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학습연구사[学習研究社, Gakken] [역사군상-유럽전사 시리즈 Vol.12 독일장갑부대전사2]의 p134~p139에 실린 군사평론가 노기 케이이치[野木 恵一]씨의 글을 번역한 글입니다. 또한 사진등은 위키피디아의 해당 항목의 것을 참조하였습니다.

연비가 좋고 피탄 당하여도 폭발할 위험이 적은 디젤 엔진. 이렇게 전차(戰車)에 적합한 동력기관의 발명자는 독일인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독일은 전차에 폭발하기 쉬운 가솔린 엔진을 계속 사용했다. 이런 기술사(技術史)적 의문에 다가서 보자.

발명가의 죽음

 1913년 9월 29일 밤.
 벨기에에서 영국으로 향하던 배에서 한 사람의 독일인이 사라졌다. 자신의 발명품이 세상에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좌절과 인간관계, 빚 문제와 같은 스트레스로 바다에 뛰어들었을 거라 추측된다. 그러나 그의 발명이 타국의 손에 건네지는 것을 막고자 독일 정보기관이 살해했다고 추리하는 사람도 있다.

 발명가 루돌프 디젤. 그의 발명품이라는 것은 새삼 말할 것도 없이 디젤 엔진이다.
 확실히 디젤의 엔진은 그가 죽은 다음 해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 U보트에 사용되어 그 우수성을 알렸기에, 그의 조국 독일은 디젤 엔진의 기술이 가상적국 영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두려워했다고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독일정부가 암살하려고 할 정도로 루돌프 디젤의 발명을 높게 평가했다면 그가 스트레스 받을 정도로 몰리지 않았을 것이며 일부러 외국까지 자신의 발명품을 팔러 갈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역시 암살설은 근거가 부족하다.(디젤 암살설은 경향 신문의 이 기사를 참조)

 디젤의 죽음(향년 55세)은 너무 빨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71살에 죽은 부친만큼 살았다면 자신의 발명품이 잠수함이나 기관차, 자동차나 비행기에 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디젤의 엔진은 그의 사후 20여 년 지나자 전차에도 실리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디젤 엔진을 전차에 채용한 것은 조국 독일이 아니었다. 그것을 실현시킨 것은 그의 조국과 싸우게 되는 소련이었으며, 먼 동양의 나라 일본이었다. 그의 모국 독일이 디젤 엔진을 사용한 제식 전차는 2차대전이 끝난 후인 레오파르트 1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디젤의 모국 독일은 어째서 디젤 엔진을 전차에 채용하지 않았는가? 이는 이외로 맹점을 찌른 의문일지도 모른다.

열효율을 추구하며

 루돌프 크리스티안 칼 디젤(Rudolf Christian Karl Diesel)의 조부나 부친은 제본공(製本工)이었다. 부친 테오도르(Theodor) 때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프랑스로 이주하였다. 테오도르는 파리에서 독일상인의 딸 엘리세(Elise)와 만나 결혼해서 루돌프와 두 딸을 두었다.

 디젤 일가는 1870년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외국인이라 추방된다(프랑스와 프로이센간의 전쟁이 원인). 루돌프는 가족과 떨어져 아우크스부르크의 친척집에 맡겨져 독일에서 교육을 받게 된다. 모국 독일에서 그는 엔지니어가 되는 꿈을 꾸며 우수한 성적으로 뮌헨 공과대학에 진학, 1880년에는 뮌헨 공과대학 사상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다.

 처음에는 은사의 추천으로 냉장고 회사에 취직하였고 프랑스어를 할 수 있었기에 프랑스 지점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883년 파리에서 살던 독일여성 마르타(Martha Flasche)와 결혼. 이를 계기로 회사를 관두고 발명가, 기술 컨설턴트로 살아가는 길을 택한다. 디젤은 대학시절부터 효율이 좋은 내연기관 발명에 깊은 흥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내연기관의 이론적 근거는 1824년 프랑스의 니콜라 레오나르 사디 카르노가 발표하였다. 또한 독일의 니콜라우스 오토는 1876년에 카르노가 제시한 기관(4사이클 엔진)을 실제로 제작하였다. 1883년 독일의 고틀립 다임러빌헬름 마이바흐가 니콜라우스 오토의 엔진에 개량을 더하고 연료에는 가솔린을 채용하였다. 이것이 가솔린을 연료로 하는 엔진의 원형이 되었다.

 그러나 니콜라우스 오토의 엔진은 14%의 열효율(발생한 전 에너지 중 유효하게 사용할 수 있는 비율)밖에 발휘하지 못하였고, 다임러의 엔진조차 효율 18~19%로 낮았다(가솔린을 연소시켜 얻을 수 있는 열에너지 중 80%이상을 버리는 엔진. 현대의 엔진 효율은 40%정도).

 디젤이 제작한 엔진은 혼합기 대신에 공기만을 압축하여 거기에 연료를 내뿜어 연소시키는 구조였다. 단열압축하면 보일의 법칙샤를의 법칙에 따라 공기는 섭씨 수 백도의 고온이 되기에 적당한 타이밍에 연료를 내뿜는 것만으로도 점화기 없이 연소, 폭발이 일어난다. 이 때문에 디젤 엔진을 ‘압축점화기관’이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방식의 엔진은 디젤 이전부터 연구되었으나 실제로 제작에 성공한 것은 루돌프 디젤이 처음이었다. 그는 1893년에 ‘합리적 열기관의 이론과 설계’를 간행하였고, 같은 해 독일정부에서 특허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만족할 만한 엔진이 완성된 것은 1897년의 일이었다. 완성될 동안 그는 고압축비(高壓縮比)나 연료분사(고기압 하의 실린더에 연료를 넣기 위해서는 가솔린 엔진처럼 부압을 이용한 카브레터가 아니라 연료를 분사하는 장치가 필요했다. 이 인젝션이라도 부르는 장치가 디젤 엔진 개발의 가장 중요한 기술이었다)에 따른 기술적 문제 해결에 고심하였으며, 덤으로 특허소송에도 연루되었다.

