쿄우토(京都) 토우지(等持)원(院)에 현존하는 요시아키의 목상(木像)을 보면, 얼굴 아래쪽이 통통한 얼굴로 코가 크며 눈썹이 수려하고 콧수염이 아래로 쳐진 전형적인 귀족의 용모이다.


 진위를 보증할 수는 없지만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가 일으킨 [혼노우(本能)()의 변]의 흑막은 요시아키라는 것이다. 노부나가(信長)에게 추방되어 빙고(備後) 토모노우라()로 망명해 있던 요시아키가 예전 자신의 부하였던 미츠히데에게 비밀리에 지령을 내려 노부나가를 죽이게 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자신을 쇼우군으로 만들고 추방했던 노부나가에 대한 끝없는 증오가 느껴진다.


 요시아키의 노부나가에 대한 증오는 무시무시할 정도였지만 노부나가 덕분에 쇼우군이 되었을 때는 눈물까지 흘리며 기뻐하였다. 그랬을 뿐만 아니라 1569 4월에 요시아키의 새로운 거처 니죠우() 저택이 완성되어 그곳에 그 저택을 만들어 준 노부나가가 기후(岐阜)로 돌아간다는 작별 인사를 하러 온 돌아갈 때가 되자 문 밖까지 직접 배웅을 하고 노부나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서 있었다고 한다.


 요시아키는 12대 쇼우군 요시하루(義晴)의 둘째로 태어났지만, 처음에는 불문(佛門)에 들어가, 나라(奈良) 코우후쿠(興福)() 이치죠우()원(院)의 몬제키(門跡[각주:1])가 되어 카쿠케이()’라는 호로 불리고 있었다.

 그 조용한 불문의 생활이 - 요시테루(義輝=13대 쇼우군)가 미요시 삼인중(三好三人衆)마츠나가(松永) 무리에게 살해당하자 급격히 변하기 시작한다. 카쿠케이는 미요시-마츠나가 무리를 피하여 오우미(近江)의 와다 코레마사(和田 惟政), 칸논지(音寺)성(城)롯카쿠 요시카타(六角 義賢), 와카사()의 타케다 요시무네(武田 義統[각주:2]) 등을 의지하여 방랑하다가 에치젠(越前)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에게 갔을 때 겨우 안정을 되찾아, 여기서 환속(還俗)하여 요시아키()’라는 이름이 되었고, 곧이어 요시아키()’로 개명하였다.


 요시아키의 운명은 노부나가로 인해 크게 비약한다. 1568 7, 둘은 기후의 릿쇼우(立政)사(寺)에서 회견했다.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를 쇼우군으로 옹립함으로써 자신이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고자 하였다.

 요시아키를 옹립한 노부나가는 6만의 대군을 이끌고 상락(上洛)하여 미요시 세력을 쫓아버리고,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를 항복시켰다.


 드디어 요시아키는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에 임명된 것이다. 여러 지역을 유랑한 끝에 얻은 영광이었다. 요시아키는 이 때 노부나가에게 아시카가 가문의 문장인 [오동나무(桐)[각주:3]] [니히키료우(二引)[각주:4]]의 사용을 허락하였고, [아빠 오다 단죠우노죠우님(御父織田忠殿)[각주:5]]라는 명칭으로 쓴 직접 쓴 표창장()까지 보내었다. 얼마나 그의 기쁨이 컸던가를 알 수 있다.

 그 기쁨은 다음 해까지 이어진다. 다음 해(1569) 정월에 미요시 일당이 쇼우군의 거처인 혼코쿠()사(寺)를 습격하자 노부나가는 기후에서부터 눈 속을 삼일 만에 주파하여 미요시 군세를 쫓아낸 것이었다.

 거기에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를 위해서 니죠우()에 새로이 쇼우군 저택을 만들어 주었다. 손수 공사의 감독관이 되어 2만 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불과 1개월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쇼우군과 노부나가의 좋은 관계는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다.


