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데이에[秀家]는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제일의 악모가(惡謀家)로 악명 높았던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1581년 나오이에가 죽기직전에 당시 오다 가문[織田家]의 쵸우고쿠[中国] 모우리 공략[毛利攻め]을 담당하고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에게 히데이에(당시는 하치로우[八郎])의 후사를 부탁하여, 이에 응한 히데요시는 나중에 히데이에를 유자(猶子)[각주:1]로 삼게 된다.

 

 히데이에는 히데요시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고, 이름글자도 히데요시의 ‘히데[秀]’를 하사 받아 하치로우[八郎]에서 히데이에[秀家]로 바뀌었으며, 히데요시 덕분에 관위도 계속해서 승진하였다. 1594년 조선침략 중 공적을 세워 24살의 젊은 나이로 곤츄우나곤[権中納言]에 임명 받아, ’

비젠

츄우나곤[備前中納言]’으로 칭해질 정도였다.
 결혼 또한 히데요시의 애정이 듬뿍 담긴 것이었다. 부인은 히데요시가 친자식처럼 기른 양녀 고우히메[豪姫 –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의 딸]였다.
 히데요시의 이러한 히데이에에 대한 애정은 친자식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나도 변하지 않았다. 히데요시의 양자들 중 관백(関白)

히데츠구

[秀次]는 자살을 언도 받았고, 히데아키[秀秋]는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에 양자로 보내졌지만, 이 히데이에만은 유자의 신분을 계속 보장받았던 것이다. 나중에 히데요시가 병상에 누워서 후사를 부탁한 오대로(五大老)[각주:2]의 면면들에 관해 이야기 할 때도,
 “히데이에는 어렸을 적부터 내 손수 키웠던 사람이기에, 히데요리를 지켜는 것에 있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도망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며 깊은 신뢰를 보냈다.
 그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히데이에의 운명도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첫 번째 신호는 집안싸움[御家騒動]이었다.
 히데이에는 무장으로서의 자질은 꽤 있었지만, 영지(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

빗츄우

[備中] 절반)를 다스리는 정치능력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히데요시의 과보호 상태에서 성인이 되었기에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것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히데이에의 가신단 중 본거지에 있는 ‘본거지파[国許派]’와 수도권에 올라와 있던 ‘수도권파[上方派]’의 가로(家老)들 사이에 험악한 파벌대립이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히데이에가 부인인 고우히메 휘하 가신으로

카가

[加賀] 마에다 가문[前田家]에서 파견된 나카무라 지로우베에[中村 治郎兵衛][각주:3]를 중용한 것이 본거지파를 자극했다. 그래도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때는 공공연히 다툼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히데요시가 죽자 결국 본거지파 가로들의 분노가 폭발, 나카무라를 주살해야 한다면 공공연히 병사를 일으켜 수도권으로 올라온 것이다. 필두가로 우키타 사쿄우노스케[宇喜多 左京亮 – 후에 사카자키 데와노카미[坂崎 出羽守]][각주:4], 토가와 히고노카미[戸川 肥後守][각주:5], 하나부사 시마노카미[花房 志摩守][각주:6] 등이었다. 하지만 나카무라를 아낀 히데이에가 나카무라를 카가로 도망치게 하자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사쿄우노스케 들은 이번엔 주군이 적이라며, 오오사카의 우키타 가문 저택 앞에 바리케이트[逆茂木]를 치고 화톳불을 피워 전투준비를 한 것이다. 금방이라도 시가전으로 발전할 듯 하였으나,

토쿠가와 이에야스

[徳川 家康]의 중재로 전투는 회피되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커 우키타 가문의 본거지파는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이에야스를 위해 활약하게 된다. 세키가하라 결전에서 히데이에는 서군의 부사령관 격으로 1만7천의 대군을 거느리고 출진하였다. 결전의 이틀 전,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는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에게 보낸 편지에서 서군 제장들의 동요하는 모습에 한탄하면서도, ‘그 와중에 우키타 히데이에는 목숨을 던질 각오로 있는 것이 든든하다’고 적었는데, 태합(太閤) 히데요시의 은혜를 갚고자 하는 히데이에의 성실함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초반의 활약은 훌륭했다. 아카시 타케노리[明石 全登][각주:7]가 이끈 우키타 군[宇喜多軍]은 용맹으로 이름을 떨치는 동군(東軍)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부대와 치열한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전투에서 서군은 패했다. 히데이에는 전쟁터에서 후퇴, 해로(海路)를 타고 사츠마[薩摩]까지 잠행하는데 성공하지만, 결국 끝까지 숨지 못하고 포로가 되어, 하치죠우지마[八丈島] 섬으로 유배당한다.
 이후 이 섬에서 살길 50년, 1655년 84세에 죽었다고 한다. 그 사이 토요토미 가문[豊臣家]는 멸망하였고, 토쿠가와 쇼우군[徳川将軍]도 4대 이에츠구[家継]의 시대가 되어 있었다.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1572년생. 히데요시[秀吉] 휘하로 시코쿠 정벌[四国征伐]
[각주:8],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각주:9],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10], 조선의 역[朝鮮の役][각주:11]에 종군하였다. 전성기 때는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 빗츄우[備中]의 절반, 하리마[播磨] 일부를 합쳐 총 57만4천석을 영유했다.