 디젤의 발명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아우크스부르크 기계제작소를 이끌고 있던 하인리히 폰 부츠(Heinrich von Buz)였다. 아우크스부르크 기계제작소는 원래 인쇄기계를 전문으로 하는 기계 메이커였지만, 디젤이 아우크스부르크 출신 제본공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면 일종의 동류의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우크스부르크 기계제작소는 1898년에 뉘르베르크 기계제작소와 합병하여 아우크스부르크 뉘른베르크 기계제작소(약칭
MAN)가 되는데, 흥미롭게도 디젤의 모친은 뉘른베르크 출신이었다.
 MAN사(社)와 더불어 디젤을 지원한 것이 독일을 대표하는 철강, 병기 회사인
크룹(wiki_en)사(社)였다. 즉 디젤의 발명은 실용화 되기도 전부터 강력한 지원자를 얻었다는 것이 된다. 디젤은 엔진을 1900년 파리 박람회에 출품하여 최우수상을 받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디젤은 기업 경영감각이 떨어졌고 상업적인 재능도 없었다. 거기에 아직 디젤의 엔진은 신뢰성에도 문제가 있어 그다지 팔리지 않아 특허가 실효되는 1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연간 판매대수는 200~300대뿐이었다. 디젤은 이상가에 완고하였고 사교성이 없는 독불장군이었기에 1906년에는 MAN사(社)와 결별하고 자신이 만든 디젤사(社)에서도 쫓겨나게 된다. 거기에 더해 특허수입으로 부동산에 투기하여 거액의 빚을 지게 된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 소식불명이 된 만큼 자살이라는 추측이 자연스러웠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죽자 차츰 디젤 엔진 보급이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특허실효 후에 영국을 시작으로 한 각국이 독자적으로 디젤 엔진을 개량한 성과가 나타난 것이다.
 이런 사정을 보아도 디젤 엔진 보급에 디젤 개인의 존재는 절대적 요건이 아니었고, 기술이 영국에 넘어가는 것을 두려워 한 독일 정보기관이 그를 암살하였다는 추측도 난센스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디젤 엔진의 장점

 디젤 엔진의 장점 특히 가솔린 엔진(니콜라스 오토의 엔진)과 비교할 경우 장점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디젤 엔진의 장점은 다음 세가지가 있다.

 (1). 열효율이 높다.
 즉 같은 출력이라면 연료소비율이 낮다(연비가 좋다 = 항속거리가 길다).
 디젤 엔진의 이론적인 열효율은 50%~60%나 된다. 가솔린 엔진으로는 기껏해야 40%정도일 것이다. 물론 이론대로의 열효율이 나올 순 없었지만, 실제로 디젤 엔진은 같은 양의 연료로 가솔린 엔진보다 1.5배 더 이동할 수 있었다.

 (2). 경유 등 저가의 연료를 사용할 수 있기에 경제성이 높았다.
 가솔린 엔진은 가솔린 밖에 쓸 수 없었지만 디젤 엔진은 연료의 융통성이 높아 가솔린은 물론 알코올도 쓸 수 있었다. 루돌프 디젤은 입도가 0.5mm 이하인 석탄가루를 연료로 할 생각까지 하였다(물론 실용화되지는 않았지만).

 (3). 구조가 단순하고 튼튼하여 내구성이 높다.
 디젤 엔진은 압축비가 20전후(통상기압의 20배)나 달하기에 처음부터 튼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루돌프 디젤이 실용화하기까지 많은 실패를 거듭했던 것도 엔진 부품을 튼튼하게 제작하고 결합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런 장점을 뒤집어 보면 디젤 엔진은 무겁고 부피가 커진다는 단점이 된다.

 디젤 엔진을 전차에 채용할 경우 (1)열효율이 높다는 점은 이동거리 연장으로 이어진다. 즉 같은 양의 연료통 용적이라면 연료소비율 에 반비례하여 이동거리가 길어진다. 전차가 보병의 동반병기였을 즈음이라면 몰라도 전차가 집단으로 질주하게 되자 1회의 연료보급만으로 오래 가는 편이 좋았다.

 (2)는 연료비의 저하는 물론이고 가솔린보다도 쪽이 확보하기 쉽기에  전쟁 때도 쉽게 연료가 부족해지는 일은 가솔린에 비해 덜했다. 전쟁 때 가솔린은 항공기의 연료로 우선적으로 배당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점에서 경유라면 확보하기 쉽다.
 또한 디젤 연료(경유)는 인화점이 높아 가솔린과 같이 폭발적으로 타오르는 일이 없다. 이 때문에 전차가 피탄 당했을 시의 생존성 향상으로 이어진다.
T-34 등 소련 전차는 후부에 드럼통처럼 생긴 예비연료통을 외부에 대놓고 탑재하였다. 이는 디젤 연료였기에 가능한 것으로 만약 안에 가솔린이 들어있었다면 피해가 더 늘었을 것이다.

전차와 디젤

 처음으로 전차용 디젤 엔진을 설계한 곳은 영국의 리카도 사(社)(wike_en)이다. 4기통 액냉 슬립 밸브로 90마력의 엔진이 비커스 중전차용으로 설계되어 1927년에 탑재되었다.
 그 후
A-12 마틸다 보병전차, 발렌타인 보병전차 등에 AEC(wike_en), 레이랜드(wike_en), 제너럴 모터스(GM) 제작의 디젤 엔진이 탑재되었지만 영국 전차의 주력은 항공기용에서 전용된 가솔린 엔진이었다.

