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모반에는 아마도 그의 성격적인 면이 하나의 요소로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노부나가(信長)는 그의 중후한 체하는 얼굴이 들지 않았다. 이마에 새겨진 듯한 교양이 눈에 거슬렸다. 히데요시(秀吉)처럼 자신의 몸을 낮추어 귀여움 받으려는 재주가 없었다.

 노부나가와 미츠히데의 관계를 상징하는 듯한 이야기가 있다.
 술 자리에서 노부나가가 엄청나게 거대한 큰 잔을 내와 여기에 술을 가득 붓고는 미츠히데에게 마시라고 하였다. 미츠히데가 도저히 안 되겠다고 하자 노부나가는 갑자기 칼을 번득이며 "술을 마실 수 없다면 이거를 목에 처넣어주마"하고 미츠히데의 얼굴 앞으로 겨누었다. 어쩔 수 없이 미츠히데가 큰 잔을 비우자 노부나가는 "역시 목숨은 아쉬운가 보군"하고 비웃었다고 한다.

 코우슈우(甲州) 정벌 때였다.
 시나노(信濃) 스와 군(諏訪郡)에 있는 어느 절에 본진을 두었을 때 미츠히데가, "정말로 경사스러운 일이옵니다. 우리들의 뼈를 깎는 듯한 오랜 노력이 이제야 결실을 맺어 스와 군에 있는 모두가 우리 편이 되겠다고 알려왔습니다" 하고 노부나가에게 축하의 말을 올렸다. 그 뽐내는 듯한 얼굴이 노부나가의 역린을 건드렸다. "메야? 네 놈의 어디 뼈가 깎였고 무슨 공을 세웠다고 하는게냐? 자기 혼자서만 분골쇄신한 것처럼 말하는 그 말투가 맘에 안 든다" 라고 외치며 아랫자리에 있는 미츠히데에게 거침없이 다가가 돌연 미츠히데의 머리를 난간에 뭉개며 "이 대머리녀석!"하고 심하게 팼던 것이다. 미츠히데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의 굴욕에 실로 분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고 한다.[각주:1]

 성격적으로는 맞지 않았지만 노부나가는 미츠히데의 재능을 인정하고 있었다. 미츠히데에게는 우선 오다 가문(織田家)의 다른 무장들에게는 없는 외교관적인 특질이 있었다. 장수로서의 기량도 뛰어나 전략, 포술, 행정, 축성 등 그 재능은 다방면에 걸쳐 넘칠 듯하였다. 노부나가는 신참자인 미츠히데를 예가 볼 수 없을 정도로 중용하여 출세시켰다. 1571년 히에이잔 섬멸(比叡山討) 후 오우미(近江) 남부의 시가 군(滋賀郡)을 하사하고 사카모토 성(坂本城)의 성주로 임명한 것이다. 거의 10만석에 달하는 봉록이었다. 이 시기 아직 히데요시조차 영지(領地)가 없는 야전부대장에 지나지 않았다. 성격적으로는 맘에 들지 않았지만 미츠히데의 우수한 능력을 높이 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츠히데의 마음은 서서히 노부나가에게 멀어지기 시작했다. 사람을 도구로밖에 보지 않고 쓸모가 없어지면 냉혹히 버리는 그런 노부나가의 방식에 견딜 수 없게 되었다.
 1578년에 이런 일이 있었다. 미츠히데의 동료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가 돌연 노부나가에게 모반을 일으킨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패한 무라시게는 홀로 츄우고쿠(中
)로 도망쳤는데 그 일족에 대한 노부나가의 처리가 너무도 잔혹했다. 122명의 여성을 십자가에 매달아 창으로 찔러 죽이고 가신 512명을 해안가에 있는 집 네 곳에 가두어 불을 질러 태워 죽였다.

 노부나가의 이런 가혹함을 미츠히데 자신도 맛보았다.
 1578년 탄바(丹波) 야카미 성(八上城) 하타노 히데하루(波多野 秀治)를 설득하기 위해 미츠히데는 자신의 모친을 인질로 보내어 항복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이런 고심에 찬 미츠히데의 인질작전을 아무렇지도 않게 뭉갰다. 아즈치(安土)로 데려간 하타노 형제를 십자가에 매달아 창으로 찔러 죽여버린 것이다. 약속을 어긴 것에 분노한 야카미 성은 보복으로 인질인 미츠히데의 모친을 죽였다.[각주:2]

 그리고 천하를 진동시킨 1582년이 왔다.
 미츠히데는 이 해의 5월 15일 아즈치 성을 방문한 토쿠가와 이에야스(
川 家康)를 접대하는 직책에 임명 받았다. 당시 미츠히데는 전투에 종사하지 않고 휴가 중이었던 것이다. 이 당시 오다 가문은 5개의 군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 하시바 히데요시, 타키가와 카즈마스(川 一益) 그리고 아케치 미츠히데가 각각의 사령관이었다. 미츠히데는 15일~17일까지 이에야스의 접대에 임했지만 17일에 빗츄우(備中)에 있던 히데요시에게서 원군을 요청하는 소식이 노부나가에게 전해졌다. 히데요시는 타카마츠 성(高松城)을 한창 수공으로 밀어붙이던 중에 모우리(毛利)의 대군이 타카마츠 성을 구원하러 몰려들었던 것이다.

