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시코쿠정벌'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8.05.12 대화대납언(大和大納言) -4- (10)
  2. 2007.11.10 살생관백(殺生関白)-3- (5)
  3. 2007.09.17 하치스카 이에마사 (6)
  4. 2007.09.15 킷카와 모토하루 (6)

.

 

 이야기를 이 원고의 중간 즈음의 시기로 되돌리지 않으면 안 된다.

 히데요시가 텐노우[天皇]의 숨겨진 자식이라는 설을 유포시키며 칸파쿠[白]가 될 사전 준비를 진행시키고 있을 시기이다. - 이러는 동안 전회에 언급한 바대로 키이[紀伊]를 다스리는 코이치로우[小一郎]의 실적이 한창 오르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 히데요시 정권은 일본 열도 전부를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손에 넣은 곳은 킨키[近畿]를 중심으로 토우카이[東海] 일부에 호쿠리쿠[北陸], 츄우고쿠[国]였으며, 오우슈우[州], 칸토우[東], 시코쿠[国], 큐우슈우[九州]는 아직 다른 세력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우선 히데요시는 시코쿠를 공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시코쿠는 토사[土佐]에서 발흥한 쵸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 元親]가 거의 전토를 정복하고 있는 중이었다.

- 토사 일국()만은 소유하게 하겠다. 다른 삼국()은 포기하고 항복할 것.

 이라고 히데요시는 모토치카에게 전하였지만 모토치카는 따르지 않고 토우카이의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와 동맹을 맺어 동서에서 서로 호응하며 히데요시를 적대하였다.

 

 히데요시는 정벌을 결심했다.

 동쪽에 이에야스라는 적이 있는 이상, 될 수 있는 한 단기간에 처리해야 할 필요가 있기에 이를 위한 전략으로써 적이 감히 대적할 생각을 못할 정도의 대규모 군단을 투입하기로 하였다. 히데요시는 동원 계획을 끝마치자 코이치로우를 불러,

 

 니가 총대장이 되어라

 

 라고 명했다. 코이치로우는 얼굴을 들어 고개를 갸웃거린 후 곧이어 통통하게 살이 붙은 흰 볼에 피를 통하게 하였다. 형을 섬긴 이래 20. 많은 전쟁터를 경험해 왔지만 총대장이 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바다를 건너 시코쿠[国]로 가는 병사는 공칭 8만이었다. 코이치로우는 우선 아와지시마[淡路島] 섬으로 건너가 후쿠라 항[福良港]을 전진기지로 하여 군선 900척을 모았다.

 

 나루토() 소용돌이를 어찌해야 할까요?”

 

 하고 수군(水軍)에 밝은 어떤 무장이 그렇게 말하자, 코이치로우는 평소와는 달리 목소리를 높여 웃었다.


 어찌 하냐고 물어도 나루토의 소용돌이를 내가 없앨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와 용()이 있으면 건널 수 있다. 조수의 적당한 시기에 맞추어 서로 떠내려가지 않게 배를 엮고 노()를 맞추어 한 일자로 건너면 되지 않겠느냐"

큰 지도에서 나루토 해협(鳴門 海峽) 보기


 라고 말했다. 거친 말투가 평소 온화한 이 남자와는 달랐다.

 곧이어 그 말대로 하여 단번에 건너서는 아와[阿波]토사도마리 항[土佐泊港]에 상륙하여 거기에 임시로 성을 쌓아 교두보로 삼았고, 계속해서 병사들을 파견하여 점령지를 넓혀갔다. 동시에 별동대인 모우리 군[毛利軍]이요[伊予] 침공하였고, 또 하나의 별동대인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군은 사누키[岐]로 침공하여, 하루에 성 하나씩 점령하는 기세로 진격하였다.

 

 코이치로우는 주력군을 이끌고 아와[阿波]에 있는 쵸우소카베 최대의 요새인 이치노미야 성[一宮城]을 포위하였지만, 성을 지키는 타니 츄우베에 타다즈미[谷 忠兵衛 忠澄]라는 자가 제법 방어하여 쉽사리 함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당초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코이치로우도 이 이치노미야 성에는 애를 먹을 것이라고 각오를 하고 있었다. 



큰 지도에서 이치노미야(一宮) 성터 보기

 

 그러나 킨키[近畿]에 있던 히데요시는 동방의 토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위협을 종시 느끼고 있었던 만큼 장기전으로 발전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 두려움이 코이치로우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코이치로우는 저러니까 안 된다. 언제나 꽃구경이라도 하는 듯이 느긋하다니까

 

 현실은 별로 느긋한 것이 아니고 또한 아무리 히데요시가 갔다고 하여도 이 정도 교착 상태는 물리적으로 당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코이치로우였던 만큼 히데요시도 불만을 말하기 쉬워 표현이 어느덧 과장되기도 하였다.

 

 내가 간다

 

 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친정한다는 것이었다. 말뿐만이 아닌 - 이 시기까지의 히데요시는 행동이 재빨랐다. 곧바로 사카이[]까지 내려가 거기서 대기하면서, 우선 사자를 보내어 아와 이치노미야의 진영에 있는 코이치로우에게 알렸다.

 

 그렇게 말씀하셨나?”

 

 코이치로우는 사자(使者)로 온 이시다 사키치[石田 佐吉=미츠나리[三成]]를 앞에 두고, 그렇게만 말하고 잠시 침묵하였다.

 참을 수 없다!’

 고 생각하였다. 형의 조연에 지나지 않았던 자신의 인생에서 이제서야 겨우 날개를 펼친 것이다. 코이치로우가 그것에 흥분해 하고 있는 바로 지금, 또다시 형이 온다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 평소의 그라면 온화하게 형의 말에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만은…… 코이치로우는 작은 저항을 시도해 보았다.

 오지마!’

 하고 화내며 말하지는 못하고, 단어를 될 수 있으한 고분고분히 하여 [오신다는 것에 대해서 잠시 유예(猶豫) 해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으로 유우히츠(祐筆)에게 상소문을 쓰게 하였다.

히데나가,
삼가 아뢰옵니다.
무릇 이번 시코쿠 정벌[四国征伐]에 있어 저는 형님의 대리를 명 받아 도해(渡海)하여 아와[阿波], 사누키[讃岐]에 군사들을 보내어 빠르게 적의 성들을 처리하고 있는 중입니다. 천하에 면목을 세움에 있어, 이보다 나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잔당(殘黨)이 여전히 남아있긴 합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이곳으로 오시겠다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건 히데나가의 무(武)가 부족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기에 몹시 놀랐습니다.
잘 생각해 보시면 출진하신다는 것은 저를 이곳에 파견한 형님의 안목이 부족하다는 뜻이 되어 형님의 위광을 스스로 줄이게 되는 것이며, 또한 모처럼 형님의 대리를 명 받은 저의 치욕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지금 조금 시일이 걸리고는 있지만 형님께서 바라는 바에 어긋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옵니다.
바라건대 이번 출진을 중지해 주십시오. 그래 주신다면 이 얼마나 히데나가의 행복이겠습니까?
부디 이 히데나가에게 온 힘을 다할 수 있게 하여 전공을 세울 수 있게 해주신다면, 일생일대의 큰 은혜로 받들겠습니다.

부디 그것을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겨주시길 바라옵니다
 코이치로우는 이 상소문을 비토우 토모사다(尾藤 知定)에게 주어서 사카이로 출발시킴과 동시에 전력을 다해 총공격을 개시하여 결국 하루 만에 성의 외곽(外廓)을 점령하고 물길을 끊어다. 성안을 말라 죽일 태세를 취한 상태에서 수비하는 타니 츄우베에에게 항복을 권했다. 츄우베에는 아와의 하쿠치 성[白地城]에 있는 자신의 주군 모토치카에게로 가서, 히데나가의 군세에게는 대항할 수 없다는 뜻을 전하여 결국 모토치카에게 항복을 결의시켰다.

