쥐고자 계획하고 있던 이에야스는 이러한 히데아키에게 은혜를 입힌 형태가 되었다.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히데아키가 배반한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키가하라의 결전 당일, 마츠오 산[松尾山]에 진을 치고 있던 히데아키는 시간이 흘러도 어느 편인지 확실히 나타내지를 않고 지켜만 보았다. 애간장이 탄 이에야스는 철포대에게 명령하여 히데아키의 배반을 재촉하는 철포를 쏘게 하였다. 이때서야 비로서 히데아키는 병사들을 움직여 서군의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부대를 공격한 것이다. 알려진 대로 이것이 세키가하라의 승패를 갈랐다.[각주:4]

세키가하라 포진도. 왼쪽 중간 마츠오 산[松尾山]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부대가 진을 치고 있다.

 싸움이 끝난 후 히데아키는 세키가하라 때 서군을 배반한 공적으로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에 51만석을 하사 받아 오카야마 성[岡山城]의 성주가 되었지만, 2년 뒤인 1602년에 21살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계속 배반자라는 비난을 받아 정신이 병들었다던가,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망령에 괴롭힘을 받아 미쳤다는 등 여러 가지가 전해진다.

츠키오카 요시토시[月岡芳年]의 괴제백선상(魁題百撰相)에 나오는 금오중납언(金吾中納言) 히데아키[秀秋]에게 원령(怨霊)이 되어 나타난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1582년 오우미[近江] 나가하마 성[長浜城]의 성 밑 마을에서 태어났다. 1584년 히데요시[秀吉]의 양자가 된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5]에 출진. 이때 미노[美濃] 오오가키 성[大垣城]의 성주로 관직은 쇼우쇼우[少将]였다. 이어서 우코노에츄우죠우[右近衛中将], 산기[参議]
[각주:6] 겸 곤츄우나곤[権中納言]으로 이례적인 스피드로 승직하였다. 1594년에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양자가 되었다.

  1. 이에사다의 다섯 번째 아들. [본문으로]
  2. 이때 다른 거대 다이묘우[大大名]는 텐노우[天皇] 나아가서는 텐노우의 대리인인 히데요시에게 대들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였는데, 다이묘우들이 서약한 대상이 히데아키였다. [본문으로]
  3. 히데츠구의 실각이 나중(1595년)이며, 히데아키가 코바야카와 가문에 양자로 간 것은 1594년의 일. [본문으로]
  4. 지금까지는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 때 히데아키가 서군이었다는 시각이었으나(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기 전 히데아키가 동군이 지키고 있던 후시미 성[伏見城] 공격군의 총대장이었던 것도 있어), 근래에 들어서는 동군으로 참전했다는 시각도 있다. 정황증거로 마츠오 산에 진을 치고 있던 서군 이토우 모리마사[伊藤 盛正]를 쫓아내고 차지한 점, 이후 행해진 서군 군의(軍議)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점, 말단인 시마즈의 사츠마 병사들 역시 히데아키를 동군으로 보고 있었다는 점 등이 있다. 그런 동군으로 참가한 히데아키가 참전을 주저했던 것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내건 당근인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가 성인이 될 때까지 관백(関白)직과 킨키[近畿] 근방에 2개국 가증에 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5.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6. 1590~92년 사이의 관직이라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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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yuphy IV 2011.11.08 22: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니 금오중납언에서는 시바료타로선생이 따로 언급하진 않았었던듯 하지만 그래도 82년 출생설이 정설인가보네요. 82년생이라면 정유재란때 활동했을시 나이가 너무..라고 생각해보니 아사노가 도련님은 오다와라전역때 15살이었던걸 생각하면 꼭 그런것도 아닌것같고(...)

    거 그렇다곤 쳐도 21세에 사망이라 이래저래 설이 많긴 많나봅니다. 딱히 지병이 있었던것도 아니고 괴설이 나돌만도 하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1.08 23: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뭐 당시는 15살이면 일반적으로 데뷔전[初陣] 치를 나이인 것 같더군요.

      매사냥에 갔다 돌아 온 뒤 '기분이 안 좋아'라는 말 한 마디 뒤 자빠져 계속 자다가 한번 깨곤 사망... 당시도 이해하기 힘든 죽음 방식이었는지 농부에게 불알 채여서 죽었다는 소리까지 나왔나 봅니다.

  2.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11.12 09: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고밖엔 표현할 말이 없는 것 같습니다. 도요토미가의 황태자였으나 결국엔 도요토미가의 멸망을 이끄는 단초를 마련해준 인물이니 말입니다. 다만, 그 당시에는 이에야스 역시 히데요리를 위한다는 기치를 내걸었을테니 히데아키를 두고 도요토미를 배신했다는 비난은 안 주어졌을테니 그것 역시 극적인 요소군요.

    어쩌면 그의 급작스러운 죽음은 가타쿠라에 대한 상사병이 아닐런ㅈ..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1.12 17: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확실히 말씀대로 드라마틱한 삶을 산 것 같습니다. 히데아키는.

      카타쿠라라.. ^^
      하지만 카타쿠라의 몸도 마음도 이미 마사무네의 것... 애송이 히데아키가 오우슈우의 독안룡에게 情人을 빼앗기는 여러모로 힘들겠군요. 으익~ 상상만해도.. ㅋㅋ

    •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11.17 09: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잉? 마사무네와 시게나가가 그렇고 그런 사이였나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1.17 15: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오사카 공성전 때 시게나가에게 선봉을 명하면서 "너 말고 누구한테 시키겠니~♡"라면서 볼에 뽀뽀했다고 하더군요.

      카타쿠라 가문의 기록[片倉代々記]에 마사무네와 시게나가는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고 하네요.

  3. 2011.11.26 17: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의 불행은 재능도 없으면서 히데요시(秀吉)의 조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 어려움 없이 칸파쿠(関白)까지 출세한 것에 있다.
 히데츠구는 오와리(
尾張)의 성()도 없는 일개 농민의 자식에 지나지 않았지만 모친이 히데요시의 누나[각주:1]였다. 그런 관계로 출세하기 시작하여 자식이 없던 히데요시의 양자가 됨에 따라 예가 없을 정도의 승진을 이룬 것이다.

 18살에 종사위하(四位下) 우코노에츄우죠우(右近衛中将)에 임명되었으며, 21살 때는 정삼위(正三位) 곤츄우나곤(権中納言)으로 승진하였다. 24살 때, 히데요시의 아들 츠루마츠(鶴松)가 죽자 칸파쿠의 지위를 물려받았다. 이제 더 이상 자식을 바랄 수 없다고 본 히데요시는 히데츠구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 한 것이다. 쥬라쿠테이(楽第[각주:2])를 히데츠구에게 주고 히데요시 자신은 오오사카 성(大坂城)으로 가 이후 타이코우(太閤[각주:3])라 불리게 된다.

 하지만 2년 후인 1593년 히데요시에게 오히로이(おい – 후에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난 것이다. 히데요시는 히데츠구에게 칸파쿠를 물려준 것에 후회하기 시작했다. 히데요시의 그런 감정을 히데츠구도 느낄 수 있었다.
  히데츠구가 여기서 깨끗하게 '칸파쿠'라는 직책을 히데요시에게 반환하였다면 비극의 인물이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 맛본 권력의 맛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이때 일본 전국을 5분할하여 그 중 4/5는 히데츠구에게, 1/5을 히데요리로 나누는 계획도 준비했다고 한다. 또한 장래 히데요리의 부인으로 히데츠구의 딸을 맞이하여 토요토미 가문(
豊臣家)을 잇게 하는 방안도 생각하였다.

 그러나 히데츠구는 그러한 히데요시의 고뇌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였으며 오히려 자포자기와 같은 행위를 거듭하게 된다. 히데요시가 칸파쿠의 직책을 거두어 가는 것이 아닐까? 그런 강박관념이 그를 난행으로 몰고 갔다.
 철포(
鐵砲) 연습을 핑계로 쿄우토(京都) 교외 키타노(北野) 근방에 가서 밭일을 하던 농부를 표적으로 쏘아 죽였고, 또한 활의 표적으로 지나가던 사람을 멈추게 한 후 맞추어 죽였다. 나중에는 살인에 맛을 들여 밤중 시내에 나가 돌아다니다 마주친 사람을 계속해서 칼로 죽였다. 자신의 칼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다 – 그 손맛이 죽였다. 히데츠구는 이렇게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 수백 명을 죽였다고 한다.

 히데츠구의 난행은 끝이 없었다. 오오기마치 죠우코우(正親町上皇)가 죽었다[각주:4]고 하는데도 사슴사냥을 하고 싶다고 억지를 부렸다.

죽은 상황에게 공양하기 위해서 사냥을 하니, 이것을 살생관백이라고 한다
御所のたむけのためのなれば、これをせっしょう関白という[각주:5]
 는 낙서마저 나왔다.

 히데츠구는 그 다음으로 성지(聖地)라 일컬어지는 히에이잔(比叡山)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금녀의 구역인 히에이잔에 여성들까지 함께 데리고 올라가 사슴사냥을 한 것이다. 히에이잔은 물론 살생이 금지된 땅이었다. 스님들이 멈추어달라고 사정을 하자 오히려 더욱 흥분하여 원숭이, 너구리까지 잡아 그렇게 사냥해 온 것들을 본당() 네모토 중당(根本中堂)으로 가지고 들어와 대놓고 요리해 먹은 것이다. 그걸로 그치지 않고 승려들이 쓰고 있던 소금이나 식초통에 사냥한 개나 사슴의 시체를 던져 넣었다.[각주:6]

 이런 난폭한 행위들은 히데요시의 귀에도 들어갔다. 히데요시는 잠시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하다가 겨우 "저건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히데요시의 분노를 폭발시킨 것이 있으니 히데츠구가 조정에 막대한 헌금을 한 행동이었다[각주:7]. 1595년의 일이었다. 히데요시는 이것을 모반하기 위한 준비작업으로 판단하였다. 파견된 힐문사(詰問使)에게 히데츠구는 결백을 주장하였지만 히데요시는 용서하지 않았다. 결국 칸파쿠, 사다이진(左大臣)이라는 요직()을 박탈당했다. 히데요시와의 면담도 거부당하여 코우야 산(高野山)으로 추방당한 뒤 그곳에서 할복을 명령 받았다.

