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의 공지와 비슷한 것인가 보더군요.
센고쿠(戦国) 시대 게시판의 기초 지식
이 정도는 알아 두지 않으면 병진 취급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센고쿠 시대 전반적인 것에 대해.
치안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쿄우토(京都)도 자치조직 같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역시 다이묘우(大名)끼리의 국경 근처는 위험했다.
영토의 크기보다 중요한 것은 석고(石高). 예를 들면 오와리(尾張)같은 곳은 저렇게 조그맣지만 50만석이 넘는 대국.
1만석X250이 대체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병사수. 예를 들어 50만석이면 12500, 100만석이면 25000 정도가 기준
텔레비전도 인터넷도 없던 시대였기에 숫자가 굉장히 엉망. 오케하자마에서 이마가와4만이라던가 미미카와(耳川 – 오오토모(大友)와 시마즈(島津)의 싸움 – 역자 주)에서 오오토모 6만이라던가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편.
노부나가는 인망이 있었다.
노부나가는 이외로 좋은 사람.
노부야스(信康 –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아들)는 노부나가가 죽인 것이 아니다.
노부나가에게 좋지 않고 이에야스에게 좋은 이야기는 대체로 에도 시대의 창작(아네가와(姉川) 전투, 노부야스죽이기 등)
노부나가와 미츠히데는 사이가 좋다.
아무 때나 방화를 일삼는 것은 아니다(미노(美濃) 공략때도 산 전체를 불태우면 성을 취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다)
노부나가는 아스퍼거 증후군
삼단철포 같은 것은 없다.
낙시낙좌(楽市楽座)는 노부나가의 오리지널이 아닌 롯카쿠(六角)의 것을 베낀 것. 참고로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도 했던 것.
오케하자마는 어쩌다 이겼다는 것이 대세.
하지만 그걸로 노부나가를 과소평가하면 이노우 전투(稲生の戦い – 노부나가와 동생 노부유키(信行)간의 싸움 700 vs. 1700 – 역자 주), 모리베 전투(森部の戦い –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가 ‘목 사냥꾼 아다치(頸取足立)’를 쓰러뜨렸다는 전투. 3000 vs. 6000(사이토우(斎藤)군) – 역자 주), 텐노우지 전투(天王寺の戦い – 텐노우지 요새(7000명)을구원하는 노부나가 3000 vs 혼간지 15000의 전투. 노부나가는 선두에 서서 돌격했다고 한다 – 역자 주) 등 적은 수로 대군을 물리친 전투가 몇 번 더 있었기에 오케하자마에서 어쩌다가 이겼다고 하여도 특별히 문제될 것은 없다.
미카타가하라 전투 최대의 피해자.
신겐 정도는 여유롭게 쓰러뜨린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편.
‘백성에게 사랑 받은 타이코우(太閤) 어르신’ 이라는 것은 거짓말.
‘혼노우(本能)사(寺)의 변’ 시점에서 히데요시의 위치는 가신 필두인 시바타(柴田), 2위인 아케치(明智), 여러 좋은 대우를 받고 있던 니와(丹羽) 아래인 4번째 정도.
가난한 농민 출신이 아니라 부잣집 출신(이었다는 설도 있다)
잔혹한 행위를 많이 했다.
노부나가가 죽은 다음부터 노부나가 뒤따마로 없던 것도 만들어서 퍼트린 것을 보면 정말로 성격이 나쁘다.
알려진 만큼 타케나카(竹中)나 쿠로타(黒田)의 도움을 받지 않았지만 히데나가(秀長)의 힘 없이 ‘천하인 히데요시’는 될 수 없었다.
토요토미 가문 멸망의 원인은 전부 이 녀석.
아기씨(精子)가 없다.
히데요리(秀頼)는 아마 이 녀석의 아이가 아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 편.
자기한테 안 좋은 것은 전부 노부나가에게 덮어 씌었다(아들 죽이기, 미카타가하라에서 3000밖에 병사를 보내 주지 않았다 등)
아네카와에서의 분투 같은 것은 없었다 - 라기보다 아네카와 전투 자체가 알려진 만큼 대규모 전투는 아니었다.
미카타가하라 전투는 이에야스의 미스라기 보다 거기서 물러난다면 코쿠진(国人)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게 되기에 어쩔 수 없이 출진. 별로 신겐이 굉장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는 것이 타당.
