쿄우토(京都) 토우지(等持)원(院)에 현존하는 요시아키의 목상(木像)을 보면, 얼굴 아래쪽이 통통한 얼굴로 코가 크며 눈썹이 수려하고 콧수염이 아래로 쳐진 전형적인 귀족의 용모이다.
진위를 보증할 수는 없지만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가 일으킨 [혼노우(本能)사(寺)의 변]의 흑막은 요시아키라는 것이다. 노부나가(信長)에게 추방되어 빙고(備後) 토모노우라(鞆の浦)로 망명해 있던 요시아키가 예전 자신의 부하였던 미츠히데에게 비밀리에 지령을 내려 노부나가를 죽이게 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자신을 쇼우군으로 만들고 추방했던 노부나가에 대한 끝없는 증오가 느껴진다.
요시아키의 노부나가에 대한 증오는 무시무시할 정도였지만 노부나가 덕분에 쇼우군이 되었을 때는 눈물까지 흘리며 기뻐하였다. 그랬을 뿐만 아니라 1569년 4월에 요시아키의 새로운 거처 니죠우(二条) 저택이 완성되어 그곳에 그 저택을 만들어 준 노부나가가 기후(岐阜)로 돌아간다는 작별 인사를 하러 온 돌아갈 때가 되자 문 밖까지 직접 배웅을 하고 노부나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서 있었다고 한다.
요시아키는 12대 쇼우군 요시하루(義晴)의 둘째로 태어났지만, 처음에는 불문(佛門)에 들어가, 나라(奈良) 코우후쿠(興福)사(寺) 이치죠우(一乗)원(院)의 몬제키(門跡 1)가 되어 ‘카쿠케이(覚慶)’라는 호로 불리고 있었다.
그 조용한 불문의 생활이 - 형 요시테루(義輝=13대 쇼우군)가 미요시 삼인중(三好三人衆)과 마츠나가(松永) 무리에게 살해당하자 급격히 변하기 시작한다. 카쿠케이는 미요시-마츠나가 무리를 피하여 오우미(近江)의 와다 코레마사(和田 惟政), 칸논지(観音寺)성(城)의 롯카쿠 요시카타(六角 義賢), 와카사(若狭)의 타케다 요시무네(武田 義統 2) 등을 의지하여 방랑하다가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에게 갔을 때 겨우 안정을 되찾아, 여기서 환속(還俗)하여 ‘요시아키(義秋)’라는 이름이 되었고, 곧이어 ‘요시아키(義昭)’로 개명하였다.
요시아키의 운명은 노부나가로 인해 크게 비약한다. 1568년 7월, 둘은 기후의 릿쇼우(立政)사(寺)에서 회견했다.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를 쇼우군으로 옹립함으로써 자신이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고자 하였다.
요시아키를 옹립한 노부나가는 6만의 대군을 이끌고 상락(上洛)하여 미요시 세력을 쫓아버리고,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를 항복시켰다.
드디어 요시아키는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에 임명된 것이다. 여러 지역을 유랑한 끝에 얻은 영광이었다. 요시아키는 이 때 노부나가에게 아시카가 가문의 문장인 [오동나무(桐) 3]와 [니히키료우(二引両) 4]의 사용을 허락하였고, [아빠 오다 단죠우노죠우님(御父織田弾正忠殿) 5]라는 명칭으로 쓴 직접 쓴 표창장(感状)까지 보내었다. 얼마나 그의 기쁨이 컸던가를 알 수 있다.
그 기쁨은 다음 해까지 이어진다. 다음 해(1569년) 정월에 미요시 일당이 쇼우군의 거처인 혼코쿠(本圀)사(寺)를 습격하자 노부나가는 기후에서부터 눈 속을 삼일 만에 주파하여 미요시 군세를 쫓아낸 것이었다.
거기에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를 위해서 니죠우(二条)에 새로이 쇼우군 저택을 만들어 주었다. 손수 공사의 감독관이 되어 2만 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불과 1개월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쇼우군과 노부나가의 좋은 관계는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다.
