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치 요시타카(大内 義隆)

1551 9 1일 자살 45

1507 ~ 1551.

요시오키(義興)의 아들. 츄우고쿠()-큐우슈우(九州) 7개국의 슈고(守護[각주:1]). 히젠(肥前)으로 출병(出兵)하여 쇼우니()()를 멸하고 대륙 무역을 장악했다. 갓산토다(月山富田)() 공략 실패 후 귀족문화에 빠져 중신(重臣)들의 반감을 사, 스에 타카후사(隆房)가 모반을 일으키자 도망 끝에 자살.








이즈모(出雲) 원정의 실패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 이와미(石見), 아키(安芸), 빙고(備後), 치쿠젠(筑前), 부젠(豊前) 등의 7개국의 슈고로써 영화를 누리며 영지(領地) 곳곳을 쿄우(京)의 우아함으로 치장한 오오우치 요시타카.
 그의 '말년'은 센고쿠(戦国) 무장의 자리를 버리는 요인이 된 이즈모(出雲)의 아마고(尼子) 토벌이 실패로 끝났을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쿄우라기산(京羅木山) 산의 본진에서 갓산토다(月山富田)성(城)을 내려다 보며, 세자(世子)인 하루모치(晴持[각주:2])에게 말했다.
 “강적 아마고님은 철벽의 요새(要塞)나 지성(支城
)을 가지고 계셨다. 그 아마고 십기(尼子 十旗[각주:3]), 아마고 십새(十塞[각주:4])도 예전만 못하다. 내일은 함께 갓산토다(月山富田)를 취하자꾸나”
 그러나 공격할 때마다 실패하여 미토야 히사스케(三刀屋 久扶), 미사와 타케키요(三沢 為清), 야마노우치 타카미치(山内 隆通), 혼죠우 츠네미츠(本城 常光), 킷카와 오키츠네(吉川 興経) 등의 이즈모(出雲) 호족들이 배반하였다.

 1543년 5월 7일. 요시타카와 하루모치는 각각 따로 배를 타고 도주(逃走)하다가 하루모치가 탄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세자를 잃게 되었다.

무사(武士)와 귀족(公家) 사이에서

 야마구치(山口)로 돌아와서는 소우기(宗祇[각주:5])가 저택을 보고 영감을 얻어,

 연못은 바다요 나뭇가지 끝이 여름엔 산이구나
 池はうみ こずえは夏のみ山かな
라 시를 쓴 츠키야마(築山)의 저택에 틀어박혔다.
 츠키야마 저택은 거대한 연못과 연못을 파면서 생긴 흙으로 쌓은 큰 산이 있었으며, 한 편이 80간(間[각주:6])에 이르는 토담과 폭 3간[각주:7]해자(垓子)를 둘러쳐 현실에서 격리된 풍아(風雅)의 공간이었다. 

 츠키야마의 저택에는 귀족(公家)이나 문인(文人), 묵객(墨客)이 전란(戰亂)의 쿄우토(京都)를 피해 방문하였고 요시타카는 미남미녀에 둘러 쌓여 와카(和歌), 한시(漢詩), 렌가(連歌), 학문(學問), 신도(神道), 불교(佛敎), 유교(儒敎) 등에 몰두하는 문(文)의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또한 전쟁도 벌였다.
 
이요(伊予)를 공격하였고 빙고(備後)도 손에 넣었다.
 스오우(周防)의 스에 타카후사(陶隆房 = 晴賢), 나가토(長門)의 나이토우 오키모리(内藤 興盛), 아키(安芸)의 히로나카 타카카네(弘中 隆包), 이와미(石見)의 토이다 타카모리(問田 隆盛), 치쿠젠(筑前)의 스기 오키츠라(杉 興連), 부젠(豊前)의 스기 시게노리(杉 重矩) 등의 슈고다이(守護代[각주:8]
)가 요시타카를 대신해서 오오우치씨(氏)를 지탱했다.

 요시타카도 1548년에는 종이위(従二位).
 쇼우군(将軍)직보다 관위가 더 높아[각주:9]
, 헤이안(平安[각주:10])시대라면 우다이진(右大臣)에 해당하는 관위였다.

 그러나 무장에게도 영지(領地)가 아닌 관위로 상을 내렸기에 무장들은 불만이 많았다[각주:11].
 사치는 백성들의 무거운 세금으로 이어졌다. [오오우치 요시타카 기(大內義隆記)]에는 “전쟁에 대한 준비도 없고 백성을 소중히 여기는 것 조차 잊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오오우치 씨(氏)의 미래를 걱정한 명장(名將) 스에 타카후사는 끊임없이 요시타카에게 간언(諫言)하며 사태를 여기까지 이르게 한 원흉인 사가라 타케토우(相良武任)를 몇 번이고 추방했다. 그러나 결국 아무것도 변함이 없어 타카후사는 오오우치 가(家)나 백성을 위해서 요시타카의 추방을 결심할 수 밖에 없었다.

