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0년 ~ 1602년.
이마가와 씨[今川氏]에게 쫓겨나 방랑의 몸이 되나 후에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를 섬기며 '
에도 시대[江戸時代], 토쿠가와 쇼우군 가문[将軍家]의 후다이[譜代] 다이묘우[大名] 필두의 지위를 점하고 있었던 것이
1575년.
15살에 이에야스[家康]을 섬기며 이이노야의 옛 영지를 되찾게 된다. 이후 나오마사는 이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하타모토(旗本 3)의 측근으로 많은 전투에 참가한다.
혼노우 사[本能寺]의 변 직후 이에야스 최대 위기인 이가도피행[伊賀越え 4] 때도 함께 했으며, 그 후 코우슈우[甲州] 공략에도 참가, 5 그 공적으로 타케다 가문[武田家]에서도 용맹함을 자랑하던 츠치야 중[土屋衆], 야마가타 중[山県衆], 오바타 당[小幡党] 등을 부하로 거느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타케다 가문의 적비대[赤備え]를 모방하여, 갑옷부터 깃발[旗], 등에 꽂는 작은 깃발[指物], 갑옷 위에 입는 덧옷[陣羽織]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붉은 색으로 통일했다. 나오마사는 이 적비대를 이끌고 선봉을 다투었고,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 전투에서의 활약으로 인하여, '붉은 귀신[赤鬼]'라는 이명으로 두려움을 얻게되었다. 이후 이에야스가 가는 곳엔 항상 선봉을 맡아 돌진하는 나오마사와 적비대가 있었다.
그 결과 이에야스를 섬긴 지 10년 만에 미카와 후다이[譜代]인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 등과 함께 이에야스의 삼걸(三傑)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1590년 이에야스가 칸토우[関東]로 이봉 되었을 때에는 코우즈케[上野] 미노와[箕輪 - 후에 타카사키(高崎)로 옮김) 12만석을 받았다.
12살 연상인 타다카츠, 야스마사를 뛰어넘어 불과 15년 만에 토쿠가와 가신단 중 최고의 영지를 영유할 수 있었던 것은, 이에야스가 가문이나 문벌에 구애 받지 않고 능력만을 평가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무단 돌진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나오마사는 혼다 타다카츠와 함께 동군(東軍) 선봉의 군감(軍監 6)으로 참가했다. 이 때 40세였다.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 토요토미[豊臣]계 유력 무장을 중심으로 한 동군에서, 히데타다[秀忠]가 거느린 토쿠가와 본대(本隊)가 도착하지 않은 당시, 토쿠가와 가문의 주력은 사실상 나오마사와 그의 사위이자 이에야스의 넷째 아들인 마츠다이라 타다요시[松平 忠吉] 휘하 약 6천의 병력이었다.
향후의 천하를 판가름하는 결전이라 생각한 나오마사는 토요토미계 다이묘우[大名]에게 선봉의 공을 빼앗꼈다간, 토쿠가와의 천하가 되더라도 후환이 남을 것이라 생각하여 이에야스와 타다카츠에게 설명하고 일부러 무단 돌진을 감행하기로 한다.
15일 이른 아침. 휘하의 적비대[赤備え]에서 추리고 추린 30기(騎)를 이끌고, 이번 전투가 데뷔전인 타다요시와 함께 한 나오마사는 선봉인 후쿠시마의 선두 부대장인 카니 사이조우[可児 才蔵]의 제지를 물리치고 7 빠져나가 맨 앞까지 진출하여 서군(西軍)에게 철포를 쏘았다. 이것으로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 싸움에서 나오마사와 타다요시의 활약이 뛰어났는데 특히 전대미문의 적중돌파(敵中突破)를 시도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를 추격하여, 그의 조카인 토요히사(豊久)를 죽이기 까지 했다. 이 때 시마즈 대(隊)의 결사적인 반격에 타다요시가 부상을 당했고, 나오마사도 투구와 오른손 엄지손가락, 거기에 오른 팔과 타고 있던 말에 총격을 받아 낙마하여 한때는 실신했다고 한다. 본진으로 돌아온 둘을 맞이한 이에야스는 직접 나오마사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며 “오늘 싸움에 있어서 제일 큰 공을 세웠다”며 극찬하였다.
전후 처리로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본거지였던 오우미[近江]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의 공략, 서군의 총대장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항복의 알선, 토사[土佐]의 쵸우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 盛親]에 대한 대응 등 군사적인 면뿐만 아니라 외교, 통치 등의 면에서도 큰 공적을 올렸다.
너무도 이른 죽음
세키가하라 전쟁 후의 논공행상으로, 1601년 2월 이에야스는 나오마사에게 이시다 미츠나리의 성이었던 오우미[近江] 사와야마 성과 새로이 6만석을 더해 합계 18만석을 하사했다. 그리고 서국 다이묘우[大名] 감시와 쿄우토[京都]의 조정 수호라는 특별임무를 부여했다. 10월에 나오마사는 타카사키[高崎]에서 새로 보수한 사와야마 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나오마사는 이시다 미츠나리의 통치를 존중하여 민정의 안정을 꾀하는 한 편,
그러나 같은 해의 겨울부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얻은 오른 손 엄지의 총상이 차츰 악화되어 다음 해인
祈るぞよ 子の子のすへの 末までも まもれあふみの 国津神々
- 전쟁터에서 얻은 상처로 인한 죽음 [본문으로]
- 무구 일체를 전부 붉은 색으로 통일한 부대. [본문으로]
- 직속 부하를 말한다. [본문으로]
- 이에야스가 사카이(堺)에서 본국으로 돌아가는 도중 이가(伊賀)라는 지방에서 죽음을 각오할 정도로 고생했다는 것을 말함 [본문으로]
- 노부나가[信長]가 죽은 1582년 당시 카이[甲斐] 등 옛 타케다 가문의 영지를 막 손에 넣었던 터라, 오다 가문[織田家]의 영주들은 거의 적의 땅이나 다름 없던 옛 타케다의 영지에서 도망쳐 자신들의 본거지로 돌아간 터라 빈집이나 다름 없었다. [본문으로]
- 부대가 싸우는 모습이나 배반하는 지를 감시하는 역할. [본문으로]
- 이 때 나오마사는 처음 전장에 나서는 타다요시에게 전장의 분위기를 익히게 하기 위해서 구경하고 온다고 말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 나오마사의 장남이나 병약했기에 후에 가독과 히코네 번을 배 다른 동생 나오타카[直孝]에게 양보하고 안나카 번[安中藩] 3만석에 봉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병약했다지만 나오카츠는 72살까지 산 반면 나오타카는 69살에 죽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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