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츠구[吉継]라는 이름이 아닌 요시타카[吉隆]로 나와 있다. 갑옷을 입지 않고 지팡이 같은 것을 잡고 있는 인물이 요시타카(=요시츠구)

 오오타니 교우부쇼유유우 요시츠구[大谷 刑部省 吉継]는 천하의 분수령이 된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에서 패할 것을 알면서도 우정을 위해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편에 서 장렬히 싸우다  그 병든 몸을 산화시킨 비창(悲槍)의 무장으로 유명하다.

 1600년 6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는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정벌하기 위해 여러 다이묘우[大名]를 동원하여 아이즈[会津]로 향했다. 이때 에치젠[越前] 츠루가[敦賀] 5만석의 성주 오오타니 요시츠구도 이에야스의 동원령에 응하여 7월에 츠루가를 출발하였다.
 이날이 되기 전까지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이름은 역사의 표면에 눈에 띄게 등장한 적도 없었으며, 이 아이즈 정벌[会津征伐]의 시점에서도 극히 평범한 다이묘우로,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후견인인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명령에 순순히 따르고자 하였다.

 도중, 요시츠구는 미노[美濃] 타루이[垂井]에서 오우미[近江]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의 이시다 미츠나리에게 사자(使者)를 보냈다. 요시츠구와 함께 아이즈로 향하게 된 미츠나리의 아들 하야토노쇼우[隼人正][각주:1]를 맞이하기 위함이었다. 이 즈음 사와야마에 은거하고 있던 이시다 미츠나리는 이에야스에게 대항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첫째 아들 하야토노쇼우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아이즈에 보내겠다고 신청한 상태였다.

 요시츠구는 사자의 구두로 미츠나리도 함께 아이즈로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고하였다.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미츠나리가 무공파 장수들에게 습격 받았을 때, 이에야스에게 도망쳐 보호를 받게 되지만[각주:2] 그로 인해 은퇴를 강요당한 미츠나리가, 반(反)이에야스의 태도를 버리기는커녕 여전히 이에야스 토벌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것은 천하의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츠나리가 아이즈로 함께 가준다면 요시츠구 자신이 이에야스와 화해할 수 있도록 주선하겠다는 뜻도 전했다.

 이에 대하여 미츠나리는 상담하고 싶은 것이 있다며 사와야마로 와 주길 바란다고 사자를 보내온 것이다. 요시츠구는 이 시점에도 무슨 일인가?하고 궁금해 하면서도 사와야마로 향했다. 미츠나리는 요시츠구와의 만남을 대단히 기뻐하며 잠시 옛정을 떠올린 뒤, 중대한 계획을 밝혔다.

 “이에야스의 행태를 보자니, 돌아가신 태합(太閤)님의 유훈(遺訓) 정치를 위반할 뿐만 아니라 히데요리 님을 무력화시키려 하고 있네. 우리처럼 태합의 은혜를 입은 자들로서는 굉장히 불쾌한 일. 이에야스가 아이즈로 향하는 지금이야말로 이에야스 토벌을 위한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일세. 거병하여 이에야스를 쓰러뜨리려 하오.”

 듣고 있던 요시츠구는 놀랐다. 너무 무모하다 – 요시츠구는 잠시 틈을 준 뒤 입을 열었다.

 “나이후[内府=이에야스]는 300만석에 달하는 거대 다이묘우일세. 군사수도 많으며 더구나 지금에 와서는 그의 명망에 비견되는 이조차 없네. 돌아가신 태합도 항상 ‘이에야스 님은 지용을 겸비하신 분, 너희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고 말씀하신 인물이네…”

 요시츠구는 불과 19만석의 미츠나리가 그러한 이에야스와 싸운다는 것은 미친 짓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열심히 미츠나리의 뜻을 꺾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미츠나리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일설에 따르면 이때 미츠나리는 이 계획이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의 가로(家老)인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와 공모한 것이기에, 이제는 취소할래야 취소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며, 요시츠구도 부디 참가해 주길 바란다고 부탁했다고 한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자 요시츠구도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일단 요시츠구는 사와야마 성에서 나와 본진이 있는 타루이로 되돌아와 심사숙고 하였다.

 요시츠구는 미츠나리와의 우정과 그런 자신을 믿고 미츠나리가 밀모를 털어놓았다는 생각이 들자, 그것을 무시한 채 아이즈[会津]로 향할 수가 없었다. 되돌아보면 히데요시[秀吉]가 츄우고쿠[中国] 방면사령관으로 히메지[姫路]에 있을 때, 16살의 자신이 먼 분고[豊後][각주:3]에서 와서 섬길 수 있었던 것도 미츠나리의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 아래서 150석으로 시작해 에치젠[越前] 츠루가[敦賀] 5만석의 다이묘우[大名]가 되어 종오위하(従五位下) 교우부쇼우유우[刑部少輔]에 임명되어, 히데요시가 관백(関白)으로 승진했을 때는 미츠나리와 함께 제대부(諸大夫)의 한 사람[각주:4]으로도 선정되었다. 요시츠구의 이런 출세에는 미츠나리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각주:5] 요시츠구는 미츠나리의 그런 우정을 머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요시츠구와 미츠나리 사이에 속설이지만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히데요시가 다회(茶会)를 열었을 때의 일이다. 그 즈음 요시츠구는 불치의 업병(業病)을 앓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여러 장수들은 요시츠구가 입댄 찻종을 꺼려했다.[각주:6] 그때 미츠나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요시츠구에게 찻종을 받아 깨끗이 원샷한 것이다. 요시츠구는 이 일을 평생 잊을 수 없는 도움을 주었다며 미츠나리에게 고마워했다고 한다.

 한편 요시츠구는 이에야스[家康]와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자주 이에야스의 저택을 방문하였다. 단지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일어난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집안싸움을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와 함께 양측의 화해조정에 힘쓰고 있을 때, 야스마사가 이에야스에게 크게 질책을 당하였기 때문에 요시츠구도 또한 이에야스의 저택에 방문하는 것을 관두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에야스를 미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요시츠구는 이에야스를 따라 아이즈 정벌[会津征伐]에 응하려 했던 것이다.

 타루이의 본진에서 요시츠구는 심사숙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츠나리에게 승산은 없었다. 때문에 또다시 사자를 보내어 미츠나리에게 결심을 바꾸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미츠나리의 결심에 변함이 없었다.
 7월 11일. 오오타니 요시츠구는 타루이에서 전군을 이끌고 사와야마 성으로 향했다. 미츠나리를 위해서 죽자고 결심한 것이다. 
미츠나리를 만면에 기쁨을 표하며 요시츠구를 맞이하였다. 그리하여 이에야스 타도의 준비계획은 이시다 미츠나리, 오오타니 요시츠구 그리고 역시 미츠나리의 요청에 응하여 사와야마 성에 온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恵瓊]의 협의에 따라 진행되었다.

