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1598 8 18일 병사 62

1536 ~ 1598.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을 섬기며, [스노마타 하룻밤 성(墨俣一夜城)[각주:1]]등의 공을 세웠다. 빗츄우(備中) 타카마츠(高松)() 공격 중에 혼노우(本能)()의 변을 듣자마자 츄우고쿠 대반전(中国大返[각주:2])를 감행하여 야마자키(山崎)의 싸움에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쓰러뜨렸다. 후에 쵸우소카베(長宗我部), 시마즈(島津), 호우죠우(北条)()를 항복시켜 천하를 통일하였다.







현실도피의 꽃구경


 토요토미노 히데요시는 1598년 새해가 밝자 교착상태에 빠진 조선 전선(朝鮮 戰線[각주:3])우울함에서 도피라도 하듯이 [다이고의 꽃구경(醍醐花見)]의 장소가 되는 다이고(醍醐)()의 정비에 열중했다. 1년 전부터 기획한 꽃구경이었지만 어두운 현실에서 눈을 돌려 도피하기에는 다시 없는 기회인 듯 했다.

 말년의 히데요시는 고독한 위정자(爲政者)였다.


 히데요시 스스로 다이고사()로 가서 오우닌의 난(応仁の乱) 때 황폐해진 절의 여러 건물()을 계속해서 수복(修復)하고 정원을 새로 만드는 것에도 직접 힘을 쏟는 등 진두지휘(陣頭指揮)하였다. 마치 이 꽃구경 행사가 [마지막 잔치]가 될 것이라는 것을 히데요시 자신이 예지라도 한 것인지 굉장한 열의를 가지고 힘을 쏟았던 것이다.


 이렇게 준비의 만전을 기한 끝에 열린 3 15 [다이고의 꽃구경] 문자 그대로 호화찬란한 사상 최고의 꽃구경이 되었다.

 히데요시는 어린 히데요리()와 함께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각주:4]), 요도도노(淀殿[각주:5]), 마츠노마루도노(丸殿[각주:6]), 산노마루도노(丸殿[각주:7])등의 정실(正室), 측실(側室)들을 시작으로, 그녀들의 시녀들이나 여러 다이묘우(大名)의 부인들과 함께 만개한 벚나무 아래를 거닐며 하루 종일 꽃구경 잔치를 즐겼다. 늙은 히데요시에게 있어 화려한 옷을 입은 여인들 사이에서 즐기는 꽃구경은 현세를 잊고 도원경(桃源境)에서 노니는 심경이었음이 틀림 없다.


병에 걸린 히데요시


 꽃구경이 끝난 뒤에도 히데요시는 다이고사()에 들려 절 수복에 힘썼다. 여전히 어두운 현실에서 조금이라도 도피하고픈 듯이.


 하지만 5 9.

 천하인(天下人)만이 소유할 수 있다고 하는 천하의 명석(名石 - 藤戸石) 히데요시의 손을 떠나 다이고사()로 옮겨져 산호우()()의 정원 정면 중앙에 놓여 졌을 때 히데요시는 후시미(伏見)()에서 병으로 누워 있었다.


 히데요시는 그 4일 전인 5 5일.

 갑자기 병에 걸려 그 날부터 투병 생활에 들어간다. 하지만 당초는 본인도 가볍게 생각하고 있던 병이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그 때문에 전국의 절과 신사(神社)들에게 쾌유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요청이 내려졌고 조정(朝廷)에서도 임시 카구라(神楽[각주:8])를 행하여 병마에서 헤어 나올 수 있게 하는 기도가 행해졌다. 하지만 기도의 효험은 나타나질 않았고 한 때는 인사불성에 빠졌다.


비통한 최후와 유언장


 히데요시도 죽음이 가까워진 것을 깨달은 듯 하다.

 7 15일.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에게 후계자인 히데요리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서약서(誓紙)를 제출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오대로(五大老), 오봉행(五奉行)을 정하여 당시 6살의 어린 히데요리를 위해 토요토미 정권 체제를 강화하는 등 죽을 때가 다 된 히데요시에게오직 히데요리의 미래만이 신경 쓰일 뿐이었다.


