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부 씨[南部氏]는 카이 겐지[甲斐源氏]의 핏줄을 잇는 무츠[]의 명문가이다.
 에도 시대[
江戸時代], 항간에는 '초생달이 둥글게 될 때까지 난부의 영지[각주:1]'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그 영지[領地]가 광대했다. 북으로는 현재의 아오모리 현[青森県]의 시모키타 반도[下北半島]부터 시작해서 남으로는 이와테 현[岩手県]의 키타카미가와[北上川] 강의 중앙부까지 펼쳐져 있었다. 이 광대한 영지를 구축한 것이 26대 당주인 노부나오[信直]였다.

 노부나오의 난부 가문 상속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동족간의 극심한 대립항쟁이 있었다.
 난부 24대 하루마사[
晴政]에게는 처음에 아들이 없어, 장녀의 남편 '탓코쿠로우 노부나오[田子[각주:2]九郎 信直]'를 후계자로 삼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하루마사에게 아들이 탄생한 것이다. '츠루치요[鶴千代]'였다. 하루마사는 양자이자 후계자로 삼았던 노부나오를 살해하려 해서 가문 내분이 일어나지만, 결국 어린 츠루치요가 '하루츠구[晴継]'라는 이름으로 25대 당주가 되었다.

 그런데 1587년 1월. 하루마사가 죽은 20일 후에 하루츠구도 부친의 뒤를 쫓기라도 하듯 급사한 것이다. 나이 불과 13세였다.[각주:3]

 그 후계자의 자리를 놓고 탓코쿠로우 노부나오와 하루마사 둘째 딸의 남편 '쿠노헤 사네치카[
実親][각주:4]와의 다툼이 시작되었지만, 일문[一門]의 실력자 키타 노부치카[ 信愛]가 무사 100명, 철포 100정으로 상속회의장을 포위하는 식의 실력행사로 회의를 리드하여 결국 노부나오를 26대 당주로 앉힌 것이었다.

 전() 성주의 장례식을 끝마치고 돌아오던 중에 저격 당하는 등 앞길이 순탄치만은 않은 노부나오였지만, 그는 여기서 일생일대의 도박에 나선다. 곧바로 가신 모두를 등성 시켜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는 반역자로서 처벌한다고 선포한 것이다. 이리하여 쿠노헤 사네치카를 옹립하고자 계속 반항하던 쿠노헤 마사자네[ 政実]이하 십여 명의 무장들도 숨죽인다.

 내란은 진정된 듯이 보였다. 하지만 바로 이때 생각지도 못했던 사건이 일어난다.
 난부 가문을 섬기며 츠가루[
津軽]를 다스리던 오오우라 타메노부[大浦 為信 – 나중에 '츠가루'로 성을 바꾼다]가 돌연 츠가루에서 독립을 외친 것이다[각주:5].

 이렇게 노부나오가 영내[
領內]의 내란에 정신 팔려있는 동안, 중앙에서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천하제패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바로 이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 정보를 노부나오에게 전해준 것이 '키요시게[清茂]'라는 쿄우토[京都]의 매[] 상인이었다는 일화가 있다. 키요시게가 말하길 오다와라 호우죠우 씨[条氏]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멸문 당할 것이며, 그 후 히데요시는 곧바로 오우슈우[奥州]로 진격할 예정이라고 하였다. 노부나오는 앙천했다. 서둘러 히데요시에게로 가 부하가 되겠다는 서약을 하지 않으면 난부 가문의 앞날이 위험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기에 이곳을 떠나면 노부나오와 반목하는 쿠노헤 일족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 뻔했다. 그래서 우선 사자[使者]를 파견하기로 하였지만, 그러나 이를 어쩌랴 난부 가문에 있던 자들은 사투리가 너무 심했고 행동거지도 촌놈 같아 도저히 히데요시에게 보내어 예를 표할 수 있을만한 인물이 없다고 노부나오는 말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 키요시게 자신이 난부 가문의 사자가 되어 오다와라의 히데요시에게 가 대신 충성을 표했다.

