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일본판 >

 후쿠이(福井)()에서 아스와가와(足羽川)()을 내륙 쪽으로 10km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에치젠 평야(越前平野)가 끝나면서 산맥이 주위를 둘러싼 작은 골짜기의 마을로 들어간다. 거기가 이치죠우다니(). 지금은 한적한 농촌이지만, 센고쿠(戦国) 시대에 이곳은 에치젠 일국을 지배했던 아사쿠라(朝倉)()의 본거지였다. 근년[각주:1]이 되어 이 지역은 갑자기 주목 받았다. 아사쿠라 씨()의 저택이 발굴 조사되어 거의 그 전모가 확실히 드러난 것이다. 이로 인해 센고쿠다이묘우(戦国大名)의 생활 실태라는 것이 생생히 떠오르게 되었다.

 저택의 유적 전체가 탄 흙과 재로 구성된 층으로 덮여 주춧돌이나 정원석(庭園石)의 겉은 타고 금이 가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1573 8월 아사쿠라 가문이 괴멸될 때 이치죠우다니()는 큰 불에 휩싸여 소실(燒失)되었다는 기록을 뒷받침함과 동시에 그 종언(終焉)의 무시무시했었음을 유적은 말해주고 있다.


 센고쿠 시대. 이치죠우다니는 ‘호쿠리쿠(北陸)의 쿄우토(京都)’라고 불리어질 정도로 화려한 성 밑 마을(城下町)이었다. 여기에는 전란으로 혼란스러운 쿄우토를 피해온 상급 귀족(公卿)이나 문화인들이 모여있었다. 우다이진(右大臣) 산죠우 킨요리([각주:2])나 다이나곤(大納言) 아스카이 마사츠나(飛鳥井 正綱)가 와있었으며, 렌가(連歌)의 제1인자 소우기(宗祇), 소우쵸우(宗長)의 사제(師弟)도 방문했었다. 당대 제일의 국학(国学) 키요하라 노부카타( 宣賢)도 초대받았다.

 그 중에서도 거물은 아시카가 쇼우군(足利 ) 요시테루(義輝)의 동생 요시아키(義秋)였다. 요시아키는 1567 11월에 이치죠우다니(一乗)를 찾아왔다. 2년 전에 형 요시테루가 미요시(三好)-마츠나가(松永) 일당에게 습격 받아 죽은 다음부터 바쿠후(幕府) 재건의 뜻을 세우고는 요시카게의 힘을 빌리려 찾아온 것이었다.

 요시카게는 이 귀공자의 방문을 크게 기뻐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온 정성을 다하였고 일부러 안요우지(安養寺) 저택을 신축해서는 시가(詩歌) 모임, 눈구경 잔치, 꽃구경 잔치를 열었다. 쿄우토(京都)에서 칸파쿠() 니죠우 하루요시(二条 晴良)를 초빙해서 성인식까지 치러주었다. 이때 요시아키()를 요시아키()로 개명하였다.


 하지만 요시아키는 환영해주는 잔치보다 요시카게의 무력(武力)을 원했다. 아사쿠라의 힘을 빌려 쿄우토(京都)에 올라가 쇼우군() ()을 잇고자 했던 것이다. 요시카게에게 있어서도 천하를 바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을 터였다. 이 모처럼의 찬스를 요시카게는 허사로 만들었다. 우유부단한 태도를 일관하여 요시아키의 실망을 사고 말은 것이다. 얄궂게도 이후 요시아키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의지하였다. 노부나가는 이 기회를 잡자마자 요시아키를 내세워 쿄우토에 올라가 쇼우군의 명성을 빌려 실질적으로는 자신이 천하의 패자(覇者)가 된 것이다.


 요시카게는 무장()이라기 보다는 문화인의 색체가 강했다.

 그는 1548년에 16살의 나이로 아사쿠라 가문의 당주가 되었지만 군정(軍政)도 내정(內政)도 숙부인 노리카게()에게 맡겼다. 노리카게는 불문에 들어가 소우테키(宗滴)라는 호()를 칭하게 되는데 그는 일대의 걸물이었다. 아사쿠라 가문의 기둥이 되어 활약하며 주변에 무명(武名)을 떨쳤지만, 1555카가(加賀)의 잇코우잇키(一向一揆[각주:3])와의 싸움 도중 안타깝게도 병으로 전쟁터의 진영(陣營)에서 죽었다. 79살의 고령이었다고 한다. 아사쿠라 가문의 토대(土臺)가 무너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일대손실이었다.