 그리고 8 5일.

 히데요시는 오대로에게 보낸 이승에서의 이별이라고 할 수 있는 유언장을 써서 계속해서 히데요리를 부탁하였다.

히데요리를 부탁합니다. 이것 말고는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습니다.

거듭거듭 히데요리를 부탁합니다. 다섯 분에게 부탁합니다.

막상 다섯 분에게 말씀드리고나니 이별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현세에 미련을 남긴 채 죽음을 맞이하고 있던 텐카비토(天下人) 히데요시의 비통한 마지막 말이었다.


 이리하여 히데요시는 그 해인 1598 8 18일 새벽. 후시미 성에서 생이 마감하였다. 향년 62.


 히데요시에게는 또한 사세구()가 있다.

이슬 떨어져 이슬처럼 사라지는 나의 생명이려나

무슨 일(또는 오오사카)이건 꿈 속의 꿈

 오대로에게 보낸 유언장처럼 아쉬움이 배어 나오는 서글픈 시이다.

 하지만 이 시는 히데요시의 예언이기도 했는지 히데요시는 토요토미 가문을 시작으로 토요토미 정권의 비극적인 결말까지 예견한 듯하다.


 히데요리는 히데요시가 그 후사를 부탁했던 오대로의 필두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에게 공격 당하여 토요토미 가문은는 멸망하였다. 거기에 히데요시가 쌓은 난공불락의 성이었던 오오사카 성()은 오오사카 여름의 전투에서 불에 타 없어졌으며 후시미 성()도 세키가하라(ヶ原)의 싸움에서 공격 받은 피해로 인하여 폐성(廢城)이 되어 없어졌다. 그리고 히데요시를 신으로 모신 호우고쿠(豊国) 신사(神社) 이에야스의 파괴 명령으로 인해 소멸되었다. 이리하여 히데요시 일대(一代)의 힘으로 쌓아 올린 토요토미 가 영광의 흔적은 이에야스에 의해 전부 이 세상에서 말살되어 그야말로 남가일몽(南柯一夢)처럼 허무하게 없어진 것이다.

  1. 스노마타에 하룻밤만에 성을 세웠다는 전설. [본문으로]
  2. 보통보다 더 빨리 철수한 것을 이름 [본문으로]
  3. 정유재란을 말함. [본문으로]
  4. 정실 네네(ねね). [본문으로]
  5. 히데요리의 친모(親母). [본문으로]
  6. 와카사 타케다(若狭 武田)씨(氏) 최후의 당주 타케다 모토아키(武田元明)의 부인. 타케다가 혼노(本能)사(寺)의 변 때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편을 들어 후에 할복. 이에 따라 히데요시의 측실이 되었다. [본문으로]
  7. 오다 노부나가의 다섯 번째 딸. [본문으로]
  8. 신에 춤을 바치기 위해 추어진 가무(歌舞). [본문으로]

호소카와 유사이(細川幽)

1610 8 20일 병사 77

1534~1610.

탄고(丹後)() 타나베(田辺)성주.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소개하여 쇼우군()으로 옹립하였으며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을 섬겼다. 세키가하라(ヶ原) 전투를 앞두고 서군의 공격을 받지만, 코요우제이(後陽成)텐노우(天皇)가 개성(開城)을 알선.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가인(歌人)으로도 유명.







칙명(勅命)으로 목숨을 건지다.


 1600년.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는 이에야스(家康) 타도를 목표로 거병(擧兵)하였다. 세키가하라(ヶ原) 싸움의 전초전(前哨戰)으로 미츠나리는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가 지키는 탄고(丹後) 타나베(田辺) 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 이유는 유우사이, 타다오키(忠興) 부자(父子)가 이에야스에게 가담하였고 거기에 타다오키의 부인 가라샤가 미츠나리의 인질 정책에 응하지 않고, 오오사카(大坂) 저택에서 자살하였기 때문이다[각주:1]. 이것은 미츠나리에게 있어서 커다란 손해였다.