 

 시코쿠()는 히데요시 정권의 산하로 들어왔다. 개전한지 50여 일만이었다. 이런 신속함은 전례가 드물 정도였다. 이후 히데요시는 바라 마지않던 칸파쿠[白]에 임명 받았고, 이어서 겐페이토우키츠[源平藤橘][각주:1]의 사성(四姓) 외에 새로이 토요토미[豊臣]의 성()을 창설하여 그것을 조정에게 하사 받는 방식을 취했다. 자연히 코이치로우도 이후 하시바[羽柴]라는 성(苗字)을 버리고, 토요토미노 히데나가라고 칭하게 된다.[각주:2]

 

 시코쿠[国]에서 개선한 뒤 코이치로우의 영지(領地)가 더해졌다. 키이[紀伊]에 더해 야마토[大和]가 추가된 것이다. 야마토도 키이와 마찬가지로 사정이 복잡한 곳으로, 지역의 대부분이 코우후쿠 사[興福寺][각주:3]카스가묘우진[春日 明神][각주:4]의 종교령(宗敎領)으로, 더구나 센고쿠[戦国] 백 년 동안 츠츠이 씨[筒井氏], 마츠나가 씨[松永氏] 등에게 땅을 강탈당해 왔기에, 히데요시 정권 성립 후에도 토지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소송이나 분쟁이 끊이질 않았으며 더구나 그런 것들이 쿄우토[京都] 공가(公家)와 엮어져 있었던 만큼 어떤 의미에선 키이보다 통치하기가 더 어려웠다.

 코이치로우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고 히데요시는 이 동생의 그러한 점을 기대하여 야마토를 맡겼다. 그 봉지(封地)는 야마토뿐만 아니라 이가[伊賀]와 그 외 여러 곳을 합하여 100만석으로 하였고 거성(居城)야마토 코오리야마[大和郡山]로 하였다.

 

 관작(官爵)도 시코쿠 정벌 다음해에 종삼위(從三位) 산기[議]가 되어 상급귀족(公卿)이 되어 궁궐에 입궐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1587년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 뒤 종이위(從二位)에 서임되어 다이나곤[大納言]에 임명되었다. 이 때문에 세상에서는 그를,

 [야마토 다이나곤[大和大納言]][각주:5]

 이라고 불렀다. 히데요시도 이제는 이 치쿠아미[竹阿弥]의 자식을 코이치로우라고 부르지 않고,

 [다이난고[なんご]]

 라 높여 불렀다. ‘다이나곤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난고쪽이 왠지 발음하기 쉬웠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날.

 코이치로우가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문안 인사를 올리려 왔을 때 히데요시는,

 

 그 신국()은 어떤가?”

 

 하고 물었다. 신국이라는 것은 - 야마토[大和]에 신사령(神社領)과 사원령(寺院領)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물론 그것을 존중하여 그렇게 부르고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특히 히데요시의 경우 어느 정도는 야유를 담아서 정공법이 통하지 않는 지역이라는 속내를 담고 있었다. 동시에 히데요시에게 그런 어려운 지역을 맡게 된 코이치로우에 대해서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고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다소는.”

 

 하고 코이치로우는 짧게 답했다. 사실 코이치로우도 애먹고 있었다. 매일같이 다이죠우인 몬제키[院 門跡][각주:6]이치죠우인 몬제키[院 門跡][각주:7], 카스가 신사[春日神社] 등에서 진정(陳情), 소송이 코이치로우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 어느 것이나 어려운 문제들로 대부분은,

- 토지를 돌려줘

 라는 것이었다. 코이치로우가 자신의 부하에게 나누어준 땅에 대해서,

 

 저 마을을 멋대로 그렇게 해서는 곤란합니다. 백 년 전에는 우리 절의 영지(領地), 물증이라고 하시면 여기에 증거도 있습니다. 꼭 돌려주시길 바랍니다

 

 라는 식이었다. 하나하나 전부 들어주면 야마토에 있어서의 코이치로우의 영지(領地)는 한뼘도 안 남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이것을 법적으로 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코이치로우는 다른 다이묘우[大名]들과는 달리 이런 점에서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센고쿠 백 년 동안에 일본 60여주()의 사원령이나 신사령, 황실령, 귀족령(公卿領) 등은 각 지역에 있는 센고쿠 다이묘우들이 강탈하였고, 그 강탈한 땅 위에 센고쿠 다이묘우의 경제는 성립해 있었다. 히데요시는 그 센고쿠를 종식시키고 통일하였다.

 - 그러니까 원래대로 돌려놔라

 고 야마토의 여러 절과 여러 신사들은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전의 영토권 등은 시간도 흐르고 권리도 썩어 무효가 되었다고 말해도 좋았다. 그 억지를 토요토미 정권에 부리는 것은 대상이 잘못된 것으로, 부리려고 한다면 센고쿠 시대에 야마토에서 자기들 맘대로 강탈해 갔던 옛 영웅호걸들의 묘 앞으로 가져가는 것 외에는 없을 것이다.

 

 토요토미 정권의 야마토 담당자인 코이치로우는 될 수 있는 한 그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며 타당하다고 생각되면 토지도 돌려주거나 하였지만,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어 온정을 베풀면 베풀수록 그를 만만하다 보고서는 계속 와서 투정 부렸다.

 그것을 무시하고 튕길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런 여러 절들은 다른 지역의 경우와는 달리 몬제키[門跡] 사원이었다. 몬제키라는 것은 황족이나 상급 귀족의 핏줄들이 앉아있는 절로, 말하자면 쿄우토[京都]의 궁정과 하나의 세계였기에 그들을 거부하는 것은 궁정을 거부하는 것이며, 궁정을 머리에 이는 것으로 성립된 토요토미 정권의 일원으로서 그것이 불가능했다.

 

 정말 귀찮겠구나

 

 하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히데요시에게 있어 옛날은 옛날, 지금은 지금이었다. 과거의 권리는 백 년간의 혼란기에서 일단 없어진 것으로 보고, 토요토미 정권이 되었으니 새로 이 정권에서 토지를 기부한다. 과거와는 관계없다는 방침을 취하고 있었다. 때문에 히데요시는 궁정에 황실령을 헌상하고 상급 귀족들에게 영지를 새로 하사하였다. 그 옛날 선조들의 화려함은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요 몇 십 년 동안은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며 살아왔기에 지금은 크게 기뻐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라[奈良]의 몬제키들은 역사적 권리에 강하게 집착했다.

 

 이건 농담입니다만

 

 하고 코이치로우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예 겐지[源氏]를 칭하여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이 되셔서 막부(幕府)를 열고 순수한 무가정치(武家政治)를 여는 편이 좋았다는 것이었다. 토요토미 정권은 이런 점에서 어중간했다. 히데요시는 칸파쿠가 되었고, 그 일족도 히데츠구[秀次]나 자신을 시작으로 모두 상급귀족이 되었다. 귀족이라는 신분으로 여러 다이묘우들을 휘하에 두고 60여주를 통치하고 있었다. 토요토미 가문은 그런 귀족의 신분이었기에 나라의 몬제키들과 동일한 사회에 있었다. 동일 사회인 이상 동일 원리를 가지지 않으면 안되기에, 그들의 요구에 대해서는 논리적으로 약하게 된다 고 코이치로우는 말하는 것이었다.