 히데요시는, "이렇게 빨리 사자를 보낸 것이 기특하다. 난부 가문 대대로 이어 내려오던 영토는 보장할 테니 걱정할 것 없네. 일족이 반란을 일으키다니 기괴한 일이로다. 이 오다와라를 정리하는 대로 이 히데요시가 오우슈우에 내려갈 테니 그때까지 성을 확실히 지키시게"라는 약속은 받았지만, 츠가루 토벌 신청에 대해서만은 츠가루 타메노부가 한발 앞서 히데요시를 만나 츠가루 영유권을 확인하는 증서를 받았기에 토벌에 관한 허락을 받지 못했다.

 이 일년 후. 난부 영내는 쿠노헤 마사자네의 반란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다. 히데요시가 파견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시작으로 히데요시의 조카 히데츠구[秀次]나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거기에 오우슈우[奥州]의 여러 장수들을 더한 15만이라는 대군을 상대로 쿠노헤 마사자네는 2개월간 농성을 하였지만, 결국 모략에 빠져 패했다.

이것을 끝으로 난부는 평정되었다.

[난부 노부나오(南部 信直)]
1546년생. 처음엔 탓코우쿠로우[
田子九]라 불렸다. 1586년 히데요시에게서 영지를 보장받았다. 무츠[] 산노헤[] 성주. 쿠노헤 마사자네 토멸 후 10만석으로 가증. 이후 모리오카 성[盛岡城]의 축성을 시작하였다. 1599년 10월 죽다. 54세.

  1. '三日月の丸くなるまで南部領'. 이 말은 그의 양아버지 하루마사[晴政] 때부터 생긴 말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2. '탓코[田子]는 노부나오의 거성이 있던 지명 [본문으로]
  3. 괴한들의 습격당해 죽었다고 한다. 범인은 쿠노헤 마사자네[九戸 政実]라는 설도 있으며 난부 노부나오[南部 信直]가 죽였다는 설도 있다 [본문으로]
  4. 쿠노헤 마사자네[九戸 政実]의 동생 [본문으로]
  5. 그 전(1571년)에 노부나오의 친부[親父]이자 츠가루 군[津軽郡]의 책임자(郡代)인 이시카와 타카노부[石川 高信]를 죽이며 반란시작. 이 때는 타메노부가 츠가루 군[津軽郡] 전체를 손에 넣은 시기 [본문으로]

난부 노부나오(南部 信直)

159910 5일 병사(病死) 54.


1546 ~ 1599

무츠[陸奧] 탓코[田子]성주 이시카와 타카노부[石川 高信]의 아들. 종가(宗家) 난부 하루츠구(南部 晴継)의 뒤를 이어 26대 당주(當主)가 되었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협력을 얻어 쿠노헤 마사자네(九戶 政実)의 난을 진압하였고, 새로이 모리오카(盛岡)성을 쌓아 후에 난부 번[] 24만석의 기초를 쌓았다.










오산으로 알게 된 시대의 종언.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에 호응하여 난부 노부나오[南部 信直]는 일천의 병사를 이끌고 참진하였다. 츠가루 타메노[津軽 為信]에게 난부 가문[南部家의 영지였던 츠가루[津軽] 일대을 빼앗긴 원한이 뼈에 사무칠 정도인 노부나오에게 있어서 참진은 영토를 탈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을 터였다. 그러나 원수 타메노부는 불과 18기의 기마 무사만을 대동한채 노부나오가 오기 3일전에 히데요시를 만나서 영지 소유권을 받아 낸 상태였다.


 억울함에 흥분하는 노부나오에게 "분노를 참고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 다독거린 것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였다. 노부나오는 이렇게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의 종언을 깨닫게 되었다. 히데요시가 발령한 [칸토우, 오우우 총무사령(関東,奥羽惣無事令)]- 즉 사투금지령[私鬪禁止令]을 어기면 난부가의 존립이 위험할 터였다.


