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일본판 >

 천하를 제패했던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조차 타케다 신겐의 군사적 능력에는 위협을 느껴, 양녀(養女)[각주:1] 를 신겐의 아들 카츠요리[頼]에게 시집 보내는 등 신겐의 마음을 잡고자 하였다. 신겐이 이끄는 코우슈우[甲州][각주:2] 군단의 무위(武威)는 당시 천하를 진동시켰다.

 

 1920년대 즈음 군사평론가로써 저명했던 사쿠라이 타다요시[櫻井 忠温][각주:3]는 신겐을 나폴레옹에 필적한다고 까지 말하고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신겐은 태어났을 때 머리가 크고 눈이 코를 감출 정도로 컸었다고 한다. 그 울음은 귀를 쥐어뜯을 정도라 짜증을 잘 내는 부친 노부토라[信虎]가 귀를 막았다고 한다. 평범한 아기가 아니었다.

 

 내향적인 성격의 소년이었지만 기질은 강했다.

 9살 때. 절의 높은 어른에게 반항하여 연못으로 던져졌지만 울먹이는 일 없이 물 속에 뻣뻣이 서 있었다고 한다. 어린 신겐은 또한 애벌레를 굉장히 싫어했다. 그래서 중신인 바바 노부후사[馬場 信房]가 이것을 고치고자 일부러 애벌레를 보여주고서는 겁먹는 신겐을 비웃었다. 그러자 신겐은 눈빛이 변하여 갑자기 그 애벌레를 손으로 쥐어 찌부러트렸다. 그 때문에 손가락 색이 곧바로 변색되어 버렸다고 한다.

 

 첫 출진은 1536 11월 운노구치[海ノ口] 전투였다. 신겐 16살 때였다. 부친 노부토라는 8천의 병사를 이끌고 사쿠[佐久]운노구치 성(城)을 공격하였는데, 당시 성주는 무명(武名)으로 이름 높던 히라가 겐신뉴도우[平賀 玄信入道]였다. 3~4일간 계속 공격하였지만 함락되지 않았다. 12월이 다 지나갈 즈음 되었고 거기에 눈도 내렸다. 이 이상 공격해도 함락시킬 수 없을 것 같았다. 회의를 거쳐 철퇴하기로 결정되었다.

 이때 16살의 신겐이 부친 노부토라에게 철퇴의 후미(後尾)를 맡고 싶다고 나섰다. 거절하는 부친을 몇 번이고 졸라 결국 이 큰 임무를 맡게 되었다

 신겐은 부친의 군세가 카이[甲斐]를 향해서 철수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갑자기 수하 300을 이끌고 운노구치 성()에 야습을 감행했다.

 성안에는 병사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지역 무사들은 카이[甲斐] 군세가 물러나는 것을 보고 모두 자기네 지역으로 돌아갔다. 성에 있었던 것은 성주 히라가 겐신 이하 7~80. 그것도 승리의 축하주로 취해 있었다. 성은 싱겁게 점령되었다.

 

 부친 노부토라와 신겐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노부토라는 자신과 많이 닮아 성미가 괄괄한 신겐보다 온순한 둘째 노부시게[信繁]를 편애했던 듯 하다. 신년 축하연에서도 신겐을 건너뛰고는 노부시게에게만 술잔을 내렸다고 한다. 거기에 노부토라는 용맹하기는 했지만 성격이 잔인하여 부하도 영민도 그에게 심복하고 있지 않았다.

 

 신겐은 어떤 계획을 세워 그 실행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계획이 실행에 옮겨진 것은 1541 6 16일이었다. 부친 노부토라는 사위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에게 방문려고 스루가[駿河]로 향했다.

 신겐은 이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루가로 통하는 길을 카이 국경에서 차단해 버리고, 부친과 함께 떠난 가신들의 가족도 인질로 잡아놓았다. 이 때문에 함께 갔던 가신들은 노부토라를 혼자 스루가에 남겨놓고 카이로 도망쳐 왔다고 한다.

 카이에서 추방된 노부토라는 이후 이마가와 씨()의 식객이 되어 25년을 보내게 되는데, 82세의 고령으로 죽을 때까지 고향 카이의 땅을 밟지 못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부자간 갈등극은 또 한번 되풀이 된다.

 신겐의 후계자인 장남 요시노부[義信]가 부친 신겐에게 모반을 꾀한 것이다. 요시노부의 부인은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의 여동생이다. 요시노부는 이마가와 가문을 멸하려는 부친에 반발하여 암살을 획책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자살하게 된다.

