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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죠우우지마사'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04.11.18 우에스기 카게카츠 - 도리를 지킨 의리의 사나이 4
  2. 2004.11.16 아시나 모리우지 3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 景勝]

1623 3 20 병사(病死) 69

1555 ~ 1623.

나가오 마사카게(長尾 政景)의 차남. 외숙부인 켄신(謙信)의 양자가 되어 가독을 상속.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의 오대로(五大老)가 된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서군에 속해 토우호쿠[東北]에서 다테 가문[伊達家], 모가미 가문[最上家]과 싸우지만 서군의 패배로 항복. 아이즈(会津)에서 전봉(転封)되어 요네자와 번[米沢藩]의 번조(藩祖)가 되었다.










후계자 다툼에서 승리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은 죽을 때까지 독신이었기 때문에 친자식이 없었지만 양자는 두 명이 있었다. 한 명은 누나가 시집간 동족의 우에다[上田] 사카토 성[坂戶城]의 성주 나가오 마사카게[長尾 政景]의 둘째 아들 카게카츠[景勝] 1559 카게카츠의 나이 5살 때 양자로 삼았다.

 또 한 명은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 7남 우지히데[氏秀] 처음엔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에게 양자로 보내졌으나 호우죠우와 타케다의 동맹이 끊어지면서 본가로 돌아온 것을 다시 우에스기와 동맹을 맺을 때 다시 인질로 온 것을 불쌍히 여긴 켄신이 자신의 전 이름[카게토라(景虎)]를 주어 양자로 삼아 카게카츠의 여동생과 결혼시켰다.


 켄신은 카게카츠를 두번째 성곽[二の丸]에 살게 하며 '御中城様[고츄우죠우사마]'라 부르게 하고 군사를 이끌게 했기 에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확실하게 정하지 않고 급하게 죽었기 때문에 두 사람간에 후계자 다툼이 일어났다.


 무력대결이 되면 형으로 호우죠우 우지마사[北条 氏政], 매제인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를 빽으로 두고 있는 카게토라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고 여겨졌으나, 카게카츠는 재빨리 카츠요리와 불가침조약을 맺고 오다와라[小田原]의 원군이 미쿠니토우게 언덕[三国峠]을 넘어 도착하기 전에 단기 결전에 임해 카게토라를 사메가오 성[鮫ヶ尾城]으로 몰아 자살시키고 승리했다.


토요토미[豊臣] 은고(恩顧)의 다이묘우[大名]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치고, 남보다 한 발 앞서 주군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원수를 갚은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 천하 평정을 목표로 에치젠[越前]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에게 공격을 시도하기에 앞서 카게카츠와 동맹을 맺으려 했다. 이때 저울질 하지 않고 곧바로 응하여 히데요시의 신뢰를 얻은 카게카츠는[각주:1] 1598년 1월 10 에치고[越後] 91만석에서 아이즈 120만석으로 이봉(移封)되었고,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揮元],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와 함께 오대로(五大老)가 되었다. 히데요시는 그 해 3 15다이고 사[醍醐寺]에서 꽃구경(花見)를 개최한 뒤에 병으로 쓰러져 8 18일에 후시미 성[伏見]에서 죽었다.


 다음 해(1599) 3 3일에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까지 병으로 죽자 이에야스[家康]의 전횡이 심해져 갔다. 카게카츠는 새로운 영토를 정비한다는 이유로 아이즈[会津]로 귀국해서는 토요토미 가문의 장래를 걱정하며 새로이 성을 쌓고 군비를 증강해서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임전태세를 갖추었다.


아이즈[会津]공격에 대응하다.


 카게카츠는 에치고 호리 히데하루[堀 秀治]의 고소로 인한 이에야스의 힐문과 상경(上京) 요구를 뻣뻣한 태도로 거절했기 때문에 화가 난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공격을 결의하여 6 18일 후시미 성에서 출진한다. 하지만 시모츠케(下野) 오야마[小山]까지 진군한 7 24일에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거병하여 미노[美濃] 오오카키[大垣]로 출진했다는 급보가 도착했으므로, 이에야스는 둘째 아들인 유우키 히데야스[結城 秀康]를 우에스기의 대비책으로 우츠노미야 성[宇都宮城]에 남겨 놓고 재빨리 에도[江戶]로 돌아갔다.[각주:2] 남겨진 유우키 히데야스는 키누가와 강[鬼怒川]을 사이에 두고 우에스기 군()과 대치하며 도발해 왔으나 카게카츠는
 "
나이후도노[內府殿[각주:3]]가 공격해 왔기에 응한 거다. 되돌아 갔다면 이 쪽도 군을 물린다. 우에스기는 빈집털이는 하지 않는다"
 고 말하며 돌아 갔다고는 하지만
실은 배후에 있던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의 진공(進攻)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가명(家名)을 남기다.