 미츠나리는 탄바(丹波) 후쿠치야마(福知山) 성주 오노기 키미사토(小田木 公鄕) 등의 무장과 군세 1 5천을 타나베성으로 향하게 했다.


 타다오키는 이에야스를 따라 아이즈() 원정 중이었기에 유우사이는 5백명의 병사들과 농성했다. 유우사이는 이들을 지휘하며 방어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낙성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유우사이는 텐노우(天皇)의 동생인 토시히토(智仁) 신노우(親王 = 하치죠우미야(八条宮))에게 고금집오의(古今集奧義)를 전수하고자 하였다. 놀란 토시히토 친왕은 비밀리에 고요우제이(後陽成) 텐노우(天皇)에게 유우사이의 목숨을 구해달라고 간청하였고[각주:2], 텐노우는 오오사카 성과 타나베 성 양 쪽에 칙사(勅使)를 파견하여 정전(停戰)시킨 것이다.

 [칙명을 받들며 감읍할 따름이다. 옥명(玉命)에 따라 구질구질한 목숨을 더 이어가겠다]며 유우사이는 개성(開城)한 후 일시적으로 카메야마(亀山)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곧이어 세키가하라(関ヶ原)의 싸움에서 이긴 이에야스에게서 타지마(但馬)가 더해져 쿄우토(京都) 요시다(吉田)에 은거하였다.


노래와 함께 여생을 보내다.


 세키가하라(関ヶ原) 싸움 후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천하의 패권을 손에 넣긴 했지만 바쿠후(幕府)의 의식(儀式[각주:3])은 전혀 몰랐다. 그래서 한 때 아시카가 쇼우군가()를 섬긴 적이 있는 유식(有識[각주:4])한 유우사이에게 부탁하여 무가(武家)의 의식(儀式)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 하지만 그 중에는 유우사이 자신이 정한 예식도 많았다고 하며 이것을 [무로마치 바쿠후의 가식(室町殿御家式)]이라고 불렀다.


 한편 이에야스 쪽에 선 타다오키는 부젠(豊前) 나카츠(中津) 37만석이라는 큰 영지를 받았다. 메이지(明治) 시대까지 이어진 히고(肥後) 쿠마모토(熊本) 55만석으로 전봉()된 것은 타다오키의 아들 타다토시(忠利) 때이다. 할아버지인 유우사이의 덕()에 의한 것이 컸다.


 이에야스는 유우사이에게도 쿄우토(京都) 근방에 한 지방()을 주려고 하였으나 완고히 거절하고 대신 6천석의 은거료(隱居料[각주:5])를 받았다. 유우사이는 쿄우토(京都) 요시다(吉田)산에 살며 제자인 마츠나가 테이토쿠(松永 貞德[각주:6]) 등의 시를 봐주면서 평온한 생활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 후 노령 때문인지 몸 상태가 나빠져 1609 11 29일자의 [智仁親王御記[각주:7]]에는 유우사이가 방문했지만 굉장히 쇠약해진 상태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음해인 1610년 여름에 병이 났고 이 병이 악화되어 8 20일 새벽, 쿄우토(京都) 산죠우 쿠루마야쵸우(車屋町)에서 죽었다. 77살이었다. 유우사이는 문인(文人)으로도 이름 높지만, [호소카와 유우사이 비망록(細川幽斎覚書)]을 보면 일류의 검법가(劍法家)인 것도 알 수 있다.

[쿄우토(京都市)사쿄우쿠(左京区)텐쥬인(天授院)]에 있는 유우사이의 묘.

  1. 천주교도였기 때문에 자살은 못하고 대신 가신에게 창으로 자신을 찌르게 하여 죽었다. [본문으로]
  2. 유우사이 같은 옛 것을 잘 아는 사람이 죽는 것은 너무 아깝다며. 이에 대한 이야기는 '토요토미 가의 사람들'의 '하치죠우노미야' 7편을 참고해 주시길... [본문으로]
  3. 여러 행사를 치르는 방법 등 [본문으로]
  4. 여기서는 옛 일, 의식, 의례에 밝은 사람을 이름 [본문으로]
  5. 은거한 사람에게 주는 쌀 또는 그 만큼의 이익이 나는 영지 [본문으로]
  6.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의 손자라고 한다 [본문으로]
  7. 토시히토 친왕의 일기 [본문으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 三成]

1600 10 1일 참수 41

1560~1600.