 

 신겐의 정실[각주:4]은 나중에 사다이진[左大臣]이 되는 산죠우 킨요리[]의 딸로, 셋케[家]의 다음가는 명문(和家역자 주) 출신이었다. 부인의 언니는 당시 아시카가 막부[足利 幕府]의 실력자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 晴元]에게 시집갔으며, 여동생은 혼간지 켄뇨[本願寺 如]의 부인이 되었다. 켄뇨는 후에 이시야마 혼간지[石山 本願寺]에 웅거하며 잇코우잇키[一向一揆]의 총대장이 되어 오다 노부나가를 괴롭힌 인물이다.

 

 신겐에게는 몇 명의 측실이 있었는데, 비극의 히로인으로 유명한 것이 유우히메[由布姫]이다. 시나노[信濃]의 명문 스와 씨[諏訪氏]의 딸로, 부친 요리시게[重]는 신겐에게 속아 배를 가르고 죽었다. 히메는 24살에 죽지만 그녀가 낳은 아들이 타케다 가문의 후계자가 되는 카츠요리[頼]이다. 그녀는 자신의 친정인 스와 씨()의 대가 끊어지는 것을 슬퍼하여 아들의 이름에 스와 씨() 대대로 붙는 요리[]’라는 글자를 붙여 카츠요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각주:5]

 

 신겐은 군사적으로만 뛰어난 무장이 아니었다. 뛰어난 민정가로써도 업적을 남기고 있다.

 저명한 것으로 '코우슈우 법도 55개조[甲州法度五十五箇]'가 있다. 당시로써는 드물게 구체적으로 현대의 법학자도 '신겐이 정한 것이 형법상의 가장 적합하다'고 그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도 많이 참고했다고 한다.

 법도의 4조와 5조에 다른 지역() 사람과 결혼, 주종계약 혹은 편지를 주고받는 것을 금지하는 항목이 보인다. 또한 3조에는 상기의 금지 항목도 자기 지역 내에 있는 자가 모략의 필요상 행하는 것이라면 용인한다고 쓰여있다. 센고쿠[戦国]이기에 있을 수 있는 세세한 배려다.

 

 일본에서 최초로 금화(金貨)를 발행한 것도 신겐이었다. 영내(領內)에 금광을 개발하여 '코우킨[甲金]'이라 명명해서 유통시켰다. 품질이 굉장히 좋았다. 이에야스가 코우후[甲府]에 입성했을 때 징발한 액수는 30만 냥이었다고 한다. 신겐이 숨겨놓은 금은 상당한 액수라고 하여 여전히 매장금 전설이 남아있다.

 

 현재 야마나시 현[山梨県] 류우오우 정[町][각주:6]에 가면 신겐이 쌓게 만든 '신겐둑[信玄堤]'이라 부르는 카마나시 천[釜無川]의 제방이 남아닜다. 이 지역은 언제나 홍수로 넘쳤기에 심혈을 기울여 치수에 힘써 U자형(雁行) 제방을 쌓은 것이다.

 

 정강(精强)을 자랑하는 코우슈우 군단의 전법은 에치고[越後]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과는 대조적이었다. 켄신은 기발한 전법을 사용했지만 신겐은 어디까지나 정공법이었다. 마치 거대한 코끼리가 들판을 가로지르 듯 조직적인이고 위압적인 행동을 취했다.

 예를 들면 코우슈우류[甲州流]의 창술은 그때까지의 11이 아닌 2~30명이 전열을 짜고 돌진하는 것이었다. 1번대, 2번대, 3번대를 큰 북의 소리로 조종하였고, 붉은 갑옷과 검은 갑옷으로 구별하여 통일적인 행동을 취하게 하였다.

 

 우에스기 켄신과의 최대의 격전이라 일컬어지는 1561 9 10일의 카와나카지마 전투[川中島い]에서는 적장 우에스기 켄신이 본진으로 질주해 와 신겐에게 칼을 퍼부었다. 신겐은 순간적으로 일어나 지휘 부채[軍配]로 막았는데, 나중에 조사해보니 그 부채에는 8곳의 칼자국이 있었다고 한다.

 

 신겐 최후의 대작전은 1572년부터 시작되었다.

 쿄우토(京都)에 올라가 천하를 호령코자 하였던 것이다. 신겐 52세였다.

 하마마츠 성[浜松城] 밖의 미카타가하라[三方原] 들판에서 토쿠가와 군과의 싸움이 최대의 격전이었다.