 

  1. 양자와 같은 개념이나 양아비의 성(姓)과 재산을 상속받지는 않는다 [본문으로]
  2.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3. 시바 료우타로우[司馬遼太郎] 선생의 토요토미 가문의 사람들[豊臣家の人々] -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4와 5편에 등장하는 인물. [본문으로]
  4. 우키타 아키이에[宇喜多 詮家]. 히데이에와는 사촌지간(각각 아비가 형제) [본문으로]
  5. 토가와 타츠야스[戸川 達安]. [본문으로]
  6. 하나부사 마사나리[花房 正成] [본문으로]
  7. 시바 료우타로우[司馬遼太郎] 선생의 토요토미 가문의 사람들[豊臣家の人々] -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5와 6편에 등장하는 아카시 카몬[明石 掃部]을 말함. [본문으로]
  8. 1585년 행해진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은 히데요시의 동생 히데나가[羽柴秀長]의 시코쿠[四国] 침공. [본문으로]
  9. 히데요시의 전쟁금지령[惣無事令]을 어긴 시마즈 가문[島津家]을 정벌하려 한 전쟁. 1587년 개전. [본문으로]
  10.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11.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합쳐 일본에선 이렇게도 부른다. [본문으로]

 카니 사이조우[可児 才蔵]는 소위 전투의 프로페셔널로 센고쿠[戦国]의 세상을 유랑한 사나이이다. 7번 주군을 바꾸지 않으면 한 사람의 무장이라는 말할 수 없다 – 고 일컬어지는 센고쿠의 풍조가 바로 그의 인생이었다.

 미노[美濃]의 사이토우 타츠오키[斎藤 竜興]를 시작으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오다 노부타카[織田 信孝][각주:1], 하시바 히데츠구[羽柴 秀次][각주:2],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 주군을 바꾸가며 전전하였다. 이런 식이었기에 사이조우의 행동은 언제나 조직에서 벗어난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하시바 히데츠구[羽柴 秀次]를 섬기고 있을 즈음의 일이다.
 1584년
히데요시[秀吉]와 이에야스[家康]간에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가 일어나, 사이조우는 하시바 히데츠구의 선봉을 맡고 있었다.
 이 전투에서 선봉이었던 사이조우는 갑자기 최전선에서 철퇴를 하기 시작하여 히데츠구를 화나게 만들었다. 사이조우는,
 “오늘은 적이 대군이고 더구나 강력하기에 여기서는 일단 물러나야만 합니다. 무리하게 공격했다가는 대패로 이어질 겁니다.”
 하고 히데츠구를 설득하였지만 전투를 모르는 히데츠구는 펄펄 날뛰며 사이조우의 진언을 물리친 후 오로지 군사를 돌진시켰다. 사이조우도 또한 히데츠구의 무식과 무모함에 화가 나,
 “에이 좆병진!”
 라는 말을 내뱉고는 자신의 병사들을 이끌고 재빨리 철퇴했다고 한다.

 사이조우의 말대로 히데츠구는 참담한 패배를 당하여 히데츠구 자신도 겨우 목숨만 부지해서는 전장에서 도망치는 꼴이 되었다. 더구나 도망치던 도중 사이조우를 발견하고는 사이조우의 말을 빌려달라고 부탁하였지만, 사이조우는 단 한마디, “싫습니다.”라고 말하며 말에 채찍질하고는 도망가 버렸다.

 그 후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를 섬기고 있을 때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이 일어나, 사이조우는 ‘조릿대의 사이조우[笹の才蔵"]’라는 이명(異名)을 얻는 기발한 활약을 하게 된다.
 이야기는 여러 버전이 전해지는데 여기서는 그 중 하나를 소개하겠다.

 동서 양군의 결전이 시작되기 전날 미노[美濃] 세키가하라 근방 아카사카[赤坂]에 체진 중일 때의 일이다. 사이조우는 명령이 있을 때까지 돌격하지 말라는 말을 어기고 뛰쳐나가 서군의 용사 유하라 겐고로[湯原 源五郎]를 죽이고 와 후쿠시마 마사노리에게 질책을 받아 근신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그대로 얌전히 있을 사이조우가 아니었다.

 그 뒤 아카사카에 도착한 이에야스가 장수들을 소집하여 군의(軍議)를 연 뒤 후쿠시마 마사노리에게,
 “지금까지 취한 목들을 살펴 봅시다”
 라고 말하였기에 각 부대가 취한 서군 무사들의 목을 검사하게 되었다.
 사이조우가 가져 온 유하라의 목 차례가 되자 이에야스의 옆에 있던 마사노리는,
 “너는 이 단 하나의 목을 취하기 위해서 군령을 어긴 어리석은 놈이다”
 라고 사이조우를 질타하였다. 그러자 사이조우는 다음과 같이 변명을 하였다.
 “사실 근신중인 몸이기에 매일 슬며시 나가서 적과 싸웠고 그럴 때마다 투구를 쓴 목[兜首][각주:3]을 베었습니다. 그러나 근신 중이기에 그 목을 가지고 올 수가 없기에 그런 목들에는 콧구멍이나 귓구멍에 조릿대[笹]를 끼어 넣은 채 버리고 왔습니다. 그런 것들은 아마 젊은 무사들이 주워와 자신의 공적으로 하였을 거라 사료됩니다.”
 사이조우의 이런 말투에 마사노리는 열화와 같이 화를 내었지만, 어쨌든 사이조우의 말대로 조사해 보자 정말 조릿대가 꽂힌 목이 17개나 되었다고 한다. 이것에는 이에야스도 놀라,
 “오늘부터 ‘조릿대의 사이조우[笹の才蔵]’라는 이름을 쓰라”
 며 이명(異名)을 하사하여 이때부터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사이조우의 무예를 알려주는 일화로 장도[長太刀] 기술이 있다.
 젊었을 때부터 장도[長太刀]를 허리에 차고 다니며 즐겨 사용하였지만 늙자 체력적인 부담이 있었던 듯 이 장도[長太刀]를 종자(從者)에게 들게 하고 다녔는데, 어느 무사[각주:4]가 이것을 보고 놀리며,
 “이제는 칼도 들고 다니지 못할 정도로 늙으셨구랴. 그 정도라면 실력도 뻔하겠구먼”
 라고 말하자 사이조우는,
 “이거 참 부끄럽소. 하지만 실력이라면 그쪽이 보는 것만큼 늙진 않았소. 내 함 보여드리지”
 라며 재빨리 장도를 뽑아서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그 무사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사이조우는 젊었을 때부터 아타고 대권현[愛宕大権現][각주:5]을 믿었기에 항상 아타고의 신통력이 영효(靈效)로운 날[縁日]에 자신은 죽을 거라고 말하였는데, 그 말대로 1613년 음력 6월 24일[각주:6]에 몸을 깨끗이 하고, 갑주로 몸을 감싼 후 미첨도[薙刀]를 든 채 의자에 앉은 채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60세라고 한다.