 이런 시원시원한 카게카츠의 태도가 맘에 든 히데야스[秀康]는 전후 처리의 자리에서 중신들과 함께 카게카츠를 변호하여,
 
"
카게카츠의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대한 모반은 확실치 않으며, 미츠나리와 미리 짜고 우리에게 공격한 것도 아닙니다. 우에스기[上杉]는 후지와라[藤原]의 분가로 카마쿠라 시대[鎌倉時代] 이래의 명문. 카게카츠는 타이코우[太閤][각주:4]를 섬긴 이래로 사리에 맞는 행동을 해 온 정직하고 의리가 두터운 사람입니다. 징벌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가명(家名)만은 존속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 조명()에 힘써 이에야스[家康] 설득시켰다. 이에야스는 할 수 없이 아이즈[会津] 120만석에서 데와[出羽] 요네자와[米沢] 30만석으로 감봉(滅封)시키는 것으로 카게카츠를 용서했다.


 1603 2월 막부에게 에도[江戸]의 소토사쿠라다[外桜田]에 저택을 하사 받은 카게카츠는 이곳을 요네자와 번저[米沢藩邸[각주:5]]로 삼았다. 카게카츠 나이 49세에 막번 체제(幕藩 體制)하에서 초대 번주(藩主)가 되었다. 그 후 오오사카 공성전 겨울의 진[大坂の陣 - 冬の陣]과 여름의 진[夏の陣]에도 참전하였고, 평화로운 시대가 된 에도 시대[江戸時代]에서 20년을 살다 이에야스의 죽은 지 7년 후인 1623년 3월 20 요네자와성에서 병으로 죽었다. 향년 69세였다.

  1. 사실 응하기만 했을 뿐 히데요시를 도우지는 못했다. 카게카츠는 사방의 적들과 시바타 씨[新発田氏]의 반란으로 인해 외침을 할 능력이 없었다. 때문에 종전 후 히데요시는 카게카츠에게 왜 참전하지 않았냐며 따지는 편지를 보냈다. [본문으로]
  2. 사실 처음엔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가 대비책으로 남겨졌으나, 히데타다가 세키가하라로 이동명령을 받자 그제서야 남겨진 것이 유우키 히데야스. [본문으로]
  3. 이에야스의 관도명, 즉 이에야스를 지칭. [본문으로]
  4. 타이코우(태합)은 관백[関白]에서 물러난 사람을 지칭. 즉 여기서는 히데요시를 말함. [본문으로]
  5. 번저는 각 번(藩)이 에도(江戶)에 세워 둔 연락소 겸 참근교대 시의 숙박소. 지금의 대사관이나 영사관이라 보면 될 듯. [본문으로]

아시나 모리우지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4. 11. 16. 09:33 Posted by 발해지랑

아시나 모리우지(盧名 盛氏)

1580 6 17 병사(病死) 60.

(그림은 KOEI의 천하창세)


1521 ~ 1580년.

므츠(陸奧)() 아이즈(会津) 쿠로카와(黒川)성주. 아시나(盧名) 16대 당주(当主).

다테(伊達), 유우키(結城)씨와 혼인관계를 맺고 주변의 호족과 무장을 복속시켜 아시나씨 전성기를 이끌었다. 한 번 은퇴하였지만 후계자인 적자 모리오키(盛興)가 어린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복귀. 18대의 모리타카(盛隆)를 후견했다.


카마쿠라(鎌倉)시대 부터의 명가



 아시나(盧名)씨는 카마쿠라 막부에게 아이즈(会津) 슈고(守護)에 임명 받은 칸토우(関東) 미우라 씨(三浦氏)의 후손이다. 그 사이에 남북조 동란 이후 하극상(下剋上)의 시대를 거쳐 격동의 시대를 헤쳐 나온 일찍부터 센고쿠 다이묘우(戦囯 大名)이기도 하다. 특히 칸토우(関東), 토우호쿠(東北)는 카마쿠라 막부 붕괴의 영향을 받아 센고쿠(戦囯)의 모습을 띠는 것이 빨랐다. 그러한 곳에서 200여 년을 살아 남은 것이다.


 선조 이래 쿠로카와(黒川)를 거점으로 하여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는데 모리타카(盛高), 모리시게(盛滋)의 부자간의 싸움이 일어나 한 때 내란상태에 빠졌으나 모리시게의 동새 모리키요(盛舜) 1521년 가독을 이은 후부터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이 짧은 시간의 평화가 모리키요의 아들 모리우지(盛氏)의 커다란 비약을 가능하게 했을 지도 모르겠다.