 

 이에 앞서 타케다 군은 토쿠가와의 성들을 계속해서 함락시킨 후 미카타가하라에 포진한 후 개전한 것은 12 22일 오후 4시였다. 눈보라 치는 찬 바람 속에서 양군은 격돌하였다. 토쿠가와의 기세도 강하여 오야마다[小山田] 부대, 야마가타[山県] 부대가 무너졌다. 하지만 그 때 나이토우 마사토요[ 昌豊] 부대가 토쿠가와의 옆구리를 찔러 들어갔다. 곧바로 토쿠가와 군세는 혼란에 빠졌고 결국 무너져 내려 패주하였다.

 

 전투는 신겐의 압승이었지만 이때 이미 신겐의 운명은 시시각각 죽음을 향하고 있었다. 신겐의 천하 제패라는 웅대한 꿈은 결국 폐결핵에 의해 무너져 내린 것이다.

 병상이 악화되어 귀국하던 도중 53세의 생애를 마쳤다. 유언에 따라 죽음은 비밀로 되어 장례식이 치러진 것은 3년 뒤였다.

 

[다케다 신겐(武田 信玄)]

1521년 타케다 노부토라[武田 信虎]의 적자로 태어났다. 이름은 하루노부[晴信]. 법호를 호우쇼우인 신겐[法性院 信玄]이라고 하였다. 타케다 씨[武田氏]는 카이[甲斐]슈고[守護]이며 코우후[甲府]에 저택을 두고 있었다. 1541년 부친 노부토라를 스루가[駿河]로 추방하고 자립해서는 시나노[信濃]로 진격하여 스와[諏訪], 무라카미[村上], 오가사와라[小笠原] 등 여러 호족들을 쓰러뜨리고 시나노[信濃] 일원을 손에 넣었다.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과의 카와나카지마의 격전[川中島の戦い]은 유명하다. 1568년에는 스루가[駿河]의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親]를 물리쳤다. 코우즈케[上野], 토오토우미[遠江], 미카와[三河]의 일부를 합친 5개국을 지배했다. 1573 4 12일 시나노[信濃] 코만바[駒場]에서 죽었다.

  1. 여동생의 딸. [본문으로]
  2. 카이[甲斐]의 다른 이름. [본문으로]
  3. 청일전쟁의 여순전투에서 전신 8발의 총상과 수 많은 도상(刀傷) 등으로 기절, 시체로 분류되어 화장터에 옮겨지다가 생환. 여순전투에 대한 '육탄(肉彈)'이라는 작품을 남겨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함, 후에 일본 육군성 신문부장을 역임. [본문으로]
  4. 정확하게는 두 번째인 후실(後室). [본문으로]
  5. 당시 무장의 이름은 여러 정치적인 고려와 배려가 섞여 지어지는 것이기에 여성이 지을 수는 없었다. [본문으로]
  6. 현 카이 시[甲斐市]. [본문으로]

우에스기 켄신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6. 4. 1. 16:17 Posted by 발해지랑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1578 3 13 병사 49

1530~1578.

에치고 슈고다이(守護代) 나가오 타메카게(長尾 為景)의 아들. 첫 이름은 카게토라(景虎), 이어서 마사토라(政虎), 테루토라(輝虎)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불문에 귀의한 후 켄신(謙信).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에게 쫓겨 온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 憲政)를 보호하여, 우에스기의 성()과 칸토우칸레이의 역직(役職[각주:1])을 물려받았다.








다섯 번에 걸친 카와나카지마(川中島)합전


 1553 4월.

 북부 시나노(北信濃) 카츠라오(葛尾) 성주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義淸)카이(甲斐)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에게 쫓겨 와 도움을 청하면서 시작된 카와나카지마 전투.

 이유도 없이 타국을 침략하는 신겐의 무법자적인 행동에 하늘을 대신해 벌을 주겠다고 일어선 우에스기 켄신(이 때는 아직 나가오 카게토라(長尾 景虎))이 이후 12년간에 걸쳐 다섯 번 싸운 것이[카와나카지마 전투]이다.


 1차는 이 해인 1553 8월. 우에스기 군()은 젠코우지(善光寺)분지로 진출하지만 신겐은 시오타(塩田)성에서 움직이려 하지 않았고 켄신의 전력을 관찰하는 듯이 후세(布施)와 오미(麻績)에서 자그마한 전투를 하는 정도로 끝났다. 이후 2차는 1555 7, 3차는 1557 8월에 행해졌지만 두 번 다 작은 전투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1561 9월. 역사상 유명한 제 4차를 맞이한다. 이 카와나카지마(川中島) 하치만바라(八幡原)에서의 전투가 유일한 격전이었다.