 

 거기까지만 말해라

 

 히데요시는 그렇게 말하였지만 그래도 놀라웠던 것은 코이치로우가 가진 행정이론가로써의 날카로움이었다. 어느새 이런 풍부한 사고 능력을 익힐 수 있었던 것일까?

 

 그건 알았으니까 됐고, 실제로는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가?”

 

 ()입니다

 

 하고 코이치로우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말했다. 토지 대신해서 황금을 준다. 그러면 불가사의할 정도로 효과를 발휘하여 소송인이 얌전해 지는 것이었다. 황금이라고 하면 근래에 사도[佐渡]를 시작으로 전국의 금광에서 솟아나듯이 나오고 있었다.[각주:8] 일본에서 이 금속을 정식 유통화폐로 채용한 것은 히데요시가 처음이었는데, 코이치로우는 이미 그 쓸모를 나라의 몬제키들을 상대로 경험하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크게 웃으며 그 처리에 만족하였다.

 

 코이치로우는 나라[奈良}의 난제(難題)들 뿐만 아니라 다이묘우들간의 불평이나 알력을 잘 조정하였다.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서 멀어지게 된 다이묘우들은 모두 키타노만도코로[政所]나 코이치로우에게 가서 부탁하였다. 또한 히데요시의 측근 관료들에게 미움 받아 곤혹해 하고 있는 다이묘우들도 코이치로우에게 그 조정을 부탁했다. 코이치로우는 직접 관료들의 사무실로 가 진실을 가려서는 측근 관료가 잘못했을 경우에는 호되게 질책했다. 이 때문에 다이묘우나 쿠교우들 사이에서는,

 - 토요토미 가문은 야마토 다이나곤이 지탱하고 있다

 고까지 말하는 사람조차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이 정권의 행복한 시간도 길지는 않았다.

 요 이십 수년, 히데요시의 온갖 작전에 참가했던 코이치로우는 1590년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만은 결국 참가하지 못했다.

 이 시기. 쿄우토[京都]에 머물던 중 병을 얻어 중태에 빠졌다. 모친인 오나카[仲]는 이 즈음 종일위(從一位)가 되어 오오사카 성에 살며 78세가 되어 있었는데, 이 아들이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여러 신사, 절에 토지를 기부하여 낫기를 기원하였다. 히데요시는 오다와라로 떠나기 앞서 가마를 돌려 코이치로우의 쿄우토 저택으로 향했고 특별히 방까지 들어가 병문안을 하였다.

 이 경우도 코이치로우는 형에 대하는 예를 버리는 일 없이, 병상을 치우고 의복을 새로이 하고는 기다렸다.

 

 이제는 그렇게 일어날 수 있느냐?”

 

 히데요시는 예전에 비해 반으로 줄어든 코이치로우의 몸을 걱정스럽게 보면서 말하였고, 이 동생은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이제 힘든 것은 넘긴 듯 합니다

 

 하고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의 눈에도 히데요시를 걱정시킬 수 없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히데요시도 그것을 느꼈다.

 

 오늘 출진한다면 길하다고 하더구나……”

 

 라고 말하면서 조심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는 불길해집니다

 

 고 코이치로우 쪽이 당황하여 곧바로 요시다 신사[吉田神社]의 신관을 불러 형의 운수를 고치고자 액막이[い]를 시켰다.

 히데요시가 저택을 떠날 때, 코이치로우는 시중드는 소년의 어깨를 빌려서 문 앞까지 나와 배웅하였다.

 정말 날 위해서 많이 애써주는구나

 히데요시는 가마에서 코이치로우의 생애를 떠올리며 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 뒤 코이치로우의 상태가 다소 좋아졌다. 히데요시도 오다와라의 진중에서 그 소식을 듣고 곧바로 모친인 오오만도코로(大政所)에게 편지로,

다이난고.
나아졌다고 하니
정말로 정말로 기쁘옵니다.
고 써서 보냈다.

 쿄우토에서 조금 나아졌기에 코이치로우는 거성인 야마토 코오리야마[郡山]로 돌아와 거기서 정양(靜養)하였다.

 

 오다와라 정벌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590 10월부터 코이치로우의 상태가 다시 나빠졌다. 히데요시는 오오만도코로와 함께 여러 신사와 절에 쾌유의 기도를 시켰지만 눈에 띌 정도의 효험은 없어, 이 때문에 오히려 오오만도코로 쪽이 마음의 병을 얻어 자리에 누울 정도가 되었다. 히데요시는 모친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기 위해서 대규모 기도(祈禱)그 자신, 이런 종류의 것을 믿고 있지는 않았지만 하기로 하여, 조정(朝廷)에 부탁해서는 신사와 절에 쾌유기도의 칙사를 보내게 하였다. 신불(神佛)도 칙사가 오면 다소 긴장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칙사는 9명이 선택되었다. 그들이 같은 날 같은 시각에 궁궐을 출발하여 두 개의 카모[賀茂][각주:9]를 시작으로 아타고[愛宕], 쿠라마[鞍馬], 타가[多賀], 리큐우하치만 궁[離宮八幡宮], 이와시미즈[水] 등 각각의 신을 모시는 곳에 가서 코이치로우를 위한 기도를 하였다. 하지만 병 상태는 조금도 나아지질 않았다.

 

 이 해도 끝날 무렵, 히데요시는 차림을 가벼이 하고 코오리야마로 내려가 코이치로우를 병문안 하였다. 히데요시가 방까지 들어왔지만 코이치로우에게는 이미 머리를 들 수 있을 정도의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단지 얼굴을 꿈틀대고 있을 뿐이었다. 형을 위해서 인사의 미소라도 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무릎으로 다가가,

 

 어서 나으렴. 니가 없으면 토요토미 가문은 어찌하란 말이냐

 

 하고 격려하였다. 이 말이 코치이로우의 얼굴을 무참할 정도로 적셨다. 눈물이 끊임없이 넘쳐 흘렀다. 코이치로우에게 있어서는 히데요시의 이 말 한마디로 자신의 인생에 의미가 부여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날 형님은…”

 

 라고 듣기 힘들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히데요시는 그것을 듣기 위해서 입술로 귀를 가져갔다.

 

 새끼줄에다 발을 걸치고 오셨죠

 

 코이치로우는 미소를 지었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히데요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래, 라고 말해 주었다.

 그 의미가 아무래도 30년 전의 옛날에 히데요시가 키요스[清洲]에서 고향 나카무라[中村]에 처음으로 출세했다고 뻐기러 돌아왔을 때의 것을 - 코이치로우는 말하였던 것이구나 하고, 히데요시가 알아차린 것은 그 다음 달 23, 코이치로우가 죽은 다음이었다. 그 날. 코이치로우의 뇌리에는 고향의 그 드푸른 하늘이 걸쳐져 있었을 것이다.

 

 51세였다.

 

******************************************************************************************************************

 

 사후, 코우후쿠 사[興福寺] 등 나라의 절간에 있던 자들은,

 - 신불의 땅을 돌려주지 않았기에 벌이 내려진 것이다

 고 열심히 욕을 했다. 역시 나라[奈良]의 종교 귀족의 한 사람으로, [타몬인 일기[多聞院日記]]를 쓴 에이슌[英俊] 1 23일 항에,

다이나곤 히데나가 경이 죽었다.
금은을 조사해 보니, 황금은 56천매()가 넘었으며, 은은 4*4미터 크기의 방 천장에 닿을 정도로 쌓아놓아 그 수는 셀 수 없다. 그 어마어마한 재산과 보물도 저 세상에는 가져가지 못했다. 정말로 목숨이 아쉬웠을 것이다.
천하디 천한 것.
이라고 썼다. 코이치로우는 탐욕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재산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편이었다. 천한 것은 오히려 그가 살아있던 때, 갖은 이유를 다해서는 그에게서 금곡(金穀)을 계속 빼앗아 갔던 그들 쪽일 것이다.

