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바 노부후사는 이타가키 노부카타[板垣 信形], 하라 토라타네[原 虎胤],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 昌景]와 더불어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 휘하의 용장으로 유명하다.

 

 노부후사가 젊은 무사들의 질문에 답한 전쟁터에서의 비결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노부토라[信虎], 신겐, 카츠요리[頼] 삼대에 걸쳐서 타케다 가문[武田家]를 섬기며 수 많은 무공을 세워 온 역전의 용장답게 굉장히 구체적인 내용이다.

-. 적보다 아군이 용감해 보이는 날은 앞을 다툴 것.
-. 아군이 겁을 먹고 있는 날에 혼자 나아가서는 개죽음한다.
-.
창끝이 올라간 적은 약한 적, 내려가 있는 적은 강적이다.
-.
전쟁을 많이 경험한 무사와 친해져서는 그 사람을 본보기로 삼을 것
  어느 것이나 노부후사가 실전 경험을 통해 만들어 낸 훈계라 할 수 있다. 또한 노부후사 자신 스스로도 항상 벽에 [전장상재(戰場常在)]라는 네 글자를 걸어두고서는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 노부후사는 '쿄우라이시 민부 카게마사[教来石 民部 景政]'라는 이름이었다.

 이 즈음 노부후사는 시나노[信濃]의 스와 신사[諏訪神社]에서 매일 참배하였는데, 실은 여기에 어떤 목적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관(神官)과 친해져 서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신관이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노부후사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카이[甲斐] 타케다 가문의 미천한 놈입니다만 군역(軍役)에 끌려가는 것이 싫어 스와 명신[諏訪明神]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신의 은혜 덕분에 지금은 군역에 끌려가는 일 없이 이렇게 있습니다.”

 신관은 이 종군 기피의 겁쟁이를 눈 여겨 보았다. 당시 시나노[信濃]의 명문 스와 씨[諏訪氏]는 카이[甲斐]와 적대적인 관계였다. 신관은 이 겁쟁이를 이용하여 타케다 가문의 정보를 캐내려 하였던 것이다.


 노부후사는 조금씩 타케다 가문의 내부 사정을 흘렸다. 둘은 술을 함께 마시는 관계까지 되었다.

 어느 날, 노부후사가 술을 많이 마셔 취해 잠이 들어버리자 신관은 은밀히 그의 작은 칼[脇差] 살펴보았다. 생각했던 대로 칼날은 녹 슬어 있었다. 소지품에도 이상한 것이 없었다. 신관은 완전히 노부후사를 믿게 되었다. 나중에는 병역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이 신사에 속하도록 권하였다.

 

 노부후사의 계략은 성공이었다.

 이리하여 순조롭게 적지에 잠입한 그는 3년 동안 스와 신사령()에서  생활하였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스와에 관한 모든 전략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이것이 타케다의 스와 공략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바바 미노노카미 노부후사[馬場 美濃守 信房]로 이름을 고침 다음부터는 항상 신겐의 선봉이 되어 싸웠다.

 스루가[駿河]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를 멸망시켰을 때 신겐은,

 모두들 서둘러 이마가와의 저택에 가서 거기에 있는 보물들을 싹 긁어와라!”

 고 명령하였다.

 바바 노부후사는 그것을 듣자마자 단 혼자서 말을 달려 이마가와 저택으로 가서는 아군 병사들이 보물 약탈을 하러 오기 전에 저택에 불을 질러 없애버렸다. 노부후사는 타케다 가문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막았다. 약탈자라는 오명을 거부한 것이다.

 

 1572년 신겐이 상경하여 천하에 패()를 외치고자 하여 오다[織田]의 전선 기지인 미노[美濃]이와무라 성[岩村城]을 공격하였을 때 노부후사의 능란한 전술이 빛을 발했다.

 오다 군 1만여의 대군을, 불과 800명의 어린진(漁鱗陣)을 이용하여 농락한 것이다[각주:1]. 어린진이라는 것은 생선의 비늘과 같은 진형을 말하는 것으로, 사람 인()자 모양의 중앙부로 적 중앙을 돌파하는 전법을 말한다.

 

 이러했던 노부후사도 1575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의 패배에서 전사를 하였다.

 

[바바 노부후사(馬場 信房)]

카이[甲斐] 쿄우라이시[教来石] 출신. 노부하루[春]라고도 했다. 타케다 노부토라[武田 信虎], 신겐[信玄], 카츠요리[勝頼] 삼대에 걸쳐 타케다 가문[武田家]을 섬겼다. 카츠요리를 받들고 싸운 나가시노의 전투[長篠の戦い]에서 패하여 전사. 62.

  1. 타케다 가문[武田家] 만세의 군기물 갑양군감(甲陽軍鑑)에만 나오는 이야기라 신빙성은 의심스럽다. [본문으로]

 야마모토 칸스케는 이노우에 야스시[井上 靖]의 명작 '풍림화산(風林火山)[각주:1]'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하지만 그 실존성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어, 이 인물을 가공의 무장으로 치부해 버리는 사가(史家)도 적지 않았다.

 그가 일반에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갑양군감(甲陽軍鑑)'이 처음이었으며, 이 갑양군감 외에 사료성이 높은 고문서류에는 칸스케의 이름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갑양군감'타케다 신겐[武田 信玄], 카츠요리[頼] 2대에 걸쳐 일어난 사건이나 코우슈우[甲州]군의 군법이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에도 시대 초기의 병법학자 오바타 카게노리[小幡 景憲]가 썼다고 한다. 굉장히 창작성이 짙은 책이라는 것이 통설이었다.

