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의 세상이 된 다음의 일이다. 
 어느 날,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의 거성 치쿠젠[筑前] 후쿠오카 성[福岡城]에서 무사들이 모여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한 무사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사무라이 대장[侍大将] 시마 사콘[島 左近]은 정말 무서웠지. 지금도 눈 앞에 있는 듯 생생하게 기억난다니까”고 몸서리치며 말하자, 그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자기들도 그러하다며 수긍하였다. 
 그러나 그 시마 사콘이 당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각자의 기억들이 달라 서로 맞지가 않았다. 그래서 마침 쿠로다 가문에 있던 미츠나리의 옛 가신(家臣)이었던 사람을 불러다 물어보았다. 그 가신의 말에 따르면 투구의 앞장식[立物]은 삼 척(尺)[각주:1] 정도 되는 텐츠키[天衝]를 붙이고, 갑옷은 옻칠을 한 가죽 몸통갑옷[溜塗り桶革胴], 연황색 목면의 전포[陣羽織]를 입고 있었다고 한다.(링크:당시 시마 사콘이 입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갑옷 - 위에서 두 번째 것이 시마 사콘의 갑옷
 이것을 듣고 모여있던 쿠로다 가문의 무사들은, “보통 그렇게 눈에 띄는 모습을 하고 있으면 잊지 못할 터인데… 더군다나 우리 쿠로다 가문은 이시다 가문과 정면으로 맞붙어 싸웠잖아. 정말 그렇게 가까이서 사콘을 보았으면서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니, 우리는 정말 당황했었나 보군, 정말 쪽 팔린 일이로세”하고 개탄하였다. 그래도 그 중 하나가, “아니지. 그렇게 온몸의 털이 다 설 정도로 공포에 떨었으며, 자칫하면 우리들 목도 사콘의 창에 꿰였을 수도 있을 터인데, 기억이 안 난다고 하더라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시마 사콘 – ‘미츠나리에게 과분한 것이 두 개 있으니, 시마 사콘과 사와야마의 성[佐和山城]’이라 일컬었을 정도의 무장이지만, 그의 이력은 확실하지 않다. 일설에 따르면 처음엔 야마토[大和]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의 성주 츠츠이 쥰케이[筒井 順慶]를 섬기었으며, 쥰케이의 가신 마츠쿠라 우콘[松倉 右近]과 쌍벽을 이루며 ‘우콘-사콘’이라 칭해진 전술가(戰術家)였다. 후에 낭인이 되어 오우미[近江] 타카미야[高宮]에 은거하고 있을 때, 사콘의 장재(將材)를 높이 산 이시다 미츠나리의 거듭된 부탁에 꺾여 미츠나리를 섬겼다. 그때 미츠나리는 4만석의 소령(所領) 중 반분 가까운 1만5천석을 사콘에게 주었다고 한다.[각주:2]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도 이런 사콘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기에, 히데요시[秀吉]가 죽은 뒤 미츠나리와 사이가 나빠지자, 검술사범 야규우 무네노리[柳生 宗矩]를 사콘에게 파견하여 사콘의 뱃속을 살피게 하였다. 무네노리와 사콘은 동향 출신이었으며, 또한 무네노리 역시 츠츠이 가문[筒井家]을 섬긴 적이 있어 사콘과 친분이 있었던 것 같다.[각주:3] 
 잠시 잡담을 나눈 후 무네노리는 사콘에게 천하의 향방이 어찌될 것 같은지에 대해 물었다. 사콘은 웃으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지금은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처럼 지모와 결단력 있는 인물이 없기에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는 자신의 주군 이시다 미츠나리가 지모는 있어도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돌려서 말한 것이다. 사실 사콘은 몇 번이나 미츠나리에게 중대한 결단을 촉구했으며, 그럴 때마다 각하 당했다.