 

******************************************************************************************************************

 

 장례식은 그로부터 6일 뒤. 코오리야마에서 행해졌다.

 상급귀족이나 여러 다이묘우들이 수없이 모였고, 죽음을 듣고 떼지어 모인 서민들의 머릿수만으로도 20만 명이라 한다. 참가했던 다이묘우 중 누구나가 이 다이나곤의 죽음으로 인해 토요토미 가문에 계속 내리쬐고 있던 햇살이 사라져 갑자기 싸늘해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날부터 9년 후. 세키가하라[ヶ原]로 이 가문이 분열했을 때, 오오사카 성[大坂城]의 늙은이들은,

 - 그분이 살아계셨다면……

 하고 거의 넋두리처럼 서로들 소곤거렸다.

 

================================================================大和大納言、了=============================

  1. 텐노우[天皇]가 하사한 본성(本姓) 중 유명한 성 네 개이다. 각각 미나모토[源], 타이라[平], 후지와라[藤原], 타치바나[橘]를 말함. [본문으로]
  2. 연구하는 사람에 따라서는 토요토미는 본성(本姓)이기에, 하시바라는 성(苗字)은 그대로였다는 사람도 있다. [본문으로]
  3. 남도북령(南都北嶺 - 북령은 히에이잔[比叡山], 남도는 코우후쿠 사[興福寺])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위세를 떨쳤던 불교 사원이다. 공가(公家)의 중심 후지와라 씨[藤原氏]의 우지데라(氏寺)이다. [본문으로]
  4. 카스가 대사[春日大社]라고도 한다. 후지와라 씨[藤原氏]의 수호신(守護神)을 모신 신사(神社). [본문으로]
  5. 그래서 대화대납언(大和大納言). [본문으로]
  6. 다이죠우인은 셋케[摂家] 중 쿠죠우 가문[九条家]의 영향력이 컸다고 한다. [본문으로]
  7. 이치죠우인은 셋케[摂家] 중 코노에 가문[近衞家]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사족으로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가 환속하기 전까지 있었던 곳이다. [본문으로]
  8.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사도 금광이 개발되지 않았다. 사도 금광은 히데요시가 죽은 1601년에 금맥이 발견되었다. [본문으로]
  9. 카미가모[上賀茂], 시모가모[下鴨]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싸잡아 카모 신사[賀茂神社]라고 한다.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5.12 11: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른 이야기에 비해 화수가 적어서 아쉽습니다만 대신 이번 화는 길군요. 잘 읽었습니다. ^^
    (히데나가가 살아있었으면 히데요시의 대륙정복 망상을 제어할 수 있었을지... --a)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12 11: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번엔 중간에서 끊을까 하다가 끊지 못하고 그만...

    음...어땠을까요... 오히려 조선 정벌군의 총사령관이 되어서 코니시나 카토우같이 분열시키는 일 없이 더 조선을 고생시켰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결국 승리의 조선이 되겠지만 말이죠)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12 21: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쉽군요. 적어도 히데나가가 살아있었더라면 도요토미가는 반석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을 건데.
    쵸소카베 모토치카도 억울하긴 했을 것 같습니다. 기껏해서 시코쿠를 평정하기 일보직전에 있었는데, 토사만 가지라니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5.13 02: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루토는 세계에서 조류가 빠르기로 3번 째라... 소용돌이... NARUTO의 우즈마키 나루토란 이름이 어떻게 붙여진 건지 이제야 알았네요^^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13 06: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공님//저는 히데츠구와 권력 암투를 벌였을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요 ^^
    모토치카에 대해선 정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아쉬었겠죠...정말...

    박선생님//우즈마키 나루토라...그야말로 걸맞는 이름이군요. ^^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nagoomo BlogIcon 볼리바르 2008.05.13 12: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히데나가가 죽으면서 도요토미 가문이 정권을 수립한 가문에 걸맞는 혈족을 구성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히데나가가 타계한 후에 추진된 조선침략등도 히데나가가 '없어서' 제멋대로 굴러간 것 같은 인상을 보여주죠(물론 자기주장 내세우지 않고 침공군 사령관이 되었을것도 같습니다만).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5.13 14: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살아서는 도요토미 정권의 주석이 되어 주었지만.. 죽고 난 빈자리가 워낙 커서인지 히데요시가 엇나간 측면이 있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괜히 혁신에서 어정쩡한 능력치로 전용 특기를 준게 아닐거라는 생각이..(아마 코에이에서도 시바센세 매냐가 있는지도 모르겠네요-_-ㅎ)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13 19: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볼리바르님//확실히 히데요리라는 후계자가 생기면서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 히데츠구를 견제할 사람이 없었다는 점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형을 잘 보좌해서는 조선침략도 더 잘 보강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다메엣찌님//그쵸...빈자리가 너무 컸죠. 히데나가는 그 게임 상의 얼굴이 너무 선해서...
    (근데 코에이에 시바 선생 매니아가 있었다면 카즈토요를 그렇게까지 낮추진 않았겠지 말입니다~ ^^)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taebong0721 BlogIcon 태봉이 2008.05.15 13: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악하악..형.. 나의 히데나가는 그렇지 않다능...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15 21: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대의 기운 혹은 흐름이란 사람의 이성을 흐뜨리는 법. 결국 조선침략을 하였든 아니면 아시카가 타다요시(足利直義)처럼 권력 다툼을 벌였을 지도 모르지.

三.

 히데요시[秀吉]가 이 마고시치로우[孫七郎]를 위해서 붙여 준 숙노(宿老)라는 것은 -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 一氏],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 히토츠야나기 나오스에[一柳 直末], 야마우치 카즈토요[山内 一豊]로 모두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織田家]의 장교일 때부터 직접 키워 온 다이묘우[大名]들이다. 우연인지 아니면 히데요시의 의도인지.
  그들은 공통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온화하며 상식적이고 세상일에 익숙하여 [얼굴에 주름 많고, 세상 물정에 밝은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무슨 일이건 조용히, 어떤 일이건 모나지 않게, 무슨 일이건, 참으세요, 참으세요 - 하고 그들은 입을 열면 입버릇처럼 말했다. 계속 그렇게 말하며 마고시치로우를 인형처럼 다루며 마고시치로우의 자유를 능수능란하게 봉하였고 더구나 히데요시에게는,

 "굉장히 뛰어난 기획력이 가지고 계시옵니다.”

 라고 하며 자신들이 생각한 것을 마고시치로우가 생각한 것처럼 말하여 히데요시의 기분을 좋게 하는데 전념했다. 히데요시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그 후에도 마고시치로우가 큰 잘못이 없자,
 '과연…… 나이를 먹으면 사람은 변하는 법인가'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타사(又左 =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도 그랬지”

 하고 측근에게 말하기도 하였다.
 마에다 토시이에도 10대일 때는 손을 댈 수도 없을 정도로 양아치였지만, 지금은 어떤가? 지금의 토시이에가 옛날의 그 마타사인가하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중후한 인물로 변해있다.