 히데츠구의 가족들에 대한 히데요시의 처치는 잔혹의 극을 달했다. 처첩과 자식들 모두 쿄우토 산죠우 강변(三条河原)으로 끌려가 히데츠구의 목 앞에서 사형당했다. 2~3세의 아이까지 모친의 면전에서 살해되었으며 그 모친도 곧바로 목이 베어져 죽음을 당했다.

[도요토미노 히데쓰구]
1568년생. 처음엔 '미요시 야스나가(
三好 康長)'의 양자가 되어[각주:8] '미요시 마고시치로우(三好 孫七郎)'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1585년 오우미(近江), 야마토(大和)에서 43만석[각주:9]. 1591년 칸파쿠(関白)가 되었다. 1595년 추방당하여 자살. 28세.

  1. 즈이류우인 닛슈우(瑞龍院日秀). [본문으로]
  2. 히데요시가 자신이 세운 정권의 권위와 상징을 위해 쿄우토에 세운 정청(政廳)겸 주거지. [본문으로]
  3. 은퇴한 칸파쿠에게 붙여주는 경칭. [본문으로]
  4. 1593년. 1586년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에게 양위한 상태였다. 여담으로 히데요시는 이 오오기마치가 양위하고 살 집(센토우고쇼(仙洞御所))을 마련한 공로로 칸파쿠(関白)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원어로는 'せつせう'라고 되어 있는 듯... 살생(殺生)과 섭정(摂政)의 발음은 둘 다 셋쇼우(せっしょう). 그 발음이 같은 것을 이용해 섭정관백을 살생관백으로 말장난한 것. [본문으로]
  6. 히에이잔 측의 기록에는 없는 말이라고 한다. 야마시타 토키츠네(山科 言経)의 일기인 [토키츠네 경기(言経卿記)]에 따르면 히데츠구는 당일 쥬라쿠테이(聚楽第)에서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를 듣고 있었다고 한다...뭐 이 헤이케모노가타리 듣는 것도 향락에 속하는지라 상황 붕어의 자숙하는 분위기에서 해선 안 될 행위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7. 이 뿐만 아니라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가 이른 것에 따르면, 뭔 일이 있을 시에는 관백인 자신(히데츠구)을 따른다는 서약서를 비밀리에 제출하라고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8. 그전(3살 즈음)에 '미야베 케이쥰(宮部 継潤)의 양자가 된 적이 있다. 양자가 되었을 당시 미야베는 오우미(近江) 아자이 가문의 유력 무장이었는데, 히데요시는 미야베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며 안전보장 한다는 의미로 자신의 조카를 양자라는 이름의 인질로 보냈다. 아자이 가문이 멸문되자 반환되었다. [본문으로]
  9. 그 후 오와리와 이세 등에 100만석.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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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Gyuphi IV 2009.08.01 11: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데 저 히데츠구의 고뇌라는것도 납득이 갈만도 합니다. 칸파쿠직을 다시 내어준들, 잠재적 경쟁자일 조카를 갓난아기인 친자식이 있는데 가만히 내버려둘리도 없잖겠습니까..랄까, 애시당초 신뢰로 형성된 관계라면 모를까 저 센고쿠에 그런관계따위 있을리가 없죠.

    히데요시가 1592년 전에 죽었다면 어땠을까 싶긴 하군요. 뭐 느슨한 연합체이긴 하겠지만 도요토미 정권 비슷한게 에도바쿠후를 대신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2 10: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사군상 56, 센고쿠 무심전, 토요토미노 히데츠구 항목을 쓴 오오노 노부나가(大野信長)씨는 마지막에 흥미로운 해석을 해 놓았더군요.
      마에다 토시이에의 딸이며 우키타 히데이에의 부인인 고우히메(豪姫)를 히데요시가 평하며 한 말인...
      "남자였다면 칸파쿠를 물려줄 텐데..."라는 것을 들어, 히데요시는 가장 사랑하고 평가하는 인물에게 주는 칭호였다고(...문제는 저는 아직 히데요시가 고우히메에게 한 저 '칸파쿠 운운'하면서 천하를 준다는 말을은 고우히메 말고 다른 사람에게도 했는지 본 적이 없어서...뭐..임진왜란에서 대성공해서 히데요시가 중화황제가 되었을 시 일본 칸파쿠(즉 일본총독)으로 임명할 생각을 가졌다는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은 있지만요)

      흥미롭군요. 1592년 히데요시 사망이라...
      아마... 히데츠구의 정권이 주욱 이어졌다고 쳤을 때... 히데츠구 인생의 유일한 패전이었다는 코마키-나가쿠테는 아마 제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川中島の戦い)처럼 말타고 달려드는 이에야스와 젊은 나이지만 중후한 히데츠구가 그것을 맞받아 치는 이야기도 생겼을 것이고...

      히데요시의 갖은 성공 뒤에는 어린 나이의 천재 군략가 히데츠구가 활약했다고 나온다던가..

      이에야스의 신격화가 진행되지 않았을 테니 이에야스를 똥싸개로 만든 타케다 신겐도 그냥 지방군벌 찌질이 레벨, 그에 이은 우에스기 켄신도 신경질 졸 부리는 약탈방화범...정도로 인식될지도요.

      (저런 것으로 IF전기를 써도 재미있겠군요 ^^ )

  2. 나라 2009.08.02 21: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친구는 운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3 03: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보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운이 없는 편이라 생각합니다.

      코마키-나가쿠테에서 본전만 찾았더라도 이에야스는 코너로 몰렸겠고, 그랬다면 히데요시의 위상도 더 높아짐과 동시에 동국의 방파제로서의 히데츠구의 가치도 높아졌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츠루마츠의 죽음도 어쩌면 운이 없다고 볼 수 있죠. 츠루마츠가 살았다면 적당한 위치에서 적당한 보호자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겠지만, 츠루마츠의 죽음으로 준비도 없이 단번에 No.2 이후는 뭐...

      가장 운에서 버려진 것은 역시 히데요리의 탄생. 속 좁아져 자기 아들밖에 안 보이는 권력자의 눈에 No.2는 단순한 방해물밖에 안 되었을 것 같습니다.

      ...뭐 머든 결과론이지만 말입죠.

  3. 나라 2009.08.03 07: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인적으로는 히데요리가 탄생했을 때에 관백을 반납하고 머리를 낮췄으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아니면 오슈의 제장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_-;;)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도 들더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4 10: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뭐... 그것땜시 나중의 비극이 생긴 것 같습니다.

      우선 절대로 없었을 것 같군요.
      오우슈우에서 조선까지 가는 동안(즉 일본 내에서의 이동 만으로) 어마어마하게 드는 쌀과 돈을 생각하면...
      거기다가 오우슈우의 무장들은 카사이-오오사키의 난, 쿠노헤의 난에서 이미 병역을 치루었기에 임진왜란 때는 면제가 된 것 같더군요. 굳이 갈 필요 없는데 간 다테 마사무네가 특이하다면 특이 케이스....하긴 임진년 초기에는 우에스기 패거리들도 건너가서는 금방 돌아온 애들이고.

  4.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08.03 19: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게 다 히데요시 때문이다 랄까(...)
    물론 살생관백이라 불려질만큼 히데츠구가 저지른 일은 옹호할수 없지만... 히데요리에 정신이 팔려서 마무리가 흐지부지한것이...
    그냥 조용히 불러서 히데츠구 너님 다음 칸파쿠로 히데요리는 어떻냐 나중에 물려주면 안되겠냐 하고 좋게좋게 협상해서 끝났으면 나중에 이에야스 러쉬가 와도 토요토미씨 멸망까진 안갔을텐데 싶네요.

    그나저나 구레나룻이 뭔가 인상적이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4 10: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살생관백으로 유명한 여러 에피소드들은 하나의 소스를 시작으로 유포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무려 오오타 규우이치(太田牛一)의 [태합님 군기에 대해서(太閤さま軍記のうち)]...것도 '그랬다!'가 아닌...'~라고 하더라'..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며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이럴 때마다 느끼는 비애.. 원본을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입죠. '누가 그러더군요'는 식으로 쓸 수 밖에 없어 안타깝습니다)

      ...따라서 실제로 히데츠구가 악행을 저질렀을지 어땠을지...개인적으로 청개구리파인지라 남들이 대세적으로 그렇다는 것을 비틀어 보는 경향이 있는지라 전 히데츠구 무실설을 취하고 있습니다.

      아마 히데요리도 히데츠구가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눈치는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히데츠구가 어떤 생각을 가졌을지는 모르겠지만요.

      구렛나루 하면 가모우 우지사토(蒲生氏郷)도 한 구렛나루 합죠.... 그러고 보니 우지사토는 엄청 미남이라고 하며 히데츠구도 잘 생겼다는 이야기도 보이더군요...그렇담 센고쿠 미남의 조건 중 하나는 구렛나루?

  5.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8.08 10: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간만에 뵙네요. 잘 지내셨는지요 ^^

    여기 오면서 <역사군상>이란 책 이야기를 자주 들어서 어떤 책인가 싶으면서도 머릿 속에 대충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는데, 제가 생각했던게 그거였네요. 꼭 사고 싶지만 일본어와 비용의 압박이 심하군요 -ㅅ-;;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8 13: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 잘 지내시죠? 전 덕분에 (돈 없는 거, 애인 없는 거, 집 나간 고양이 생각하는 거 빼 놓고는) 잘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예전보단 나아진 편입죠. 예전엔 고문을 그대로 쓰고 해석도 안 해주는 경우도 많았지만, 요즘엔 그래도 해석도 써 주고 루비(한자 위에 발음 써 주는 거)도 달려서 읽기는 많이 편해졌습니다....만 그 대신이랄지.. 가끔 황당한 주장을 실어서 깨는 경우가 있습니다.

