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채팅 서비스인 ChatGPT, 구글의 제미나이, 윈도우11 내장인 코파일럿..에게 일본 어삼가(御三家)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우선 쳇지티피에 한국어로 물어보았습니다.

 

 

전혀 딴 소리 하고 있죠.

이이 가문井伊家은 후다이 No.1譜代筆頭라는 명칭이 따라 붙긴 하지만 어삼가는 아니죠. 

마츠다이라 가문松平家은 위 그림의 설명 그대로이긴 하지만 어삼가는 아니죠.

시바 가문斯波家은... 시바이누柴犬할 때의 '柴'를 썼네요. 발음은 같습니다만 왠지 웃기네요. 위 그림에서 설명대로 오다 노부나가와 관련이 있습니다. 신장공기信長公記의 수권首巻에서 자주 나오는 부에이님武衛様는 저 시바 가문의 당주인 시바 요시카네斯波義銀를 지칭합니다. 그러니 노부나가와 관련이 있기는 하죠. 그러나 어쨌든 어삼가는 아닙니다. 그나저나... 시바를 斯波가 아니라 柴라니... 芝.

 

그럼 저는 시바이누斯波犬라고 하죠.


하지만, 일본어로 물어보면...

 

-----번역 시작-----
고산케[御三家]는 일본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세 가문을 가리킨다. 구체적으로는 아래의 세 가문을 지칭합니다.

1. 오와리 토쿠가와 가문[尾張徳川家]

  · 오와리 토쿠가와 가문[尾張徳川家]은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직계 가문으로, 현재 아이치현 나고야(愛知県 名古屋)를 본거지로 삼고 있었다. 이에야스의 손자인 토쿠가와 요시나오[義直公]가 설립하여 되어 오와리번을 통치했습니다.오와리 토쿠가와 가문은 에도시대 내내 중요한 다이묘우 가문 중 하나로 나고야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지배했다.
2. 키슈 도쿠가와 가문[紀州徳川家]

  · 키슈우 토쿠가와 가문은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동생인 토쿠가와 요시노부[徳川頼宣]가 설립하여 현재의 와카야마현을 중심으로 키슈우번을 통치했다.키슈우 토쿠가와 가문도 에도시대의 중요한 다이묘우 가문으로, 키슈우번의 지배를 통해 막부의 정책과 지방 통치에 기여했습니다.
3. 미토 도쿠가와 가문(水戸徳川家)

  ·  미토 토쿠가와 가문은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자인 토쿠가와 미츠쿠니[徳川光圀]가 설립한 가문으로, 현재의 이바라키현 미토시를 거점으로 미토번을 통치했다.미토번은 특히 학문과 문화의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토학'이라는 학문 체계를 발전시켰습니다.

이들 '고삼가(御三家)는 모두 토쿠가와 가문의 일족으로 막부에 대한 중요한 지지기반을 제공했다.또한 각 가문의 영지는 일본의 역사와 정치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번역 끝-----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9째 아들인 오와리의 요시나오를 손자, 10째 아들인 키슈우의 요리노부를 동생, 미토의 경우 미츠쿠니의 애비인 요리후사[徳川頼房]를 빼고 미츠쿠니가 설립했다는 등... 자잘한 거 말고는 대체로 맞는 듯이 보입니다.

 

참고로 작년 초인 2023년 2월에 쳇지티피에게 일본어로 어삼가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의 결과는

 

https://www.facebook.com/valhae/posts/pfbid0jidWNoZAEqQi5sfRqLjm6v66w4NPQnSdL6Be6tks1qw3eTFNDFNnqbLZ2TyjM2tal

 

이때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죠. 

 

다음은 구글의 제미나이.

 

한국어로 물어봤을 경우,

 

 

음... 이것은 안 좋네요.

마츠다이라 씨는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토쿠가와를 칭하기 이전의 가문입니다. 이에야스는 초반에 마츠다이라 모토야스[松平元康]를 칭하였고 이후 마츠다이라 이에야스[松平家康]를 거쳐 토쿠가와 가문으로 개성한 후에야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되었습니다.