어릴 때부터 히데요시[秀吉]를 가까이서 섬겼다.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에서는 오봉행(五奉行)중의 한 사람으로 문리파(文吏派) 다이묘우[大名]의 리더로 인식되었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 이에야스[家康] 타도를 꾀하여 미노[美濃] 세키가하라[ヶ原]에서 결전을 벌이지만 패배. 쿄우토[京都] 로쿠죠우 강변[六 河原]에서 참수당했다.









태합(太閤)의 넘버 원 총신(寵臣)


 어렸을 때부터 절에서 일했던[각주:1] 이시다 미츠나리가 권력의 정점에 선 것은, 태합 토요토미노 히데요시 아래서 봉행에 임명되어 오우미[近江] 사와야마[佐和山] 19 4천석(쿠라이리치[入地[각주:2]]를 포함하면 약 30만석)을 영유하면서 부터이다.

 히데요시는 말년에 정권 집행을 미츠나리에게 맡겼으며, 이런 미츠나리에게는 아무리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라도 미츠나리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고 한다.


 미츠나리의 권세가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1598 8 18 히데요시가 죽으면서부터이다.
[이타자카 보쿠사이 비망록(板坂)]에 따르면, 오대로(五大老)[각주:3]와 오봉행(五奉行)[각주:4] 제도는 이 해(1598) 7 13일에 정해졌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죽음을 예감하여 자신의 유언을 법규로 삼아 자신의 사후에도 토요토미 정권의 안정을 꾀하려 하였다. 히데요시의 뇌리에는 토요토미 가의 존속(存續밖에 없었다. 정권을 히데요리[秀頼]에게 물려주고 싶지만 히데요시는 자신이 죽은 뒤 천하를 거머쥐는 것은 이에야스라고 간파하고 있었다. 때문에 히데요리의 보좌를 맡은 코이데 히데마사[小出 秀政][각주:5]와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각주:6]에게는,

내 가문을 끊기게 하고 싶지 않으면 절대 이에야스에게 반항해서는 안 된다. 조심 또 조심스럽게 이에야스를 섬겨 히데요리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게 하여라. 그러면 우리 가문이 끊어지는 일은 없다.

 고 유언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는 한편 총애하는 신하인 이시다 미츠나리에게는 일시적이나마 정권을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에게 맡기지만, 히데요리가 성인이 되었을 때에는 히데요리가 물려받을 수 있도록 꾀하라고 히데마사와 카타모토와는 정반대의 명령을 내린 것이다.


타도 이에야스


 미츠나리는 융통성이 없는 정직한 사람이었다. 히데요시의 명령을 충실히 실행하려고 하였다.

 토시이에는 히데요시의 막역한 친구였기에 히데요시의 유언을 잘 지켰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야망은 천하를 잡는데 있었다. 곧바로 토오토미 가문을 멸하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미츠나리는 그런 이에야스의 행동에 제동을 걸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암살도 계획했지만 실패했다. 거기에 더 귀찮은 일이 생겼는데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 무공파(武功派)와 알력이 생긴 것이었다. 그들은 1599년 윤3 3 히데요리의 후견인이었던 마에다 토시이에가 병으로 죽는 것과 동시에 미츠나리를 습격했다. 이것을 중재한 것이 이에야스였다. 대신 미츠나리는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에 칩거 당하게 되었다.


 대로, 봉행 제도를 무시한 이에야스 독재 정치는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다.

 상경명령에 응하지 않던 같은 대로(大老직급인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치기 위한 아이즈 원정[津遠征]에 아무도 반대의 뜻을 표하지 않고 이에야스를 따라간 것도 이에야스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원정 뒤에는 미츠나리의 거병(擧兵)을 유도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했다.


곶감을 거절하다.


 이에야스가 자리를 비운틈을 노려 미츠나리는 거병하였다.