 미국에서도 M4A2 셔먼이 GM의 디젤을 탑재하였지만 대부분은 무기대여법에 따라 소련으로 보내졌고, 미육군 자신들은 실전에서 사용하지 않았다.

 2차대전 중 본격적으로 디젤 엔진을 전차에 탑재한 나라는 앞서 이야기 했듯이 소련과 일본이었다.
 소련은
피아트제의 항공기용 디젤 엔진을 연구하여 V형 12기통의 BD-2를 개발. 1933년에 BT-5 쾌속전차(wike_en)에 탑재하여 테스트하였다. BD-2엔진은 V-2엔진으로 발전하여 1939년에는 표준엔진으로 제정. KV-1 중(重)전차, T-34 중(中)전차, 스탈린 중(重)전차 등에 탑재되었다. V-2 시리즈는 개량에 개량을 거듭하여 1970년대까지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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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가장 적극적이고 조직적으로 전차용 디젤 엔진을 개발한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가솔린 확보의 불안, 화재 위험 등을 고려하여 디젤 엔진 개발을 단행하였다. 또한 중국대륙에서의 작전 중 냉각용수 확보의 어려움(냉각수에는 칼슘 등 미네랄이 적은 물이어야 했다. 우물이나 강물은 부적절)이나 냉각계통이 얼어붙을 위험(극한의 중국 동북부에서 작전행동을 고려했기 때문) 등도 감안하여 1932년부터 공냉식 디젤 엔진 개발에 들어갔다. 세계적으로도 공냉식 디젤 엔진 모델이 없어 독자적인 개발이 되었지만, 우선 직열 6기통 4사이클 디젤 엔진이 1936년 제식 채용되어 89식 중전차(을형)에 탑재되었다. 이어서 일본은 동일 실린더의 조합을 바꾸어 각종 사이즈의 엔진을 만드는 – 모듈러 사상의 선구자와 같은 4사이클 디젤 엔진 개발에 착수했다.

 통제 디젤(100식 엔진)(wiki_jp)이라 부르는 보아(내경)120mm, 스트로크 160mm의 배기량 1.8리터의 실린더를 1단위로 하고, 이것을 4본(직렬4기통)에서 최대 12본(V형 12기통)으로 조합함으로써 배기량 7.2리터에서 21.6리터의 디젤 엔진을 만드는 것이다. 최대 V형 12기통 과급기 내장 엔진의 최대출력은 300마력으로 공냉식 외에 수냉식도 있었다. 통제 엔진은 1식 중전차(치헤) 이후의 전차에 탑재되었다.

 패전으로 인해 일단 일본은 병기개발에서 손을 떼지만 자위대의 발족과함께 전차 개발을 재개. 2차대전 후 첫 번째인 61식 전차에는 2차대전 때의 기술을 살려 공냉식 4사이클 디젤이 탑재되었다. 그 후에도 74식 전차(공냉 2사이클), 90식 전차(공냉 2사이클)에 디젤 엔진을 탑재하였다. 즉 일본은 반세기에 걸쳐 일관되게 전차용 디젤 엔진을 계속 추구한 것이다. 전차용 디젤 엔진은 2차 대전 이전부터 이후까지 기술을 계속 발전시켰던 일본의 병기개발사상 드문 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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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솔린 엔진을 채용한 독일

 디젤 엔진의 원조 독일에서는 2차대전 중 전차에 가솔린 엔진을 계속 탑재했다.
 디젤 엔진을 탑재한 시작전차라 하면 판터의 다임러 벤츠의 시작차(VK3002DB)에 동사(同社)의 디젤 엔진을 탑재하긴 했지만 저 시작차는 채용되지 않았다. 제식전차는 I호 전차 B형 이후 전부 마이바흐 사(社)의 가솔린 엔진을 탑재하였다. 마이바흐 사(社)는 비행선이나 철도차량용 디젤에서 실적이 있던 회사였던 만큼 독일이 디젤을 채용하지 않았던 것은 수수께끼다.

 또한 디젤의 발명에 처음부터 관여했던 MAN 사(社)나 크룹 사(社)도 2차대전 중에 전차의 생산이나 설계에 관여하였다. MAN 사(社)나 크룹 사(社)에서 디젤 엔진을 탑재한 전차가 등장하여도 이상하지 않았음에도 실제로 전차에는 마이바흐 제의 엔진을 탑재한 것을 보면 이는 역시 독일육군의 기술정책이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또한 디젤 엔진이라 아울러 말하지만 잠수함, 기관차용과 자동차, 전차용은 설계 자체가 많이 달랐다. 잠수함이나 기관차용은 대형대중량으로 저회전인 소위 저속디젤이며, 자동차용과 전차용은 소형경량의 고속디젤이 요구되었다. MAN의 특기인 U보트 용 디젤 엔진 기술은 기관차에 적용할 수 있었지만 그 상태대로 차량용에는 전용할 수 없다.

 디젤 엔진의 소형경량화에 공헌한 기술은 연료의 공기분사에서 무기분사로의 전환이었다.
 디젤이 설계한 시작 엔진이나 1920년대까지의 실용 디젤 엔진은 대부분이 연료를 압축공기와 혼합하여 실린더 내에 분사하는 방식을 채용하였다(공기분사). 당시의 기술수준으로는 연료를 단독으로 깨끗한 안개 상태로 뿜어내는 노즐, 고압연료 펌프 등을 제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기압축기는 부피가 커 필연적으로 엔전 전체도 크고 무거워졌다.

 1927년 독일의 로베르토 보슈 사(社)가 무기연료분사 펌프 개발에 성공한다. 덕분에 1930년대가 되자 차츰 무기분사 디젤 엔진이 보급되었다. 이와 함게 디젤 엔진의 신뢰성도 눈에 띄게 향상되어 갔다.
 흥미롭게도 1930년대에는 열강들이 경쟁하듯 항공기용 디젤 엔진 개발에 분주하였다. 디젤 엔진은 가솔린 엔진보다도 필연적으로 무겁기에 항공기용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좋은 연비율과 내구성은 장거리용 항공기에게 있어서는 무게에 관한 문제를 고려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엔진이 무거워도 필요한 연료가 적다면 차감하여 엔진 중량이 무거워도 연료를 적게 실으니 가벼워 질 수 있는 가능성도 생긴다.