 요시카게는 문약(文弱)으로 내달렸을 뿐만 아니라 여성관계도 화려했다. 첫 번째 부인은 일찌감치 죽었지만, 두 번째 부인은 코노에(近衛) 가문의 딸로 [미모가 견줄 이 없다(容色無雙)]는 절세의 미녀였다고 한다. 세번째 부인은 코사이쇼우노츠보네(小宰相局)라고 하며 두 딸을 낳았다.

 가장 요시카게의 마음을 빼앗았던 이가 네 번째 부인이었다. 사이토우 효우부쇼우유우(藤 兵部少輔)의 딸로, 코쇼우쇼우(小少)라고 불렸다. 미녀에다가 말까지 잘하였기에 요시카게는 그녀가 하자는 대로만 하였다고 한다. 아사쿠라 가문의 멸망은 그녀의 교언영색(巧言令色)이 원인이 되었다고 일컬어질 정도이다.


 요시아키를 쇼우군에 앉힌 노부나가는 요시아키의 이름으로 요시카게에게 상경하라는 친서를 보냈다. 요시카게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것은 노부나가에 대한 선전포고를 의미했다. 1570 4, 노부나가가 에치젠에 3만여의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들어갔다. 오우미(近江)에 가까운 전선기지인 테즈츠야마(手筒山)성(城)이 하루 만에 낙성되어 성병 1400이 죽었다. 계속해서 오다 군()은 츠루가(敦賀)카네가사키(崎)성(城)으로 몰려들었다. 다행히도 이때의 위기는 아자이 나가마사( 長政)의 도움으로 피할 수 있었다. 예전부터 동맹을 맺고 있던 아자이 군()이 노부나가의 배후를 공격, 그들을 놀라게 해서는 도망치게 한 것이다.


 이로부터 2개월 뒤, 아네가와(姉川) 천(川)에서 아사쿠라-아자이 연합군 2만과 오다-토쿠가와() 연합군 35천이 격전을 전개하여, 아사쿠라-아자이는 패했다. 이때 요시카게는 출진하지 않고 일족인 카게타케(景健)가 지휘하였다.


 3년 후인 1573년은 아사쿠라 가문에게 있어서 운명적인 해가 되었다.

 아자이 씨()오다니(小谷)성(城)이 오다 군의 맹공격을 받고 있다는 소식에 어쩔 수 없이 요시카게는 뭉기적대고 있던 엉덩이를 들어 출격한 것이다. 따르는 군세는 15천이었다. 그러나 왕년의 위세가 없었으며 전년도부터 오다 측의 모략의 손길이 뻗쳤기에 이미 마에바 요시츠구(前波 吉), 토미타 나가시게(富田 長繁) 등의 유력 무장이 오다 측으로 돌아선 상태였다. 거기에 막 출격할 때가 되어서 일족인 아사쿠라 카게아키라(朝倉 景鏡)가 병이 걸렸다는 이유로 출진을 거부하였으며, 미조에 나가야스(溝江 長逸)도 역시 출진을 거부한 것이다. 요시카게의 약화된 통제력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지경이었다.


 아사쿠라 군은 오다니 성()에 도착하긴 하였지만, 오다 측의 활발한 모략의 손길이 계속 뻗쳐와 가신들이 계속해서 배신하였다. 요시카게는 도착한 지 3일만에 에치젠으로 도망쳤다. 본거지인 이치죠우다니()도 결코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패주해 온 요시카게에게 병에 걸려 자리에 누워있을 터인 카게아키라가 출두한 것이다. 충성스런 표정으로 오오노(大野)로 옮기라고 진언했다. 요시카게가 오오노의 도우운(洞雲)사(寺)로 옮기자, 또다시 카게아키라에게서 도우운 사()는 제 거성 이누야마(犬山)()에서 떨어져 있으니, 로쿠보우(六坊)의 켄쇼우(賢松)()로 이동해 주십시오라는 연락이 왔다.


 카게아키라의 덫이었다.

 요시카게가 켄쇼우 사()로 옮기자, 카게아키라의 군사들이 몰려와 포위한 것이다.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요시카게는, “네놈들 부자(父子)의 생명은 필시 3년 안에 끊어질 것이다[각주:4]고 저주를 퍼붓고는 자해(自害)했다.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

1533년 에치젠(越前) 이치죠우다니()에서 태어나 16살에 가독(家督)을 이었다. 처음엔 노부카게(延景)’라 하였지만, 쇼우군() 요시테루(義輝)의 이름 글자를 하사 받아 요시카게(義景)’로 개명. 노신 아사쿠라 소우테키(朝倉 宗滴)가 죽은 후는 무위를 떨치지 못하고 아네가와(姉川) 전투에서 패배, 3년 후에 멸망하였다. 41.