 노부나가는 지금이야말로 모우리와 자웅을 정할 때라 여기고 직접 출진하고자 하였다. 여러 장수들에게 동원령이 내려졌다. 미츠히데는 그 구원군의 선봉이었다. 지휘하에 들어온 다이묘우(大名)는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츠츠이 쥰케이(筒井 順慶),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들이었다.
 이때 미츠히데의 심경은 복잡했다. 츄우고쿠 공략은 말하자면 히데요시가 메인이며 나중에 달려가는 자신은 그 보조적인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설사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오로지 히데요시의 명성만 높여주기만 할 뿐이 아닌가?

 그런 마음의 동요에 더욱 박차를 가한 것이 노부나가의 명령이었다. 빗츄우 출진을 명령 받은 직후에 노부나가의 사자가 와,
"이즈모(出雲), 이와미(石見)를 새로이 하사하시며 대신 탄바(丹波), 오우미(近江)의 영지(領地)를 거두신다고 하십니다"
 고 전한 것이다. 지금 가진 영지(領地)를 몰수하고 대신 적국의 영지를 준다는 것이다. 영지 몰수나 마찬가지인 명령이었다. 이때 미츠히데의 뇌리에 예전 노부나가에게 추방당한 오다 가문의 중신 하야시 미치카츠(林 通勝)나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나에게도 그런 일이 닥칠 줄은……"

 5월 26일.
 거성(居城) 탄바 카메야마 성(
山城)에 입성한 미츠히데는 다음 날인 27일 아타고야마(愛宕山) 산에 올라 기도를 하고 신전 앞에서 2~3번 제비를 뽑으며 길흉을 쟀다고 한다. 후세의 사가들은 이때 대체적으로 그가 모반 결의를 굳혔다고 보고 있다.

 날이 밝아 28일.
 아타고야마 산에서 렌가(連歌) 모임이 개최되었다. 당대 렌가계 제일인자인 사토무라 쇼우하(里村
紹巴), 사토무라 쇼우시츠(里村 昌叱)가 열석하였다. 곧이어 모임이 시작되어 발구(發口)를 미츠히데가 읊었다.

때는 지금 하늘이 내리는 5월 비려나
時はいま、天が下しる五月かな

 쇼우하는 깜짝 놀랐다.
 '때는 지금'은 결의를 의미하며, '때(토키)'에는 또한 미츠히데의 출신인 미노(美濃)의 '토키' 씨(土岐氏)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이 내리는(天が下しる)'은 '천하를 다스린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토키(아케치)가 천하를 통치할 때가 온 것이다' – 쇼우하는 이렇게 해석하여 전율한 것이다.
 렌가 모임은 이틀간에 걸쳐 행해졌는데 미츠히데는 자리에서 간식으로 나온 대나무 잎에 싸서 찐 떡인 쫑즈(粽)를 잎도 벗기지 않고 그냥 입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카메야마 성으로 돌아온 미츠히데는 가장 신뢰하는 아케치 사마노스케 히데미츠(明智 左馬助 秀)를 침실로 불러 모기장 안으로 불러들여서는 모반할 뜻을 밝혔다.

 미츠히데가 츄우고쿠 공략을 위해 전군을 지휘하여 카메야마 성을 출발한 것은 6월 1일 오후 6시였다.
 전군 쿄우토(京都)로 향했다. 이 시점에서 미츠히데는 아직 장병들에게 본심을 밝히지 않았다. 쿄우토에서 노부나가 앞에서 열병식을 치른다고 속였다. 전군이 쿄우토 근교 카츠라가와(桂川) 강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전투준비의 명령이 전군에게 하달되었다.
 "말의 재갈을 풀고 보병인 자는 새로운 짚신으로 갈아 신으라. 철포를 소지한 자는 화승을 1척5촌으로 자른 다섯 줄에 불을 붙여 꺼지지 않게 꺼꾸로 들고 있으라"
 이렇게 세부적인 명령은 전쟁터에서만 행해지는 것이었다. 전군은 처음으로 미츠히데의 결의를 알게 되었다.