요시아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쇼우군이란 노부나가의 괴뢰(傀儡)로 실권은 어디까지나 노부나가가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요시아키는 실권을 가지고 싶었다. 은밀히 에치젠의 아사쿠라(朝倉)나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上杉), 카이(甲斐)의 타케다(武田)나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 등 노부나가와 적대하는 세력과 연락을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부나가는 이 불온한 움직임에 민감히 반응했다. 1570년 정월, 상경한 노부나가는 쇼우군 요시아키에게 강한 태도로 나왔다. [전중 법도(殿中御掟)]를 정하여 쇼우군이 다른 여러 지역에 편지를 보낼 때에는 반드시 노부나가가 쓴 편지도 첨부하게 만든 것이었다. 이걸로 쇼우군의 정치 행동은 크게 제약 받게 되었다. 쇼우군이라는 것은 이름뿐인 존재였다.
바야흐로 요시아키의 물밑 공작은 점점 심해졌다. 노부나가의 제약이 반대로 반발로 작용한 것이다.
여러 지역의 다이묘우들에게 보내는 노부나가 타도의 밀서는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노부나가가 아자이(浅井)-아사쿠라 연합군과 싸우고, 이시야마 혼간지와 교전하며,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과 적대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도 요시아키가 배후에서 선동한 것과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다. 어쨌든 요시아키의 적대적 행동에 참을 수가 없게 된 노부나가는 신겐이 서상(西上)하기 직전인 1571년 9월, 요시아키에게 17개조에 이르는 강경한 의견서를 제출하였다.
- 여러 지역에 밀서를 내려서는, 말(馬) 같은 것을 달라고 해서는 안 된다.
- 우리들(노부나가)과 사이가 안 좋아졌다며 재물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에 쿄우(京) 전체가 시끄럽다. 이렇게 니죠우(二条)의 저택이 있는데 어디로 가시려는 것인가?
- 노부나가와 친한 사람은 여관(女官)들마저도 잔인한 처벌을 하고 있다.
- 소송을 노부나가가 청해도 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 다른 지역에서의 헌상품을 감추거나 쌀을 팔아 금으로 바꾸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이유로 그리 하시는 것인가?
요시아키의 급소를 하나하나 찌르는 힐문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요시아키의 책모는 그치지 않았다. 그 시기 이러한 쇼우군의 행동에 정나미가 떨어진 중신(重臣)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 藤孝=유우사이(幽斎))는 결국 요시아키를 버리고 노부나가의 신하로 들어간다.
1573년 2월.
요시아키는 결국 깃발을 선명히 하여 노부나가 타도의 병사를 일으켰다. 타케다 신겐이 미카타가하라(三方ヶ原)에서 토쿠가와(徳川)-오다(織田) 연합군을 대패시킨 것에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타케다와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군세로 노부나가를 포위 섬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시기를 잃고 있었다. 요시카가가 이미 포위 작전을 내팽개치고 에치젠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었다.
요시아키는 이때 서(西) 오우미(近江)의 이시야마(石山)에서 잇코우 종도(一向宗徒)들을 규합하여 거병하였다. 예전 형 요시테루(義輝)를 죽인 미요시, 마츠나가 등과도 손을 잡았다.
하지만 결국 노부나가의 적은 아니었다.
7월. 야마시로(山城) 마키노시마(槇島)성(城)에서 농성하며 최후의 저항을 시도해보았지만 버티질 못하고 당시 2살의 아들 요시히로(義尋)를 인질로 바치고 항복하였다. 이로써 15대가 이어졌던 아시카가 바쿠후(幕府)는 사실상 끝을 고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
1537년 요시하루(義晴)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엔 외숙부 전(前) 칸파쿠(関白) 코노에 타네이에(近衛 稙家)의 유자(猶子)가 되어 나라(奈良) 이치죠우(一条)원(院) 몬제키(門跡) 카쿠케이(覚慶)라는 이름으로 불문에 있었지만, 환속하여 요시아키(義秋)라 하고, 후에 요시아키(義昭)로 고친다. 처음엔 에치젠(越前)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의지하였지만, 결국 오다 노부나가에 옹립되어 제15대 아시카가 쇼우군이 된다. 노부나가와 사이가 틀어지자 쫓겨나 빙고(備後)로 도망쳤다. 머리를 깎고 쇼우잔 도우큐우(昌山 道休)라는 호를 칭하였고,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보호를 받으며 1만석을 하사 받는다. 1597년 죽다. 6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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