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江戸) 시대에 스즈키 시게히데(鈴木 重秀)라는 사람이 호우죠우 가문의 역대 당주들을 평가하면서 우지야스에 대해서, '문무겸비의 무장으로 생애에 걸쳐 몇 번이나 전투에 나섰지만 패한 적이 없다. 거기에 인덕도 있었다. 이 시대에 관팔주(関八州 = 칸토우(関東))의 병란을 평정하여 크게 가명을 높였다. 고금의 명장이다'고 절찬하였다.
우지야스는 칸토우의 태반을 자신의 산하에 두어, 조부인 소우운(早雲)의 꿈을 실현시킨 것이었다.
우지야스가 다스리던 오다와라(小田原)의 모습을 알려주는 귀중한 기록이 남아 있다.
1551년 4월. 하코네(箱根) 유모토(湯本)의 소우운(早雲)사(寺)에 참배하고 오다와라에 들린 쿄우토(京都) 난젠(南禅)사(寺)의 261대 토우레이치오우(東嶺智旺)가 직접 보고 쓴 것이다.
[유모토의 소우운 사(寺)에서 1리(4km). 수도인 오다와라에 도착했다. 거리는 작은 길만 수만 개. 땅에는 먼지 하나도 없다. 동남쪽은 바다이다. 바닷물이 오다와라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군주인 우지야스의 성(城)은 거목 울창한 곳에 있으며 크고 아름답다. 삼면에 큰 연못이 있다. 연못의 물은 가득 차 있어 깊고 낮음을 잴 수 없다. 백조나 물새들이 날개를 쉬고 있다. 군주인 우지야스는 겉으로는 문(文), 속으로는 무(武)의 인물로 형벌(刑罰=정치)이 깨끗하여 원근(遠近)이 모두 복종하고 있다. 그야말로 이 시대 천하 무쌍의 패왕이다.]
이렇게 전성기의 호우죠우 씨(氏)의 오다와라를 굉장히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
불패의 용장이라 일컬어지며 16살의 첫 출진(初陣)을 경험한 이후 병으로 죽을 때까지 36번의 전투에 출격하여 한번도 적에게 아게마키(総角 1)를 보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전군의 선두에 서서 적과 부딪쳐 몸에는 도창(刀槍)의 상처가 7군데 있었고, 얼굴에도 2군데의 상처가 있었다. 그래서 몸 정면에 있는 상처를 [우지야스상처(氏康傷)]라고 부르며 존중 받았다고 한다.
소년시대의 그의 사람됨을 알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12살 때였다. 철포는 아직 드물었던 시기로 어느 날 우지야스는 철포의 사격 연습을 구경하게 되었다. 갑작스런 굉음에 놀란 우지야스는 일순 창백한 얼굴로 몸을 떨었다. 옆에 있던 무사가 그것을 보고 웃었다. 우지야스는 참을 수가 없었다. 창피함에 얼굴이 확 빨개져서는 곧바로 작은 칼을 꺼내어 자해(自害)하려고 하였다. 근시(近侍)의 무사가 당황하여 이것을 막았다. 우지야스의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우지야스를 부속 가로(家老)인 시미즈(清水)라는 자가 “옛날부터 용기 있는 무사일수록 잘 놀란다고 합니다. 뛰어난 말도 성격이 예민하여 잘 놀라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그제서야 참았다고 한다. 2
우지야스의 무명(武名)을 천하에 널리 알리게 한 것은 일본 3대 기습전 3 중에 하나로 꼽히는 카와고에(河越) 전투이다.
1545년 8월.
호우죠우 가문의 영국(領国)과 국경을 접하는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노리마사(山内 上杉 憲政)는 오우기가야츠 우에스기 토모사다(扇谷 上杉 朝定)나 스루가(駿河)의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와 손을 잡고 우지야스를 일거에 괴멸시키고자 하였다.
요시모토는 우지야스 측의 스루가(駿河) 나가쿠보(長久保)성(城)을 포위하였고,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도 역시 공격해 왔다. 한편 노리마사는 토모사다와 함께 호우죠우 츠나시게(北条 綱成)가 지키는 카와고에(河越)성(城) 탈환을 꾀했다. 카와고에 성(城)은 1537년에 츠나시게에게 빼앗긴 토모사다의 거성(居城)이었다. 츠나시게는 원래 쿠시마(福島)라는 성(姓)이었지만 호우죠우 씨(氏)의 보호를 받으며 우지야스의 동생 격의 신분이 되어 있던 인물이었다 4.
더욱이 이 카와고에 공성(攻城)에는 우지야스의 매제(妹弟)인 코가 쿠보우(古河 公方) 아시카가 하루우지(足利 晴氏)도 가담하고 있었다. 노리마사의 꼬임에 넘어가 버린 것이었다. 이리하여 카와고에 성(城)은 노리마사, 토모사다, 하루우지 8만의 연합군에 의해 포위되어 버렸다. 그리고 반년에 걸친 공격을 받아 언제 낙성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놓였다.
1546년 4월.