 쿄우토(京都)에 돌입한 아케치 군세가 혼노우(本能)사(寺)에 있던 노부나가를 죽인 것은 다음 날 새벽이었다. 그러나 모반으로 세워진 아케치의 천하는 이어지는 일 없이 10일 후의 야마자키 전투(山崎合)에서 상경한 히데요시에게 패함으로써 무너졌다.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1528년 생. 미노(美濃) 토키 씨(土岐氏)의 지족이라고 한다. 전반생이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를 섬겼다는 말이 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가신이 된 것은 중년이 지나서인 것 같다.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
)와 함께 쇼우군(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노부나가에게 알선하여 공적을 인정받았다. 1570년 오우미(近江) 사카모토(坂本) 성주가 되어 탄바(丹波) 경영을 일임 받았다. 1575년 코레토우(惟任)라는 성(姓)과 휴우가노카미(日向守)를 제수 받았다. 1582년 6월 2일 혼노우(本能)사(寺)에서 주군 노부나가를 죽였지만 야마자키(山崎)에서 히데요시(秀吉)에게 패하여 도주 중 오구루스(小栗栖)에 이르렀을 때 그 지역 백성에게 살해당했다.

이전 번역글.

2008/01/29 -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 아케치 미츠히데

  1. 이때의 일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루이스 프로이스는 미츠히데가 노부나가에게 발길질 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적고 있다. [본문으로]
  2. 회본태공기(絵本太功記)의 창작이라 여겨지고 있다. 야카미 성은 긴 포위에 지친 성 수비병들이 성주인 하타노 형제를 잡아다 받쳤다고 한다. [본문으로]

 센고쿠(戦国) 무장 중에서 시미즈 무네하루(清水 宗治)만큼이나 무사다운 화려한 의식 속에서 마지막을 장식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는 츄우고쿠(中国) 모우리(毛利) 공략에 임하여 우선 모우리 세력권의 최전선에 있는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의 시미즈 무네하루를 오다(織田) 측으로 배신하도록 꾀했다. 노부나가(信長)의 서약서에 자신도 편지를 써서는 하치스카 마사카츠(蜂須賀 正勝)와 쿠로다 요시타카(黒田 孝高)를 무네하루에게 사자로 보냈다. 노부나가의 서약서에는 빗츄우(備中), 빙고(備後) 2개국(国)을 항복의 조건으로 준다는 것이었다.

 무네하루는 곧바로 이 서약서와 편지를 모우리의 당주 테루모토(輝元)에게 받쳤고 히데요시에 대한 답신에는 “테루모토가 나를 신뢰하여 국경의 땅을 맡겼기에 그 믿음에 어긋나는 짓을 할 수는 없소이다”고 정중히 거절하였다고 한다. 2개국이라는 맛있는 떡밥에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무네하루에게는 모우리에게 빚이 있었다. 예전에 아들 사이타로우(才太郎)가 적에게 유괴당하였을 때 테루모토나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 덕분에 아들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센고쿠 난세에 있어서는 진귀한 의리의 무장이었다.

 역사상 유명한 타카마츠 성 공격은 1582년에 시작되었다.
 히데요시는 4월 4일에 2만의 대군을 이끌고 우키타 씨(宇喜多氏)의 본거지 오카야마 성(岡山城)에 입성하였다. 타카마츠 성은 이 오카야마 성에서 12km정도 떨어진 지점인 키비 평야(吉備平野)의 거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외교로 타카마츠 성을 항복시키는 것에 실패하였는데 그렇다고 이것을 힘으로 뺏기에도 어려웠다. 성안의 사기가 왕성하였으며 성은 요해였다. 작고 높은 성 주변에는 말의 발도 빠질 듯한 진창 깊은 밭으로 연못이나 늪이 많았다. 그 속에는 불과 말 한 마리 지날 수 있을 정도의 외길밖에 없었다. 함락시키는데 필시 2년은 걸릴 것이다.

 히데요시는 본영 류우오우산 산(竜王山)에서 타카마츠 성을 멀리 바라보며 이 성의 공략법에 대해 생각하였는데 그 결과 이 천하의 지혜꾸러미 속에서 나온 것은 [수공(水攻)]이라는 획기적인 전술이었다. 즉 타카마츠 성의 서쪽에 흐르는 아시모리가와 강(足守川)를 막아, 그 지점에서 성의 동쪽 이시이야마 산(石井山)의 남쪽기슭 카와즈가하나(蛙ヶ鼻)까지 약 4km에 걸쳐 제방을 쌓아 성을 이 인조호수 안에 수몰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공성이라기 보다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거대한 토목공사 계획이었다(부대 배치 및 알기 쉽게 나온 그림이 있는 곳)