 미츠나리가 무공파 칠장[각주:4]에게 공격받아 이에야스의 중재로 사와야마에 은퇴하게 되었을 때, 사콘은 일전불사를 주장하며 이런 작전을 세웠다. “사와야마를 1천의 병사로 수비하고, 2천의 병사를 거느리고 후시미[伏見]의 성 밑 마을[城下町]에 불을 질러 혼란을 일으키고 그 틈에 이에야스를 죽여버립시다.”고 진언하였다. 미츠나리는 때가 아니라며 그 책략을 쓰지 않았다. 또한 이 이후 이에야스가 아이즈의 우에스기 정벌[上杉征伐]에 향하던 도중 오우미[近江] 미나구치[水口]에 머문다는 정보가 들어왔을 때도 사콘은 야습을 진언했지만 미츠나리는, “그에 대해서는 미나구치 성주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에게 맡겨두었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1600년 9월 14일 세키가하라 결전의 하루 전. 아이즈 정벌군을 회군한 동군(東軍)의 총수 이에야스가 미노[美濃] 아카사카[赤坂]에 도착하자, 오오가키[大垣]에 있던 서군(西軍)은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다. 이때 사콘은 아군의 사기를 여기서 높이지 않으면 단번에 무너질 것이라 보고, 500 정도의 병사를 이끌고 오오가키와 아카사카 사이에 흐르는 쿠이세 강[杭瀬川]까지 진출하여 동군의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 一氏], 아리마 토요우지[有馬 豊氏]의 군을 유인해서는 쳐부수어 서군의 사기를 높였다. 이어서 그날 밤 작전회의에서 야습을 진언했지만 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콘은 자신의 진소(陣所)에 돌아가서는 가신들을 모아, 가신들의 목숨을 자신에게 맡기라고 전했다 한다.

시마 사콘[島 左近]
이름은 키요오키[清興]. 일반적으로 카츠타케[勝猛]가 유명하다. 츠츠이 가문[筒井家] 다음에는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의 아들[각주:5] 히데야스[秀保]도 섬긴 적이 있다고 한다.

  1. 약 91cm. [본문으로]
  2. 미츠나리가 미나구치 성[水口城] 4만석일 때 이러했다고는 하나, 미츠나리는 미나구치 성의 성주가 된 적이 없었으며, 시마 사콘은 미츠나리가 사와야마 성[佐和山城] 19만석의 영주일 때 얻었다는 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본문으로]
  3. 거기에 더해 사콘의 딸은 무네노리의 조카이며 후에 오와리 야규우[尾張柳生]의 시조인 야규우 토시토시[柳生 利厳]의 부인이다. [본문으로]
  4. 일반적으로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를 말한다[関原始末記], [徳川実記]. 다만 그 인물 구성은 기록마다 틀려 '전국무장의 말년과 최후 - 토요토미 히데요시 편'에 잠깐 이름이 나온 이타자카 보쿠사이[板坂 卜斎]의 메모[板坂卜斎覚書]에는 이케다 테루마사가 빠지고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가 있으며, 미츠나리를 습격한 무장 일곱명에게 보낸 편지인 [윤3월5일자 이에야스의 편지(閏三月五日付家康書状)의 수신인은 이케다 테루마사, 카토우 요시아키가 빠지고 대신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 家正],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가 포함되어 있다. [본문으로]
  5. 양자. [본문으로]

 쿄우토[京都]의 산쥬우산켄 당[三十三間堂] 앞에 요우겐 원[養源院]이라는 절이 있다. 사람들은 요우겐 원 본당의 천장을 일컬어, ‘혈천정[血天井]’이라고 하다. 기분 나쁜 흑색으로 천장에 늘러 붙은 혈흔 – 그것이 장렬한 낙성을 보여준 후시미 성[伏見城]의 수비장수 토리이 모토타다[鳥居 元忠]와 그의 사졸들이 흘린 피였던 것이다.

 절의 역사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절은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측실 요도도노[淀殿]가 망부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하였지만 나중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각주:1] 요도도노의 동생이며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의 부인 수우겐인[崇源院][각주:2]이 재건한 것이라고 한다.[각주:3] 재건할 때 에도 막부[江戸幕府]는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이 세웠던 절을 재건시킬 수 없다고 하자, 후시미 성에서 전사한 토리이 모토타다 들의 혈흔이 새겨진 후시미 성의 마루바닥을 요우겐 원의 천장으로 하여 모토타다 들의 명복을 빈다는 명목으로 세웠다고 한다.[각주:4]

 세키가하라 결전[関ヶ原の戦い]의 전초전 격으로 치러지고 낙성된 후시미 공방전이야 말로 미카와 무사[三河武士]의 본질을 잘 알려주는 전투였다. 의리 있고 완고하며 주군을 위해서는 온 몸을 바친다. 그러한 미카와 무사의 전형을 후시미 성의 수비장수 토리이 모토타다가 농성전에서 보여준 것이다.

 토리이 모토타다는 부친 이가노카미 타다요시[伊賀守 忠吉][각주:5]의 아들로, 토쿠가와 가문[徳川家=당시엔 마츠다이라 가문[松平家]]을 대대로 섬겼다는 가문[普代]에서 태어났다. 모토다다는 13살 때부터 3살 연하인 이에야스[家康]를 근시(近侍)하였다.