가니 사이조[可児 才蔵]
미노[美濃] 혹은
오와리[尾張] 출신이라고 한다. 호우조우인 인에이[宝蔵院 胤栄]에게 창술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1. 노부나가[信長]의 셋째 아들. [본문으로]
  2. 살생관백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 [본문으로]
  3. 아시가루[足軽]나 무가봉공인(武家奉公人)은 머리 방어구로 주로 삿갓[陣笠]였지만, 무사 계급이 되면 투쿠[兜]를 썼기에 투구를 쓴 목은 더 높은 전공의 대상이 되었다. [본문으로]
  4. 카헤에[嘉兵衛]라는 후쿠시마 일족의 인물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5. 불의 신. [본문으로]
  6. 양력 8월 10일. 여담으로 블로그 주인장의 생일이다. [본문으로]

 야마우치 카즈토요[山内 一豊]라고 하면 부인의 내조를 받은 에피소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카즈토요가 아직 이에몬[猪右衛門]이라는 이름으로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던 하급무사였을 때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아즈치[安土]의 성 아래에 동국(東國)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말(馬)을 팔러 온 사람이 있었다. 오다 가문의 무사들은 누구나가 그 말을 보고 경탄하였지만 그런 만큼 비쌌기에 아무도 사질 못하였다. 카즈토요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기는커녕 자신과 부인 둘의 생활조차 근근한 처지였다.
 카즈토요는 한숨을 쉬면서 집에 돌아와서는,
 “가난하다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로군. 저렇게 멋진 말이 있다면 노부나가님의 열병식 때 멋진 모습을 보여 드릴 수 있을텐데…”
 하고 혼잣말을 하였다.
 이를 곁에서 부인 치요[千代]가 듣고
있었다. 치요는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이내 그 말의 가격이 황금 10냥[각주:1]라는 것을 카즈토요에게 듣고서는,
 “그렇다면 이 돈으로 그 말을 사십시오”
 라고 말하며 화장대 밑에서 황금 10냥를 꺼내 카즈토요에게 주었다.
 카즈토요는 놀랐다. 지금껏 빈곤했는데 이런 큰 돈이 어디서 생긴 것이냐고 묻자 치요는,
 “이 돈은 제가 시집올 때 아버님에게 ‘평소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 너의 남편에게 아주 큰일이 생겼을 때만 사용하거라’하면서 주신 돈입니다. 열병식이라면 주군 노부나가님을 시작으로 많은 분들의 눈에 띌 좋은 기회겠지요. 어서 그 명마를 사시옵소서”
 라고 말하였다. 카즈토요는 매우 기뻐하며 곧바로 그 말을 사러 갔다.
 
얼마 후 쿄우토[京都]에서 열병식이 성대히 치러졌다. 그리고 카즈토요의 말은 당연히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노부나가도 경탄을 하여[각주:2], 이를 계기로 카즈토요는 출세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고 한다.[각주:3]

 이 에피소드는 에도시대[江戸時代] 중기에 기술된 몇몇 사료에 실려 있기에 시대성에서 본다면 ‘좋은 부인의 모범’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의 여성을 이러한 유교론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치요는 센고쿠의 여성이 보여주는 억척스러움과 강인한 정신을 겸비한 인물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덧붙여 치요의 내조에 대해서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한다.
 카즈토요가 결혼하였을 때 카즈토요는
오우미[近江] 카라쿠니[唐国]에 400석[각주:4]영지를 얻었지만 빈곤하여 집에 도마조차 없어 치요는 되를 뒤집어 대신 사용하였다.[각주:5]
 또한 당시 카즈토요가
히데요시[秀吉]에게 배속되어 히데요시에게 축성의 감독을 명령 받았지만, 가난하여 인부들의 야식도 대접하지 못하자 치요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팔아 쌀을 사 와서 카즈토요의 면목을 세웠다고 한다.

 카즈토요는 히데요시의 휘하로 각지를 전전하였지만 특별한 전공을 세우지는 못했다. 그러나 용맹심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1573년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 토벌전 때 패주하는 아사쿠라의 군세를 추격하여 오다 군[織田軍]이 에치젠과 오우미[近江]의 국경에 있는 토네자카[刀根坂]에 이르렀다. 이때 아사쿠라 군의 후군[殿]에 미타자키 칸에몬[三段崎 勘右衛門]이라는 활을 잘 쏘는 무장이 있어, 오다 군은 그 활 때문에 쉽사리 진격을 못하고 있었다. 거기에 카즈토요가 창을 꼬나쥐고 단숨에 돌격하였다.
 진에몬은 자랑하는 활을 쏘았다. 화살은 정확히 카즈토요의 볼을 꿰뚫어 어금니까지 파고들었다. 그러나 카즈토요는 그대로 진에몬에게 달려들어 뒤엉켰고 아군의 도움으로 진에몬을 죽였다.

 어쨌든 카즈토요는 히데요시 아래서 순조롭게 출세하여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때의 공으로 카케가와 성[掛川城] 5만석의 성주로 봉해졌다. 카즈토요가 카케가와에 봉해진 것은 칸토우[関東]에 봉해진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감시하며 만일의 경우가 있을 때는 이에야스를 방비하려는 히데요시의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카즈토요는 자신이 배속되어 있던 칸파쿠[関白] 히데츠구[秀次]가 난행을 이유로 할복을 명령 받은 다음부터는, 오히려 이에야스의 수완에 장래를 맡기려는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다. 즉 카즈토요는 히데츠구 사건의 전말을 보고 히데요시 정권의 종말을 느끼게 된 것이다.