 제방의 규모는 높이 7m, 밑바닥 폭이 20m나 되어 그 위는 도로가 있어 이 도로의 폭은 약 10m였다. 히데요시는 이를 단기간에 완성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히데요시는 10여일 만에 완성시킨 것이다. 그야말로 기적으로 ‘천재적인 토목건축가’라는 말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는 신속함이었다. 흙은 가마니로 옮기는 방법을 취하여, 그 가마니 한 개당 무려 돈 100문과 쌀 한 되를 준다는 조건을 내건 것이다. 당연하게도 비젠(備前), 빗츄우(備中) 일대의 사람들은 이 짭잘한 돈벌이에 달려들었다. 이야기는 엄청난 전파력으로 각지에 전해져 흙 가마니를 쌓은 백성들의 수레가 타카마츠로 쇄도하였다. 히데요시에게 행운이며 타카마츠 성에게 있어 불행인 것은 때마침 장마의 계절이었기에 완성된 이 인조호수에 엄청난 비가 쏟아져 볼 때마다 수량이 늘어갔다. 호수 한 가운데 덩그러니 뜨이게 된 타카마츠 성은 3일째에 성의 일층까지 물에 잠겼다.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형제를 중심으로 한 모우리의 대군이 타카마츠 성을 구원하러 도착해 있었지만 이 인조호수를 둘러싼 하시바 히데요시의 대포위망에는 손을 쓸 수가 없었다. 화해 협상밖에 방법이 없었다. 모우리 씨의 외교승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恵瓊)가 히데요시의 본진으로 파견되었다. 모우리가 제시한 조건은 빗츄우 등 5개국을 할양할 테니 타카마츠 성의 모든 장병을 구해달라는 것이었다. 모우리 씨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였다. 히데요시는 이를 거부했다. 히데요시의 조건은 5개국 할양 외에 ‘타카마츠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의 할복’이라는 것이었다.

 일시 화평교섭은 좌초되었지만 안코쿠지 에케이가 성주 무네하루를 설득하여 양해를 구했다. 조건 수락의 서장이 히데요시의 진영에 도착한 것은 6월 2일이었다. [4일에 할복]이라고 정해졌다. 히데요시는 크게 기뻐하며 타카마츠 성으로 술과 안주를 보냈다. 이 2일 새벽에 실은 쿄우토(京都)에서 대사건이 일어나있었다. 혼노우(本能)사(寺)의 변이었다. 히데요시 쪽으로 그 급보를 가진 밀사가 도착한 것이 3일 심야. 히데요시는 앙천했다. 어쨌든 이 사실은 철저하게 감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모우리 측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화평교섭의 와해는커녕 고립된 히데요시는 곧바로 적의 맹공을 받게 된다.

 4일.
 무네하루의 자인이 행해지는 날이었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입장에 급격한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은 채 평온히 자리잡고 있었다. 작은 배가 타카마츠 성에서 배를 저으며 나왔다. 배 위에는 죽은 사람이 입는 흰 옷의 무네하루가 있었다. 죽음을 확인하는 사람이 탄 배의 앞에 오자 무네하루는 그 역을 맡은 호리오 모스케(堀尾 茂助[각주:1])와 조용히 마지막 잔을 기울이고는 흰 부채를 펼쳐 쿠세마이(曲舞) ‘세이간지(誓願寺[각주:2])’를 추었다. 적과 아군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펼쳐지는 화려한 죽음의 의식이었다. 무네하루가 배를 가르자 등뒤에서 칼날이 번쩍거리며 목이 떨어졌다. 동승하고 있던 형 겟세이(月清) 이하 따르던 자들도 계속해서 무네하루의 뒤를 따랐다.

무네하루 사세구(辭世句),

이제야 이승을 떠나는 무사의
이름을 타카마츠의 이끼에 새겨두고
浮世をば今こそわたれ武士の
名を高松の苔に残して

 히데요시는 이 이후 곧바로 행동을 일으켜 후에 히데요시의 대반전(大返し)이라 일컬어지는 초인적인 속도로 쿄우토(京都)로 올라가 야마자키 전투(山崎合戦)에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친 것이었다.

[시미즈 무네하루(水 宗治)]
1537년생. 처음엔 빗츄우(備中) 시미즈 성(清水城)의 성주. 후에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에 속해 타카마츠 성(高松城) 성주 이시카와 히사타카(石川 久孝)의 딸과 결혼하여 타카마츠 성주가 되었다. 1582년 타카마츠 성에서 자인(自刃).

