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와는 대조적으로 강직하고 우직한 장수였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죽은 뒤 노부나가의 후계자리를 둘러싸고 히데요시와 격렬한 주도권다툼을 벌이다 패했다.

 전해지는 카츠이에의 목상을 보면 눈꼬리가 치켜 올려진 염라대왕과 같은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카츠이에는 오다 가문 내에서도 그의 부대 표식(馬印)인 금색 고헤이(御幣)가 [귀신 시바타의 고헤이]라 칭송 받을 정도로 맹장이었던 것이다.(이곳(링크)에 가보면 중간 즈음에 좌상과 금색 고헤이(御幣)를 볼 수 있다)

 맹장이라는 이미지와 반대로 카츠이에게는 뛰어난 민정가로서의 일면도 있었다.
 농민 반란군(一向一揆)을 멸하고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의 성주가 된 카츠이에는 칼 단속령(刀狩)을 단행하여 농민들의 무기를 전부 몰수한 후 그것을 다시 농기구로 만들어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남은 것은 쇠사슬로 만들어 쿠주류우가와 강(九頭龍川)에 가교(架橋)를 세웠다. 영지(領地)에서 48척의 배를 모아 떠내려가지 않게 쇠사슬로 엮고 그 위에 널빤지를 이어 다리로 만든 것이다. '후나바시(舟橋)'라는 이름이 붙여져 지금도 그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키타노쇼우를 종단하는 아스와가와 강(足羽川)에 반은 돌, 반은 나무로 평판이 자자한 '오오하시(大橋)'도 만들었다.

 시바타 씨(柴田氏)는 대대로 오다 가문의 가로(家老)를 역임하는 가격(家格)을 가지고 있으며 카츠이에는 중신 필두로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었다. 한때는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카츠(信勝)[각주:1]의 모반에 가담하여 노부나가에게 반항하였다. 당시 캐찌질이(大うつけ)라고 불리고 있던 노부나가를 오다 가문 번영을 위해 없애버리고자 한 것이다. 그것에 실패하자 곧바로 머리를 밀고 용서를 구하였다. 보통 노부나가는 한번 자신에게 모반을 일으킨 자는 절대로 용서하는 일 없이 곧바로 죽였지만[각주:2] 카츠이에의 경우 그의 우직과 성실함이 인정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카츠이에의 무공을 말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독 깨기 시바타(かめ割り柴田)]라는 에피소드이다. 1570년 오다 노부나가가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朝倉)를 공격하였을 때 갑작스런 아자이 나가마사(井 長政)의 배신으로 인해 실패했던 시기였다. 오우미(近江) 방어를 위해 카츠이에는 쵸우코우지(長光寺)성()을 소수의 병사와 지키고 있었는데 거기에 남 오우미의 옛 주인인 롯카쿠 죠우테이(六角 承禎)가 8000의 병사를 이끌고 공격해 온 것이다. 농성전이 시작되었다. 성의 용수지(用水池)를 빼앗겼기에 이내 성 안에 마실 물이 바닥을 드러냈다. 적은 그것을 알아차리고 항복을 권고해 왔다. 갈증으로 쓰러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카츠이에는 성 안의 모든 병사를 모아 결의를 다졌다.
 "이대로 간다면 자멸할 뿐.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오늘 밤 출격하여 최후의 꽃을 피워보지 않겠는가?"
 그리고 성 안에 남은 물을 큰 독에 모아 병사들에게 한 잔씩 마시게 한 후 손수 나기나타(薙刀)로 독을 깬 것이다. 그리하여 시바타의 군세는 전원 결사의 돌격을 감행하여 몇 배나 되는 적을 물리친 것이다.

 1582년 6월 2일.
 혼노우(本能)사(寺)에서 주군 노부나가가 죽은 시점이 카츠이에 인생의 분수령이었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천하인이 되는 것은 필두 중신은 자신이다. – 그렇게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아케치 미츠히데(
明智 光秀) 토벌을 히데요시가 먼저 해버린 것이다. 이때부터 카츠이에와 히데요시간에 주도권 다툼이 펼쳐지게 된다.

