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나가의 성격은 크게 나누어 두 개의 면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합리적인 근대(近代)에 대한 동경과 잔혹한 살육에 대한 의지가 그의 몸 안에 공존하고 있는 것 같다.

 포르투갈의 선교사 프로이스(Luis Frois)는 직접 노부나가와 회견하였는데, 당시의 일을 로마 교회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전략)…키가 크고 말랐으며, 수염이 적고, 목소리는 대단히 크며…(중략)… 전술이 뛰어나고, 대부분의 규율에 복종하지 않으며, 부하의 진언에 따르는 것이 드물다…(후략)]

 고 쓰면서, 최하급의 병사와도 친근감 있게 이야기를 하는 대장(大將)이라 말하고 있다. 독선적인 성격이지만 뛰어난 군단지휘자의 풍모를 방불케 한다

 

 노부나가는 중세의 무거운 쇠사슬을 끊어, 일본에 근세의 여명기를 가져다 주었다고 평가 받고 있다. 동시대의 영웅인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이나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과 차별화 되는 것은 이 근대적인 합리성일 것이다. 신겐이나 켄신은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반드시 신불(神佛)에게 기도를 올렸지만 노부나가는 그것을 부정하였다. 노부나가는 무신론자였다.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납득한 것도 노부나가였다. 이보다 백 년 뒤, 에도 바쿠후(幕府)의 어용학자 하야시 라잔(林 羅山)은 지구가 둥글다는 설에 반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노부나가가 얼마나 시대에 앞선 근대성을 가지고 있었는가 알 수 있을 것이다. 코우베()코우베 시립박물(市立博物館)에는 노부나가가 애용하던 세계지도 병풍이 있다.

 

 너무 합리적인 나머지 인간을 하나의 도구로만 이용하려는 냉혹한 면이 있었다. 쓸모 있는 자는 히데요시와 같이 그 출신에 구애 받지 않고 계속 출세시켜 주었지만, 한번이라도 무능이라는 낙인을 찍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버렸다. 가로(家老)로써 힘써온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 등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혼간지(本願寺) 공략에서 아무런 활약이 없었다는 이유로 고우야(高野)산(山)으로 추방 당하였고 말년에는 길가에서 굶어 죽는 비참함 죽음을 맛보게 하였다.

 

 1571 9.

 노부나가는 히에이잔(比叡山)산(山)을 포위하여 건물, 석탑, 승가가람(僧伽藍摩)을 전부 불태움과 동시에 남녀노약을 가리지 않고 수천 명을 학살했다. 이어서 1574년 키소카와() 강 하구(河口)나가시마(長島) 잇코우잇키(一向一揆[각주:1])를 토벌했을 때는, 퇴성(退城)을 허용한 듯이 속여서는 방심한 틈을 타서 일제 사격하고 성에 불을 질러 2만여 명의 남녀를 태워 죽였다. 에치젠(越前)의 잇코우잇키 정벌에서는, 그 시체들로 인하여 후츄우(府中)의 마을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부 불교도에 대한 노부나가의 철저한 증오가 표출된 것이다[각주:2].

 반대로 기독교에는 관대하여 오히려 보호하였다.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가 발령한 선교사 추방령을 해제하였고, 쿄우토(京都)에 교회당을 세우는데 원조까지 하였다.

 

 노부나가에게도 익살스러운 인간적인 측면이 있었다.

 별명을 붙이는 것이 장기로, 히데요시에게는 [원숭이([각주:3])]라던가, [대머리생쥐(げネズミ[각주:4])]라고 붙였으며,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에게는 [대머리(キンカ)[각주:5]]라고 붙였다.

 

 따스한 인간성을 나타내는 편지가 남아있다. 히데요시의 마누라 네네(ねね)에게 보낸 것이다.

 […(전략)네네님 정도의 미인을 저 대머리생쥐 히데요시는 두 번 다시 얻지 못할 테니까, 네네님도 지금부터는 마님다운 관대한 마음을 가지고 질투 같은 것을 일으키지 않게…(후략)]

 히데요시가 여색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을 네네가 노부나가에게 호소하자 그 답변으로 보낸 편지이다. 그 외에도 냉철한 무장의 이미지와는 상상할 수 없는 인간미 넘치는 일면이 있었다.