    •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8.08 15: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황당한 주장이라면 학설같은건가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8 16: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제가 또 말을 실수했네요. 그냥 잊어주시길. ^^; 료우마에 관한 것에서 료우마가 프리메이슨의 꼬봉이었다는 글이 워낙 인상에 남아서 실수를 저질렀네요.

  6. shiroyume 2009.08.08 22: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양반... 전에는 히데요시한테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했는데(대망의 영향인지...)

    역시 생각해봐도 설사 히데요리가 안태어나도 붙잡혀 죽었을 듯. 어째 우리의 고려의 막장군주 충혜왕과 겹쳐지는건 -_-;

    그럼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양자가 되었을라나.

    저는 팩트를 중요시하는편이라 시바료타로를 재밌게 읽긴 하지만 링크걸어놓은걸 보니 확실히 뭐라고 해야하나...가독성은 떨어지는군요. 한국에서 인기가 없었을만도 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무래도 일본은 문화적성향상 디테일도 중요시 여기지만 한국은 가독성이 있고 흐름이 있는 이야기를 좋아하니까. 그래서 최악의 사서로 평가받는 이문열 삼국지가 잘 읽히는건가...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10 16: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주 무능하거나 알려진대로 좆병진이었다면 내버려 두어도 인심은 알아서 떠날 것이며 또한 자멸할 터이니 죽일 필요까진 없었겠죠. 아주 뛰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능력과 인덕이 있었기에 히데요시는 자신이 일군 업적을 빼앗길까 두려워 한 것이고 그렇게 참혹히 관련된 사람들을 죽인 거 아닐까요?

      츠루마츠 죽은 시점에서라면 히데아키처럼 처의 친족보다는 히데츠구의 친동생이며 역시 히데요시의 양자가 된 히데카츠(秀勝)가 되었을지도...무엇보다 히데요시의 친아들 히데카츠의 이름을 물려받은 사람이니까요.

      가독성이 떨어지는 것이야 제가 번역해서 그런 거고요. ^^; 개인적으로는 괜찮은 역사소설이라 생각합니다. 제대로 번역작업하시는 분이 하셨다면 정말 좋은 글이 나왔을 듯.

  7. 1 2009.08.10 03: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료마가 프리메이슨의 꼬봉이라는 글 굉장히 구미가 땅기는데, 언제 기회가 되면 블로그에 소개해주세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10 16: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야~ 그런 글을 올렸다가는 주화입마에 빠지는 분들이 있을까봐 피하고 싶군요.

      우리나라에 들어온 료우마의 인식이야 시바 선생의 '료마가 간다' 정도일텐데 그런 상황에서 저런 말도 안 되는 글을 유포시킬 엄두가 나지 않는군요. 그래서 죄송합니다만 불가능합니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한가지 덧붙이자면 음모론은 거의 대부분이 구라입니다. 있는 사실을 빼놓고 주장하고픈 사실들만 나열해서는 독자를 속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더군요. 료우마의 프리메이슨 꼬붕설은 그런 류의 하나입니다.

      일본어 아신다면 '신 역사군상 시리즈④ - 유신창세 사카모토 료우마' 150~152페이지를 참조해 주십시오.(몇 일전 들린 교보문고에 저 책은 아직 몇 권 더 있더군요)

  8. agger 2009.10.08 03: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히데츠구의 여타 능력은 솔직히 잘 모르겠으나 정치적인 식견이 없었기에 죽음을 자초한것이라고 생각..
    자신의 입지가 불안해졌을때 알아서 기었으면 좋았을거라고 생각드는군요
    아니면 아예 요도도노에게 굽신굽신 하면서 히데요리의 후견인 비슷하게 가겠다는 정치적 움직임을 보여주거나..하튼 히데요시에게 안심을 주는 퍼포먼스를 보여줬어야 했는데..그런 부분이 안타까움..

    개인적으로는 히데요시를 참 좋아하고 그런 모습을 닮고 싶은데(말년빼구요 ㅋㅋ) 히데츠구가 죽은 시점이 도요토미가의 몰락?을 예견한 분수령이 된거같아서 아쉽게 느껴지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08 17: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확실히 히데츠구에게는 히데요시를 안심케 할 만한 뭔가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아니면 그런 일을 했는데도 히데요시가 부족했다고 느겼을 수도 있고요)

      히데요시가 히데츠구에게 붙여준 가신단의 면면들을 보면 확실히 히데츠구를 후계자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단지 역시 히데요리가 태어난 것이 토요토미 가문 그리고 히데츠구에게는 마이너스였던 것 같습니다.

 천하인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는 직위가 신하로서는 최고인 칸파쿠(白) 다이죠우다이진(太政大臣)까지 되었지만 그 출신이 오와리(尾張) 나카무라(中村)의 성(姓)도 없는 일개 농민의 자식이었다는 것을 지금은 누구나 알고 있다. 어렸을 적에 도적 하치스카 고로쿠(蜂須賀 小六)의 밑에 있었다는 이야기도 굉장히 유명하지만 스루가(駿河) 이마가와 가문(今川)에 속해있던 마츠시타 카헤이(松下 嘉兵衛)를 섬겼을 때의 이야기도 소년시대의 히데요시의 풍모를 전해주고 있어 흥미롭다.
 마츠시타 카헤에가 하마마츠(浜松)의 마을 밖의 히쿠마가와(曳馬川) 강 근처에서 얼굴이 특이한 아이를 주웠다.
 [원숭이인가? 하면 사람. 사람인가? 하면 원숭이]
 어느 책에 이렇게 기록되어있는데 그것이 히데요시였다. 이때 카헤이는 하마마츠의 영주 이이오 부젠(飯尾 豊前)을 방문하여 "특이하게 생긴 꼬마를 주웠다네"하며 이 히데요시를 구경거리로 데리고 간 것이다. 이이오 부젠의 부인이나 딸들이 신기해하며 밤을 던져주자 히데요시는 마치 원숭이처럼 입으로 껍질을 벗겨 먹었다. 그녀들은 손뼉을 치며 재미있어했다고 한다.
 후세에 만들어진 위의 이야기처럼 사서로 전해지는 것에서도 히데요시의 용모는 원숭이와 닮았던 듯 하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원숭이(猿=사루)'라고 불렀던 것은 너무도 유명한데[각주:1] 히데요시를 보았던 모우리(毛利)의 신하 타마키 요시야스(玉木 吉保)는 [붉은 수염을 기르고 원숭이 눈과 같이 정신 없이 움직인다.[각주:2]]하고 쓰여 있으며,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
)도 조선 침공 계획을 듣고 "원숭이놈 죽을 자리를 못 찾아서 미쳤나?"라 욕하고 있다.

 이쯤에서 히데요시가 출세할 수 있었던 비결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 본다.
 우선 돈을 쓰는 방법이 절묘했다.
 전투를 할 때도 공을 세운 병사에게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상금을 주었다. 톳토리 성(鳥取城) 공략 때,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가 성을 정찰하러 갔다가 적을 만나 물리치고서는 보고를 하였는데 이 보고를 받은 히데요시는 곧바로 황금 한 웅큼과 100석을 가증해 주었다고 한다.
 특히 혼노우(本能)사(寺)의 변 때
츄우고쿠(中
)에서 급히 아케치(明智)를 물리치기 위해 쿄우토(京都)로 향했을 때 돈을 뿌린 방식이 굉장했다. 히메지 성(路城)에 있던 금은과 쌀을 하나도 남김없이 부하들에게 준 것이다. 즉 이때 히데요시는 무일푼이 되었던 것이다. 그 과감한 투자로 히데요시는 천하를 얻은 거라 말해도 과언이 아닐지도 모른다.
 돈이라고 하면 천하를 얻은 후 쥬라쿠테이(聚
第) 문 밖에서 돈을 나누어 준 것은 고금에 예를 볼 수 없었던 쇼였다. 금은 합계 36만 5천냥을 친족부터 시작해서 고급 귀족(公卿)이나 다이묘우(大名)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분배하였다.

 또 하나 히데요시 출세의 비결은 어떤 일이건 철저히 한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젊었을 때는 철저히 봉사를 함으로써 주군 노부나가에게 인정받았다. 짚신을 따스하게 덥혔다는 에피소드에서 상징되듯이 오로지 주군만을 생각하였으며 자그마한 욕심도 부리지 않았다. 어떠한 공을 세우더라도 영지(領地)에 대한 야심은 병아리 눈곱만큼도 보이질 않았다. 츄우고쿠 정벌 때 노부나가가 하리마(播磨)를 준다고 하였지만 사퇴하면서 그보다도 조선(朝鮮)을 공략하게 되면 그 나라를 받겠습니다 – 라며 꿈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열석해 있던 다른 무장들은 코웃음 쳤지만 노부나가는 그 무욕에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1581년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에게
오우미(近江), 하리마(播磨), 타지마(但馬) 등 70여만석이라는 영지(領地)를 하사 받았는데 이 때 고마움을 나타내고자 노부나가에게 막대한 선물을 보냈다. 타치(太刀) 한 자루, 은자(銀子) 6000매, 옷(小袖) 백 벌, 가죽 200매, 종이 200다발, 말린 도미 1000마리, 그 외에 도자기 등이 끝없는 행렬을 만들며 아즈치 성(安土城)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사람을 쓰는데 있어서도 히데요시는 뛰어났다.
 천성적으로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으며 인정미가 넘쳤고 미천한 신분 시대에 얻은 거짓말 안하기, 남을 속이지 않기가 다른 사람의 신용을 얻는 것이라는 '생활의 지혜'가 그 기본이 되었다.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이나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을 섬겼으며 나중에 히데요시에게 시모츠케(下野)에 3만석을 하사 받은 사노 후사츠나(佐野 房綱)는 "신겐공이나 켄신공을 만날 때는 분위기가 엄격하여 압도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히데요시공은 '여어~ 텐토쿠지(天
寺=후사츠네의 호). 잘 오셨네'며 굉장히 친근하면서도 정중한 말투를 쓰셨기에 감개무량하였다"고 히데요시의 거드름 피우지 않는 성격을 전해주고 있다.
 혼노우(本能)사(寺)의 변 때도,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
秀),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등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산하의 다이묘우(大名)가 인질을 받쳐 충성을 맹세하고자 하였지만 히데요시는 "그럴 필요 없소"하며 인질을 받지 않았다.