 요시아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쇼우군이란 노부나가의 괴뢰(傀儡) 실권은 어디까지나 노부나가가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요시아키는 실권을 가지고 싶었다. 은밀히 에치젠의 아사쿠라(朝倉)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上杉), 카이(甲斐)의 타케다(武田)나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 노부나가와 적대하는 세력과 연락을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부나가는 이 불온한 움직임에 민감히 반응했다. 1570년 정월, 상경한 노부나가는 쇼우군 요시아키에게 강한 태도로 나왔다. [전중 법도(殿中御掟)]를 정하여 쇼우군이 다른 여러 지역에 편지를 보낼 때에는 반드시 노부나가가 쓴 편지도 첨부하게 만든 것이었다. 이걸로 쇼우군의 정치 행동은 크게 제약 받게 되었다. 쇼우군이라는 것은 이름뿐인 존재였다.


 바야흐로 요시아키의 물밑 공작은 점점 심해졌다. 노부나가의 제약이 반대로 반발로 작용한 것이다.

 여러 지역의 다이묘우들에게 보내는 노부나가 타도의 밀서는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노부나가가 아자이()-아사쿠라 연합군과 싸우고, 이시야마 혼간지와 교전하며,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과 적대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도 요시아키가 배후에서 선동한 것과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다. 어쨌든 요시아키의 적대적 행동에 참을 수가 없게 된 노부나가는 신겐이 서상(西上)하기 직전인 1571 9, 요시아키에게 17개조에 이르는 강경한 의견서를 제출하였다.

  • 여러 지역에 밀서를 내려서는, 말() 같은 것을 달라고 해서는 안 된다.
  • 우리들(노부나가)과 사이가 안 좋아졌다며 재물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에 쿄우() 전체가 시끄럽다. 이렇게 니죠우()의 저택이 있는데 어디로 가시려는 것인가?
  • 노부나가와 친한 사람은 여관(女官)들마저도 잔인한 처벌을 하고 있다.
  • 소송을 노부나가가 청해도 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 다른 지역에서의 헌상품을 감추거나 쌀을 팔아 금으로 바꾸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이유로 그리 하시는 것인가?

 요시아키의 급소를 하나하나 찌르는 힐문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요시아키의 책모는 그치지 않았다. 그 시기 이러한 쇼우군의 행동에 정나미가 떨어진 중신(重臣)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 藤孝=유우사이())는 결국 요시아키를 버리고 노부나가의 신하로 들어간다.


 1573 2.

 요시아키는 결국 깃발을 선명히 하여 노부나가 타도의 병사를 일으켰다. 타케다 신겐이 미카타가하라(三方ヶ原)에서 토쿠가와()-오다(織田) 연합군을 대패시킨 것에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타케다와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군세로 노부나가를 포위 섬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시기를 잃고 있었다. 요시카가가 이미 포위 작전을 내팽개치고 에치젠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었다.

 요시아키는 이때 (西) 오우미(近江)이시야마(石山)에서 잇코우 종도(一向宗徒)들을 규합하여 거병하였다. 예전 형 요시테루(義輝)를 죽인 미요시, 마츠나가 등과도 손을 잡았다.


 하지만 결국 노부나가의 적은 아니었다.

 7. 야마시로(山城) 마키노시마(槇島)성(城)에서 농성하며 최후의 저항을 시도해보았지만 버티질 못하고 당시 2살의 아들 요시히로(義尋)를 인질로 바치고 항복하였다. 이로써 15대가 이어졌던 아시카가 바쿠후(幕府)는 사실상 끝을 고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

1537년 요시하루(義晴)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엔 외숙부 전() 칸파쿠(関白) 코노에 타네이에(近衛 稙家)의 유자(猶子)가 되어 나라(奈良) 이치죠우(一条)() 몬제키(門跡) 카쿠케이(覚慶)라는 이름으로 불문에 있었지만, 환속하여 요시아키(義秋)라 하고, 후에 요시아키(義昭)로 고친다. 처음엔 에치젠(越前)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의지하였지만, 결국 오다 노부나가에 옹립되어 제15대 아시카가 쇼우군이 된다. 노부나가와 사이가 틀어지자 쫓겨나 빙고(備後)로 도망쳤다. 머리를 깎고 쇼우잔 도우큐우(昌山 道休)라는 호를 칭하였고,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보호를 받으며 1만석을 하사 받는다. 1597년 죽다. 61.

