죠스이(如水)는 호(號)이며 이름은 요시타카[孝高], 통칭을 칸베에[官兵衛]라고 한다.
 히데요시[秀吉]는 이 칸베에의 지략을 굉장히 두려워했다고 한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이미 천하인이 된 히데요시가 측근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쩌다 보니 히데요시가 죽은 뒤 누가 천하인이 되느냐로 화제가 옮겨졌다. 측근들은 한결같이 '오대로 중 한 사람이 아닐까?'고 하였다. 히데요시는 머리를 저으며 "그렇지가 않네. 저 쿠로다 칸베에 말고는 생각할 수 없지"라고 말했다. 모두 이상히 여겼다. 칸베에는 기껏해야 부젠[豊前] 12만석의 다이묘우[大名]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히데요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노부나가[
信長]가 급사한 이래 자신은 아케치[明智] 정벌[각주:1]을 시작으로 여러 전투를 경험하였다. 전투에 임하여 아무리 고심해도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는 문제가 생겨 이를 칸베에에게 상담하면 그 답은 자신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내린 결론과 똑같았다. 오히려 칸베에 쪽이 훨씬 의표를 찌른 작전을 세웠다. –고.
 또한 히데요시는 "세상에 두려운 자가 둘 있으니 토쿠가와 이에야스[
川 家康]와 쿠로다이다. 토쿠가와는 그래도 온화한 사람이지만 쿠로다는 뭐라 말할 수 없이 알 수 없는 자이다."라고도 말했다 한다.

 칸베에가 센고쿠의 무대 전면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은 히데요시와 만나면서부터이다. 히데요시가 츄우고쿠[中国] 모우리[毛利] 공략을 위해 하리마[播磨]로 병사를 이끌고 왔을 때부터이다. 그때까지 칸베에는 하리마의 시골 다이묘우[大名]에 속한 가로(家老)에 불과하였다. 주군은 고챠쿠 성[御着城]의 성주인 코데라 마사모토[小寺 政職]라 하였다.
 1577년 10월 히데요시가 모우리 정벌의 사령관으로 하리마에 왔을 때 칸베에는 자신의 거성(居城)인 히메지 성[
路城]를 바치고 자신은 히메지 성의 두 번째 성곽(二の丸)으로 옮겨 살았다[각주:2]. 히데요시는 이 해의 7월 칸베에에게 보낸 편지에 '자네는 내 동생 코이치로우[小一=히데나가[秀長]]만큼이나 편한 사람일세'라고 까지 적었다. 칸베에의 기량에 느끼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이 때 이후 칸베에는 타케나카 한베에[竹中 半兵衛]와 함께 히데요시 참모의 한 사람이 되었다.

 칸베에의 노력으로 인해 하리마의 대부분은 오다 측에 붙게 되지만, 1578년 3월 하리마 최대의 호족 미키 성(三木城)의 벳쇼 나가하루[別所 長治]가 모우리 쪽으로 돌아서자 다른 호족들도 이에 동조하였다. 칸베에의 주군인 코데라 씨에게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흘렀다. 거기에 또 생각도 못했던 사태가 일어난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하리마에 구원하러 올 예정이었던 오다 가문의 유력 무장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가 갑자기 반기를 치켜세웠던 것이다. 노부나가조차 벙찌기만 할 뿐인 급변이었다.

 여기서 칸베에는 친구이기도 한 무라시게를 설득하기 위해서 단신으로 무라시게가 있는 이타미 성[伊丹城]에 입성하였다. 하지만 무라시게에게는 오다 쪽으로 돌아갈 생각이 아예 없었다. 사자(使者)인 칸베에도 원래대로라면 살해당할 처지였지만 무라시게와 오랜 기간 친교를 맺어왔고 또한 종교가 같은 천주교였기에 살해당하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참혹한 포로 생활이 시작되었다. 

 습한 시궁창 같은 감옥이었다. 가려움을 일으키는 피부병이 머리 부분을 잠식하였으며[각주:3] 다리의 근육이 떨어지고 피부병 때문에 오른쪽 무릎이 썩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반년도 버티지 못했겠지만 칸베에의 생명력은 여기서 1년을 버틸 정도로 강했다. 낙성으로 인하여 구출되기는 하였지만 이 감옥생활로 인하여 죠스이는 오른쪽 다리의 자유를 잃었다. 또한 이 때 무라시게와 뜻을 같이한 코데라 씨는 히데요시에게 성에서 쫓겨났다. 칸베에가 코데라 성(姓)을 버리고[각주:4] 원래의 쿠로다[田]로 돌아온 것은 이때부터이다.