 이에야스 타도에 임하기 전에 요시츠구가 미츠나리에게 전한 유명한 충고가 있다. 이하는 그 내용이다.
 “귀공(미츠나리)에게는 방자하고 거만한 점이 있다 – 고 다이묘우를 시작으로 말단 병사들까지 날마다 떠들고 있는 듯 하네. 다른 사람의 위에 서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의 인기를 얻지 않으면 안 되네. 이것을 잘 판단하여 이번 큰일도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님과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님을 위에 세우고, 귀공은 그 아래서 일을 진행시키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네. 거기에 남들이 보기에 귀공은 지혜와 능력에 있어서 천하무쌍이지만 그에 비해 용기는 부족하다고들 여기고 있소. 이에야스 타도계획에는 모우리, 우키타 님 외 다른 다이묘우들도 참가할걸세. 이 계획을 처음부터 짠 것은 귀공이니, 계획이 진행될 때는 남들보다 먼저 목숨을 바친다는 각오를 임하길 바라네.”
 그야말로 미츠나리의 결점에 대한 충고였다. 미츠나리도 당장은 친구 요시츠구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1600년 9월 15일.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동서 20만의 대군이 격돌하였다.
 이날 요시츠구[각주:7]는 토다 카츠시게[戸田 勝成],
히라츠카 타메히로[平塚 為広][각주:8], 오오타니 요시하루[大谷 吉治][각주:9], 키노시타 요리츠구[木下 頼継][각주:10] [각주:11]의 부대를 후지카와 대[藤川台]에 두고, 자신은 그 후방에 본진을 두었다. 오오타니 부대의 우익에는 아카자 나오야스[赤座 直保][각주:12], 오가와 스케타다[小川 祐忠][각주:13], 쿠츠키 모토츠나[朽木 元綱][각주:14] 등을 배치하였다[각주:15]. 이 포진은 더 오른편에 있던 마츠오야마[松尾山]에 진을 치고 있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에 대비한 것이었다. 요시츠구는 처음부터 히데아키에게 딴마음이 있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에서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주변의 배치도. 빨간색은 동군. 파란색은 서군. 노란색은 도중 배신하는 무장들이다.

 오전 8시. 결전이 시작되었다. 오오타니 부대는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高虎], 쿄우고쿠 타카토모[京極 高知]의 부대를 상대로 격전을 펼쳐 압도하고 있었다. 요시츠구는 병든 몸이었다. 뚜껑이 없는 가마에 타고서는 지휘하였다. 뭉개진 얼굴을 흰 포로 감싸 눈 만을 내 놓고 있었다. 그 눈도 거의 실명에 가까웠다.

 전황은 서군이 조금이지만 유리. 그러나 일진일퇴. 곧이어 정오가 되었다. 이때였다. 마츠오야마 산에서 형세를 관망하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갑자기 산을 내려와 오오타니 부대를 공격한 것이다. 요시츠구는 침착하게 맞아 싸웠다. 하지만 요시츠구의 오산이 생겼다. 이 배반에 대비하여 배치한 아사자 나오마사 등의 부대까지도 함께 배신하여 오오타니 부대를 향해서 공격한 것이다.[각주:16] 오오타니 부대는 세 방향의 적과 싸우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다 카츠나리, 히라츠카 타메히로 두 무장이 전사를 하였다. 요시츠구는 두 무장의 죽음을 보고 받고 각오를 정했다. 옆에 있던 유아사 고스케[湯浅 五助]를 가까이 불러,
 “내 목을 적에게 넘기지 마라”[각주:17]
 고 명한 뒤 배를 갈랐다. 고스케는 배 가르는 요시츠구의 목을 베어 준 뒤 그 목을 전포[羽織]에 싸서 땅에 묻은 다음 토우도우 부대를 향해 돌격하였다.[각주:18]

오타니 요시쓰구[大谷 吉継]
분고[豊後] 오오토모 가문[大友家]을 섬겼던 오오타니 씨[大谷氏]의 출신이라고 한다[각주:19]. 처음엔 키노스케[紀之介] 나중엔 요시타카[吉隆][각주:20]라는 이름을 썼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측근시동[小姓]부터 시작하여 1585년 에치젠[越前] 츠루가[敦賀] 5만석의 성주가 되어[각주:21] 종오위하(従五位下) 교우부쇼우유우[刑部少輔]에 서임, 관백 히데요시의 제대부(諸大夫) 중 한 명이 된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신뢰를 받았기에 그에 대한 의리로 서군에 참가하였다. 사나다 유키무라[真田 幸村]의 부인은 요시츠구의 딸[각주:22]이다. 묘는 기후 현[岐阜県] 세키가하라 정[関ヶ原町]의 옛 전쟁터[古戦場], 후지카와 대[藤川台]에 있다. 격전을 펼친 토우도우 가문[藤堂家]이 요시츠구의 분전에 감명받아 세운 것이라고 한다.


  1. 이시다 미츠나리의 첫째 아들 이시다 시게이에[石田 重成] [본문으로]
  2. 미츠나리 포스팅에서도 썼듯이 실제로는 이런 적 없다. 오오사카[大坂]에서 공격받은 미츠나리는 사타케 요시노부[佐竹 義宣]나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도움으로 후시미 성[伏見城] 안에 있는 자신의 저택으로 피했고, 여기서 농성했으며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와 연계하여 무공파 칠장 및 이에야스를 협격하려 하였다. 다만 동료였던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가 주저하는 사이 협격 모의는 실패하고, 이에야스와 화해를 하는 조건으로 책임을 지고 미츠나리는 봉행에서 물러나 은거를 하게 된다. [본문으로]
  3. 근래엔 오우미[近江] 출신이라고는 하나 정확히 어디 출신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오오타니 촌[小谷] 출신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요시츠구의 성과 같은 오오타니[大谷]라고 ‘큰 大’자를 썼으나, 세키가하라에서 서군의 수장의 고향인지라 그것을 감추기 위해 발음은 같지만 ‘작을 小’를 써서 마을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나카무라 시키부쇼유유우 카즈우지[中村 式部少輔 一氏], 이코마 우타노카미 치카마사[生駒 雅楽頭 – 이 당시엔 마사카츠[政勝]라 하였음], 오노기 누이도노스케 시게카츠[小野木 縫殿助 重勝], 아마고 쿠나이쇼우유우 하루히사[尼子 宮内少輔 晴久], 이나바 효우고노스케[因幡 兵庫助], 츠게 사쿄우노스케[柘植 左京亮], 츠다 오오이노카미[津田 大炊頭], 후쿠시마 사에몬다이후 마사노리[福島 左衛門大夫 正則], 이시다 지부노쇼우유우 미츠나리[石田 治部少輔 三成], 오오타니 쿄우부우쇼우유우 요시츠구[大谷 刑部少輔 吉継], 후루타 효우부쇼우유우 시게츠네[古田 兵部少輔 重恒], 핫토리 우네메노카미[服部 采女正]. [본문으로]
  5. 미츠나리의 도움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나 요시츠구의 출세에는 히데요시의 마누라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의 집사격인 모친 ‘히가시도노[東殿]’의 영향력이 컸다고 한다. [본문으로]
  6. 요시츠구가 콧물을 떨어뜨렸다고도 하며, 얼굴의 고름이 찻종에 떨어졌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7. 병사는 600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본문으로]
  8. 둘이 합쳐 900명. [본문으로]
  9. 요시츠구의 첫째 아들. [본문으로]
  10. 요시츠구의 둘째 아들 [본문으로]
  11. 둘이 합쳐 3500명. [본문으로]
  12. 에치젠[越前] 이마죠우[今庄] 2만석의 다이묘우[大名]. 600명 동원. [본문으로]
  13. 이요[伊予] 이마바리[今治] 7만석의 다이묘우. 2000을 동원. [본문으로]
  14. 오우미[近江] 쿠츠키[朽木] 2만석의 다이묘우. 600을 동원. [본문으로]
  15. 여담으로 아와지[淡路] 수모토[洲本] 3.3만석의 다이묘우로 1000명을 동원한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도 배치되어 있었지만, 일본에서 와키자카는 듣보잡 중의 듣보잡이라 이 책에선 4명 중 3이 나오면서도 기술에서 빠져있다. 정말 몇 년 전의 일이지만 이런 듣보잡 중의 듣보잡을 감히 이순신 장군의 라이벌 포지션에 배치한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제작진은 평생 좆잡고 반성해야 한다. [본문으로]
  16. 여담으로 이 배신자들은 전후,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배신한다는 뜻을 명확히 하지 않았다며 아카자 나오야스, 오가와 스케타다는 영지 몰수, 쿠츠키 모토츠나는 반토막(2만석에서 9590석)이 되며, 와카시카 야스하루만이 전투가 일어나기 전부터 배신한다는 뜻을 알렸다며 영지를 보전받았다. [본문으로]
  17. 병들어 추해진 얼굴을 적에게 보이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18. 유아사 고스케는 이때 묻는 모습을 토우도우 타카토라의 조카인 토우도우 타카노리[藤堂 高刑]에게 걸려, 타카노리에게 자신의 목을 줄테니 대신 주군의 목이 여기에 묻혀 있는 것을 비밀로 해주길 바란다고 하였다고 한다. 후에 이에야스가 타카노리에게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목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고 묻자, 알기는 하지만 유아사 고스케와 약속을 하여 말할 수 없다고 끝까지 버티자, 오히려 감심한 이에야스에게 상을 받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19. 위에도 언급했지만 분고[豊後] 오오토모 가문[大友家]의 가신 출신이 아니라고 한다. 여담으로 유명한 '내적인 일은 센노 소우에키[千 宗易]에게 외적인 일은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에게'라고 가신에게 편지를 보낸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은, 그 편지에 요시츠구의 애미 히가시도노[東殿]의 영향력이 쎄다는 것도 썼지만, 만약 요시츠구의 가문이 오오토모 가문의 가신뻘이었다면 특별히 언급하였을 텐데도 그런 것이 없는 것을 보면, 오오토모 가문과 오오타니 가문은 관련이 없는 것 같다. [본문으로]
  20. 한때 킨키[近畿]를 지배했던 미요시 가문[三好家] 마지막 당주의 이름 미요시 요시츠구[三好 義継]의 이름과 같아서 불길하다며 서군에 가담하기 직전에 바꾸었다고 한다. 위에 사진에도 나와 있듯이 세키가하라 병풍에는 요시타카[吉隆]로 나와 있다. [본문으로]
  21. 츠루가 성주가 된 것은 1589년의 일 [본문으로]
  22. 사위 유키무라와 장인 요시츠구의 나이차이가 최소 2 ~ 최대 11살 차이라 아마 조카나 친족의 여성을 양녀로 삼은 뒤 시집 보낸 듯 [본문으로]