 힘에 의존한 타메노부 토벌에서는 몇 번이나 밀렸기에 뛰어난 무장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노부나오지만, 대세판단의 정확함에 있어서는 남들보다 뛰어난 면이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죽은 뒤 천하의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해,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유력해진 히데요시에게 접근하기 위해 그의 신임이 두터운 토시이에에게 줄을 대고 있었다. 그 방법은 그때까지 말이나 매의 헌상을 매개로 하는 오우우[奥羽]의 여러 호족들의 방법[각주:1]에 더하여 기청문(起請文-서약서(誓約書))까지 토시이에에게 받아냄으로써 정치적 의도를 명확히 한 획기적인 것이었다.


 타메노부의 반란 후 노부나오는 일문의 효웅 쿠노헤 마사자네[九戶 政実]에게 배반당한다. 타메노부의 경우에는 사투금지령이 노부나오의 발목을 죄는 덫이 되었지만 마사자네의 경우는 노부나오를 구하는 마법의 지팡이가 되었다.


쿠노헤의 난과 오우우 처리(奥羽再仕置)


 노부나오는 난부가 24대 하루마사[晴政]의 사촌동생이었다. 처는 하루마사의 장녀였다. 하루마사의 양자로 들어가 후계자 자리를 약속 받았지만, 하루마사의 애첩에게서 하루츠구[晴継]가 태어나자 입장이 미묘하게 되었고 더구나 처가 먼저 죽었기에 후계자 후보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1582 1월.

 하루마사가 죽자 하루츠구가 당주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러나 그 20여일 후 부친의 장례식을 끝내고 산노헤 성[三戶城]으로 돌아오던 도중 자객에게 습격 당했다고도, 독살 당해 죽었다고도 한다. 그리하여 가독(家督) 상속 문제가 대두되어 가문이 둘로 나뉘는 바람에 무력에 위한 싸움은 없었으나 가문 내부에 석연치 않은 앙금을 남기게 되었다. 노부나오는 키타 노부치카[北 信愛], 하치노헤 마사요시[八戶 政栄]들의 지지를 얻어 26대 당주가 되었다. 나이 37세였다.


 한편 '노부나오는 두려워 할 가치도 없다'며 적의를 보이는 마사자네 초대 미츠유키[光行] 때 부터 갈라져 나온 난부 가문의 명문으로 쿠노헤[九戶], 니노헤[二戶]의 양 군()을 영유하고 있던 가문 내에서도 높은 신분이었다. 일촉즉발의 위기를 내부에 품고 있으면서도 평화를 유지하고 있던 난부 일족에게 결정적인 분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오우우 처리(奥羽仕置)[각주:2]때문이었다. 처리(仕置)는 오다와라성 공격에 참여하지 않았던 여러 제후들에 대한 본보기였는데, 가지고 있던 영토를 빼앗긴 무장의 원한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군사들이 떠나자 구영주(舊領主)들과 이들과 관계를 맺고 있던 사람들에 의한 반란이 오우우[奥羽] 각지에서 계속해서 일어나 히데요시의 계획은 어긋나 버렸다.


 이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마사자네 후계문제에 불만을 품고 있던 무장들에게 격문을 날려 호응을 얻자 5천의 병사를 이끌고부 종가에게 반란을 일으켜 자신의 거성(居城) 쿠노헤 성에서 농성했다. 1591년의 가을이었다.


 노부나오의 구원 요청에 응해 히데요시는 마사자네의 봉기를 사투(私鬪)로 판단하여, 재처리(再仕置)를 통해서 천하 통일을 과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히데츠구[秀次]를 총대장으로 하는 원군을 파견. 여기에 오우우의 여러 무장의 병사들을 더한 10만의 대군으로 쿠노헤성을 포위. 4일간의 공성전 후 모략에 의해 마사자네 일당을 섬멸했다.


난부가 중흥의 시조


 노부나오는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 종군.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에 있던 중 하치노헤 마사요시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이곳에 모여 있는 모두가 피로해 있다. 이것을 히데요시에게 직언하면 처분 받을 것 같기에, 이를 두려워 하여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다. 이것만 보아도 이곳이 어떤지 알 수 있겠지
 고 하며 히데요시의 광기(狂氣)를 전하고 있다. 이 또한 노부나오의 통찰력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의 권유를 받아, 거성을 북쪽으로 치우친 산노헤 성[三戶城]에서 중앙부의 모리오카[盛岡]으로 옮기는 것을 허락 받은 것은 이 나고야 재진 중의 일이었다.