  1. 참고로 이 책은 1978년에 발행된 책. [본문으로]
  2. 스에 타카후사(陶 隆房)의 모반으로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 義隆)와 함께 죽은,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장인이다. [본문으로]
  3. 혼간지(本願寺)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해당 지역 내 반란군. [본문으로]
  4. 카게아키라는 다음 년도 1574년에 잇코우잇키 군에 공격받아 전사. [본문으로]

기노시타 가쓰토시(木下 勝俊)

1649 6 15 병사 81

1569 ~ 1649.

호는 쵸우쇼우지[長嘯子=장소자] .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정실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의 조카. 와카사[若狹]의 오바마성[小浜城]성주였으나,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때 임무 방임죄로 영지(領地)를 잃었다. 후에 풍류의 세계에 살며 가인(歌人)으로 이름을 남겼다. 저서로는 가집(歌集) '쿄하쿠슈우[举白集]'











전도유망했던 와카사 소장(若狹少将)


 세키가하라 전투를 일컬어 '천하를 가르는 싸움'이라 하는데 이번에 등장하는 무장 키노시타 카츠토시에게 있어서도 인생이 갈려 버린 싸움이었다.

 카츠토시는 1569토요토미노 히데요시의 정실 키타노만도코로의 오빠인 키노시타 이에사다[木下 家定]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막내 동생이 히데토시[秀俊] - 후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각주:1]였다. 성인식을 치른 후 카츠토시는 1548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 히데요시를 따라 종군하였는데 아마 이것이 전장에 처음 출진일 것이다.

 

 1587년.

 큐우슈우[九州] 정벌에서도 1천의 병력을 이끌고 종군했다. 이 시기에 시키부다이후[式部大輔]에 임관.

 다음해 1588년 4 14 쥬우라쿠테이[聚樂亭]로 천황이 놀러 갔을 때, 카츠토시는 칸파쿠[関白] 히데요시의 우마차 바로 뒤를 따랐다. 그때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그 뜻을 적은 서약서에 [타츠노 지쥬우 토요토미노 카츠토시[龍野 侍從 豊臣 秀俊]]라 서명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당시 하리마[播磨] 타츠노 성주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590년.

 칸토우[関東], 오우슈우[奧州] 원정에서는 9백명을 동원. 이어서 1592년 조선 출병으로 인해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에 주둔하지만 조선에는 건너 가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다음해인 1591 1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의 뒤를 이어 와카사 오바마 6 2천석으로 이봉되었다. 이 때 동생인 토시후사[利房]도 같은 와카사 내의 타카하마 성[高浜城] 2만석으로 봉해졌기에 카츠토시, 토시후사 형제가 다이묘우[大名]로서 와카사를 지배하게 되었다.


 또한 1598 4월에는 종사위하(從四位下) 사코노에노곤쇼우쇼우[佐近衛権少将]에 임관되었기에, 와카사 쇼우쇼우[若狹少将]라 불렸다. 키타노만도코로의 조카, 거기에 타이코우[太閤] 히데요시[秀吉]의 친족이기에 카츠토시의 앞날은 그야말로 전도유망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2년 뒤에 운명의 세키가하라의 전투를 맞이한 것이다.


후시미(伏見)성의 수비에서 도망치다.


 1600 7월.

 세키가하라의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는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우에스기 씨[上杉氏]를 토벌하기 위해 칸토우로 내려가면서, 카츠토시에게 후시미 성의 수비를 명령하였기에 카츠토시는 후시미 성의 마츠노마루[丸]를 수비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를 타도하려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의 서군의 포위 공격이 시작되자 몰래 후시미성에서 빠져나온다. 공격군 중에는 동생인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참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츠토시가 후시미성의 수비를 방기(放棄)한 것은 이에야스의 명령을 배신하고 서군에 가담한 것을 의미했다. 결국 서군의 맹공을 받은 후시미성은 곧바로 낙성되었고 이에야스의 부하인 토리이 모토타다[鳥居 元忠] 등 농성군은 장열한 전사를 했다.


 9 15일 세키가하라 전투가 이에야스의 승리로 끝나자 전후 처리과정에서 임무 방임의 책임에 따라 와카사 오바마 62천석을 몰수당한다. 이때 카츠토시의 정실 모리 씨[森氏]는 카츠토시의 행동에 정이 떨어져 비구니가 됨과 동시에 카츠토시에게 시를 한 편 보내고는 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 한다. 참고로 이 정실 모리씨는 예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유력 부장이었던 모리 요시나리[森 可成]의 딸로,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 때 전사한 모리 란마루[森 蘭丸]의 여동생이었다.