 1600년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토벌을 위한 이에야스의 군세 속에 카즈토요의 모습이 있었다.
 7월 24일
시모츠케[下野] 오야마[小山]에 이르렀을 때, 카즈토요에게 오오사카[大坂]에 있는 치요에게서 편지가 도착했다. 거기에는 오오사카 측의 봉행[奉行]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와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의 이름으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거병과 자기들 편에 참가를 요청하는 편지 한 통, 거기에 카즈토요에게 직접 보낸 편지에는 ‘이에야스에게 충성을 다해 주십시오, 제 몸은 걱정하지 마십시오’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카즈토요는 이 두 통의 들어간 상자의 봉인을 뜯지 않은 채 이에야스에게 제출하였다.
 사실 카즈토요는 이것과는 따로 또 한 통의 밀서를 치요에게서 받았던 것이다. 그것은 전령인 타나카 마고로쿠[田中 孫六]의 삿갓에 숨겨져 있던 것으로 치요의 의견이 담겨 있었다. 카즈토요는 다 읽은 뒤 곧바로 불살랐지만, 추측하건대 편지가 담긴 상자의 봉인을 풀지 말고 그대로 이에야스에게 제출을 권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곧바로 ‘오야마의 군의[小山の軍議]’가 열려, 이미 넘어가버린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한 마디[각주:6]로 ‘미츠나리 타도’가 결정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카즈토요는 중대한 발언을 하였다.
 “상경하는 군세를 위해서 도중에 있는 제 카케가와 성을 군량과 함께 전부 바치겠습니다. 거기에 인질도 바쳐 저에게 두 마음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하겠습니다”
 라는 것이었다.[각주:7] 
 토우카이도우[東海道]에 성을 가지고 있던 무장들도 전부 이에 따랐다고 한다.

 이로 인해 카즈토요의 공은 단번에 여러 무장들 중 눈에 띄게 되었다. 세키가하라 결전 때 카즈토요는 그다지 전공이 없었음[각주:8] 에도 이에야스는,
 “카즈토요가 오야마에서 한 말이 세키가하라 승리의 초석이 되었다”
 며, 영지배분 때 일약 토사[土佐] 전부인 24만석[각주:9][각주:10]을 주었던 것이다.

야마우치 가즈토요[山内一豊]
1545년 오와리[尾張] 출생. 1560년 미노[美濃] 마키무라 성[牧村城]의 성주 마키무라 마사토모[牧村 政倫], 이어서 오우미[近江] 세타 성[勢多城]의 성주인 야마오카 카게타카[山岡 景隆]를 섬겼다고 한다. 그 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히데요시[秀吉]에게 배속. 1584년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 종군하여 오우미 나가하마[長浜] 5000석에 봉해지고 1년 후 2만석이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카케가와[掛川] 5만석에서 토사[土佐] 24만석이 주어졌다. 1605년 61세로 죽었다.

  1. 당시 보통 말은 1냥, 좋은 말은 5냥 정도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2. 노부나가가 경탄한 것은 말 때문이 아니다. 노부나가는 카즈토요가 치요가 건네 준 돈으로 말을 산 것을 듣고 말하길 “동국 제일(東国第一)이라는 말을 상인이, 천하에 오다 가문만이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이리도 먼 내 영지까지 끌고 와서 팔려 했는데도 아무도 사지 않았다면 안타까운 일이며 이는 노부나가의 부끄러움이기도 하다. 그러던 때 오랫동안 낭인이었다는 카즈토요가 가난했음에도 말을 샀다. 무사의 마음가짐은 이래야 함이다.”고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수상한 점이 많다. 당시 열병식이 열린 시기는 서력 1581년. 당시 카즈토요는 기록에 따라 다르다고는 하나 츄우고쿠[中国] 등에서의 활약으로 최대 2700석의 신분이었다. 당시 황금 10냥으로 대략 쌀을 140석 정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치요하고 카즈토요가 과소비하지 않는 한 살 수 있었단 이야기. 무엇보다 1581년 열병식 때 히데요시와 히데요시 휘하의 무장들 즉 카즈토요는 츄우고쿠[中国] 공략에 바빠 참가를 아예 못하였고, 노부나가 역시 참가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본문으로]
  4. 1573년 아사쿠라 침공전[朝倉攻め] 때 에치젠[越前]의 호걸 미타자키 칸에몬[三段崎 勘右衛門]을 부상 당하면서도 쓰러뜨린 공적으로. [본문으로]
  5. 링크는 당시의 것이 아니다. 링크의 것은 1806년 후지나미 신사[藤並神社]에 봉납된 모조품.실물은 2차대전 때의 공습에 불에 타 없어졌다고 한다. 크기는 종횡17cm * 17cm에 높이 8cm라고 한다. [본문으로]
  6. 대충 '나이 어린 히데요리가 이에야스 토벌을 명령 할리 없다. 이는 미츠나리가 사사로이 거병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7.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의 번안보[藩翰譜]에 따르면, 이에야스에게 성과 쌀을 바치는 것은 원래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의 아들이며 당시 하마마츠 성[浜松城]의 성주였던 호리오 타다우지[堀尾 忠氏]가 친했던 카즈토요에게 이야기했던 것을 카즈토요가 타다우지가 말하기 전에 말한 것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아이디어 도용이라 할 수 있다. 여담으로 도용 당한 타다우지는 카즈토요에게 “평소 성실한 당신과는 어울리지 않는군요”라면서 웃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8. 당시 카즈토요의 부대는 난구우 산[南宮山]에 진을 친 모리 가문[毛利家]에 대한 대비책으로 전선 후방에 놓여 있었다. 결국 모우리 가문은 움직이지 않았고 그랬기에 카즈토요의 부대도 피 흘리지 않았다. [본문으로]
  9. 실제로는 9만 8000석. 나중엔 1605년 카즈토요가 제출한 영지 목록에 20만 2600석으로 이후 이것이 막부 공인이 됨. [본문으로]
  10. 24만석이 나온 숫자는, ‘쵸우소카베 영지조사장부[長宗我部地検帳]’에 토사[土佐]의 농작면적이 2만 4000정(町)으로 나와있는데 단순히 1반(反=1/10정(町))을 1석(石)으로 하여 24만석이 속설로 된 것으로, 1705년 번(藩)이나 다이묘우[大名], 하타모토[旗本] 등을 다룬 백과사전격인 '무감(武鑑)'부터 이렇게 나왔다고 한다. [본문으로]

 닛코우[日光]에 가면 토우쇼우 궁[東照宮][각주:1]에 있는 돌로 만들어진 오오토리이[大鳥居]가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이는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가 저 먼 큐우슈우[九州]에서 거대한 바위를 옮겨와 건조한 것이다.
 