 오다 가문의 후계를 정하는 키요스 회의(議)가 그 결정적인 장면이 되었다. 카츠이에는 노부나가의 셋째 노부타카(信孝)를 내세웠으며 히데요시는 혼노우(本能)사(寺)의 변에서 노부나가와 함께 죽은 적자 노부타다(信忠)의 아들 산포우시(三法師=후에 히데노부(秀信))를 내세웠고,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를 자기 측에 끌어들인 히데요시가 결국 적통이라는 명분을 이유로 산포우시 추대에 성공한 것이다.

 주도권 다툼에서는 패했지만 카츠이에는 그 대신 당시 절세의 미녀라 칭송 받던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노카타(お市の方)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당시 카츠이에 61세.
 오이치노카타는 박복한 운명에 휘둘린 여성이었다. 처음엔 오우미의 아자이 나가마사에게 시집가 2남3녀를 낳았지만 오빠 노부나가에게 남편 나가마사는 멸망 당하고 장남까지 살해당하였다.

 히데요시도 오이치노카타를 남몰래 동경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히데요시와 카츠이에가 싸운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合
)는 오이치노카타를 빼앗긴 히데요시가 카츠이에에게 실연당한 복수를 한 것이라는 설이다. 히데요시는 싸움에 패하여 키타노쇼우에서 농성하는 카츠이에에게 목숨은 살려줄 테니 코우야산 산(高野山)으로 물러나라며 3만석의 땅까지 약속했다고 한다. 그 본심은 오이치노카타를 자신의 것으로 하려는 것이었다고 하지만 믿기 힘든 이야기다.

 히데요시가 천하를 손에 넣는데 있어 최대의 강적은 카츠이에였다. 포르투갈의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도 보고서에 '히데요시는 카츠이에만을 두려워한다'고 적었다. 에도 시대 초기 바쿠후(幕府)의 유학자인 하야시 가호우( 鵞峰[각주:3])도 '히데요시는 카츠이에의 목숨을 살려주자고 하는 부하에게, 카츠이에가 살아서는 내 야망이 성취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기록하였다.

 1583년 3월 시즈가타케 전투가 카츠이에의 운명을 정하였다.
 1개월간에 걸친 지구전이 펼쳐지던 중에 기후 성(岐阜城)의 오다 노부타카 공격에 나선 히데요시의 빈자리를 노려 카츠이에의 부하장수인 사쿠마 모리마사(佐久間 盛政)가 기습을 감행했다. 이 사쿠마의 기습은 성공하여 히데요시 측의 무장인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
秀)를 전사시키고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을 패주시키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지만 거만해진 사쿠마는 예정대로 철수하지 않았고 카츠이에의 세 번에 걸친 명령도 승리에 취하여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이 패전의 소식을 듣자마자 예전 츄우고쿠 대반전(中大返し)를 방불케 하는 무서운 속도로 되돌아왔다. 그것은 52km를 불과 5시간 만에 주파한 초인적인 속도였다.
 시즈가타케에 나타난 히데요시군을 보고 그 경이적인 신속함에 시바타군은 동요했다. 4월 20일 미명부터 시작된 시즈가타케의 결전은 카토우 토라노스케(加藤 虎之助=키요마사(
正)), 후쿠시마 이치마츠(福島 市松=마사노리(正則)) 등 소위 칠본창의 무공 등에 힘입어 히데요시의 승리가 결정되었지만, 이미 개전하기 전부터 카츠이에의 패배는 결정적이었던 것이다. 즉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후와 카츠미츠(不破 勝光), 카나모리 나가치카(金森 長近) 등 시바타 휘하의 여러 무장이 히데요시에게 내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바타군은 붕괴되어 에치젠으로 패주하기 시작했다. 카츠이에도 불과 100여기의 수하들에게 보호받으며 토치노키토우게 고개(木峠)를 넘어 에치젠(越前)에 들어섰고, 그 후 마에다 토시이에의 거성 후츄우(府中)에 도착했을 때는 불과 8기로 줄어있었다. 이때 카츠이에는 후츄우 성의 마에다 토시이에를 방문하였다. 배신한 토시이에를 원망하는 마음이 카츠이에에게 없었다. 토시이에가 내온 식사를 다 먹은 후 지금까지 토시이에가 자신에게 해 준 것에 감사를 한 후, "자네와 치쿠젠(筑前=히데요시)은 굉장히 친한 사이. 나와의 약속은 버리고 히데요시와 같은 편이 되어 영지(領地)를 지키시게"라고 권했다 한다. 더군다나 카츠이에는 키타노쇼우에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토시이에에게 인질인 딸[각주:4]을 돌려보내었다.