  1. 몬제키는 황족이나 고급 쿠교우(公卿)가 잇는 절을 말하며, 이치죠우 원(院)은 코노에 가문의 영향력이 강한 곳으로 외숙부인 코노에 타네이에(近衛 稙家)의 유자(猶子)로 들어갔다. [본문으로]
  2. ‘요시즈미’라고도 읽는다. [본문으로]
  3. 이것은 원래 황실의 것으로 쇼우군 가문이 하사 받은 것을 다시 노부나가에게 허용한 것. [본문으로]
  4. 후타츠히키(二つ引)’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5. 사족으로 노부나가는 1534년생, 요시아키 1537년생. 세 살차이. [본문으로]

 그야말로 이색의 쇼우군[軍]이었다. 13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검술의 달인이었던 것이다. 츠카하라 보쿠덴[塚原卜伝]에게 비기 [히토츠노타치(太刀)]를 전수받았을 정도의 실력이었다.

 달리 생각하면, 전란 다발하던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으로써의 자기단련이었다. 1546년에 쇼우군[軍]이 되면서부터 요시테루에게는 하루라도 평온한 날이 없었던 것이다.

 

 요시테루 치세인 1546년부터 1565년에 이르는 20년간은 중세의 암흑기에서 근세의 여명기로 이어지는 과도기였다. 일본에 온 하비에르[각주:1]처음으로 기독교를 전파하였고, 노부나가[信長]가 오케하자마[間]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를 쓰러뜨린 것도 이 시기였다. 그 격동기의 고뇌를 요시테루는 혼자 짊어지고 있었다.

 

 어렸을 적 부친 요시하루[義晴]와 함께 전란의 쿄우[京]에서 피신하여 오우미[近江]에 있었던 요시테루는, 쇼우군[軍]이 되어 쿄우[]로 돌아와서도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 晴元] 미요시 쵸우케이[三好 長慶]의 다툼에 휘말려, 부평초[浮萍草]처럼 양 세력 사이를 떠도는 존재밖에 되지 않았기에 그 이후에도 몇 번이나 오우미로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되었. 그러나 결국 미요시 쵸우케이의 실력에 굴복하여 미요시 체제에 옹립되는 형태가 되었다. 이때가 1558 11.

 쿄우()로 돌아온 요시테루는 이것이 정말로 기뻤던 듯, 어소[御所][각주:2]의 마당에 서서는 밤하늘을 향해서 환호성을 올렸다고 한다.


 이 즈음, 그제서야 칸파쿠[白]였던 코노에 타네이에[近衛 稙家]의 딸과 결혼식을 올렸다. 모친인 케이쥬인[寿院]이 오랫동안 권해왔던 이야기였다. 요시테루의 마음에 안정이 생겼다는 것을 말해 준다.[각주:3]


 미요시 쵸우케이가 죽자, 요시테루는 지금이야말로 막부(幕府)의 실권을 회복할 좋은 기회라 생각하여, 붕고[豊後]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이나, 에치고[越後]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등 여러 다이묘우[大名]에게 접근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쇼우군의 의도는 죽은 쵸우케이의 모신(謀臣)이며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아시카가 요시히데[足利 義栄][각주:4]를 새로이 쇼우군으로 세우려고 하는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가 간파하기에 이른다. 히사히데는 같은 쵸우케이의 가신이었던 미요시 삼인중[三好三人衆]과 상담한 후 선수를 쳐 요시테루의 어소(御所)를 습격하기로 한다.