 실제 디젤 엔진은 우선 1930년대에 비행선용으로 확고한 지위를 점할 수 있었다. 그 여세를 몰아 MAN, 다임러 벤츠, 피아트, 롤스로이스, 융커스(wike_en), 리카도 등 유명한 회사가 대형 항공기용 디젤 개발에 매진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실용의 영역에 달한 것은 융커스 사(社)의 유로204/205/207 시리즈가 유일했다.
 융커스의 항공기용 디젤 엔진은 긴 기통의 양측에 크랭크 샤프트가 있어 두 개의 피스톤 사이엔 연소실을 형성하는 대향(對向) 피스톤이라는 특이한 형식을 채용하였다. 이 엔진은 종전 후 영국의
치프틴, 소련 T-64의 디젤 엔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석유를 갈구하며

 지금은 디젤 엔진을 탑재한 승용차나 트럭이 널리 보급되어 있지만 독일이 전차 개발을 재개한 1920년 말 즈음은 디젤 엔진 차량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는 디젤 연료(경유)보다 가솔린을 구하기 쉬웠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에 침공한 독일 육군의 장갑부대는 길가에 있던 주유소에서 연료를 약탈하여 사용하였다. 경유라면 현지조달이 어려웠을 지도 모르지만 디젤 엔진이라면 가솔린을 연료로 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나폴레옹 전쟁 때라면 모르겠지만 근대적인 군대에서 연료나 식량을 현지조달 하겠다는 생각 따위 하지 않을 것이다. 연료를 최전선까지 보낼 수 있는 보급체재가 만들어지지 않는 한 전쟁은 시작할 수도 없다.

 연료(석유자원) 확보에 관해서는 독일군 수뇌부보다도 히틀러 쪽이 확실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정권을 잡기 전인 1932년 6월 히틀러는 독일의 석유화학기업 I.G.파르벤(wike_en)과 손을 잡고 보호를 약속하였다.
 I.G. 파르벤은 석탄을 원료로 하는
석탄액화연료를 개발하고 있었다.
 석탄을 석유로 만드는 합성에는
프리드리히 베르기우스수소 첨가법(wike_en)과 석탄을 일단 수소와 일산화탄소로 분해해서 재합성하는 피셔 트로프슈 공법(wiki_en)이 있는데, 파르벤의 방법은 베르기우스의 수소 첨가법으로 이는 항공기용 가솔린을 합성하는데 적합했다.

 히틀러는 강박관념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항상 석유자원 확보에 신경썼다. 그가 말하는 게르만 민족의 레벤스라움(생존권)에는 식량산지와 더불어 유전지대도 포함되어 있다. 루마니아를 동맹국에 끌어들여 플로이에슈티의 유전을 확보했으며, 1941년 소련침공 때는 장군들을 물리치고 주공을 카프카스의 유전지대로 돌렸다. 그는 장군들에게 “자네들은 전쟁의 경제적 측면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까지 말했다. 
 독일군은 카프카스 산맥 앞에 도달하여
바쿠의 유전지대가 보이는 곳까지 육박했지만, 기상악화와 보급선의 한계로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었다.

 프랑스 전선과는 정반대인 일이 러시아 전선에서 일어난다.
 독일군은 소련군의 보급기지를 점령하지만 비축되어 있던 연료는 디젤 용의 경우로 독일군의 전차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942년 공세에서도 카프카스의 유전지대를 목표로 하였다. 바쿠 유전을 점령하면 독일은 그리도 바라던 석유자원을 손에 넣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소련의 전쟁유지 능력을 뺐어 패배로 몰아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은 점령한 유전을 복구하기 위한 석유기술여단까지 재빨리 편성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1942년 공세도 역시 기상악화와 보급선의 한계로 실패했다. 독일육군은 다시 연료부족으로 진격을 멈추었기에 공세에서 수세로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히틀러가 기대했던 I.G. 파르벤의 석탄액화연료는 1944년 초반에는 석유공급의 54%를 점할 정도가 되었고, 항공 가솔린은 92%나 석탄액화연료에서 만들어졌다. 아우슈비츠의 강제수용소 옆에 I.G. 파르벤의 석탄액화연료 고장이 건설되어 유대인 수용자들이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 연료생산에 종사했다. 독일의 석탄액화연료의 1/3은 이런 강제노동의 산물이었다.

 연합국 공군은 1944년 5월부터 독일의 석탄액화연료 공장을 공격하였으며 또한 플로이에슈티의 유전을 폭격하였다. 독일의 석탄액화연료 생산은 곧바로 1/10이하로 떨어져 항공기는 날 수 없게 되었고 전차는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독일은 운명은 석탄액화연료와 함께 다한 것이다.

 이제 여기서 서두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독일은 어째서 디젤 엔진을 전차에 탑재하지 않았을까?

 여러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알 수 없다. 독일육군 수뇌부가 주로 유럽 안에서만 작전을 상정하였기에 연료 확보를 문제시 하지 않는 점도 있었을 것이다. 전차는 보병의 동반병기라는 개념을 계속 가지고 있어 그다지 긴 작전행동을 요구하지 않음 점도 있을 것이다. 당시의 디젤 엔진을 전차에 탑재하기에는 신뢰성이 떨어지는 점도 있었을 테지만 그 정도라면 독일의 기술력으로 해결할 수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그것을 하지 않았다.
 물론 독일 전차가 디젤 엔진을 채용했다고 하더라도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석유생산의 근원을 파괴당하면 디젤 연료(경우)건 가솔린이건 부족하긴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디젤 엔진이라면 독일 전차의 이동거리가 좀 더 길어졌을 것이며 보급도 원활하지 않았을까? 연료부족으로 진격을 멈춘 몇몇 국면에서는 좀 더 유리하게 진행시켰을 가능성도 있다.

