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는 이름을 후지타카(藤孝)라고 한다. 센고쿠 무장 중에서는 최고의 지식인이라고 단정지어도 좋다. 고전(古典)을 산죠우니시 사네에다(三西 枝)와 쿠죠우 타네미치(九 種道)에게 배워 고금전수(古今授), 중세 시학(歌) 등을 집대성하였다.

 태어나 자란 환경이 좋았다. 모친은 역사상 굴지의 석학 키요하라 노부카타(原 宣賢)의 딸로, 표면적인 부친으로는 미츠부치 하루카즈(三淵 晴員)로 되어있지만 실제로는 12대 쇼우군(軍)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 義晴)라고 한다. 쇼우군이 코노에 히사미치(近衛 尚通)의 딸과 결혼하게 되었기에 이미 요시하루의 애를 배고 있던 모친은 미츠부치 가문에 하사된 것이다.

 후지타카는 미츠부치 가문(三淵家)에서 태어났지만 호소카와 가문(細川家)의 양자가 된다[각주:1]. 자란 것은 모친의 친정 키요하라 가문으로 거기서 후년의 와카(和歌), 문학적 소양 등을 기초를 길렀을 터인데 달리 이런 이야기도 전해진다.

 후지타카가 시에 눈을 뜬 것은 어느 전투에서 함께 있던 무사가 옛 시(古歌)를 읊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적을 쫓다가 도중에 놓쳐서 포기하고 돌아오려고 할 때에 이 무사가,

당신은 아직 멀리 안 갔을 거요 내 옷깃에,
눈물도 아직 식지 않았으니
君はまだ遠くは行かじ我袖の、
も未だ冷かならねば
라는 옛 시를 읊으며 적이 타다 버린 말을 조사한 것이다. 안장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다. 이 무사는 적이 아직 멀리 도망치지 못한 증거라고 후지타카에게 가르쳐주었다. 그 말을 듣고 더 추격해서 적병의 모습을 발견하여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후지타카는 시에 뜻을 두었고 후에 결국 달인의 영역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후지타카가 처음으로 섬긴 주군은 13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후지(足利 義藤[각주:2]=후에 요시테루(義輝)이다. 13살 때였다. 아시카가 바쿠후의 쇠망기로 1554년에는 쇼우군 요시테루 자신이 미요시 쵸우케이(三好 長慶)에게 쫓겨나 오우미(近江) 쿠츠키(朽木)로 도망쳤다. 이때 후지타카도 그를 따르며 쓴맛을 맛보았다. 이 쿠츠키 계곡(朽木谷)에서 후지타카는 책을 읽기 위한 등불을 밝힐 기름이 없어 가까운 신사(神社)의 등불에서 기름을 훔쳤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568년 이 요시테루가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와 미요시 일당에게 살해당했을 때는 영지(領地)인 야마시로(山城) 쇼우류우지 성(勝寺城)에 있었기에 난을 피할 수 있었다. 이 때가 32살이었다. 이때부터 고난의 유랑생활이 시작되었다. 요시테루의 동생으로 나라(奈良) 코우후쿠(興福)사(寺) 이치죠우(一)원(院)의 몬제키(門跡)였던 카구케이(慶=후에 요시아키(義昭))를 옹립하여 쇼우군의 자리에 앉히기 위한 후원자를 찾기 위해 여러 다이묘우(大名) 사이를 돌아다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 만나 요시아키를 15대 쇼우군 자리에 앉히는 것에 성공한다. 이때 후지타카는 노부나가에게 야마시로 나가오카(長岡)를 하사 받아 성(姓)을 '나가오카'로 바꾸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후지타카는 쇼우군 요시아키에게 불신감을 품기 시작한다. 노부나가의 괴뢰에 지나지 않는 쇼우군 자리가 불만인 요시아키는 은밀히 반오다(反織田) 세력과 손을 잡았고 결국에는 모반까지 계획하게 된 것이다. 이 시점에서 후지타카의 날카로운 정치적 감이 빛난다. '요시아키는 망하고 천하는 노부나가의 것이 된다' - 후지타카는 그리 확신하여 요시아키가 모반을 꾀한다는 사실을 예전 함께 요시아키를 섬겼고 지금은 양다리로 노부나가까지 모시고 있는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에게 전하여 노부나가 측에 선다는 것을 명확히 하였다.

