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6년 12월 30일 병사(病死) 81세.
1559년 ~ 1638년.
하치스카 마사카츠[蜂須賀 正勝]의 적남(嫡男). 키노시타 토우키치로우[木下 藤吉郎]를 섬기며 아네가와 전투[姉川の戦い]에서 데뷔전. 시코쿠[四国] 공략의 전공(戰功)으로 아와[阿波] 일국(一国)을 하사 받았다. 조선 침략 시에는 위기에 빠진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를 구출하는 활약을 하였고 은거 후에도 적자 요시시게[至鎮]를 보좌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과 이에마사
1600년 9월.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토요토미 계[豊臣系] 무공파(武功派) 다이묘우[大名]의 유력 무장으로 여겨지던 하치스카 이에마사는 - 아직 14살인 적자 요시시게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동군에 종군시키는 한편 자신은 영지를 히데요리에게 반환하고 아와[阿波]를 나와서 은거. 머리를 깎고 '호우안[蓬庵]'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코우야 산[高野山]에 올랐다 1.
이것이 효과를 발휘해 아와[阿波] 일국은 요시시게에게 새로이 주어졌다. 2
이에마사는 아와[阿波]로 돌아와서 카츠우라 군[勝浦郡] 나카다 촌[中田村]의 은거소(현 코마츠시마 시[小松島市])에서 여생을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센고쿠(戦国).
1605년 아와 군[阿波郡] 이치바 쵸우[市場町]에 호우안의 서명으로 마을 법률을 반포하는 등, 요시시게의 뒤에서 번(藩)의 정치를 보좌하는 한편 쇼우군 토쿠가와 이에야스, 히데타다[秀忠]나 이이 가문[井伊家] 등 -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의 중신(重臣)과 연락을 자주 하여 하치스카 가문[蜂須賀家]과 토쿠가와 막부(幕府)와의 파이프를 강고히 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614년 8월.
은거소에서 2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에게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히데요시의 목상(木像)을 받든 호우코쿠 신사[豊国神社]를 세웠다. 이 해 10월에 오오사카 겨울 전투[大坂 冬の陣]이 일어났기에 이 사실은 이에마사를 이야기하는데 있었서 굉장히 흥미롭다.
편히 쉬려던 여생이……
어쨌든 오오사카 여름 전투[大坂 夏の陣]에서 토요토미 씨가 멸망하여 천하가 토쿠가와의 것이 되자, 요시시게는 전공(戰功)에 의해 아와지[淡路] 일국(一国)이 더해져 총 25만 7천석의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1618년.
요시시게도 착실히 성장하여 농민정책을 중심을 한 '벽서 23개조[壁書二十三ヶ条] 3라는 국법을 제정하여 번정(藩政) 확립에 힘썼다.
이에마사도 안심했을 것이다. 번정은 전부 요시시게에게 맡기고 편히 여생을 즐기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역사는 이에마사를 쉬게 나두질 않았다.
1620년 2월 26일.
하치스카 요시시게가 35살이라는 한창 일할 나이에 토쿠시마 성[徳島城]에서 병으로 죽어버린 것이다.
4월에 그 뒤를 센마츠마루[千松丸 = 타다테루[忠英]]가 이었지만 아직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이에마사는 나카다 촌(村)의 은거소에서 토쿠시마 성의 서측 성곽[西の丸]으로 옮겨 와 4, 어린 번주(藩主)를 후견하여 1629년 병으로 누울 때까지 사실상 이에마사가 통치를 계속 하게 된 것이다.
그때 가노(家老)나 모노가시라 5[物頭] 6 등 주요 가신들에게 대하여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번주가 어린 동안에는 모노가시라가 모든 것을 처리할 것.
주인이 어린 동안에는 각자가 자기 할 일은 확실히 할 것.
공공(公共)의 일은 밤낮없이 봉사할 것.
어떤 일이건 사사로운 감정을 넣지 말 것.
등의 지시를 내렸다.
또한 에도[江戸] 루스이야쿠[留守居役]에게도 에도 저택의 운영에 대해서 7 4개조의 지시를 내렸다.
이에마사는 하세가와 에치젠[長谷川 越前]이나 외손자인 하치스카 야마시로[蜂須賀 山城]를 가로(家老)로 삼아 센마츠마루를 보좌시켰다 8.
참근교대(参勤交代) 9할 때에도 이에마사가 같이 갔다.
이에마사는 번정의 확립에 큰 역할을 이룸과 동시에 노련함을 무기로 바쿠후가 흠잡을 만한 일이 없도록 노력했다.
1623년에는 쿠니부교우[国奉行]를 설치하여 지방 행정의 정비를 꾀했고,
1627년 7월에는 요시시게의 '벽서 23개조'를 보완하는 의미에서 '이서 7개조(裏書七ヶ条)'를 제정하였다.
센마츠마루는 1623년에 아와노카미 타타시게[阿波守 忠鎮]라 이름을 바꾸고, 다음 해 봄에는 타다테루(忠英)라 고쳤다.
그 후에도 이에마사는 신전(新田)개발이나 염전(鹽田)개발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매년 에도에 가서는 막부와의 파이프를 더욱 강고히 했으며 죽기 직전까지 이에마사가 가신들에게 영지를 배분하는 문서를 쓰는 등 번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이에마사의 언행을 기록한 [존어집(尊語集)]에는,
어린 타다테루의 늦잠을 고치라고 한 말이나, 가신들이 타다테루가 자신들을 함부로 다루는 것에 대해 상담하러 왔을 때, '어렸을 때는 그런 법이다'라며 타다테루를 감싸는 듯 하다가, 에도로 출발하기 전에 인사를 올리러 온 타다테루에게 정원에 있는 개나 참새를 자신의 뜻대로 다루는 것을 보여준 뒤 새나 동물도 이렇게 자신을 따르게 할 수 있으니 부하에게 정을 주고 위엄을 가지고 가르치면 충의를 행하지 않는 자는 없다고 말한 부분이 보인다.
1638년 12월 23일.
토쿠시마 성[徳島城] 서측 성곽에서 죽었다. 81세.
번정의 확립을 자신의 눈으로 끝까지 지켜본 일생이었다.
코우겐 사[興源寺]에 있는 이에마사의 묘 - 토쿠시마 시[徳島市]
- 속세를 버리고 중이 되겠다는 의미. [본문으로]
- 이에마사는 서군 편에 섰다, 혹은 병에 걸렸었기에 오오사카[大坂]에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본문으로]
- 벽서(壁書)란 법령을 적은 종이나 나무를 벽에 붙인 것을 말한다. [본문으로]
- 에도시대 때. 보통 서측 성곽[西の丸]은 다이묘우[大名]가 은거하며 머무는 곳이었다. [본문으로]
- 가문의 수상(首相) 격 [본문으로]
- 중급 관리자. [본문으로]
- 에도[江戸]에 있는 번(藩)의 저택의 책임자. [본문으로]
- 하치스카 야마시로의 증조부는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 죽은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이다. [본문으로]
- 참근(参勤)은 쇼우군에게 봉사한다는 의미, 교대(交代)는 봉사를 쉬고 자기 영지로 돌아가 정무를 맡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1년 터울로 에도와 자기 영토를 왔다 갔다 했으며 처자식은 인질로 에도에 항상 남겨 두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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