이에야스가 몸을 일으킨 미카와三河에는 같은 친척들인 마츠다이라가 엄청 많았습니다. 오죽했으면 열여덟 마츠다이라十八松平라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거기에 일개 쿠니国 또는 그 이상을 영유할 정도인 마에다 가문前田家, 다테 가문伊達家, 시마즈 가문島津家 등등도 에도 막부의 정식 호칭은 각각 마츠다이라 카가노카미松平加賀守, 마츠다이라 무츠노카미松平陸奥守, 마츠다이라 사츠마노카미松平薩摩守이었을 정도로 에도 시대에 마츠다이라는 너무도 많습니다. 

 

토쿠가와 고산케...는 아예 싸잡아서 미토로 한정 시켰네요.

 

토쿠가와 시미즈 번徳川清水藩...은 아마도 어삼경御三卿 중 하나인 시미즈 가문清水家과 헷갈렸나 보네요. 시미즈 말고 키요미즈 번清水藩은 에도시대 초기에 잠깐 있었다가 없어진 번이 있습니다만.. 여기에 낄 급도 아니고요.

 

그럼 제미나이에게 일본어로 물어보면...

 

 

 

-----번역 시작-----
어삼가에 대해서

 

어삼가는 에도 시대에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에 있어서 쇼우군 가문将軍家와 특히 가까운 혈연관계였던 세 가문을 지칭합니다. 이들은 쇼우군 가문에 후계자가 없을 경우에 이 세 가문에서 양자를 보낼 수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높은 지위와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삼가를 구성하는 가문.

  • 오와리 토쿠가와 가문 :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형 마츠다이라 야스치카松平康親의 자손으로 오와리 번을 다스렸다.
  • 키슈우 토쿠가와 가문 :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9남 토쿠가와 요리노부의 자손으로 키슈우 번을 다스렸다.
  • 미토 토쿠가와 가문 :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11남 토쿠가와 요리후사의 자손으로 미토 번을 다스렸다.

-----번역 끝-----

 

가격家格이라고 '가문'이라는 단어로 고풍스럽게 표현한 것이 재밌네요.

오와리 토쿠가와 가문 설명에... 이에야스의 형이라고 했는데, 이에야스에게는 대놓고 형제라 할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부제.. 그러니까 모친이 히사마츠 가문久松家에 시집가 낳은 동생들만 있었죠. 후손들이 자신이 선조는 이에야스의 배다른 형제였다고 주장하거나 하는 경우는 있었습디마만 이에야스가 살아있는 동안에 동생취급 했던 것은 저 히사마츠 가문 사람들 말고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키슈우 토쿠가와 가문은 이에야스의 9째가 아닌 10째 입니다.

 

미토번은 틀린 곳 없네요.

 

마지막으로 윈도우 11의 코파일러.

 

먼저 한국어로

 

틀린 곳 없습니다.

 

일본어로 물어볼 시,

 

 

-----번역 시작-----

御三家고산케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  중 오와리(요시나오), 키이(요리노부), 미토(요리후사)의 가계를 가리킵니다. 이들 가계는 장군가 다음가는 가문으로 특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토쿠가와 어삼가는 에도시대에 쇼운군직을 계승할 가능성이 있는 가계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오와리번(61만석)은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9남인 요시나오, 키이번(55만석)은 10남 요리노부, 미토번(35만석)은 11남 요리후사가 각각 번주가 되었습니다.

 어삼가御三家라는 단어는 다른 분야에서도 유력한 세 가지 존재를 지칭할 때 사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연예계나 산업계 등에서 「어삼가」라고 불리는 그룹이 존재합니다.

-----번역 끝-----

 

틀린 곳 없네요.

 

그래서 결론은,

  • 쳇지티피나 제미나이의 경우, 어삼가御三家에 관해서 한국어로 물어 볼 시 제대로 된 답변을 얻을 수 없다.
  • 쳇지티피나 제미나이의 경우, 어삼가에 대해 일본어로 물어볼 시 크게는 맞고 자잘하게는 틀린 답변을 얻을 수 있다.
  • 윈도우 코파일럿의 경우, 한국어든 일본어 간결하지만 바른 답변을 얻을 수 있었다.