낙동[洛東[각주:2]]의 은거자


 그 후 다이묘우에서 전락하여 낭인이 된 카츠토시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쿄우토 히가시야마[東山]의 코우다이 사[高台寺]에서 죽은 히데요시의 명복을 빌고 있던 키타노만도코로는 조카인 카츠토시를 불쌍히 여겨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1608 8월.

 카츠토시의 부친인 키노시타 이에사다가 쿄우토에서 죽자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에사다의 영지였던 빗츄우[備中] 아시모리[足守] 2 5천석을 카츠토시와 토시후사에게 나누어 물려받게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끼어든 키타노만도코로가 이에야스의 명령과는 다르게 이에사다의 영지를 카츠토시 한 명에게만 몰아주었기에 격노한 이에야스는 영지의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고 아시모리 2 5천석은 아사노 나가마사의 둘째 아들인 나가아키라[長晟]들에게 주어 버렸다. 이 직후 다시 다이묘우가 되지 못한 카츠토시는 머리를 깎고 '쵸우쇼우지[長嘯子]'라 호를 칭한 것 같다.


 1610 6월.

 카츠토시는 키타만도코로의 영지인 셋츠[摂津] 히라노 장[平野庄]을 관리하게 되었다. 이 관리직도 원래는 부친 이에사다가 하고 있던 것으로 영주(領主)인 키타노만도코로의 배려로 카츠토시가 이어받게 된 것이다.

 후에 히가시야마에 은거한 카츠토시는 와카[和歌]의 길을 정진하면서 근세 초기의 와카의 무대에 이름을 남겼다.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斎], 하야시 라잔[林 羅山]등의 문인이나, 상급귀족[堂上=도우죠우], 하급귀족[地下=지게]의 사람들과 넓은 교우관계를 맺었다.


 1649년 6월 15 쿄우토 서쪽의 오오하라노[大原野]에서 81세로 죽었다. 묘는 숙모인 키타만도코로가 잠든 코우다이 사에 만들어졌다.

  1. 킨고 츄우나곤(金吾中納言). 즉 금오중납언. [본문으로]
  2. 쿄우토(京都)의 동쪽을 이름 [본문으로]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

1585 4 16 병사 51

1535 ~ 1585.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겼고 각지에 종군하며 공을 세워 오우미[近江] 사와야마[佐和山], 이어서 와카사[若狹]를 하사 받았다. 혼노우지의 변[本能寺の変]이 일어나자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 합류하여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쳤으며 키요스 회의[淸州会議]도 출석. 시즈가타케 전투[岳の戦い]에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와 싸웠다.









노부나가의 사위가 된 부자(父子)


 니와 나가히데가 오다 노부나가의 사위라는 것은 이외로 알려져 있지 않다.
 
나가히데는 노부나가보다 1년 늦은 1535년에 태어났으며 아명은 만치요[万千代]였다. 15세에 노부나가를 가까이서 모시며, 1552년 키요스[淸州] 성주인 오다 히코고로우[織田 彦五郞]의 가재(家宰[각주:1])인 사카이 다이젠[坂井 大膳]을 물리친 카야츠 전투[
萱津の戦い] 그의 첫 데뷔전이라 한다.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桶狹間の戦い]에도 종군했다고 한다.


 1563년.

 노부나가의 양녀(부친은 노부나가의 배다른 형인 노부히로[信広])를 처로 맞이하는데 이것은 나가히데의 능력을 노부나가가 인정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주군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인다는 것은 가신에게 있어 파격의 대우임과 동시에 일문(一門)에 준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 후 노부나가의 전선 확대와 더불어 각지에 종군했으며, 1571년에는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 공략의 중요 거점이었던 오우미의 사와야마 성주가 되어 오우미 지배에 관여했다.


 1581 2월.

 황거의 동쪽 마장에서 행해진 열병식[각주:2]에서는 오다 가신단 중 최초로 등장. 셋츠[摂津], 와카사[若狹]의 무사들을 이끌고 행진하는 명예가 주어졌다. 이것은 바로 전 해인 1580노부나가의 딸과 나가히데의 아들 나가시게[長重]의 결혼이 성립된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보이며, 나가히데가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의 추방 후 오다 정권에서 가장 유력한 무장 중에 한 명인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예일 것이다. 부자 2대에 걸쳐 노부나가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한 예는 니와 씨[丹羽氏]말고는 없다.