 

 그러나 근년[각주:2]이 되어 갑자기 칸스케의 실존성이 강해졌다. 그것을 증명한다고 보여지는 고문서가 발견된 것이다. 홋카이도우[北海道] 쿠시로 시[釧路市]의 이치카와 가문[市川家]에서 타케다 신겐의 서장(書狀)이 발견된 것이다. 이치카와 가문의 선조는 나가노 현[長野県] 시모타카이 군[下高井郡]에 카마쿠라 시대[鎌倉時代]부터 토착했던 호족으로, 키소 요시나카[ 義仲][각주:3]부터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에 이르기까지 고문서 150여 점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타케다 신겐의 서장은 신겐이 시나노[信濃] 노자와[沢]의 이치카와 후지와카[市川 藤若]라는 호족에게 보낸 것으로, 이 문서의 말미에 '야마모토 칸스케(菅助)의 입으로 전한다'라는 문장이 있다. 칸스케[菅助]가 정확하게 칸스케[勘介]라면[각주:4], 칸스케는 이 때 근습(近習)의 한 사람으로써 신겐의 명령으로 중요한 사자(使者)의 임무를 맡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덕분에 '갑양군감(甲陽軍鑑)'의 사료적 가치도 최근 역사 사료로써 재평가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 한다.

 

 '갑양군감'에 따르면 - 칸스케의 출신은 미카와[三河]우시쿠보[牛窪], 축성술과 군법의 오의(奧義)를 깨달았으며 또한 무예도 뛰어났다고 한다.

 스루가[駿河]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를 섬기려다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칸스케는 추남에 외눈으로 거기다 손가락도 열 개가 안 되며 절름발이였기에,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에서는 그 때문에 쓰임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반대로 타케다 신겐의 흥미를 끌었다. 신겐은 피부도 검고 그렇게 추남이면서도 명성이 높은 것은 정말로 능력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라면서 타케다 가문에 불러들였다고 한다. 그야말로 신겐다운 에피소드라 할 수 있다.

 신겐의 부하 장수인 이타가키 노부카타[板垣 信形]가 천거하였다고도 하는데, 어쨌든 칸스케는 200관의 봉록이 주어졌다. 신겐 23세로 칸스케는 이미 중년을 넘긴 나이였다고 한다.

 

 그 생애의 정점에 달한 전투는 1561년 가을의 카와나카지마 전투[川中島い]였다.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이 타케다의 본진으로 돌격해 와 신겐에게 칼을 퍼부었다는 것으로 유명한 격전이었다.

 이 전투는 13천의 병사를 이끌고 시나노[信濃]로 쳐들어 온 켄신이 타케다의 전선기지 카이즈 성[海津城]과 지근거리인 사이죠산 산[妻女山]에 진을 치면서 시작되었다.

 곧바로 타케다 군도 카이에서 원군을 이끌고 카이즈 성에 입성하였다.

 쌍방은 대치한 채 시간이 흘러, 9 9일에 이르자 신겐은 회의를 열어 타개책을 강구하였다.

 우선 숙련된 장수인 오부 효우부 토라마사[飯富 兵部 虎昌]가 정면승부를 하여 자웅을 겨루자고 주장하자, 바바 민부 노부후사[馬場 民部 信房]도 쌍수를 들어 그 의견에 찬성하였다.

 

 하지만 상대는 지금이야 말로 자웅을 겨루자고 침공해 온 군신(軍神) 우에스기 켄신이었다. 그래서 야마모토 칸스케의 계략의 채택되었던 것이다.

 칸스케의 작전은,

 타케다 군 2만의 군세를 둘로 나누어, 12천의 별동대로 내일 새벽 6시를 기하여 사이죠산를 기습한다. 그러면 우에스기 군은 놀라 치쿠마가와 강[千曲川] 건너편 평원인 카와나카지마[川中島]로 퇴각할 것이다. 거기에 미리 카와나카지마에 숨겨놓은 8천의 본대가 급습하여 앞뒤에서 협격하면 적은 혼란에 빠져 우리 군은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는 것이었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딱따구리 전법[啄木鳥]'이라고 한다. 딱따구리는 나무의 벌레를 잡기 위해서 구멍 반대쪽을 쪼아 벌레를 놀라게 하여 구멍으로 나왔을 때 잡는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뛰어난 칸스케의 지략도 군신 켄신의 혜안에는 미치지 못했다.

 

 9일 저녁.

 눈 아래 보이는 카이즈 성에서 피어 오르는 무수한 밥짓는 연기를 보고 카이[甲斐] 군의 작전을 간파한 것이다.

 켄신은 전군을 이끌고 밤중에 은밀히 사이죠산을 내려와 다음날 10일 새벽, 카와나카지마 하치만바라[八幡原]의 카이 군 본대를 급습한 것이었다. 우에스기 군세는 질풍과 같이 타케다 본영을 맹공격하여 한때는 신겐도 위기에 처했지만, 오후가 되어 나타난 산에 올라갔던 타케다의 별동대 출현으로 상황은 반전되었다.

 

 이 때, 이미 칸스케는 작전의 실패를 부끄러워하여 적진으로 돌격하여 전사한 상태였다.

 그 목은 수하의 병사가 난전 속에서 다시 탈취하였지만 몸통은 치쿠마가와 강을 떠내려가 하류의 강변에 쌓여있었다. 그 적과 아군의 구별이 가지 않는 수 많은 시체더미에서 부하들은 결국 찾아내어 묻었다고 한다.

 현재 카와나카지마 테라오[寺尾]라는 곳에 도우아이하시[胴合橋]라는 조그만 다리가 있는데, 이곳이 그 장소라 전해지고 있다.