 스모우(相撲[각주:6])를 아주 좋아하여, 1578년에 아즈치(安土)성(城)에서 열린 스모우 대회에는 주변에서 300여명이 모였고, 이 중에서 23명의 우수 씨름꾼을 선발하여 승자에게는 부채 등의 상품을 내렸다.

 

 오다(織田) 가문 중에서도 노부나가의 가문은 말류(末流)이다.

 오다 가문은 아시카가 쇼우군(足利 )을 보좌역인 시바(斯波) 가문의 오와리(尾張) 슈고다이(守護代[각주:7])였다. 이 오다 가문에 오와리 위쪽 4개군()이세노카미(伊勢守) 가문과 아래쪽 4개군()을 지배하는 야마토노카미(大和守) 가문이 있어, 노부나가가 태어난 가문은 이 야마토노카미 가문을 섬기는 세 행정관(三奉行[각주:8]) 중의 하나였다. 아시카가 쇼우군에서 보면 부하(斯波)의 부하(오다 종가(領家))의 부하(織田 大和守)의 부하(織田 正忠)에 지나지 않는다[각주:9].

 그러나 당시의 하극상 풍조를 타고 노부나가의 부친 노부히데(信秀) 시대에는 오와리(尾張) No.1 실력자로 올라선다.

 

 부친이 죽었을 때, 노부나가는 아직 16살로 세간에서 [최강 찌질이(うつけ)]로 불리며 얼간이 취급을 받고 있었다. 당시의 기록에 따라 그 풍모를 설명하자면, 반바지(半袴)에 나시(なしの浴衣)이며 헤어스타일은 챠센마게(茶筅), 머리를 묶는 끈(元結)은 빨간색이나 짙은 녹색 등의 강렬한 색을 좋아하였으며, 큰 칼(太刀)의 칼집은 붉은색. 무구(武具)도 새빨간 색이었다.

 이런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하였고 걸어 다니며 밤, , 오이, 떡 등을 칠칠 맞게 흘려가면서 먹었다. 거기에 남의 어깨에 매달려 다니거나 하여 행동거지에 예절이 없는 것을 말하면 끝이 없었다.

 

 부친 노부히데의 장례식 날도 제대로 차려 입지 않고 나타나, 부처님 상 앞에 나아가서는 갑자기 향을 움켜쥐고는 부친의 위패에 집어 던지고서는 돌아갔다고 한다. 이 폭거에 교육을 담당한(傅役)인 노신 히라테 마사히데(平手 政秀)는 노부나가의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해 배를 가르고 죽었다.

 

 오케하자마()의 일전이 그런 노부나가의 천하를 손에 넣기 위한 첫 번째 도약대였다.

 1560 5 19일 심야. 노부나가는 갑자기 나각(法螺貝)을 울리게 하여 병사를 동원하면서, 손수 코우와카마이(幸若舞[각주:10]) [아츠모리(敦盛)]를 춤추었다.

 [인간 오십년, 하천(下天)과 비교해 보니, 몽환(夢幻)과 같도다(人間五十年、下天のをくらぶれば、夢幻のごとくなり).]

 이 부분을 세번 춤추었다 한다. 춤이 끝나자 뜨뜻한 물에 밥을 말아서 먹은 뒤 질풍과 같이 달려 나갔다고 한다.

 

 적은 스루가(駿河), 토오토우미(遠江), 미카와(三河)의 대군단을 이끄는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이다. 오와리 절반만 소유한 오다 씨()같은 것은 가볍게 물리치고 쿄우토(京都)에 올라가 천하에 패를 외치고자 하였다. 오다 가문의 위급존망지추(危急存亡之秋)였다. 이마가와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기습 전법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폭풍우가 치고 있었다. 오다 군()덴가쿠하자마(楽狭)에서 쉬고 있는 이마가와 군의 허를 찔러 습격, 결국 대장 요시모토의 수급을 베고 승리의 함성을 울려 퍼지게 한 것이었다(누누이 말씀 드렸듯이 저는 아케치 님의 “[說] 오케하자마(桶狹間) 진상정면공격설”이 가장 신빙성 있다고 생각합니다. – 역자 주)

 

 1575 5나가시노(長篠)의 전투는 일본 전투 사상 획기적인 전투였다. 근대 전법을 구사한 오다 군이, 그때까지 센고쿠(戦国) 최강을 자랑하던 타케다(武田) 군단을 괴멸시킨 것이다. 노부나가는 철포 3000정을 끊임없이 타케다의 병마(兵馬)에 집중하는 방법을 쓴 것이다[각주:11].