 루돌프 디젤의 모국 독일이 전차용 디젤 엔진을 개발하고자 하지 않았던 점은 기술사적으로 기묘한 일이라 할 수 있다.

2차대전 서적을 읽다가 삘받아서 번역하긴 했습니다만 제가 2차대전과 이런 기계에 관한 것은 무지에 가까우니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가차없이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의 정신구조인 ‘하극상(下剋上)’이 “아래(下)가 위(上)를 이긴다(剋)”는 주종역전이라는 것을 본 작품에서도 거듭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무가사회(武家社会)의 주종관계(主従関係)란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리고 그 관계가 어떻게 변해갔는가? - 정신적인 면에 주안을 두며 살펴보자.

 중세의 주종관계의 큰 특징 중 하나가 주인을 바꿀 수 있다는 점에 있었다. 맘에 안 들면 주인을 바꾸면 되는 것이다.
 카니 사이조우 요시나가[可児 才蔵 吉長 - 1554년~1613년]’는 그 대표적인 무사라 할 수 있다. 그의 과거을 살펴보면 엄청나다. 사이토우 타츠오키[斉藤 龍興][각주:1],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오다 노부타카[織田 信孝][각주:2],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 삿사 나리마사[佐々 成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로 주군을 바꾸었다. 센고쿠의 시대를 질주한 사나이로서 떳떳한 인생이었을 것이다. 카니 사이조우에게 “아래가 위를 먹어 치운다”는 것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위를 존중하지 않는 정신구조는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종관계가 어떻게 가능하였을까?
 막부(幕府)를 연 ‘쇼우군[将軍]’은 휘하에 가신(家臣)을 두었다. 이를
고케닌[御家人]이라 한다. 이 고케닌은 쇼우군에 충성을 맹세하는 대신에 ‘지두(地頭-じとう)에 임명 받았다. 이는 어느 일정한 지역의 지배권을 인정받는 것이다. 이 지배권을 침해 당할 때에는 쇼우군이 나서서 권리를 부활시켜 주었다. 이것이 ‘본령안도(本領安堵)’. 쇼우군에게서 받은 ‘어은(御恩)’이다.

 대신 고케닌은 쇼우군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것이 ‘봉공(奉公)’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출진하였다. 목숨을 바쳐 자기 영지[本領]를 안도 받으려 노력하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주종관계 즉 ‘어은(御恩)과 봉공(奉公)’은 어디까지나 상호계약이었다는 것이다. 쇼우군이 ‘어은’을 해주지 않는다면 ‘봉공’할 필요는 없었다. 정신적인 ‘절대복종’이 아니라 ‘give and take’에 가까웠던 것이다. 카니 사이조우라면 ‘어은’을 받지 못했기에 당신에게는 ‘봉공’할 수 없습니다 – 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정신을 가졌던 고케닌은 발생 당시 숫자가 얼마큰 있었을까?
 1185년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頼朝]가 요시츠네[義経]를 토벌하기 위해 모은 15개 쿠니[国]의 고케닌은 2096명이었다고 한다. 즉 ‘무사(武士)’는 1 쿠니[国] 당 130여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외로 적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즈음의 전투가 대군을 이끌고 자신의 경제력(병력동원력)을 과시하며, 실제의 전투는 일기토[一騎打ち]에 의한 것이었기에 전투의 스페셜리스트는 그렇게까지 필요하지 않았던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더 말하자면 병기가 되는 철(鉄)이 귀중품이었기에 일반병사들에게까지 병기가 충분히 전해지지 않았던 것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은 무사의 본거지라고도 할 수 있는 동국(東国)에서 이 숫자인 것이다. 이외로 무사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서서히 소빙하기가 무가사회(武家社会)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다.
 1230년, 여름에 이상기온이 찾아왔다. 6월9일에
무사시[武蔵] 카네코 장[金子荘]과 미노[美濃] 마키타 장[蒔田荘]에 눈이 내렸다. 이 보고를 받은 카마쿠라 막부[鎌倉幕府]는 동요했다. 이상기온은 곧바로 벼농사의 괴멸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어서 7월에 들어서자 여러 지역에 서리가 내렸다.
 ‘이본탑사장첩(異本塔寺長帳)[각주:3]’에 따르면 “일본 전국이 겨울과 같아 매우 추웠다”는 상태였던 것이다. 쿄우토[京都]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아사자가 속출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확실히 비상사태였다. 이때 막부는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할 장치를 만들었다. 이즈[伊豆]와 스루가[駿河] 지역의 예를 살펴보자. 막부가 보증하니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빌려주도록 도소우[土倉]에 명령하였다. 만약 백성이 쌀을 변상하지 못하더라도 막부가 대신해서 변상한다는 것이었다. ‘아즈마카가미[吾妻鏡]’에 따르면 이 연도에 덕정령(徳政令)을 취한 다음에도 약 9000여 석의 비축미를 방출했다고 한다.