 1582년 혼노우(本能)사(寺)의 변이 일어났을 때도 이 정치적 감이 빛을 발한다.
 그는 아케치 미츠히데가 노부나가를 습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미츠히데의 능력으로는 천하를 유지시킬 수 없을 거라 판단하였다. 이 때문에 평생의 친구인 미츠히데의 요청을 거부한다. 이때 미츠히데의 딸 타마(たま=가라샤(ガラシャ))를 부인으로 둔 아들 타다오키(忠興)에게,
 "나는 노부나가의 은혜를 입어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은 머리를 밀고 노부나가의 명복을 빌고자 한다. 그러나 너는 미츠히데와 사위-장인이라는 사이. 아케치에게 가는 것도 안 가는 것도 너의 마음대로 하여라"
 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결국 타다오키도 부친과 마찬가지로 머리를 밀고 노부나가에 대한 조의를 표해 미츠히데의 요청을 물리쳤다.

 머리를 민 후지타카는 가독을 타다오키에게 물려주고 자신 본래의 문화인적인 특질을 발휘하게 된다. 유우사이(幽)라는 호는 이 시점에서의 것이다. 히데요시의 시마즈(島津) 정벌에 종군하였을 때 유우사이는 항복한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를 위해 따스한 온정을 베풀었다.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바쳐진 요시히사의 딸 카메쥬(亀寿)를 유우사이가 노력하여 가족들에게 돌려보낸 것이다. 유우사이와 요시히사가 귀여운 딸에 관한 시를 지어 서로 받고 보낸다는 소식을 들은 히데요시가 그 모습에 감동하여 카메쥬를 인질인 신분에서 해방시킨 것이다.

 히데요시의 황금시대. 고전파 지식인으로서 유우사이는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1588년 4월. 히데요시는 새로 지은 쥬라쿠테이(聚
第)에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의 행행(行幸)을 기획하였는데 이는 전년도의 키타노 대다회(北野大茶)와 마찬가지로 토요토미 정권의 여러 다이묘우들에 대한 거대 정치 이벤트였다. 유우사이는 이때 와카(和歌)의 자리에서 조정의 예법에 맞추어 예식을 거행하고 대표로서 와카 몇 수를 헌상하는 등 고전의 교양 없이는 불가능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이런 행사를 화려하게 장식하려는 경향이 있었지만 유우사이 자신은 그런 화려함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평소 그는 어디까지나 옛 전통에 따라 의상 같은 것도 검은색 일색이었다고 한다.

 유우사이의 고전에 대한 조예는 전쟁에서도 그 가치를 발휘한다.
 천하가 둘로 나뉜 세키가하라(
ヶ原) 때의 일이다. 아들인 타다오키는 이에야스를 따라 칸토우(東)로 내려가 있었기에 아들을 대신해서 탄고(丹後) 타나베 성(田城)에서 농성전을 치르게 된다. 후쿠치야마(福知山)성주 오노기 누이노스케(小野木 縫殿助)를 시작으로 한 1만5천여의 서군이 포위한 타나베 성에는 불과 500여의 수비병밖에 없어 낙성은 시간문제라 여겨졌다. 유우사이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이때 조정에서 유우사이가 죽게 됨으로써 옛 것들이 끊기는 것을 안타까워해 유우사이에게 개성을 권한 것이다. 하지만 유우사이는 이를 정중히 거절. 다만 고금전수의 기록들이 재로 변하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기에 이들 전부를 텐노우(天皇)의 동생 하치죠우노미야 토모히토(八宮 智仁)에게 보내고자 하였다. 조정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텐노우의 칙령으로 서군에게 타나베 성의 포위를 풀게 하였고 대신 유우사이는 탄바(丹波) 카메야마 성(山城)으로 옮기게 만들었다.

 말년의 유우사이는 쿄우토 닌나(仁和)사() 주변에서 조용히 살았다고 한다.