“송충이가 나비가 나비가 되듯이 마고녀석도 언제까지나 송충이일 턱이 없지”

 라고 말했다.
 히데요시는 바꾸려고 해도 바꿀 수도 없고,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 없는 이 혈연자 중 우두머리인 젊은이를 다음 해인 1585년 아직 18살짜리를 키슈우[紀州] 정벌군의 부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운이 좋았는지 큰 실수는 없었다. 이어서 그 해에 시코쿠[四国]정벌에 참가시켰고 이때도 큰 실수 없이 부사령관을 맡았다.
 이 때문에 히데요시는 드디어 마음을 굳혀 같은 해의 윤8월 마고시치로우에게 하시바 성[羽柴姓]을 허용함과 동시에 오우미[近江]를 하사했다. 또한 히데요시가 칸파쿠[関白]가 되자 마고시치로우는 아직 18살이지만 – 조정에 요청하여 종사위하 우코노에츄우죠우[右近衛中将]로 만들었다.
 성(姓)도 없이 백성으로 자란 젊은이가 갑자기 조정의 대신이 된 적은 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
 다음해인 19살에 산기[参議]가 되었다. 이미 산기 이상은 공경(公卿)이다.

 이렇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행운에 공포를 느낀 사람이 있었다.
 실부(實父)인 야스케[弥助] – 지금은 미요시 무사시노카미 카즈미치[三好 武蔵守 一路]였다. 쿄우[京]에서 자신의 아들인 마고시치로우를 만나,

 “천도(天道)를 두려워혀라”

 하고 오와리 백성들이 사용하는 말로 지겹도록 목소리를 높여가며 말했다. 야스케는 어디서 들었는지,

 “감투가 크면 어깨를 누른다는 말이 있고, 높은 가지가 부러지기 쉽다는 말이 있다. 옛날부터 그 실력 없이 영달을 얻은 사람치고 제대로 된 말로를 보낸 사람이 읍어.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딘다. 두려워혀라”

 고 야스케는 말했다.

 “필시 너는 너무 빠른 승진 때문에 니 마음이 그것에 따라가지 못하여 결국 마음이건 뭐건 산산조각 나 버릴 것이여. 그것을 두려워혀라”

 하고 계속 말했다.

 “어떻게 두려워하라는 건데요?”

 마고시치로우는 무능한 그리고 언제나 무언가에 떨고 있는 듯한 이 친아비의 안스러운 농사꾼 얼굴이, 자신의 미천한 출신을 말해주는 것 같아서 볼 때마다 기분 좋지 않았다. 마고시치로우는 말했다.

 “나는 무예가 뛰어나요. 지위는 그것에 걸맞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아녀 아녀, 너는 잘못 생각혀고 있다”

 고 야스케는 말했지만, 산기[參議] 히데츠구 공[秀次公]이 된 마고시치로우의 날카로운 시선을 되받아 칠 기력도 없어 고개를 숙였다. 침묵은 했지만 야스케는 마고시치로우가 장식 인형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다.
 살아 있는 인간은 결코 아닐 것이다.
 살아 있는 인간일 턱이 없다.
 단순히 토요토미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인 것이다.
 그 증거가 자신이었다. 오와리 오오타카 마을에서 끌려와 세 명의 아들을 전부 빼앗겼고, 더구나 자신은 토요토미 가문의 화려함을 더하기 위해서 자기 성과 이름도 아닌 '미요시 무사시노카미 카즈미치'가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고향 사람들은 이런 나를 뒤에서 뭐라고들 지껄이고 있을까?

 “아버지. 이젠 오지 마세요”

 마고시치로우는 참다 못하여 잔인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렇게 말하였다. 이미 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용받았으며, 후지와라 성[藤原姓]을 가진 입만 산 공경(公卿)들과 사귀지 않으면 안 되는 이때에, 궁상맞은 얼굴을 하고 이곳에 와서는 오와리에서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듯한 것을 하나하나 말하는 부친이 참을 수가 없었다. 이건 날 괴롭히기 위해서 일 것이다. 그러나 양부(養父)인 히데요시는 달랐다.
 마고시치로우에게 부귀영화를 맛보게 하기 위해서, 천하의 모두가 납득할 만한 화려한 이력을 계속해서 만들어 주었다.

 20살 때에는 히데요시를 따라 큐우슈우[九州] 정벌에 종군하였다. 이때도 숙노(宿老)들의 보좌로 큰 잘못 없이 맡았고, 다음 해인 1588년에는 정삼위(正三位) 곤쥬우나곤[権中納言]으로 승진했다. 거기에 그 다음 달에는 종이위(從二位)에 오르는 등 그야말로 이례였다.

 “이 상태라면 필시 내년에는 다이나곤[大納言]이 되실 것입니다”

 하고, 이 즈음 토요토미 가문에서 조정과의 연락을 담당하고 있던 승려 출신의 쿄우토 봉행[京都奉行] 마에다 겡이[前田 玄以]는 맛깔머리 없는 아부를 하여, 이 토요토미 가문의 후계자가 될 것 같은 젊은이를 기쁘게 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마고시치로우는 너무도 빠른 승진에 이미 감동이 둔해져 있었다.

 “그런가……내년에는 다이나곤인가”

 하고 멍해서는 기뻐하지도 않았기에 겡이는 마음속으로 웃기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 바보녀석’

 겡이는 안색 하나 바꾸진 않았지만 마고시치로우의 예법지도를 담당하고 있었던 겡이였던 만큼, 이 마고시치로우를 경멸하는데 겡이만한  인간도 없었다.
 ‘이건 암만 가르쳐도 안 되겠군’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필시 다이나곤이 얼마나 높은 지위인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다이나곤이라는 함은 후지와라 가문[藤原家]의 공경(公卿)중에서도 아네코우지[姉小路], 아스카이[飛鳥井] 가문이라는 우린[羽林[각주:1]]의 가격을 지닌 가문조차 노년(老年)이 되지 않으면 될 수 없는 관위(官位)입니다. 무엇보다도 다이진[大臣[각주:2]] 다음 가는 관위이옵지요.”

 라고 말을 하자, 과연 마고시치로우도 안색을 바꾸며,

“그런가? 그런 다이나곤에 내년에는 될 수 있는 것인가?”

 하고 기뻐 되물었다.
 그런데 그 다음 해. 사건이 일어났다. 아니 사건이라고 해선 안 될 것이다. 토요토미 정권에게 있어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경사였다. 히데요시의 측실 아자이씨[浅井氏[각주:3]]
에게서 남자아이가 태어난 것이었다.
 내 몸에는 아기씨가 없는 것인가 하고 거의 포기하고 있던 히데요시에게 있어서 이 보다 더 기쁜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름은 장수(長壽)를 약속한다는 미신에 따라, 스테[捨[각주:4]]라고 이름 지어졌다.
 어쨌든 히데요시는 미칠 듯이 기뻤했다.
 천하는 거기에 맞추어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은 각각 영지(領地)가 휘청댈 정도로 수 많은 양의 축하 선물을 보냈었으며, 텐노우[天皇]조차 이 새롭게 등장한 토요토미 가문의 후계자를 위해 호화로운 애기 옷을 보냈다. 이 덴노우의 하사품(下賜品) 행사를 빈틈없이 처리한 것이 마에다 겡이였다.

 마고시치로우의 존재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멀어졌다.
 ‘다이나곤은?’
 하고, 이 해에 마고시치로우는 기대했지만 결국 히데요시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당연했다. 마고시치로우의 관작(官爵)을 너무 높여버리면 이 아기의 장래를 위해선 좋지 않다는 명쾌한 그리고 극히 현실적인 생각이 히데요시와 토요토미 가문의 관료들 사이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전쟁에서 마고시치로우의 막중한 임무는 예전과 같았다. 스테가 탄생한 다음 해에 행해진 오다와라[小田原] 정벌[각주:5]에서도 이 인물은 여전히 부사령관의 지위를 잃지 않았다.