 

 아즈치(安土) 7층루의 장대한 성을 쌍은 것은 1579년이다. 아즈치는 쿄우토(京都)와 가깝고 비와코(琵琶湖) 호수의 물길을 이용할 수 있으며, 북쪽으로는 호쿠리쿠(北陸)와 통하며, 남쪽으로는 이세(伊勢)로 연결되는 요충지였다. 7층의 텐슈카쿠(天守閣)의 내부는, 카노우(狩野)파의 벽화로 장식되었고, 최상층은 금박(金箔)을 입혔다고 한다. 일본에 와 있던 선교사들은 성안의 어느 것이나 세계에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화려한 건물이라고 절찬하였다.

 

 희대의 영웅 노부나가는 1582 6 2. 갑자기 일어난 아케치 미츠히데의 모반으로 인해 혼노우(本能)()에서 쓰러졌다.

 이날, 모리 란마루(森 蘭丸)의 보고로 모반의 군세가 아케치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노부나가는 단 한마디 [是非に及ばず 할 수 없군, 어쩔 수 없군한국어로 정확히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 역자 주]라고 말했을 뿐이었다고 한다.

 노부나가는 손수 활을 들고 싸웠지만 이제는 여기까지라는 것을 깨닫자 건물 깊숙이 들어가 문을 닫고 자인(自刃)했다.

 

 그는 단 한 올의 머리카락도 이 세상에 남기지 않았다. 적에게 자신의 시체를 보여지는 것에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1534년 노부히데(信秀)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죽은 후 오와리 절반을 통일하였고,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를 오케하자마에서 물리치고 미카와(三河)의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와 동맹을 맺어 오와리를 통일. 1564미노(美濃)를 공략. 1568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옹립하여 쿄우토(京都)에 입경한다. 이후 아자이(), 아사쿠라(朝倉), 타케다(武田) 등 여러 가문을 물리치고 혼간지(本願寺)의 잇코우잇키(一向一揆)를 항복시켜 천하 제일의 실력자가 되지만, 패업(覇業)을 목전에 두고 부하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모반으로 인하여, 쿄우토(京都) 혼노우(本能)() 에서 자인했다. 49.
  1. 혼간지(本願寺)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농민 폭동군. [본문으로]
  2. 증오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과격한 행동은 에도 시대의 혼간지(本願寺) 측이 왜곡했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3. 원숭이(일본 발음으론 사루(さる))라고 붙게 된 것은, 1591년 쿄우토(京都)에 낙서가 되어있길.. “말세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나무 아래 있는 어느 칸파쿠를 보더라도(末世とは別にはあらじ、木下にさる関白をみるにつけても)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나무 아래’는 키노시타(木下)로 히데요시가 하시바(羽柴) 성을 쓰기 전의 성이다. [본문으로]
  4. 히데요시의 부인 네네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칭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정말로 대머리였다기 보다는, 미츠(光)의 아랫부분과 히데(秀)의 윗부분이 결합되어 ‘대머리 독(禿)’이 되었고, 그와 같은 뜻인 ‘キンカ頭’로 부르지 않았나 싶다. [본문으로]
  6. 일본 씨름 [본문으로]
  7. 여러 지역을 가진 슈고 혹은 바쿠후(幕府)의 중요 직책을 가지고 있을 경우 그 지역에 가지 않은 채 가신 혹은 친척에게 대신 그 지역을 통치시켰고 그런 사람을 슈고다이(守護代)라 하였다. [본문으로]
  8. 오다 이나바노카미(織田 因幡守), 오다 토우자에몬(藤左衛門), 오다 단죠우노죠우(織田 弾正忠)의 세 가문. [본문으로]
  9. 이세노카미 가문(伊勢守)이 오다 가문의 종가라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10. 단한 춤을 추며, 옛 무장들의 영웅담을 읊는 것. [본문으로]
  11. 3000의 철포와 3단 철포는 없었다는 것이 대세이다. 자세한 사항은 검색해 보시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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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19 02: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년도 NHK 대하드라마 주인공이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이기에 만약 그 때까지 번역할 수 있다면 그가 짱 먹을 것 같습니다(예로 '무인 토시이에'의 주인공 마에다 토시이에 포스트( http://blog.naver.com/valhae0810/100023192573 )는 제 블로그에서 가장 많은 댓글과 링크 스크랩을 자랑하고 있습죠)

    문제는 나오에 카네츠구는 92번째 인물이고, 이제 노부나가는 19번째 인물이라는 거....
    (아마 내년 그 드라마가 끝날 즈음에나 가능하지 않을지...)