 미카와 무사 모토타다의 충섬심에 대한 일화가 있다.
 어느 땐가 이에야스가 모토타다에게 몇 번 모토타다의 공적을 상찬하는 표창장[感状]을 주려고 하자 모토타다는,
 “표창장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려 다른 가문에 취직할 때 이력서로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토쿠가와 가문과 운명을 함께 하는 것 말고 다른 생각을 가진 적이 없기에 그러한 표창장은 저에겐 휴지쪼가리나 마찬가지입니다.”
 고 거절하며 받지 않았다고 한다.

 비슷한 이야기로, 히데요시[秀吉]가 모토타다에게 조정의 관직을 주력 하자 모토타다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뭘 하건 서투르기에 이군(二君)에게 충성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거기에 미카와에서 자란 시골뜨기라 역시 뭘 하건 투박하여 도저히 관위를 얻어 전하(=히데요시)의 앞에서 어떤 실수를 할 지 모르옵니다. 부디 관위에 관해서는 생각을 거두어 주시길.”
 하고 완고히 사퇴하며 받지 않았다고 한다. 즉 정중하면서도 히데요시에 대한 접근을 거부한 것이다.

 모토타다의 경우 이러한 의리 있는 모습, 완고함은 자신의 주군 이에야스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1580년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 측의 타카텐진 성[高天神城]을 공격하였을 때, 격전을 치른 뒤 모토타다의 부대는 험한 산길에 본진을 두게 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보급부대가 오지 않았다. 병사들은 계속 된 격전에 피로와 굶주림으로 지쳐갔다. 그러던 중 모토타다에게 한 병사가 밥을 한 상 차려왔다. 부근의 민가를 돌아다니며 조달해 온 것이었다. 모토타다는 병사의 얼굴을 보고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있었으나 행여라도 싶어 보급대가 도착하였는지, 병사들은 밥을 먹었는지 물어보았다. 대답은 역시 아니라고 하였다. 모토타다는 말했다.
 “장수인 자가 병사들과 함께 고생도 하지 않고 무슨 전공을 얻을 수가 있겠는가? 지금 식량이 없다면 너희 병사들과 함께 굶어 죽는 것이 내가 바라는 바이다.”
 고 말하며 차려온 밥상을 눈 앞의 절벽으로 던져버렸다고 한다.

 1600년 5월 17일. 이에야스가 아이즈[会津]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토벌하기 위해 동쪽으로 가기 전날이었다. 중간에 후시미 성에 들른 이에야스는 이미 62세가 된 모토타다를 불러, 자신이 부재 중 후시미 성의 수비장수로 임명하였다.
 이미 이에야스는 자신이 동쪽으로 떠나면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이 거병할 것이라는 것을 간파하여 오히려 그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때 이 후시미 성은 사방에서 이시다 측에게 포위되어 고성(孤城)이 될 것이다. 그런 희생양을 부탁할 수 있는 인물이 있다면 토리이 모토타다 말고는 없다고 이에야스는 생각한 것이다.
 모토타다는 이에야스에게 수비장수에 임명되었을 때 자신이 이시다 측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라는 것을 있었다. 그리고 이에야스가,
 “수비장수의 역할은 힘들 것이네. 수비병도 많이 남기지 못하여 고생할 테이지만…”
 하고 말을 꺼내자,
 “지금은 아이즈로 출병하는 것이 가장 중대한 일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한 부대라도 많이 데려가시길”
 하고 답하며 모토타다와 함께 후시미 성의 수비역할을 맡게 된 나이토우 이에나가[内藤 家長], 마츠다이라 이에타다[松平 家忠]들도 아이즈로 데려가길 바란다며 반대로 이에야스에게 부탁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이에야스라도 이것까지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날 밤. 이에야스와 모토타다는 술을 마시며 어렸을 적 추억 등[각주:6]을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으로 모토타다가,
 “만약 이시다의 거병 등이 있다면 오늘 밤이 이번 생의 마지막이옵니다.”
 고 인사를 하고 물러나는 모토타다의 뒷모습을 보며 이에야스는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고 한다.

 예상대로 한 달이 지나자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거병하여 곧바로 후시미 성 공격에 나섰다. 공성군 총세 4만에 수비하는 병사는 2000미만[각주:7]이었다. 누가 보아도 낙성은 시간의 문제였다. 그러나 성 수비병의 사기가 높아 10일간의 포위공격이 이어져도 여전히 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이때 공격군 속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가 휘하의 코우가[甲賀] 출신자를 이용하여 그의 일족으로 성안에서 수비를 하고 있던 자에게 내응하도록 만들었다. 만약 응하지 않으면 고향에 있는 너의 부인이나 아들을 전부 죽이겠다고 협박한 것이다.