 맹우(盟友)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는 무모하다고 반대하였지만, 태합 히데요시에 대한 보은(報恩)이라는 말에 동의하였다. 이에야스의 유언 위반을 지탄하는 격문(檄文)을 여러 다이묘우[大名]에게 날리며 선전포고하였다.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이에야스였다. 토요토미 은고(恩顧[각주:7])의 토자마 다이묘우[外大名[각주:8]]를 거느리고 미츠나리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말머리를 서쪽으로 향했다. 미츠나리는 만전의 태세로 미노[美濃] 세키가하라[ヶ原]에 포진하여 동군(東軍)을 유격하려 하였다.


 1600 9 15일 이른 아침. 천하를 가름하는 최후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서군을 표방한 많은 무장들이 싸우지 않는 와중에서도 선전하였다. 그러나 미츠나리가 예측하지 못했던 사태가 일어났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등 다섯 무장[각주:9]이 싸움 중에 서군을 배신하고서는 공격해 왔다. 무방비의 등 뒤를 총에 맞은 것과 같이 충격과 혼란 속에서 서군은 완패하였다.


 미츠나리에게는 이에야스 타도의 대의(大義)가 있었다.

 울분을 삼키고 이부키[伊吹]산 속으로 도망쳤지만, 패배자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인정은 종이보다 얇은 법. 밀고에 의해 숨어있던 곳이 밝혀져 이에야스 앞에 잡혀왔다. 미츠나리의 행위를 문책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에야스 편에 선 무장 중에도 동정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미츠나리는 잡힌 몸이면서도 비굴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직했다. 창피한 행위는 아니었다고 후회하는 안색조차 띄우지 않았다.


 쿄우토[京都] 로쿠죠우 강변[六河原]의 형장으로 향할 때, 갈증을 느낀 미츠나리가 따스한 물을 원하자 경호하던 무사가 따스한 물은 없으니까 대신하라며 곶감을 권했다. 이에 미츠나리는 곶감은 담()에 나쁘다고 거절했다. 경호하던 무사들은 비웃었지만 "큰 뜻을 품고 있는 사람은 죽기 바로 직전까지 생명을 아끼는 법이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미츠나리가 포진했던 사사오 산[笹尾山](기후 현[岐阜県] 세키가하라 정[関ヶ原町])

  1. 당시엔 입을 줄이기 위해서 아이를 절에 맡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히데요시도 어렸을 땐 절에 맡겨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2. 히데요시의 직할령을 말하며, 미츠나리는 이 직할령의 대관(代官 – 주인을 대신하여 관리함)을 맡았다. [본문으로]
  3.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4. 일반적으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 마에다 겡이(前田 玄以) [본문으로]
  5. 히데마사의 부인은 히데요시의 모친 오오만도코로[大政所]의 동생. 즉 히데요시의 이모부. [본문으로]
  6. 시즈가타케[賤ヶ岳] 칠본창 중 한 명. [본문으로]
  7. 히데요시에게 은혜를 가지고 있거나 직접 히데요시가 키운 무장들 [본문으로]
  8. 직속 부하가 아닌 동맹격인 다이묘우 [본문으로]
  9. 이 중 넷은 히데아키의 배신을 대비하여 요시츠구가 배치한 무장들이었다. 이 중에는 한국에서'만' 명장 취급을 받는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도 있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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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하도 원이 비싸서....

첫 스캔이라 부족한 것이 많네요.

넓은 아량으로 클릭하면서 봐주세요~

안경쓰고 회의를 주도하는 인물이 하시바 히데요시

잘 모르지만 따라하는 타입이 토쿠가와 이에야스

바로 위에 수박들고 여자같이 생긴 것이 모리 란마루

총리는 오다 노부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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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마사[井伊 直政)]

1602 2 1 전상사(戰傷死[각주:1]) 42

1560 ~ 1602.

이마가와 씨[今川氏]에게 쫓겨나 방랑의 몸이 되나 후에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를 섬기며 '이이의 적비대[井伊の赤備え[각주:2]]를 이끌고 용명을 떨쳤다.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에서 도주하는 시마즈[島津] 군세를 추격하지만 이 때 입은 상처가 원인이 되어 죽었다.