 1912년 쿄우토[京都]의 다이토쿠 사[大徳寺]에 있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묘를 이장하게 되었을 때 미츠나리의 유골을 조사하였다.  
 조사에 따르면 미츠나리의 골격은 여성과 착각할 정도로 얇았다고 한다. 마치 히로사키 시[弘前市] 스기야마 가문[杉山家][각주:1]에 전해지는 미츠나리 초상화[각주:2]처럼, 섬세하고 여성적인 풍모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추측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체형의 사람은 고지식하며 비사교적, 유모어가 부족하고, 섬세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보통 자연이나 책 등을 사랑하는 지능형으로, 인간에 대해서는 냉담냉혹 한 편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이시다 미츠나리와 관련된 일화의 대부분에서 그런 특징을 옅볼 수 있다.

 미츠나리는 뛰어난 재치로 인해 히데요시를 섬기게 되었다.
 미츠나리의 출신지 오우미[近江] 사카타 군[坂田郡] 이시다 촌[石田村] 근처에 있는 절에 심부름하는 아이[寺小姓]로 있을 때의 일이다. 나이는 15~16 즈음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당시 오우미[近江] 나가하마 성[長浜城]의 성주로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가 매사냥을 하던 도중 목이 말라 이 절에 목을 축이러 온 것이다.
 미츠나리가 접대를 맡았다. 곧바로 차를 끓여 히데요시에게 권했다. 첫 번째로 내온  차는 커다란 찻잔에 미지근한 차를 7~80%를 담아서 내왔다. 히데요시는 맛있게 전부 마시고 난 뒤 한잔 더 바랐다. 미츠나리는 방금 전보다는 조금 뜨거운 차를 찻잔의 반 정도 담아서 내왔다. 히데요시는 이것도 다 마시고 난 뒤 한잔 더 바랐다. 미츠나리는 아주 뜨거운 차를 작은 찻잔에 조금만 담아 내온 것이다.
 히데요시는 미츠나리의 이런 재치가 맘에 들어 절의 주지에게 청하여 미츠나리를 데리고 와 곧바로 시동으로 삼았다. 이렇게 히데요시를 가까이서 모시게 된 미츠나리는 일이 있을 때마다 현명한 재능을 발휘하며 차츰 히데요시의 신임을 얻어갔다.[각주:3] [각주:4]

 이런 이야기도 전해진다.
 어느 날 히데요시가 미츠나리를 호출하여 지금까지의 공적에 대한 포상으로 500석을 가증(加增)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미츠나리는,
 “500석 대신에 우지[宇治], 요도[淀]의 양 천 기슭에 자라는 백성들이 맘대로 베고 있는 갈대의 예초권(刈草權)을 저에게 주신다면, 1만석에 상당하는 군역(軍役)을 부담하겠습니다”
 하고 청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이상하게 생각하였지만 미츠나리의 청을 허락하였다. 그러자 미츠나리는 양 천의 천기슭 수십 리 안에 있는 갈대를 베는 것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여 결국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고 한다.[각주:5] 

 미츠나리 의 이러한 이재(理財)의 재능도 히데요시는 맘에 들었다. 더구나 미츠나리의 경우 그런 재능을 사욕이 아닌 히데요시에 대한 멸사봉공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언제나 미츠나리는,
 “남을 섬기는 사람은 주인에게서 받은 봉록을 전부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남긴다는 것은 주인의 것을 훔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다 써버리고서 남에게 돈을 빌리는 것은 어리석은 자이다”
 고 단언하였다.

 이에 관한 일화로 용장(勇將)으로 이름 높은 시마 사콘[島 左近]을, 미츠나리는 자신의 봉록의 절반 가까이를 들여 가신으로 삼았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진다.[각주:6] 
 미츠나리는 뛰어난 무사에게 최고의 대우를 할 수 있도록 힘썼던 듯 하다. 그것도 히데요시에 대한 봉공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미츠나리 자신의 주변은 실로 꾸밈이 없고 수수했다. 후에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패하여 거성인 사와야마 성[佐和山城]도 함락되었는데, 공격군의 병사가 성 안을 돌아보자 방은 모두 초벽(初壁)만 한 상태였으며, 바닥은 대부분 판자만 덧댄 채였다. 마당에 정원수(庭園樹)도 없었다고 한다.

 미츠나리의 근무태도도 굉장히 착실하였으며 다방면에 이르렀다. 밤중에 폭풍이 들이쳤을 때에는 다음 날 아침 6시에 이미 성의 파손상태를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즉 미츠나리는 이런 경우 철야를 해가며 성 안을 돌아보았던 것이다. 원래 이런 역할을 해야 할 담당관은 10시 즈음이나 되어서야 보고하러 오는 꼴이었다.

 이상과 같은 미츠나리의 근무태도는 결코 히데요시에게 아첨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자주 히데요시에게 격한 말투로 간언(諫言)하였다고 전해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미츠나리는 1585년 7월 히데요시가 관백(関白)에 임명되어 토요토미[豊臣]라는 성(姓)을 칭하게 되었을 때, 관백의 제대부(諸大夫) 12명[각주:7] 중 한 사람에 선정되어 종오위하(従五位下) 지부노쇼우유우[治部少輔]에 임명되었으며, 나중에는 토요토미 정권의 오봉행(五奉行)[각주:8] 중 한 사람으로 행정의 중책을 짊어지지만, 가지고 있는 재능과 능력으로 순식간에 No.1 실력자가 된다.