[호소카와 유사이(細川 幽斎)]
1534년생. 호소카와 모토츠네(細川 元常)의 양자가 된다. 효우부다이후(兵部大輔)에 서임받았다. 처음엔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에 속해있었지만 1573년 오다 노부나가로 말을 갈아타 1580년 탄고(丹後)를 하사 받았다. 혼노우(本能)사(寺)의 변 후에 가문을 타다오키(忠興)에게 물려주었고 1589년 타다오키의 영지(領地)와는 별도로 미야즈 성(宮津城) 4만석을 받는다. 1610년 8월 20일 77살로 죽었다.

  1. 유우사이의 부친 미츠부치 하루카즈는 호소카와 가문의 서류 이즈미 슈고가문(和泉守護家) 출신으로, 하루카즈의 모친의 친정인 미츠부치 가문에 아들이 끊겼기에 양자로 들어갔으며, 유우사이는 다시 후계자가 없던 큰아버지 호소카와 모토츠네(細川 元常)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 [본문으로]
  2.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 '藤'孝)의 '후지'는 이 요시테루의 전 이름의 글자를 하사받은 것(一字拝領)이다. [본문으로]

삿사 나리마사( 成政)

1588년 윤 5 14 할복 53.

1536 ~ 1588.

오와리(尾張) 히라(比良) 성주.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검은 화살막이 부대 - 쿠로호로(黑母衣)()' 필두(筆頭)에 발탁되었다. 주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등과 호쿠리쿠(北陸) 방면을 담당하였다.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항복하여 히고(肥後) 국주()에 임명받았으나, 실정(政)의 책임을 지고 할복.








히데요시(秀吉), 토시이에(利家)와의 관계


 오다 노부나가 시대.

 용맹으로 유명했던 삿사 나리마사는 라이벌 마에다 토시이에와 거의 같은 스피드로 출세하여 토시이에가 오다 군단의 엘리트들이 모인 '붉은 화살막이 부대 - 아카호로(赤母衣)()'에 발탁되었을 때 나리마사는 쿠로호로중 필두가 되었다.

 1576년에는 토시이에와 함께 [부츄우(府中)삼인중[각주:1]]에 임명되었으며, 1581년에는 엣츄우(越中) 60만석을 받아 토야마(富山) 성주가 되었다.


 나리마사의 비운은 1582 6 노부나가의 죽음부터 시작되었다. 혹은 다음 천하인이 되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를 신출내기 출세자로 깔보는 감정이 나리마사의 말년 6년간의 운명을 결정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다음 해인 1583년.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정하는 시즈가타케() 전투에서토야마성에서 움직이는 일 없이 형세를 관망하고 있던 중에 시바타 카츠이에가 히데요시에게 패했다. 할 수 없이 히에요시에게 둘째 딸을 인질로 받치고 항복. 히데요시도 이것을 받아들여 나리마사는 지금까지처럼 엣츄우 일국을 안도받았다.


 그러나 다음해인 1584년.

 코마키(小牧)-나가쿠테(長久手) 전투에서 히데요시와 대치하며 유리하게 싸움을 전개하고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의 요청에 응하여 8천의 병력을 이끌고 마에다 토시이에의 영내(領內)노토(能登) 하쿠이(羽咋)의 스에모리(末森)성을 기습하였다. 토시이에의 필사적인 반격에 패퇴하면서도 쿠리카라(俱利加羅) 고개에 병사를 배치하여 나리마사가 끈질기게 분전하고 있던 와중에 중앙에서는 히데요시와 이에야스의 정전 교섭이 성립되려 하고 있었다.

 고립되는 것을 우려한 나리마사는 이에야스에게 싸움을 포기하지 말 것을 설득하기 위해서 엄동의 산길에 악전고투하면서도 돌파(‘サラサラ라 일컬어지고 있다). 하마마츠(浜松)의 이에야스를 만났지만 [나는 히데요시와 원래부터 원한이 없다]며 거절당해 허무하게 귀국한다.


키타노(北野) 대다회(大茶會) 중지


 토시이에의 원군을 요청 받은 히데요시는 호쿠리쿠에 칸파쿠()의 위광을 과시하기 위하여 다음 해인 1585 8만의 병사를 이끌고 보무당당하게 카가(加賀)로 진입했다. 히데요시-토시이에의 대군을 앞에 두고는 용맹을 떨친 나리마사도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머리를 밀고 중이 된 나리마사는 니이카와(新川)() 20만석으로 영지가 줄었지만 살아 남았다.