속영웅백인일수(続英雄百人一首)에 그려진 시미즈 무네하루

  1.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를 말한다. [본문으로]
  2. 헤이안 시대 중기의 시인으로 남녀 관계없이 1~2위를 다투던 여류 시인 ‘이즈미 시키부(和泉式部)’의 영혼이 가무(歌舞)의 보살이 되어 성불한 기쁨을 나타내는 춤. [본문으로]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시대에서도 이나바[因幡] 톳토리 성[鳥取城] 농성전만큼이나 인간성이 극한으로 몰린 것은 드물 것이다.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의 대규모 포위작전으로 인해 성은 완전히 아귀지옥으로 떨어져 사람 고기를 먹는 미증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었다. 당시의 기록은 그 모습을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전략)… 벼 베고 남은 그루가 최고의 먹을 것으로 나중에는 이조차 떨어져 말과 소를 먹었으며, 서리와 이슬을 맞고 약한 자는 아사(餓死)…(중략)… 말라 뼈만 남아 걷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남녀가 성의 책(柵)에 달라붙어 포위군을 향해서 살려주소~하고 울어도 그것에 용서 없이 공격군의 철포가 집중되었다. 맞은 자가 아직 숨이 붙어있는데도 성안의 사람들이 손에 칼을 들고 모여들어 다투어가며 그 살을 떼어 먹었다. 몸에서도 특히 머리가 맛있다고 하여 머리를 서로 뺏어가며 도망 다녔다…(후략)…

 히데요시의 ‘굶겨 죽이기. 칼도 창도 필요 없다’는 장기 포위공성전[兵量攻め]의 전형이 이 톳토리 성에 대해서 행해진 것이다. 장기 포위공성전의 이점은 아군 병사의 손해 없이 상대의 자멸을 기다리는 것에 있다. 단지 시간이 걸린다. 이 공성전은 1581년 7월에 시작되어 낙성을 보기까지 반년을 요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츄우고쿠[中国] 방면사령관으로서 출진한 히데요시는 하리마[播磨], 타지마[但馬]를 정복한 뒤 산인[山陰] 방면으로 더 진출하여 톳토리 성을 포위하였다. 그런데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진귀한 현상이 일어났다. 성주인 야마나 토요쿠니[山名 豊国]가 단 혼자서 히데요시에게 항복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모우리[毛利] 측에 마음이 기울어져 있던 가신들은 원군을 킷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에게 청하였다. 그래서 파견된 이가 킷카와 일족의 킷카와 츠네이에[吉川 経家]였다. 츠네이에는 성격이 우직하며 남다른 각오로 톳토리 성에 입성한 것을 알게 된 히데요시는 대규모 포위작전을 전개하였다.

 히데요시는 톳토리 성 멀리 3리(里) 사방부터 포위하였다. 그 포위한 진영은 산과 들의 형태를 바꿀 정도로 철저한 것이었다. 성밖 타이샤쿠산 산[帝釈山]의 정상을 깎아서 본진을 세웠고, 연장 2리(약 8km)에 이르는 포위선에는 흙으로 된 보루를 쌓고 책(柵)을 둘러 참호를 팠다. 약 1km마다 삼 층짜리 작은 성과 같은 망루(櫓)에 사수 100명씩을 두었고 또한 500m마다 초소를 만들어 사졸 50명씩 두었다. 밤에는 하늘까지 태워버릴 정도로 화톳불을 활활 피워서는 파리가 드나들 틈도 없을 정도로 엄중하게 경계를 섰다. 거기에 더해 히데요시는 이 진영에서 축제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시장을 만들어 여러 지역의 상인을 불러 모았고, 종을 치고 북을 때려 시끌벅적함 속에 유녀(遊女)들까지 불러들였다. 전투라기 보다는 관광유람에 가까웠다.

그러는 한편 히데요시는 이미 주변지역의 쌀과 보리 사재기에 빈틈없는 손을 쓰고 있었다[각주:1]. 시가 이상의 가격으로 쌀과 보리를 사들였기에 톳토리의 농민들은 앞다투어 팔았다[각주:2]. 톳토리 성 주변에서는 차츰 식량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킷카와 측이 모우리에 부탁한 식량선도 오는 족족 히데요시의 수군으로 인해 격침되어 버렸다. 히데요시는 성안이 굶어가는 것을 기다릴 뿐이 되었다.

 그리하여 성안의 식량난은 날이 갈수록 도를 더해 가 결국에는 기아(飢餓) 상태로 빠져버린 것이다. 그 뒤는 지옥이었다. 이 공방전의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성안의 사졸들은 싸우지도 못하고 무너져 간 것이다. 적은 철포보다도 무서운 배고픔이었다. 이대로 포위가 계속 된다면 전원이 성안에서 굶어 죽을 뿐이었다.