가토 기요마사[加藤 ]
1611년 6월 24일 병사(病死) 50세.

1562년 ~ 1611년.
시즈가타케[賤ヶ岳] 칠본창(七本槍)[각주:1]중 한 명. 히데요시[秀吉]가 큐우슈우[九州]를 제압하자 히데요시에게서 히고[肥後]의 반(半)을 하사받았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동군(東軍)에 속하였고, 히고 일국(一国)를 영유하며 쿠마모토 성[熊本城]을 축성하였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회견을 성사시켰지만 곧바로 병이 나서 죽었다.



갈등으로 고심한 말년

 카토우 키요마사가 일부 지역을 뺀 히고[肥後]와 붕고[豊後]의 3개 군(郡)[각주:2]을 합하여 54만석을 소유하게 된 것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인 1600년 11월.

 키요마사의 "말년"은 용맹을 바탕 삼아 혁혁한 공을 세워 온 센고쿠[戦国] 무장에서 위정자(爲政者)로 변신한 이 해의 38살부터 한창 일할 나이인 50세로 죽었을 때까지인 12년간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쿠마모토에서는 키요마사를 [세이쇼우 코우(清正公 = 키요마사 공)]을 줄여 [세이쇼코 상(セイショコ さん = 키요마사 씨)]이라 부르며 키요마사의 은덕(恩徳)을 우러르는 풍습이 남아있다. 이 12년 동안 키요마사가 정력적으로 기반을 닦고 발전을 위해 노력한 것이 후에 쿠마모토 발전의 기초가 되었고 지금도 그 노력의 은혜를 입고 있기 때문이다.

 천하의 명성(名城)인 쿠마모토 성(城)의 축성, 가도(街道)의 정비, 관개(灌漑)의 확충, 간척(干拓) 등에 의한 경작지(耕作地)의 조성, 제사(製絲) 등의 산업 진흥 등이 그 후의 히고 쿠마모토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히고 카토우 가문[加藤家]은 그 다음 대인 타다히로[忠広]의 삭탈관직[改易[각주:3]]과 함께 끊어지지만, 카토우 가문 다음으로 이봉(移封)되어 온 호소카와 가문[細川家]이 카토우 가문의 유적, 풍습을 존중한 것도 키요마사에 대한 히고 사람들의 감사와 존경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군(名君) 카토우 키요마사의 말년은 정말 충실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내면(内面)에서는 토요토미 은고(恩顧)의 다이묘우[大名]이면서도, 토쿠가와 정권에 순종할 수 밖에 없는 인간적 갈등으로 고심했다고 여겨진다.

토요토미 안태(安泰)를 꾀하다

 키요마사에게는 세 명의 측실(側室)이 있었다고 한다.
 2남 1녀를 낳은 ‘혼가쿠인[本覚院 = 통칭 카와지리도노[川尻殿]]’, ‘죠우코우인[浄光院 = 통칭 키쿠치도노[菊池殿]]’, 후에 뒤를 잇는 셋째 아들 타다히로와 둘째 딸 아마[あま]의 1남1녀를 낳은 ‘쇼우오우인[正応院]’이다.

 키요마사가 죽은 뒤, 불과 12살며 셋째 아들 타다히로가 뒤를 이은 것은 이미 장남 토라노스케[虎之助]가 2살, 둘째인 타다마사[忠正]가 8살에 요절했기 때문이다.

 정실(正室)[각주:4]법호(法號)를 ‘쇼우죠우인[清浄院]’이라 하는데, 이에야스의 외숙부 미즈노 타다시게[水野 忠重]의 딸이다. 이에야스는 모친 오다이[於大 = 덴즈우인[伝通院]]의 동생인 이 타다시게의 딸을 양녀로 삼아서 키요마사에게 시집보냈다[각주:5].