 그래도 1587년. 나리마사에게 마지막 기회가 주어진다. 큐우슈우(九州)평정을 끝낸 히데요시는 종군했던 나리마사에게 히고(肥後) 일국(一国)을 하사하였다. 그러면서 히데요시는 히고를 지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설명하면서 앞으로 3년간은 토지조사를 행하지 말 것, 각종 토목공사를 일으켜 히고의 영민들을 힘들게 하지 말 것 등, 거기에 농민 반란을 일으키게 하지 말 것 등 5개조의 주의서를 나리마사에게 주었다[각주:2].


 엣츄우에서는 선정을 펼친 나리마사였지만 코쿠진([각주:3]) 영주의 세력이 강한 히고는 지금까지 나리마사가 겪어 온 것과는 달랐다. 거기에 나리마사에게는 히고로 왔을 때 영지 목록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곧바로 제출하라고 명령을 하자, 일부의 코쿠진 영주가 들고 일어났고, 진압을 서두른 나리마사가 3천의 병력을 보내자 반란은 들불처럼 번졌다.


 이때 히데요시는 쿄우토(京都)의 키타노에서 큰 다회(茶會)를 열고 있었는데, 둘째날이 되어 나리마사가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당초 10일간 열릴 예정인 다회를 중지하였다. 차 도구는 무엇이든 좋으며 빈부나 귀천을 묻지 않고 누구나 참가하라는 대 이벤트를 중지할 수 밖에 없게 된 히데요시의 분노는 컸다.


비운의 최후와 검은 백합 전설.


 새해가 된 1588년.

 히데요시가 파견한 원군으로 반란은 진정되기 시작했으나 히데요시에게 실정의 책임을 추궁받은 나리마사는 이유 설명을 위하여 오오사카(大坂)의 히데요시를 방문하려 했으나,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아마가사키(尼崎)의 호우온(法園)()에 유폐되어, 5 14 할복하여 죽었다.

 배를 열십자로 가르고 장기를 손으로 끄집어 내었다고 한다[각주:4].

 53세였다고 한다.


 강직했지만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 했던 나리마사의 비운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러가지 [검은 백합 전설]이 전해 내려 오고 있다.
 그 중 하나로 히데요시의 분노를 산 나리마사는 아마가사키에서 처분을 기다리고 있던 중 하쿠산(白山) 산에서 핀다는 검은 백합을 하야비캬쿠(早飛脚[각주:5])로 받아서, 좋게 말해 달라며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각주:6])에게 보냈다. 이 검은 백합이 맘에 든 키타만도코로는 곧바로 다회를 열어, 초대했던 요도도노(淀殿[각주:7])를 비롯한 측실들에게 은쟁반에 담아 이 귀중하고 신기한 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몇 일 지난 후.
 
꽃이 난 곳을 알아낸 요도도노는 대량의 검은 백합을 가져와 아무 곳에나 심은 뒤 자신의 다회에 초대한 키타노만도코로에게 그렇게 진귀한 것도 아니라는 듯이 여러 사람 앞에서 창피를 주었다.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키타만도코로는 나리마사에게 냉담해져 히데요시에게 나리마사의 목숨을 구해 달라는 탄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예전 나리마사가 토야마 성주로 있을 때 죄가 없는데도 딴 남자와 놀아났다는 누명으로 죽인 애첩 사유리(小百合[각주:8]) 히메()의 저주가 추가된 것도 있.
  1. 또 한 명은 '후와 미츠하루(不破光治)'. [본문으로]
  2. 오제 호안(小瀬 甫庵)의 [보암태합기(甫庵太閤記)]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동시기에 히데요시는 나리마사를 '하시바 히고지쥬우님(羽柴肥後侍従との)'이라고 썼지만, 저 5개조의 편지에는 '삿사 쿠라노스케(佐々内蔵助)'라 적혀있기에 실존성이 의심간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3. 그 지방의 호족. [본문으로]
  4. 그 외에 오오사카 쪽을 노려보다 이빨을 너무 앙물어 서너개의 이빨이 부러졌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5. 지금으로 말하면 택배 같은 것. [본문으로]
  6. 히데요시의 정실.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본문으로]
  7.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秀頼)를 낳았다. 이 일로 히데요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되어 정실인 키타만도코로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작은 백합'이라는 의미.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