 이렇게 몇 백 년 정도 이어진 것이다. 비축미도 바닥을 보였다. 막부는 점점 체력을 잃었고 그에 따라 군사력도 저하되었다. 이젠 ‘본령안도(本領安堵)’같은 것을 할 때가 아니었다. 막부의 승인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막부가 아무리 ‘본령안도’를 하더라도 기근으로 인해 마을 자체가 없어질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막부의 권위는 점점 떨어졌다. 그렇게 점차 일본인의 정신구조에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구제정책덕분에 도움을 받았다”는 감사의 마음에서, “또 쌀을 달라고”라는 억지스런 요구로, 나중에는 “어째서 막부는 도와주지 않는 것이냐!?”라는 원망으로 생각이 바뀌어 간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총촌(惣村)=센고쿠(戦国)의 마을’이 출현하게 된다. 이 마을은 ‘어은(御恩)과 봉공(奉公)’이라는 주종관계를 몰랐다. 원래 고케닌[御家人]과는 혈연관계도 아니었다. 새로운 ‘자칭’ 무사(武士)’가 태어났다. 그들이 바로 ‘코쿠진[国人]’이며 ‘재지령주(在地領主)’로 그야말로 쿄우토의 귀족들과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 미천한 자들이었다. 최대로도 하나의 쿠니[国]당 130명밖에 없었던 과거의 무사계급이 센고쿠 시대에 볼 수 있는 대군단을 편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향에 쐐기를 박듯이 1450년대의 ‘오우닌의 난[応仁の乱]’으로 인하여 막부의 통치능력 결여가 명확히 드러났다.

 이제 더 이상 ‘‘어은(御恩)과 봉공(奉公)’은 없었다. 즉 ‘위(上)’는 없었다. 새로운 무사단이 ‘아래(下)’라고 한다면 통치능력이 없는 막부, 슈고[守護] 등 ‘위’를 물리치려는 사상이 발생하는 것도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하극상의 행동규범이 없었다면 센고쿠 시대를 살아서 헤쳐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오케하자마 전기[桶狭間戦記]’ 3권속에서 ‘오다 야마토노카미 노부토모[織田 大和守 信友]’[각주:4]가 “신하를 지키지 않는 주인은 주군이 아니다!!”라고 외치며 오와리 슈고[尾張守護] 시바 요시무네[斯波 義統]를 쓰러뜨린 것은 센고쿠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손에 넣은 ‘서바이벌 방식’이 아니었을까?

키지마 유우이치로우[木島 雄一郎]

  1. 사이토우 도우산[斎藤 道三]의 손자. 미노[美濃]의 영유하다가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쫓겨난다. [본문으로]
  2.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셋째 아들. [본문으로]
  3. 주로 아이즈[会津] 지역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오와리[尾張] 하사군[下四郡]의 슈고마타다이[守護又代 - 슈고다이[守護代]의 대리]. 오다 노부나가의 가문[織田 信長]의 가문인 '단죠우노죠우 가문[弾正忠家]'의 주가(主家)였다. 1554년 시바 요시무네[斯波 義統]의 아들 시바 요시카네[斯波 義銀]가 가신들을 이끌고 낚시하러 간 사이에 슈고[守護] 시바 요시무네를 살해. [본문으로]

 중세사회는 소빙하기에 따른 한랭화가 진행된 기근 사회였다. 이러한 사회에서 과연 ‘금융’이라는 것이 발행할 수 있었을까? 우선 농민의 벼농사 경제 실태를 살펴 보자.
 농민들은 벼농사를 하기 위해 봄에 볍씨를 빌려 수확을 거둔 가을에 쌀로 반환하는 행위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것을
출거(出擧)라고 한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쌀’이라는 농작물은 마법과 같은 작물이다. 우선 쌀의 생산력은 모든 농작물 중에서도 최상위권이다. 쌀알 하나가 수확기에는 100~300알 정도의 낟알을 가진 이삭으로 자란다. 단순계산으로 생산효율은 100배에서 300배가 되는 것이다. 더구나 몇 년간은 보관도 할 수 있다. 창고에 넣어두면 비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볍씨의 이자율은 몇 퍼센트였을까?
 1459년 11월 2일에 제정된 '무로마치 막부법 추가법[室町幕府法追加法]' 260조에는 이자율이 정해져 있다.

전당물의 이자율에 대해. 옷…(중략)등은 5부이자로 한다. 쟁반, 향합, 차제구(茶諸具)…(중략) 미곡(米穀) 등은 6부이자로 할 것
 5부이자이기에 월리 5%에 연리 60%, 6부이자는 월리6%에 연리 72%이다. 더구나 중세의 관례로 이자는 원본의 2배까지밖에 인정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어느 농민이 1알의 볍씨를 빌려 100알의 수확을 거두었다고 하자. 쌀은 6부이자이기에 이자율은 72%. 따라서 2알로 갚는다. 5% 정도의 세(
조용조)로 5알. 수확량 중 경작한 농민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93알.
 간단히 변제할 수 있었다. 이것이 당시 농민의 감각이다. 이런 감각으로 말하면 연리 50%나 100%라고 하여도 꼭 폭리라고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의 금융업자를 ‘도소우[土倉]’라고 부른 것은 원래 쌀을 빌려주었던 것이 발단이기 때문이다. 그 쌀을 바탕으로 ‘쌀 금융’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발달한 것이다. 그러다가 보다 보존이 용이한 화폐와 병용되어 갔다.
 물론 ‘도소우’에는 큰 것이 있으면 작은 것도 있었다. 여기에 작은 도소우에 빌려주는 큰 도소우와 같은 존재가 생기는 것도 필연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가 쌀을 비축할 수 있는 신사(神社), 사원(寺院)도 금융활동을 행하였다. 여기에 센고쿠 시대[戦国時代]로 이어지는 금융의 원천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세의 농촌사회에 타격을 주는 소빙하기가 찾아온다. 끊이지 않는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해 ‘내일의 쌀’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궁핍한 농민들은 볍씨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쌀알을 먹어버리는 상황까지 내몰렸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아무리 생산효율이 높은 농작물이라도 심지 않으면 생기질 않는 것이다. 제로는 아무리 큰 수를 곱해도 제로인 것이다.