 그 정벌이 끝나자 히데요시는 후계자의 위치를 잃은 마고시치로우를 위해서 공경(公卿)으로서의 관작은 올려주지 않았지만 다이묘우[大名]로는 가장 내실있는 위로를 해 주었다. 석고가 일약 100만석이 되었다. 주어진 것은 태어난 고향인 오와리[尾張]와 그 옆의 이세[伊勢]였다.

 “기쁘지?”

 라는 말을 히데요시에게 들었지만, 마고시치로우는 어떻게 기뻐하면 좋을지 몰랐다.

 “열심히 해라”

 라고 히데요시는 또 말했다. 더 이상 열심히 하면 후계자로 한다는, 오랫동안 계속했던 그 말은 없었지만 대신 이런 말을 해 주었다.

 “너는 내 대리인이다.”

 그러나 마고시치로우가 생각하기에 대리인은 직무이지 관작이 아니다.
 어쨌든 히데요시는 이 젊은이에게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오다와라 정벌이 끝나자 마자 계속해서 마고시치로우는 오우슈우[奥州] 정벌에 종군하였고, 개선하자 마자 쿄우[京]에서 쉴 틈도 없이 다시 쿠노헤의 반란 진압을 위해서 오우슈우로 출정했다.
 이때는 히데요시가 직접 가지 않고 마고시치로우가 처음으로 히데요시를 대리하여 참전하였다. 단지 히데요시는 이 젊은이의 실력이 불안하였기에 사실상의 총사령관으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동행시켰다. 이때 어쩌다 보니 이에야스의 관직이 다이나곤이었기 때문에 격을 맞추기 위해서, 단지 그런 이유 하나 만으로 출발하기 전에 이 젊은이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곤다이나곤[権大納言[각주:6]]에 임명받았다. 그러나 기뻐할 틈도 없이 출정하였고 오우슈우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닌 후 반란은 진압된 이 해 10월 오오사카로 개선했다.

 오오사카에서 히데요시를 알현하고 형식적인 치하를 받았지만, 놀랍게도 이 외숙부의 자랑이며 육체적 특징 중에 하나인 북을 치는 듯한 목소리를 찾아 볼 수 없었고, 말에 힘이 없었기에 떨어져서는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예전엔 시끄러울 정도로 활기찼던 쥬라쿠테이[聚楽第]도 마치 절간과 같이 조용했다.
 마고시치로우는 그 이유를 개선하는 도중 들었다. 2개월 정도 전에 츠루마츠[鶴松 – 스테를 말 함]가 병으로 죽은 것이었다.

  1. 고급 귀족인 공경(公卿)의 가문의 격(格) 중 4번째에 해당하는 문벌. 코노에쇼우쇼우[近衛少将], 코노에츄우죠우[近衛中将] 등 무관을 거쳐 다이나곤까지 될 수 있었다. [본문으로]
  2. 조선시대 식으로 말하면 좌의정이나 영의정 급을 말한다. [본문으로]
  3. 후에 요도도노[淀殿]를 말함. [본문으로]
  4. 버린 애라는 뜻. 즉 내 놓은 자식은 오래 산다는 미신. [본문으로]
  5. 후 호우죠우 씨[後北条氏]를 멸망시킨 전쟁. [본문으로]
  6. 곤[権]은 정규인수 외에 임명받은 사람에게 붙는 것. [본문으로]

'일본서적 번역 > 豊臣家의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살생관백(殺生関白)-6-  (5) 2007.11.30
살생관백(殺生関白)-5-  (0) 2007.11.24
살생관백(殺生関白)-4-  (3) 2007.11.17
살생관백(殺生関白)-3-  (5) 2007.11.10
살생관백(殺生関白)-2-  (2) 2007.06.26
살생관백(殺生関白)-1-  (2) 2007.06.04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11.11 05: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아버지의 말대로 되고 말았군요.
    더군다나 양자인 그는 히데요시에게 적자가 생기면 당연히 멀어질 수밖에 없는 관계였구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1.12 21: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실제로는 나름 능력있었기에, 그것이 오히려 화를 불렀다고도 합니다.
    역사의 패자(敗者)란 없던 사실도 뒤집어 쓰는 것이다 보니, 정말 실제로는 어땠을지...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11.13 11: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긴 그런 경우도 많죠. 역사는 승자가 써내려간 것이라고들 하니까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1.15 15: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거야 ㅎㄷㄷ군요.. 이녀석을 보니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떠오르는군요;;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도 무능의 극치로만 그려진다지만 실체는 어땠을련지..;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1.15 17: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갸는 무능했던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좋게 생각할려고 해도 그렇게 삽질만 하는지... 뚜렷하게 뭔가를 정해놓은 것도 없이, 그 때 그 때 땜빵메우기 식이다 보니 줏대도 없어보이고...결국엔 배신자라는 낙인밖에 남은 것이 없으니까요.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 家政]

1636 12 30일 병사(病死) 81.

1559 ~ 1638.

하치스카 마사카츠[蜂須賀 正勝]적남(嫡男). 키노시타 토우키치로우[木下 藤吉郎]를 섬기며 아네가와 전투[姉川の戦い]에서 데뷔전. 시코쿠[] 공략의 전공(戰功)으로 아와[阿波] 일국()을 하사 받았다. 조선 침략 시에는 위기에 빠진 아사노 요시나가[野 幸長]를 구출하는 활약을 하였고 은거 후에도 적자 요시시게[鎮]를 보좌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과 이에마사

 

 1600 9월.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 토요토미 계[豊臣系] 무공파(武功派) 다이묘우[大名]의 유력 무장으로 여겨지던 하치스카 이에마사는 - 아직 14살인 적자 요시시게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의 동군에 종군시키는 한편 자신은 영지를 히데요리에게 반환하고 아와[阿波]를 나와서 은거. 머리를 깎고 '호우안[蓬庵]'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코우야 산[高野山]에 올랐다[각주:1].

 이것이 효과를 발휘해 아와[阿波] 일국은 요시시게에게 새로이 주어졌다.[각주:2]

 

 이에마사는 아와[阿波]로 돌아와서 카츠우라 군[勝浦郡] 나카다 촌[中田村]의 은거소(코마츠시마 시[小松島市])에서 여생을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센고쿠(戦国).

 1605년 아와 군[阿波郡] 이치바 쵸우[市場町]에 호우안의 서명으로 마을 법률을 반포하는 등, 요시시게의 뒤에서 번()의 정치를 보좌하는 한편 쇼우군 토쿠가와 이에야스, 히데타다[秀忠]나 이이 가문[井伊家] 등 -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의 중신(重臣)과 연락을 자주 하여 하치스카 가문[蜂須賀家]과 토쿠가와 막부(幕府)와의 파이프를 강고히 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614 8월.

 은거소에서 2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에게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히데요시의 목상(木像)을 받든 호우코쿠 신사[神社]를 세웠다. 이 해 10월에 오오사카 겨울 전투[大坂 冬の陣]이 일어났기에 이 사실은 이에마사를 이야기하는데 있었서 굉장히 흥미롭다.

 

편히 쉬려던 여생이……

 

 어쨌든 오오사카 여름 전투[大坂 夏の陣]에서 토요토미 씨가 멸망하여 천하가 토쿠가와의 것이 되자, 요시시게는 전공(戰功)에 의해 아와지[淡路] 일국()이 더해져 25 7천석의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1618년.