  5차는 1564 8월에 이루어졌는데 사실상 카와나카지마의 네 개 군(郡)을 지배하고 있던 신겐은 자웅을 겨루려는 켄신의 시도를 무시하며 한달 가량 대치만 한 후 9월 중순 서로 물러난 뒤, 다시 카와나카지마에서 대결하는 일은 없었다.


정의를 위하여 동분서주


 제1차 카와나카지마 합전이 일어나기 전년인 1552년.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 憲政)가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에게 쫓겨 보호를 청하며 에치고로 온 것을 계기로 켄신은 1552 8월에 처음으로 산코쿠토우게(三国峠) 고개를 넘어 칸토우에 출진하여 누마다(沼田)성으로 입성했다. 이후 주가(主家)의 실지(失地) 회복을 위하여 14번이나 칸토우로 출진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1560년부터 1571년에 걸친 12년간은 8번이나 칸토우에서 새해를 맞이하였다.


 새해를 칸토우에서 맞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켄신이 에치고로 돌아가면 우지야스가 농성을 풀고 칸토우로 출진하여 시모츠케(下野)의 사노 마사츠나(佐野 昌綱)나 오야마 히데츠나(小山 秀綱), 히다치(常陸)의 오다 우지하루(小田 氏治), 무사시(武蔵)의 나리타 우지야스(成田 長泰)들이 호우죠우 측으로 돌아 섰고, 켄신이 오오타 스케마사(大田 資正), 유우키 하루토모(結城 晴朝), 사타케 요시아키(佐竹 義昭), 사타케 요시시게(佐竹 義重)들의 요청을 받아서 칸토우로 출진하면 우지야스는 또다시 물러나 농성을 했고 배반했던 호족들은 다시 돌아오는 일이 반복되어 진전이 보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이번에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쫓겨나 빙고(備後)() 토모()로 물러나 있던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沼)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와 동맹을 맺고 노부나가를 협격(挾擊)하라]는 요청을 받았기에 노부나가로 돌아선 노토(能登) 하타케야마(畠山) 씨의 중신(重臣) 쵸우 츠나츠라(長 綱連)가 농성하는 나나오(七尾)성을 공략하였고, 오다의 구원군인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군을 카가(加賀)의 테토리가와(手取川) 강에서 물리친 기세로 쿄우()로 진격하려 했지만, 시모우사()의 유우키 하루토모에게서 호우죠우 우지마사(北条 氏政)가 칸토우 제패를 노리고 있다며 출진 요청을 해왔기에 우선 귀국하여 칸토우를 진정시킨 뒤 상경(上京)하기로 하였다.


최후의 대동원령


 하지만 카스가야마(春日山)성으로 돌아온 켄신에게 호우죠우 우지마사로부터 평화롭게 지내자는 요청서가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를 통하여 도착했기에, 켄신은 칸토우로의 출진을 상경 원정으로 전환하여 휘하 장수의 명부를 작성하였다. [上杉謙信自筆将士書上]이라 불리는 것으로, 우에스기 군단 39명의 무장에 코우즈케(上野), 엣츄우(越中), 노토, 카가의 여러 장수를 합친 81명의 무장의 이름이쓰여 있다. 마지막에 [天正五年(1577년)十二月二十三日法印大和謙信]이라 서명되어있기에, 이것은 명백히 우에스기 군단 동원 명부라 할 수 있다. 켄신은 다음해 1 19일. 명부에 기재된 여러 장수들에게 대동원령을 내리며 눈이 녹는 3 15일을 출진하는 날로 정했다.


 그러나 출진의 날이 다가 온 3 9일 켄신은 돌연 화장실에서 쓰러졌다. 뇌졸중이라 한다. 의원들이 열심히 고치려 했지만 보람도 없이 켄신은 혼수 상태인 채로 13일 죽었다. 향년 49. 장의는 출진의 날로 정해졌던 15일 행해졌다.

  1. 무로마치 바쿠후의 관직. [본문으로]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

1611 6 4일 병사(病死) 65

1547 ~ 1611

시나노[信濃] 우에다 성[上田城] 성주. 처음엔 타케다 씨[武田氏]를 섬겼지만 타케다 씨 멸망 후 자립한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서군(西軍)에 속해 우에다 성에서 농성하여 토쿠가와 히데타다[德川 秀忠]를 괴롭히지만, 서군의 패배로 인하여 항복 개성(開城)하였다. 코우야 산[高野] 자락의 쿠도야마[九度山]에 유폐되었다.