 미츠나리의 치적을 간단히 살펴보면, 히데요시가 중요시했던 사카이[堺]의 총독을 1586년부터 1588년까지 맡았으며,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각주:9] 때의 병참, 하카타[博多]의 부흥,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와의 외교절충에 힘 썼으며,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10], 히데요시의 오우슈우 정벌[奥州征伐][각주:11]에 출진, 그리고 두 번에 걸친 조선침략에서는 침략군의 운송과 병참, 무기 보급 등의 지휘를 취하였으며 감찰[軍監]까지 맡았다. 거기에 관백 히데츠구[秀次] 사건[각주:12], 태합검지[太閤検地][각주:13]에도 참여하는 등등 히데요시가 행한 중요정책 전반에 미츠나리는 중요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했기에 히데요시도,
 “나와 비교하여 손색이 없는 자는 미츠나리뿐”
 이라며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미츠나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히데요시 정권의 No.1 실력자였다.
 코우야 산[高野山]의 모쿠지키 상인[木食 上人]은,
 “미츠나리는 오봉행 중 제일인자인 듯이 행동하며, 조금이라도 거스른다면 해를 끼치는 사람이다”
 고 말했으며,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는,
 “태합의 고굉지신으로, 그 위세는 비견할 자가 없다”고 말하였고,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는 가신인 코다마 모토카네[児玉 元兼]가 가지고 있는 명도(名刀)를 미츠나리가 원하였는데, 제출이 늦어져[각주:14] 미츠나리의 기분이 상하면 큰일이라며 빨리 제출해 달라고 코다마 모토카네에게 부탁할 정도였다.  

 그러했기에 미츠나리는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을 대하는 태도가 거만하여 평판이 좋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미츠나리를 극도로 증오하는 무리가 있었다.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등 창 한 자루로 돌격하며 출세한 히데요시의 아이들, 즉 무공파 무장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미츠나리는 아무런 무공도 없는 주제에 히데요시의 맘에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잘난체하며 이런저런 지휘를 하는 건방진 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했기에 1598년 히데요시가 죽자, 오대로(五大老)[각주:15] 필두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천하제패의 야망을 들어내기 시작하자, 저 무공파 장수들은 미츠나리를  너무 증오한 나머지 적극적으로 이에야스와 손잡고 미츠나리 등 문치파와 격한 대립을 하게 되었다.

 다음 해인 1599년 3월, 문치파의 좌장적 존재였던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가 죽자, 무공파 칠장[각주:16]은 미츠나리를 습격하고자 하였다. 미츠나리는 이때 하필이면 이에야스에게로 도망쳐 난을 피할 수 있었는데[각주:17], 이런 모습에서 당시의 정치상화 속에서 고립된 미츠나리의 모습을 볼 수 있다[각주:18]. 이 사건으로 미츠나리는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으로 은거를 강요당해, 천하는 이에야스의 독무대가 되었다.

 1600년 세키가하라 결전[関ヶ原の戦い]은 대단원이었다. 대다수 토요토미 은고[豊臣恩顧][각주:19]의 다이묘우는 미츠나리가 내건 ‘토요토미 가문을 위해서’라는 대의명분만으로 더 이상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미츠나리의 중대한 오산이었다.

 미츠나리는 세키가하라에서 패하여 도망치다 잡혔다. 그 뒤에 몇 개의 일화가 전해진다.
 의복이 더러워져 있었기에 이에야스가 입던 옷을 주었을 때, 그것을 미츠나리에게로 가지고 온 자가,
 “이것은 우에사마[上様]가 하사하신 것”
 이라고 하자,
 “히데요리[秀頼]님 말고 우에사마는 따로 없을 터”
 라고 말하며 그 옷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잡힌 미츠나리를 내려다 보며 욕을 하였을 때,
 “무운 다하여 네 놈을 이러한 처지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구나”
 고 대답했다고 한다.

 10월 1일. 로구죠우 강변[六条河原]의 처형장에 끌려갈 때, 미츠나리는 너무도 목이  말라 경비하는 자에게 따스한 물을 달라고 하였다. 공교롭게도 당장 따스한 물을 구할 수 없어 경비무사는 대신으로 하라며 곶감을 주려고 하였다. 그러자 미츠나리는, 곶감이 가래병에 좋지 않다며 거절하였다. 경비무사는 지금 죽으러 가는 주제에 몸에 좋지 않다니 하면서 비웃었다. 미츠나리는 말했다.
 “큰 뜻을 품은 자는 목이 떨어지는 순간까지 목숨을 아껴 어떻게든 그 뜻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고.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1560년 오우미[近江] 사카타 군[坂田郡] 이시다 촌[石田村] 출생.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눈에 띄어 코우가[甲賀] 미나구치[水口] 성주가 되면서부터[각주:20] 출세하여 종오위하(従五位下) 지부노쇼우유우[治部少輔]가 되었고 오봉행(五奉行)의 한 명으로 선정된다. 1595년 오우미 사와야마[佐和山] 19만 4천석에 봉해졌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를 참모로 삼아 서군(西軍) 8만을 이끌고 싸우지만 패하여 사형당했다. 41세.