 혼노우지의 변 직후에는 하시바 히데요시들과 역신(逆臣)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하였고, 오다 가문의 당주 결정을 둘러싼 소위 키요스 회의에서는 히데요시를 도와 산포우시[三法師-노부나가의 큰아들인 노부타다[信忠]의 아들]를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정했다. 그리고 히데요시, 나가히데, 시바타 카츠이에,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의 숙노(宿老) 4명이 앞으로의 일처리를 행하기로 했다.


 1583 시바타 카츠이에의 멸망 후에는 그의 거성이었던 키타노쇼[北ノ庄]성이 주어져 에치젠[越前], 와카사[若狹], 카가[加賀]의 남부(南部)를 손에 넣어 백 만여석을 소유했다.


망령 퇴치의 기도 의뢰


 1585 4월.

 나가히데는 키타노쇼 성[北ノ庄城]에서 병상에 누었다. 같은 달 4 쿄우토[京都] 요시다 신사[吉田神社]의 신관[神主] 요시다 카네미[吉田 兼見]에게 나가히데의 가신 사타케 데와노카미[佐竹 出羽守]가 편지를 보내왔다. 용건은 나가히데가 병을 앓고 있으며 특히 요 근래는 더욱 심해졌으니 나을 수 있도록 신에게 빌어달라는 의뢰였다.

 편지에는 발병의 원인으로 시바타 카츠이에의 망령이 내린 저주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적혀있었다. 카츠이에는 나가히데와는 동급의 무장이었지만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나가히데는 카츠이에의 권유를 거부하고서 히데요시의 편을 들었기에 당시 이러한 소문이 그럴듯하게 퍼져 쑤군들 대었던 것 같다.


 4 9일.

 키이[紀伊] 사이카[雑賀]를 공격하는 도중에 나가히데가 병상에 누웠다는 소식을 들은 히데요시는 곧바로 당대의 명의(名醫)인 타케다 죠우카[竹田 定可]에게 키타노쇼성으로 가서 나가히데를 치료하도록 의뢰했다. 그러나 죠우카는 곧바로 가지 않은 듯 히데요시는 12일에 다시 가도록 요청할 정도였다.

 13일에 히데요시는 나가히데에게 편지를 보내 위로를 함과 동시에 쿄우토[京都]로 와서 많은 의사들에게 치료를 받도록 권했다.


 하지만 다음 날인 14일.

 나가히데는 병이 더 심해진 것을 깨닫자 세자인 나가시게(14)를 시작으로 친척들과 중신을 머리맡에 불러 어린 나이의 나가시게를 잘 보좌하여 나라를 지킬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같은 날. 가신인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에게 명하여 히데요시에게 보내는 유서를 쓰게 하였다. 유서에는 평소 히데요시에게 은혜를 받은 것을 감사히 여기며, 3개국이나 되는 영지(領地)를 받았으면서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이 죄송하다고 말한 후 후계에 대한 것은 히데요시의 뜻에 맡기겠다고 했다. 이 서장에 [히데요시님(秀吉)]이라 쓰인 것이 인상적이다. 죽음을 앞둔 나가히데로써는 천하인이 되고 있는 히데요시에게 니와 가[丹羽家]의 앞 날을 맡긴 것이다.


죽음을 둘러싼 기괴한 소문


 4 16일.

 나가히데는 51세의 나이로 생의 막을 내리는데 나라[奈良]의 승려 타몬인 에이슌[多聞院 英俊]의 일기에 따르면 나가히데는 병사하는 것이 분하다고 한탄하면서 14일에 할복하여 결국 16일에 죽었다고 쓰고 있다.

 또한 일설에 의하면, 나가히데는 평소부터 담석을 앓고 있어서 고통을 참지 못하고 할복했다고도 전해지는등 기괴한 소문들이 떠돌았다.


 나가히데가 죽은 뒤 나가히데의 세력을 세자인 나가시게가 이어받았지만 영지는 천하인 히데요시에게 차츰 깎여,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 직전에는 단지 카가[加賀]에 12만 여석을 지배하는 하는 정도로 몰락했다. 또한 나츠카 마사이에, 미조구치 히데카츠[溝口 秀勝] 등 유능한 가신들도 곧바로 히데요시 자신의 가신단에 편입시키는 등 니와 씨의 명운은 나가히데의 생각과는 반대로 히데요시에게 유린된 감이 있다.

  1. 그 가문의 재상 [본문으로]
  2. 京都御馬揃え [본문으로]

삿사 나리마사( 成政)

1588년 윤 5 14 할복 53.

1536 ~ 1588.

오와리(尾張) 히라(比良) 성주.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검은 화살막이 부대 - 쿠로호로(黑母衣)()' 필두(筆頭)에 발탁되었다. 주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등과 호쿠리쿠(北陸) 방면을 담당하였다.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항복하여 히고(肥後) 국주()에 임명받았으나, 실정(政)의 책임을 지고 할복.