    개인적으로도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7.20 01: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노부나가!!!
    역자 주에 쓰신 것 처럼 부풀려진 면도 있지만 어쨌든 대단한 인물이네요
    '빠'는 아니지만 여러가지로 배울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전국무장100화 중에서 댓글이 가장 많이 달리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해보네요 ^^;;;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7.20 01: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천지인』은 나오에 카네츠구를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군요
    내년엔 다시 남자들의 세계를 그린 대하드라마~!!! >ㅁ<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20 10: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연은 워터보이즈에서 빤스입고 춤추던 츠마부키... 저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7.20 17: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분도 플레쉬 오버 덕분에 깔끔한 화장을 하실 수 있었던 듯 싶더군요(-_-;) 아무튼 이렇듯 허무하게 죽으리라고는..잔넨(-_-)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21 08: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무라고 말씀하시니까, 프로이스가 노부나가의 죽음에 대해 말한 부분이 생각납니다.(저는 그 부분이 맘에 들더군요)
    [그 이름만으로도 만인을 공포에 떨게했던 인물이, 이 세상에 머리카락 한 올도 남기지 않았다]...는 부분이(...자세하진 않지만, 대충 이런 뜻이었던 것 같네요 ^^)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kanshiniove BlogIcon 루키아 2008.08.27 20: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오다 노부나가를 아주아주 좋아합니다앗..ㅋ.ㅋ.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free_artist BlogIcon 2008.09.18 15: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1 20: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루키아님//저도 노부나가를 아주아주 좋아합니다!

    쏭님//자주자주 들려주세요~

  10. 오호라 2016.09.02 07: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림은 히데요시그림입니다.

 '살무사 도우산'이라는 별명으로 알 수 있듯이, 사이토우 도우산의 평판은 굉장히 안 좋다.

 타이라노 마사카도[門][각주:1],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등과 함께 악인(惡人)의 전형적인 인물로 일컬어지고 있다.

 같은 시대에도 도우산을 비난하는 아래와 같은 낙서가 유행했다고 한다.

주인을 베고, 사위를 죽이는 것은 몸의 파멸. 옛날엔 오사다, 지금은 야마시로

主を斬り、聟を殺すは身のおわり、昔はおさだ、いまはやましろ

 미노오와리(()のおわり)미노[美濃]오와리[尾張]를 말하는 것으로, 주군 토키 요리요시[土岐 芸]가 도우산에게 추방 당하여 미노에서 오와리로 쫓겨난 것을 말하며, ‘오사다 [헤이지의 (平治)]에서 주군인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 義朝][각주:2]를 죽인 오사다 타다무네[長田 忠致]를 지칭하는 것이다. ‘야마시로는 사이토우 야마시로노카미 도우산[斎藤 山城守 道三]을 말한다. 어느 쪽이건 주군을 배신한 극악인(極惡人)이라고 세상 사람들은 손가락질했던 것이다.


 잔혹한 행동도 기록되어 있다.

 [도우산은 작은 죄를 지었더라도 거열형(車裂刑)에 처했으며, 혹은 솥에 죄인을 넣어 그의 부인이나 부모형제에게 불을 피우게 하여 사람들 앞에서 삶아 죽이게 하였다.]


 적수공권(赤手空拳). 일개의 기름 상인에서 미노[美濃] 일국(一国)의 태수로 출세했을 만큼 젊었을 때부터 두뇌의 명석함은 발군이었다.