  1. 미츠나리의 둘째 아들 이시다 시게나리[石田 重成]가 히로사키 번[弘前藩]으로 도망간 뒤 시게나리의 아들 요시나리[吉成] 때부터 스기야마 씨[杉山氏]를 칭함. [본문으로]
  2. 위에 있는 초상화. [본문으로]
  3. 이 이야기는 에도 시대 작자미상의 일화 모음집 무장감장기(武将感状記)에 나오는 이야기이며, 미츠나리의 첫째 아들 시게이에[重家]가 기록한 것에 따르면 미츠나리는 18살 때 히데요시가 히메지[姫路]에서 츄우고쿠[中国] 방면을 담당했을 때부터 섬겼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사족으로 후세의 군기물 ‘이시다 군기[石田軍記]에는 히데요시가 미츠나리의 후장을 파려고 시동으로 들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5. 갈대는 지붕을 만드는데 쓰이거나, 물건을 가리는 발(簾)을 만드는데 쓰였기에 거의 필수품으로 여겨지던 것이라 한다. 이어지는 이야기로 미츠나리는 후에 이때 얻은 돈으로 화려한 무구를 몸에 걸치고 수백 기(騎)의 무사를 이끌고 와 히데요시를 깜짝 놀라게 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 이야기는 에도 시대의 ‘고금무가성쇄기(古今武家盛衰記)’에 실린 글이라 한다. [본문으로]
  6. 미츠나리가 미나구치 성[水口城] 4만석일 때 2만석을 떼어 주었다고 하나, 미츠나리는 미나구치 성의 성주가 된 적이 없었으며, 시마 사콘은 미츠나리가 사와야마 성[佐和山城] 19만석의 영주일 때 얻었다는 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본문으로]
  7. 나카무라 시키부쇼유유우 카즈우지[中村 式部少輔 一氏], 이코마 우타노카미 치카마사[生駒 雅楽頭 – 이 당시엔 마사카츠[政勝]라 하였음], 오노기 누이도노스케 시게카츠[小野木 縫殿助 重勝], 아마고 쿠나이쇼우유우 하루히사[尼子 宮内少輔 晴久], 이나바 효우고노스케[因幡 兵庫助], 츠게 사쿄우노스케[柘植 左京亮], 츠다 오오이노카미[津田 大炊頭], 후쿠시마 사에몬다이후 마사노리[福島 左衛門大夫 正則], 이시다 지부노쇼우유우 미츠나리[石田 治部少輔 三成], 오오타니 쿄우부우쇼우유우 요시츠구[大谷 刑部少輔 吉継], 후루타 효우부쇼우유우 시게츠네[古田 兵部少輔 重恒], 핫토리 우네메노카미[服部 采女正]. [본문으로]
  8. 주로 마에다 겐이[前田 玄以],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를 이름. [본문으로]
  9. 히데요시의 전쟁금지령[惣無事令]을 어긴 시마즈 가문[島津家]을 정벌하려 한 전쟁. 1587년 개전. [본문으로]
  10.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11. 1591년 1월의 오오사키-카사이의 난[大崎・葛西の乱]과 9월의 쿠노헤 마사자네의 난[九戸政実の乱]. [본문으로]
  12. 사실 미츠나리는 히데츠구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다.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에 미츠나리는 칸토우[関東] 사타케 령[佐竹領]의 검지(検知)하기 위해 출장간 상태였다. [본문으로]
  13. 일종의 토지조사. 정확한 수확량을 선출하여 세금과 부역할 양을 정하였다. [본문으로]
  14. 살생관백 히데츠구[秀次]도 이 칼을 노리고 있었기에, 모토카네는 어느 쪽을 주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기에 늦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15.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16. 일반적으로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를 말한다[関原始末記], [徳川実記]. 다만 그 인물 구성은 기록마다 틀려 '전국무장의 말년과 최후 - 토요토미 히데요시 편'에 잠깐 이름이 나온 이타자카 보쿠사이[板坂 卜斎]의 메모[板坂卜斎覚書]에는 이케다 테루마사가 빠지고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가 있으며, 미츠나리를 습격한 무장 일곱명에게 보낸 편지인 [윤3월5일자 이에야스의 편지(閏三月五日付家康書状)의 수신인은 이케다 테루마사, 카토우 요시아키가 빠지고 대신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 家正],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가 포함되어 있다. [본문으로]
  17. 실제로는 이런 적 없다. 오오사카[大坂]에서 공격받은 미츠나리는 사타케 요시노부[佐竹 義宣]나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도움으로 후시미 성[伏見城] 안에 있는 자신의 저택으로 피했고 여기서 농성했으며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와 연계하여 무공파 칠장 및 이에야스를 협격하려 하였다. 다만 동료였던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가 주저하는 사이 협격 모의는 실패하고, 이에야스와 화해를 하는 조건으로 책임을 지고 미츠나리는 봉행에서 물러나 은거를 하게 된다. [본문으로]
  18. 사실 이 사건은 미츠나리 하나만 노린 사건이 아니라, 봉행파 다수를 노린 사건이었으나 은거를 하며 봉행직에서 물러난 것은 미츠나리 한명 뿐이라, 후세에 미츠나리만 공격받은 양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9. 히데요시의 은혜를 입어 다이묘우가 된 무장들. [본문으로]
  20. 미츠나리가 미나구치 성주가 된 적은 없다. 시마 사콘[島 左近]을 등용할 때 미나구치 4만석 중 2만석을 떼어 주었다는 일화 때문에 퍼진 낭설로, 당시(1590) 미나구치의 성주는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 一氏]였다. [본문으로]

 언제부터인지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쵸우슈 한[長州藩]은 매년 1월1일이 되면 하기 성[萩城]의 가장 깊숙한 방에서 비밀 회의가 열렸다고 한다. 중신들이 번주(藩主)에게 신년 인사를 올린 뒤, 필두 가로가 앞에 나아가, “올해는 어떻게 할까요?”라 물으면 번주가 “아직 이르네”라 답하는, 아주 간단한 의식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의 진위여부는 확실하지 않으나,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때의 원한을 잊지 않고 복수전의 시기를 주종간에 문답한다는 것이 정말 쵸우슈우[長州]다운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세키가하라 전쟁에서 패하여 츄우고쿠[中国] 8개국[国][각주:1]이라는 거대한 영지에서 단번에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 2개국으로 감봉된 당사자 - 그것이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이다.
 테루모토
는 시대의 영걸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손자이다. 1563년 테루모토의 부친 타카모토[隆元]가 지 아비 모리나리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불과 11살의 나이로 가문을 이었다. 당연 어린 테루모토를 대신하여 모토나리가 실질적인 당주로 정무를 계속 보았고,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양 천[両川] ’이 모토나리를 보좌하는 체제가 성립되었다. 
 모토나리는 어려서 아비를 잃은 테루모토가 건강하고 예의 바르게 성장해 줄 것을 기도했다. 그리고 그 바람대로 무사히 테루모토는 15살의 봄을 맞이했다. 모토나리는 그 기쁨을 편지로 써서 테루모토의 모친에게  보낼 정도였다.

 테루모토는 위대한 할아버지에게 응석을 부리는 감이 있었다. 모토나리가 1567년 은거하려고 하자,
 “아버지 타카모토는 40살이 되어서도 뒤를 돌보아 주셨으면서 이제 막 15살이 된 저를 버리시려고 하시다니 뭐라 할 말도 없사옵니다. 그러니 저도 모우리 가문[毛利家]을 버리고 어디까지건 할아버지가 가시는 곳에 따라가겠습니다.”
 며 정말 아이처럼 우는 소리를 해댔다.
 모토나리는 이런 테루모토를 미덥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한편 귀엽다고도 생각했다.[각주:2]

 테루모토가 13살인 1565년.
 모우리 가문[毛利家]는
토다갓산 성[富田月山城]의 아마고 가문[尼子家]을 공격하였는데 이 때가 테루모토 전쟁터 데뷔였다. 4월 16일 테루모토는 모토나리에게 선봉에 서고 싶다며 자원하였다. 그러나 이날 적은 아마고의 주력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킷카와 모토하루,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모우리 가문의 당주가 데뷔전을 치를만한 상대가 아니라며 테루모토의 선봉을 막았다. 테루모토는 크게 불만을 품게 되었다. 어린 테루모토는 장수(將帥)의 역할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지 못했다기 보다 테루모토 자체가 격정적이고 저돌적인 성격이었던 듯 하다. 시간이 흘러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그런 테루모토를 ‘대장의 그릇이 아니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즉 테루모토는 정치적 감각이 결여된 인물이었던 듯 하다.

 예를 들면 1574년 빗츄우[備中] 미무라 사네치카[三村 実親][각주:3]의 키노미 성[鬼身城]을 공격하였을 때, 사네치카를 손녀사위로 둔 오우미 뉴우도우[近江 入道][각주:4]가 자기 가문만 살려 주면 사네치카를 잡아다 바치겠다고 하자, 테루모토는 그 더러운 수법을 절대 용서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략을 중시하는 다른 중신들이 오우미 뉴우도우의 내응을 받아들이도록 테루모토를 설득시켰다고 한다.

