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 隆景]
1597년 6월 12일 병사(病死) 65세
1533년 ~ 1597년.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셋째 아들. 형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와 함께 모토나리, 테루모토[輝元]를 보좌. 히데요시[秀吉]가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을 포위하자 교섭에 임했다. 분로쿠의 역[文禄の役 1] 때는 조선에 출병. 벽제관[碧蹄館]의 싸움에서 명(明)나라 군과 싸워 이겼다. 토요토미[豊臣] 정권에서는 오대로(五大老)의 한 사람이었다. 2
모우리 가문의 안녕을 지탱하는 인물
권모술수로 가득 찬 센고쿠[戦国]시대에 죽을 때까지 모우리 종가(宗家)의 안녕을 생각하며 부친 모토나리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킨 것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뿐이었다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형 킷카와 모토하루와 함께 조카인 테루모토를 보좌한 명참모이기도 했다.
그의 생애는 크게 나누어 다음 셋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2) 모토나리가 죽은 후 둘째 형인 모토하루와 함께 모우리의 중진(重鎭)으로 활약했던 시기.
(3)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를 섬기며 토요토미 정권의 정치가로 활약했던 시기.
1582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의 츄우고쿠 대반전[中国大返し 3]때는 히데요시 군을 추격하지 말자고 모우리 군에선 단 혼자서 주장하여 히데요시의 신뢰를 얻어 이로인해 후에 토요토미 정권의 중신(重臣)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1592년.
분로쿠의 역에서는 제 6군의 사령관으로 1만여의 장병을 이끌고 활약했다.
특히 벽제관의 전투에서는 이 여송(李 如松)장군이 이끄는 명(明)군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 염전기운이 만연하여 의기소침해 있던 일본군의 사기를 높인 의미는 크다. 킷카와 모토하루가 걸핏하면 성급해졌던 것에 비해 타카카게는 형에 뒤지지 않는 용맹함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론 상황을 멀리 내다보는 주도면밀함까지 겸비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1595년 8월.
치쿠젠[筑前]의 나지마[名島]로 돌아와 있던 타카카게는, 후계자가 없던 모우리 테루모토에게 자신의 외조카인 하시바 히데토시(羽柴 秀俊 = 후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를 모우리 가문의 후계자로 앉히려고 하는 히데요시의 의도를 저지하여, 모우리 종가의 피를 지키기 위해 대신 히데아키를 자신의 양자로 맞이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히데요시에게 은거를 신청한 타카카게는 그 신청이 받아들여지자 코바야카와 씨의 본거지인 빙고[備後] 미하라[三原]에 은거하였다. 히데요시가 3만여석의 은거료(隱居料 4)를 하사하여 타카카게의 공로를 치하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영내 정치(領內 政治)와 교양(敎養)
루이스 프로이스는 그의 저서 [일본사(日本史)]에서 타카카게를,
1595년 11월.
미하라로 온 타카카게는 우선 은거할 성(城)으로 미하라 성(城)의 개수(改修)와 성 밑 마을(城下町)의 정비를 행했다.
붓츠우 사[仏通寺]의 재건 공사에서는 “손이 많이 가긴 하겠지만 앞을 내다봐서”라며 절을 세울 땅의 선정부터 건축공사까지 세세히 지시를 내렸다. 또한 교량(橋梁)공사에 있어서도 건축 용재는 오래된 배를 재이용하는 쪽이 내구성이 높다고 하여 세토[瀬戸]와 온도[音戸]에 계류되어 있던 아타케 선[安宅船]을 모으도록 지시를 내렸다. 이렇듯 민정의 세세한 곳까지 신경을 쏟았다.
말년의 타카카게는 무라사키노[紫野]의 다이토쿠[大徳寺]의 오우바이 원[黄梅院]의 암주(庵主)인 교쿠센 소우슈우[玉仙宗秀]에게 사사(師事)받으며 참선(參禪)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독실한 선종(禪宗)의 신자로 오우바이 원(院)을 시작으로 미하라의 베이산[米山寺 5], 쿄우신 사[匡真寺], 다이젠 사[大善寺], 치쿠젠 하카타[博多]의 쇼우후쿠 사[聖福寺] 등 타카카게가 정재(淨財)를 한 곳은 여러 곳에 이른다.
또한, 유학(儒學)을 좋아한 타카카게는 치쿠젠 나지마에 나지마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의 육성에 힘쓰는 등 문무 양쪽에 주목할 점이 많다.
타카카게의 죽음
베이산 사[米山寺]에 있는 타카카게의 묘(미하루 시[三原市]
1597년 봄 즈음 부터 아프기 시작한 타카카게는 히데요시의 세번에 걸친 상경 요청에 대해서도 병 조리를 이유로 나중에 찾아 뵙겠다며 연기를 요청했다. 죽기 직전에는 코다마 나리히데[児玉 就英]의 가독 상속이 아무 문제없이 행해지도록 테루모토에게 부탁했다.
이것을 최후의 업무로 같은 해 6월 12일. 65세의 생애를 마쳤다.
타카카게의 죽음은 정말 갑작스러운 일이었던 듯 유언도 남기질 못했다.
[마치 자기에게 죽음이 갑자기 찾아온 듯이 앙천했다]고 테루모토는 그 죽음에 놀라 모우리 가문의 대들보를 잃은 슬픔과 앞으로의 의지할 데 없는 불안함을 절절히 기록했다.
그 3년 뒤에 일어난 세키가하라[関ヶ原]의 전투에서 서군(西軍)의 총사령관으로 추대 받았으면서도 택해야 할 길을 잘못 택해, 영지 대부분을 잃은 것을 보면 타카카게의 죽음이 얼마나 모우리 씨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손실이었는가를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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