 1582년 6월 2일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었다. 죠스이는 이때 히데요시를 따라 모우리 가문[毛利家]의 최전선기지인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의 수공(水攻)에 참전하고 있었다. 흉보가 그 진영에 도착했을 때는 아무리 히데요시라도 정신이 나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동요하고 있던 히데요시의 귓가에 "지금이야말로 히데요시님이 천하를 잡을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이옵니다"하고 칸베에는 속삭인 것이다.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한 정세판단이었다. 히데요시는 이 때 이후 칸베에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으며 히데요시 정권의 최대 공로자임에도 불구하고 히데요시가 칸베에에게 하사한 것은 부젠[豊前] 나카츠[中津] 12만석밖에 안 되었다.

 죠스이가 가슴 속에 숨기고 있던 천하에 대한 야망을 잠시나마 비친 것은 후에 천하를 나누는 싸움이라는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 때였다.
 당시 적자(
嫡子)인 나가마사[長政]는 이에야스의 부사령관 격으로 세키가하라에서 싸웠는데, 그 사이 죠스이는 전격적인 움직임으로 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 붕고[豊後] 등 큐우슈우[九州] 북-중부의 서군 세력을 물리치고 그 지역을 손에 넣은 것이다. 휘하의 주력병사들을 나가마사가 세키가하라로 거느리고 갔기에 죠스이에게는 소수의 병사밖에 없었다. 하지만 죠스이는 백성, 낭인을 긁어 모아 용병군단을 조직하였다. 금은을 방 안에 산더미같이 쌓아서 지원자들을 모았다고 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쿠로다 군은 동군 토쿠가와 쪽이라고 깃발을 선명히 하고 있음에도, 죠스이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 이에야스[家康] 양 쪽을 저울에 메달며 수상쩍은 행동을 보였다는 말이 있다. 미츠나리에게서 협력을 요청하는 밀사가 왔을 때, "큐우슈우[九州] 중 7개 쿠니[国]를 준다면 – "하고 서군에 설 듯한 척을 하였다.

 본심은 이러했다. 토쿠가와와 이시다가 싸우고 있는 틈을 타 큐우슈우를 제압하고 양군이 싸우다 지쳤을 때를 봐서 단번에 중앙으로 진출, 천하를 손에 넣으려고 한 가공할 야망이었다. 하지만 세키가하라의 승패는 허무하게 결정이 나 토쿠가와가 이겼다.

 예상이 빗나간 데에 대한 애석함 때문인지 세키가하라 전쟁 후 죠스이는 아들인 나가마사가 토쿠가와 세력의 중심이 되어 뛰어난 활약을 보인 것을 알자 "이 천하의 얼간이 같은 놈"하고 투덜대었다고 한다.

 이 귀모(鬼謀)의 사나이는 죽을 때까지도 연기를 펼쳤다. 임종의 때가 다가오자 이유도 없이 중신들을 욕하며 쪽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도가 지나쳐 나가마사가 한마디 하자 "이는 너를 위해 서란다. 중신들의 마음이 나에게서 떠나 빨리 나가마사의 대가 되었으면 하고 생각하게 만들기 위함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구로다 조스이(田 如水)]
1546년 하리마[播磨] 히메지[
路]에서 태어났다. 처음엔 코데라 마사모토[小寺 政職]를 섬겼지만 히데요시[秀吉]의 츄우고쿠([中国] 공략 때부터 히데요시의 모신(謀臣)이 되었다. 1580년 하리마 내에 1만석이 주어졌고, 1585년에는 야마자키[山崎] 성주가 되었으며, 1588년에는 부젠[豊前] 나카츠(中津) 12만 5천석이 되었다. 경건한 천주교도로 세례명을 '돈 시메온(Don Simeon)'이라고 하였다. 1604년 59세에 죽었다.

  1.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치기 위한 츄우고쿠 대반전[中国大返し]에 이은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를 말한다. [본문으로]
  2. 나머지 일족은 부친(쿠로다 모토타카[黒田 職隆]의 은거성인 코우노야마 성[国府山城]으로 보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이로 인해 瘡頭라는 별명이 생겼다. 우리식 표현으로 하면 '곰보'가 되겠지만, '瘡'라는 글자는 매독의 속칭이기도 하기에 그가 매독에 걸렸다는 말이 생긴 것 같다. [본문으로]
  4. 이때까지만 해도 '코데라 요시타카[小寺 孝高]'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본문으로]

 벳쇼 나가하루(別所 長治)가 지키는 하리마(播磨) 미키 성(三木城)은 ‘미키의 말려 죽이기, 톳토리(鳥取)의 굶겨 죽이기[각주:1]’라 일컬어지며 그 농성전의 참혹함으로 유명하다.

 성주 나가하루의 초상화가 효우고 켄(兵庫県) 미키 시(三木市)의 호우카이 사(法界寺)에 전해내려 오고 있다. 카노우 히데노부(狩野 秀信)가 그린 것이라고 하는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갸름한 그 얼굴은 명문가의 다이묘우(大名)다운 품격이 있다. 무장이라기 보다는 상급귀족(公卿)과 같은 인상이다. 이 얼굴과 마찬가지로 깔끔한 마지막, 좋은 품성이 미키 성의 지옥도(地獄圖) 속에서는 하나의 위로가 되었다.