 또한 히데요시는 남을 직접 돌봐줄 때도 마치 자기 친형제에게 하는 듯이 애정 넘쳤다. 나가쿠테 전투(長久手合)에서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 모토스케(助)가 전사하였을 때, 츠네오키의 부인을 위로하고 남겨진 차남 테루마사(輝政)를 친자식처럼 키웠으며, 비젠(備前)의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가 노부나가에게 미움 받았을 때는 노부나가에게 거짓말까지 하면서 감쌌다.
 속이지 않으며 약속을 지킨다는 점에서는 저 나오이에에게 약속한대로 아들인 히데이에를 후에 오대로(
五大老)의 한 명으로 만들 정도로 크게 중용하였으며,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 카게아키라(朝倉 景鏡)의 경우 그의 주인 요시카게(義景)를 배반한 요시아키라의 행위에 노부나가는 혐오하며 용서치 않으려고 하였지만 히데요시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끝까지 노부나가를 설득하여 그의 생명을 구했다.

 조선의 기록에 파격적인 히데요시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 있다.
 1590년 11월 조선의 사자(使者)를 접견했을 때였다. 술을 내어 접대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히데요시는 잠깐 나갔다가 갓난아이(장남 츠루마츠(鶴松))를 안고 들어왔다. 안고서 실내를 어슬렁거리다가 조선의 악사(樂師)들에게 연주를 시키게 하던 중 그 갓난아이가 오줌을 싸버린 것이다. 히데요시의 옷도 다 젖었다. 히데요시는 크게 웃고는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고 한다. 조선의 사신은 이를 '방약무인'이라고 평하였다.[각주:3]

 무엇이든 스케일이 다른 히데요시는 호색도 남달라 수 많은 측실을 데리고 있었지만 부인인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에 대한 배려만은 허술히 하지 않았으며 세세했다. [신신당부하네만 대변이 나올 수 있게 쓰셨으면 하는 마음에…]하고 설사약에 대한 것까지 편지에 적고 있다.
 후계자를 낳은 요도도노(
淀殿)에 대한 애정은 손을 쓸 수가 없을 정도였다. [20일 즈음에 반드시 네게로 가 도련님(츠루마츠)을 안고 싶구나. 밤에는 너와 함께 자고 싶다…]고 쪽팔리지도 않은 듯이 편지를 쓰고 있다. 한편으론 오다와라(小田原) 정벌 때 진영에서 키타노만도코로에게 편지를 보내어서는 '당신 말고는 요도가 맘에 들더군' 라는 등 서열을 확실히 정하여 그녀의 우월감을 만족시켰다. 또한 모친 오오만도코로(大政所)에 대한 효심도 깊어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에 재진 중이던 1592년에 오오만도코로가 죽자 히데요시는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기절했다고 한다.

 센고쿠(戦国) 시대는 사람 좋은 것만으로 헤쳐나갈 수 없다. 히데요시도 또한 센고쿠 무장이다. 천하인(天下人)이 되기 위해서는 뛰어난 무장이 아니면 안 된다. 히데요시가 천재적인 무략가라는 예를 들어보자.
 1582년 6월. 히데요시 46살 때였다. 빗츄우(
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를 수공(水攻)하고 있던 6월 3일 한밤중의 히데요시 본진에 혼노우(本能)사()의 변보가 전해졌다.
 이 순간부터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의 일개 부장에서 천하인으로의 길을 내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전군을 질타하여 폭풍우 속의 타카마츠를 출발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질주하였다. 히메지(
)까지 100km를 불과 하루 만에 돌파라는 엄청난 스피드였다. 이것이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순식간에 물리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그 후 시즈가타케()에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를 격파한 것도 신기에 가까운 움직임에 의한 것이었다.

 말년의 히데요시는 오로지 히데요리()에 대한 맹목적 사랑에 빠져 더 이상 천하를 취한 영웅의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는 그냥 평범한 노인으로 변모하였다. 3살의 히데요리에게 보낸 편지에 '곧 너를 보러 갈 테니 그 때까지 엄마의 젖을 많이 빨고 있으렴' 등을 쓰며 요도도노의 모유 상태까지 걱정하고 있다.

 마지막까지 히데요리의 장래가 걱정되었는지 죽음이 가까운 1598년 8월 5일 병상에서 이에야스(家康)나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등 오대로(五大老)에게 '히데요리가 다 클 때까지…'하고 불안하다는 듯이 유언을 남겼다. 그로부터 13일 뒤인 18일 미명. 63세의 나이로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죽었다.

[도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1537년 오와리(尾張)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오다 가문(織田家)의 아시가루() 키노시타 야에몽(木下 弥右衛門). 최초의 이름은 키노시타 토우키치로우(木下 藤吉).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1574년에 오우미(近江) 나가하마(長浜) 성주가 되었다.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친 후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를 멸망시켰고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와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에서 싸운 후 화해. 1585년 49살 때 칸파쿠()가 된다. 다음 해 다죠우다이진(太政大臣)이 되어 성을 토요토미(豊臣)로 바꾸었다. 1587년 쥬라쿠테이() 완성. 1598년 8월 제2차 조선역(朝鮮役)[각주:4]이 한창이던 중에 죽었다.

2007/03/23 -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 토요토미노 히데요시

  1. 노부나가가 그를 '원숭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노부나가는 그를 대머리생쥐(禿げ鼠)라고 불렀을 뿐이다. 그것도 히데요시의 부인 네네(키타노만도코로)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에서만 보이는 표현이다. [본문으로]
  2. 원문의 猿まなこをぎょろつかせ・・・猿まなこ는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낸다는 뜻이지 원숭이와 닮았다는 뜻은 아니다. 즉 이 책의 저자는 예시를 잘못 들은 듯. [본문으로]
  3. 有頃, 秀吉 入內, 在席者不動。俄而便服, 抱小兒出來, 徘徊堂上而已, 出楹外招我國樂工, 盛奏衆樂而聽之。小兒遺溺衣上, 秀吉 笑呼侍者, 一女 倭 應聲出, 乃授其兒, 更他衣, 皆肆意自得, 傍若無人。- 선조수정실록 24년 3월 1일. 3번째 기사. [본문으로]
  4. 정유재란을 말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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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맹꽁이서당 2009.02.26 09: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에도 잘 읽었습니다. ^^
    그러고보니 궁금한 것이.. [헤이케 모노가타리]에서 성과 이름 사이에 '노'를 붙인 것을 많이 봤지요. 보통 전국시대 무장들 이름엔 '노'가 없던데 번역하신 책에서 풍신수길에게만 '노'를 붙인 특정한 이유라도 있을까요?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2.27 20: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게 또 별로 안 복잡하면서 설명하기는 쪼큼 힘든 것이라...

      우선 본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미나모토(源), 타이라(平), 후지와라(藤原), 타치바나(橘), 수가와라(菅原) 등등등...그냥 텐노우가 하사하는 것이라고 합시다...^^;

      그 본성의 아래에 있는 개념(??)으로, 어느 곳의 땅을 얻어서 그 땅의 지명을 성으로 이용한 것이 묘우지(苗字)... 오다 가문의 경우 후지와라의 후손 중 하나가 오다장(織田庄)의 영주가 되면서부터 사용한 것이 오다씨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경우 오다(織田)는 묘우지(苗字 - 성의 발상지)이며, 그의 본성(本姓)는 전성기때는 타이라(平), 초창기는 후지와라(藤原), 그 오다 가문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베(忌部)라고 하지만...어쨌든... 오다 노부나가도 타이라의 성을 이용할 경우는 타라이노 노부나가(平 信長)가 되옵죠..

      히데요시의 경우 텐노우에게 토요토미(豊臣)라는 본성을 하사받은 다음 부터는 그것만을 사용했다고 하기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 전에 하시바(羽柴)나 키노시타(木下)라는 묘우지를 사용할 경우는 그냥 하시바 히데요시, 키노시타 토우키치로...로 하고 있습죠.

      보통 본성은 궁정에서 활동할 때 주로 쓰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별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냥 본성일 경우 '**노 **'..라고 쓰는 것이 원칙이라는 것과 토요토미 성을 하사 받은 이후 히데요시는 본성만을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2.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2.26 18: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랜만에 만화방에 갔는데 '센고쿠'라는 만화책이 있더군요. 전국시대를 사는 무사 이야기를 다뤄서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거기서도 히데요시의 '대머리 생쥐' 별명 이야기가 나오더라구요.

  3. 히히후 2011.08.15 19: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통일하고 천하인이라니 허세가 하늘을 찌를듯하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15 21: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당시 일본에서 '천하'라는 개념이 어떻게 쓰였는지 살펴보시길 권합니다.

      거기에 히히후님이 천하를 어떤 개념으로 아시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한 문명의 권력면에서 정점에 다다른 자라면 천하인이란 단어를 못 쓸 것도 없습지요.

五.

 이 1586년 12월에 칸파쿠(関白) 히데요시는 다죠우다이진(太政大臣)이 되어 토요토미(豊臣)라는 성(姓)을 하사 받음으로써 타이라 씨(平氏), 미나모토 씨(源氏), 후지와라 씨(藤原氏)라는 고귀한 성(姓)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일본 귀족으로서의 위치와 체면을 확립하였다.
 이 때문에 히데요시는 궁중에서의 예식이나 축하연회 등으로 쿠게(公家) 사회에서의 사교로 매우 바빴다. 쿄우(京)에서는 쥬라쿠테이(聚楽第)에 주거하고 있었다. 쥬라쿠테이는 이 해의 2월에 완공되었고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각주:1])와 오오만도코로(大政所[각주:2])도 불려와 그대로 쿄우(京)에 있었다.