 그리하여 내응자가 지른 불로 성안에 불이 나 혼란에 빠지자 공격군이 단번에 성 안으로 진입했다. 세 번째 성관[三の丸]의 수비장인 마츠다이라 이에타다, 서측 성관[西の丸]의 수비장인 나이토우 이에나가도 연달아 전사하여 남은 것은 본성[本丸]의 토리이 모토타다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모토타다는 마지막까지 할복을 거부, 적병을 한 사람이라도 많이 죽이기 위해 계속 분전했다. 하지만 얼마 안가 62세의 노구에 피로가 쌓였다. 지친 모토타다는 나기나타[薙刀]를 지팡이 삼아 계단에 앉아있을 때 적 사이카 마고이치[雑賀 孫一][각주:8]가 그 목을 베었다고 한다.

도리이 모토타다[鳥居 元忠]
1539년 생. 토쿠가와[徳川]를 대대로 섬긴 집안 출신. 아네가와 전투[姉川の戦い]에서 공을 세웠고, 미카타가하라 전투[三方ヶ原の戦い] 때 발에 부상을 입어 절름발이가 되었다고 한다. 혼노우지의 변[本能寺の変] 뒤 카이[甲斐]에서 호우죠우 우지카츠[北条 氏勝][각주:9]의 부대를 격파[각주:10]하여 카이 군[甲斐郡] 안에 영지를 하사[각주:11]받았으며, 이에야스칸토우[関東]로 이봉(移封) 됨에 따라 시모우사[下総] 야하기[矢作] 4만석에 봉해졌다.[각주:12]

  1. 1619년. [본문으로]
  2. 2011년도 NHK 대하드라마 주인공 오고우[お江]. [본문으로]
  3. 1621년. [본문으로]
  4. 요우겐 원 뿐만이 아니라 후시미 성의 혈천정은 여러 곳에 남아 있다. [본문으로]
  5. 소설 ‘대망’에서, 인질시대의 이에야스가 조상의 성묘를 핑계로 오카자키에 잠깐 들렸을 때, 타다요시는 자신의 집 창고에 이마가와 가문 파견 무장들의 눈을 피해 쌀과 돈, 무구 등을 축적하여 보여주며 다시 이 성의 주군이 되었을 때 쓰라며 미카와 무사들의 와신상담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에 나오는 그 인물. [본문으로]
  6. 모토타다는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에 인질로 잡혀있을 때 함께 순푸[駿府]에 있었었다. 또한 이에야스는 같이 놀다 맘에 안 들어 모토타다를 발로 찼다는 일화도 있다. [본문으로]
  7. 처음엔 약 1800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이에야스의 정무소였던 오오사카 성[大坂城] 서측성곽[西の丸]를 지키던 사노우 츠나마사[佐野 綱正]와 휘하 600명이 모우리 가문[毛利家]에 쫓겨 후시미로 왔고, 이에야스의 오우미의 영지 코우가 군[甲賀郡]의 호족 - 이 들중 하나가 나중에 서군과 내통 - 들이 입성하여 후시미 성의 수비군은 총 2500~3000 사이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이 사이카 마고이치는 스즈키 시게토모[鈴木 重朝]로 알려져 있다. 나중에 미토 토쿠가와 가문[水戸徳川家]에 임관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9.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의 맹장 호우죠우 츠나시게[北条 綱成]의 손자. [본문으로]
  10. 호우죠우 1만에 대하여 미즈노 카츠나리[水野 勝成]와 함께 2000여를 이끌고 기습하여 승리. 이에야스는 “이 땅은 자네가 무용으로 취한 땅이니 앞으로도 이 땅을 다스려라” [본문으로]
  11. 사족으로 이때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에야스가 타케다[武田]의 명장 바바 노부후사[馬場 信房]의 딸을 찾아서 데려오라고 하자 모토타다는 찾을 수 없다며 보고했다. 나중에 어떤 이가 이에야스에게 노부후사의 딸이 있는 곳을 보고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모토타다가 데리고 있다고 하였다. 이에야스는 “모토타다 녀석 빈틈이 없구만”이라고 웃어 넘겼다고 한다. 모토타다는 그녀와의 사이에서 3남1녀를 낳았다. [본문으로]
  12. 토쿠가와 삼걸인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12만석,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10만석,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 10만석에 이어 오오쿠보 타다요[大久保 忠世]와 같은 4만석. [본문으로]