 키타노쇼우의 최후가 왔다.
 이제 성의 병사는 3000도 안 되었다. 이미 밖에는 노도와 같이 에치젠으로 진격해 온 히데요시의 대군이 성(
)을 포위하고 있었다. 카츠이에는 고굉지신이라 부를 수 있는 80여명의 부하를 텐슈(天守)로 불러들여 석별의 주연을 벌였다. 한 사람 한 사람 술을 따라주며 돌아다녔고 부하들의 부인과 시녀들, 그녀들의 말상대인 비구니에게까지 시중을 들었고, 가무음곡을 즐기며 취했다고 한다.

 주연이 끝나자 카츠이에와 오이치노카타는 거실로 옮겨 옛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츠이에는 이때 몇 번이나 오이치노카타에게 성에서 나갈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오이치노카타는 마지막까지 받아들이지 않고 남편과 운명을 함께 할 것을 맹세하였다. 오이치노카타는,

그렇지 않아도 졸린 여름 밤에
꿈길로 유혹하는 두견새려나
さらぬだに
ぬる
夢路をさそうほととぎすかな

 카츠이에는,

여름 밤 꿈길이라는 허무한 흔적의 이름을
저 하늘까지 가져가다오 두견새여
夢路はかなき
雲井にあげよほととぎす

 라고 각각 사세구를 읊었다.

 다음 날 1583년 4월 24일 미명부터 히데요시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정오에 이르러 이제는 각오를 정해야 할 때라고 본 카츠이에는 텐슈(天守)에 올라 화약에 불을 붙여 일족들과 함께 자인하고 성과 운명을 함께하였다.

[시바타 가쓰이에(柴田 勝家)]
1522년 태생. 통칭 곤로쿠(
). 슈리노스케(修理亮). 오다 가문(織田家)의 필두중신으로 1575년 9월 노부나가(信長)의 에치젠(越前) 농민반란군(一向一揆) 토벌 후 에치젠 국주()가 되었다. 혼노우(本能)사()의 변 때는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와 싸우고 있었다.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패하여 거성 키타노쇼우()에서 자해하였을 때는 62세로 부인인 오이치노카타(お)는 37세였다.

  1. 보통 노부유키(信行)로 많이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2. 내가 알기로는 이런 적 없다. 곧바로 죽인 사례를 아시는 분은 댓글 부탁. [본문으로]
  3. 에도 바쿠후(江戸幕府) 초기에 활약한 유학자 하야시 라잔(林 羅山)의 아들. [본문으로]
  4. 후에 히데요시의 측실 카가도노(加賀殿)가 되는 마아히메(麻阿姫). [본문으로]

 센고쿠라는 시대의 무서움을 말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1574년의 설날, 기후(岐阜)성(城)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정월 잔치를 연 자리였다. 중신들과 종속 다이묘우(大名)들이 물러간 뒤 친위대(馬廻) 장수들만의 술자리가 되었을 때, 노부나가는 검은 상자 세 개를 가지고 오게 하였다. 누군가가이번에는 어떤 안주인 것입니까?”하고 묻자, 노부나가는이 세상에 진귀한 안주다라고 말했다.