 [타카후사 모반]의 소문은 차츰 퍼져나갔다.
 그런 와중에서도 1551년 8월 26일 츠키야마의 저택에서는 코우와카(幸若[각주:12]
)가 행해지고 있었다.

 다음 날인 27일.
 
남색(男色)을 즐기던 요시타카는 과거 스에 타카후사와 즐겼던 생각에 잠기며 미남(美男)인 야스토미 겐나이(安富 源内)와 함께 마당에 있었다.

 오후 8시.
 [스에 타카후사의 대군! 야마구치를 향해서 와카야마(若山)성(城)을 출발]이라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오오우치의 군세(軍勢)는 6천.

 그러나 스기 오키츠라(杉 興連) 이외의 슈고다이는 모두 스에 쪽으로 돌아섰다.
 요시타카는 방어하기 쉽게 츠키야마의 저택에서 호우센(法泉)사(寺)로 옮겼지만, 다음 28일 아침이 되자 남아있는 병사는 500으로 줄어 있었다.

 이곳에서 자살할까도 생각했지만 사랑하는 오사이노카타(おさいの方)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그 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적자(嫡子) 요시타카(義尊)와 함께 나가토(長門) 센자키(仙崎)로 도망쳤다. 거기에서 큐우슈우(九州)로 도망치려 작은 배에 올랐지만 바다가 거칠어졌기에 나가토(長門)의 타이네이(大寧)사(寺)로 돌아왔다.

 자신을 따라 온 것은 레이제이 타카토요(冷泉 隆豊)를 포함한 불과 60여명.
 스오우(周防)국(国)은 토우다이(東大)사(寺)의 장원(莊園)가 있었던 곳으로, 이 즈음 토우다이사(寺)에서는 [스에 오와리노카미 타카후사(陶 尾張守 隆房)가 마음을 고치길]과 요시타카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비는 엄숙한 기도회가 열렸다고 한다.(東大寺古文書[각주:13]
)

말세(末世)의 수행자(修行者)

 요시타카는 둔세(遁世)에 대하여 일찍부터 동경하여 젊어서부터 선(禪)에 심취해 있었다.
 아키(安芸)의 카나야마(銀山)성(城)을 한창 공격하던 중에 - 가까운 곳에 고명한 선승(禪僧)인 지큐우(次休) 소우스(蔵主[각주:14]
)의 옛 터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산 속 깊이 들어가 결국 발견하고서는 거기에 대가람(大伽藍)을 재건(再建)하려고 결심할 정도였다.

 또한 이즈모(出雲) 원정이 한창일 때조차 쿄우토(京都)에서 요시다 카네이에(吉田 兼家)를 초청하여 요시다(吉田) 신도(神道)를 전수받았다.

 요시타카는 물질적인 풍요로움은 허무하며 마음은 신불(神仏), 와카(和歌), 한시(漢詩), 유우소쿠(有職[각주:15]), 귀족(公家)의 놀이에 몰두했다. 이를 [大內義隆記]에서는 ‘말세의 수행자’라 평했으며 이는 센고쿠(戦国) 무장에게 필요한 시의심(猜疑心)과 공격성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요시타카는 타이네이사(寺) 13대 이세츠 케이쥬(異雪 慶姝)가
 “죽음을 앞두고는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라는 가르침을 듣자 요시타카는,
 “뭐가 어떻게 되든 좋습니다. 지금은 마음 속 하늘에 달이 보입니다”
 고 답하여 이세츠(異雪)의 가르침을 깨달은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고 한다.

 죽기 전에 남긴 시는,

 죽이려는 사람도 죽는 사람도 모두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 같구나.
 부처가 세상을 구하려고 이 세상에 오는 것 또한 이와 같다
 討つ人も討たるる人も諸共に如露如電、応作如是観
향년 45세.