 요시시게도 착실히 성장하여 농민정책을 중심을 한 '벽서 23개조[壁書二十三条][각주:3]라는 국법을 제정하여 번정(藩政) 확립에 힘썼다.

 이에마사도 안심했을 것이다. 번정은 전부 요시시게에게 맡기고 편히 여생을 즐기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역사는 이에마사를 쉬게 나두질 않았다.

 1620 2 26일.

 하치스카 요시시게가 35살이라는 한창 일할 나이에 토쿠시마 성[城]에서 병으로 죽어버린 것이다.

 4월에 그 뒤를 센마츠마루[千松丸 = 타다테루[忠英]]가 이었지만 아직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이에마사는 나카다 촌()의 은거소에서 토쿠시마 성의 서측 성곽[西丸][각주:4]으로 옮겨 와, 어린 번주(藩主)를 후견하여 1629년 병으로 누울 때까지 사실상 이에마사가 통치를 계속 하게 된 것이다.

 

 그때 가노(家老)[각주:5]나 모노가시라[物頭][각주:6] 등 주요 가신들에게 대하여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번주가 어린 동안에는 모노가시라가 모든 것을 처리할 것.

 주인이 어린 동안에는 각자가 자기 할 일은 확실히 할 것.

 공공(公共)의 일은 밤낮없이 봉사할 것.

 어떤 일이건 사사로운 감정을 넣지 말 것.

 

 등의 지시를 내렸다.

 또한 에도[戸] 루스이야쿠[留守居役][각주:7]에게도 에도 저택의 운영에 대해서 4개조의 지시를 내렸다.

 

 이에마사는 하세가와 에치젠[長谷川 越前]이나 외손자인 하치스카 야마시로[蜂須賀 山城][각주:8]를 가로(家老)로 삼아 센마츠마루를 보좌시켰다.

 참근교대(交代)[각주:9] 할 때에도 이에마사가 같이 갔다.

 이에마사는 번정의 확립에 큰 역할을 이룸과 동시에 노련함을 무기로 바쿠후가 흠잡을 만한 일이 없도록 노력했다.

 

 1623년에는 쿠니부교우[奉行]를 설치하여 지방 행정의 정비를 꾀했고,

 1627 7월에는 요시시게의 '벽서 23개조'를 보완하는 의미에서 '이서 7개조(裏書七)'를 제정하였다.

 센마츠마루는 1623년에 아와노카미 타타시게[阿波守 忠鎮]라 이름을 바꾸고, 다음 해 봄에는 타다테루(忠英)라 고쳤다.

 

 그 후에도 이에마사는 신전(新田)개발이나 염전(鹽田)개발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매년 에도에 가서는 막부와의 파이프를 더욱 강고히 했으며 죽기 직전까지 이에마사가 가신들에게 영지를 배분하는 문서를 쓰는 등 번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이에마사의 언행을 기록한 [존어집(尊語集)]에는,

 어린 타다테루의 늦잠을 고치라고 한 말이나, 가신들이 타다테루가 자신들을 함부로 다루는 것에 대해 상담하러 왔을 때, '어렸을 때는 그런 법이다'라며 타다테루를 감싸는 듯 하다가, 에도로 출발하기 전에 인사를 올리러 온 타다테루에게 정원에 있는 개나 참새를 자신의 뜻대로 다루는 것을 보여준 뒤 새나 동물도 이렇게 자신을 따르게 할 수 있으니 부하에게 정을 주고 위엄을 가지고 가르치면 충의를 행하지 않는 자는 없다고 말한 부분이 보인다.

 

 1638 12 23일.

 토쿠시마 성[城] 서측 성곽에서 죽었다 81.

 번정의 확립을 자신의 눈으로 끝까지 지켜본 일생이었다.

코우겐 사[興源寺]에 있는 이에마사의 묘 - 토쿠시마 시[徳島市]


  1. 속세를 버리고 중이 되겠다는 의미. [본문으로]
  2. 이에마사는 서군 편에 섰다, 혹은 병에 걸렸었기에 오오사카[大坂]에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본문으로]
  3. 벽서(壁書)란 법령을 적은 종이나 나무를 벽에 붙인 것을 말한다. [본문으로]
  4. 에도시대 때. 보통 서측 성곽[西の丸]은 다이묘우[大名]가 은거하며 머무는 곳이었다. [본문으로]
  5. 가문의 수상(首相) 격 [본문으로]
  6. 중급 관리자. [본문으로]
  7. 에도[江戸]에 있는 번(藩)의 저택의 책임자. [본문으로]
  8. 하치스카 야마시로의 증조부는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 죽은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이다. [본문으로]
  9. 참근(参勤)은 쇼우군에게 봉사한다는 의미, 교대(交代)는 봉사를 쉬고 자기 영지로 돌아가 정무를 맡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1년 터울로 에도와 자기 영토를 왔다 갔다 했으며 처자식은 인질로 에도에 항상 남겨 두었다.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09.17 05: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모리 모토나리의 말년과 비슷하군요.
    차이가 있다면 그의 노력은 번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모토나리의 노력은 허사나 다름없이 끝나버렸다는데 있다는 것이겠네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9.17 10: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설이나 게임 상에선 이 인물보단, 얘 아비가 더 유명하죠.(하치스카 고로쿠...)
    테루모토도 번정의 확립과 지번(支藩) 설치 등을 보면 모토나리의 노력이 허사였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무능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恵瓊)하고 킷카와 히로이에라는 서로 좋지않은 사이였던 두 개의 창구를 동시에 가동시킨 것이 패인이라고 생각합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09.22 01: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직도 배워야 할게 많네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9.23 22: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같이 공부해 나가요. ^^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4.12 11: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치스카 고로쿠 마사카쓰…
    하지만 전 마사카쓰보다는 어째 이 이에마사가 더 친숙하게 느껴지네요. 무장이 너무 없어서 고생했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플레이 때 정치력이 높아서 상당히 소중한 인재였기에 그랬을까요… 정치력이 높은 까닭이 있었군요.
    아. 천창에서 이 녀석은 아와오도리 이벤트와 관련해서 등장하더군요. 아버지의 스노마타 축성 이벤트 같은 건 나오지도 않는데, 은근히 아버지보다 좋은 대우?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12 11: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처음 일본 전국 시대에 관심을 가지게 해준, 김성한 작가님의 '임진왜란'에서 봉수하가정...이라는 왠지 재미있는 이름을 접해서인지 친근감이 들더군요.

    아와오도리...하니까... 일본 축구 선수 중에 쿠보 타츠히코(久保 竜彦)라는 선수가 골을 넣으면 코너 플레그에 가서 아와오도리를 춤추던 것이 생각나네요.

깃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1586 11 5일 병사(病死) 57.

1530 ~ 1586.

모우리 모토나리[毛利元就]의 둘째 아들. 호족 킷카와 가문[吉川家]을 상속하였다. 이츠쿠시마 전투[島の戦い]나 아마고 가문[尼子家] 평정 등에서 공을 세웠다. 동생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와 함께 '모우리 양 천[毛利 [각주:1]]'이라 일컬어 졌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요청으로 큐우슈우[九州]로 출전하지만 코쿠라[小倉]에서 죽었다.








무패의 명장


 킷카와 모토하루는 센고쿠[戦国] 굴지의 실전적(實戰的)인 명장(名將)이다.

 1530년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둘째 아들로 아키[安芸] 요시다[吉田]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에서 태어나 1541 12살의 나이에 아마고 하루히사[尼子 晴久]와의 코오리야마 농성전(籠城戰)에서 처음 데뷔전을 치뤘다. 이후 싸움터를 내달리길 80회에 가까웠고 그 중 64번의 싸움에서는 승리했다[각주:2].