 쿄우토[京都]의 묘우카쿠 사[妙覚寺]에서 수행할 때는 '배움은 부처의 가르침에 통달하였으며, 변설(辯舌)부루나(富樓那 석가의 제자로 변설가)에도 뒤지지 않을 것이며, 내외(內外)를 잘 깨닫고 있으니 훗날 굉장한 명승(名僧)이 될 것이다'고 촉망 받았다. 묘우가쿠 사()에서는 호우렌보우[法蓮坊]라는 이름이었다. 이 시절에 알게 된 난요우보우[南陽坊]가 훗날 도우산이 출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난요우보우는 미노의 호족 나가이 토시타카[長井 利隆]의 동생으로, 후에 미노[美濃]명찰(名刹) 죠우자이 사[常在寺]의 주지(住持)가 되어 '니치운 상인[日運上人]'이라 불리게 된다.


 도우산의 전반생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들이 있어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쿄우토[京都]의 교외에 있는 니시노오카[西]의 낭인 마츠나미 모토무네[松波 基宗]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마츠나미 가문은 대대로 '북면의 무사(北面武士 상황(上皇)의 거처를 지키는 무사)' 집안이었다고 한다.

 호우렌보우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환속하여 기름 상인이 되었다. 나라야[奈良屋]데릴사위로 들어가, 야마자키야 쇼우고로우[山崎屋 庄五郎]라는 이름을 칭었다.


 미노[美濃]의 성 밑 마을(城下町)에서 기름 행상을 하고 있을 때의 에피소드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손님을 모으기 위해서 일종의 퍼포먼스를 보여준 것이다. 기름을 에 담아 손님의 항아리에 옮기는데 깔때기를 사용하지 않은 채 일문전(一文銭[각주:3])의 구멍을 통해서 흘려 넣은 것이었다. 한 방울도 구멍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구멍 주위에 한 방울이라도 묻는다면 공짜로 주겠다고 하였기에 그에게는 손님들이 잔뜩 모여들었다고 한다.

 어쩌다가 이 퍼포먼스를 미노[美濃]의 호족 나가이 토우자에몬[長井 藤左衛門]의 가신 중에 한 명이 보게되었다.

 굉장한 기술이군. 저 묘기를 무예로 살린다면 필시 뛰어난 무사가 될 수 있을 텐데……”


 이 나가이 가문의 무사가 한 말이 도우산을 무사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도우산은 기름 상인을 관두고 창() 수련에 정진하기 시작했다. 3간반(間半=약 6미터40센티[각주:4])이라는 굉장히 긴 창(=나가야리(長槍))을 만들어, 그 창 끝에 바늘을 달아서는 대나무 가지에 매단 일문전의 구멍을 뚫는 연습을 하였다. 필사의 수련 끝에 구멍을 뚫을 수 있었고 이어서 백발백중의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나가야리[長槍]는 센고쿠[戦国]전투에는 필수인 것이 되었는데 도우산이 그것의 발명자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또한 철포()의 실력도 또한 굉장했다고 한다[각주:5].
 이리하여 무예가 숙달된 도우산은 예전 묘우가쿠 사()에서 함께 수행했던 난요우보우=니치운 상인[日運上人]의 연줄로 나가이 토우자에몬 나가히로[長井 藤左衛門 長弘]를 섬기며, 마츠나미 쇼우고로우[松波 庄五
郎]라는 이름을 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도우산이 가진 다른 매력적인 면으로 나가이 씨()에게 접근한 것은 아닌가 하는 말들도 있다. 기름 상인이라고 하여도 조그만 가게를 운영했던 것이 아니라야마자키 하치만 궁[山崎八幡宮]전매권(專賣權)을 가진 기름 조합(油座)에 속해있던 상인으로 대단히 큰 규모의 가게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기름 조합의 상인은 관소(關所[각주:6])를 통과할 때도 세금을 면제받는 특권상인이었던 것이다.


 곧이어 도우산은 미노 슈고[美濃守護] 토키 모리요리[土岐 盛頼][각주:7]의 동생인 요리요시[芸]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이 즈음부터 그의 야망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는 요리요시를 꼬드겨 자신을 멀리하고 있던 당주인 모리요리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당주가 된 요리요시는 도우산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도우산은 요리요시의 애첩 미요시노[深芳野]까지 자신의 부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의 독선적 행위가 두드러지기 시작하자 노신(老臣)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특히 도우산을 천거했던 나가이 토우자에몬이 가장 강하게 반발한 것이다. 그러자 도우산은 은혜를 입었던 이 토우자에몬을 모살(謀殺)해 버린다. 이미 나가이 신쿠로우 토시마사[長井 新九朗 利政]로 이름을 바꾸고 있던 도우산은 이렇게 나가이 가문을 완전히 빼앗은 것이다. 일시적으로 나가이 일족의 반발을 사 공격을 받아, 주군 요리요시 밑으로 도망쳤으나 오우미[近江]의 슈고다이묘우[守護大名] 사사키 씨[木氏][각주:8]의 중재로 겨우 지위를 보전하였다.