히데요시(秀吉), 토시이에(利家)와의 관계


 오다 노부나가 시대.

 용맹으로 유명했던 삿사 나리마사는 라이벌 마에다 토시이에와 거의 같은 스피드로 출세하여 토시이에가 오다 군단의 엘리트들이 모인 '붉은 화살막이 부대 - 아카호로(赤母衣)()'에 발탁되었을 때 나리마사는 쿠로호로중 필두가 되었다.

 1576년에는 토시이에와 함께 [부츄우(府中)삼인중[각주:1]]에 임명되었으며, 1581년에는 엣츄우(越中) 60만석을 받아 토야마(富山) 성주가 되었다.


 나리마사의 비운은 1582 6 노부나가의 죽음부터 시작되었다. 혹은 다음 천하인이 되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를 신출내기 출세자로 깔보는 감정이 나리마사의 말년 6년간의 운명을 결정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다음 해인 1583년.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정하는 시즈가타케() 전투에서토야마성에서 움직이는 일 없이 형세를 관망하고 있던 중에 시바타 카츠이에가 히데요시에게 패했다. 할 수 없이 히에요시에게 둘째 딸을 인질로 받치고 항복. 히데요시도 이것을 받아들여 나리마사는 지금까지처럼 엣츄우 일국을 안도받았다.


 그러나 다음해인 1584년.

 코마키(小牧)-나가쿠테(長久手) 전투에서 히데요시와 대치하며 유리하게 싸움을 전개하고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의 요청에 응하여 8천의 병력을 이끌고 마에다 토시이에의 영내(領內)노토(能登) 하쿠이(羽咋)의 스에모리(末森)성을 기습하였다. 토시이에의 필사적인 반격에 패퇴하면서도 쿠리카라(俱利加羅) 고개에 병사를 배치하여 나리마사가 끈질기게 분전하고 있던 와중에 중앙에서는 히데요시와 이에야스의 정전 교섭이 성립되려 하고 있었다.

 고립되는 것을 우려한 나리마사는 이에야스에게 싸움을 포기하지 말 것을 설득하기 위해서 엄동의 산길에 악전고투하면서도 돌파(‘サラサラ라 일컬어지고 있다). 하마마츠(浜松)의 이에야스를 만났지만 [나는 히데요시와 원래부터 원한이 없다]며 거절당해 허무하게 귀국한다.


키타노(北野) 대다회(大茶會) 중지


 토시이에의 원군을 요청 받은 히데요시는 호쿠리쿠에 칸파쿠()의 위광을 과시하기 위하여 다음 해인 1585 8만의 병사를 이끌고 보무당당하게 카가(加賀)로 진입했다. 히데요시-토시이에의 대군을 앞에 두고는 용맹을 떨친 나리마사도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머리를 밀고 중이 된 나리마사는 니이카와(新川)() 20만석으로 영지가 줄었지만 살아 남았다.


 그래도 1587년. 나리마사에게 마지막 기회가 주어진다. 큐우슈우(九州)평정을 끝낸 히데요시는 종군했던 나리마사에게 히고(肥後) 일국(一国)을 하사하였다. 그러면서 히데요시는 히고를 지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설명하면서 앞으로 3년간은 토지조사를 행하지 말 것, 각종 토목공사를 일으켜 히고의 영민들을 힘들게 하지 말 것 등, 거기에 농민 반란을 일으키게 하지 말 것 등 5개조의 주의서를 나리마사에게 주었다[각주:2].


 엣츄우에서는 선정을 펼친 나리마사였지만 코쿠진([각주:3]) 영주의 세력이 강한 히고는 지금까지 나리마사가 겪어 온 것과는 달랐다. 거기에 나리마사에게는 히고로 왔을 때 영지 목록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곧바로 제출하라고 명령을 하자, 일부의 코쿠진 영주가 들고 일어났고, 진압을 서두른 나리마사가 3천의 병력을 보내자 반란은 들불처럼 번졌다.


 이때 히데요시는 쿄우토(京都)의 키타노에서 큰 다회(茶會)를 열고 있었는데, 둘째날이 되어 나리마사가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당초 10일간 열릴 예정인 다회를 중지하였다. 차 도구는 무엇이든 좋으며 빈부나 귀천을 묻지 않고 누구나 참가하라는 대 이벤트를 중지할 수 밖에 없게 된 히데요시의 분노는 컸다.


비운의 최후와 검은 백합 전설.


 새해가 된 1588년.