 

 1565 5 19.

 때는 장마의 계절,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그 빗속을 마츠나가, 미요시 군세는 갓과 우비를 입고서, 키요미즈 사[寺]를 참배한다는 명목으로 쿄우[京]로 올라가고 있었다.

 히사히데는 밤이 되기 직전에 일부러 어느 소송(訴訟)에 대한 서장을 어소에 제출했다. 응답에 시간이 걸렸다. 그것이 노림수였다. 그 사이에 히사히데의 무리들은 어둠에 섞여 어소 안으로 잠입하여 마루나 복도 밑에 몸을 숨겼다.

 

 갑자기 함성이 울려 퍼졌다. 궐기의 신호였다. 어소에는 사무를 보는 몇몇 외에 사람이 없었다.

 사태가 명확해지자, 검호 쇼우군답게 각오를 정하여 금생의 이별 주연(酒宴)을 열었다. 호소카와 타카요시[細川 隆是]가 여관(女官)코소데[小袖]를 뒤집어 쓰고 춤을 추었다.

 이때 요시테루는, 그 코소데 위에 사세구(辭世)의 시를 적었다고 한다.

지금 내리는 비는 이슬인가 눈물인가,

내 이름을 알려라 구름 위에까지

五月雨は露かかほととぎす

わが名をあげて雲の上まで

 그때부터 요시테루의 활약은 눈부셔 몇 자루나 되는 칼을 마루에 꼽고서는 날이 무뎌지면 계속해서 바꾸어가며 달려드는 적을 마구 베어 쓰러뜨렸다.

 하지만 결국 다구리에는 장사가 없었다. 한 적병이 문틈에서 창으로 발을 걸어 넘어뜨리자 요시테루는 넘어졌다. 거기에 적병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장지문으로 몸을 누르고는 그 위에서 창으로 내리 찔렀다. 그때 불길이 한꺼번에 번져 요시테루의 목을 베지 못한 채, 건물은 화재로 무너져버렸다고 한다.(에이로쿠의 변[永禄の変])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

1536년생. 첫 이름은 요시후지[義藤]. 12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 義晴]의 아들. 1546년 아시카가 제 13대 쇼우군이 되었다.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 晴元]를 칸레이[管領=쇼우군의 보좌역]로 임명 하였지만, 호소카와 우지츠나[細川 氏綱], 미요시 쵸우케이[三好 長慶] 등이 이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켰고, 미요시 측이 승리를 거둠으로써 바쿠후의 실권은 쵸우케이가 쥐게 된다. 쵸우케이가 죽자 실권을 쥐고 있던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에게서 정권탈환을 기도하지만 히사히데 등에게 습격 받아 살해당했다. 1565년 당시 아직 30살이었다.
  1. 일본에서는 ‘자비에르[ザビエル]’ 로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2. 높은 귀인의 거처 겸 정무소. [본문으로]
  3. 여담으로 요시테루의 모친 ‘케이쥬인’은 장인인 ‘코노에 타네이에’의 여동생이다. 즉 요시테루는 외사촌과 결혼한 것이다. [본문으로]
  4. 아시카가 바쿠후 14대 쇼우군, 요시테루와는 할아버지가 같은 사촌지간. [본문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
1616년 4월 17일 병사(病死) 75세.

1542년 ~ 1616년.
미카와
[三河] 오카자키[岡崎] 성주(城主) 마츠다이라 히로타다[松平 広忠]의 아들. 오케하자마 전투[桶狭間の戦い][각주:1]를 기회로 이마가와 씨[今川氏]에게 독립. 토요토미[豊臣] 정권에서 오대로(五大老) 필두(筆頭)가 된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승리하여 에도 막부[江戸 幕府]를 열었으며, 토요토미 씨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손 안에 넣었다.