 더욱이 기근의 만성화로 화폐보다 식량 쪽이 귀중해졌다. 『잡병 이야기[雑兵物語]』’에 “갑옷을 팔아서도 주먹밥 하나와 교환할 것”이라는 서민의 감각은 당시의 농민이 가진 숨길 수 없는 심경이 아닐까?
 아무리 돈을 가지고 있어도 먹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기근 때는 아무리 돈을 주어도 쌀을 팔지 않았다는 사례는 수 없이 많다.

 그래서 ‘도소우’에는 쌀이 아니라 ‘화폐’가 쌓여 갔다. 그래서 도소우도 자기방위라고 할 수 있는 ‘폭주’를 시작한다. 앞서 본 무로마치 막부법 추가법에 다음과 같은 항목이 있다.

여러 도소우 이자율에 대해서. 근년 마구 방치된 채인 것에 안타까운 일이다. 고리에 대해서는 도소우 조합끼리 이자율을 정하여 엄밀히 지킬 것
 중세의 임차계약은 개별계약이었다. 즉 도소우들은 막부의 이자제한법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기근, 가뭄이 들 때마다 이자는 크게 오르고 내렸다. 하지만 이자의 근본이 되는 농작물(실물경제)의 생산효율이 오르지 않았는데도 이자가 오르거나 하면 갚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도소우 들은 ‘차용증 매매’라는 파생상품을 개발하였다. ‘오케하자마 전기’의 작품 속에서도 나오는데 ‘차용증’ 그 자체를 매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차용증은 매매될 때마다 가격이 올라갔다. 매매될 때마다 논밭이나 장원(荘園), 조합의 전매권이 더해졌다. 그렇게 토지나 전매권을 손에 넣어 부(富)를 축적해 간 것이다. 물론 그러다보니 궁핍한 농민들이 세상에 넘치게 되었다.

 그래서 행해진 것이 당시의 개인회생제도라 할 수 있는 ‘덕정령(徳政令)’이다.
 ‘채무면제=덕정력’은 선정(善政)인 듯이 쓰이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확실히 채무로 인하여 가난해진 농민이 이 정책덕분에 도움을 받은 것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빚이 늘기만 하는 불량채무자, 지급불능자를 많이 짊어지고 있었던 ‘도소우’는 아무런 부(富)도 창출하지 못했다. 빚을 갚다 극도로 가난해진 사람들은 굶어 죽거나,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남는 것은 경작하는 인간이 없어진 논밭뿐이었다.

 그렇게 되는 것보다 일단 채무자에게서 채무를 떼어주고 다시 일할 상태로 만들어 일하게 만드는 편이 경제효율로 따지면 더 좋은 것이다. 덕정령이라는 것을 그러한 의미로 다시 살펴보면, 오히려 채권자 즉 도소우[土倉]나 유력무사, 신사(神社), 사원(寺院)의 이익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센고쿠 시대[戦国時代]가 끝나 에도시대[江戸時代]에 들어서도 1622년의 법령에는, “이자는 서로 합의하에 정할 것”이라고 하여 당사자들간에 맘대로 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에도 막부[江戸幕府]는 1692년에 100문(文)당 월리 3부이자, 연리 3할7분5리까지 이자의 상한을 두었다(質屋作法御定書之事). 센고쿠 시대로부터 100년이 지나서야 겨우 이자는 제한된 것이다.

키지마 유우이치로우[木島雄一郎]

 이 시대의 사회를 인식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장원(荘園)'의 잔재인 '총촌(惣村=そうそん)' 즉 센고쿠[戦国]의 마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 道長]로 대표되는 쿠게 정치[公家政治]가 일본 전국에 '장원'이라는 작은 독립영토를 만들었다. 바로 연공(年貢)인 세(稅)를 면제받는 '사령(私領)'이다. 무사(武士)는 이 '장원=사령'을 경호하는 무장민(武装民)에서부터 출발한다.

 카마쿠라 시대[鎌倉時代]를 거쳐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에 들어서자 '슈고 직[守護職]'이 고정화되어 일부 씨족이 그 지역에서 강대해져 갔다. 그러자 '슈고 직'의 권력이 강대해져가는 것을 위험시하여 그것을 제한하기 위한 시스템이 생겨났다. 이것이 '슈고 불입권"[守護不入権]'이다.

 슈고 불입권의 주된 내용으로는 슈고에 대한 징세거부권(徵稅拒否權)과 경찰권의 획득이다. 총촌(惣村)은 막부(幕府)에 직접 납세한다는 명목으로 슈고에게 조세(이를 “단젠[段銭]”이라 하였다)를 거부하였고, 도둑과 같은 범죄자를 잡으려고 하더라도 슈고의 가신은 마을에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에서 마을사람들이 범인 포박하는 것을 기다린 후 인도받았다.

 막부에게서 이 권리를 얻은 마을은 '장원'에서 보다 자립성이 강한 '총촌=센고쿠의 마을'이 되어 갔다. 와카야마 현[和歌山県]의 어느 마을에서 발견된 1491년의 마을 규정에는 센고쿠 시대의 마을 자치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마을에 도둑이 생기면 현행범으로 처형할 것. 영주(領主)에게서 문책이 있을 시에는 마을이 책임지고 설명할 것

 현대인이 '센고쿠의 마을'을 연상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여기저기 산재한 '외국대사관'을 떠올리면 되지 않을까? 아니면 '주일미군기지'도 좋은 예이다.
 전국 각지에 있는 주일미군기지는 '일본'이 아니다. 일본의 통치시스템인 '도도부현(都道府県)'에서 격리되어 있는 어엿한 '미국'이다. 거기서 근무하는 군인 및 그 가족들을 미국인들이며, 세금을 미국에 납세하고, 죄를 지으면 기본적으로 미국 법률에 따라 심판 받는다. 일본의 행정단위인 도도부현에는 지방세의 '징수권'도 없으며 각 도도부현 경찰에 위한 '사법경찰권'도 없다. 이것이 '슈고 불입권'이다.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이 경우 '슈고'는 '도도부현 지사'이며, 막부가 '일본정부', 총촌이 '주일미군기지'가 된다. 즉 당시의 일본에는 '막부'라는 중앙정부하고만 연결된 총촌지배자 즉 호족들의 '주일호족기지'가 무수히 많았던 것이다. 그 안에서 농민들은 밭을 갈고 농작물을 자신들의 주인인 호족에게 납세하였다. '센고쿠의 마을'은 '슈고'에게 납세하지 않았다.