하산(下山)하고 싶은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 대한 의리를 갚기 위해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우에다 성[上田城]에서 농성하며 토쿠가와 히데타다[德川 秀忠]를 농락하였지만, 서군의 패배 후 아들 노부유키[信之]의 구명 운동으로 목숨을 건진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 유키무라[幸村 = 노부시게[信繁]] 부자가 시나노 우에다에서 16인의 동반자들과 함께 유배지인 키이[紀伊] 코우야 산으로 향한 것은 1600년 10월 13이었다. 당시 마사유키는 54, 유키무라는 34세였다.


 코우야산에 도착한 마사유키 일행은 사나다지방의 숙방(宿坊[각주:1])인 렌게죠우 원[華定院]에 일년 넘게 체제하였으며 곧이어 쿠도야마에 완성된 사나다 저택으로 옮겼다. 죄인이라고는 해도 유배 생활은 완전 자유로 등산이나 사냥, 수영, 뱃놀이도 즐길 수 있었다. 그러한 유배 생활을 계속하면서도 마사유키의 마음 속에는 유배에서 풀려나는 꿈만을 키워갔다.


 1603년 3월 15신코우 사[信綱寺]로 보낸 편지에, 3년 후의 여름에는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가 이에야스[家康]에게 잘 말하여 유배에서 풀려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거나, 또한 몇 년도의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 편지의 전후로 생각되어지는 가신 쇼우츠 신고로[称津 神五郞]에게 보낸 정월 3일의 편지에도 '새해도 되어 우리들에게 곧 하산의 명령이 내려질 것 같다' 근거 없는 기쁨을 전하며 하산의 명령을 계속 기다렸다.


고향에 돈을 요구.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하산의 명령이 내리지 않은 채 세월만이 흘러갔다.

 이에야스조차도 두려워 한[각주:2] 무장의 의지도 차츰 꺾여 갔다. 더욱이 동반자나 하인들을 포함한 유배생활은 대가족이었기에 돈이 많이 들었다. 생활비는 노부유키[信之]가 보내주는 돈과 렌게죠우 원[連華定院]에서 바치는 적은 세금, 거기에 감시역인 와카야마 성[和歌山城]의 성주(城主) 아사노 나가아키라[浅野 長晟]에게서 매해 보내지는 50석뿐이었다. 이것만으로는 대가족의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어 마사유키는 자주 노부유키에게 돈을 요구했다.


 연도는 불명이지만 정월 5일의 편지에 셋째 아들 마사치카[昌親]에게서 40냥 중 20냥을 확실히 받았지만, 빚이 많아 살림을 꾸려나갈 수 없어 힘드니 남은 20냥도 하루속히 보내주길 바라며 빨리 보낼 수만 있다면 5~6냥도 좋다고 할 정도로 마사유키는 빚에 찌들린 힘든 나날들을 유배지에서 보내고 있었다.

 마사유키의 계속된 돈 요구나 재촉에 노부유키는 그때마다 보내주었고 또한 정월이 되면 돈과 물품을 보냈으며 편지도 왕성히 오고 갔다. 편지의 왕복이야말로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마사유키에게 있어서 유일한 위안이었을 것이다.


약해져 버린 과거의 지장(智將)


 노부유키쪽에서의 편지를 마음속으로 기다리면서 마사유키는 차츰 늙어가는 자신에 대한 한탄을 내뱉게 되었다.

 연도는 알 수 없지만 말년이라고 여겨지는데 첫째 아들 노부유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가오는 세월의 파도로 인해 무엇을 해도 끈기가 없어 지쳐만 간다고, 왕년의 지장(智將)이 이제는 완전히 체념한 듯한 약한 소리를 내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최후의 말년에는 자주 병이 걸려, 1609년 혹은 1610년 즈음으로 추정되는 4 28일자 우에다[上田]의 유우안 호우인[夕庵法印]과 가로(家老) 오오쿠마 호우키노카미[大熊 伯耆守]에게 보낸 편지에, 노부유키의 병이 쾌유가 된 것을 기뻐하면서도 자신의 병이 재발했다고 하며 다음에는 발이 빠른 말을 한 마리 보내주길 바란다고 적혀 있다. 말은 병중의 위로로 하고 싶다고 했는데 이것도 병으로 인하여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약해진 마음을 지탱하기 위해 또는 과거 말을 탄 자신의 용맹했던 모습을 생각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유배지에서 11년.

 1611 6 4일.많은 무공(武功)과 무명(武名)을 남겨둔 채, 사나다 아와노카미 마사유키[真田 安房守 昌幸]는 저승으로 여행을 떠났다. 향년 65.