당시로써는 굉장히 힘들었을 듯한 이런 공정을 나가마사는 어떻게 해낼 수 있었을까? 전하는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에도[江戸]에서 닛코우로 강을 거슬러 올라갈 때, 돌기둥 하나를 배 한 척에 싣고, 그 배의 양쪽에 굵은 밧줄을 연결한 배 두 척이 끌게 하였다. 육로로 옮겨지자 슈라구루마[修羅車]라 불리는 거대한 바위나 큰 목재를 옮기는 수레에 싣고 수 마리의 소로 끌게 하였다. 닛코우로 가는 길은 흑토(黑土)라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두꺼운 널빤지를 200여 미터정도 빈틈없이 깔아가며 옮겼다.
 
오오토리이를 조립하는데도 고생하였다. 기둥을 양쪽에 세운 후 상부에 돌을 얹어야 했는데, 나가마사는 근처에 사는 백성들에게서 쌀, 보리, 메밀, 콩을 채운 가마니를 사 모은 뒤 이 가마니를 쌓아 발판으로 삼고 도르래를 장치하여 돌을 끌어 올렸다. 이것만으로도 천 명을 필요로 하는 대공사였다고 한다. 나가마사는 호쾌한 기술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나가마사는 덩치가 컸기에 전쟁터의 모습은 괴물을 연상시켰다고 한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가신(家臣) 시마 사콘[島 左近]은 '일본에서 가장 용맹한 무사'라고 경외 받았는데, 어느 날 갑주를 입고 살기를 풍기는 사콘을 보고 사콘의 부인조차 공포에 떨었다. 그러자 사콘은 "참 겁도 많으시군. 쿠로다 카이노카미[黒田 甲斐守=나가마사]가 갑주 입은 것을 보면 아예 기절하시겠구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전쟁터에서의 활약도 매우 열정적이었다.
 
용맹하기로 유명한 고토우 마타베에[後藤 又兵衛]는 나가마사의 부친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 때부터 쿠로다 가문의 가신이었는데, 나가마사는 전투에서 언제나 이 마타베에와 치열한 공적다툼을 벌였다. 가신들이 목숨을 아까지 않는 이런 무모한 모습에 간언하자,
"아버지(죠스이)가 안 계시다면 아들 타다유키[忠之]에게 선봉을 맡기고 나는 후방에서 지휘를 하겠지만, 아직 아버지는 건재하시다. 만약 내가 전사하더라도 우리 집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아"
 라고 말했다 한다.

 부친 죠스이의 교육 방침으로 나가마사와 마타베에는 형제처럼 자랐지만 그것이 역기능으로 작욕하여, 둘은 어렸을 때부터 끝없이 싸웠다.[각주:2] 결정적으로 사이가 틀어진 것은 임진왜란 때였다. 마타베에는 나가마사가 강 한가운데서 조선 장수[각주:3]와 필사적으로 격투하고 있는 것을 방관만하며 도우려하지 않았던 것이다[각주:4].
  나가마사에게는 마타베에가 하는 짓 하나하나가 맘에 들지 않았다.
  전의관(全義館)에 포진하고 있을 때 호랑이가 마굿간에 침입하여 말을 잡아먹은 사건이 일어났다. 가신 칸 마사토시[菅 政利][각주:5] [각주:6]가 퇴치하고자 달려들었지만 호랑이는 더욱 날뛰었다. 마사토시가 위험에 처하자 마타베에가 달려들어 호랑이의 미간에 두 번 칼질을 퍼부어 겨우 잡았다고 한다. 나가마사는 마타베에의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았다. "한 부대의 대장이라는 자가 축생과 싸우다니 이 무슨 짓이더냐?"하고 크게 꾸짖었다고 한다.[각주:7]

 1606년 결국 나가마사와 마타베에는 헤어진다. 나가마사가 노[能]를 관람하는 자리에서 마타베에의 아들 모토노리[基則]에게 작은 북[小鼓]을 치게 만든 것에 분노[각주:8]하여 마타베에는 1만6천석의 가록(家祿)을 버리고 쿠로다 가문을 떠났다.[각주:9]

 나가마사는 무용일변도인 외견과는 달리 굉장히 뛰어난 정략가(政略家)였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죽은 뒤의 혼돈스런 정치정세 속에서 토쿠가와 정권수립을 위해 암약한 것이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아이즈[会津]의 우에스기 토벌군을 일으켜 시모츠케[下野]의 오야마[小山]까지 갔을 때 이시다 미츠나리의 거병 소식이 전해져 왔다. 여기서 토쿠가와 가문의 운명을 나누는 사상 유명한 오야마의 군의[小山の軍議]가 열리게 되었다.

 이에야스를 따라온 다이묘우[大名] 대부분이 토요토미 은고[豊臣恩顧]의 다이묘우였다. 거기에 미츠나리는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명령에 따라 토쿠가와 타도의 병사를 일으켰다고 하였다. 토요토미 계열의 다이묘우의 향배가 이에야스의 운명을 쥐고 있었다. 이때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존재가 급격히 클로즈업 된다. 히데요시가 손수 키운 맹장(猛將)이며 히데요리에 대한 충성심은 누구보다도 강했다. 그런 사내가 토쿠가와 편에 선다고 표명한다면 다른 장수들도 전부 이에 따를 것임에 틀림없었다. 나가마사는 이런 흐름을 민감히 캐치하여 이에야스에게 부탁받기 전에 마사노리의 진소(鎭所)를 방문하였다. 나가마사는 다음과 같이 마사노리를 설득했다고 한다.
  "미츠나리놈은 토요토미 가문을 위해서라고 떠벌리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천하를 쥘 심산이다. 생각해보게나. 어리신 히데요리님에게 거병의 의지같은 것이 있을 턱이 없지 않은가…"
  마사노리는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와 함께 무공파 다이묘우[武功派大名]의 대표격인 인물로, 문치파인 미츠나리에게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나가마사는 마사노리의 그런 증오심을 자극한 것이다. 마사노리는 나가마사의 교묘한 설득에 넘어가 단번에 미츠나리에 대한 적개심을 일으켜 미츠나리와 싸우는 것을 맹세한 것이다.