 이후 도우산은 또다시 성()을 바꾸어 사이토우 성[姓][각주:9]을 칭하였다. 쇠약해져 있던 사이토우 씨()의 양자로 들어가 사이토우 야마시로노카미 히데타츠[藤 山城守 秀竜]라는 이름을 쓴 것이다. 착실히 그는 출세의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야망은 끝없이 커져만 갔다. 다음 목표는 미노[美濃]의 주인 자리였다.


 그의 독선적인 행동이 또다시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미노의 호족들이 반 히데타츠 연맹군을 조직하여 공격해 왔다. 그러나 운 좋게 오우미[近江]의 사사키 씨(), 에치젠[越前] 아사쿠라 씨[朝倉氏]의 중재로, 큰일이 터지기 전에 화해하였다. 이때 히데타츠는 그 죄를 사죄한다는 의미로 머리를 밀고 불문에 들어가 이때부터 도우산[道三]이라는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도우산의 덫이었다.

 15425. 갑자기 도우산은 요리요시의 거성 오오가 성[大桑城]을 습격하여 주군을 추방하여 명실공히 미노[美濃]의 태수(太守)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도우산은 곧이어 이웃나라 오와리[尾張]의 오다 노부히데[織田 信秀]의 공격을 받게 되지만, 딸인 노히메[]를 노부히데의 적자 노부나가와 결혼시켜 평화협정을 맺었다.

 당시 얼간이라는 말을 들으며 무시를 받고 있던 노부나가를 한번 보자마자,

 안타깝게도 이 얼간이 집 앞에 내 자식들은 말을 메게 되겠구나[각주:10]

 라고 탄식했다는 유명한 이야기는 이 즈음의 일인데, 도우산은 멍청함을 가장한 노부나가의 얼굴에서 일찍부터 후년 천하의 패자(覇者)가 가진 재능을 꿰뚫어 본 것이었다. 역시 예언은 적중하여, 도우산의 손자 타츠오키[興] 때가 되어 사이토우 가문은 노부나가에게 멸문 당해 버린다[각주:11]

 

 도우산의 말년은 비참했다.

 그는 주군 요리요시의 복수를 받게 된다. 그의 부인이 된 미요시노는 도우산에게 왔을 때 이미 요리요시의 씨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도우산의 적자 요시타츠[]였다. 이 설의 진위는 확실치 않지만 도우산의 애정은 이 장자에게는 박했고, 둘째인 마고시로우[孫四郎], 키헤이지[喜平次]에게만 쏠려 있었다.

 

 도우산은 요시타츠에게 가독을 물려주어 킨카잔 성[金華山城][각주:12]에 있게 하고, 자신은 나가라가와[長良川] 강 건너편에 있는 사기야마 성[鷺山城]에 은거하였다.

 요시타츠는 한센병을 앓고 있었고 65(195cm)이라는 큰 키였으며 성격도 굉장히 과격했다고 한다.

 부자간의 사이는 좋지 않아 날이 갈수록 험악해 져 갔다. 도우산은 요시타츠를 없애고 둘째인 마고시로우에게 가문을 물려주려고 은밀히 꾀했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요시타츠가 선수를 쳤다. 꾀병을 부려 숨이 있는 동안 유언을 하고 싶다고 하여 두 동생을 성에 불러들여 죽인 것이다.

 도우산은 격노하였다. 두 아들을 단번에 잃은 실망도 컸다. 이리하여 아비와 아들이 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1556 4.

 결국 둘은 전쟁을 벌인다. 도우산은 63세가 되어 있었다. 젊은 요시타츠의 적수는 되지 못하였다. 패하여 키다이 사[城田寺]로 도망치던 도중, 요시타츠의 가신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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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시타츠의 아들 타츠오키가 노부나가에게 패하여 사이토우 가문에 종지부가 찍히는 것은 이로부터 11년이 지난 1567년이었다.