취소된 은거소(隱居所)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75세라는 장수(長壽)를 누리며, 생애(生涯)의 꿈이었던 천하 제패를 확립한 후 저 세상으로 여행을 떠났다. 주위 사람들의 눈에는 미련 따윈 없는 대왕생(大往生)으로 보였을 것이다. 단지 직접적인 사인(死因)이 식중독에 의한 쇠약이었던 것이 본인에게는 조금 아쉬웠을 지도 모른다.

 1615년 4월.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大坂 夏の陣)에서 소원이던 토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자, 순푸[駿府]로 되돌아와 본격적인 은거 생활에 들어갈 준비를 시작한다. 어느새 74살이 되어 있었다. 그 당시도 이미 쇼우군[将軍] 자리는 히데타다[秀忠]에게 물려주고 순푸에서 은거를 하고 있었기는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오오고쇼(大御所)로서 쇼우군[将軍]보다 더 강한 권력을 쥐고 정치를 진두지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가장 신경 쓰이던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을 멸망시켜 이제는 더 이상 표면적으로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에 대항하는 다이묘우[大名]도 없게 되자, 평범한 노인의 심정에 가까워졌던 듯 하다. 그래서 순푸 성(城)을 10째 아들인 요리노부[頼宣][각주:2]에게 물려주고 이즈[伊豆] 미시마[三島]의 근교인 이즈미가시라[泉頭]에 은거할 곳(隱居所)을 만들려고 하였다. 그러나 어떤 마음의 변화가 생겼는지 건설은 중단되었고 결국 없었던 일이 되었다.

은거할 수 없던 은거

 다도(茶道)나 매사냥, 바둑 등 취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무엇보다 즐겼던 취미는 역시 천하의 형세를 관망하면서 그때그때 자신의 정치이념에 따라 수정을 한다거나 보강을 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자신이 죽은 뒤에도 히데타다 이하 토쿠가와 가문의 후계자들이 대대로 정권을 유지해 갈 수 있게 해 두지 않으면 아니 되었을 것이다.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大坂 夏の陣]에서 완승한 뒤 다이묘우 통제를 위해서 일국일성령(一国一城令[각주:3]), 텐노우[天皇]나 귀족[公家]을 통제하는 [궁중 및 쿠게 에 대한 법도(禁中並公家諸法度)], 불교계를 장악하기 위한 [오산과 십찰, 제산에 대한 법도(五山十刹諸山法度[각주:4]] 등의 반포되었다. 이런 법들은 쇼우군 히데타다의 이름으로 공포(公布)되기는 하였지만, 이는 이에야스의 지시로 그의 측근들이 만든 것이다.

 이에야스에게 평범한 노인과 같은 은거 같은 것은 가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는 진심으로 속세에서 벗어날 생각 같은 것이 없었을 지도 모르며, 있다고 하여도 예전부터 바래왔던 정치이념의 실현과 토쿠가와 정권의 토대(土臺)를 굳건히 하기 위해선 유유자적한 은거 생활은 즐길 수 없었다. 이즈[伊豆]의 시골에서 은거하려다 관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에야스의 추종자들 중에는 정치나 군사 전문가들 외에도 취미나 교양이 풍부한 문화인들이나 상인들이 있어 그들과의 교류를 차마 끊을 수 없었던 사정도 있었을 것이다. 이즈[伊豆] 은거 대신 측근 중의 하나인 텐카이[天海]에게 권고 받아 염불을 매일 외는 것 만은 실행하였다.

도미 튀김이 목숨을 앗아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추종자들과의 교류가 남은 생명을 줄였다고 말할 수 있다.

 1616년 1월 21일. 그는 순푸[駿府] 근교의 타나카[田中]에 매사냥을 하러 간 날 밤. 격심한 복통을 일으켰다. 식중독이었던 듯하다. 타나카까지 문안 인사를 하러 온 어용상인(御用商人) 챠야 시로우지로우[茶屋 四郎次郎]의 추천으로 도미 튀김을 먹었기 때문이다.