 노부나가가 꺼낸 내용물을 보고 자리는 일순 정적에 휩싸였다.

 아름다운 금은으로 채색되어 있지만, 인간의 두개골인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거기에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 아사쿠라 사쿄우다이부 요시카게[朝倉 左京大夫 義景]

. 아자이 시모츠케[井 下野(=히사마사(久政)]

. 아자이 비젠[井 備前(=나가마사(長政))

 바로 전년도에 노부나가에게 쓰러진 자들의 두개골이었던 것이다.

 

 부자가 함께 사람들 앞에 두개골이 내보이게 된 아자이 가문은 오우미(近江)의 명문가였다.

 비와코(琵琶湖) 호수의 북부에 그들의 거성 오다니(小谷)성(城)이 있었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동쪽으로는 산기슭을 둘러싼 거대한 연못이 천연의 해자(垓子)를 이루고 있었다. 거기에 남쪽에도 커다란 늪이 있었다. 지키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고 공격하기에 역시 이보다 더 어려울 수 없는 성이었다.

 

 오다니 성()이라고 하면 아자이 나가마사의 부인 [오이치노카타()]가 유명하다. 이곳에 시집온 다음부터 [오다니노카타(小谷)]가 된다. 노부나가의 여동생이라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시집을 온 것은 나가마사 20, 오이치가 18살 때였다. 평판이 자자했던 미모의 여성이었다. 나가마사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들은 각각 화려한 생애를 보내게 된다. 장녀는 요도기미(淀君[각주:1])가 되었으며, 차녀는 쿄우고쿠 타카츠구(京極 高次)의 부인, 삼녀는 토쿠가와 2대 쇼우군() 히데타다(秀忠)의 부인이 된다.

 

 아자이 나가마사의 불행은 범용한 부친을 둔 것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조부인 스케마사(亮政)는 기량이 뛰어난 무장이었지만 그 뒤를 이은 히사마사는 놀고 즐기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가신들의 신망도 적었다. 스케마사가 죽자 이 히사마사는 아자이 가문의 원로 격인 오오하시 히데모토(大橋 秀元)를 강제로 할복시켜 버렸다. 나가마사와도 의견이 맞지 않았다. 어렸을 적의 나가마사는 부친의 분노를 사서 일년 정도 오다니의 키요미즈다니(水谷)에 있는 묘우오우(明王)()에 감금당한 적이 있다.

 

 결혼 문제로도 충돌했다.

 나가마사 15살 때였다. 상대는 오우미(近江) 칸논지(音寺)성(城)의 성주 사사키 요시카타( 義賢[각주:2])의 노신 히라이 이가노카미(平井 伊賀守)의 딸이었다. 히라이 씨()는 사사키의 일족이라고는 하여도 그 가신에 불과하였다. 나가마사로서는 사사키 가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오우미 명문의 긍지가 있었다[각주:3]. 아무리 부친의 권유라고는 하여도 승복하기 힘들었다. 그는 이 결혼 이야기를 확실히 거부했던 것이다[각주:4]. 부친 히사마사는 화를 내었지만 가중의 신망은 이미 젊은 주군 나가마사에게 모이고 있었다. 히사마사는 이 다음 해에 가신들의 청원으로 은거 당하게 된다.

 

 여기서 언급해 두어야 할 것이 아자이 가문 비극의 원인은 조부 스케마사 대부터 이어져 왔던 에치젠(越前) 아사쿠라 가문과의 친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와 당시의 아사쿠라 가문의 당주 요시카게는 사이가 나빠 천하포무(天下布武)를 목표로 하는 노부나가가 두 번이나 상경을 재촉했는데도 불구하고 요시카게는 이를 계속 거절한 것이다. 이는 노부나가에 대한 도전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때 요시카게는 동맹자인 아자이 나가마사에게 밀사를 보내 자신들과 함께 움직일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나가마사는 괴로운 입장에 놓였다.