 

 또한 에도 시대에 쓰여진 어떤 책에는 - 명군사인 그도 미관말직의 일개 검객으로 등장하며, 타케다 가문의 부장()인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 昌景]의 부하였다고 한다. 카와나카지마 전투에서는 단순한 척후의 임무를 맡고 있었던 것에 불과하며, 어쩌다 마사카게에게 보고하고 있는 모습이 신겐의 눈에 띄어, “저 자는 뭐 하는 녀석인가?”라고 물어보았을 뿐이라고 한다.

 

 어쨌든 아직 평가가 분명하지 않은 수수께끼의 무장이다.

 

[야마모토 칸스케(山本 勘介)]

미카와[三河] 출신으로 이름을 하루유키[晴幸]라고 하며, 출가 후 뉴우도우 도우키[入道 道鬼]’. 신겐은 바바 노부후사[馬場 信房] 등에게 명하여 칸스케에게 군법을 배우게 하였다고 한다. 1561년 카와나카지마에서 전사했을 때는 69세였다고 한다.

  1. 2007년도 NHK 대하드라마의 원작. [본문으로]
  2. 이 '전국무장 100화[戦国武将100話]'는 1978년도에 출판. [본문으로]
  3. 카마쿠라 막부[鎌倉幕府]를 세운 미나모노토 요리토모[源 義朝]와는 사촌지간이다(부친끼리 배다른 형제. 사족으로 요시나카의 부친은 요리토모의 큰형[悪源太]에게 살해당했다). 시나노[信濃] 키소[木曽]에 있다가 겐페이 쟁란기[源平爭亂] 때 토벌 명령이 내려진 헤이케[平家]를 누구보다도 빨리 쿄우[京]에서 쫓아냈다. 키소[木曽]는 묘우지[苗字]이며 본성(本姓)은 미나모토[源]. 보통 '미나모토노 요시나카[源 義仲]'로 알려져 있다. 요리토모의 부하뻘이었지만,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며 나대다가 그 꼴을 못 본 요리토모가 정벌군을 파견하자 정치적 우위를 세우기 위해 코시라카와 법황[後白河法皇]을 협박하여 쇼우군이 되었다. 이후 요리토모의 토벌군에 패해 전사. [본문으로]
  4. 글자는 다르지만 발음은 동일. [본문으로]

<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일본판 >

 천하를 제패했던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조차 타케다 신겐의 군사적 능력에는 위협을 느껴, 양녀(養女)[각주:1] 를 신겐의 아들 카츠요리[頼]에게 시집 보내는 등 신겐의 마음을 잡고자 하였다. 신겐이 이끄는 코우슈우[甲州][각주:2] 군단의 무위(武威)는 당시 천하를 진동시켰다.

 

 1920년대 즈음 군사평론가로써 저명했던 사쿠라이 타다요시[櫻井 忠温][각주:3]는 신겐을 나폴레옹에 필적한다고 까지 말하고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신겐은 태어났을 때 머리가 크고 눈이 코를 감출 정도로 컸었다고 한다. 그 울음은 귀를 쥐어뜯을 정도라 짜증을 잘 내는 부친 노부토라[信虎]가 귀를 막았다고 한다. 평범한 아기가 아니었다.

 

 내향적인 성격의 소년이었지만 기질은 강했다.

 9살 때. 절의 높은 어른에게 반항하여 연못으로 던져졌지만 울먹이는 일 없이 물 속에 뻣뻣이 서 있었다고 한다. 어린 신겐은 또한 애벌레를 굉장히 싫어했다. 그래서 중신인 바바 노부후사[馬場 信房]가 이것을 고치고자 일부러 애벌레를 보여주고서는 겁먹는 신겐을 비웃었다. 그러자 신겐은 눈빛이 변하여 갑자기 그 애벌레를 손으로 쥐어 찌부러트렸다. 그 때문에 손가락 색이 곧바로 변색되어 버렸다고 한다.

 

 첫 출진은 1536 11월 운노구치[海ノ口] 전투였다. 신겐 16살 때였다. 부친 노부토라는 8천의 병사를 이끌고 사쿠[佐久]운노구치 성(城)을 공격하였는데, 당시 성주는 무명(武名)으로 이름 높던 히라가 겐신뉴도우[平賀 玄信入道]였다. 3~4일간 계속 공격하였지만 함락되지 않았다. 12월이 다 지나갈 즈음 되었고 거기에 눈도 내렸다. 이 이상 공격해도 함락시킬 수 없을 것 같았다. 회의를 거쳐 철퇴하기로 결정되었다.

 이때 16살의 신겐이 부친 노부토라에게 철퇴의 후미(後尾)를 맡고 싶다고 나섰다. 거절하는 부친을 몇 번이고 졸라 결국 이 큰 임무를 맡게 되었다

 신겐은 부친의 군세가 카이[甲斐]를 향해서 철수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갑자기 수하 300을 이끌고 운노구치 성()에 야습을 감행했다.

 성안에는 병사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지역 무사들은 카이[甲斐] 군세가 물러나는 것을 보고 모두 자기네 지역으로 돌아갔다. 성에 있었던 것은 성주 히라가 겐신 이하 7~80. 그것도 승리의 축하주로 취해 있었다. 성은 싱겁게 점령되었다.

 

 부친 노부토라와 신겐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노부토라는 자신과 많이 닮아 성미가 괄괄한 신겐보다 온순한 둘째 노부시게[信繁]를 편애했던 듯 하다. 신년 축하연에서도 신겐을 건너뛰고는 노부시게에게만 술잔을 내렸다고 한다. 거기에 노부토라는 용맹하기는 했지만 성격이 잔인하여 부하도 영민도 그에게 심복하고 있지 않았다.