  1. 불공을 드리러 온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절의 숙박소. [본문으로]
  2. 여담으로 후에 이에야스가 토요토미 가문을 멸하기 위해 일으킨 오오사카 공방전에서 마사유키의 아들 유키무라가 오오사카에 입성했다는 소식을 보고받은 이에야스는 손을 걸치고 있던 창문이 소리가 날 정도로 떨며 '아비냐 아들이냐?'라고 두번이나 물을 정도로 당황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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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 義淸)

1573 1 1 병사(病死) 73

1501 ~ 1573.

시나노(信濃) 카츠라오(葛尾)성주(城主). 맹장으로 이름 높아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과 싸워 토이시(戶石)성 합전(合戰)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북부 시나노(信農), 에치고(越後)로 세력을 확대하였으나 후에 신겐에게 패해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에게 도망. 이후 객장(客將)이 되어 카와나카지마(川中島) 합전 등에 참가하였다.

(그림은 태합입지전V에서)






신겐(信玄)에게 두 번 패배를 안기다.


 전성기의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 義淸)는 대단히 강했다.

 부와 북부 시나노(信濃)일대의 장병을 이끌고 사카키(坂城)의 카츠라오(葛尾) 성을 본거지로 삼아 타케다 하루노부(武田 晴信 = 信玄)와 승부를 벌였다.

 1548 2월 우에다하라(上田原)의 전투에서는 이타가키 노부카타(板垣 信方) 등을 패사(敗死)시켰을 뿐 만 아니라 신겐에게도 심한 부상을 입힐 정도로 대승하였으며, 1550년의 토이시(戶石)성 합전에서도 후세 사람들에게 신겐에게 [토이시 붕괴(戶石崩れ)]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이 따라 붙게 할 정도로 괴멸적인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수많은 승리를 이끌어 온 요시키요의 무운(武運)도 여기까지였다. 신겐의 사키카타슈우(先方衆) 사나다 유키타카(真田 幸隆)에게 토이시성을 빼앗기자 유력한 휘하의 무장들이 계속해서 신겐쪽으로 돌아서는 바람에 본거지인 카츠라오 성의 방어 체제가 무너져버렸다. 이렇게 되자 시나노(信濃)의 용장 요시키요도 어쩔 수 없이 1553년 4월 9 카츠라오성을 버리고 8살의 외아들 쿠니키요(国淸)와 함께 에치고(越後)의 나가오 카게토라(長尾 景虎 =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에게 의지하기 위하여 도망가게 된다.


에치고(越後)의 객장


 요시키요가 에치고로 망명한 목적은 켄신(謙信)의 원조를 받아 옛 영토를 회복하는데 있었다. 이것이 카와나카지마(川中島) 전투의 원인이 되었는데, 카츠라오 성을 뒤로한지 14일 후인 4 23일에는 켄신의 원군을 얻어 카츠라오성을 탈취하였고 치이사가타(小県)()의 시오다(塩田)성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주변은 이미 확고한 신겐의 영지가 되어 있었기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에치고(越後)로 군사를 후퇴시켰다.


 이후 요시키요는 옛 영토회복의 꿈을 계속 가슴에 품으며 도합 5회에 이르는 카와나카지마 전투에 4번 참가하였다. 1561 9월의 네 번째가 되는 하치만바라(八幡原)의 사투[각주:1]에서는 시나노(信濃)의 병사 2000여기()를 이끌고 처음 전쟁터에 나서는 쿠니키요(国淸)와 함께 선봉으로써 용감히 싸웠는데 이때 요시키요의 나이는 이미 61세의 나이였다.


 고향 사카키(坂城)로의 복귀도 반쯤 포기하고 있던 1562년.

 신겐의 친족중(親族衆)인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 梅雪)의 사자라고 하는 승() 쿠우안(空庵)이 길보(吉報)를 카스가야마(春日山)성에 가지고 왔다.

 신겐이 적자(嫡子) 요시노부(義信)를 폐하고 서자 카츠요리(勝頼)를 후계자로 삼고자 하니 만약 켄신이 요시노부를 양자로 삼는다면 바이세츠도 켄신을 따르겠으며 곧바로 시나노(信濃)는 켄신(謙信)의 것이 되고 요시키요도 옛 영토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요시키요는 맘 속으로 크게 기대하였으나 쿠우안(空庵)의 이야기를 들은 켄신은 크게 화를 내며 쫓아버렸다고 한다.[名将言行錄]


 1564 5회째가 되는 카와나카지마(川中島)의 합전에 63세라는 고령으로 참전하지 못하였고 대신해서 아들인 쿠니키요(国淸)가 출진하였다. 이 즈음의 일을 지칭하는 것 같은데 [上杉将士書上]에는 요시키요를 지칭해 [우에스기(上杉)()에서 그렇게 뛰어난 활약도 하지 못한다]며 호된 지적을 하고 있다. 그래도 요시키요는 켄신에게 객장(客將)으로써 계속 대우받았다.