 오오사카(大坂)에는 챠챠(茶々)가 있었다. 챠챠에게는 토요토미 가문 일족의 쿠게(公家) 사교에 참여할 명분이 없었기에 사람들의 입으로 쥬라쿠테이의 화려함을 듣기만 하고 있었다.
 - 한번 보고 싶구나
 하고 유모에게도 말하였지만 이것만은 유모도 어찌 해 줄 수 없었다. 쥬라쿠테이는 친왕, 상급귀족(公卿), 몬제키(門跡[각주:3]) 그리고 위계가 높은 무장들의 사교 장소이기에 아무런 위계도 가지지 못한 몰락 다이묘우(大名)의 고아가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정말 화려하겠구나”

 챠챠는 동경하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키타노만도코로는 위계를 가지고 계신가?”

 “칸파쿠의 부인이시니까요.”

 여성이면서 종이위(從二位)였다. 다이나곤(大納言) 등보다도 상석이었다.

 굉장히 화려할 것이다. 챠챠는 쿄우(京)의 번화함을 상상하였다. 온갖 꽃들이 화려하게 피여서는 저마다의 미를 자랑하는 화원을 연상했다. 쥬라쿠테이 주변에는 끊이지 않고 음악이 울려 퍼지며 시회(詩會)나 다회(茶會)가 열리고 항상 그 중심에 히데요시와 키타노만도코로가 있을 것이다.

 어느 날.
 히데요시가 갑자기 오오사카 성(大坂城)으로 내려왔다. 성안은 북새통이 되었다. 히데요시는 자기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챠챠의 유모를 불렀다. 유모는 서둘러 수 많은 복도와 복도를 가로질렀다. 히데요시는 이외로 혼자 있었다.

 “여어~”

 하고 히데요시는 유모의 얼굴을 보자마자 자신의 얼굴을 쓰윽 쓰다듬었다. 식초라도 마신 듯한 얼굴을 하고서는 더구나 쪽팔리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알겠나? 이 얼굴”

 히데요시는 자신의 얼굴을 거울도 보지 않고 아는 것 같았다. 이 얼굴을 보아라, 이 얼굴로 추측하라, 쪽 팔려서 입으로는 말할 수 없다 – 고 말했다. 유모는 넙죽 엎드려 절을 하였다. 유모는 이해했다. 챠챠를 말하는 것이다.

 “마음이 답답하여 참지 못하고 이렇게 오오사카로 돌아왔네. 알겠나? 내일은 쿄우(京)로 돌아간다”

 ‘내일은 쿄우에?’
 그렇다면 오늘 밤만이 기회였다. 이렇게 경황없는 명령이라니……

 “허락하마. 그 편지상자를 열어보아라”

 히데요시는 말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유모는 눈 앞에 편지상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황송해하며 그것을 열어 안에서의 한 장의 시가 적힌 종이를 꺼냈다. 놀랍게도 연애시였다. 히데요시는 요즘 시에 열심으로 또한 현실적인 필요로 인해 쿠게(公家)의 습관에 익숙해지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유모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연애에 대해서까지 쿠게(公家) 풍으로 흉내 내려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이 사람을 꼬시는 데 있어서의 천재가 챠챠에게만은 이렇게 고풍스런 수단을 이용함으로써 챠챠에 대한 존중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 익살꾼의 단순한 장난인가?

함께 자고픈 마음이 오오사카에 다녀온 듯하다
팔베개하며 꾼 오늘 밤의 꿈.
想い寝の心や御津に通ふらむ
今宵逢ひみる手まくらの夢

 음률도 갖추어져 있었다. 히데요시 시의 첨삭은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斎)가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 시도 그런 것일까?

 “내가 만든 시다”

 히데요시는 일부러 말했다. 유모는 황송해하며 그것을 편지상자 집어넣어 뚜껑을 덮고 보라색 끈을 묶어 머리 위로 공손히 들어올렸다.

 “오늘 밤 술시(밤 여덟 시)에 건너가겠다. 이불에 있으라고 하라, 누워 있으라고 전해라”

 하고 딱 잘라 말했다. 이런 것은 쿠게(公家) 풍이라기 보다는 말 위에서 천하를 획득한 무사 정권의 우두머리다웠다.
 유모는 물러나려 하였다. 하지만 히데요시가 불러 멈추게 하고는 시동(児小姓)을 불렀다. 시동은 흰 나무로 된 작은 상을 머리 위로 받쳐들고 와서는 유모 앞에 내려 놓았다. 하사품이었다. 더구나 황금이었다. 유모는 물론 받을 수밖에 없었다.

 유모는 히데요시의 방에서 나와 긴 복도를 건너면서 생각하였다.
 ‘전하는 3년이나 공들이셨다’
 라는 실감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유모도 일찍부터 히데요시의 좋은 도우미가 되어 있었다. 다른 오우미 사람(近江人) – 예를 들어 이시다 지부쇼우유우 미츠나리(石田 治部少輔 三成) 등에게서도 유모는 이런 경사스러운 일이 어서 와야 함에 대해 음습한 기대가 담긴 말로 들은 적도 있었다. 어쨌든 챠챠가 가지고 있는 히데요시에 대한 인상이 좋아지도록 얼마나 신경을 쓰며 얼마나 손을 써 왔는지 몰랐다. 그것은 우선 성공하였다. 유모에게 있어 적어도 운이 좋았던 것이 챠챠는 그녀의 모친인 오이치(お市)처럼 도리가 명쾌한 뚜렷한 성격이 아닌 감정적으로 무엇이든 그렇게만 사물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기에, 그런 점에서 유모는 제대로 처리해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제멋대로이고 변덕스러운 성격이기에 막상 그 때가 되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이루어지도록 도와야 해’
 유모는 혼잣말하며 스스로를 고무하였다. 그것이 결국 챠챠에 대한 충성이 되는 것이며, 결코 꿈에서라도 – 챠챠를 황금에 판 것은 아닌 것이다.

 이날 밤.
 술시. 히데요시는 챠챠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불에 있어라, 누워 있으라고 유모에게 명령해 두었는데도 챠챠는 옷을 입은 채 촛대에 둘러싸여 앉아있었다.

 “여어~ 이 향은?”

 하고 히데요시는 순간적인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자신을 쪽팔림에서 건져 올리려 하였다. 방에는 향이 피워지고 있었다. 향이 피워지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히데요시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향은 여러 종류가 섞인 혼합 향(組香)인 듯 했다. 그런 쪽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코로 하나하나 맞출 수 있다.

 “향의 이름은 무엇인고?”

 히데요시는 턱을 들어 콧구멍을 벌름거렸지만 이제 막 쿠게(公家) 문화를 배우기 시작한 히데요시가 맞추기에는 무리였다.

 “어린 나물(若菜)의 향이옵니다”

 하고 챠챠는 희미하게 듣기도 힘들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답하였지만 목소리와는 반대로 그 눈은 거만하게 빛나고 있었다. 원래 챠챠는 히데요시에 대해서 그다지 예의가 바르지 못하였고 때때로 존대하기까지 하였다. 히데요시는 그것을 허용했다. 챠챠에 한해서는 에치젠(越前) 이치죠우다니(一乗谷)에서 만났을 때부터 계속 그런 태도를 허용해왔다. 다른 사람이라면 남성이건 여성이건 히데요시는 그런 태도를 허용하지 않았고 또한 그런 태도를 취하는 사람도 없었다.
 히데요시의 측실은 많았다. 오다 가문(織田家)의 방계 출신인 히메지도노(姫路殿), 아시카가 바쿠후(足利幕府)의 명문가인 쿄우고쿠 씨(京極氏) 출신 마츠노마루도노(松ノ丸殿),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의 여동생 산죠우노츠보네(三条局) 등 많은 명문가 출신들이 있었지만 모두 히데요시 앞에서는 숨죽이고 그의 심기를 민감하게 살피며 열심히 섬겼다. 히데요시도 역시 그녀들에게 상냥하였으며 오히려 너무 상냥할 정도였다. 그녀들 또한 히데요시의 그런 상냥함에 감동하여 감사의 마음을 담아 섬겼다. 하지만 이 챠챠만은 달랐다. 그 제멋대로인 성격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것 같았지만 히데요시 만큼이나 사람의 심성에 대해 정통한 사람도 그리 생각하지는 못하고 이 아가씨는 자신에 대한 원한을 잊지 못하여 어딘가에 항상 품고서는 계속 원망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고 해석하고 있었다. 반해있었던 것이다. 그 반해있음이 히데요시의 태도를 약하게 하였다.

 “이 향은 히메가 피운 것인가?”

 하고 히데요시는 비위를 맞추려는 듯 말했다.

 “아니요”

 하고 챠챠는 말하지 않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챠챠라는 아가씨에게는 혼합 향을 조화시킬 수 있는 듯한 재주가 없었다. 이는 유모가 피웠다. 피웠을 뿐만 아니라, 아씨 잊지 마시옵소서. 이 혼합 향은 ‘어린 나물’이라고 하옵니다. 어린 나물이옵니다. 이와 연관된 옛 시(古歌)는 이것과 이것입니다, 하고 쪽지에 적어서는 하나하나 가르쳐갔다. 그랬을 뿐인 장치였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오해했다. 고개를 가로저은 것은 챠챠의 겸손함일 것이라 생각하여 그 교양의 깊음에 탄복하였다. 이런 점 - 사랑을 하고 있는 젊은이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나는 향에 대한 것은 아무 것도 모른단다. 이 봄나물에는 어떠한 옛 시가 있는고?”

 “몇몇이 있사옵니다”

 하고 챠챠는 매우 부드럽게 답했다. 유모가 가르쳐 주었듯이 ‘어린 나물’에 연관된 옛 시 중 다음과 같은 것은 읊조렸다.

내일부터는 어린 나물을 캐자고 약속한 들에
어제도 오늘도 눈은 계속 내리고
明日よりは若菜摘むとしめし野に
昨日も今日も雪は降りつつ

 히데요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제도 오늘도 계속 내리는 눈’이라는 것은 거부하는 ‘수수께끼’인 것 같았다. 적어도 무언가의 사정으로 오늘은 어린 나물을 캘 수 없습니다, 고 챠챠는 말하는 듯했다.

 "허어~ 캘 수 없나?”

 히데요시는 그래도 한 번 더 확인하였다. 쿠게(公家)의 귀공자라면 아니 적어도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무렵의 도련님들이라면 이렇게까지 수수께끼가 던져지면 여성의 방에서 물러나 나중에 시를 보내는 것이 풍류를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같은 귀족이라도 말 위에서 검을 쥐고 칸파쿠(関白)의 의관을 쟁취한 전쟁터의 사나이였다. 물러나지 않았다.