 노부나가는 마누라의 오빠였다. 그렇다고 해서 조부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아사쿠라와의 친분을 버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가마사는 노부나가에게 자신에게 아무 말도 없이 무단으로 아사쿠라를 공격하지 않도록 약속시켰다.

 

 하지만 1570 4.

 노부나가는 대군을 일으켜 에치젠 침공을 시작하였다.

 이때 나가마사의 결단이 아자이 가문의 명운을 가르게 되었다. 아자이 가문은 노부나가의 침략을 보고 마누라의 오빠라는 노부나가와의 관계보다, 50년에 걸친 아사쿠라 가문과의 교분을 우선시한 것이다. 보수적인 부친 히사마사의 의견이 강했던 것이다.

 

 오다 측에서는 아자이가 공격해 올 턱이 없다고 믿고 에치젠에 진공하였던 것이지만 거기에 갑자기 등뒤에 있던 아자이 군이 공격해 온 것이다. 오다 군은 완전히 퇴로가 가로막힌 꼴이 되었다. 괴멸의 위기였다. 오다 군은 간신히 비와고(琵琶湖) 호수 서쪽 산맥으로 우회하여 퇴각했다.

 이 결단으로 인해 아자이 가문은 노부나가를 완전히 적으로 돌려버리게 된다. 파죽지세와도 같은 신흥세력을 버리고 늙은 대국 아사쿠라 가문과 운명을 함께하고자 결의한 것이다.

 

 1573 8.

 오다 군은 재차 에치젠(越前)에 침공하여 별 힘 안들이고 아사쿠라 군을 괴멸시키고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로쿠보우(六坊) 켄쇼우(賢松)()에 몰아넣어 자살하게 만들었다.

 오다니 성()의 아자이 가문은 이젠 완전히 고립되었다. 압도적 우세에 선 오다 군은 이번에야말로 아자이의 숨통을 끊어놓고자 성 밑 마을(城下町)을 오다 군의 군사들로 메운 것이었다.

 곧바로 토라고젠야마(虎御前山) 산이 오다 측의 공격을 받았다. 이곳은 오다니 성()을 지키는 요해(要害)의 땅으로 아자이의 병사 482명은 끝까지 오다 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남은 것은 아자이의 본거지 오다니 성()만이 남게 되었다.

 오다의 대군은 슬금슬금 성을 포위하여 파리가 드나들 틈도 만들지 않았다. 이제 오다니 낙성은 시간의 문제였다. 여기까지 이르자 노부나가는 후와 카와치노카미(不破 河)를 사자로 보내어 아자이 나가마사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얌전히 성을 건네고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면, 야마토(大和)() 전체를 준다고 까지 말하였다. 그러나 나가마사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오다니 성() 최후가 다가오자 나가마사는 장졸 700여명을 모이게 한 후 자신의 위패를 내보이며 각오를 단단히 했다. 이 다음날인 8 27, 오다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나가마사는 낙성이 되기 전에 오이치노카타와 딸 셋을 노부나가에게 보내었고, 부친 히사마사가 28일에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자, 성에 불을 지르고 배를 갈라 죽었다. 29세의 젊은 나이였다.

 

 아자이 부자의 목은 쿄우토(京都)로 보내져,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목과 함께 옥문에 내걸렸다.

 

[아자이 나가마사( 長政)]

1545년 히사마사(久政)의 아들로 태어난다. 처음엔신쿠로(新九朗)’라고 하였다. 오우미(近江) 오다니(小谷) 성주.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여동생 오이치노카타(お市の方)에게 장가간 것으로 유명. 롯카쿠 요시카타(六角 義賢)를 물리치고, 쿠츠키(朽木)()를 거느리며 오우미(近江)의 대부분을 영유(領有)한다. 처음엔 오다 씨()와 사이가 좋았지만,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와의 맹약으로 인하여, 노부나가의 에치젠(越前) 침공 때는 아사쿠라 측에 서서 노부나가와 싸웠다. 1570년 아네가와의 전투(姉川の戦い)에서 오다-토쿠가와 연합군에 대패. 1573년 거성 오다니를 노부나가에 공격받아 패사(敗死).