 히데요시가 파견한 원군으로 반란은 진정되기 시작했으나 히데요시에게 실정의 책임을 추궁받은 나리마사는 이유 설명을 위하여 오오사카(大坂)의 히데요시를 방문하려 했으나,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아마가사키(尼崎)의 호우온(法園)()에 유폐되어, 5 14 할복하여 죽었다.

 배를 열십자로 가르고 장기를 손으로 끄집어 내었다고 한다[각주:4].

 53세였다고 한다.


 강직했지만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 했던 나리마사의 비운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러가지 [검은 백합 전설]이 전해 내려 오고 있다.
 그 중 하나로 히데요시의 분노를 산 나리마사는 아마가사키에서 처분을 기다리고 있던 중 하쿠산(白山) 산에서 핀다는 검은 백합을 하야비캬쿠(早飛脚[각주:5])로 받아서, 좋게 말해 달라며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각주:6])에게 보냈다. 이 검은 백합이 맘에 든 키타만도코로는 곧바로 다회를 열어, 초대했던 요도도노(淀殿[각주:7])를 비롯한 측실들에게 은쟁반에 담아 이 귀중하고 신기한 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몇 일 지난 후.
 
꽃이 난 곳을 알아낸 요도도노는 대량의 검은 백합을 가져와 아무 곳에나 심은 뒤 자신의 다회에 초대한 키타노만도코로에게 그렇게 진귀한 것도 아니라는 듯이 여러 사람 앞에서 창피를 주었다.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키타만도코로는 나리마사에게 냉담해져 히데요시에게 나리마사의 목숨을 구해 달라는 탄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예전 나리마사가 토야마 성주로 있을 때 죄가 없는데도 딴 남자와 놀아났다는 누명으로 죽인 애첩 사유리(小百合[각주:8]) 히메()의 저주가 추가된 것도 있.
  1. 또 한 명은 '후와 미츠하루(不破光治)'. [본문으로]
  2. 오제 호안(小瀬 甫庵)의 [보암태합기(甫庵太閤記)]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동시기에 히데요시는 나리마사를 '하시바 히고지쥬우님(羽柴肥後侍従との)'이라고 썼지만, 저 5개조의 편지에는 '삿사 쿠라노스케(佐々内蔵助)'라 적혀있기에 실존성이 의심간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3. 그 지방의 호족. [본문으로]
  4. 그 외에 오오사카 쪽을 노려보다 이빨을 너무 앙물어 서너개의 이빨이 부러졌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5. 지금으로 말하면 택배 같은 것. [본문으로]
  6. 히데요시의 정실.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본문으로]
  7.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秀頼)를 낳았다. 이 일로 히데요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되어 정실인 키타만도코로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작은 백합'이라는 의미. [본문으로]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

1573 8 20 할복 41

1533년 ~ 1573년.
아사쿠라씨 제 5대 가주. 에치젠(越前), 카가(加賀), 노토(能登)의 잇코우잇키(一向一揆)와 싸웠다. 후에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과 대립.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와 손을 잡고 아네가와(姉川) 천에서 싸웠으나 패배. 본거지 이치죠우다니(一乗谷)를 노부나가에게 공격 받아, 친족인 카게아키라(景鏡)에게 배반당해 할복하였다.









이치죠우다니의 망명객


 1533년.

 에치젠의 센고쿠 다이묘우 아사쿠라 타카카게(朝倉 孝景)의 장남으로 태어난 요시카게는 1573 41세의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명문가 아사쿠라에게 몰락의 징조가 나타난 것은 난을 피해 에치젠으로 도망 온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가 이치죠우다니를 떠나 오다 노부나가의 기후(岐阜)로 향한 1568 7월로 볼 수 있다. 이 때 요시카게는 36세였다.


 오히려 요시카게 자신은 가장 행복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전년인 1567 11월에 에치젠 츠루가(敦賀)에서 이치죠우다니로 온 아시카가 요시아키(이 때는 아직 義秋)가 아사쿠라 저택으로의 비공식적인 방문이 성사 되었으며, 새해가 밝은 1568 요시아키의 추천으로 요시카게를 낳은 모친의 위작이 이위(二位)에 서임되었다. 또한 봄에는 경치가 뛰어난 객관(客館)인 난요우(南陽)()로 요시아키를 초대하여 화려한 연회를 열어서는 화려하게 핀 벗나무를 주제로 요시카게는 참석한 귀족(公家)들과 함께 시와 노래를 즐겼다. 이어 아사쿠라 저택에서 요시아키(義秋)는 성년식을 치르고 [義昭]로 개명했다. 그리고 5월에는 공식적인 방문이 실현. 요시카게는 최고의 명예를 만끽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시아키는 요시카게와는 달리 굉장히 정치적이며 야심가이기도 했다. 풍류를 즐기기 위하여 일부러 에치젠까지 내려올 리가 없었으며 아사쿠라 가()의 무력 지원을 받아서 쿄우()로 올라가 쇼우군() 정치를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8개월 정도 머물고 있는 동안, 요시카게에게 움직일 마음과 준비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요시아키는 결국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노력으로 새로운 지원자가 되어 준 노부나가에게로 향했다.