 또한 1578년에는 ‘양 천[両川]’이 목숨을 살려주자고 하던 아마고의 유신(遺臣) 야마나카 시카노스케[山中 鹿之助]를, 테루모토는 2번이나 살려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반항한 은혜를 모르는 놈이라며, 독단으로 시카노스케를 죽였다.[각주:5]

 1571년 모토나리의 죽음 이후에도 이런 성질 급한 테루모토가 큰 실수 없이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양 천[両川]’  중 하나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잘 컨트롤했기 때문이다. 모토나리가 죽은 뒤 모우리 가문은 과감한 킷카와 모토하루, 진중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모우리 가문의 양 기둥이 되어 모우리 가문의 안태를 지키고 있었다. 테루모토는 이 두 숙부 중 성격적으로는 모토하루에 가까웠지만 접촉의 기회는 타카카게 쪽이 많아 정치력이 탁월한 타카카게의 의견을 자주 따랐다.[각주:6]

 하지만 성격적으로도 대조적인 ‘양 천[両川]’은 1577년부터 시작되는 오다 가문[織田家]와의 전쟁 속에서 대응법을 둘러싸고 차츰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1582년 히데요시[秀吉]가 시미즈 무네하루[清水 宗治]가 지키는 빗츄우 타카마츠 성[高松城]를 포위하였을 때 킷카와 모토하루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대립은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때 킷카와 모토하루는 철저항전을,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강화교섭을 주장한 것이다.
 결국 천하의 정세에 밝은 타카카게의 주장으로 인해 사태는 시미즈 무네하루의 할복을 조건으로 강화교섭으로 이어졌다.
 이때 테루모토는 상기의 움직임 속에서 타카카게 노선을 따르기는 하였지만, 위험에 빠진 타카마츠 성의 구원을 주장하며 무네하루의 목숨과 바꾸어 강화교섭에 나서는 것에 세찬 거부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는 테루모토 자신의 의지와 반대되는 것이었다. 테루모토는 무네하루의 유족들에게 직접 위로의 말을 전하고 후히 대했다.[각주:7] 이보다 전에 ‘말려 죽이기[干殺し]’ 작전이 펼쳐진 톳토리 성[鳥取城]의 킷카와 츠네이에[吉川 経家]의 유족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했다.[각주:8]

 1582년 히데요시를 혐오하던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가 은거하고 4년 뒤에는 죽어, 모우리 가문은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 하에서 활로를 찾으려 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노선을 밟아가[각주:9], 1588년에는 테루모토가 히데요시에게 초청받아 타카카게, 킷카와 히로이에[吉川 広家, 모토하루의 아들]와 함께 상락(上洛)하여 쥬라쿠테이[聚楽第]와 오오사카 성[大坂城]에서 환대를 받고 임관의 영예[각주:10]까지 맛본 것이다. 즉 모우리 가문[毛利家]은 완전하게 토요토미 정권에 속하게 된 것을 의미했지만 그것이 테루모토가 바라는 방향이기도 했다.

 1597년. 모우리 가문의 기둥이었던 코바야카와 타카카케가 죽고 다음 해인 1598년에는 히데요시가 죽었다. 모우리 가문의 중추는 킷카와 히로이에[吉川 広家]로 옮겨져, 코바야카와 노선의 후계자는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恵瓊]와의 사이에 심각한 대립이 생겼다. 양자는 각자 놓여진 입장에 따라 킷카와 히로이에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무공파 다이묘우[大名]와 친했고, 안코쿠지 에케이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문치파와 손 잡았다.

 1600년 세키가하라 결전[関ヶ原の決戦] 때 테루모토는 안고쿠지 에케이의 요청에 응하여 서군의 총수가 되어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입성하였다. 히로시마[広島]를 출발할 때 중신 대부분이 반대했음에도 테루모토는 굳이 출마하였다고 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오대로(五大老)[각주:11] 중 하나로 선정된 은혜를 갚기 위함이었으나,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교활한 정권탈취를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던 것일지도 – 격정가(激情家)인 테루모토라면 양쪽 다 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리 데루모토[毛利 輝元]
1553년 출생. 히데요시[秀吉] 휘하가 되자 시코쿠 정벌[四国征伐][각주:12],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각주:13]에 참가하였고,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14]에도 참가. 1595년에는 오대로(五大老)의 한 사람이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총사령관으로 출진[각주:15].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패하여 120만석에서 수오우[周防], 나가토[長門] 36만석 9천석으로 감봉되었다. 1625년 4월 죽었다. 73세.

  1. 나가토[長門], 스오우[周防], 이와미[石見], 아키[安芸], 이즈모[出雲], 빈고[備後], 빗츄우[備中], 호우키[伯耆]. [본문으로]
  2. 여담으로 이때의 생활을 1613년 테루모토가 모우리 히데모토[毛利 秀元], 후쿠하라 히로토시[福原 広俊]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11살 때부터 부모님 곁을 떠났고, 13살에 시마네[島根]로 불려가 19살 때까지 할아버지(모토나리)에게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채 지냈다. 모든 것을 할아버지 의견에 따라야 했으며 때로는 엄청나게 맞은 적도 있다"고 하였다. [본문으로]
  3. 이 당시는 우에다 이에자네[上田 家実]의 딸과 결혼하여 양세자가 되었기에 우에다 사네치카[上田 実親]로 불림. [본문으로]
  4. 우에다 이에자네[上田家実]의 아비 [본문으로]
  5.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의 명령이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6. 앞서 언급한 편지에서 테루모토는 이에 대하여 “나는 할아버지에게도 맞았지만 타카카게, 모토하루에게도 엄하게 교육받아 이래서는 몸이 견뎌나질 않겠구나 하고 생각하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7. 테루모토는 그의 아들 시미즈 카게하루[清水 景治]를 중용하였고, 카게하루는 세키가하라 이후 감봉으로 인해 힘든 모우리 가문의 재정상황을 재건하는데 힘썼다. [본문으로]
  8. 츠네이에의 아들 츠네자네[経実]는 이와쿠니 번[岩国藩] 킷카와 가문의 사숙노[四宿老]의 한 명이 되었다. [본문으로]
  9. 여담으로 킷카와 모토나가와 형 모토나가[元長]까지 죽어 킷카와 가문[吉川家]의 당주가 된 히로이에는 이런 타카카게를 '타카카게는 히데요시 밑으로 들어간 결단을 자신의 가장 큰 공적이라며 자랑했다'며 빈정댔다. [본문으로]
  10. 토요토미 씨[豊臣氏]가 되어 토요토미노 테루모토[豊臣 輝元]라는 이름으로 종사위하(従四位下) 지쥬우[侍従]에 임명되었고. 같은 날 산기[参議]가 됨. [본문으로]
  11.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12. 1585년 히데요시가 시코쿠[四国]의 쵸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 元親]를 공격한 전쟁. 테루모토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를 1진, 킷카와 모토나가[吉川 元長]를 2진으로 출진시켰을 뿐 참가하지는 않았다. [본문으로]
  13. 1586년~1587년 사이에 히데요시가 시마즈 가문[島津家]에 공격당하던 큐우슈우[九州]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의 구원요청에 응하여 일으킨 전쟁. [본문으로]
  14. 테루모토는 쿄우토[京都]를 수비하는 역할을 맡아 칸토우[関東]에는 가지 않았다. 대신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모우리 가문의 군세를 이끌고 히데요시 주변을 지켰다. [본문으로]
  15. 테루모토는 정유재란 때 병으로 참가하지 않았다. 참가한 것은 테루모토의 대리인[名代]으로 우군(右軍) 사령관이 된 모우리 히데모토[毛利 秀元]였다. [본문으로]

 센고쿠(戦国) 무장 중에서 시미즈 무네하루(清水 宗治)만큼이나 무사다운 화려한 의식 속에서 마지막을 장식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는 츄우고쿠(中国) 모우리(毛利) 공략에 임하여 우선 모우리 세력권의 최전선에 있는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의 시미즈 무네하루를 오다(織田) 측으로 배신하도록 꾀했다. 노부나가(信長)의 서약서에 자신도 편지를 써서는 하치스카 마사카츠(蜂須賀 正勝)와 쿠로다 요시타카(黒田 孝高)를 무네하루에게 사자로 보냈다. 노부나가의 서약서에는 빗츄우(備中), 빙고(備後) 2개국(国)을 항복의 조건으로 준다는 것이었다.