 야마우치 카즈토요[山内 一豊]라고 하면 부인의 내조를 받은 에피소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카즈토요가 아직 이에몬[猪右衛門]이라는 이름으로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던 하급무사였을 때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아즈치[安土]의 성 아래에 동국(東國)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말(馬)을 팔러 온 사람이 있었다. 오다 가문의 무사들은 누구나가 그 말을 보고 경탄하였지만 그런 만큼 비쌌기에 아무도 사질 못하였다. 카즈토요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기는커녕 자신과 부인 둘의 생활조차 근근한 처지였다.
 카즈토요는 한숨을 쉬면서 집에 돌아와서는,
 “가난하다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로군. 저렇게 멋진 말이 있다면 노부나가님의 열병식 때 멋진 모습을 보여 드릴 수 있을텐데…”
 하고 혼잣말을 하였다.
 이를 곁에서 부인 치요[千代]가 듣고
있었다. 치요는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이내 그 말의 가격이 황금 10냥[각주:1]라는 것을 카즈토요에게 듣고서는,
 “그렇다면 이 돈으로 그 말을 사십시오”
 라고 말하며 화장대 밑에서 황금 10냥를 꺼내 카즈토요에게 주었다.
 카즈토요는 놀랐다. 지금껏 빈곤했는데 이런 큰 돈이 어디서 생긴 것이냐고 묻자 치요는,
 “이 돈은 제가 시집올 때 아버님에게 ‘평소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 너의 남편에게 아주 큰일이 생겼을 때만 사용하거라’하면서 주신 돈입니다. 열병식이라면 주군 노부나가님을 시작으로 많은 분들의 눈에 띌 좋은 기회겠지요. 어서 그 명마를 사시옵소서”
 라고 말하였다. 카즈토요는 매우 기뻐하며 곧바로 그 말을 사러 갔다.
 
얼마 후 쿄우토[京都]에서 열병식이 성대히 치러졌다. 그리고 카즈토요의 말은 당연히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노부나가도 경탄을 하여[각주:2], 이를 계기로 카즈토요는 출세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고 한다.[각주:3]

 이 에피소드는 에도시대[江戸時代] 중기에 기술된 몇몇 사료에 실려 있기에 시대성에서 본다면 ‘좋은 부인의 모범’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의 여성을 이러한 유교론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치요는 센고쿠의 여성이 보여주는 억척스러움과 강인한 정신을 겸비한 인물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덧붙여 치요의 내조에 대해서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한다.
 카즈토요가 결혼하였을 때 카즈토요는
오우미[近江] 카라쿠니[唐国]에 400석[각주:4]영지를 얻었지만 빈곤하여 집에 도마조차 없어 치요는 되를 뒤집어 대신 사용하였다.[각주:5]
 또한 당시 카즈토요가
히데요시[秀吉]에게 배속되어 히데요시에게 축성의 감독을 명령 받았지만, 가난하여 인부들의 야식도 대접하지 못하자 치요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팔아 쌀을 사 와서 카즈토요의 면목을 세웠다고 한다.

 카즈토요는 히데요시의 휘하로 각지를 전전하였지만 특별한 전공을 세우지는 못했다. 그러나 용맹심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1573년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 토벌전 때 패주하는 아사쿠라의 군세를 추격하여 오다 군[織田軍]이 에치젠과 오우미[近江]의 국경에 있는 토네자카[刀根坂]에 이르렀다. 이때 아사쿠라 군의 후군[殿]에 미타자키 칸에몬[三段崎 勘右衛門]이라는 활을 잘 쏘는 무장이 있어, 오다 군은 그 활 때문에 쉽사리 진격을 못하고 있었다. 거기에 카즈토요가 창을 꼬나쥐고 단숨에 돌격하였다.
 진에몬은 자랑하는 활을 쏘았다. 화살은 정확히 카즈토요의 볼을 꿰뚫어 어금니까지 파고들었다. 그러나 카즈토요는 그대로 진에몬에게 달려들어 뒤엉켰고 아군의 도움으로 진에몬을 죽였다.