 이 챠야 시로우지로우는 토쿠가와 가문의 어용상인으로써 이에야스와 깊은 친분을 나누었던 시로우지로우(四郎次郎)의 아들 쪽이다[각주:5]. 본명은 마타시로우[又四郎]였지만 부친이 죽은 뒤 이름을 계승하였다.

 그는 요즘 쿄우토[京都] 부근에는 도미를 비자나무의 기름으로 튀긴 후 마늘을 갈아서 곁들여 먹는 것이 유행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에야스는 곧바로 도미를 가져오게 하여 유행하는 것과 같이 튀겨 먹었다. 굉장히 맛있었는지 참도미, 옥돔을 다섯 마리나 먹었다고 한다. 이래서는 건장한 사람이라도 위에 무리가 간다. 하물며 체력이 약한 노인에게는 버틸 수 있는 여지도 없을 것이다.

 그 이후, 25일에 순푸[駿府]로 돌아온 이에야스의 병상(病狀)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도 확실히 나쁜 쪽으로 진행되었다. 에도에 있던 히데타다도 2월 2일에 순푸[駿府]로 달려와 병문안을 하였다.

 이에야스는 손수 약을 만드는 취미가 있어 이 때도 [만병단(万病丹)], [은액환(銀掖丸)]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던 자신이 제조한 약 이외에는 복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용태는 더욱더 악화되어 간 듯하다. 결국 그도 죽을 때가 된 것을 깨달아, 4월이 되자 측근인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나 텐카이[天海], 곤치인 수우덴[金地院 崇伝]들을 불러 유언을 전했다.

 유체를 순푸[駿府] 가까이에 있는 쿠노우산(久能山) 산에 묻어줄 것, 장례식은 에도의 조우죠우 사[増上寺]에서 행할 것, 위패(位牌)는 미카와(三河)의 다이쥬 사[大樹寺][각주:6]()에 둘 것, 일주기(一週忌) 후에는 닛코우[日光]에 작은 암자를 세우면 거기에서 칸토우[関東]의 수호신이 되겠다는 등이었다.

 그리고 4월 17일 오전 10시 즈음. 75세의 나이로 순푸 성[駿府城]에서 파란 많던 생애의 막을 내렸다. 유체는 그날 밤에 이슬비를 맞으며 쿠노우 산(山)으로 보내졌다.

  1. 1560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오와리[尾張]에 침공해 온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를 오케하자마란 곳에서 물리쳐 이긴 전투.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사망. [본문으로]
  2. 후에 쇼우군 가문[将軍家]에 후사가 끊겼을 시 쇼우군을 배출할 수 있는 토쿠가와 어삼가(徳川御三家)의 하나 키슈우 토쿠가와 가문[紀州徳川家]의 시조. [본문으로]
  3. 한 다이묘우[大名]의 영지(領地) 내에는 성을 하나만 세울 수 있게 하는 것. 이에 따라 각 다이묘우는 방어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단 몇몇(ex. 다테 센다이 번[伊達仙台藩] 소속인 카타쿠라 가문[片倉家] 등)의 예외는 있었다. [본문으로]
  4. 오산, 십찰, 제산 등은 각각 다섯 개의 거대 사찰과 10개의 큰 사찰 및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 각 지역의 절 등 사찰의 격식을 말한다. [본문으로]
  5. 2대째인 형이 젊은 나이에 죽어서 가문을 상속한 동생이다. 또한 챠야 가문[茶屋家]의 당주는 ‘시로우지로우[四郎次郎]’란 이름을 계승했다. [본문으로]
  6. 쇼우군[将軍]들의 위패는 대대로 이곳에 두는데, 위패는 관에 들어가기 직전의 키와 같다고 한다. 위패에 따르면 이에야스가 키는 159cm이다. [본문으로]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

1579 8 28일 병사 61

1573 ~ 1597.