 다음 날 열린 오야마 군의는 마사노리가 발언한 말에 따라 장수들은 전부 토쿠가와 측에 서게 된 것이다. 이에야스는 나가마사의 행동이 굉장히 기뻤는지 애용하던 투구와 말을 한 마리 주었다. 나중에 나가마사에게 치쿠젠[筑前] 52만 3천석이라는 거대한 영지를 준 것도 이 오야마 군의에서의 공적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각주:10]

 정계의 막후 모사라 할 수 있는 정치력을 가진 나가마사였지만 그의 부친 죠스이의 기량에는 결국 이르지 못했다. 나가마사는 항상, "나는 14살 때부터 여러 번 공적을 세웠지만 사람들은 조금도 칭찬해 주지 않았다.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의 아들]는 천하의 누구나가 그의 무용을 칭송한다. 이는 요시나가의 부친 나가마사에게 특별한 무공(武功)이 없었기 때문에 요시나가의 이름이 빛나는 것이다" 라고 하며 은근히 너무나 위대했던 아비를 갖았다는 것에 한탄하였다고 한다. [각주:11]

 그렇다고 하여도 부친 죠스이의 영향은 커 영지경영에 대한 것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부친의 방식을 지켰으며, 임종할 때에도 아들 타다유키에게 오로지 죠스이의 노선을 지키도록 유언했다고 한다.

구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
1568년생. 요시타카[孝高=죠스이[如水]]의 아들. 1589년 가문을 이어 부젠[豊前]의 6개 군(郡)과 카와치[河内] 탄보쿠 군[丹北郡][각주:12]을 영유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에도 출진하여 김해성(金海城) 공략. 1597년 정유재란에서는 직산(稷山)에서 1만의 명나라 군을 격파[각주:13].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부젠 18만석에서 치쿠젠[筑前] 52만석[각주:14]이 된다. 1623년 8월 4일 죽었다. 56세.

  1.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신으로 모시고 있는 신사(神社). [본문으로]
  2. 여담으로 쿠로다 죠스이가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를 설득하러 갔다가 잡혀 유폐되었을 때, 마타베에의 백부 2명이 쿠로다 가문을 떠나는데, 마타베에도 함께 쿠로다 가문을 떠나 센고쿠 히데히사[仙石 秀久]를 섬긴다. 그러나 나가마사가 마타베에의 기량을 아까워해 다시 불러들였다. 오히려 죠스이는 배신자의 핏줄이기에 가까이 쓰지 말라고 하여, 나가마사는 쿠리야마 시로우에몬[栗山 四郎衛門]의 요리키[与力]로 삼아 100석만 주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이응리(李應(応)理)라고 하는데 누군지 모르겠음. [본문으로]
  4. 당신의 주군이니 구하라고 하는 코니시[小西] 부대 사람의 말에 "내 주군이라면 저 정도로 죽지는 않을 것이오" 라고 고토우 마타베에는 말했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나가마사는 간신히 이기고 나왔는데, 마타베에는 태연히 부채질하면서 구경하고 있었기에 벙쪄했다 한다. [본문으로]
  5. 菅은 '스게'라고도 읽는다. [본문으로]
  6. 사족으로 이 칸 마사토시는 세키가하라에서 시마 사콘[島 左近]을 부상(혹은 사망)당하게 하는 철포대의 지휘관이었다. [본문으로]
  7. 물론 칸 마사토시도 함께 혼났다. [본문으로]
  8. 모토노리는 원래 작은 북을 잘 쳐 나가마사가 시킨 것이기는 했지만, 무사인 자신이 연극배우[能楽師]의 흥을 위해서 치는 것에 굴욕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아비인 마타베에에게 일러 일이 발생. [본문으로]
  9. 마타베에의 영지는 오오쿠마 성[大隈城]였는데, 이는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興元]의 영지와 인접한 곳이었다. 쿠로다 가문과 호소카와 가문은 사이가 안 좋았는데, 이는 호소카와 가문이 부젠[豊前]에 오기 전 영주인 쿠로다 가문이 치쿠젠으로 이동하면서 연공(年貢)을 싹슬이 가져가는 바람에 호소카와는 초기 영지경영에 어려움을 겪었고 그만큼 쿠로다 나가마사를 미워했다. 나가마사 역시 자꾸 항의하는 호소카와 가문에 화가 나 가신들에게 호소카와 가문과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하였다. 호소카와를 감시하고 압박을 주라고 배치한 마타베에가 오히려 호소카와와 친하게 지내자 나가마사가 자주 화를 내었기에 이런 불화가 쿠로다 나가마사와 코토우 마테베에 양측에 쌓인 면도 있다. [본문으로]
  10. 거기에 세키가하라 때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가 배신하도록 암약한 것도 나가마사였다고 한다. 전투가 행해질 때 히데아키가 배신을 하지 않자 초조해진 이에야스는 나가마사에게 사자를 보내 히데아키가 배신을 하는 것이 확실한지 다그칠 정도였다. 즉 히데아키는 나가마사가 담당했다. 여담으로 다그치는 이에야스의 사자에게 나가마사는, “히데아키가 배신할지 어떨지 내가 지금 그걸 어케 알어!! 싸우기 바쁜데 짜증나게 할래?”…라고 했다고 한다. 보고를 들은 이에야스는 짜증이 확 나 왼손 엄지손가락 손톱 물어뜯어 피 철철이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1. 그러나 효심은 깊어, 시즈가타케[賤ヶ岳]의 전초전인 사쿠마 모리마사[佐久間 盛政]의 강공 때 사쿠마 군세의 공세에 놀란 죠스이가 죽음을 각오하며 부하 쿠리야마 시로베에[栗山 四郎兵衛]에게 아들을 데리고 도망가라고 하여 쿠리야마는 나가마사에게 아무 것도 알리지 않은채 나가마사와 함께 전장을 벗어났다. 나중에 쿠리야마에게 이동지를 묻다가 사정을 알아챈 나가마사는 “아무리 명령이라고 하더라도 아들이 아비를 버리고 도망갈 수 없다”면서 전장으로 되돌아 왔다고 한다. 덧붙여 이 시즈가타케에서 수급을 얻어 450석을 하사 받음. [본문으로]
  12. 전부는 아니고 쿠로다 나가마사의 시즈가타케 활약 450석 +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 때 후방을 노리던 네고로[根来], 사이카[雑賀]를 격퇴하여 2000석 + 쿠로다 죠스이 가족 재경료 500석. [본문으로]
  13. 직산 전투를 말하는 것인데, 명나라 기병 4000에 쿠로다 5000의 격돌. 몇 차례 접촉은 있었으나 서로 물러났음. [본문으로]
  14. 치쿠젠 전부, 히젠[肥前] 2군(郡), 치쿠고[筑後] 2군을 포함하여 정확히는 52만2천4백여석. [본문으로]