  1. 무로마치(室町)바쿠후(幕府)의 지방관. [본문으로]
  2. 친아들이 아니라 양자(養子)이다. 모친이 오오우치 요시타카의 누나이며 쿠게(公家)의 명문 이치죠우 가문(一条家) 출신이었던 점이 당시 친아들이 없었던 요시타카의 세자가 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본문으로]
  3. 본성 갓산토다(月山富田)와 이어진 주요한 열 개의 지성을 말한다. [본문으로]
  4. 갓산토다(月山富田)와 아마고 십기 사이에 있던 열 개의 요새. [본문으로]
  5. 1421~1502. 살아 있을 당시는 렌가(連歌)계의 일인자. [본문으로]
  6. 1간은 약 1.82미터니까, 80간은 약 146미터 [본문으로]
  7. 약 5.5미터. [본문으로]
  8. 여러 지역을 가진 슈고일 경우 그 지역에 가지 않은 채 가신 혹은 친척에게 대신 그 지역을 통치시켰고 그런 사람을 슈고다이(守護代)라 하였다. [본문으로]
  9. 이 즈음 아시카가 쇼우군 가문(足利 将軍家)은 대체로 종삼위(従三位)였다. [본문으로]
  10. 94~1185 즈음. 귀족(公家)의 전성시대였다. [본문으로]
  11. 자칭이 많았던 다른 가문, 무장이 많았던 것에 비해 오오우치가(家)의 유력 무장들은 실제로 조정에서 하사 받은 것이었다. [본문으로]
  12. 간단한 춤을 동반한 시를 읊는 것.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즐겨 부른 아츠모리(敦盛)도 이것 중의 하나다. [본문으로]
  13. 이는 스오우(周防)를 지배하고 있던 스에 가문이 횡령한 토우다이사(寺)의 장원을 요시타카가 타카후사에게 토우다이사(寺)로 반환하라고 했기에 토우다이사(寺)는 요시타카를 위해서 기도를 한 것이다. [본문으로]
  14. 절에서 불교 경전 등을 관리하는 직책 또는 사람. [본문으로]
  15. 옛 선례(先例)를 바탕으로 관직(官職), 의식(儀式), 복장 등을 연구하는 학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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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08.19 10: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규슈, 시코쿠 이런 쪽은 아직도 모르는 가문이 많습니다.
    뭐, 물론 다른 지방도 마찬가지이긴 합니다만;;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8.19 12: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오우치 가문은 백제왕의 후예라는 점(자칭)에서 우리나라엔 좀 알려져 있는 가문이죠.
    KBS 역사 스페셜에서도 요시타카의 아비인 요시오키에 대해서 방송한 적이 있더군요.
    특히나 요시오키의 경우, 오다 노부나가 이전에 천하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고 하는 학자도 있다고 하더군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08.20 12: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그렇군요.
    역사스페셜을 거의 안 봐서 몰랐습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8.20 15: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나라...라고 하니 온 국민이 다 아는 것 같이 썼군요. 죄송합니다.
    기껏해야 그 당시 역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라고 했어야 했는데...죄송합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08.20 15: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게 말씀하실거 까지야^^;;
    저도 잘못 썼네요...
    전국시대에 관심있는 사람이 전국민의 몇 퍼센트나 되겠습니까 ㅎㅎ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8.21 07: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서로 얼굴 보면서 댓글 다는 것이 아니니까, 될 수 있음 오해가 없었음 해서요.
    턴오버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08.21 14: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시타카의 몰락은; 참 자폭이죠;; 요시오키에 관해서도 한번 알고 싶은 생각이 드는군요.. 50대 초반으로 죽었다는 사실 말고는 통 모르는지라..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8.21 15: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님//무로마치 바쿠후 10대 쇼우군 아시카가를 옹립하여 상락을 이뤄내, 칸레이다이(管領代)와
    종삼위(従三位)까지 올라간 것이 천하인에 가깝다는 소리를 듣는 이유가 아닌가 합니다.
    저는 솔직히 미요시 나가요시(三好 長慶)가 더 오다 노부나가 이전에 천하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만, 차이는 바쿠후의 역직(役職)과 조정의 관위가 더 높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09.26 10: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좀 뜬금 없지만.. 나이다이진이 종2위였던가요? 좌우대신 바로 밑이었던걸로.. 그렇게 생각하면 도쿠가와에게 히데요시가 상당히 우대를 해준것이군요.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9.26 15: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이다이진(内大臣)은 정2위, 종2위가 될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우선 관위가 정해지고, 그 후에 관직에 임명되는 식이었다고 하더군요.(그래서 관직에 임명받지 못했을 때는 '산미(三位)'등 관위로만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네요)

    히데요시는 조정의 권위를 그가 대리함으로 다른 세력을 그 휘하에 둔 것이라, 그 만한 힘을 가진 만큼, 그에 상당하는 직위를 내렸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아시는 바대로 이에야스의 세력은 히데요시 다음 가는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09.26 17: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군요. 유신 후에 좌대신을 역임한 시마즈 히사미츠島津久光는 결국 도쿠가와를 넘어선걸로 생각할수도(ㅎㄷㄷ..)

    아니, 그때랑은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ㅎ_-)

  1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9.26 19: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상임직으론 좌대신이 최고이긴 하죠.(태정대신, 관백은 비상임). 최후의 쇼우군 토쿠가와 요시노부(徳川 慶喜)보다 일년 일찍 종 1위에 서임되긴 했죠. ^^

    사족이지만... 히사미츠도 억울했을 것입니다. 그의 사상은 좌막을 바탕에 깐 공무합체(조정과 막부가 서로 손 잡는 체제)였는데, 사이고우 타카모리나 오오쿠보 토시미치같은 애들이 멋대로 도막으로 치달아 결국 자신의 손으로 천하를 움직을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긴 형국이 되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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