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모토 칸스케는 이노우에 야스시[井上 靖]의 명작 '풍림화산(風林火山)'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하지만 그 실존성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어, 이 인물을 가공의 무장으로 치부해 버리는 사가(史家)도 적지 않았다.
그가 일반에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갑양군감(甲陽軍鑑)'이 처음이었으며, 이 갑양군감 외에 사료성이 높은 고문서류에는 칸스케의 이름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갑양군감'은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 카츠요리[勝頼] 2대에 걸쳐 일어난 사건이나 코우슈우[甲州]군의 군법이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에도 시대 초기의 병법학자 오바타 카게노리[小幡 景憲]가 썼다고 한다. 굉장히 창작성이 짙은 책이라는 것이 통설이었다.
그러나 근년이 되어 갑자기 칸스케의 실존성이 강해졌다. 그것을 증명한다고 보여지는 고문서가 발견된 것이다. 홋카이도우[北海道] 쿠시로 시[釧路市]의 이치카와 가문[市川家]에서 타케다 신겐의 서장(書狀)이 발견된 것이다. 이치카와 가문의 선조는 나가노 현[長野県] 시모타카이 군[下高井郡]에 카마쿠라 시대[鎌倉時代]부터 토착했던 호족으로, 키소 요시나카[木曽 義仲]부터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에 이르기까지 고문서 150여 점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타케다 신겐의 서장은 – 신겐이 시나노[信濃] 노자와[野沢]의 이치카와 후지와카[市川 藤若]라는 호족에게 보낸 것으로, 이 문서의 말미에 '야마모토 칸스케(菅助)의 입으로 전한다'라는 문장이 있다. 칸스케[菅助]가 정확하게 칸스케[勘介]라면, 칸스케는 이 때 근습(近習)의 한 사람으로써 신겐의 명령으로 중요한 사자(使者)의 임무를 맡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덕분에 '갑양군감(甲陽軍鑑)'의 사료적 가치도 최근 역사 사료로써 재평가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 한다.
'갑양군감'에 따르면 - 칸스케의 출신은 미카와[三河]의 우시쿠보[牛窪]로, 축성술과 군법의 오의(奧義)를 깨달았으며 또한 무예도 뛰어났다고 한다.
스루가[駿河]의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를 섬기려다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칸스케는 추남에 외눈으로 거기다 손가락도 열 개가 안 되며 절름발이였기에,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에서는 그 때문에 쓰임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반대로 타케다 신겐의 흥미를 끌었다. 신겐은 “피부도 검고 그렇게 추남이면서도 명성이 높은 것은 정말로 능력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라면서 타케다 가문에 불러들였다고 한다. 그야말로 신겐다운 에피소드라 할 수 있다.
신겐의 부하 장수인 이타가키 노부카타[板垣 信形]가 천거하였다고도 하는데, 어쨌든 칸스케는 200관의 봉록이 주어졌다. 신겐 23세로 칸스케는 이미 중년을 넘긴 나이였다고 한다.
그 생애의 정점에 달한 전투는 1561년 가을의 카와나카지마 전투[川中島の戦い]였다.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이 타케다의 본진으로 돌격해 와 신겐에게 칼을 퍼부었다는 것으로 유명한 격전이었다.
이 전투는 1만3천의 병사를 이끌고 시나노[信濃]로 쳐들어 온 켄신이 타케다의 전선기지 카이즈 성[海津城]과 지근거리인 사이죠산 산[妻女山]에 진을 치면서 시작되었다.
곧바로 타케다 군도 카이에서 원군을 이끌고 카이즈 성에 입성하였다.
쌍방은 대치한 채 시간이 흘러, 9월 9일에 이르자 신겐은 회의를 열어 타개책을 강구하였다.
우선 숙련된 장수인 오부 효우부 토라마사[飯富 兵部 虎昌]가 정면승부를 하여 자웅을 겨루자고 주장하자, 바바 민부 노부후사[馬場 民部 信房]도 쌍수를 들어 그 의견에 찬성하였다.
하지만 상대는 지금이야 말로 자웅을 겨루자고 침공해 온 군신(軍神) 우에스기 켄신이었다. 그래서 야마모토 칸스케의 계략의 채택되었던 것이다.
칸스케의 작전은,
“타케다 군 2만의 군세를 둘로 나누어, 1만2천의 별동대로 내일 새벽 6시를 기하여 사이죠산를 기습한다. 그러면 우에스기 군은 놀라 치쿠마가와 강[千曲川] 건너편 평원인 카와나카지마[川中島]로 퇴각할 것이다. 거기에 미리 카와나카지마에 숨겨놓은 8천의 본대가 급습하여 앞뒤에서 협격하면 적은 혼란에 빠져 우리 군은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는 것이었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딱따구리 전법[啄木鳥の戦法]'이라고 한다. 딱따구리는 나무의 벌레를 잡기 위해서 구멍 반대쪽을 쪼아 벌레를 놀라게 하여 구멍으로 나왔을 때 잡는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뛰어난 칸스케의 지략도 군신 켄신의 혜안에는 미치지 못했다.
9일 저녁.
눈 아래 보이는 카이즈 성에서 피어 오르는 무수한 밥짓는 연기를 보고 카이[甲斐] 군의 작전을 간파한 것이다.
켄신은 전군을 이끌고 밤중에 은밀히 사이죠산을 내려와 다음날 10일 새벽, 카와나카지마 하치만바라[八幡原]의 카이 군 본대를 급습한 것이었다. 우에스기 군세는 질풍과 같이 타케다 본영을 맹공격하여 한때는 신겐도 위기에 처했지만, 오후가 되어 나타난 산에 올라갔던 타케다의 별동대 출현으로 상황은 반전되었다.
이 때, 이미 칸스케는 작전의 실패를 부끄러워하여 적진으로 돌격하여 전사한 상태였다.
그 목은 수하의 병사가 난전 속에서 다시 탈취하였지만 몸통은 치쿠마가와 강을 떠내려가 하류의 강변에 쌓여있었다. 그 적과 아군의 구별이 가지 않는 수 많은 시체더미에서 부하들은 결국 찾아내어 묻었다고 한다.
현재 카와나카지마 테라오[寺尾]라는 곳에 도우아이하시[胴合橋]라는 조그만 다리가 있는데, 이곳이 그 장소라 전해지고 있다.
또한 에도 시대에 쓰여진 어떤 책에는 - 명군사인 그도 미관말직의 일개 검객으로 등장하며, 타케다 가문의 부장(部将)인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 昌景]의 부하였다고 한다. 카와나카지마 전투에서는 단순한 척후의 임무를 맡고 있었던 것에 불과하며, 어쩌다 마사카게에게 보고하고 있는 모습이 신겐의 눈에 띄어, “저 자는 뭐 하는 녀석인가?”라고 물어보았을 뿐이라고 한다.
어쨌든 아직 평가가 분명하지 않은 수수께끼의 무장이다.
[야마모토 칸스케(山本 勘介)]
미카와[三河] 출신으로 이름을 ‘하루유키[晴幸]’라고 하며, 출가 후 ‘뉴우도우 도우키[入道 道鬼]’. 신겐은 바바 노부후사[馬場 信房] 등에게 명하여 칸스케에게 군법을 배우게 하였다고 한다. 1561년 카와나카지마에서 전사했을 때는 69세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