 어쨌든 카즈토요는 히데요시 아래서 순조롭게 출세하여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때의 공으로 카케가와 성[掛川城] 5만석의 성주로 봉해졌다. 카즈토요가 카케가와에 봉해진 것은 칸토우[関東]에 봉해진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감시하며 만일의 경우가 있을 때는 이에야스를 방비하려는 히데요시의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카즈토요는 자신이 배속되어 있던 칸파쿠[関白] 히데츠구[秀次]가 난행을 이유로 할복을 명령 받은 다음부터는, 오히려 이에야스의 수완에 장래를 맡기려는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다. 즉 카즈토요는 히데츠구 사건의 전말을 보고 히데요시 정권의 종말을 느끼게 된 것이다.

 1600년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토벌을 위한 이에야스의 군세 속에 카즈토요의 모습이 있었다.
 7월 24일
시모츠케[下野] 오야마[小山]에 이르렀을 때, 카즈토요에게 오오사카[大坂]에 있는 치요에게서 편지가 도착했다. 거기에는 오오사카 측의 봉행[奉行]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와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의 이름으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거병과 자기들 편에 참가를 요청하는 편지 한 통, 거기에 카즈토요에게 직접 보낸 편지에는 ‘이에야스에게 충성을 다해 주십시오, 제 몸은 걱정하지 마십시오’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카즈토요는 이 두 통의 들어간 상자의 봉인을 뜯지 않은 채 이에야스에게 제출하였다.
 사실 카즈토요는 이것과는 따로 또 한 통의 밀서를 치요에게서 받았던 것이다. 그것은 전령인 타나카 마고로쿠[田中 孫六]의 삿갓에 숨겨져 있던 것으로 치요의 의견이 담겨 있었다. 카즈토요는 다 읽은 뒤 곧바로 불살랐지만, 추측하건대 편지가 담긴 상자의 봉인을 풀지 말고 그대로 이에야스에게 제출을 권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곧바로 ‘오야마의 군의[小山の軍議]’가 열려, 이미 넘어가버린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한 마디[각주:6]로 ‘미츠나리 타도’가 결정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카즈토요는 중대한 발언을 하였다.
 “상경하는 군세를 위해서 도중에 있는 제 카케가와 성을 군량과 함께 전부 바치겠습니다. 거기에 인질도 바쳐 저에게 두 마음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하겠습니다”
 라는 것이었다.[각주:7] 
 토우카이도우[東海道]에 성을 가지고 있던 무장들도 전부 이에 따랐다고 한다.

 이로 인해 카즈토요의 공은 단번에 여러 무장들 중 눈에 띄게 되었다. 세키가하라 결전 때 카즈토요는 그다지 전공이 없었음[각주:8] 에도 이에야스는,
 “카즈토요가 오야마에서 한 말이 세키가하라 승리의 초석이 되었다”
 며, 영지배분 때 일약 토사[土佐] 전부인 24만석[각주:9][각주:10]을 주었던 것이다.

야마우치 가즈토요[山内一豊]
1545년 오와리[尾張] 출생. 1560년 미노[美濃] 마키무라 성[牧村城]의 성주 마키무라 마사토모[牧村 政倫], 이어서 오우미[近江] 세타 성[勢多城]의 성주인 야마오카 카게타카[山岡 景隆]를 섬겼다고 한다. 그 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히데요시[秀吉]에게 배속. 1584년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 종군하여 오우미 나가하마[長浜] 5000석에 봉해지고 1년 후 2만석이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카케가와[掛川] 5만석에서 토사[土佐] 24만석이 주어졌다. 1605년 61세로 죽었다.