 “히메! 기왕 이렇게 된 것이다”

 하고 히데요시는 오른손을 뻗쳤다. 행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뻗친 손으로 청자(靑磁)로 된 향로를 집어서는 뚜껑을 거칠게 열고 피워져 있는 불에 물통의 물을 부었다. 재가 일고 향기가 사라지며 동시에 ‘어린 나물’도 옛 시도 수수께끼도 사라졌다.
  키득, 하고 히데요시는 웃었다.
 ‘앗’
 하고 챠챠가 놀랄 정도로 히데요시의 웃는 얼굴에는 흠뻑 빠져버릴 듯한 애교가 있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곧바로 그 웃는 얼굴을 지웠다.
 곧이어 챠챠를 노려보았다.

 “귀족놀이는 이제 그만하자”

 그것은 선언이었다. 무문(武門)에는 무문만의 사랑에 대한 작법이 있을 것이다.

 “오른손을 나에게 맡기라”

 위엄을 가지고 명령했다. 항복과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 무문의 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방법이 오히려 히데요시에게는 더 나았다. 챠챠는 순종적이 되었다. 그 하얀 오른 손을 히데요시 쪽으로 내밀었다. 마음이 멍해지며,
 ‘무엇을 하려고?’
 하고 챠챠가 생각할 여유도 없이 히데요시는 그 손을 잡았고 잡자마자 챠챠를 무릎 위에 눕혔다.

 “챠챠야”

 하고 히데요시가 ‘히메’라는 존칭을 버렸을 때는 이미 챠챠의 몸이 공중에 떠 있었다. 놀랍게도 이 자그마한 남자의 어디에 그런 힘이 있는 것일까? 그대로 이불 위로 옮겨졌다. 그러나 거기서 히데요시의 힘이 다했다. 히데요시는 OTL이 되어 거친 숨을 토했고 토하고는 들이마셨다.

 “나도 늙었다”

 히데요시는 자조적이 되고 싶었을 터이지만 젊은 챠챠에게 허세도 부려야 했기에 무턱대고 큰 소리로 웃었다. 사냥감은 바로 앞에 뉘여있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였다. 숨이 진정될 때까지 뭔가를 떠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난 몸은 작지만 다할래야 다한 적이 없을 정도로 남들과는 다른 뛰어난 체력을 선천적으로 타고 났었지. 그러나 천하를 갈고 닦기 위한 큰일을 하다보니 조금 피곤해졌다. 옛날이라면 너 정도는 손가락 하나로 가볍게 들었을 텐데……”

 ‘거짓말
 하고 챠챠는 엎드려 있으면서도 저 초로를 훨씬 넘긴 남자의 허풍이 웃겼다.

 “챠챠야 내 아이를 낳아라”

 히데요시는 OTL인 채로 고개만 쳐 들고 말했다. 토요토미 칸파쿠 가문의 아이를 낳으라고 거듭 말했다. 히데요시가 이럴 때 쓰는 상투적인 문구였으며 어느 여성에게건 그렇게 말해왔다. 그러나 어느 여성도 그 명령에 따르지 못했다. 히데요시의 아기씨가 드문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석녀(石女)들과만 조우하였는지는 잘 모른다. 어쨌든, 챠챠는 히데요시를 받아들이기 위한 자세가 취해졌다.
 받아 들였다.
 이 순간만큼 거대한 사건은 토요토미 가문 역사 속에서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을 것이다. 단지 자연적인 – 챠챠의 옷이 펼쳐지고 히데요시가 그 육체를 꽉 껴안았을 뿐인 단지 그랬을 뿐의 자연적인 행위가 이 순간부터 토요토미 가문의 체질을 바꾸기 시작했다고 말해도 좋았다. 오우미 파벌(近江閥)이 이 이불 속에서 성립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도 히데요시의 이 상냥함이란…… 그것이 끝났더라도 챠챠를 놓지 않았다. 이야기를 하였다. 이 가련한 이를 위해서 선물을 주고 싶었다.

 “성(城)을 갖고 싶지 않은가?”

 하고 히데요시는 챠챠의 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히데요시는 말했다. – 바다 건너온 비단이나 면으로 된 옷 같은 것을 사라, 시녀의 수도 늘려라, 그러나 챠챠가 가져야 할 것은 성이다. 성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성을?”

 챠챠는 놀람과 동시에 자신의 정부(情夫)는 보통사람이 아니라 천하의 지배자라는 것을 새삼 실감하였다. 천하인의 선물이라는 것은 당연 성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저는 여자이기에 성은 필요 없사옵니다.”

 “사양하지 마라”

 히데요시는 말했다. 꼭 성을 주고 싶다. 그 이유로 히데요시는 쿄우(京)와 오오사카(大坂)를 왕복하니 그 중간인 요도(淀) 근방에 휴식을 위한 성을 하나 두고 싶었는데 그것을 쌓아 챠챠를 살게 하면 그녀도 기쁘고 자신도 편리했다.
 ‘단 다른 여성들에게도 납득시켜놓지 않으면 안 되지’
 다른 측실들은 모두 오오사카 성에서 살고 있는데 챠챠만이 [성주]가 된다면 대부분 질투할 것이다. 무엇보다 정실인 키타노만도코로가 심술내지 않도록 이것저것 이유를 만들어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히데요시의 버릇으로 생각나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빨랐다. 그날부터 몇 일 내에 동생인 야마토 다이나곤 히데나가(大和大納言 秀長)를 불러,

 “요도에 성을 쌓아라”

 고 명령했다. 장소는 카츠라가와 강(桂川)과 우지가와 강(宇治川)이 합류하여 요도가와(淀川)가 되는 합류점으로, 거기에는 예부터 아시카가 쇼우군 가문(足利将軍家)의 성이 있었지만 지금은 불과 보루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 폐허인 성을 부활시켜 작지만 견고한 성을 만들어라, 건물을 화려하게 지어라, 귀부인을 위한 건물로 해라, 여성 침실의 앞마당에는 꽃나무를 잊지 말도록, 화장실도 특별히 생각을 해서 만들라고 명했다.

 요도 성(淀城)은 5개월 만에 만들어져 챠챠는 오오사카에서 거기로 옮겼다. 아자이 씨(浅井氏) 일족이나 시녀를 포함하면 이 새로운 성에서 생활하는 사람 수는 남녀 200이 넘을 것이다. 챠챠는 세간에게 ‘요도도노(淀殿)’라 불렸으며 히데요시에게는 ‘요도노모노(淀の者)’, ‘요도노뇨우보우(淀の女房)’ 등으로 불리거나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도도노는,
 - 어머님(お袋様).
 이라고 세간에서 불리게 되었다. 히데요시를 위해서 첫아들 츠루마츠(鶴松)를 낳은 것이다. 하지만 이 츠루마츠는 2년 후에 죽었다. 히데요시는 크게 낙담하였지만 그러나 요도도노에 대한 애정은 더욱더 깊어졌다. 곧이어 조선침략이 시작되어 그 대본영인 치쿠젠(筑前) 나고야 성(名護屋城)에도 그녀를 데려갔다. 이 나고야의 행궁에서 요도도노는 또다시 임신했다. 히데요시는 춤을 추며 기뻐했다.
 - 남자아이를 낳아라
 고 히데요시는 요도도노의 배에 손을 대고는 굉장히 진지하게 빌었다. 토요토미 가문에 아이를 낳는다는 기적을 요도도노는 별 힘 안들이고 실현해 주게 되었다. 그 해 – 1593년 8월 3일. 요도도노는 이미 요도 성(淀城)에 돌아와 있었다. 이날 히데요시의 희망대로 남자아이를 낳았다. 


 히데요리(秀頼)였다.

  1. 히데요시의 부인 [본문으로]
  2. 히데요시의 모친 [본문으로]
  3. 거대 사찰 혹은 그런 사찰의 주지가 된 황족이나 상급귀족의 자제를 지칭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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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88. 미야[] 12살이 되었다.

 이 해의 봄, 히데요시[秀吉]는 이 나라의 궁정이 생긴 이래 가장 성대한 유흥을 기획하였다.

 흔히 말하는 쥬라쿠테이 행행[第 行幸]이다. 히데요시의 쿄우토[京都] 저택인 쥬라쿠테이에 텐노우[天皇] 이하 궁정사람들을 초대하여 무신(武臣)들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자는 것이었다.


 미야도 당연히 초대를 받았다. 미야는 히데요시의 쥬라쿠테이[第]를 예전부터 보고 싶어하였기 때문에, 이 기획을 들은 날부터 당일까지가 너무 길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이 쥬라쿠테이[第]라는 성곽과 저택을 겸한 장대하고 아름다운 건조물은 작년 가을에 쿄우[京]의 우치노[野]에 준공하여, 큐우슈우[九州] 정복을 끝낸 히데요시는 개선 후에 거기서 살며 새해를 맞이하였다. 그 장대하고 아름다움은 수도 안에 또 하나의 수도가 생긴 것과 같았으며, 어떤 화가(畵家)의 붓으로도 그것을 표현할 수 없었다고 한다.

 

 4 14일이 그 당일이었다.

 그날 아침. 히데요시는 직접 텐노우를 마중하러 나왔다. 텐노우[天皇]시신덴[紫宸殿]에서 출어(出御)하여 봉련(鳳輦)까지 걸어가는 동안 히데요시는 그 배후로 돌아가 텐노우의 옷 끝자락을 들고 모셨다.

 어소(御所)에서 쥬라쿠테이[第]까지 약 1636미터이다. 1636미터의 길을 경비하던 무사들의 수는 육 천명이었으며, 그 사이를 화려한 행렬이 지나갔다. 미야[]도 겉을 옻칠한 상자와 같은 가마(塗輿)에 타고 텐노우[天皇]의 뒤를 따랐다.