 소령(所領)은 칸바라(蒲原)군(郡)의 야마우라(山浦)와 우오누마(魚沼)() 내에 가지고 있었으며 켄신이 만들어 준 나오에츠(直江津)의 저택에서 살았다고 한다. 또한 켄신은 다음해인 1565 3월 그다지 활약도 하지 않는 요시키요를 네치(根知)성주로 앉히고, 쿠니키요(国淸)를 토쿠아이(德合) 성주로 발탁하였다. 네치(根知)성은 엣츄우(越中)와 시나노(信濃)의 국경 사이에 있는 성으로, 그 성의 관할로 마츠모토(松本)가도(街道)라던가, 치쿠니(千国)가도가 있어 옛날부터 소금의 운송로이면서 또한 군사상의 요지이기도 했다. 켄신이 65세라는 말년의 요시키요에게 네치성을 맡긴 것도 카와나카지마 전투 후 신겐에 대한 대비와 함께 세이와겐지(淸和 源氏) 무라카미(村上)씨의 후예이며 시나노 명문족(名門族)인 무라카미의 명예를 존중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켄신은 요시키요에게 네치(根知)의 경비를 엄중히 할 것을 명령하며 어류나 소금을 네치를 통해 시나노로 운송시켰다. 요시키요는 이런 중요한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면서도 1568 68세가 되자 스스로 노령을 이유로 켄신에게 가증(加增)받은 야마우라(山浦)와 오야마(飯山)의 소령(所領)을 쿠니키요(淸国)에게 물려준 후 다음 해인 1569년에 중이 되었고 70세에는 은거. 1572년에는 병으로 쓰러져 다음해인 1573년 정월 두 번 다시 고향의 땅을 밟아 보는 일 없이 네치 성에서 죽었다. 73세였다. 원수인 신겐(信玄)이 죽은 것은 그로부터 3개월 후였다.


아들 쿠니키요의 그 후


 요시키요가 남긴 야마우라 4만관() 등은 1573 12 쿠니키요에게 안도(安堵)되었다.

 쿠니키요도 켄신과 그 후계자인 카게카츠(景勝)에게 중용되어 카게카츠가 시나노의 북부를 진압한 1583 8 카이즈(海津)성의 성주 대리(城代)가 되었다. 여덟 살에 부친 요시키요의 손에 이끌려 에치고로 도망 친 후 30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1. 일반적으로 카와나카지마 전투라고 하면 이 제 4차를 말하다. [본문으로]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 梅雪)

1581 6 2 객사(客死) 42

1541 ~ 1582.

이름은 노부키미(信君). 친류중(親類衆[각주:1])필두로써, 타케다 가문(武田家)내에서도 발언권이 강했다. 타케다씨가 멸망할 때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에게 항복하여 타케다씨 친족중에선 유일하게 살아 남지만, 혼노우(本能)()의 변이 일어나 귀국하던 도중 야마시로(山城)에서 토민에게 살해당했다.










배신의 배경


 어느새 이 인물의 마음에는 암암리에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 결별할 생각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머리 속에 있는 생각이 주가(主家)에 대한 배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는 것 이외에 카이 겐지(甲斐 源氏)의 명문 타케다 가()의 이름을 남길 방법이 없다는 생각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럼 [배신], [배반]이라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망상을 품은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 梅雪)라는 인물이 원래부터 주가(主家) 타케다 씨에 대한 충성심이 적었냐 하면 반대였다.


 바이세츠는 타케다 일문(一門)의 필두격으로 카이(甲斐) 남부의 후지가와(富士川) 천 유역에 펼쳐진 카와치(河內)령을 지배했던 아나야마 노부토모(穴山 信友)의 장남이었다.

 부친 노부토모의 부인이자, 바이세츠의 어머니인 난쇼우인(松院)은 타케다 노부토라(武田 信虎 - 신겐의 부친)의 둘째 딸로, 노부토모는 자신을 [타케다 이즈노카미 노부토모(武田 伊豆守 信友)]라고 자칭할 정도로 타케다 일문이라는 것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졌던 인물이다. 그 노부토모의 적남(嫡男)인 바이세츠는 아명을 카츠치요(勝千代), 성인식(元服)을 치른 후에는 노부키미(信君)라 했으며 후에 신겐(信玄)의 딸인 켄쇼우인(見性院)을 부인으로 맞아들였기에 신겐은 외숙부이면서 장인이므로 혈통상으로도 아주 가까웠다. 당연히 부친 노부토모처럼 타케다 일문 필두라는 자부심이 강했다.