우지야스는 카와고에 성(城)을 구원하기 위하여 8천의 병사를 이끌고 달려왔다. 병력의 차이는 10대 1이었다. 보통의 방법으로는 우지야스에게 승산이 없었다.
우지야스는 거기서 사자(使者)를 아시카가 하루우지에게 보내어 “카와고에에서 농성(籠城)하고 있는 병사들의 목숨만이라도 살려주십시오. 그래 주신다면 카와고에의 성과 영지(領地)를 쿠보우(公方)님에게 바치겠습니다”하고 몇 번에 걸쳐 애원한 것이다. 하루우지는 듣기는커녕 비웃으면서 “네놈들이 바치지 않아도 당장 내일 즈음은 성이 떨어질 것이다. 성 안의 병사들은 전부 죽이고 또한 우지야스도 잡아 죽일 테다”고 잘난 척 했다.
우지야스는 또한 우에스기의 부장(副將) 오다(小田)씨(氏)의 부하인 스게노야(菅谷)라는 자에게도 사자를 보내어 “어떻게든 성의 츠나시게를 도와줄 방법은 없겠습니까? 도와만 준다면 카와고에 성(城)은 당신에게 받치겠습니다. 만약 전투라도 일어난다면 우리 쪽은 병사 수가 적으니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고 전했다. 우에스기 측은 우지야스의 이러한 애원에 [호우죠우 측은 겁쟁이 병이 돌고 있다]고 보았다. 그 소문은 우에스기 연합군 전체로 퍼져, 이제는 다 이기기라도 한 듯한 분위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이 우지야스의 노림수였다. 우지야스는 시노비(忍び 5)를 써서 적측의 정세를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다.
4월 20일 밤.
우지야스는 경장(輕裝)의 정예병으로 구성된 돌격대를 편성해서는 적진 깊이 잠입시켜 놓고서는 불을 밝혀 성안에 있던 병사들과 호응하여 기습을 하였다. 어두운 밤 중의 습격에 우에스기 연합군은 단지 당황하여 허둥댈 뿐으로, 결국 도망을 치다 오우기가야츠 토모사다는 전사하였고 노리마사, 하루우지는 간신히 도망쳤다(카와고에 성 전투:위키 한글판).
1554년.
그때까지 적이었던 타케다 신겐,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삼국동맹(三国同盟)을 맺었다. 우지야스의 장남 우지마사(氏政)와 신겐의 딸을 결혼시키고, 우지야스의 딸을 요시모토의 아들 우지자네(氏真)에게 시집 보내어 상호간에 인척 관계를 맺은 것이었다. 스루가(駿河)의 젠토쿠(善徳)사(寺)에서 모여 맺었기에 세상에서는 이를 [젠토쿠 사의 회맹]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동맹도 요시모토가 죽은 다음에는 깨어진다.
우지야스는 민정가(民政家)로서도 뛰어나 다른 다이묘우(大名)들보다 먼저 본격적인 검지(検地 – 전답의 석고를 정하는 것)와 세제(稅制) 개혁을 행하였고, 전마(傳馬 – 수송용의 말)제도를 정비하였다. 또한 통화를 명나라의 영락전(永楽銭)으로 통일하여 상공업자를 보호하는 등 경제 정책에도 능하였다. 또한 아시카가 학교(足利学校 6)를 원조하거나, 와카(和歌)를 산죠우니시 사네타카(三条西 実隆)에게 배우는 등 문화인(文化人)적인 측면도 겸비하고 있었다.
[호조 우지야스(北条 氏康)]
1515년 우지츠나(氏綱)의 아들로 태어나다. 소우운(早雲)에서부터 3대째이다. 1541년 부친 우지츠나가 죽은 뒤 27살의 나이로 가독을 이었다. 카와고에의 야전(夜戰)에서 승리하여 무사시(武蔵)의 태반을 영유(領有)하였고, 1551년에는 우에스기 노리마사의 히라이(平井)성(城)을 공략하여, 칸토우(関東)를 자신의 세력권 하에 두었다.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타케다 신겐과도 싸웠다. 1571년 죽었다.
- 갑옷의 등 뒤에 묶은 끈을 지칭. 링크타고 가시면 이미지를 볼 수 있습죠. [본문으로]
- 우지야스 12살이면 1527~8년경. 많이 알려진 타네가시마(種子島) 섬에 철포가 전래된 것은 1543년 이지만, 위의 우지야스 일화가 실린 [호우죠우 오대기(北条五代記)]에 따르면 1510년에 외국에서 일본 사카이(堺)로 전래되었고 1528년 즈음에 오다와라에 있던 늙은 중(山伏)이 사카이에 갔다가 신기하여 한 정 사서는 우지츠나(氏綱 – 우지야스의 부친)에게 받쳤다고 한다. [본문으로]
- 나머지는 이츠쿠시마(厳島) 전투, 오케하자마(桶狭間) 전투 [본문으로]
- 둘 다 1515년 태생으로 동갑이긴 하다 [본문으로]
- 닌쟈(忍者)를 말한다. [본문으로]
- 당시 칸토우 지방 최고의 학교 겸 서고. 후에 히데츠구의 강압으로 많은 책을 빼앗겼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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