  1. 당시 보통 말은 1냥, 좋은 말은 5냥 정도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2. 노부나가가 경탄한 것은 말 때문이 아니다. 노부나가는 카즈토요가 치요가 건네 준 돈으로 말을 산 것을 듣고 말하길 “동국 제일(東国第一)이라는 말을 상인이, 천하에 오다 가문만이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이리도 먼 내 영지까지 끌고 와서 팔려 했는데도 아무도 사지 않았다면 안타까운 일이며 이는 노부나가의 부끄러움이기도 하다. 그러던 때 오랫동안 낭인이었다는 카즈토요가 가난했음에도 말을 샀다. 무사의 마음가짐은 이래야 함이다.”고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수상한 점이 많다. 당시 열병식이 열린 시기는 서력 1581년. 당시 카즈토요는 기록에 따라 다르다고는 하나 츄우고쿠[中国] 등에서의 활약으로 최대 2700석의 신분이었다. 당시 황금 10냥으로 대략 쌀을 140석 정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치요하고 카즈토요가 과소비하지 않는 한 살 수 있었단 이야기. 무엇보다 1581년 열병식 때 히데요시와 히데요시 휘하의 무장들 즉 카즈토요는 츄우고쿠[中国] 공략에 바빠 참가를 아예 못하였고, 노부나가 역시 참가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본문으로]
  4. 1573년 아사쿠라 침공전[朝倉攻め] 때 에치젠[越前]의 호걸 미타자키 칸에몬[三段崎 勘右衛門]을 부상 당하면서도 쓰러뜨린 공적으로. [본문으로]
  5. 링크는 당시의 것이 아니다. 링크의 것은 1806년 후지나미 신사[藤並神社]에 봉납된 모조품.실물은 2차대전 때의 공습에 불에 타 없어졌다고 한다. 크기는 종횡17cm * 17cm에 높이 8cm라고 한다. [본문으로]
  6. 대충 '나이 어린 히데요리가 이에야스 토벌을 명령 할리 없다. 이는 미츠나리가 사사로이 거병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7.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의 번안보[藩翰譜]에 따르면, 이에야스에게 성과 쌀을 바치는 것은 원래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의 아들이며 당시 하마마츠 성[浜松城]의 성주였던 호리오 타다우지[堀尾 忠氏]가 친했던 카즈토요에게 이야기했던 것을 카즈토요가 타다우지가 말하기 전에 말한 것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아이디어 도용이라 할 수 있다. 여담으로 도용 당한 타다우지는 카즈토요에게 “평소 성실한 당신과는 어울리지 않는군요”라면서 웃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8. 당시 카즈토요의 부대는 난구우 산[南宮山]에 진을 친 모리 가문[毛利家]에 대한 대비책으로 전선 후방에 놓여 있었다. 결국 모우리 가문은 움직이지 않았고 그랬기에 카즈토요의 부대도 피 흘리지 않았다. [본문으로]
  9. 실제로는 9만 8000석. 나중엔 1605년 카즈토요가 제출한 영지 목록에 20만 2600석으로 이후 이것이 막부 공인이 됨. [본문으로]
  10. 24만석이 나온 숫자는, ‘쵸우소카베 영지조사장부[長宗我部地検帳]’에 토사[土佐]의 농작면적이 2만 4000정(町)으로 나와있는데 단순히 1반(反=1/10정(町))을 1석(石)으로 하여 24만석이 속설로 된 것으로, 1705년 번(藩)이나 다이묘우[大名], 하타모토[旗本] 등을 다룬 백과사전격인 '무감(武鑑)'부터 이렇게 나왔다고 한다. [본문으로]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

1585 4 16 병사 51

1535 ~ 1585.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겼고 각지에 종군하며 공을 세워 오우미[近江] 사와야마[佐和山], 이어서 와카사[若狹]를 하사 받았다. 혼노우지의 변[本能寺の変]이 일어나자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 합류하여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쳤으며 키요스 회의[淸州会議]도 출석. 시즈가타케 전투[岳の戦い]에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와 싸웠다.









노부나가의 사위가 된 부자(父子)


 니와 나가히데가 오다 노부나가의 사위라는 것은 이외로 알려져 있지 않다.
 
나가히데는 노부나가보다 1년 늦은 1535년에 태어났으며 아명은 만치요[万千代]였다. 15세에 노부나가를 가까이서 모시며, 1552년 키요스[淸州] 성주인 오다 히코고로우[織田 彦五郞]의 가재(家宰[각주:1])인 사카이 다이젠[坂井 大膳]을 물리친 카야츠 전투[
萱津の戦い] 그의 첫 데뷔전이라 한다.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桶狹間の戦い]에도 종군했다고 한다.


 1563년.

 노부나가의 양녀(부친은 노부나가의 배다른 형인 노부히로[信広])를 처로 맞이하는데 이것은 나가히데의 능력을 노부나가가 인정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주군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인다는 것은 가신에게 있어 파격의 대우임과 동시에 일문(一門)에 준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 후 노부나가의 전선 확대와 더불어 각지에 종군했으며, 1571년에는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 공략의 중요 거점이었던 오우미의 사와야마 성주가 되어 오우미 지배에 관여했다.


 1581 2월.

 황거의 동쪽 마장에서 행해진 열병식[각주:2]에서는 오다 가신단 중 최초로 등장. 셋츠[摂津], 와카사[若狹]의 무사들을 이끌고 행진하는 명예가 주어졌다. 이것은 바로 전 해인 1580노부나가의 딸과 나가히데의 아들 나가시게[長重]의 결혼이 성립된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보이며, 나가히데가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의 추방 후 오다 정권에서 가장 유력한 무장 중에 한 명인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예일 것이다. 부자 2대에 걸쳐 노부나가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한 예는 니와 씨[丹羽氏]말고는 없다.