 

 건물 주위에 둘러친 해자(垓子)에 붉은색 다리가 세워져 있어 다리를 건너 쥬라쿠테이[第]의 성문 안으로 들어섰을 때, 미야는 별천지에 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이 웅대하고 화려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한단 말인가? 기품 속에 화려함이 있어, 지금까지 대건축물의 상징인 사원(寺院)들과 같은 축축함이 없었고, 어디까지나 현세(現世)를 한 없이 즐기고자 하는 히데요시의 마음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자칫하면 그것이 실속 없는 아름다움으로 격하될 지도 모르는 것을, 히데요시의 다도취향(茶道趣向)이 요소요소에 배치되어서는 실속 없는 아름다움을 억눌러 새어 나오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 호우칸파쿠[=히데요시]이니 할 수 있는.

 이라고 미야는 후년까지 이때의 감동을 잊지 못했다. 미야가 생각하기에 불도를 닦는 승이 그림으로 자신의 기개(氣槪)와 품격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과 같이 히데요시는 건축으로 그것을 하고자 하려는 것 같았다.

 

 텐노우[天皇]가 준비된 자리에 들어섰다. 히데요시가 나아가 착석의 의식을 치렀고 곧이어 주연(酒宴)이 시작되었다.

 연회가 행해지는 자리의 서쪽은 활짝 개방되어 있어 그 앞에는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정원은 온통 새싹들의 향연이었다. 거기에 철 늦은 벚꽃, 일찍 핀 진달래, 제철인 황매화, 제비붓꽃 등이 색을 더해, 그 근방에서 피어오르는 꽃내음 속에서 연회가 진행되었다. 연회 중간에 히데요시가 수많은 헌상품을 받쳤다. 밤의 연회는 음악이 중심이었다. 텐노우는 굉장히 기분이 좋았는지 직접 소우[]라는 악기를 옆에 누이고 멋지게 연주하였다.

 

 연회는 3일간 이어졌다. 3일로 끝날 예정이었지만 텐노우[天皇]는 더 즐기고 싶었는지이틀 더 있고 싶다고 말하였다. 유사이례 예가 없었던 일로 군신들은 놀랐다.

 미카도[帝]도 히데요시가 좋으신 것이다

 하고 미야는, 형인 텐노우와 좋아하는 점이 일치했다는 것에 날뛰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기뻤다. 미야는 이 텐노우[天皇]필시 역사상 어느 텐노우[天皇]보다도 교양이 높았을 이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를 평생 존경하였다. 텐노우는 미야의 스승이기도 하였다. 중국 시학(詩學)의 재미를 가르쳐 준 것도 이 텐노우였으며, 백씨문집[白氏文集]의 기초를 쌓아 준 것도 이 고요우제이[後陽成]였다.

 히데요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하고 미야는 신경이 쓰였지만, 신경을 쓸 필요도 없이 이 연기(延期)를 가장 기뻐한 이는 당연히 히데요시 자신이었다. 그는 너무 기쁜 나머지 자기 휘하의 다이묘우[大名]들을 텐노우[天皇] 앞에 모이게 하였다. 예정에 없었던 일이었다. 소집된 자는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서 삼위[三位][각주:1] 이상의 계급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였다. 이들보다 위계가 낮은 자들은 별실에 모여있었다.

 

 히데요시는 앞으로 나아가,

 - 성은이 하해와 같사옵니다.

 라는 말과 함께 다이묘우[大名]들에게 훈계를 하였다. 그 훈계의 주된 내용은,

 

 지금 이처럼 우리들 같이 무신(武臣)같은 것들에게 텐노우와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있게 허용해주신 이번 행행(行幸)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일생의 영광이다. 이 기쁨에 우리들은 몸 둘 바가 없도다. 그러나 우리들 자손은 어떨까? 성은을 잊거나 혹은 무()를 내세워 텐노우에 대해 무례를 꾀하는 자가 나타날지 두렵다. 그러니 서약서를 제출하여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텐노우에 대해 배신하는 일 없도록 맹세하도록

 

 라는 것이었다.

 모두 서약서를 제출하였다.

 미야는 그 자리의 처음과 끝을 그 눈으로 보았다. 보면서 위복(位服) 속에서 몸을 부들부들 떨며 히데요시의 행동에 감격하였다. 미야의 조부(祖父)에 해당하는 선대 오오기마치 텐노우[正親町天皇]가 나이 어렸을 시기, 무가(武家)는 황실 같은 것이 있는 줄도 몰랐으며, 어소는 평소 수라(水剌)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빈곤하였는데 그때와 비교해 보면 지금 히데요시와 같이 황실을 생각해 주는 인물이 나타난 것 자체가 기적이지 않은가?

 

 물론 히데요시는 히데요시대로의 꿍꿍이가 있었다. 히데요시 휘하의 다이묘우[大名]들은 예전 그 자신과 동격이거나 아니면 오다 노부카츠,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같이 그 자신보다도 상격(上格)에 있던 자들이 많았지만, 앞으로도 토요토미 가문이 그런 그들을 통제하는 한편 히데요시가 죽은 후에도 계속 이어지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텐노우[天皇]의 신성함을 빌려, 그 신성함을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에게 철저하게 주입시켜서는 그로 인해 신하 중 제일인 칸파쿠 가문이 얼마나 중한가를 교육하여, 텐노우[天皇]를 따르는 것과 같이 토요토미 칸파쿠 가문을 따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야는 그렇듯 심술궂게 이 현상을 관찰할 정도로 성숙해 있지 않았으며 거기에 무엇보다도 미야는 히데요시 빠돌이였기에 히데요시의 순수함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미야는 토쿠가와 다이나곤[大納言] 이에야스라는 인물을 보았다. 이에야스는 극히 최근까지 히데요시와 싸우고 있던 토우카이[東海]의 패자(覇者), 히데요시도 이 인물에게는 조심하여 휘하 다이묘우[大名]이면서도 빈객(賓客)을 대하는 것과 같이 응대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었다. 목이 두꺼운 인물이었다.

 구레나룻이 엷고 볼통통한 얼굴이었으며 동작에 지장을 줄 정도로 뚱뚱하였다. 하지만 어디에도 히데요시의 군사를 물리쳤다는 무인의 거만함 없이 공손하고 정중하여 그 행동거지나 풍모는 아무리 보아도 은거한 거상(巨商)과 같았다. 이에야스도 서약서를 써 제출하였다.

 

 시를 읊는 시회(詩會)의 행사도 행해졌다.

 참석자는 상급귀족(公卿) 측에서 24, 무가 측은 히데요시를 포함한 4명으로 합계 28명이었다. 자리순은 히데요시가 최상석으로 이어서 미야[], 말석에서 두 번째가 토쿠가와 이에야스였다. 각각의 무릎 앞에는 직접 지은 시를 필사하기 위한 벼루와 종이가 놓여졌다. 시회의 진행에 필요한 역할도 정해졌다. 시회 진행자[御歌奉行], 주제를 선정하는 사람[다이샤(題者)], 시가 쓰인 종이를 정리하여 낭독자[코우시(講師)]에게 전해주는 사람[도쿠시()], 낭독자 뒤에서 가락을 넣는 사람[핫세이(発声)] 등의 역할이다. 텐노우의 시가 적힌 종이를 옮기는 것[師]은 히데요시가 직접 하였다.

 텐노우[天皇]의 시는 정말 군자(君子)답다는 그의 인격에 어울리는 가락의 산뜻함이 갖추어진 것이었다.

그리도 오늘까지 기다린 보람이 있으니 소나무 가지에

온 세상의 언약을 매달아 보면서

わきて今日待つ甲斐あれや松が枝の

の契りをかけてみせつつ

 미야가 그것에 화답시를 만들었고, 거기에 히데요시도 그것의 화답시를 지었다. 히데요시의 그것은,

만대에 걸쳐 임금이 놀러 오시는 것을 익숙한 풍경으로 한다.

나무가 높은 건물에 쓰이는 것과 같이

よろづ代の君がみゆき(行幸)になれなれむ

みどり木高玉松 


 ‘이에야스는 어떨까?’

 하고 미야는 말석에 가까운 이에야스를 보았다. 미야는 이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영웅이라는 소문을 예전부터 듣고 있었기에 관심을 안 가질래야 안 가질 수 없었다. 메노토[傅人]인 카쥬우지 하루토요[修寺 晴豊]의 말에 의하면, 히데요시와 같은 예술적 취미를 일체 가지고 있지 않은 인물이라고 한다. 화려한 의상을 좋아하지 않고 화려한 건축을 좋아하지 않기에, 그 거성(居城)하마마츠 성[浜松城]도 극히 실용적이며 소박한 건조물에 지나지 않아, 성안에는 다실(茶室)도 없다고 한다. ()를 이에야스는 좋아하지 않는다는 소문도 있으며, 와카[和歌] 등도 일체 읊는 적이 없는 인물이라고 한다.

 그런 사나이가 시회에 섞여 있었다. 읊었을 턱이 없는 와카를 저 뚱뚱한 사나이는 어떻게 읊을 것일까?

 

 미야는 계속 관심을 가졌다. 곧이어 이에야스는 품 안에 손을 집어넣어 작은 종이쪽지를 꺼냈다. 그것을 한자한자 옮겨 적기 시작했다.

 옮겨 적다니!’

 하고 미야는 놀랐다. 필시 대작(代作)일 것이다.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斎]임에 틀림이 없다고 미야는 생각했다. 왜냐면 이 이에야스가 재작년 10, 히데요시와 강화를 맺어 그 휘하에 들어오기 위한 의식을 치르러 오오사카[大坂]에 왔을 때, 그 회견석의 접대역을 예식(禮式)에 밝은 유우사이가 맡았다. 그것을 미야는 유우사이에게 직접 들었었다. 그 이래 유우사이는 이에야스와 친교를 두터이 하고 있다고 한다. 대작을 했다고 하면 필시 유우사이일 것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조금 남의 눈을 피하면서 베껴 적으면 좋을 것을 이에야스는 당당히 종이쪽지를 펼쳐 거리낌없이 베껴 적고 있었다. 그 모습에 미야는 위화감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 취했던 공손한 태도와는 대략 다른 뻔뻔스러움이 있어, 과장되게 말하면 텐노우[天皇]의 앞에 있다는 경외감(敬畏感)같은 것을 조금도 가지지 않은 듯 했다. 곧이어 읽는이[講師]가 그 이에야스의 시를 읽었다.