 명장(名將)은 명장을 안다고 한다.

 운명의 장난인지 스에 타카후사[陶 隆房=晴賢]와는 의형제의 맺을 정도의 사이였다.

 아키[安芸] 신쇼우[新荘]에 입성하여 킷카와 가문 중흥(中興)의 시조가 되어서는 동생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와 더불어, () '카와[川]'를 짊어지고 모우리 양 천[毛利両川]의 일익을 담당하며 모우리 종가(宗家)의 융성(隆盛)을 위해 분주한 일생이었다그런 모토하루이기에 말년이 한가롭고 평온할 턱이 없었다.


은거를 바라는 나날들


 모토하루가 은거를 결심한 것은 그때까지 항상 공세에 서서 전쟁을 벌였던 것이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을 둘러싼 히데요시 군()과의 대결에서는 항상 수세로 돌아서 버린 때부터이다. 공격형인 모토하루로서는 히데요시에게 굴복한 것에 정신적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더구나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을 알지 못한 채(알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사료도 있다), 감쪽같이 히데요시의 술책에 넘어가 싸움을 멈추고 타카마츠 성장(城將)시미즈 무네하루[清 宗治]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등의 실책이 모토하루를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아 넣었다.


 1582 12 20일.

 "늙었기에 가문을 모토나가[元長]에게 물려준다"(江譜拾遺)고 하고선 곧바로 은거해 버렸다. 모토하루 53, 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은거 후, 일본의 중앙에선 노부나가[信長] 사후의 주도권 쟁탈전이 일어나 히데요시 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등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때 히데요시, 카츠이에 쌍방에서 자기들을 도와달라는 요청이 왔지만 모토하루는 신중히 양 진영(陣營)을 관찰했다. 결국 히데요시의 확고한 자신감과 실행력이 가득 쓰여진 편지를 보고 이후는 히데요시 편에 서기로 했다.


 그러나 히데요시와의 영지(領地) 문제에서 코지마 반도[児 半島][각주:3]를 빼앗겼고, 거기에 모토하루가 가장 귀여워하고 있던 셋째 아들 츠네노부[経信]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양자(養子)인 모토사토[元総][각주:4]를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바치는 등 굴욕적인 타협을 참으며 모우리 종가의 안태(安泰)를 위해 노력하였다.

 참고로 츠네노부는 후에 이와쿠니[岩国] 킷카와 가문의 시조(始祖)가 되는 히로이에[広家][각주:5] 그 다음 해에는 귀국을 허락 받았다. 모우리 안태를 위한 인질을 바친 셈으로 모우리 종가의 테루모토[輝元]는 츠네노부에게 오키[隠岐] 일국(一国)를 하사하는 등 공로를 인정하여 모토하루의 마음 고생에 보답하였다.


 히데요시는 키이[紀伊] 공략을 끝내자 시코쿠[四国]의 쵸우소카베[長宗我部] 공략에 임하여 모토하루에게도 출진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모토하루는 히데요시의 뜻에 따르는 것을 거부하여 은거인 몸이라는 이유로 큰 아들 모토나가를 대신하여 보냈다. 모토하루를 대신한 킷카와 가문과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모우리 양 천[毛利両川]은 시코쿠[四国]를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쵸우소카베[長宗我部]와 싸우던 1585 7월에는 난죠우 모토츠구[南条 元続]에게 시코쿠[四国] 침공으로 방비가 허술해진 호우키[伯耆] 카와라야마 성[河原山城]을 빼앗기는 사태가 발생하지만 노련한 모토하루는 곧바로 배다른 동생인 스에츠구 모토야스[元康][각주:6]에게 명령하여 이를 탈환케 하였다.


모토하루 최후



 그 후도 모토하루가 바라는 편온한 은거 생활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일 없이 결국 모토하루의 마지막 출진의 날이 다가온다.


 1586년.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는 큐우슈우[九州] 통일을 목표로 붕고[豊後]의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을 공격하였다. 히데요시는 시마즈를 토벌하기 위해 모우리 테루모토를 대장으로 삼아 백전연마의 노장 모토하루에게도 출진을 지시하였다. 동생인 타카카게에게 이요[伊予]를 하사한 것처럼, 출진만 한다면 모토하루에게 치쿠젠[筑前] 일국(一国)을 주겠다고 하였다. 모토하루는 히데요시의 명령을 따르고 싶지 않았지만 모우리 종가를 위해서는 출진할 수밖에 없었다.


 1586 8 19일.

 모토하루는 모토나가, 츠네노부를 거느리고 아키[安芸] 신쇼우를 출발하여 사에키 군[佐伯郡]의 오가타[小方]에서 배를 타고 건너가 코쿠라 성[小倉城]을 공략했다. 모우리가 공격해 왔다는 소식을 들은 시마즈는 어쩔 수 없이 공격 중이던 치쿠젠[筑前] 타치바나야마 성[立花山城] 포위를 풀고 히고[肥後] 야츠시로[八代]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농성하고 있던 타치바나 성주(城主)인 타치바나 무네토라[立花 統虎 = 후의 무네시게[宗茂]]는 성을 나와 시마즈 군()을 추격하여 치쿠젠의 타카토리이 성[高鳥居城]을 공략하고, 이와야 성[岩屋城]과 호우만 성[宝満城]을 탈회하였다.


 이때 모토하루는 부스럼(통증이 심했다고 하며 경과를 봐서는 피부암이라 추정된다)이 나서 코쿠라 성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아들인 모토나가는 쾌유를 바라며 사찰에 명해 기도를 올리게 하였고, 테루모토도 의사를 파견하여 치료를 하게 했지만 낫는 일 없이 11 5일 코쿠라 성()에서 죽었다. 향년 57.

  1. 모토나리가 구축한 모우리 가[毛利家]의 군사-정치 조직. 모토나리의 둘째와 셋째 아들을 양자로 보낸 킷카와나 코바야카와 가문에는 '카와[川]'라는 글자가 들어갔기에 이러한 이름이 되었다 [본문으로]
  2. 위키에 따르면 76전 64승 12무승부 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3. 당시는 간척 사업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아 코지마 섬이었다. [본문으로]
  4. 모우리 모토나라의 9번째 아들. 후에 모우리 히데카네[毛利 秀包] [본문으로]
  5. 세키가하라에서 모우리 군단의 움직임을 막아 동군을 유리하게 한 인물. [본문으로]
  6. 모우리 모토나리의 8번째 아들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09.15 20: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랜만에 올리셨네요^^
    근데 읽기가 힘들어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9.16 00: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이 너무 조잡하다는 말씀?? 아니면 글씨가 너무 작다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09.16 06: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 작아서 읽기 힘들었는데 크게 해주셨네요. 고맙습니다^^
    불패의 명장이었군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9.16 09: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주 그런 일이 있네요.... (뭐가 그렇게 만드는지 원...)
    애비인 모토나리조차, 전투는 자기도 모토하루에 미치지 못한다고 할 정도라는 말을 했다고 하더군요.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09.17 05: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런 인물이 있었기에 모리가가 큰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던거네요.
    그런데도 오다나 토요토미에게 밀린 걸 보면 새삼 그들이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9.17 10: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쟁은 예나 지금이나 물량이 대세니까요.
    돈 좀 뽑을 수 있는 곳(사카이 같은 경제구역과 각종 이권을 손에 쥐고 있던 사찰등)은 오다 측이 쥐고 있었으니까요.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