 

 신겐은 어떤 계획을 세워 그 실행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계획이 실행에 옮겨진 것은 1541 6 16일이었다. 부친 노부토라는 사위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에게 방문려고 스루가[駿河]로 향했다.

 신겐은 이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루가로 통하는 길을 카이 국경에서 차단해 버리고, 부친과 함께 떠난 가신들의 가족도 인질로 잡아놓았다. 이 때문에 함께 갔던 가신들은 노부토라를 혼자 스루가에 남겨놓고 카이로 도망쳐 왔다고 한다.

 카이에서 추방된 노부토라는 이후 이마가와 씨()의 식객이 되어 25년을 보내게 되는데, 82세의 고령으로 죽을 때까지 고향 카이의 땅을 밟지 못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부자간 갈등극은 또 한번 되풀이 된다.

 신겐의 후계자인 장남 요시노부[義信]가 부친 신겐에게 모반을 꾀한 것이다. 요시노부의 부인은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의 여동생이다. 요시노부는 이마가와 가문을 멸하려는 부친에 반발하여 암살을 획책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자살하게 된다.

 

 신겐의 정실[각주:4]은 나중에 사다이진[左大臣]이 되는 산죠우 킨요리[]의 딸로, 셋케[家]의 다음가는 명문(和家역자 주) 출신이었다. 부인의 언니는 당시 아시카가 막부[足利 幕府]의 실력자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 晴元]에게 시집갔으며, 여동생은 혼간지 켄뇨[本願寺 如]의 부인이 되었다. 켄뇨는 후에 이시야마 혼간지[石山 本願寺]에 웅거하며 잇코우잇키[一向一揆]의 총대장이 되어 오다 노부나가를 괴롭힌 인물이다.

 

 신겐에게는 몇 명의 측실이 있었는데, 비극의 히로인으로 유명한 것이 유우히메[由布姫]이다. 시나노[信濃]의 명문 스와 씨[諏訪氏]의 딸로, 부친 요리시게[重]는 신겐에게 속아 배를 가르고 죽었다. 히메는 24살에 죽지만 그녀가 낳은 아들이 타케다 가문의 후계자가 되는 카츠요리[頼]이다. 그녀는 자신의 친정인 스와 씨()의 대가 끊어지는 것을 슬퍼하여 아들의 이름에 스와 씨() 대대로 붙는 요리[]’라는 글자를 붙여 카츠요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각주:5]

 

 신겐은 군사적으로만 뛰어난 무장이 아니었다. 뛰어난 민정가로써도 업적을 남기고 있다.

 저명한 것으로 '코우슈우 법도 55개조[甲州法度五十五箇]'가 있다. 당시로써는 드물게 구체적으로 현대의 법학자도 '신겐이 정한 것이 형법상의 가장 적합하다'고 그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도 많이 참고했다고 한다.

 법도의 4조와 5조에 다른 지역() 사람과 결혼, 주종계약 혹은 편지를 주고받는 것을 금지하는 항목이 보인다. 또한 3조에는 상기의 금지 항목도 자기 지역 내에 있는 자가 모략의 필요상 행하는 것이라면 용인한다고 쓰여있다. 센고쿠[戦国]이기에 있을 수 있는 세세한 배려다.

 

 일본에서 최초로 금화(金貨)를 발행한 것도 신겐이었다. 영내(領內)에 금광을 개발하여 '코우킨[甲金]'이라 명명해서 유통시켰다. 품질이 굉장히 좋았다. 이에야스가 코우후[甲府]에 입성했을 때 징발한 액수는 30만 냥이었다고 한다. 신겐이 숨겨놓은 금은 상당한 액수라고 하여 여전히 매장금 전설이 남아있다.

 

 현재 야마나시 현[山梨県] 류우오우 정[町][각주:6]에 가면 신겐이 쌓게 만든 '신겐둑[信玄堤]'이라 부르는 카마나시 천[釜無川]의 제방이 남아닜다. 이 지역은 언제나 홍수로 넘쳤기에 심혈을 기울여 치수에 힘써 U자형(雁行) 제방을 쌓은 것이다.

 

 정강(精强)을 자랑하는 코우슈우 군단의 전법은 에치고[越後]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과는 대조적이었다. 켄신은 기발한 전법을 사용했지만 신겐은 어디까지나 정공법이었다. 마치 거대한 코끼리가 들판을 가로지르 듯 조직적인이고 위압적인 행동을 취했다.

 예를 들면 코우슈우류[甲州流]의 창술은 그때까지의 11이 아닌 2~30명이 전열을 짜고 돌진하는 것이었다. 1번대, 2번대, 3번대를 큰 북의 소리로 조종하였고, 붉은 갑옷과 검은 갑옷으로 구별하여 통일적인 행동을 취하게 하였다.

 

 우에스기 켄신과의 최대의 격전이라 일컬어지는 1561 9 10일의 카와나카지마 전투[川中島い]에서는 적장 우에스기 켄신이 본진으로 질주해 와 신겐에게 칼을 퍼부었다. 신겐은 순간적으로 일어나 지휘 부채[軍配]로 막았는데, 나중에 조사해보니 그 부채에는 8곳의 칼자국이 있었다고 한다.

 

 신겐 최후의 대작전은 1572년부터 시작되었다.

 쿄우토(京都)에 올라가 천하를 호령코자 하였던 것이다. 신겐 52세였다.

 하마마츠 성[浜松城] 밖의 미카타가하라[三方原] 들판에서 토쿠가와 군과의 싸움이 최대의 격전이었다.