 츠네이에는 결심했다. 히데요시에게 사자(使者)를 보내어 ‘츠네이에가 배를 갈라 책임을 지겠으니 성병의 목숨만은 살려주길 바랍니다’고 청원한 것이다. 일족인 킷카와 모토하루의 셋째 히로이에[広家]에게 보낸 편지에 ‘오다와 모우리가 싸우는 일본에서 가장 화려한 전쟁터에서 배를 가르는 것, 후대까지 명예라고 생각한다’고 써서 각오가 어느 정도인지를 나타냈고, 부친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렇듯 훌륭한 최후를 맞을 수 있게 된 것은 킷카와 일족의 명예라고 생각합니다’는 심경을 적어 보냈다. 히데요시는 츠네이에의 담백함에 감동하여 될 수 있으면 목숨을 구해주고 싶다고 생각한 듯, 처음에는 목숨을 바꾼 항복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엔 츠네이에의 바램을 인정하였다. 그 뒤 츠네이에는 성의 병사들과 이별 잔치를 벌이고 싶다며 술과 안주를 요청했다. 히데요시는 이에 응하여 술 10상자, 그릇 10상자, 안주 다섯 종류를 보냈다.

 마지막 모습을 전하는 것으로써 시동(小姓)으로 마지막까지 지켜본 야마가타 나가시게[山県 長茂]의 보고서가 남아있다. 츠네이에는 목욕으로 몸을 깨끗이 한 뒤 녹황색의 의상을 입고 주연에 참석하여 껄껄거리며 웃는 등 쾌활하게 행동하였다. 그리고 배를 가를 때가 되었을 때 갑옷상자에 앉아서는 큰 목소리로 “연습 같은 것도 해 본 적 없을 테니 필시 서투를 테지”하고 카이샤쿠닌(介錯人[각주:3])에게 말을 걸었다고 한다.

 다른 기록은 더 세세하다. 와키자시[脇差[각주:4]]를 배에 꽂고는 기합과 함께 휘저었고 한번 칼을 뽑고는 다시 찔러 심장 아래까지 그어 올린 다음 배꼽 밑에까지 밀어 내리고선 와키자시를 배에 꽂은 채 무릎 위에 양 손을 올려 머리를 내밀었다… 츠네이에가 배를 가를 때 야마나 가문의 중신 몇 명도 뒤를 따라 배를 갈랐다.

 이리하여 성병의 대부분은 구원을 받게 되지만 생각하지도 못했던 사태로 인하여 많은 성병들의 목숨이 사라져 버렸다. 극심한 기아를 겪은 후엔 어떻게 먹느냐가 중요하다. 기아상태인 사람은 위나 내장이 쪼그라들어 있기 때문에 한번에 많이 먹으면 급사한다고 한다. 그 때문에 시간을 들여 조금씩 먹으라고 지시를 하였지만 그것을 지키는 사람은 적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모처럼 도움 받은 목숨을 잃게 된 것이다.

[킷카와 츠네이에(吉川 家)]
이와미[石見]의 호족 킷카와 가문[吉川家]의 분가 출신이다. 본가는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차남 킷카와 모토하루[元春]가 이은 가문이다. 톳토리 성[鳥取城]에서 자해하였을 때 츠네이에 35세였다.

  1. 이나바의 근린인 와카사[若狭]의 상인들을 시켜서. [본문으로]
  2. 성병들 조차 돈에 눈이 멀어 성 안의 쌀을 팔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3. 할복하는 사람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뒤에서 목을 베어주는 사람. [본문으로]
  4. 일본 무사들이 차는 칼 두 자루 중 작은 칼을 이름. [본문으로]

 벳쇼 나가하루(別所 長治)가 지키는 하리마(播磨) 미키 성(三木城)은 ‘미키의 말려 죽이기, 톳토리(鳥取)의 굶겨 죽이기[각주:1]’라 일컬어지며 그 농성전의 참혹함으로 유명하다.

 성주 나가하루의 초상화가 효우고 켄(兵庫県) 미키 시(三木市)의 호우카이 사(法界寺)에 전해내려 오고 있다. 카노우 히데노부(狩野 秀信)가 그린 것이라고 하는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갸름한 그 얼굴은 명문가의 다이묘우(大名)다운 품격이 있다. 무장이라기 보다는 상급귀족(公卿)과 같은 인상이다. 이 얼굴과 마찬가지로 깔끔한 마지막, 좋은 품성이 미키 성의 지옥도(地獄圖) 속에서는 하나의 위로가 되었다.

 나가하루는 미키 성의 상징적인 존재였다. 자신의 의지로 센고쿠 난세를 개척하려는 욕망은 없었다. 나가하루를 대신하여 미키 성을 사실상 움직이고 있던 것이 숙부인 미키 야마시로노카미 요시스케(三木 山城守 賀相)였다. 야마시로노카미는 오다 측 하리마 공략 총사령관인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에게 적대적이었는데 그 이유는 히데요시가 신발 담당에서 출세한 천한 자라고 경멸하였기 때문이다. 이 야마시로노카미의 반감이 벳쇼 가(別所家) 멸망의 원인이 된 것이다.