 센고쿠 시대[戦国時代]는 좋은 주군을 찾아 여러 가문에 발길을 남기는 것이 일상다반사였기에, ‘7번 주군을 바꾸지 않으면 제대로 된 무사라고 할 수 없다’고 일컬어졌을 정도였다. 그런 의미에 전형적인 인물이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였다. 타카토라는 7번 주군을 바꾸었다.

 처음 오우미[近江] 아자이 가문[浅井家]을 섬긴 타카토라는 이때 아직 13살의 소년이었다. 그 당시 일화로 도망자를 처치한 이야기가 있다. 죄를 짓고 도주하다 어느 집에 숨어 들어가 저항하는 죄인을 처치하였는데, 이때 행한 타카토라의 모습에서 그의 인생 전반에 걸친 삶의 방식을 엿볼 수 있다. 부친과 형이 집 안에 들어가 죄인과 싸우자, 죄인은 틈을 엿보다 집 밖으로 도망쳤다. 타카토라는 문 근처 그늘에 숨어있다가 도망에 성공했다고 방심한 죄인을 불현듯이 덮쳐 처치하였다고 한다. 즉 정공법보다도 오히려 물밑 정치교섭에 뛰어난 타카토라의 특색을 엿볼 수 있다

 다음으로 타카토라는 아자이 가문이 아네가와[姉川]에서 오다[織田]-토쿠가와[徳川] 연합군에게 패하여 위세가 낮아지자, 17살에 낭인이 되어 같은 오우미의 아츠지 아와지노카미[阿閉 淡路守]를 섬겼고[각주:1], 그 다음으로 이소노 탄고노카미[磯野 丹後守]를 섬긴다. 둘 다 한 달 어쩌면 수개월 만에 각 가문에 한계를 느껴 오다 노부즈미[織田 信澄]의 가신이 되었지만[각주:2] 노부즈미도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 때 누명을 쓰고 살해당했다. 노부즈미의 부인이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딸이었기에 미츠히데 일당으로 오해 받아 살해당한 것이다[각주:3].

 다음으로 히데요시[秀吉]의 동생 하시바 히데나가[羽柴 秀長]를 섬기면서 2만석까지 출세. 그제서야 안정을 찾나 싶었더니 그 히데나가도 1591년에 죽었고, 다음으로 히데나가의 양자인 히데야스[秀保]를 섬기지만 히데야스 역시 몇 년 뒤 죽자, 아무리 타카토라라도 한때는 세상을 버리고 코우야 산[高野山]에 은거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의 재능을 아까워한 히데요시의 소환에 응하여 하산하여 이요[伊予] 7만석에 봉해졌다. 이렇게 타카토라는 여러 가문을 전전하다 히데요시 휘하에 속하게 된 것인데, 그러는 동안 눈에 뛸만한 무용담이 거의 없다. 타카토라는 창놀림보다는 원활한 인간관계를 추구함으로써 세상을 헤쳐나간 것이다.

 훗날의 일로 그가 부하를 얼마나 능숙히 썼는가에 대해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가신 중에 유녀(遊女)에 빠진 자와 도박에 미친 자가 있어 둘 다 재산을 모두 잃고 말았다. 타카토라는 유녀에 빠진 자를 좆병진이라며 영구추방하였지만, 도박에 미친 자에게는 100일간 근신과 급료 감봉에 그쳤다. 이 둘에 대한 처분에 차이가 생긴 것은 이러했다. 유녀에 빠져 무기까지 파는 놈은 앞길이 암담하지만, 도박에 미친 자는 남에게 이기려는 호승심이 있기에 무사로서는 아직 쓸만한 곳이 있다는 것이었다.[각주:4]

 또한 사표를 내고 떠나는 가신에게 타카토라는 그 무사를 초대하여 직접 차를 대접하고 차고 있던 칼을 주면서,
“새로 취직하는 곳에서 맘에 안 드는 일이 생기면 언제든 다시 돌아오게나”
라는 말을 항상 하였기에 일단 토우도우 가문[藤堂家]을 떠났더라도 다시 돌아와 예전 봉록을 그대로 받은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타카토라는 이름있는 무사를 자신의 가신으로 삼는 것에도 노력하였다. 센고쿠 시대에 탑 클래스 급의 무용을 자랑하던 와타나케 칸베에[渡辺 勘兵衛]를 2만석으로 데리고 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전쟁터에서는 무명잡배 100명보다도 명성이 자자한 와타나베 칸베에 쪽이 적에게 더 공포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이 타카토라의 생각이었다.

