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구축함 진수식 때 사고가 났다고 하니 음슴체.
- 옛날 일본(그러니까 1910년대 ~ 1930년대 중반)은 진수식을 꽤나 성대하게 치룸.
- 5000톤급 순양함 이상일 경우 텐노우天皇가 직접 참관하거나, 그의 황족 대리인名代이 파견됨.(이번 북한 구축함도 5000톤급 이상이라는 것 땜에 이 글 쓰는 듯)
-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해군대표로 해군대신海軍大臣 또는 진수부사령장관
- 건조측 대표로 해군조선소장海軍工廠長이나 건조회사의 사장 등이 참여.
- 일본이 진수식을 성대히 하게 된 계기는, 1925년에 한 해군기술소장野田鶴雄造兵小将이 '군함명명식에 대하여'에서, 건조기술이 미숙했을 때에는 선대(배 만들 때 올려 놓는 곳)에서 고장 없이 진수하는 것이 배 만드는 당사자에게 있어서 공사 중 가장 어려운 때이기에, 이런 진수식의 공개는 진수 성공의 기쁨을 일반 국민과 함께 나누는 동시에 해군 조선 기술의 상황 등을 세상에 알릴 좋은 기회이니 확실히 이용해야 한다 - 고 하며 진수식은 이래야 한다며 의견서를 냄.
- 해군 주도로 진수식에는 열람권이 배부되었는데 워낙 인기가 좋다보니 암표로 매매되기도 했다는 듯.
- 안전을 위해서 10살 이하의 아이나 부축이 필요한 사람은 출입 금지.
- 가장 관람객 수가 많았던 것은 1919년 요코스카에서 진수한 잠수모함 타이게이大鯨 때 약 20만명.
- 당연 질서유지 인원 등 필수 인원이나 그에 따른 돈도 늘어남.
- 타이게이 관람객 20만명일 때 해군은 13,062명. 15만 관람객의 스즈야鈴谷 때는 16,345명을 동원
- 1927년 묘우코우妙高의 진수식 비용은 현재 가치로 약 2.2억엔. 타카오高雄 때는 약 1.9억엔
- 확대되어가기만 하던 화려하고 웅장한 진수식은 급격히 모습을 감춤.
-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어 국가총동원법 공포에 따라 다음해인 1938년 '군무1기밀 제370호'에 따라 '진수할 때 함종 및 함명 외에는 일절 공표해서는 안 됨'이라 하였으며, 태평양전쟁에 시작되기 전인 1940년에는 '군함 진수 자체를 공표해서는 안 됨'이 되어 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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