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이색의 쇼우군[将軍]이었다. 13대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검술의 달인이었던 것이다. 츠카하라 보쿠덴[塚原卜伝]에게 비기 [히토츠노타치(一の太刀)]를 전수받았을 정도의 실력이었다.
달리 생각하면, 전란 다발하던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으로써의 자기단련이었다. 1546년에 쇼우군[将軍]이 되면서부터 요시테루에게는 하루라도 평온한 날이 없었던 것이다.
요시테루 치세인 1546년부터 1565년에 이르는 20년간은 중세의 암흑기에서 근세의 여명기로 이어지는 과도기였다. 일본에 온 하비에르 1가 처음으로 기독교를 전파하였고, 노부나가[信長]가 오케하자마[桶狭間]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를 쓰러뜨린 것도 이 시기였다. 그 격동기의 고뇌를 요시테루는 혼자 짊어지고 있었다.
어렸을 적 부친 요시하루[義晴]와 함께 전란의 쿄우[京]에서 피신하여 오우미[近江]에 있었던 요시테루는, 쇼우군[将軍]이 되어 쿄우[京]로 돌아와서도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 晴元] 대 미요시 쵸우케이[三好 長慶]의 다툼에 휘말려, 부평초[浮萍草]처럼 양 세력 사이를 떠도는 존재밖에 되지 않았기에 그 이후에도 몇 번이나 오우미로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되었. 그러나 결국 미요시 쵸우케이의 실력에 굴복하여 미요시 체제에 옹립되는 형태가 되었다. 이때가 1558년 11월.
쿄우(京)로 돌아온 요시테루는 이것이 정말로 기뻤던 듯, 어소[御所]의 마당에 서서는 밤하늘을 향해서 환호성을 올렸다고 한다 2.
이 즈음, 그제서야 칸파쿠[関白]였던 코노에 타네이에[近衛 稙家]의 딸과 결혼식을 올렸다. 모친인 케이쥬인[慶寿院]이 오랫동안 권해왔던 이야기였다. 요시테루의 마음에 안정이 생겼다는 것을 말해 준다. 3
미요시 쵸우케이가 죽자, 요시테루는 지금이야말로 막부(幕府)의 실권을 회복할 좋은 기회라 생각하여, 붕고[豊後]의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이나,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등 여러 다이묘우[大名]에게 접근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쇼우군의 의도는 죽은 쵸우케이의 모신(謀臣)이며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아시카가 요시히데[足利 義栄] 4를 새로이 쇼우군으로 세우려고 하는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가 간파하기에 이른다. 히사히데는 같은 쵸우케이의 가신이었던 미요시 삼인중[三好三人衆]과 상담한 후 선수를 쳐 요시테루의 어소(御所)를 습격하기로 한다.
1565년 5월 19일.
때는 장마의 계절,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그 빗속을 마츠나가, 미요시 군세는 갓과 우비를 입고서, 키요미즈 사[清水寺]를 참배한다는 명목으로 쿄우[京]로 올라가고 있었다.
히사히데는 밤이 되기 직전에 일부러 어느 소송(訴訟)에 대한 서장을 어소에 제출했다. 응답에 시간이 걸렸다. 그것이 노림수였다. 그 사이에 히사히데의 무리들은 어둠에 섞여 어소 안으로 잠입하여 마루나 복도 밑에 몸을 숨겼다.
갑자기 함성이 울려 퍼졌다. 궐기의 신호였다. 어소에는 사무를 보는 몇몇 외에 사람이 없었다.
사태가 명확해지자, 검호 쇼우군답게 각오를 정하여 금생의 이별 주연(酒宴)을 열었다. 호소카와 타카요시[細川 隆是]가 여관(女官)의 코소데[小袖]를 뒤집어 쓰고 춤을 추었다.
이때 요시테루는, 그 코소데 위에 사세구(辭世)의 시를 적었다고 한다.
지금 내리는 비는 이슬인가 눈물인가,
내 이름을 알려라 구름 위에까지
五月雨は露か涙かほととぎす
わが名をあげて雲の上まで
그때부터 요시테루의 활약은 눈부셔 몇 자루나 되는 칼을 마루에 꼽고서는 날이 무뎌지면 계속해서 바꾸어가며 달려드는 적을 마구 베어 쓰러뜨렸다.
하지만 결국 다구리에는 장사가 없었다. 한 적병이 문틈에서 창으로 발을 걸어 넘어뜨리자 요시테루는 넘어졌다. 거기에 적병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장지문으로 몸을 누르고는 그 위에서 창으로 내리 찔렀다. 그때 불길이 한꺼번에 번져 요시테루의 목을 베지 못한 채, 건물은 화재로 무너져버렸다고 한다.(에이로쿠의 변[永禄の変])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
1536년생. 첫 이름은 요시후지[義藤]. 12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 義晴]의 아들. 1546년 아시카가 제 13대 쇼우군이 되었다.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 晴元]를 칸레이[管領=쇼우군의 보좌역]로 임명 하였지만, 호소카와 우지츠나[細川 氏綱], 미요시 쵸우케이[三好 長慶] 등이 이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켰고, 미요시 측이 승리를 거둠으로써 바쿠후의 실권은 쵸우케이가 쥐게 된다. 쵸우케이가 죽자 실권을 쥐고 있던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에게서 정권탈환을 기도하지만 히사히데 등에게 습격 받아 살해당했다. 1565년 당시 아직 30살이었다.'일본서적 번역 > 戰國武將100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 - 모반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나이 (8) | 2008.07.04 |
---|---|
미요시 쵸우케이(三好 長慶) - 마무리가 좋지 못했던 실력자. (12) | 2008.07.02 |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 센고쿠에서 가장 정의로웠던 명장 (10) | 2008.06.20 |
바바 노부후사[馬場 信房] - 코우슈우 군단[甲州 軍團]의 실력자. (6) | 2008.05.30 |
야마모토 칸스케[山本 勘介] -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코우슈우 군사[甲州 軍師] (6) | 2008.05.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