노부나가 포위망의 한 축을 담당하다.


 1568년.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상경을 이루고 천하를 향한 발판을 마련했다. 반대로 요시카게는 요시아키를 놓쳐 귀중한 기회를 잃게 되었다. 오히려 그 당시 요시카게는 세력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일족끼리의 다툼이 방해를 하였다. 오오노(大野)()의 지배를 맡고 있는 아사쿠라 카게아키라(朝倉 景鏡)와 츠루가(敦賀) 군(郡)의 지배를 맡고 있는 아사쿠라 카게츠네(朝倉 景恒)와의 다툼이 끊이질 않았으며, 이 둘의 중재에 요시카게는 고생하고 있었다. 더구나 요시아키가 떠나기 직전, 요시카게의 적자 쿠마키미(阿君)가 독살당하는 괴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의 진상은 확실치 않지만 요시아키를 둘러쌓고 요시카게와 사이가 틀어져 버린 아케치 미츠히데 쪽의 책모는 아닐까 하는 말이 있다.


 다음 해인 1569년.

 쇼우군 요시아키의 어소(御所)를 만들기 위해 노부나가는 여러 나라의 다이묘우들에게 쿄우로 와서 건설에 참가하기를 원했다. 요시카게에게도 상경의 재촉이 있었으나 회의 결과 무시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노부나가와의 적대 관계가 명확히 되어 1570년에 아네가와 전투라는 결과가 되었다.

 아사쿠라 요시카게 군() 1 5천과 아자이 나가마사 군() 5 ~ 6천이 아네가와를 사이에 끼고 오다-토쿠가와(德川) 연합군 3 4천과 대치하였다. 일반적으로는 격전 끝에 아사쿠라-아자이측이 대패배를 당했다는 듯이 알려져 있지만 양 측 다 많은 전사자를 내며 물러났으며 나가마사도 오다니(小谷) 성을 지킬 수 있었으니 우선은 비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요시카게보다도 노부나가가 위기에 빠진다.

 권력을 나누어 주지 않는 노부나가가 원망스러운 쇼우군 요시아키를 중심으로 아사쿠라, 아자이, 이시야마 혼간지(石山 本願寺), 잇코우잇키(一向一揆), 히에이잔(比叡山), 마츠나가(松永), 미요시(三好) 등의 세력과 카이(甲斐)타케다 신겐(武田 信玄)까지도 참가하는 강대한 노부나가 포위망이 형성된 것이다. 요시아키의 생각을 받들어 요시카게도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배반당한 요시카게의 최후


 하지만 노부나가군과 몇 번이나 싸우면서도 요시카게는 한 번만 더 밀면 되는 곳에서 철군하는 등 승기를 놓쳤다. 한 편 각개 격파로 포위망을 뚫고 위기를 탈출한 노부나가는 1573오우미(近江)로 쳐들어 온다. 오다니성 구원을 위하여 달려온 요시카게였지만 이미 노부나가군의 신속한 공격으로 두 개의 지성(支城)이 함락되어 오다니성도 벌거벗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을 알고 구원을 중지하고 퇴각하였으나 추격해 온 노부나가 군과 오우미 토네사카(刀禰坂)에서 조우하여 요시카게군은 대패하였다.


  5 ~ 6기(騎)와 함께 이치죠우다니로 도망 온 요시카게는 사촌인 요시아키라의 의견을 받아들여 에치젠 오오노로 도망가 토우운(洞雲)()로 들어갔다. 하지만 여기서도 기대하고 있던 헤이센(平泉)() 중도(衆徒)의 지원을 얻지 못하였고, 더구나 카게아키라의 꼬임으로 로쿠보우켄쇼우(六坊賢松)()로 거처를 옮긴 상태에서 배반한 카게아키라의 군세에 포위되었다. 더 이상 어쩔 수 없음을 알게 된 요시카게는 8 20일 오전 10시경,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쓰러진 40년 인생.
 나도 없고 남도 없으니 모든 것이 허무하다.

 七転八倒 四十年中
 無他無自 四大本空

 이라는 사세구를벽에 피로 쓴 후,배를 열십자로 그어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