 

 이에 앞서 타케다 군은 토쿠가와의 성들을 계속해서 함락시킨 후 미카타가하라에 포진한 후 개전한 것은 12 22일 오후 4시였다. 눈보라 치는 찬 바람 속에서 양군은 격돌하였다. 토쿠가와의 기세도 강하여 오야마다[小山田] 부대, 야마가타[山県] 부대가 무너졌다. 하지만 그 때 나이토우 마사토요[ 昌豊] 부대가 토쿠가와의 옆구리를 찔러 들어갔다. 곧바로 토쿠가와 군세는 혼란에 빠졌고 결국 무너져 내려 패주하였다.

 

 전투는 신겐의 압승이었지만 이때 이미 신겐의 운명은 시시각각 죽음을 향하고 있었다. 신겐의 천하 제패라는 웅대한 꿈은 결국 폐결핵에 의해 무너져 내린 것이다.

 병상이 악화되어 귀국하던 도중 53세의 생애를 마쳤다. 유언에 따라 죽음은 비밀로 되어 장례식이 치러진 것은 3년 뒤였다.

 

[다케다 신겐(武田 信玄)]

1521년 타케다 노부토라[武田 信虎]의 적자로 태어났다. 이름은 하루노부[晴信]. 법호를 호우쇼우인 신겐[法性院 信玄]이라고 하였다. 타케다 씨[武田氏]는 카이[甲斐]슈고[守護]이며 코우후[甲府]에 저택을 두고 있었다. 1541년 부친 노부토라를 스루가[駿河]로 추방하고 자립해서는 시나노[信濃]로 진격하여 스와[諏訪], 무라카미[村上], 오가사와라[小笠原] 등 여러 호족들을 쓰러뜨리고 시나노[信濃] 일원을 손에 넣었다.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과의 카와나카지마의 격전[川中島の戦い]은 유명하다. 1568년에는 스루가[駿河]의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親]를 물리쳤다. 코우즈케[上野], 토오토우미[遠江], 미카와[三河]의 일부를 합친 5개국을 지배했다. 1573 4 12일 시나노[信濃] 코만바[駒場]에서 죽었다.

  1. 여동생의 딸. [본문으로]
  2. 카이[甲斐]의 다른 이름. [본문으로]
  3. 청일전쟁의 여순전투에서 전신 8발의 총상과 수 많은 도상(刀傷) 등으로 기절, 시체로 분류되어 화장터에 옮겨지다가 생환. 여순전투에 대한 '육탄(肉彈)'이라는 작품을 남겨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함, 후에 일본 육군성 신문부장을 역임. [본문으로]
  4. 정확하게는 두 번째인 후실(後室). [본문으로]
  5. 당시 무장의 이름은 여러 정치적인 고려와 배려가 섞여 지어지는 것이기에 여성이 지을 수는 없었다. [본문으로]
  6. 현 카이 시[甲斐市]. [본문으로]


 이마가와 요시모토라는 이름은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기습을 받아
오케하자마에서 죽은 것으로써 유명하다.
 토쿠토미 소호우[富 蘇峰]는 이 일전을 '귀족적 문약(文弱)과 평민적 무강(武强)의 충돌'이라 하였다. 요컨대 구() 명문가와 신흥 세력의 승부라고 한 것이다.


 요시모토의 풍채에 대해서 기록이 있다.

 다리가 짧고 허리가 길었다고 한다. 머리를 밀지 않고 머리를 뒤로 넘겼으며(総髪), 이빨은 검게 물들인(漿) 상급귀족[公卿]처럼 화장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마가와 씨[今川氏]는 아시카가 쇼우군 가문[足利軍家]과 혈연인 명문가이다.
 아시카가 요시카네[足利 義兼]를 선조로 하여, 증손자인 쿠니우지[
氏]가 이마가와 씨를 칭하게 되었다. 쿠니우지의 손자 노리쿠니[] 때부터 스루가[駿河]를 영유(領有). 유명한 사서 '난태평기(難太平記)[각주:1]'의 저자 이마가와 료우슌[今川 了俊][각주:2]은 이 노리쿠니의 아들이다.[각주:3]


 이마가와 씨는 대대로 토오토우미[遠江], 스루가[駿河]의 슈고[守護][각주:4]로써 토우카이[東海] 지방에서 위세를 떨쳤다. 쿄우토[京都]와의 관계도 깊어서 귀족[公家]과 인척관계를 맺었다. 요시모토의 모친도 다이나곤[大納言] 나카노미카도 노부타네[中御門 宣胤]의 딸이다.

 요시모토는 부친 우지치카[氏親]의 다섯째 아들로, 우지치카의 첫째 아들은 우지테루[氏輝]였다. 또한 우지치카의 누나는 나이다이진[大臣] 산죠우 사네모치[ 望]의 부인이다.
 쿄우토[京都] 문화에 심취한 요시모토는 순푸[駿府]의 구석구석까지 쿄우토로 만들었다. 지명도 쿄우토에 있는 키요미즈[
水], 아타고[愛宕], 키타야마[北山], 니시야마[西山]라 명명하였고, 케마리[蹴鞠]와카[和歌] 모임도 활발히 열었다.