녹색 창연한 소나무 잎마다 임금의

천 년을 언약으로 본다.

たつ松の葉ごとにこの君の

を契りてぞ見る 

 라는 것이었다. 소나무의 잎은 수없이 많다. 그 수많은 소나무 잎마다 텐노우[天皇] 천 년의 번영을 빌었다는 정도의 의미일 것이다. 시가 만약 지은이의 심정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에야스도 또한 이 시에 따라 궁정의 번영을 보증했다 - 는 것이 될 듯했다.

 

 1590년이 되었다.

 미야는 이제 성인식을 치러 '토모히토 친왕[智仁 親王][각주:2]'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이 14세였다.

 그 전해에 토요토미 가문에 친자식이 태어났다. 츠루마츠[鶴松]였다.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는 칙사를 오오사카[大坂]로 내려 보내어 축하선물로 큰 칼[太刀]을 하사하였다. 이후 화제는 자연스럽게 미야를 토요토미 가문 유자(猶子)라는 신분에서 풀어놓아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논으로 이어졌다. 히데요시에게 친자식이 생겼고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에게는 아직 자식이 없었다. 이 기회에 미야를 원래의 순수한 궁정인으로 되돌려놔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렇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한때 자신의 유자였던 이 미야를 위해서 어떤 보답이건 해 주고 싶었다. 생각 끝에 독립된 궁가(宮家)를 창설시키자는 것으로 생각이 미쳤다. 궁가를 창설하기 위해서는 영지(領地)와 저택이 필요했다. 우선 영지(領地) 3000석을 주었고, 이 새로운 가문의 명칭을 [하치죠우노미야 가문[]]으로 하였으며, 그 저택을 하치죠우[条] 강변[河原]에 마련해 주었다.

 

 이해의 정월.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3] 준비로 매우 바빴지만, 틈을 보아 입궐해서는 미야를 저택공사지로 데려갔다.

 

 미야의 저택 건물배치는 제가 해 드리겠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여전히 건축을 좋아했다. 히데요시는 미야를 저택의 예정지로 데리고 가서는 현장에 토목(普請), 건축(作事) 담당관리(奉行)와 장인(匠人)들을 불러 우선 기본방침을 세웠다.

 

 굉장히 어렵게들 생각하는군

 

 하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친왕의 주거지이기에 어소(御所) 풍의 - 즉 토노모 형식[主殿造り][각주:4]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경쾌함이 결여된다. 채광(採光)도 나빴고 무엇보다 너무 고풍스러웠다. 거기에 신흥(新興)의 스키야 형식[奇屋造 다실(茶室) 풍의 건축]도 가미하라 - 는 것이 히데요시의 주문이었다.

 

 미야도 무언가 말씀하시길

 

 하고 히데요시는 말했지만, 미야는 아직 건축에 대해 잘 몰라,

 

 모두 공(公)에게 맡기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히데요시는 장인에게 도면을 그리게 하여 오오사카[大坂]에 돌아가서 그것을 받아보고서는 직접 붉은 먹을 먹인 붓으로 수정을 한 뒤,

 - 미야께도 보여드려라

 고 명했다. 미야는 그 도면을 보았다. 히데요시의 것은 너무 다도(茶道)의 취향이 드러나 있는 듯 했다. 미야는 그 점에 대해 그다지 불만이 있지는 않았지만, 희망을 말하자면 위로 매달아 열어 햇빛이나 비를 막는 시토미[蔀] 등을 사용한 왕조(王朝) 풍의 요소도 다소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말했다. 이 즈음 형인 텐노우[天皇]와 함께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의 고찰에 몰두하고 있던 미야로서는 그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공간이 하나 있었으면 했을 것이다. 그 의견이 히데요시에게 전해졌다. 히데요시는,

 

 지당하신 말씀이다

 

 라며 마지막 붉은 선을 그려 넣고서는 오다와라 정벌을 향해 출발하였다. 하지만 오다와라의 진영에서도 건축 진행 상태를 신경 써 하나하나 보고시켰다.

 미야도 자주 건축현장에 가서는 장인들 틈에 섞여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 미야가 차츰 건물과 건축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은 이 하치죠우[条] 저택의 건축부터일 것이다.

 

 연말에 건물이 거의 완성되었다. 히데요시는 오다와라에서 그것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맹장지에 그려지는 그림()만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그것을 후원하던 화가 카노우 에이토쿠[狩野 永徳]에게 재촉했다. 그 해의 마지막 날 전에 그것이 완성되어 저택에 설치되었다.

 그림의 주제는 노송나무였다.

 큰 화면 가득 짙은 묵의 선을 달리게 하여 노송나무를 그렸고 거기에 농후한 색채의 물, 하늘, 바위를 곁들인 그야말로 히데요시가 좋아하는 - 말하자면 쥬라쿠테이[第] 풍의 호화장려(豪華壯麗)한 구도로 히데요시가 만들어 낸 이 시대의 정신을 상징하고 있는 듯 했다.

카노우 에이토쿠[狩野 永徳]의 그림. 현재는 병풍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참고로 화가인 카노우 에이토쿠는 그 해의 10월(1590년 10월)에 사망하였기에, 완성을 한 것은 아마 제자일 것이라고 한다.

  새해가 되자, 미야는 이 새로운 저택으로 옮겼다. 이어 9월에 히데요시는 동방에서 개선한 뒤에 이 저택에 들렸다.

 

 잘 만들어진 것 같군요

 

 히데요시는 저택 안을 확인해 보면서 몇 번이나 말하였는데, 단지 정원만이 맘에 들지 않은 듯 직접 지휘를 해서는 바위를 이곳 저곳으로 옮겼다.

 

  1591년은 토요토미 가문에 불행이 이어졌다. 정월에 히데요시의 동생인 야마토다이나곤[大和大納言] 히데나가[秀長] 죽었으며, 8월에는 츠루마츠가 죽었다.

 토요토미 가문은 다시 후계자를 잃었다. 히데요시는 결국 결심을 하여, 이 해의 11월 조카인 히데츠구[秀次] 받아들여 자로 삼고, 그 다음 달에 칸파쿠 직책을 이 양자에게 물려주었다. 그 후 조선 침략이 시작되었지만 히데요시는 이 즈음부터 몸의 심이 부러졌는지 갑자기 노쇠하기 시작했다.

  1. 이 삼위(三位)가 되면 당상가라 하여 궁궐에 입궐할 수 있었고 이때부터 공경(公卿)라 하여 상급귀족이 되었다. - 사족으로 정사위(正四位) 산기[参議]에 임명된 자는 사위(四位)임에도 특별히 공경이 되었다. [본문으로]
  2. 위키에는 ‘토시히토’라고 한다. [본문으로]
  3. 칸토우[関東] 호우죠우 씨[北条氏]와의 전쟁. [본문으로]
  4. 그 건물 안에 여러 행사나 침식 등을 모두 행할 수 있는 다목적 슈덴(主殿)이라는 건축물이 저택의 중심에 있는 저택형식.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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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9.21 20: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글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되는 인물이라, 과연 어떤 인생을 살아 나갈지 궁금해집니다.
    이번편도 잘 읽었습니다. ^^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1 20: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옛시가 많다는 이유로 질질 끌어왔던 이 '하치죠우노미야'편도 다음이 마지막입니다....(근데 그러고 보니 시는 몇 편 없었네요 ^^; )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mansukizzang BlogIcon 본다충승 2008.09.22 07: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조선이고 일본이고 시는 어렵군요. ^^; 재밌게 읽었습니다. ^^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9.22 12: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글을 읽고 관심이 생겨, 카노우 에이토쿠에 대해 찾아보니 의외로 요절했더군요. 위키에서는 과로사일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적혀있었지만서도...

    문화인은 대체로 장수하는게 일반적(;)이라고 생각했었기에 조금 의외였습니다(~~;)

    이에야스 경우엔 참.. 뚱뚱이 외관을 잘 묘사했더군요~~; 뭐, 취미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일지 모르겠습니다만서도 그래도 대놓고 컨닝은 좀(~~;)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2 17: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본다충승님//재밌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참고로 시의 해석은 엉터리입니다. 고어는 자신도 없고, 문학적 소양이 부족하다보니 그냥 단어 뜻의 나열(겸 대충 때려 맞춘 것)입니다. 그래서 밑에 원어를 적어 넣었습니다. 잘 아시는 분이 보시면 알려주셨으면 하는 마음에.. ^^; 이건 넓은 마음으로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다메엣찌님//그런 방면에 일이 많던 시기에, 그 분야에서 No.1급의 인물이다보니 이곳저곳 많이 불려다녀서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근데 정말 저렇게 뚱뚱하였을지... 제 이미지로는 그냥 북두의 권의 작가가 그린 &quot;꽃의 케이지&quot;에 나오는 정도입죠...(그것이 동작에 지장을 줄 정도로 뚱뚱함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요)

    이에야스니까 조금 당당하고 거만하게 비춰지는 것이겠죠... 하지만 찌찔이급이 그랬다면 어떤 이야기가 되었을지 궁금하군요.(무엇보다 저렇게 베낀 일이 실제로 있었는지 없었늦지 의문이지만요. 처음 들어 보는 일이다 보니... 함 찾아봐야 겠습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zardizm BlogIcon zardizm 2008.09.22 22: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이에야스가 단지 베껴썼다고 싫어하게된건가 싶었는데 위키를 보니 좀더 큰 일이 있었군요;;
    다음 화에 나오려나요...? 기대해봅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2 22: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어쨌든 다음이 마지막 편이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9.23 00: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나 곱게 자라 풍파없이 곱게 황실로 돌아간...
    과연 마지막 편에는 무슨 일이 있으려나요^^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3 09: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떠한 고민도 가져다 주는 일 없이 잘 먹여주고, 잘 대접해주고, 집까지 지어주고....
    저래주었는데도 빠가 되어 주지 않았다면, 하치죠우노미야가 천하의 개*놈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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