 노부나오가 난부 가문 중흥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이유는 천하인 히데요시를 따르며 난부 7()을 안도 받아 성 밑 마을(城下町) 모리오카로 전국의 상인이나 직인(職人)을 불러 모아 우대하여 번영시킨 것도 있지만, 거기에 더해서 카즈노[鹿角]의 산 등에서 금을 캐내어 재정을 풍부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1599, 노부나오는 모리오카성에서 발병. 쿠노헤 성을 수리, 복구하여 이름 바꾼 모리오카 성으로 옮긴 후에 죽었다. 나이는 54. 가독은 토시나오[利直]가 이었다.

  1. 이 방식은 노부나가에게 귀순한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노부나가가 만들어낸 방법이었다. 즉 이 오우우, 즉 토우호쿠[東北] 지방 뿐만 아니라 큐우슈우[九州]의 시마즈[島津]나 오오토모[大友]도 노부나가에게 매를 헌상하여 노부나가에게 귀순하였다. [본문으로]
  2. 히데요시는 참전하지 않았던 토우호쿠[東北=오우우[奥羽]] 무장들의 영토를 빼앗아, 자기 가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본문으로]

구노헤 마사자네(九戶 政実)
1591년 9월 20일 처형 56세.

이곳에 가면 쿠노헤 마사자네가 그려진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링크)

1536~1591.
무츠
[陸奧] 쿠노헤[九戶]성주. 쿠노헤씨는 난부[南部]씨의 분가. 종가(宗家)의 난부 노부나오((南部 信直)에 대항하여 거병, 농성하지만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아사노 나가마사[淺野 長政] 등이 이끄는 토요토미 씨[豊臣氏]의 오우슈우 평정군[奧州仕置軍]에 진압되어 일족 전원이 처형 당했다.

봉기결단의 배경

 1591년. 쿠노헤 성주 마사자네는 종가(宗家)의 난부 씨 26대 당주인 노부나오에게 모반을 일으킨다. 당시 마사자네는 56세의 노장이었다. 따라서 봉기는 최후의 도전이었으며, 모든 것을 건 일생일대의 도박이었던 것이다.
'나야말로 난부의 정통후계자이다'라고 공언하며, '노부나오는 듣보잡'[각주:1]이라 말하며 마사자네는 오랫 동안 쌓아 온 주변의 여러 호족들과의 우호, 동맹관계에 더하여 일족의 두령으로서의 신망을 바탕으로 그 동안 종가에게 쌓인 반목과 불화를 총결산하는 결단이었다.

 암군(暗君)이라고 평가받던 난부 가문 24대 하루마사[晴政]가 1582년 1월에 죽자, 하루마사 첩의 아들인 하루츠구[晴継]가 13세의 나이로 가독을 잇게 되었다. 그러나 하루츠구는 당주의 자리를 이은 지 20여일만에 급사한다. 부친의 장례 종료 후 눈바람이 심한 밤에 산노헤[三戶]성으로 귀성 중에 자객에게 습격받았기 때문이다. 한 편으론 독살의 소문도 돌았다.

 이 사건을 꾸민 것은 평소의 거동으로 보았을 때 쿠노헤 일족임에 틀림이 없다고 단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가문은 둘로 나뉘어지기에 이르렀다. 후계자로서 마사자네의 이름을 거론하는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정작 마사자네는 동생인 쿠노헤 사네치카[実親]를 추천한다. 사네치카가 하루마사의 둘째 딸과 결혼한 것과 쿠노헤 일족이 난부가 19지족(支族)중에 필두임을 이유로 들었다.

 한편 키타 노부치카[北 信愛]등은 23대 야스노부[安信]의 동생 이시카와 타카노부[石川 高信 - 츠가루 지방 당담관(津軽 郡代)]의 아들인 노부나오[信直]를 추천하였다. 노부나오의 부인은 하루마사의 첫째 딸이었다. 한 때 하루마사의 양자가 되어 후계자 자리에 있었지만, 첩에게서 하루츠구가 태어났기 때문에 차츰 하루마사와 사이가 벌어졌고, 거기에 처도 죽는 바람에 후계자의 지위를 반납하고 있었다.