이이의 적비대


 에도 시대[江戸時代], 토쿠가와 쇼우군 가문[将軍]후다이[譜代] 다이묘우[大名] 필두의 지위를 점하고 있었던 것이 이이 가문[井伊]의 '오우미[近江] 히코네[彦根] 30만석'이었는데, 이이 문이 당시엔 신참의 가문이었다는 것은 이외로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지위는 전적으로 초대 나오마사[直政]가 발군의 활약을 펼쳤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이 가문은 토오토우미[遠江] 이이노야[井伊谷]의 호족으로 대대로 이마가와 씨[今川)]를 섬겼다. 그러나 1562년에 부친 나오치카(直親)가 이마가와 씨에게 살해 당하자, 2살인 나오마사는 이이노야에서 도망쳐 각지를 전전한다.


 1575년.

 15살에 이에야스[家康]을 섬기며 이이노야의 옛 영지를 되찾게 된다. 이후 나오마사는 이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하타모토(旗本[각주:3])의 측근으로 많은 전투에 참가한다.


 혼노우 사[本能]의 변 직후 이에야스 최대 위기인 이가도피행[伊賀越え[각주:4]] 때도 함께 했으며, 그 후 코우슈우[甲州] 공략에도 참가[각주:5], 그 공적으로 타케다 가문[武田]에서도 용맹함을 자랑하던 츠치야 중[土屋], 야마가타 중[山県], 오바타 당[小幡] 등을 부하로 거느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타케다 가의 적비대[赤備]를 모방하여, 갑옷부터 깃발[], 등에 꽂는 작은 깃발[指物], 갑옷 위에 입는 덧옷[陣羽織]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붉은 색으로 통일했다. 나오마사는 이 적비대를 이끌고 선봉을 다투었고,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 전투에서의 활약으로 인하여, '붉은 귀신[赤鬼]'라는 이명으로 두려움을 얻게되었다. 이후 이에야스가 가는 곳엔 항상 선봉을 맡아 돌진하는 나오마사와 적비대가 있었다.


 그 결과 이에야스를 섬긴 지 10년 만에 미카와 후다이[譜代]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사카키바라 야스마사[原 康政] 등과 함께 이에야스의 삼걸(三傑)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1590년 이에야스가 칸토우[]로 이봉 되었을 때에는 코우즈케[上野] 미노와[箕輪 - 후에 타카사키(高崎)로 옮김) 12만석을 받았다.

 12살 연상인 타다카츠, 야스마사를 뛰어넘어 불과 15년 만에 토쿠가와 가신단 중 최고의 영지를 영유할 수 있었던 것은, 이에야스가 가문이나 문벌에 구애 받지 않고 능력만을 평가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이이 가문의 후다이[譜代] 필두라는 지위는 에도 시대를 통해서도 변함이 없었다.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무단 돌진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나오마사는 혼다 타다카츠와 함께 동군(東軍) 선봉의 군감(軍監[각주:6])으로 참가했다. 이 때 40세였다.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 토요토미[豊臣]계 유력 무장을 중심으로 한 동군에서, 히데타다[秀忠]가 거느린 토쿠가와 본대(本隊)가 도착하지 않은 당시, 토쿠가와 가문의 주력은 사실상 나오마사와 그의 사위이자 이에야스의 넷째 아들인 마츠다이라 타다요시[松平 忠吉] 휘하 약 6천의 병력이었다.


 향후의 천하를 판가름하는 결전이라 생각한 나오마사는 토요토미계 다이묘우[大名]에게 선봉의 공을 빼앗꼈다간, 토쿠가와의 천하가 되더라도 후환이 남을 것이라 생각하여 이에야스와 타다카츠에게 설명하고 일부러 무단 돌진을 감행하기로 한다.