  1.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를 낳는 히데요시의 측실. 키미(君)는 에도 시대 유곽에 있던 여성의 끝에 붙이던 것으로, 그녀를 낮추려는 의도가 이어진 것으로, 당시에 여성을 부를 때는 그냥 '도노(殿)(ex;요도도노)’나 ‘노(の)’ 다음에 ‘카타(方)’(ex;요도노카타=淀の方)를 붙였다. [본문으로]
  2. 롯카쿠 요사카타(六角 義賢)를 말한다 [본문으로]
  3. 아자이 씨(氏)는 지역 호족 출신으로, 사사키의 분가인 쿄우고쿠(京極)씨(氏)의 부하에 지나지 않아 그다지 격이 높지는 않았다. 오히려 사사키 즉 롯카쿠 씨(氏)는 무가로써는 최상격의 가문이었다. [본문으로]
  4. 실은 결혼식만 치른 후 이혼 [본문으로]

아자이 나가마사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6. 11. 19. 09:58 Posted by 발해지랑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
1573
8 28
할복 29

1545 ~ 1573.

오우미(近江) 오다니(小谷) 성주(城主).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여동생인 오이치()를 처로 맞이하여 동맹을 맺지만, 맹우 아사쿠라(朝倉)()를 노부나가가 공격하였기 때문에 배반. 아사쿠라 요시카게(義景)와 함께 아네가와(姉川)의 전투를 벌이나 패배. 후에 오다니 성을 공격당하여 할복했다.






부인과 자식을 사랑하는 호북(湖北)의 용장(勇將)


 아자이 가문은(浅井)초대(初代) 스케마사(亮政)가 주가(主家)인 쿄우코쿠(京極)()를 하극상(下剋上)으로 밟고 올라 와 히사마사(久政), 나가마사로 3대가 이어져 소위 [호북의 패자(覇者)]가 되어있었다. 특히 나가마사는 조부의 기질을 이어 받아 뛰어난 무략(武略)을 발휘하여 가문의 기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1567년.

 오와리(尾張) 키요스(淸州) 성주 오다 노부나가의 동생 오이치를 처로 맞이하여 아자이 가()의 위세는 안정되게 되었다. 오이치와의 사이에 2 3녀를 두었고 이 행복이 영원이 이어질 것이라고 꿈꾸고 있었다.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받들어 상경(上京)할 때 나가마사는 망설임 없이 노부나가와 함께 롯카쿠(六角)()를 싸워 추방시켰다.


 하지만 나가마사는 노부나가의 이기적인 면을 꽤 뚫어 보지 못했다. 아니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부인이나 자식들을 너무 사랑하여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었을 것이다.노부나가는 나가마사의 사람 좋은 것을 이용하여 약속을 위반하였다.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 공격이었다.


노부나가와 갈라서다.


 나가마사는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을 때 - 에치젠의 아사쿠라씨()는 조부 스케마사의 시대부터 친밀한 관계이니 자신한테 알리지 않고 아사쿠라씨()를 공격하지 않는다. 만약 아사쿠라씨()를 공격할 때에는 사전에 나가마사의 이해를 구하도록 굳게 약속했다.

 그러나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은 노부나가를 싫어하여번히 쿄우()로 올라오도록 한 요청에도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다의 속성(属城)인 테즈츠(手筒), 카나가사키()를 빼앗아 버린 것이다. 노부나가는 격노하여 나가마사에게 통보하지 않고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의 원군과 함께 에치젠 공격을 감행했다. 1570 2월이었다.