 1562년.

 약관 21세로 망부(亡父)의 뒤를 이은 바이세츠는 이후 신겐의 측근으로 카와나카지마(川中島) 전투를 시작으로 미카타가하라(三方ヶ原) 전투[각주:2]에 출진해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신겐이 병으로 죽고서 카이슈고쇼쿠(甲斐守護職)를 시로우 카츠요리(四郞勝頼)가 상속한 후에도 젊은 카츠요리의 후견인격이 되어 타케다가()에 대한 충성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때문에 1575 5미카와(三河)의 나가시노(長篠)합전에서 오다-토쿠가와 연합군에 대패했을 때 역전(歷戰)의 중신과 여러 무장들이 계속해서 죽는 것에 흥분한 카츠요리가 여기서 죽겠다며 뛰쳐나가려는 것을 칼에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강제로 말의 엉덩이를 때려 철퇴시킨 것도 후견인이라는 것을 자부했기 때문이다.


배반의 대가


 패전 후.

 아나야마 바이세츠는 스루가(駿河)의 에지리(江尻)성을 지키며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침공에 대비했다. 최전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에지리(江尻)의 성장(城將)이 된 것이 바이세츠의 운명을 크게 변화시킬 줄은 카츠요리도 그리고 바이세츠 본인도 예상못했다.


 1579 9월.

 토쿠가와군()이 스루가 침공을 개시. 이미 타카텐진(高天神)성을 타케다군()에게서 탈취한 상태였으므로 그 다음이 카이(甲斐)가 될 것임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노부키미가 중이 되어 [바이세츠사이후하쿠(梅雪斎不白)]라 칭하게 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 梅雪)의 탄생으로 40세가 된 그가 타케다가()의 장래를 다시 한 번 심각하게 생각하게 된 증거이기도 했다.


 1581년.

 오다(織田)()의 침공에 대비하여 카츠요리(勝頼)가 신푸(新府)성을 축성했을 때에도 바이세츠는 일문(一門) 필두로써 거액의 건설자금을 기부하였기에 아직 이 시점까지는 여전히 후견인으로서 강한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다음해 1582년 다시 오다-토쿠가와 연합군이 카이 공략을 개시하자, 바이세츠는 타케다 가의 운명에 내일이 없다고 판단하여 카츠요리와 결별을 결의. 곧바로 행동을 개시한다. 그는 카츠요리보다도 타케다의 피가 진하게 흐르고 있다 자부하는 자신의 아들 카츠치요(勝千代) - 카츠요리를 대신할 명문 타케다가()의 총수로 삼아 명문 타케다의 이름을 존속시키려 한 것이다.

 바이세츠는 우선 코우후(甲府)에 인질로 가 있던 처와 자식을 시노비노모노(忍の者 = 닌쟈)를 이용하여 탈출시킨 후 이에야스에게 에지리 성을 넘겼다. 이 부분을 [신장공기(信長公記)]에는 [아나야마 겐바(穴山 玄蕃) 카이(甲斐)()부츄우(府中)에 인질로 두고 있던 처자식을 2 25일 비오는 밤을 틈타 빼내어]로 기록하고 있다.

 카츠요리는 [바이세츠 배반]을 알게 되자 오다군()과 대치하고 있던 시나노(信濃)에서 신푸(新府)성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얼마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성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지만 믿고 있던 중신(重臣) 오야마다 노부시게(小山田 信茂)에게도 배반당하여 텐모쿠(天目)산에서 자살한다.


 한편 토쿠가와군()을 길안내하며 후지가와 천을 거슬러 올라 코우후(甲府)로 침공한 바이세츠는 노부나가(信長)에게 자신의 아들 카츠치요(勝千代)를 타케다 가의 후계자로 허락 받는 등,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은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에야스와 함께 아즈치(安土)성을 방문하여 노부나가에게 환대 받고 돌아가던 중에 구경하러 들린 사카이()에서 생각하지도 못했던 [혼노우지(本能寺)의 변(]이 일어난다. 귀국하던 도중 야마시로(山城)국 우치다하라(宇治田原)부근에서 야도(野盜)에게 습격 받아 죽임을 당했다. 향년 42. 야망은 물거품이 되고 배반자의 이름만이 남게 되었다.

  1. 일족 친척들을 지칭함. [본문으로]
  2. 토쿠가와 이에야스를 공포로 몰아넣어 똥을 지리게 했다는 전투.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