무로마치 바쿠후(室町 幕府) 15대 쇼우군().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옹립되어 쇼우군이되었다. 노부나가와 사이가 틀어져 병사를 일으키지만 패하여 무로마치 바쿠후는 기능이 정지. 모우리(毛利)()를 의지하여 쿄우토(京都) 복귀를 노리지만 실패하였다. 후에 출가하여 쇼우산(昌山)이란 이름을 칭했다.









칸파쿠()와 쇼우군()이라는 위치


 [토요토미 칸파쿠(豊臣 )]의 위광을 쿄우토(京都) 구석구석까지 알린 - 쥬라쿠테이(聚落第)로 천황을 초대하여 연 잔치의 열기가 여전히 식지 않은 1588 9 10일.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오오사카(大坂) 저택에 있었다. 하지만 오전 10시가 되기도 전에 실외의 마당까지 내려와 공손히 예를 갖추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고 서국(西)에서 으뜸가는 거대 다이묘우(大大名) 7월 하순에 첫 상경(上京)하여 한달 정도 쿄우()에서의 생활을 즐기다 돌아가는 길에 히데이에에게 초대 받아 같은 저택에 머물고 있던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도 곧바로 문 밖의 다리 위에까지 나가 의관을 가지런히 하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름아닌 오전 10시 즈음에 히데이에의 저택을 방문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칸파쿠] 토요토미노 히데요시를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요시아키라고 하면 종삼위(從三位)에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으로 무문(武門)의 최고 권위(權威)였다. 이 해의 정월 13일에 모우리(毛利)()의 영국(領國)에서 쿄우()로 돌아와선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쇼우산(昌山)]이라는 도호(道號) [도우케이(道慶)]이라는 법명을 쓰는 것과 동시에 산구우(三宮)에 준하는 지위를 얻었다.(쥰산구우(准三宮))=쥬고우(准后)[각주:1].

 그런 요시아키가 히데요시가 방문하는 자리에 예를 갖추고 맞이한 것이다.


 어떠한 심경이었을까?

 요시아키와 히데요시는 1568년에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이 되기 위한 상경전(上京戰) 때 부터의 관계였지만, 그것은 쇼우군과 오다 가문(織田)의 일개 부하 장수로서의 히데요시 - 즉 주군(主君)과 배신(陪臣[각주:2])이라는 주종(主從)의 관계에서, 칸파쿠와 쇼우군이라는 동급으로 변하기는 했어도 주종의 관계가 뒤바뀐 것은 아니었던 만큼 주위의 시선은 아무래도 특이하게 비추어졌을 것이다.


 사실 이 즈음 요시아키(쇼우산)는 오오사카에 저택을 가지고 있는 한편 예전 머물던 야마시로(山城) 마키노시마(槇島)에 따로 저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히데요시의 방문 같은 행사에 행동을 같이 하고 있었다. 쿄우토(京都) 다이고(醍醐)() 산보우(三宝)()의 몬제키(門跡[각주:3])인 기엔(義演)에 따르면, 정월에 요시아키가 출가할 때 히데요시에게서 1만석을 하사 받아 오오사카에 저택을 세웠다고 하는 것을 보면 아마 무문(武門)의 상징적인 존재로써 토요토미 칸파쿠 정권의 권위를 세우는데 공헌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점에서 칸파쿠 히데요시의 방문에 따라 예를 올리는 모습도 그런 역할의 일환으로 자존심 덩어리와 같은 요시아키가 기분 나빠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히데요시와 그의 정권에 권위를 세워주는데 적극적으로 공헌하고 있다는 자부심 쪽이 강했음이 틀림 없다.


너무도서글픈 죽음


 확실히 오오사카에 저택을 가지면서부터 요시아키는 당시 토요토미 정권 최대의 군사, 외교적 안건이었던 대륙 침공 계획 등에 남보다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1591 8월.