 1578년 히데요시는 츄우고쿠(中国) 공략의 대군을 일으키는데 앞서 벳쇼 나가하루에게 선봉을 명하였다. 야마시로노카미는 불만이었다. 벳쇼 일족을 최전선으로 몰아세워 자멸시킬 꿍꿍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21살의 나가하루에게 전략전술 같은 것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야마시로노카미가 말하는 데로 따랐다. 야마시로노카미는 군사적 득실보다 명문의 자긍심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출신이 천한 히데요시의 아래로 들어가 그의 지령에 따라 선봉에 서는 것은 벳쇼 가문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반기를 든 미키 성을 히데요시는 2년에 걸쳐 공격하였다. 특기인 식량공격이었다. 미키 성과 아카시(明石)의 우오즈미(魚住)를 잇는 선상에 50~60개의 요새를 쌓아 그 사이에 초소를 두고 해자(垓子), 목책, 바리케이트(逆茂木)를 물샐틈없이 둘러쳐 파리도 빠져 나오지 못할 정도로 한 것이다.

 농성 1년째. 미키 성은 벌써 저장했던 식량이 바닥을 들어내어 이대로 농성이 계속 되면 전원 아사(餓死)할 것이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결전을 벌여 이 상황을 타개하는 것 외에는 없었다. 1579년 2월 결국 2500 여의 성병이 하나가 되어 성밖으로 돌격했다. 결과는 처참한 패배로 끝났다. 굶주림에 쇠약해진 미키 군은 거의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것이었다. 소수의 인원만이 간신히 도망쳐 이후는 성문을 꽉 걸어 잠그고 안에 틀어박혀버렸다.

 이 해의 9월이 되자 모우리 씨(毛利氏)는 배를 준비하여 미키 성 구원의 식량 수송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도 히데요시 군에게 요격당하여 실패로 끝났다. 식량 수송의 희망은 완전히 끊긴 것이다. 성안에는 더 이상 한 톨의 쌀도 없었다. 쥐를 잡아먹고 타던 말을 먹었으며 잡초를 씹기 시작했다. 성안에 틀어박힌 농민 아시가루(足軽)부터 풀썩풀썩 쓰러져갔다. 겨우 살아있는 사람은 해골 같았다. 걷는 것이 겨우 였다. 완전히 전투능력을 상실하였다.

 벳쇼 나가하루는 결국 개성을 결심하였다. 이 종전 처리에 있어서 나가하루의 미련없는 태도가 미키 성과 나가하루의 이름을 후세에 남기게 된다. 히데요시에게 보낸 항복서장에는 나가하루, 동생인 토모유키(友之)와 숙부 야마시로노카미 요시스케 세 명이 배를 가르겠다고 쓰며 ‘그러니 성안의 사졸의 목숨을 구해주신다면 나가하루에게 있어 이번 생의 기쁨이옵니다’고 그 심정을 밝혔다.

 벳쇼 일족 최후의 날이 왔다. 나가하루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목욕을 하고 몸에 향을 배이게 하고는 우선 3살의 어린 자식과 부인을 죽이고 그 후 동생 토모유키와 함께 복도로 나와 좌우로 앉아서는 잇따라 배를 갈라 죽었다고 한다. 이때 나가하루 23세. 토모유키 21살이었다.[각주:2]

[벳쇼 나가하루(別所 長冶)]
벳쇼 씨(別所氏)는 아카마츠 씨(赤松氏)의 일족인 명문으로, 대대로 동 하리마(播磨)의 슈고(守護)였다. 나가하루는 13살에 미키(三木) 성주가 되었다. 1580년 1월 미키 성 함락과 함께 자인(自刃).

  1. 三木の干し殺し, 鳥取の飢え殺し [본문으로]
  2. 숙부인 요시스케는 목이 깨끗하게 노부나가에게 건네지는 것을 거부하여 성에 불을 질러 재로 만들겠다고 하는 것이 성의 병사들의 분노를 사, 결국 자신의 자택에서 병사들에게 둘러 쌓여 자살했다고 한다. 그 목은 그의 바램과는 반대로 노부나가에게 보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모략으로 점철된 센고쿠 시대라 하여도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정도의 음모가는 드물다.

 그가 어렸을 적의 에피소드로 이런 것이 있다.
 나오이에는 백치와 같았다 한다. 동생 타다이에[忠家]는 똑똑했기에, 모두 형인 나오이에를 바보취급하고 동생을 칭찬하였다. 단 한 명 우라가미 가문[浦上家][각주:1]의 가로인 잇칸 노인[一閑老人]만이 "그렇지 않다. 나오이에는 마음 속 깊이 큰 뜻을 품고 있기에 보통 사람이 아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나오이에는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일부러 바보 흉내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동생 타다이에는 나오이에가 죽자, "형만큼이나 무서운 인물은 없었다. 날 귀여워해주었지만 형과 만날 때는 반드시 옷 안에 사슬갑옷[鎖帷子]을 입고 조심하였다"하고 술회하였다.