 그야말로 오다군의 선봉이 아사쿠라의 본거지인 이치죠다니(一乗谷)를 포위하려 할 즈음 노부나가는 나가마사가 배반하여 요시카게에게 가담한 것을 알게 되었다. 옛 의리를 중요시 하는 부친 히사마사의 설득에 의한 것이었다고도 하지만 거기에는 나가마사의 논리가 있었으며 맹목적으로 노부나가를 섬길 수 없다는 오우미(近江) 무사의 의지도 있었을 것이다. 노부나가는 에치젠에서 철수를 명하고 쿄우()로 돌아갔다. 앞뒤로 협격 당하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사태는 같은 해 6월의 아네가와(姉川) 전투로 발전했다.

 이부키(伊吹)산에서 비와코(琵琶) 호수로 흘러 들어가는 아네가와 천을 사이에 두고, 오다-토쿠가와 연합군과 아자이-아사쿠라 연합군이 싸웠다. 선전했지만 노부나가 측의 머릿수에 눌려 나가마사 측은 패배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나가마사는 거성(居城)인 오다니 성을 중심으로 끊이지 않고 노부나가 진영을 공격하여 괴롭혔다.


부인과 자식을 도망시키고 철저항전


 부인과 자식을 가진 인간은 자식이 성장함과 동시에 보수적인 자세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

 필시 나가마사도 그랬음에 틀림이 없다. 오오기마치(正親町) 텐노우(天皇)의 명령를 바탕으로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중개에 나서자 나가마사는 간단히 화의(和議)에 응했다. 성립은 1570년 12월 14.

 이것을 좋지 않게 생각한 나가마사 휘하의 무장도 있었다. 이소노 카즈마사(磯野 員昌) 등의 부하 장수들이 나가마사에게는 더 이상의 가망성이 느낄 수 없다고 단념하며 뒤를 이어 노부나가에게 항복하였다. 나가마사의 수동적인 모습에 실망을 느꼈기 때문이다.


 노부나가는 집념이 강하다. 자신을 거역한 자를 방치해 두는 성격이 아니다. 우선 1573 8월에 에치젠을 공격하였고, 20일에는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자살로 몰았다. 일족인 아사쿠라 카게아키라(朝倉 景鏡)의 배반이 원인이었다. 그리고 노부나가는 이 공격의 기세를 이용하여 나가마사의 오다니 성을 포위하였다.


 8 26일.

 노부나가는 오우미(近江)의 토라고젠(虎御前)산에 포진하고, 후와 카와치노카미(不破 河內守)를 사자로 하여 나가마사에게 항복을 권고하였다. 요시카게를 쓰러트린 지금 나가마사에게는 원한이 없으니 항복한다면 나쁘게는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나가마사가 거절하자 이번엔 야마토(大和) 일국을 주겠다고 하였다.

 나가마사는 1568년 오우미(近江) 침공부터 6년 간 노부나가의 동향을 빠짐없이 관찰해 왔다. 아무래도 목숨을 구해 줄 것 같은 상대가 아니다. 나가마사는 다시 거절했다.

 이 이야기는 결국 오다니성에 농성하는 무장들을 동요시켜 전투의욕을 잃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졌다.


 카와치노카미가 돌아가자 부인인 오이치노카타(市の方)를 설득하여 딸 세 명(챠챠([각주:1]), 오하츠(お初), 오고우(お江[각주:2]))과 함께 노부나가에게 보냈다. 아들인 만부쿠마루(万福丸)와 이쿠마루(幾丸[각주:3])는 도망치지만 만부쿠마루는 잡혀서 살해당한다.


 나가마사는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고 성 밖으로 나가 용감하게 싸웠다. 그리고 8 28일. 성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아카오 미마사카노카미(赤尾 美作守)의 저택에서 할복하였다. 향년 29.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는 사람이 많았다.

  1. 후에 요도도노(淀殿). [본문으로]
  2. 후에 에도 바쿠후(江戸幕府) 2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의 부인. [본문으로]
  3. 갓난 아기였기에 절로 보내져 중이 되었지만 후에 호소카와(細川)씨의 가신이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