 그리고 키요마사의 장녀인 코야[古屋 – 혼가쿠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를 토쿠가와 사천왕[徳川 四天王][각주:6] 중 한 명인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의 아들 야스카츠[康勝]와 결혼시켰고, 둘째 딸 아마를 후에 어삼가(御三家[각주:7])인 키슈우 토쿠가와 가문[紀州家]를 세운 이에야스의 10째 아들 요리노부[徳川 頼宣]와 결혼시켰다.

 토쿠가와 가문과 키요마사가 이런 인척(姻戚)관계로 이어진 것은, 이에야스가 토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기 위한 책략의 하나로 이루어진 것이다. 토요토미 은고 다이묘우(大名)를 회유하기 위한 정략결혼이었다. 키요마사가 비록 서국(西国) 큐우슈우[九州]에 있더라도, 키요마사라는 인물은 적으로 돌리면 또 이 정도로 성가신 무장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키요마사는 밖에서 보면 토쿠가와와 친하며, 토요토미와는 거리가 생긴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 우직한 인물은 고(故) 히데요시의 두터운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 은혜를 갚는 길은 겉으론 토쿠가와에게 복종하면서, 히데요리를 당주로 하는 토요토미 가문의 안태를 꾀하는 것 말고는 없었던 것이다.

 이에야스가 강요하는 니죠우 성[二条城]에서 히데요리와의 회견을 성사시키기 위해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등과 함께 요도도노[淀殿 – 히데요리의 생모]를 설득하여 실현시킨 것은 토요토미 가문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하고자 하는 생각에서였다.

귀국 도중에 병이 나다

쿠마모토 시[熊本城]에 있는 키요마사 동상.

 이에야스와 히데요리의 회견은 1611년 3월 27일 무사히 끝났다.
 니죠우 성에서 나와 숙소로 돌아온 키요마사가 침실에서 몸 안에 품고 있던 단도를 꺼내고 잠시 이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慶元記[각주:8]].

 회견장에서 만약의 일이라도 발생한다면 그 단도로 히데요리를 지킬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사태가 되지 않았다는 안심에서 흐른 눈물일 것이다.

 히데요리를 오오사카 성[大坂城]으로 경호하며 돌려보내는 도중에 후시미[伏見]에 들렸다. 그곳에 있는 자기 저택 앞을 흐르는 강에 배를 띄우고 그 배에서 잔치를 연 키요마사는 그제서야 어깨의 무거운 짐을 내린 듯한 생각이 들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같은 해 5월 하순.
 귀국하던 배에서 갑자기 병이 나 병든 몸을 질질 끌듯이 하며 쿠마모토로 돌아왔다. 혀가 꼬이는 증상의 병이었는데 확실한 병명(病名)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병은 나날이 악화되어 6월 24일 숨을 거두었다.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大坂 夏の陣]에서 토요토미가(家)가 멸망하기 4년 전이었다.

  1. 1583년 오우미[近江]에서 히데요시[秀吉]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싸운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2. 후에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乱]의 무대가 되는 아마쿠사[天草] 섬 등은 기독교도들이 많았기에 막부에 부탁하여 옆 지방인 붕고[豊後]의 세 개군(郡)과 교환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카이에키[改易]라 읽는다.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줄임. [본문으로]
  4. 키요마사의 정실은 야마자키 카타이에[山崎 片家]의 딸로, 키요마사가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건너가 있던 중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즉 쇼우죠우인[清浄院]은 후실(後室). [본문으로]
  5. 그녀의 나이 18세. 키요마사와는 20살 차이가 난다. [본문으로]
  6.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토쿠가와가(家)를 지탱한 네 명의 공신을 지칭. [본문으로]
  7. 오와리[尾張], 키슈우[紀州], 미토[水戸]에 이에야스의 각각 9째, 10째, 11째 아들들이 임명된 가문으로, 후에 쇼우군 본가가 끊길 경우 쇼우군을 배출할 수 있는 가문. 특징 겸 우대로써 토쿠가와[徳川]라는 성(姓)을 사용할 수 있었으며, 에도 바쿠후에서는 다방면에 걸쳐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본문으로]
  8. 호우죠우 츠나시게(北条 綱成)의 증손자 호우죠우 우지나가(北条 氏長)가 쓴 책.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