 나가하루는 미키 성의 상징적인 존재였다. 자신의 의지로 센고쿠 난세를 개척하려는 욕망은 없었다. 나가하루를 대신하여 미키 성을 사실상 움직이고 있던 것이 숙부인 미키 야마시로노카미 요시스케(三木 山城守 賀相)였다. 야마시로노카미는 오다 측 하리마 공략 총사령관인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에게 적대적이었는데 그 이유는 히데요시가 신발 담당에서 출세한 천한 자라고 경멸하였기 때문이다. 이 야마시로노카미의 반감이 벳쇼 가(別所家) 멸망의 원인이 된 것이다.

 1578년 히데요시는 츄우고쿠(中国) 공략의 대군을 일으키는데 앞서 벳쇼 나가하루에게 선봉을 명하였다. 야마시로노카미는 불만이었다. 벳쇼 일족을 최전선으로 몰아세워 자멸시킬 꿍꿍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21살의 나가하루에게 전략전술 같은 것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야마시로노카미가 말하는 데로 따랐다. 야마시로노카미는 군사적 득실보다 명문의 자긍심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출신이 천한 히데요시의 아래로 들어가 그의 지령에 따라 선봉에 서는 것은 벳쇼 가문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반기를 든 미키 성을 히데요시는 2년에 걸쳐 공격하였다. 특기인 식량공격이었다. 미키 성과 아카시(明石)의 우오즈미(魚住)를 잇는 선상에 50~60개의 요새를 쌓아 그 사이에 초소를 두고 해자(垓子), 목책, 바리케이트(逆茂木)를 물샐틈없이 둘러쳐 파리도 빠져 나오지 못할 정도로 한 것이다.

 농성 1년째. 미키 성은 벌써 저장했던 식량이 바닥을 들어내어 이대로 농성이 계속 되면 전원 아사(餓死)할 것이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결전을 벌여 이 상황을 타개하는 것 외에는 없었다. 1579년 2월 결국 2500 여의 성병이 하나가 되어 성밖으로 돌격했다. 결과는 처참한 패배로 끝났다. 굶주림에 쇠약해진 미키 군은 거의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것이었다. 소수의 인원만이 간신히 도망쳐 이후는 성문을 꽉 걸어 잠그고 안에 틀어박혀버렸다.

 이 해의 9월이 되자 모우리 씨(毛利氏)는 배를 준비하여 미키 성 구원의 식량 수송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도 히데요시 군에게 요격당하여 실패로 끝났다. 식량 수송의 희망은 완전히 끊긴 것이다. 성안에는 더 이상 한 톨의 쌀도 없었다. 쥐를 잡아먹고 타던 말을 먹었으며 잡초를 씹기 시작했다. 성안에 틀어박힌 농민 아시가루(足軽)부터 풀썩풀썩 쓰러져갔다. 겨우 살아있는 사람은 해골 같았다. 걷는 것이 겨우 였다. 완전히 전투능력을 상실하였다.

 벳쇼 나가하루는 결국 개성을 결심하였다. 이 종전 처리에 있어서 나가하루의 미련없는 태도가 미키 성과 나가하루의 이름을 후세에 남기게 된다. 히데요시에게 보낸 항복서장에는 나가하루, 동생인 토모유키(友之)와 숙부 야마시로노카미 요시스케 세 명이 배를 가르겠다고 쓰며 ‘그러니 성안의 사졸의 목숨을 구해주신다면 나가하루에게 있어 이번 생의 기쁨이옵니다’고 그 심정을 밝혔다.

 벳쇼 일족 최후의 날이 왔다. 나가하루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목욕을 하고 몸에 향을 배이게 하고는 우선 3살의 어린 자식과 부인을 죽이고 그 후 동생 토모유키와 함께 복도로 나와 좌우로 앉아서는 잇따라 배를 갈라 죽었다고 한다. 이때 나가하루 23세. 토모유키 21살이었다.[각주:2]

[벳쇼 나가하루(別所 長冶)]
벳쇼 씨(別所氏)는 아카마츠 씨(赤松氏)의 일족인 명문으로, 대대로 동 하리마(播磨)의 슈고(守護)였다. 나가하루는 13살에 미키(三木) 성주가 되었다. 1580년 1월 미키 성 함락과 함께 자인(自刃).

  1. 三木の干し殺し, 鳥取の飢え殺し [본문으로]
  2. 숙부인 요시스케는 목이 깨끗하게 노부나가에게 건네지는 것을 거부하여 성에 불을 질러 재로 만들겠다고 하는 것이 성의 병사들의 분노를 사, 결국 자신의 자택에서 병사들에게 둘러 쌓여 자살했다고 한다. 그 목은 그의 바램과는 반대로 노부나가에게 보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