 
 대충 나오이에 모략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선 주군인 우라가미 무네카게[浦上 宗景]를 국외 추방한 후 그의 영지(領地)를 빼앗았다. 거기에 미마사카[美作], 빗츄우[備中]의 실력자 미무라 이에치카[三村 家親]를 철포로 암살, 그와 친하다는 이유로 장인 나카야마 노부마사[中山 信正]를 독살하였다. 이때 장인의 유언을 위작하여 그의 땅을 손에 넣었다. 고토우 미마사카노카미[後藤 美作守]에게는 자신의 딸을 시집 보낸 후 독살하였고, 이 직후 매형인 타니카와 히사타카[谷川 久隆]도 같은 수단으로 죽였다. 이렇게 악랄한 수단으로 결국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와 빗츄우[備中] 일부를 수중에 넣은 것이다.

 1577년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츄우고쿠[国] 공략이 시작되어 모우리 가문[毛利家]와의 사이에서 치열한 항쟁이 전개되자 나오이에의 정절 없는 기회주의자적인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항상 이기는 편에 붙는다. 그러기 위해서 어느 쪽이 이겨도 상관없도록 손을 쓴다"
 
이것이 그의 모토였다.

 1577년 12월 나오이에의 가신 코우즈키 쥬로우[上月 十郎]가 지키던 코우즈키 성[上月城]이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함락당하자 곧바로 오다 노부타다[織田 信忠 – 노부나가의 적자]에게 "앞으로 오다 측에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와 동시에 예전과 마찬가지로 모우리 가문과도 끈을 놓지 않아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를 설득하여 코우즈키 성 탈환을 꾀했다. 거기에 교활하게도 이 전투에는 병을 칭하며 출진하지 않고 승리 소식을 듣자 그제서야 기어나와 킷카와-코바야카와 양 진영에 인사를 한 것이다.

 나오이에의 계략은 이로 끝나지 않았다. 모우리의 두 장수에게 "쿄우토[京都]로 진격하신다면 제가 선봉이 되겠습니다. 또한 귀국하신다면 제 영내(領內)에 잔치를 열겠으니 꼭 참석해 주시길"고 하였다.

 이 뒤편에는 나오이에의 무서운 간계가 숨어있었다.

 쿄우토로 진격한다면 그대로 따라가겠지만, 만약 돌아가게 된다면 성안에 초대하여 그 자리에서 두 장수를 죽이고 그 목을 들고 오다 측으로 배신하겠다는 계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계략은 모우리 측에게 그 내막이 알려져 버렸다. 킷카와 모토하루는 더 이상 나오이에를 신용하지 않게 되었다. 
 
 이 이후 그는 오다 측으로 넘어갈 결심을 굳히고 인질로 세자 하치로우(후의 히데이에[秀家])를 히데요시에게 보냈다.

 1581년 11월 나오이에는 병상에 누웠고 다시 일어설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자, 히데요시를 한번 보고 싶다고 부탁을 하였다. 나오이에 최후의 연기였다. 머리맡에 있는 히데요시에게 임종이 가깝다는 것을 고한 후,

 "인질로 받친 하치로우를 생각하면 하루 종일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부디 하치로우의 뒤를 잘 돌보아 주셨으면 해서…"

 하고 애원했다. 인정에 약한 히데요시는 다 죽어가는 나오이에의 탄원에 넘어가 그의 유언을 지켜 히데이에(하치로우)를 유자(猶子)[각주:2]로 키워 후에 오대로(五大老)까지 만들어 주었다.

 여담으로 일설에 따르면 나오이에의 병은 매독으로 남 앞에 나설 수 없을 정도로 추하게 부었다고 한다.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

비젠[備前]의 슈고[守護] 아카마츠 씨[赤松氏]의 슈고다이[守護代] 우라가미 무네카게[浦上 宗景]의 가신이었지만 모우리 가문[毛利家]의 지원으로 주군을 멸하고, 이어서 미마사카[美作]를 공략하여 모우리 씨의 휘하가 되었지만,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은 히데요시[秀吉]가 츄우고쿠[国]에 진출하자 오다[織田] 측에 붙었다. 1582년 2월 오카야마 성[岡山城]에서 병으로 죽었다. 53세였다고 한다.

  1. 당시 우키타 가문[宇喜多家]의 주가. [본문으로]
  2. 양자와 비슷하나, 성까지 따를 필요는 없는 부자관계.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