 쇼우코쿠()()의 로쿠온(鹿苑)()의 전 원주(院主)인 사이쇼우 죠우타이(西笑 承兌)가 히데요시에게서 [카라이리(唐入[각주:4])]에 따른 수행을 명령 받았다는 이야기를 - 이 다음 달인 9 18 마키노시마(槇島)의 저택을 방문해 온 로쿠온(鹿苑)()의 현() 원주(院主) 유우세츠 즈이호(有節 瑞保)에게 전해들은 요시아키는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鹿苑日錄].

 이 이야기를 들은 요시아키가 갑자기 [속세의 명예심을 드러내 종군(從軍)할 결심](오쿠노 타카히로(野 高廣)가 쓴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을 하기 시작했는지 아니면 이미 예정 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다음해인 1592년 정월 5일에 여러 다이묘우(大名)에게 출진 명령을 내린 히데요시가 3 26일을 기해서 쿄우토(京都)를 출발함에 따라 히데요시 본진의 제 2진으로 요시아키도 종군하게 된 것이다.


 이 달(3) 20일에 입경(入京)한 요시아키는 다음 날 로쿠온(鹿苑)()의 남문(南門) 밖에 깃발을 휘날리며 로쿠온원()에 들어가 이곳을 주둔지로 삼는 한편 출진을 준비하였다.

 26일 출진식에서 요시아키는 금칠을 한 보로(母衣[각주:5])를 등에 멘 차림을 하였고, 금문(禁門)을 통과할 때에는 너무도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고 하니 더욱 눈에 뛰었을 것이다.

 총대장인 히데요시는 제 5진이었다. 환송에 나선 고요우제이(後陽成) 텐노우(天皇)의 좌석 앞에서는 말에서 내려 예()를 올렸다. 셋케([각주:6]), 신노우케(親王家[각주:7]), 몬제키(門跡)들 전부 서서 구경하여 평민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열기를 짐작할 수 있다.


 히데요시가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 ()에 도착한 것은 4 25일로 요시아키는 3500명의 장병을 이끌고 성의 외곽에 포진하였다.

 오오사카로 되돌아 온 것은 히데요시가 오오사카로 되돌아 옴에 따른 1593 8월 하순을 지나서라고 보여지는데, 이 원정의 장식물로써의 역할이 끝났는지 그 후의 모습은 확실치 않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597 8 28일.

 요시아키는 종기를 원인으로 하는 병때문에 20일 가까운 투병 끝에 죽었다. 하지만 그 죽음은 지금까지 쇼우군이라는 자존심으로 일관해 온 생전과는 달리, 히데요시에게 장례를 주관하도록 명령받은 죠우타이(承兌) 쿄우토쇼시다이(京都所司代[각주:8]) 토쿠젠인(德善院 마에다 겐이(前田 玄以))에게 관과 화장(火葬)하는 곳을 만들기 위해서 목수 두 명을 신청하여, 한 명밖에 허가 받지 못할 정도로 서글펐다.

  1. 쥬고우(准后)라는 것은 태황태후(太皇太后),태황후(皇太后),황후(皇后)의 지위에 준하는 위치나 봉록을 받는 것을 이른다. 요시아키의 선조 3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 義満)가 무가(武家)로는 처음 받은 이후 무로마치 쇼우군가(家)는 이 자격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부하의 부하를 이른다. [본문으로]
  3. 황족이나 귀족의 자제가 뒤를 잇는 절 또는 사람을 말함. [본문으로]
  4. 나중에 임진왜란이 된다. [본문으로]
  5. 등에 메는 풍선과 같이 생긴 화살막이. [본문으로]
  6. 칸파쿠를 낼 수 있는 다섯 가문. [본문으로]
  7. 텐노우(天皇)와 핏줄이 이어진 가문. [본문으로]
  8. 쿄우토(京都)의 치안과 행정을 맡은 직책.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