 혼노우지의 변 직후에는 하시바 히데요시들과 역신(逆臣)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하였고, 오다 가문의 당주 결정을 둘러싼 소위 키요스 회의에서는 히데요시를 도와 산포우시[三法師-노부나가의 큰아들인 노부타다[信忠]의 아들]를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정했다. 그리고 히데요시, 나가히데, 시바타 카츠이에,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의 숙노(宿老) 4명이 앞으로의 일처리를 행하기로 했다.


 1583 시바타 카츠이에의 멸망 후에는 그의 거성이었던 키타노쇼[北ノ庄]성이 주어져 에치젠[越前], 와카사[若狹], 카가[加賀]의 남부(南部)를 손에 넣어 백 만여석을 소유했다.


망령 퇴치의 기도 의뢰


 1585 4월.

 나가히데는 키타노쇼 성[北ノ庄城]에서 병상에 누었다. 같은 달 4 쿄우토[京都] 요시다 신사[吉田神社]의 신관[神主] 요시다 카네미[吉田 兼見]에게 나가히데의 가신 사타케 데와노카미[佐竹 出羽守]가 편지를 보내왔다. 용건은 나가히데가 병을 앓고 있으며 특히 요 근래는 더욱 심해졌으니 나을 수 있도록 신에게 빌어달라는 의뢰였다.

 편지에는 발병의 원인으로 시바타 카츠이에의 망령이 내린 저주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적혀있었다. 카츠이에는 나가히데와는 동급의 무장이었지만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나가히데는 카츠이에의 권유를 거부하고서 히데요시의 편을 들었기에 당시 이러한 소문이 그럴듯하게 퍼져 쑤군들 대었던 것 같다.


 4 9일.

 키이[紀伊] 사이카[雑賀]를 공격하는 도중에 나가히데가 병상에 누웠다는 소식을 들은 히데요시는 곧바로 당대의 명의(名醫)인 타케다 죠우카[竹田 定可]에게 키타노쇼성으로 가서 나가히데를 치료하도록 의뢰했다. 그러나 죠우카는 곧바로 가지 않은 듯 히데요시는 12일에 다시 가도록 요청할 정도였다.

 13일에 히데요시는 나가히데에게 편지를 보내 위로를 함과 동시에 쿄우토[京都]로 와서 많은 의사들에게 치료를 받도록 권했다.


 하지만 다음 날인 14일.

 나가히데는 병이 더 심해진 것을 깨닫자 세자인 나가시게(14)를 시작으로 친척들과 중신을 머리맡에 불러 어린 나이의 나가시게를 잘 보좌하여 나라를 지킬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같은 날. 가신인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에게 명하여 히데요시에게 보내는 유서를 쓰게 하였다. 유서에는 평소 히데요시에게 은혜를 받은 것을 감사히 여기며, 3개국이나 되는 영지(領地)를 받았으면서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이 죄송하다고 말한 후 후계에 대한 것은 히데요시의 뜻에 맡기겠다고 했다. 이 서장에 [히데요시님(秀吉)]이라 쓰인 것이 인상적이다. 죽음을 앞둔 나가히데로써는 천하인이 되고 있는 히데요시에게 니와 가[丹羽家]의 앞 날을 맡긴 것이다.


죽음을 둘러싼 기괴한 소문


 4 16일.

 나가히데는 51세의 나이로 생의 막을 내리는데 나라[奈良]의 승려 타몬인 에이슌[多聞院 英俊]의 일기에 따르면 나가히데는 병사하는 것이 분하다고 한탄하면서 14일에 할복하여 결국 16일에 죽었다고 쓰고 있다.

 또한 일설에 의하면, 나가히데는 평소부터 담석을 앓고 있어서 고통을 참지 못하고 할복했다고도 전해지는등 기괴한 소문들이 떠돌았다.


 나가히데가 죽은 뒤 나가히데의 세력을 세자인 나가시게가 이어받았지만 영지는 천하인 히데요시에게 차츰 깎여,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 직전에는 단지 카가[加賀]에 12만 여석을 지배하는 하는 정도로 몰락했다. 또한 나츠카 마사이에, 미조구치 히데카츠[溝口 秀勝] 등 유능한 가신들도 곧바로 히데요시 자신의 가신단에 편입시키는 등 니와 씨의 명운은 나가히데의 생각과는 반대로 히데요시에게 유린된 감이 있다.

  1. 그 가문의 재상 [본문으로]
  2. 京都御馬揃え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