 타카토라의 이름이 갑자기 역사의 무대에 오르게 된 것은 히데요시가 죽은 다음부터이다. 혼돈스러운 정세 속에서 타카토라는 그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주인 고르기를 행했다. 타카토라는 히데요시 사후의 천하인(天下人)을 이에야스[家康]로 보고 자주 친해지려고 접근하였으며[각주:5], 그러기 위해 이에야스와 대립하고 있던 사람들의 정보를 크건 작건 세세히 이에야스에게 보고하였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무리가 꾸미던 이에야스 타도 계획을 밀고 한 것도 타카토라였다. 선택 받은 이에야스는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가 죽어 히데요리[秀頼] 후견자로 사실상 No.1 실력자가 되자, 모반을 꾸몄다는 이유를 대며 마에다 토시나가[前田 利長=토시이에의 후계자]와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에게 인질을 바치게 만들었다.
 
이에야스가 이렇게 인질을 얻도록 만든 것이 타카토라였다. 자신도 나서서 동생 쿠라노스케 마사타카[蔵之助 正高]를 에도[江戸]에 보냈다. 곧이어 세키가하라[関ヶ原] 결전이 다가오자 타카토라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있어 중대한 역할을 맡게 된다.

 1600년.
 이시다 미츠나리가 거병했다는 소식에 이에야스는 아이즈[会津]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정벌 중이던 군사를 회군하였지만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등의 부대가 오와리[尾張] 키요스 성[清洲城]까지 진출하였는데도, 이에야스 자신은 에도 성[江戸城]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선견 부대의 장수들의 동향이 신경 쓰였던 것이다. 그들은 전부 토요토미 은고[豊臣恩顧] 다이묘우[大名]들이기에, 갑자기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에게 돌아설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타카토라의 무대 뒤 활약은 이때도 펼쳐지게 된다. 이에야스가 에도 성에서 대기하도록 진언한 것도 타카토라였으며, 키요스 성에 있으면서 다른 장수들의 동향을 시시각각 에도에 보고한 것도 타카토라였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러한 타카토라의 정보에 따라 안심하고 에도를 출발하였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9월 15일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동서(東西) 결전의 막이 올랐다. 여기서도 타카토라의 수면 하 공작이 빛을 발한다. 타카토라의 부대는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지휘아래서 서군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의 부대와 싸웠지만 차츰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의 배반이 형세를 역전시켰다. 마츠오 산[松尾山]에 진을 치고 있던 코바야카와 부대가 오오타니 부대의 옆구리를 찌른 것이다. 그리고 오오타니 부대에 속해 코바야카와를 대비하기 위해 배치했던 쿠츠키[朽木], 와키자카[脇坂], 오가와[小川], 아카자[赤座] 등의 약소 다이묘우마저 코바야카와에 동조하여 오오타니를 공격한 것이다. 이 약소 4명의 다이묘우가 배신하도록 사전에 공작한 것이 타카토라였던 것이다.
 이런 일련의 활약으로 인해 타카토라는 8만석에서 단번에 이요[伊予]의 반인 20만석으로 가증되었다.

 이에야스에 대한 타카토라의 헌신은 계속 이어졌다. 앞서 언급된 동생 마사타카[正高]에 이어, 1606년에는 다른 다이묘우들보다 앞서 처자식을 에도에 보냈을 뿐만 아니라, 휘하 가로[家老] 4명의 자제들까지도 에도에서 살게 만들었다.

 타카토라의 헌신적인 자세는 이에야스가 죽어서도 이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막부(幕府)에 대한 충성으로 닛코우[日光]에 이야야스 묘소 선정, 건물 설립 등에 조력하였으며, 에도 우에노[上野]에는 칸에이 사[寛永寺]가 세워졌을 때에는 지금도 남아있는 우에노 토우쇼우 궁[上野東照宮][각주:6]을  만들어 바쳤다.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1556년 오우미[近江] 아자이 군[浅井郡] 토우도우 향[藤堂郷]에서 태어났다[각주:7]. 아자이 가문[浅井家] 멸망 후 여러 가문을 전전하다가 1594년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섬겨 이요[伊予] 우와지마[宇和島]에 7만석. 1597년 제2차 조선침공[각주:8]에서는 수군(水軍)으로 출동.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이요[伊予]의 절반을 하사 받았으며, 오오사카 전쟁[大坂の役]에서 세운 공적으로 이가[伊賀], 이세[伊勢] 거기에 더해 시모우사[下総] 카토리 군[香取郡]을 합쳐 총 32만3900여석의 영지를 거느린다. 1616년 4월 17일 죽었다. 75세.

  1. 아자이 가문[浅井家]과 아츠지를 떠난 것은, 두번 다 성질을 참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다투다 칼을 뽑아 부상을 입혔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2. 오다 노부즈미[織田 信澄]는 이소노 탄고노카미의 양자였기에, 이소노가 노부나가에게 쫓겨난 뒤 그대로 노부즈미를 섬기게 아닌가 싶다. [본문으로]
  3. 노부즈미가 살해당하기 이전에 노부즈미와 결별하였다. 결별이유는 뭔가 맘에 안 들었기 때문이라고만 한다. [본문으로]
  4. 사족으로 만약 저였다면 둘 다 쫓아 냈을 것입니다. 도박이건 유녀건 앞뒤 가리지 못 하는 놈들이기에 앞길이 암담하긴 마찬가지. 오히려 도박이 더 맘에 안 듭니다. 주위에 도박에 미친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피하시길. [본문으로]
  5. 그 이전 히데요시의 정무소였던 쥬라쿠테이[聚楽第]의 이에야스 거처를 건축한 것이 타카토라로, 이때부터 친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6. 에도에 있던 토우도우 저택[藤堂藩邸]에 만들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7. 이누가미 군[犬上郡] 혹은 코우라 군[甲良郡] 출신이 더 유력하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정유재란.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