 쿄우토 문화에 심취한 무장답게 요시모토에게는 이러한 에피소드가 전해져 내려온다.
 어느 전투에서였다. 부하에게 적 선봉의 상태를 알아보고 오라며 정찰시켰는데, 이 부하가 싸움에 말려들어서는 정작 중요한 정찰을 하지는 못하는 대신 적의 목을 가지고 왔다.
 요시모토는 화를 내며 명령 위반에 따라 엄벌을 내리려 하였다. 센고쿠 무장으로써는 당연한 처치였다. 하지만 이 부하가 꾀를 써서, 옛 시를 이용한 것이었다. 후지와라노 이에타카[藤原 家隆]

솔새에 빠져들 생각은 없었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슬에 꺾인 줄기
苅萱に身にしむ色はなけれども、見て捨て難き露の下折
라는 시를 읊었다.
 요시모토는 이를 듣자마자 태도가 변하였다.
 괘씸한 녀석이지만 순간적으로 옛 시를 생각해내다니 기특하구나
 라고 말하며 군령 위반의 죄를 용서했다고 한다. 만약 노부나가였다면 아니 노부나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군령 위반이라는 것은 그럴 정도로 무거운 죄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요시모토가 무장으로써 실각이라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후세에 요시모토에게 나쁜 평판만이 남게 된 것은 무엇보다 오케하자마의 패배자라는 것에 있다. 후세의 기록이라는 것은 모두 승리자에게 유리하게 쓰여지는 법이다. 승리를 한 노부나가는 후에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었기에, 그와 대비되면 당연히 요시모토가 불리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에도 시대가 되면서 신격화된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가 소년기에 이 요시모토 밑에서 인질이 되어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고 하여 악의를 가지고 요시모토의 모습을 일그러뜨리는 경우가 많아지게 된 것이다.


 어쨌든 요시모토가 이마가와 가문의 당주가 될 때 가문 내란이 일어났다.
 1536
. 형인 우지테루가 죽었을 때 요시모토는 걸승(傑僧) 타이겐 셋사이[太源 雪斎]의 제자로 후지 군[富士郡] 젠토쿠 사[寺]의 중이었다. 그리고 가독(家督)을 둘러싸고 역시 출가해 있던 배 다른 형인 에탄[探]과 다투어 승리하여 패한 에탄을 자살하게 만들었다.[각주:5]
 이때 요시모토는 환속하여 이마가와 가문을 잇고 은사(恩師) 타이겐 셋사이를 군사로 맞이하였다. 요시모토의 시대가 되자 종래의 스루가[駿河], 토오토우미[遠江]에 더하여
미카와[三河]도 세력하에 두었다. 요시모토는 결코 쿄우토 문화에 정신 팔린 용렬한 무장이라는 일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케하자마의 전투는 1560 5 19일에 일어났다.
 이 때 요시모토는
스루가, 토오토우미, 미카와의 대군을 이끌고 서상(西上)을 개시하였다. 도중에 있는 오와리[尾張]의 그것도 반밖에 영유(領有)하지 못하고 있는 오다 가문[織田家]은 단번에 물리치고 쿄우토[京都]에 깃발을 세우고자 하였던 것이다.[각주:6]
 오와리에 침입한 이마가와의 군세는 이미 오다 측의 성 두 개를 점령하고 있어 기세가 올라 있었다. 19. 요시모토의 본진은
덴가쿠하자마[楽狭]에 도착하였다.
 이날의 요시모토의 모습은 끝부분에 금칠을 한
안장을 얹힌 말을 타고서, 황금으로 용이 세워진 투구에 몸통이 흰색으로 된 갑옷을 입고, 이마가와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28( 84cm)의 오오타치[大太刀]를 차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위엄서린 무장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서전(緖戰)의 승리에 취하여 노부나가를 얕보고 있었다.

 한편 이날 새벽 키요스[清洲]를 출발한 노부나가 군세는 질풍과 같은 기세로 달려와 덴가쿠하자마의 이마가와 본진까지 다가왔다. 때마침 폭풍우가 불어와 이마가와 본진은 혼란에 빠졌다(이에 대해선 아케치 님의 블로그: [ 說 ] 오케하자마(桶狹間) 진상정면공격설을 참조해 주시길).


 요시모토는 죽는 순간까지 잘 싸웠다.
 돌격해 온 오다 측의 핫토리 코헤이타[服部 小平太]의 창대를 자르고 무릎을 베어 물리쳤다. 거기에 모우리 신스케[毛利 新助]가 달려들어 마운트 포지션을 허용했지만, 요시모토는 목이 베이는 순간까지 굴하지 않고 신스케의 집게손가락을 물어 뜯으며 싸웠던 것이다.


 참고로 오다 측에 있던 요시모토의 목은 나루미 성[鳴海城]에 있던 오카베 모토노부[岡部 元信]가 건네 받아, 순푸[駿府]로 가지고 돌아왔다고 한다.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

1519년 태어났다. 우지치카의 다섯째로 처음엔 불문에 들어가 쇼우호우[承芳]라고 불렸지만, 환속하여 형 우지테루의 뒤를 잇고 요시모토라는 이름으로 고쳤다. 스루가[駿河], 토오토우미[遠江] 2개 지역을 영유(領有)하여 토우카이[東海] 지방 No.1 다이묘우[大名]가 된다. 미카와[三河]를 손에 넣은 후, 천하통일의 야망을 품고 상경을 꾀하였지만 오케하자마의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기습당하여 전사하였다. 42.