 이때 주의해야만 할 것이 '슈고 불입권'으로 인해 막부의 지배력이 약화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래 이 권리는 '슈고'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주었기 때문에 막부가 인정한 제도이다. 이 '슈고 불입권'을 원했기에 '센고쿠의 마을'은 막부의 권위를 계속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표현을 쓰자면 '슈고'에게,

우리들은 막부에게서 슈고 불입권을 받은 곳이다. 그러니 연공을 바칠 수 없다
고 말하고 싶어서 막부의 권위를 인정하였던 것이다. 막부에서 파견된 ‘슈고’는 ‘센고쿠의 마을’을 통치하는 호족을 컨트롤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일본에 미증유의 기후변동 즉 ‘소빙하기(小氷河期)’가 찾아와 대기근이 민중을 습격하였다. 극단적 경제 정체 속에서 의지하던 막부는 경제적으로도 지리적으로도 먼 존재가 되었으며, 심각한 식량난 속에서는 믿을 만한 권력이 아니게 되었다. 무엇보다 막부를 이용하면서 득이 되는 것은 대의명분일 뿐 군사력이나 경제력은 모두 자신들이 해결하고 있었다.

 그러자 ‘총촌=센고쿠의 마을’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기 시작했다. 기근으로 흉작이 들었을 경우에는 옆 마을에 약탈하러 갔다. 그 옆 마을이 머릿수가 많고 강하면 즉 '다이묘우[大名]'라면 그 밑으로 들어갔다. 센고쿠의 마을 스스로가 어느 다이묘우에 붙을까를 판단하였다. 힘이 있는 호족은 많은 총촌을 집어삼키며 거대화하였고, 힘이 없으면 흡수되어 갔다. 슈고 직에 있던 가문이 강력하면 그대로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가 되었고, 가문빨이 없더라도 마을을 많이 흡수할 수 있었던 사람은 ‘힘 있는 자’가 되어 하극상(下克上)을 실현해 갔다. 이렇게 전국의 ‘총촌=주일호족기지’의 재편성이 행해진 것이다.

 '오케하자마 전기[桶狭間戦記]’의 작품 속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가 ‘이마가와 가나 목록 추가[今川仮名目録追加]’에서 거론한,

현재는 모든 것에 있어 막부의 권위에 의하지 않으며,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이 법률을 만들고 치안을 유지해 이 지역을 다스리고 있기에 슈고 불입권은 인정하지 않는다
고 선언한 것은 막부에게 임명 받은 슈고가 막부의 권위를 부정하는 아이러니함이었다.

 키지마 유우이치로우[木島 雄一郎]

ぬこ

일본어번역/잡스러운 번역 2009. 2. 27. 22:31 Posted by 발해지랑

일본 2ch에 VIP板라는 곳이 있다.

뉴스 속보 게시판인데 누가 뉴스를 소개하면 그에 꼬리에 꼬리를 물며 잡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곳이다.

뭐 어쨌든 거기서 주운 것.

아이가 태어났다면 개를 기르세요.
아이가 아기일 때, 아이의 좋은 보모가 되어 줄 것입니다.
아이가 유년기일 때, 아이의 좋은 놀이 상대가 되어 줄 것입니다.
아이가 소년기일 때, 아이의 좋은 이해자가 되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자신의 죽음으로 아이에게 생명의 고귀함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고양이를 기르세요.
고양이가 아기일 때, 당신은 고양이의 좋은 하인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고양이가 유년기일 때, 당신은 고양이의 좋은 하인일 것입니다.
고양이가 소년기일 때, 당신은 고양이의 좋은 하인일 것입니다.
고양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당신은 역시 고양이의 좋은 하인인 채일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 날이 와 고양이는 자신의 죽음으로 당신의 마음에 고양이 형태의 구멍을 만들어 놓을 것입니다.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해서는 또 고양이를 키울 수 밖에 없습니다.

 

Q;우리 집에 오는 길냥이가 너무 뻔뻔해서 곤란해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집 밖에서 냐~냐~하고 울며 밥을 달라는 정도였습니다만
추운 날씨에 밖은 힘들겠구나 하고 생각하며 한 번 현관에서 자게 한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밥 달라고 조를 뿐만 아니라 매일 집 안으로 들어와 6kg이라는 거대한 몸으로 점점 전기장판을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길냥이 주제에 뿌리라도 박힌 듯 전기장판에서 떠나지 않으며 가족들이 방 문을 열고 닫기라도 하면 춥다고 울며 방에서 사람이 없으면 누군가 오라고 웁니다. 그래서 사람이 오면 왔으면 쓰다듬으라고 울며 나중엔 무릎 위에 앉게 하라고 할 정도입니다.
그런 주제에 지가 나가고 싶을 때는 거리낌없이 문 앞으로 가서는 밤 중이건 남들이 자건 말건 문을 열 때까지 울며 행패를 부립니다. 
길냥이들의 번식을 막기 위해  이 녀석을 잡아서 거세수술 시켰습니다만 납치하여 아프게 만든 기억을 만든 상대가 앞에 있는데도 배 뒤집고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길냥이로서의 긍지는 어디 간 것이냐?’하고 핀잔을 주고 싶을 정도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A;당신 이외는 모두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그 고양이는 길냥이가 아니라 당신이 기르고 있는 고양이입니다. 지금처럼 상냥한 마음으로 길러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