 초대 미츠유키[光行]부터 시작되는 난부 분가 중 명문가의 리더[각주:2]이고 또한 쿠노헤, 니노헤[二戶]의 양 군(郡)을 소유하면서 주변 여러 호족을 휘하로 두고 있던 마사자네조차 "노부나오는 예전 하루마사 공에게 미움 받기는 했지만 일시나마 후계자로 인정받았다. 또한 장녀는 죽었다고는 해도 그녀의 남편이기도 했던 사람"이라 말하며 물러났지만 맘속으로는 후일을 기약하게 되었다.

봉기군 각지에서 우세.

 모반을 일으킨 마사자네가 처음부터 농성전을 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노부나오가 자신의 적자 토시나오[利直]를 히데요시[秀吉]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하자, 히데요시는 마사자네가 사투금지령(私闘禁止令)을 위반했다고 판단. 휘하 장병과 오우우(奥羽) 다이묘우의 세력을 규합하여 10만의 오우 평정군([奥羽仕置軍]을 파견했기 때문에 농성에 이르게 된 것이다. 히데요시는 이 사건을 천하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과시하기 위한 표적으로 삼은 것이다.

 후세에 [쿠노헤의 난]이라 일컬어지는 이 반란은 오우우 평정군이 도착하기 전 1월에서 8월말까지 난부령 각지에서 종가 군과 쿠노헤 군과의 사이에서 격전이 펼쳐졌다. 전체적으로 봐서 종가군은 패색이 짙었고, 형세에 따라서는 - 하면서 방관하고 있던 여러 호족들도 전부 쿠노헤군에 가담하여 총세 약 5천으로 증가했다. 그에 비해 종가군은 3천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예전에 멸망시킨 시와[志波]의 시바 씨[斯波氏]의 잔당들까지도 봉기를 해서 노부나오는 위기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9월 1일 오우우 평정군이 도착하였다.

모략에 당하다.

 아무리 무용이 뛰어나다고 소문난 쿠노헤 일족이라도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가 이끄는 대군과 야전에서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 천연의 요해인 쿠노헤성에서 농성하며 무문(武門)의 의지를 나타내고자 하였다.

 평정군 진영에는 츠가루 타메노부[津軽 為信]의 군 3천이 있었다. 타메노부는 마사자네의 지원을 받으며 츠가루의 영주가 될 수 있었다. 마사자네는 자신도 권모술수을 잘 부려왔던 사람이기에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같은 평정군 진영에 있던 노부나오는 어처구니 없었다. 노부나오의 부친 타카노부는 바로 타메노부의 기습을 받아 자결했기 때문이다. 불구대천의 원수임에도 불구하고 손을 잡고 마사자네를 물리쳐야 했다.

 쿠노헤 일족은 용감히 싸웠고, 시골의 작은 성이라며 무시한 평정군은 무수한 사상자를 낼 뿐이었다. 이렇게 되자 공성군은 하나의 계책을 세우게 된다. 모략은 전투에 항상 있는 것이다. 쿠노헤 가문의 묘소가 있는 쵸우코우 사[長興寺]의 사츠텐[薩天] 화상이 모략인 줄도 모르고 권항사(勸降使)가 되었다.

 무장들 중에는 사네치카[각주:3] 한 명만이 끝까지 투항에 반대했다. 후세에 [쿠노헤의 학살(=九戸のなで斬り)]이라 칭해지는 살육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사네치카는 성밖으로 달려 나가 싸우다 죽었다. 그리하여 평정군의 공성전은 9월 1일에 시작해서 4일에 끝났다.

 속임수에 빠진 항장(降將) 마사자네 등 8명은 9월 20일 다테[伊達] 영내에 있는 히데츠구의 본영 이와가사키[岩ヶ崎]로 보내져 참수되었다. 다테의 영지에서 처형한 것은 마사자네와 사이가 좋으며 야심가인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에 대한 본보기 이기도 했다.