Ps; 역자인 저는 상경설을 부정합니다(물론 요즘 분위기도 비상경설이 대세지만요). 이 이야기는 길어지니 차후에……

  1. 이마가와 씨의 역사, 가계, 공적 등이 쓰여 있다. [본문으로]
  2. 1326~1420(?). 일본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무로마치[室町] 중기의 무장. 료우슌[了俊]은 불문에 들어서 부터이며, 이전엔 이마가와 사다요[今川 貞世]라는 이름을 썼다. 1371년 큐우슈우[九州] 지역을 관리하는 막부 직책인 '큐우슈우 탄다이[九州探題]'가 되어 큐우슈우의 남조 측을 구축하나, 남북조(南北朝)가 합체하자 1395년 큐우슈우탄다이에서 경질된다. 1399년 오오우치 요시히로[大内 義広]와 손잡고 반항하지만 실패. 뛰어난 문학적 소양을 지녔으며, 고려의 정몽주와 회담하여 왜구 억제를 꾀하는 등 우리나라 역사와도 관련이 있는 인물. [본문으로]
  3. 여담으로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는 이마가와 료우슌[今川 了俊]의 후손은 아니다. 료우슌이 큐우슈우탄다이[九州探題]에서 물러난 뒤 스루가 절반의 슈고가 되었고, 나머지 절반은 이마가와 종가(宗家)의 당주이며 료우슌의 조카인 이마가와 야스노리[今川 泰範]가 슈고였다. 요시모토는 야스노리의 후손. [본문으로]
  4.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지방관. [본문으로]
  5. 이를 하나쿠라의 난[花倉の乱]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6. 근래엔 상락설(上洛說)보다는 오와리[尾張] 점령을 위한 설이 강한 듯. [본문으로]

 에도() 시대에 스즈키 시게히데(鈴木 重秀)라는 사람이 호우죠우 가문의 역대 당주들을 평가하면서 우지야스에 대해서, '문무겸비의 무장으로 생애에 걸쳐 몇 번이나 전투에 나섰지만 패한 적이 없다. 거기에 인덕도 있었다. 이 시대에 관팔주(八州 = 칸토우())의 병란을 평정하여 크게 가명을 높였다. 고금의 명장이다'고 절찬하였다.

 우지야스는 칸토우의 태반을 자신의 산하에 두어, 조부인 소우운(早雲)의 꿈을 실현시킨 것이었다.


 우지야스가 다스리던 오다와라(小田原)의 모습을 알려주는 귀중한 기록이 남아 있다.

 1551 4. 하코네(箱根) 유모토(湯本)소우운(早雲)사(寺)에 참배하고 오다와라에 들린 쿄우토(京都) 난젠()사(寺)261대 토우레이치오우(東嶺智旺)가 직접 보고 쓴 것이다.

 [유모토의 소우운 사()에서 1(4km). 수도인 오다와라에 도착했다. 거리는 작은 길만 수만 개. 땅에는 먼지 하나도 없다. 동남쪽은 바다이다. 바닷물이 오다와라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군주인 우지야스의 성()은 거목 울창한 곳에 있으며 크고 아름답다. 삼면에 큰 연못이 있다. 연못의 물은 가득 차 있어 깊고 낮음을 잴 수 없다. 백조나 물새들이 날개를 쉬고 있다. 군주인 우지야스는 겉으로는 문(), 속으로는 무()의 인물로 형벌(刑罰=정치)이 깨끗하여 원근(遠近)이 모두 복종하고 있다. 그야말로 이 시대 천하 무쌍의 패왕이다.]

 이렇게 전성기의 호우죠우 씨()의 오다와라를 굉장히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


 불패의 용장이라 일컬어지며 16살의 첫 출진(初陣)을 경험한 이후 병으로 죽을 때까지 36번의 전투에 출격하여 한번도 적에게 아게마키([각주:1])를 보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전군의 선두에 서서 적과 부딪쳐 몸에는 도창(刀槍)의 상처가 7군데 있었고, 얼굴에도 2군데의 상처가 있었다. 그래서 몸 정면에 있는 상처를 [우지야스상처(氏康傷)]라고 부르며 존중 받았다고 한다.


 소년시대의 그의 사람됨을 알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12살 때였다. 철포는 아직 드물었던 시기로 어느 날 우지야스는 철포의 사격 연습을 구경하게 되었다. 갑작스런 굉음에 놀란 우지야스는 일순 창백한 얼굴로 몸을 떨었다. 옆에 있던 무사가 그것을 보고 웃었다. 우지야스는 참을 수가 없었다. 창피함에 얼굴이 확 빨개져서는 곧바로 작은 칼을 꺼내어 자해(自害)하려고 하였다. 근시(近侍)의 무사가 당황하여 이것을 막았다. 우지야스의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우지야스를 부속 가로(家老)인 시미즈()라는 자가 옛날부터 용기 있는 무사일수록 잘 놀란다고 합니다. 뛰어난 말도 성격이 예민하여 잘 놀라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그제서야 참았다고 한다.[각주:2]


 우지야스의 무명(武名)을 천하에 널리 알리게 한 것은 일본 3대 기습전[각주:3] 중에 하나로 꼽히는 카와고에(河越) 전투이다.

 1545 8.

 호우죠우 가문의 영국(領国)과 국경을 접하는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노리마사( 上杉 憲政)는 오우기가야츠 우에스기 토모사다(扇谷 上杉 朝定)스루가(駿河)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와 손을 잡고 우지야스를 일거에 괴멸시키고자 하였다.

 요시모토는 우지야스 측의 스루가(駿河) 나가쿠보(長久保)성(城)을 포위하였고,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도 역시 공격해 왔다. 한편 노리마사는 토모사다와 함께 호우죠우 츠나시게( 綱成)가 지키는 카와고에(河越)() 탈환을 꾀했다. 카와고에 성() 1537년에 츠나시게에게 빼앗긴 토모사다의 거성(居城)이었다. 츠나시게는 원래 쿠시마(福島)라는 성()이었지만 호우죠우 씨()의 보호를 받으며 우지야스의 동생 격의 신분이 되어 있던 인물이었다[각주:4].