 

[사이토 도산(藤 道三)]
이름은 토시마사[利政], 후에 히데타츠[竜]. 말년에 불문에 들어가 도우산[道三]이라는 이름을 칭했다. 미노 슈고[守護] 토키 씨[土岐氏]의 가신이 되었고, 1542년 주군 요리요시를 추방하여 미노 슈고가 된다. 1556 4 20일 적자 요시타츠와 싸워 전사(戰死).

  1. 939년에 칸토우(関東)에서 반란을 일으켜 [새로운 텐노우(新皇)]를 자임하였으나 진압당하였다. [일본 3대 원령(怨靈)] 중의 하나. [본문으로]
  2. 카마쿠라 바쿠후[鎌倉 幕府]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頼朝]의 부친. [본문으로]
  3. 우리 나라의 엽전처럼 구멍이 뚫려 있다. [본문으로]
  4. 아시가루(足軽)가 아닌 일반 무사의 창은 1간반(약 2.7~3미터)~2간(약 3.6~4미터)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일본에 철포가 전래된 것은 1543년이라고 하니 이 당시는 아직 철포에 대해서 몰랐을 것이다. 말년(도우산 1556년 몰) 즈음의 이야기 일 것이다. [본문으로]
  6. 당시는 각 지방의 실력자(영주, 절, 신사 등)들이 재정 확충을 위해서 자신의 영지(領地)를 통과하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거두는 곳이 많았다. [본문으로]
  7. 요리타케(頼武), 마사요리(政頼)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8. 보통 롯카쿠[六角]로 많이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9. 사이토우 씨(氏)는 대대로 미노[美濃]의 슈고다이[守護代]였다. [본문으로]
  10. 얼간이 집 ‘가서’ 인사를 올리거나 지시를 받으러 가야 한다는 의미. [본문으로]
  11. 멸문은 당했지만, 도우산의 막내 아들인 사이토우 토시하루[利治]는 노부나가의 부하가 되었고 후에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타다[信忠] 부속 가신 되어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때, 노부타다와 함께 싸우다 니죠우 성[二条城]에서 죽게 된다. [본문으로]
  12. 이 시대에는 이리 불렸다 한다. 후에 이나바야마[稲葉山]를 거쳐 노부나가 시대에 기후[岐阜]라는 이름으로 바뀐다. 또한 이 성이 있는 산의 이름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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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8.03.20 23: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우산의 아들 요시타츠나 손자 타츠오키의 이름에 '타츠'가 들어가서 왜 그런가 했더니 도우산의 본명에 '타츠'가 들어있었군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21 05: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마...확실치는 않지만...그 윗대에 '타츠(龍,竜)"자가 없는 것을 보면 도우산 때부터 붙이기 시작했나 봅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iroyume BlogIcon shiroyume 2008.03.21 11: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다. ^^ 역시 도산은 아무리 생각해도 완전 히데요시처럼 밑바닥부터 발발 기어오른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밑바닥이락고 생각하는 기름장수설마저도 거상이라는 가설을 담고 있네요. 동전구멍으로 기름따르는건 대망에서도 본것 같은데 여기서 보니 또 새롭네요 ㅎ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21 18: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냥 3년만 버텼어도 나병으로 알아서 죽을것을 뭣하러 도발해서(-_-;;)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21 2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shiroyume님//저 [야망의 사나이 도삼] 보시지 않으셨다면 함 보세요. 볼 만합니다. 다만 끝부분은 서둘러 끝내는듯한 인상을 받지만요. (주인공이라서 그런지 찢어죽이거나 삶아 죽이는 것 같은 잔인한 행적은 나오지 않지만요)

    다메엣찌님//워낙 내정에 어두운 도우산이라 다른 호족들이 "못살겠다 바꾸자"라고 해서 도우산이 어디 간 사이를 노려 봉기했다는 말도 있지만요. ^^ (이노구치(井ノ口)등의 정비나 라쿠이치(楽市)등의 설치를 보면 내정에 어둡다기 보다는 그에 관련된 코쿠진(国人)이나 절, 신사 등의 이권 문제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