 동장군(冬將軍)이 가까이 왔는데도 화해를 선택한 마사자네의 생각이 어리석었다고 힐난하는 역사가도 있다. 마사자네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오천의 장병을 구하기 위해서 천하인의 도량을 재어 본 것이다. 무참한 결과만을 보고 정치적인 동찰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단지 아쉬운 것은 마사자네가 전국의 무대로 올라가는 것이 너무 늦었다는 것이었다.

  1. 노부나오는 난부 가문의 분가인 이시카와 타카노부[石川 高信]의 서장자이다. [본문으로]
  2. 쿠노헤 씨는 미츠유키의 여섯째 아들 유키츠라[行連]부터 시작된다. [본문으로]
  3. 난부가의 후계로 추대되었던 마사자네의 동생 [본문으로]

쓰가루 다메노부[津軽 為信]
1607년 12월 5일 병사 58세.

1550 ~ 1607.

히로사키[弘前]의 번조(藩祖). 처음엔 오오우라[大浦]씨를 칭하나 난부[南部]씨의 지배가 약화되자 독립.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서 츠가루 지방의 지배를 인정 받아, 츠가루를 성(姓)으로 삼았다.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는 동군에 속해 오오가키[大垣] 공략에 참가하였다.

 

 

 




 



전국말기에 주가를 배반한 무장.

 

 오오우라 성[大浦城]의 성주 오오우라 타메노리[大浦 爲則]의 사위인 타메노부[爲信]는 그 때까지 난부[南部]의 성(姓)을 썼었다. 츠가루[津軽]라는 성은 1589년 오다와라 성[小田原城] 공략을 위해 참진하여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서 츠가루에 3개 군(郡)을 안도 받으면서 쓴 성이다.


 난부 가문 츠가루 담당관(郡代)의 집사(執事)를 맡고 있던 타메노부가 츠가루 지역 일원을 난부 가문에게서 무력으로 강탈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난부 가문에 후계자 문제로 인해 내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타메노부는 불만이 많은 쿠노헤 마사자네[九戶 政実]와 손을 잡는 한편 아세이시 성[浅瀬石城]을 영지로 가지고 있던 난부 가문의 가신 센토쿠 마사우지[千德 政氏]와 맹약을 맺고 지금까지 츠가루의 영민을 잘 다스린 실적을 기반으로 츠가루 일원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운 좋게도 이런 강탈 행위가 히데요시가 발령한 '칸토우오우 총무사령[関東奧羽㹅無事令]'[각주:1]이 발령되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출 수 있어 센고쿠 시대 말기에 자신의 영토를 얻는데 성공한 것이다. 물론 상대방의 역량을 정확히 파악한 후에 속공과 기습 작전을 성공시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시류를 잘 살펴 민정에 힘을 쏟은 점이 특징적이다. 지용겸비의 무장이라 칭해도 좋을 것이다.

 

놀랄만한 전략으로 영토를 안도

 

 군웅할거의 센고쿠 시대는 힘 있는 자가 내키는대로 빼았을 수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타메노부는 신빙성 높은 정보를 모아서 중앙 정국의 동향을 누구보다도 빨리 탐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인물에게 접근하면 유리한가를 정확히 판단했다. 센고쿠 무장의 대부분은 중앙 권력자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진기한 물건이나 재보를 헌상하는 방법을 이용했다. 타메노부도 그렇게 하여 성공한 무장 중의 한 명이다.

 

 주인이었던 난부 가문에 반기를 든 대담함에 더하여 치밀함을 소유한 타메노부는 유서 깊은 가문에서 태어나지 않았기에 쓸데없는 관습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허례허식에 묶일 필요가 없었다. 창피함이라던가 겉모습에 집착하지 않고 어떻게 행동하는 지가 최선인가를 재빨리 판단할 수 있었던 희대의 명장이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히데요시에게서 영토를 인정 받으려 할 때 나타난다.