 무네하루는 곧바로 이 서약서와 편지를 모우리의 당주 테루모토(輝元)에게 받쳤고 히데요시에 대한 답신에는 “테루모토가 나를 신뢰하여 국경의 땅을 맡겼기에 그 믿음에 어긋나는 짓을 할 수는 없소이다”고 정중히 거절하였다고 한다. 2개국이라는 맛있는 떡밥에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무네하루에게는 모우리에게 빚이 있었다. 예전에 아들 사이타로우(才太郎)가 적에게 유괴당하였을 때 테루모토나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 덕분에 아들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센고쿠 난세에 있어서는 진귀한 의리의 무장이었다.

 역사상 유명한 타카마츠 성 공격은 1582년에 시작되었다.
 히데요시는 4월 4일에 2만의 대군을 이끌고 우키타 씨(宇喜多氏)의 본거지 오카야마 성(岡山城)에 입성하였다. 타카마츠 성은 이 오카야마 성에서 12km정도 떨어진 지점인 키비 평야(吉備平野)의 거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외교로 타카마츠 성을 항복시키는 것에 실패하였는데 그렇다고 이것을 힘으로 뺏기에도 어려웠다. 성안의 사기가 왕성하였으며 성은 요해였다. 작고 높은 성 주변에는 말의 발도 빠질 듯한 진창 깊은 밭으로 연못이나 늪이 많았다. 그 속에는 불과 말 한 마리 지날 수 있을 정도의 외길밖에 없었다. 함락시키는데 필시 2년은 걸릴 것이다.

 히데요시는 본영 류우오우산 산(竜王山)에서 타카마츠 성을 멀리 바라보며 이 성의 공략법에 대해 생각하였는데 그 결과 이 천하의 지혜꾸러미 속에서 나온 것은 [수공(水攻)]이라는 획기적인 전술이었다. 즉 타카마츠 성의 서쪽에 흐르는 아시모리가와 강(足守川)를 막아, 그 지점에서 성의 동쪽 이시이야마 산(石井山)의 남쪽기슭 카와즈가하나(蛙ヶ鼻)까지 약 4km에 걸쳐 제방을 쌓아 성을 이 인조호수 안에 수몰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공성이라기 보다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거대한 토목공사 계획이었다(부대 배치 및 알기 쉽게 나온 그림이 있는 곳)

 제방의 규모는 높이 7m, 밑바닥 폭이 20m나 되어 그 위는 도로가 있어 이 도로의 폭은 약 10m였다. 히데요시는 이를 단기간에 완성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히데요시는 10여일 만에 완성시킨 것이다. 그야말로 기적으로 ‘천재적인 토목건축가’라는 말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는 신속함이었다. 흙은 가마니로 옮기는 방법을 취하여, 그 가마니 한 개당 무려 돈 100문과 쌀 한 되를 준다는 조건을 내건 것이다. 당연하게도 비젠(備前), 빗츄우(備中) 일대의 사람들은 이 짭잘한 돈벌이에 달려들었다. 이야기는 엄청난 전파력으로 각지에 전해져 흙 가마니를 쌓은 백성들의 수레가 타카마츠로 쇄도하였다. 히데요시에게 행운이며 타카마츠 성에게 있어 불행인 것은 때마침 장마의 계절이었기에 완성된 이 인조호수에 엄청난 비가 쏟아져 볼 때마다 수량이 늘어갔다. 호수 한 가운데 덩그러니 뜨이게 된 타카마츠 성은 3일째에 성의 일층까지 물에 잠겼다.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형제를 중심으로 한 모우리의 대군이 타카마츠 성을 구원하러 도착해 있었지만 이 인조호수를 둘러싼 하시바 히데요시의 대포위망에는 손을 쓸 수가 없었다. 화해 협상밖에 방법이 없었다. 모우리 씨의 외교승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恵瓊)가 히데요시의 본진으로 파견되었다. 모우리가 제시한 조건은 빗츄우 등 5개국을 할양할 테니 타카마츠 성의 모든 장병을 구해달라는 것이었다. 모우리 씨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였다. 히데요시는 이를 거부했다. 히데요시의 조건은 5개국 할양 외에 ‘타카마츠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의 할복’이라는 것이었다.

 일시 화평교섭은 좌초되었지만 안코쿠지 에케이가 성주 무네하루를 설득하여 양해를 구했다. 조건 수락의 서장이 히데요시의 진영에 도착한 것은 6월 2일이었다. [4일에 할복]이라고 정해졌다. 히데요시는 크게 기뻐하며 타카마츠 성으로 술과 안주를 보냈다. 이 2일 새벽에 실은 쿄우토(京都)에서 대사건이 일어나있었다. 혼노우(本能)사(寺)의 변이었다. 히데요시 쪽으로 그 급보를 가진 밀사가 도착한 것이 3일 심야. 히데요시는 앙천했다. 어쨌든 이 사실은 철저하게 감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모우리 측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화평교섭의 와해는커녕 고립된 히데요시는 곧바로 적의 맹공을 받게 된다.

 4일.
 무네하루의 자인이 행해지는 날이었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입장에 급격한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은 채 평온히 자리잡고 있었다. 작은 배가 타카마츠 성에서 배를 저으며 나왔다. 배 위에는 죽은 사람이 입는 흰 옷의 무네하루가 있었다. 죽음을 확인하는 사람이 탄 배의 앞에 오자 무네하루는 그 역을 맡은 호리오 모스케(堀尾 茂助[각주:1])와 조용히 마지막 잔을 기울이고는 흰 부채를 펼쳐 쿠세마이(曲舞) ‘세이간지(誓願寺[각주:2])’를 추었다. 적과 아군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펼쳐지는 화려한 죽음의 의식이었다. 무네하루가 배를 가르자 등뒤에서 칼날이 번쩍거리며 목이 떨어졌다. 동승하고 있던 형 겟세이(月清) 이하 따르던 자들도 계속해서 무네하루의 뒤를 따랐다.

무네하루 사세구(辭世句),

이제야 이승을 떠나는 무사의
이름을 타카마츠의 이끼에 새겨두고
浮世をば今こそわたれ武士の
名を高松の苔に残して

 히데요시는 이 이후 곧바로 행동을 일으켜 후에 히데요시의 대반전(大返し)이라 일컬어지는 초인적인 속도로 쿄우토(京都)로 올라가 야마자키 전투(山崎合戦)에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친 것이었다.

[시미즈 무네하루(水 宗治)]
1537년생. 처음엔 빗츄우(備中) 시미즈 성(清水城)의 성주. 후에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에 속해 타카마츠 성(高松城) 성주 이시카와 히사타카(石川 久孝)의 딸과 결혼하여 타카마츠 성주가 되었다. 1582년 타카마츠 성에서 자인(自刃).

속영웅백인일수(続英雄百人一首)에 그려진 시미즈 무네하루

  1.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를 말한다. [본문으로]
  2. 헤이안 시대 중기의 시인으로 남녀 관계없이 1~2위를 다투던 여류 시인 ‘이즈미 시키부(和泉式部)’의 영혼이 가무(歌舞)의 보살이 되어 성불한 기쁨을 나타내는 춤. [본문으로]

야마나카 시카노스케[山中 鹿之助]라고 하면 2차대전이 일어나기 전만 하더라도 이야기꾼들의 무용담(講談)은 물론 교과서에까지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렸을 정도로 유명하다. 산 끝에 걸린 초승달을 올려다보며,
 "나에게
칠난팔고(七難八苦)을 주소서"
 라고 비는 장면이다. 주군 가문의 부활을 위해서 동분서주하며 노력하는 모습이 2차대전 이전 충군애국을 위한 정신교육에 딱 알맞은 소재였던 것이다.
 그의 인생드라마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은 주군인 아마고 가문[尼子家] 부활을 위해서 싸우는 – 그 집요한 게릴라 활동에 있을 것이다.