 더욱이 이 카와고에 공성(攻城)에는 우지야스의 매제(妹弟)인 코가 쿠보우(古河 公方) 아시카가 하루우지(足利 晴氏)도 가담하고 있었다. 노리마사의 꼬임에 넘어가 버린 것이었다. 이리하여 카와고에 성()은 노리마사, 토모사다, 하루우지 8만의 연합군에 의해 포위되어 버렸다. 그리고 반년에 걸친 공격을 받아 언제 낙성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놓였다.


 1546 4.

 우지야스는 카와고에 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8천의 병사를 이끌고 달려왔다. 병력의 차이는 10 1이었다. 보통의 방법으로는 우지야스에게 승산이 없었다.

 우지야스는 거기서 사자(使者)를 아시카가 하루우지에게 보내어 카와고에에서 농성(籠城)하고 있는 병사들의 목숨만이라도 살려주십시오. 그래 주신다면 카와고에의 성과 영지(領地)를 쿠보우(公方)님에게 바치겠습니다하고 몇 번에 걸쳐 애원한 것이다. 하루우지는 듣기는커녕 비웃으면서 네놈들이 바치지 않아도 당장 내일 즈음은 성이 떨어질 것이다. 성 안의 병사들은 전부 죽이고 또한 우지야스도 잡아 죽일 테다고 잘난 척 했다.

 우지야스는 또한 우에스기의 부장(副將) 오다(小田)()의 부하인 스게노야(菅谷)라는 자에게도 사자를 보내어 어떻게든 성의 츠나시게를 도와줄 방법은 없겠습니까? 도와만 준다면 카와고에 성()은 당신에게 받치겠습니다. 만약 전투라도 일어난다면 우리 쪽은 병사 수가 적으니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고 전했다. 우에스기 측은 우지야스의 이러한 애원에 [호우죠우 측은 겁쟁이 병이 돌고 있다]고 보았다. 그 소문은 우에스기 연합군 전체로 퍼져, 이제는 다 이기기라도 한 듯한 분위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이 우지야스의 노림수였다. 우지야스는 시노비([각주:5])를 써서 적측의 정세를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다.


 4 20일 밤.

 우지야스는 경장(輕裝)의 정예병으로 구성된 돌격대를 편성해서는 적진 깊이 잠입시켜 놓고서는 불을 밝혀 성안에 있던 병사들과 호응하여 기습을 하였다. 어두운 밤 중의 습격에 우에스기 연합군은 단지 당황하여 허둥댈 뿐으로, 결국 도망을 치다 오우기가야츠 토모사다는 전사하였고 노리마사, 하루우지는 간신히 도망쳤다(카와고에 전투:위키 한글판).


 1554.

 그때까지 적이었던 타케다 신겐,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삼국동맹(同盟)을 맺었다. 우지야스의 장남 우지마사(氏政)와 신겐의 딸을 결혼시키고, 우지야스의 딸을 요시모토의 아들 우지자네()에게 시집 보내어 상호간에 인척 관계를 맺은 것이었다. 스루가(駿河)젠토쿠()사(寺)에서 모여 맺었기에 세상에서는 이를 [젠토쿠 사의 회맹]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동맹도 요시모토가 죽은 다음에는 깨어진다.


 우지야스는 민정가(民政家)로서도 뛰어나 다른 다이묘우(大名)들보다 먼저 본격적인 검지( 전답의 석고를 정하는 것)와 세제(稅制) 개혁을 행하였고, 전마(傳馬 수송용의 말)제도를 정비하였다. 또한 통화를 명나라의 영락전(楽銭)으로 통일하여 상공업자를 보호하는 등 경제 정책에도 능하였다. 또한 아시카가 학교(足利[각주:6])를 원조하거나, 와카(和歌)를 산죠우니시 사네타카(西 )에게 배우는 등 문화인(文化人)적인 측면도 겸비하고 있었다.


[호조 우지야스( 氏康)]

1515년 우지츠나(氏綱)의 아들로 태어나다. 소우운(早雲)에서부터 3대째이다. 1541년 부친 우지츠나가 죽은 뒤 27살의 나이로 가독을 이었다. 카와고에의 야전(夜戰)에서 승리하여 무사시()의 태반을 영유(領有)하였고, 1551년에는 우에스기 노리마사의 히라이(平井)성(城)을 공략하여, 칸토우()를 자신의 세력권 하에 두었다.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타케다 신겐과도 싸웠다. 1571년 죽었다.

  1. 갑옷의 등 뒤에 묶은 끈을 지칭. 링크타고 가시면 이미지를 볼 수 있습죠. [본문으로]
  2. 우지야스 12살이면 1527~8년경. 많이 알려진 타네가시마(種子島) 섬에 철포가 전래된 것은 1543년 이지만, 위의 우지야스 일화가 실린 [호우죠우 오대기(北条五代記)]에 따르면 1510년에 외국에서 일본 사카이(堺)로 전래되었고 1528년 즈음에 오다와라에 있던 늙은 중(山伏)이 사카이에 갔다가 신기하여 한 정 사서는 우지츠나(氏綱 – 우지야스의 부친)에게 받쳤다고 한다. [본문으로]
  3. 나머지는 이츠쿠시마(厳島) 전투, 오케하자마(桶狭間) 전투 [본문으로]
  4. 둘 다 1515년 태생으로 동갑이긴 하다 [본문으로]
  5. 닌쟈(忍者)를 말한다. [본문으로]
  6. 당시 칸토우 지방 최고의 학교 겸 서고. 후에 히데츠구의 강압으로 많은 책을 빼앗겼다고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