 타메노부는 불과 18기(騎)의 부하와 함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오다와라 공략 중인 히데요시의 본진을 목표로 내달려, 누마즈[沼津]에서 히데요시를 배알해서는 영토를 인정 받을 수 있었다. 난부 종가(宗家)의 노부나오[信直]가 히데요시를 알현하기 3일 전이라는 아슬아슬함이었다. 1590년 3월 27일의 일이었다.

 

 타메노부는 히데요시에게 츠가루 일대의 지배를 인정받은 다음부터 '쿠노헤의 란[九戸の乱]' 출병을 시작으로 많은 군역(軍役)을 부과 받지만 충실히 따랐다. 그러나 히데요시 사후의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에서는 토쿠가와[德川]를 선택, 오오카키 성[大垣城] 공략에 참가하여 이에야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한편 쿄우토[京都] 조정에서 존중받고 있던 오섭가[五摂家][각주:2]의 필두인 코노에 가문[近衛家]과 친교를 맺는 등 여타의 무장들과는 다른 수법으로 정보 수집에 열을 올렸다. 타메노부 자신도 3번 쿄우토에 올라 재물을 받치고 감사의 뜻을 올리면서 쿄우토 산죠우 거리[三条通り]에 있는 츠가루 번(藩)의 저택에 머물면서 때때로 자식들을 불러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곤 했다.

 

말년과 죽음

 

 본의는 아니지만 가문의 안정을 위해서 츠가루 통일의 공로자인 센토쿠 일족을 모략으로 멸망시킨 타메노부는 남을 믿지 못하는 마음을 고치고자 남들보다 더 불교에 정진하여 마음의 불안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불행은 계속해서찾아 왔다. 원래부터 사이가 좋지 않던 장남 노부타케[信建]는 츠가루를 버리고 떠난 뒤 쿄우토에서 병에 걸려 죽었다. 3대 번주로 눈 여겨 두고 있던 손자인 오오쿠마[大熊]가 얼굴에 큰 화상을 입는 사고를 당했고 계속해서 귀여워하던 딸 토미히메[富姬]가 자신 보다 먼저 죽는 비운을 맞보게 된다.

 

 츠가루 10만석의 번조(藩祖) 타메노부의 말년은 깊은 쓸쓸함과 죄를 뉘우치는 회개로 가득차게 되었다.

 오오우라 성에서 호리코시 성[堀越城]으로 옮긴 타메노부는 요해지인 타카가오카[鷹ヶ岡]에 새로운 성을 쌓으려 했으나 막부(幕府)에 허락 받지 못해 생전에 실현을 보지 못했다.(2대째의 노부히라[信枚]대에 완성).

 중앙 정권에 순순히 따르는 것으로 영지의 안태를 꾀했던 타메노부는 심혈을 쏟아부은듯 1607년 12월 5일 58세를 일기로 쿄우토에서 죽었다. 쿄우토의 츠가루 번의 저택이 아닌, 야마시나[山料]의 칼 장인(刀工)인 라이쿠니미치[來囯道]의 저택이라 한다. 히데요시처럼 심한 기침에 의한 것으로 추측된다.

 

 타메노부는 죽음을 앞두고 3남 노부히라를 머리맡으로 불러 가독을 물려주었다. 2남 노부카타[信堅]은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노부히라는 운 좋게도 후에 이에야스의 양녀 마테히메[滿天姬]를 정실로 맞아들였다. 마테히메는 이에야스의 이부제 마츠다이라 야스모토[松平 康元]의 딸이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楅島 正則]의 양자 마사유키[正之]에게 시집갔었으나 마사유키가 폐적, 참살당해 19세에 과부가 되어 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에야스는 이를 불쌍히 여겨 노부히라에게 시집보냈다고 한다.

  1. 칸토우[関東]와 오우우[奥羽] 지방의 무사들에게 사적인 타툼을 하지 말라는 명령. [본문으로]
  2. '고셋케'라고 발음. 칸파쿠[関白]를 배출할 수 있는 코노에[近衛], 이치죠우[一条], 니죠우[二条], 쿠죠우[九条], 타카츠카사[鷹司]를 말한다. 서열은 필두 코노에 가문을 제외하고 모두 동급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