 시카노스케의 무용전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아마고 가문이 멸망하여 순례자의 모습으로 여러 지역을 유랑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오우미[近江]의
반바쥬쿠[番場宿]라는 곳에서 어느 노승의 친절로 암자에서 머물게 되었다. 2~3일 지났을 즈음 십여 명의 건장한 무사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들어와서는 식사를 내놓으라고 하였다. 보기에 식사만 하고 얌전히 돌아갈 듯한 쌍판이 아니었다. 시카노스케가 마당에 있던 큰 바위를 가볍게 들어올리고는 "어서 꺼지지 못할까!"하고 소리치자 무사들은 두려움을 느끼고 물러났다.
 하지만 그 날 밤. 그 무사들이 습격해왔다. 그들은 산적, 도적들이었던 것이다. 시카노스케는 재빨리 노승과 동자승을 숨기고는 정면으로 들어오는 자는 함정에 빠뜨리고, 창문에서 들어오는 자는 창문 아래 몸을 숨기고 있다가 한 사람씩 사로잡았다. 이렇게 해서 별 어려움 없이 14명의 도적을 잡았지만, 노승의 말을 듣고 생명을 살려주자 두목 같은 남자가,
 "제가 도둑질하기 백여 번,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하길 칠십여 번에 이르지만 이렇게 당한 적은 처음이외다"
 고 말하며 적어도 존명이라도 말해달라 하였다 한다.

 시카노스케의 파란만장한 삶의 막이 오른 것은 1566년 아마고 씨[尼子氏] 멸망부터였다. 한때 츄우고쿠[中国] 11개 쿠니[国]의 영토를 가지고 패권을 세웠던 아마고 씨도, 신흥 세력인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군에게 패하여 멸망해 버린 것이다. 한때는 이 모우리 씨[毛利氏]도 아마고 가문의 휘하였다.
 이 1566년에 아마고의 본거지 이즈모[出雲]
토다 성[富田城]이 함락당하자 당주 아마고 요시히사[尼子 義久]와 그 동생 토모히사[倫久], 히데히사[秀久] 세 명은 포로의 몸이 되어 모우리의 근거지 아키[安芸]로 끌려갔다.

 이때부터 야마나카 시카노스케나 타치하라 히사츠나[立原 久綱] 등의 활약이 시작된다. 은밀히 쿄우토[京都]에 올라가 토우후쿠 사[東福寺]를 방문하였다. 거기에는 중이 되어 있는 아마고의 혈통이 있었다. 최후의 당주 요시히사의 부친 하루히사[晴久]의 숙부[각주:1]의 아들이었다. 시카노스케들은 그를 환속시켜 '아마고 마고시로우 카츠히사[尼子 孫四勝久]'라는 이름을 쓰게 하였다.

 카츠히사를 대장으로 옹립한 일당 200여명은 타지마[但馬]로 내려가 해적 나사 니혼노스케[奈佐 日本之助]의 배로 오키[岐]로 건너가 이곳의 사사키 타메키요[佐為清]의 협력으로 대망의 옛 영토 이즈모[出雲]의 흙을 밟게 된 것이다. 옛 주인의 입국에 이즈모는 들끓었다. 각지에 숨어있던 아마고 낭인 3000여명이 곧바로 달려와 그들의 세력은 1개월 안에 이즈모의 반을 석권하였다. 이와미[石見], 호우키[伯耆]에서도 줄을 대는 자가 속출했다. 본거지 토다 성을 되찾으면 옛 영광을 다시 한번 재현할 수가 있었다.
 그 토다 성에도 모우리의 군사는 불과 300명의 병사밖에 없었다. 아마고는 6000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함락시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모처럼의 기회가 무너졌다. 토다 성의 수비장수 아마노 타카시게[天野 隆重]가 계략을 쓴 것이다.
 "깨끗하게 성을 넘기고 싶다. 그러나 한번도 싸우지 않고 넘기는 것은 무사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 그러니 일전을 벌이는 척을 하고 넘기겠으니 군세를 이끌고 오시길"
 아마고 측은 이 사자(使者)의 편지로 기세 등등해졌다. 완전히 안심을 하고 2000의 병사를 보냈다. 하지만 산 중턱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활과 총탄이 날아들었다. 아마고 측은 예상 못했던 습격을 받아 혼란에 빠졌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번엔 성병 300이 밀고 내려와 아마고 측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게 된 것이다.

 시카노스케는 1570년 모우리 가문의 이즈모 총공격에 잡히는 몸이 되었다. 여기에서도 그의 집요함을 볼 수 있다. 참수에 처해질 운명이었지만, 모우리를 위해서 일하겠다고 하여 목숨을 건졌다. 모우리를 위해서 시코쿠[四国] 정벌의 선봉을 자처까지 하였다. 그런 것들은 전부 살아남아 또다시 아마고 부활의 기회를 잡기 위한 연기였다. 그리고 시카노스케는 화장실을 이용하여 모우리 진영에서 탈출하였다. 게릴라 활동가다운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몸을 숨기며 미마사카[美作]를 거쳐 쿄우토로 갔다. 이번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의지하였다. 당시 노부나가는 혼간지[本願寺]와 손잡고 있는 모우리 측과 적대하고 있었다. 다시 쿄우토에 모인 시카노스케 일행의 아마고 잔당은 츄우고쿠 담당인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의 휘하로 들어가 하리마[播磨]로 갔다. 타지마[但馬]의 코우즈키 성[上月城]를 함락시키자 히데요시는 아마고 카츠히사의 바램대로 이 성을 지키게 하였다. 히데요시를 따라 이즈모로 진격하여 옛 영토를 회복하는 것도 그리 먼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 믿는 아마고 일당은 피가 끓었다.

 바로 그때 모우리 측이 대군을 이끌고 코우즈키 성을 포위하였던 것이다.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의 군세[각주:2]를 선봉으로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군세가 몰려와 아마고 섬멸을 노린 것이다. 모우리 군세는 보급로를 완전히 끊어버렸다.

 의지할 것은 히데요시의 원군이었다. 성안의 식량은 바닥을 들어내고 있었다. 탈주병도 계속 생겼다. 쿠마미가와 강[熊見川]을 사이에 두고 타카쿠라야마 산[高倉山]에 진을 친 히데요시 군밖에 의지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모우리 군세 2만이 유리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에는 히데요시도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결국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작전변경이 하달되었다. 코우즈키 성에서 물러나라는 것이었다. 아마고 일당은 버림을 받은 것이다.

 그리하여 코우즈키 성은 모우리에게 항복하였다. 당주 카츠히사는 자결, 시카노스케 등 60여 명은 빗츄우[備中]로 보내졌다. 시카노스케는 도중 몇 번이나 탈출을 시도하였지만 이루지 못하고 결국 빗츄우로 들어서는 아이[阿井]의 나루터에서 살해당했다.
 모토하루, 타카카게는 시카노스케를 부하로 삼으려 했던 것 같지만 모우리의 당주 테루모토(
輝元)의 뜻으로 살해당했다고 한다.

[야마나카 시카노스케(山中 鹿之助)]
1545년생. 아마고 하루히사[尼子 晴久]를 섬기며 미마사카[美作] 2만석에 봉해져 가로(家老)의 지위에 있었다. 아마고 멸망 후는 카츠히사[勝久]를 옹립하여 싸움을 거듭하였지만 1578년 7월 17일 살해당했다. 34세.

  1. 아마고 가문[尼子家] 최강의 전투집단이었던 신구우 당[新宮党]의 당수 아마고 쿠니히사[尼子 国久]. [본문으로]
  2. 나오이에는 병을 칭하여 동생 타다이에[忠家]를 대신 출진시켰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