 15일 이른 아침. 휘하의 적비대[赤備え]에서 추리고 추린 30()를 이끌고, 이번 전투가 데뷔전인 타다요시와 함께 한 나오마사는 선봉인 후쿠시마의 선두 부대장인 카니 사이조우[可児 才蔵]의 제지를 물리치고[각주:7] 빠져나가 맨 앞까지 진출하여 서군(西軍)에게 철포를 쏘았다. 이것으로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 싸움에서 나오마사와 타다요시의 활약이 뛰어났는데 특히 전대미문의 적중돌파(敵中突破)를 시도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를 추격하여, 그의 조카인 토요히사(豊久)를 죽이기 까지 했다. 이 때 시마즈 대()의 결사적인 반격에 타다요시가 부상을 당했고, 나오마사도 투구와 오른손 엄지손가락, 거기에 오른 팔과 타고 있던 말에 총격을 받아 낙마하여 한때는 실신했다고 한다. 본진으로 돌아온 둘을 맞이한 이에야스는 직접 나오마사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며오늘 싸움에 있어서 제일 큰 공을 세웠다며 극찬하였다.


 전후 처리로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본거지였던 오우미[近江]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의 공략, 서군의 총대장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항복의 알선, 토사[土佐]의 쵸우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 盛親]에 대한 대응 등 군사적인 면뿐만 아니라 외교, 통치 등의 면에서도 큰 공적을 올렸다.


너무도 이른 죽음


 세키가하라 전쟁 후의 논공행상으로, 1601 2 이에야스는 나오마사에게 이시다 미츠나리의 성이었던 오우미[近江] 사와야마 성 새로이 6만석을 더해 합계 18만석을 하사했다. 그리고 서국 다이묘우[大名] 감시와 쿄우토[京都]의 조정 수호라는 특별임무를 부여했다. 10월에 나오마사는 타카사키[高崎]에서 새로 보수한 사와야마 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나오마사는 이시다 미츠나리의 통치를 존중하여 민정의 안정을 꾀하는 한 편, 신영주 이이 의 거성 만들기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의 겨울부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얻은 오른 손 엄지의 총상이 차츰 악화되어 다음 해인 1602년 2월 1 42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화장(火葬)을 한 후 유골은 히코네[彦根]의 세이료우 사[淸凉]에 묻혔다.


 비노니. 아들의 아들의 아들까지 마지막까지 지켜다오 대지의 신들이여
 
るぞよ 子のすへの 末までも まもれあふみの 国津神
 라는 시를 남겼는데, 귀신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맹장도 13살의 어린 장남 나오카츠[直勝][각주:8] 등의 장래와 이이 가문의 존속을 대지의 신들에게 빌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토쿠가와 바쿠후[幕府]를 세우는 도중에 쓰러진 나오마사의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나오마사 부인의 양아버지이기도 한 이에야스도 특별히 신경을 썼다. 그리고 가신단(家臣團)도 또한 확실히 그의 뜻에 응하였다.

  1. 전쟁터에서 얻은 상처로 인한 죽음 [본문으로]
  2. 무구 일체를 전부 붉은 색으로 통일한 부대. [본문으로]
  3. 직속 부하를 말한다. [본문으로]
  4. 이에야스가 사카이(堺)에서 본국으로 돌아가는 도중 이가(伊賀)라는 지방에서 죽음을 각오할 정도로 고생했다는 것을 말함 [본문으로]
  5. 노부나가[信長]가 죽은 1582년 당시 카이[甲斐] 등 옛 타케다 가문의 영지를 막 손에 넣었던 터라, 오다 가문[織田家]의 영주들은 거의 적의 땅이나 다름 없던 옛 타케다의 영지에서 도망쳐 자신들의 본거지로 돌아간 터라 빈집이나 다름 없었다. [본문으로]
  6. 부대가 싸우는 모습이나 배반하는 지를 감시하는 역할. [본문으로]
  7. 이 때 나오마사는 처음 전장에 나서는 타다요시에게 전장의 분위기를 익히게 하기 위해서 구경하고 온다고 말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8. 나오마사의 장남이나 병약했기에 후에 가독과 히코네 번을 배 다른 동생 나오타카[直孝]에게 양보하고 안나카 번[安中藩] 3만석에 봉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병약했다지만 나오카츠는 72살까지 산 반면 나오타카는 69살에 죽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