실은 알려진 만큼 괴로운 인질 시대 같은 것은 없었다(요시모토에게는 굉장한 기대를 받았고, 타이겐 셋사이(太原 雪斎)에게 교육을 맡길 정도였다)
타케다 신겐 편.
센고쿠 시대에서 가장 과대평가 받고 있는 과대사천왕(타케다, 우에스기, 시마즈, 다테, 쵸우소카베(長宗我部) 5명이 있지만 단어 가지로 따져서는 안 된다)의 필두.
항상 우세한 상태에서 싸움을 걸기에 소수의 군사로 대군을 물리친 전투가 없다.
그런 주제에 몇 번이나 졌던 것을 보면 이 녀석 역시 전쟁 하수일 것이다.
노부토라(信虎) 이상으로 세금 폭탄을 먹였다.
영민들에게 미움 받았다.
기껏해야 코쿠진(国人) 연합의 맹주적인 존재이기에 ‘조직 만들기’는 안 된다.
사람을 쓰는 것이 정말로 뛰어난지 어떤지는 미묘.
노부나가가 두려워하거나 할 정도의 인물은 아니었다.
자기보다 격이 떨어지는 인물밖에 이기질 못한다.
오야붕(이마가와 요시모토)에게는 개기질 못한다.
미카타가하라는 3배의 병력 차이가 있었기에 이길 수 있었다. 별로 신겐이 굉장한 것은 아니다.
메뚜기전법(상대의 지역에서 물자를 약탈)과 인신매매로 겨우 버텼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정도.
카와나카지마는 안개 속에서 퇴각하다가 우연 부딪혔을 뿐.
타케다 가문 멸망의 원인은 전부 이 녀석.
상대방이 일부러 동맹을 신청해서 맺었는데도 불구하고 손바닥 뒤집듯이 간단히 동맹을 끊는 것을 보면 너무 멍청이 같아서 옹호해 줄래야 옹호해 줄 수가 없다.
처음부터 카이(甲斐) 22만석을 전부 가지고 있는 등 굉장히 좋은 환경.
처음부터 5000의 병력을 움직일 수 있었기에 굉장히 좋은 환경.
시나노(信濃)에는 다이묘우(大名)가 없는(소규모 호족 밖에 없었다) 굉장히 좋은 환경.
기본적으로 역사 게임이라거나 TV 방송 등에서는 최강 취급을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다테나 시마즈와 그리 차이가 나질 않는다.
우에스기 켄신 편.
- 실은 여자가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다.
- 그 이상한 행동도 여자라고 하면 왠지 납득할 수 있는 것이 많다.
메뚜기 전법과 인신매매가 특기
우에스기는 **성을 뺏어 100의 금과 200의 식량을 얻었다 - 라는 게임 같은 것을 실제로 한 무서운 다이묘우(大名).
10만의 대군으로 호우죠우(北条)를 공격하지만 니노마루(二の丸)도 없었던 오다와라(小田原)성(城)을 낙성시키지 못했다.
영토 확장 욕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영토 확장을 할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즈음은 북새통에 호쿠리쿠(北陸)의 대부분을 손에 넣어 100만석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로.
오다 가문과의 국력 차이를 보면 무슨 짓을 해도 절대 이길 수 없다.
테토리가와 전투(手取川の戦い)는 노부나가를 쓰러뜨린 것이 아니라, 히데요시가 멋대로 전선 이탈하여 혼란에 빠진 카츠이에(勝家)를 쓰러뜨린 것뿐.
우에스기측이 주장하는 만큼 큰 전투는 아니다.
라기보다 실제로 있었는지 어떤지 조차도 미묘(있었다고 하여도 그걸로 우에스기 켄신의 명성을 높일 수 있는 듯한 큰 전투는 아니다)
호우죠우 가문 편.
- 호우죠우라는 성을 쓰기 시작한 것은 우지츠나(氏綱) 때부터라고 한다.
알려진 소우운(早雲) 실적의 대부분은 우지츠나가 한 것.
우지야스가 한 카와고에 전투(河越の戦い - 11000으로 60000의 군세를 물리친 전투)는 여러 설이 있긴 하지만 우에스기와 호우죠우의 밸런스를 보는 한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전투로 센고쿠 시대에 기리 남을 멋진 전투.
우지야스, 츠나시게(綱成), 우지시게, 우지마사 등 농성만 하였다.
- 명군(名君)이 비교적 많은 핏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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