모리우지 역사의 무대에 등장


 모리우지 자신이 영토 확장의 욕심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지금에 와서는 알 수가 없지만 아이즈(会津)슈고(守護)라는 직책에 앉아 있는 이상 주변 영토 다툼에 관여할 수 밖에 없었다. 슈고로써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권익이라는 것이 있다. 1543(천문 11) 원래는 가신의 위치에 있던 야마노우치 키요미치(山內 舜通)에치고(越後)의 나가오 타메카게(長尾 為景)와 손잡고 아시나의 군세를 궁지에 몰아 넣었다. 이 당시 충분히 힘을 기르고 있던 모리우지가 스스로 병사를 이끌고 이들을 철저히 응징했다. 에치고가 배후에 있다는 것이 아이즈의 아시나씨에 있어서는 바다로 통하는 길이 막힐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모리우지는 전형적인 센고쿠 다이묘우(戦囯 大名)의 행동을 취해 역대 아시나씨의 지배 영역을 훨씬 넘어서 영토를 넓히고, 외척인 시라카와(白川) 유우키(結城), 스카가와(須賀川)의 니카이도우(二階堂), 니혼마츠(二本松)의 하타케야마(畠山), 타무라군(田村郡)의 타무라(田村)씨까지도 신종 시켰다고 한다. 이 시기의 지배영역은 아시나씨의 긴 역사 속에서도 최대의 규모에 달했다고 한다.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이 죽은 후, 에치고의 [오타테(御館)의 난[각주:1]]의 틈을 타서, 오가와(小川)의 오다기리(小田切)씨 영토 주변을 탈취, 영토를 확대하였다. 이렇게 지배영역의 확대에 성공한 모리우지는 북쪽으로는 다테(伊達)씨와, 남쪽으로는 사타케(佐竹)씨와의 접촉이 늘어만 갔다. 특히 사타케씨와의 관계는 잠시도 방심할 수 없을 정도로 되어 간다.


생각처럼 되어가지 않는 말년.


 1568년 즈음 모리우지는 [止止斎=시시사이]라는 호를 칭한다. 쿠로카와성을 세자인 모리오키(盛興)에게 물려주고 새로이 은거할 성으로 만든 오오누마 군(大沼)에 있는 이와사키(岩﨑)성에 은거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모리오키는 병에 자주 걸리는 몸인 듯, 그 후에도 모리우지는 이와사키성에 있으면서 모리오키의 정무(政務)를 도와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1574년. 결국 모리오키는 부친보다 먼저 병에 쓰러진다. 향년 26세라 추정된다.


 모리우지는 서둘러 모리오키의 부인(다테 하루무네(伊達 晴宗)의 딸)을 양녀로 삼아, 니카이도우(二階堂)씨의 모리타카(盛隆)를 사위로써 받아 들이기로 한다. 모리타카는 니카이도우씨의 인질로써 모리우지가 어렸을 때부터 교육시켜 온 인물로써 우선 안심할 수 있기는 했지만 모리우지는 이와사키 성을 나와 쿠로카와 성으로 돌아와 어린 모리타카의 정무(政務)를 감독하게 되었다. 그렇게 함과 동시에 정무의 방침도 그 때까지와는 약간 바뀌었다. 그 때까지는 니카이도우씨와 시라카와(白川)의 유우키(結城)씨와 협력해서 북상하는 사타케씨와 대결하는 자세를 견지해 왔지만 1577년 즈음부터는 양 씨를 설득해서 사타케씨와의 협조노선을 펴게 된다.


 이것에는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사후에 최대의 적이 없어진 호우죠우 우지마사(北条 氏政)가 칸토우(関東) 통일을 목표로 활발한 군사 행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

 또 하나는 같은 해 겐푸쿠(元服[각주:2])를 한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가 차츰 오슈우(奧州) 남반부 제패의 야망을 나타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히 다테-타무라(田村) 연합군의 위협에 대해서는 아시나, 사타케를 중심으로 한 니카이도우, 유우키, 이시카와(石川), 이와키(岩城)의 결속을 급속히 모으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배치를 끝낸 1580년 6월 17일. 아시나 모리우지는 쿠로카와 성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향년은 60세라 전해진다.


 물론 모리우지의 뒤를 이은 모리타카는 모리우지의 정책을 계승했다고 한다. 모리우지의 치세기(治世期)에 아시나씨의 지배영역이 최대가 되었고 지배체제도 또한 굳건해 진 것은 후계자들이 계속해서 [止止斎]라는 인감을 사용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1. 우에스기 켄신 후계자 싸움. 두 양자인 친족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와 호우죠우(北条)씨에서 온 우에스기 카게토라(上杉 景虎) 사이의 내란. [본문으로]
  2. 무장이 성인식을 치루는 것.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