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키운 무장들[秀吉の子飼い] 중에서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와 함께 쌍벽으로 일컬어지는 무장이다. 둘 다 맹장(猛將)으로 유명한 것에 더해, 히데요시를 섬기게 된 방식과 토쿠가와 정권하에서 멸문하게 되는 운명 등 둘은 비슷한 경력을 걸었다. 단지 키요마사 쪽은 아들 타다히로[忠広] 때 삭탈관직 당하지만, 양쪽 다 토요토미 은고의 토자마 다이묘우[外様大名[각주:1]]였기에 막부(幕府)가 판 함정에 빠지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키요마사와 같은 오와리[尾張] 출신이다. 나이도 마사노리가 한 살 연상 혹은 동갑이라고 한다. 히데요시와는 아비 측의 연으로 어렸을 적부터 히데요시를 섬겼다고 한다. 마사노리가 나무통 직공의 아들로 부친이 히데요시의 아비와 아비 다른 형제라고 하지만 속설이기에 확증은 없다.

 어쨌든 그 즈음에 이치마츠[市松]라 불렸던 마사노리는 츄우고쿠[中国] 공략군의 사령관으로 하리마[播磨]의 히메지 성[姫路城]를 본거지로 하였던 히데요시를 섬기게 되었다.
 히데요시도 또한 모친 쪽 연으로 데려온 카토우 토라노스케[加藤 虎之助 = 키요마사]와 마찬가지로, 이 이치마츠를 자신의 팔다리로 만들기 위해 곁에 두고 가르쳤다. 마사노리는 히데요시의 기대대로 용맹한 무장의 재능을 보이게 된다.

 1578년 하리마 미키 성[三木城] 공략 때 18살의 나이로 데뷔하여 공적을 세웠고, 그 후에도 톳토리 성[鳥取城],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각주:2]]에서 공을 세워 명성을 높여갔으며, 1583년의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는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의 용장 하이고우 이에요시[拝郷 家嘉]를 쓰러뜨려 소위 ‘칠본창(七本槍[각주:3])’이라 용명을 얻는 수훈을 세워, 상으로 혼자서만 5000석을 하사 받아, 칠본창 중 다른 멤버들이 3000석이었던 것과 비교해 보면 그가 세운 공적이 다른 멤버들을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알 수 있다.

 그 후에도 마사노리는 히데요리를 따라 각지를 전전. 임진왜란 때도 조선에 출진했지만 1594년에는 귀국하여, 다음 해인 1595년 히데요시에게 칸파쿠[関白] 히데츠구[秀次]가 코우야 산[高野山]에서 할복을 명령 받았을 때 검시관에 임명되었다. 전쟁터의 마사노리는 용맹함으로 명성을 떨쳤지만 한편으로 인정이 깊은 성격이기도 했다. 특히 은혜를 입은 토요토미 가문에 대한 감정이 남달랐다. 히데요시의 애미 오오만도코로[大政所]가 병에 걸렸을 때는 잠도 자지 않고 간호했다고 하며, 히데츠구가 배를 갈랐을 때는 그 가엾은 운명에 눈물을 흘렸다고도 한다.

 그 후 마사노리는 히데츠구의 영지였던 오와리 키요스[清須] 24만석으로 가증(加增) 받았는데, 이때 마사노리는 어렸을 적에 자신을 귀여워 해주던 지모쿠 사[甚目寺]라는 절의 늙은 비구니를 찾아, 예전 은혜를 갖는다며 먹을 것을 계속 보냈다. 더구나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히로시마[広島]로 옮기게 되자, 새로 오와리의 영주가 되는 마츠다이라 타다요시[松平 忠吉[각주:4]]의 가로(家老)에게 자신을 대신해서 종래대로 늙은 비구니를 보살펴 달라고 부탁한 후 떠났다 한다.

 인정가(人情家)이기도 한 마사노리는 그런 만큼 격정가(激情家)이기도 했다.
 히로시마로 옮겼을 때의 이야기로, 어느 날 측근 중 하나에게 잘못한 것이 있어 이에 화가 난 마사노리는 이 측근을 굶겨 죽이고자 성 한 켠에 가두어 놓고 식사반입을 금지시켰다. 시간이 흘러 마사노리가 그 측근의 생사를 살펴보자 어찌된 일인지 이전과 변함이 없었다. 마사노리는 누가 먹을 것을 가져다 주었냐고 열화와 같이 화내며 규명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다도의 자리에서 시중드는 중[茶坊主]이, 자기가 그러했다며 그 측근은 예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었기에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측근이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억지로 먹였다고 하며, 측근을 대신해서 자기가 벌을 받겠다고 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마사노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이라며 중은 물론 유폐했던 측근까지 죄를 용서하였다.

 이러한 마사노리의 격정은 토요토미 정권의 행정관[奉行]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문치파에 대한 격렬한 증오로도 나타나 세키가하라에서 동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600년. 마사노리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따라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토벌군에 종군하였는데, 이시다 미츠나리 거병 소식에 따라 열린 대책회의인 ‘오야마 군의[小山軍議]’가 열렸을 때의 일이다.
 이에야스는 이미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나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 등 유력 다이묘우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는 하였어도, 진중에 있던 다이묘우들 대부분은 토요토미 가문에게 은의를 느끼는 다이묘우였으며 게다가 오오사카[大坂]에 처자를 두고 있었다. 히데요리[秀頼]의 명령을 바탕으로 한 미츠나리의 거병이었기에 다이묘우들이 동요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이렇게 말했다.
 “미츠나리와 한편이 되더라도 결코 원망하지 않겠소. 즉각 오오사카니 돌아가시길.”
 자리에 있던 다이묘우들은 이것저것 재보고 눈치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벌떡 일어나더니,
 “미츠나리의 거병은 히데요리 공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하지만 불과 8살의 어린 주군께서 그러한 생각을 하실 리가 없소. 즉 미츠나리 놈의 잔꾀일터.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이 마사노리는 나이후[内府=이에야스]와 함께 할 생각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이 마사노리의 말에 힘을 얻었는지 다른 다이묘우들도 잇따라 이에야스에 협력하겠다고 나섰다. 죽은 히데요시의 은혜를 가장 많이 입고 또한 히데요시의 아들인 히데요리를 생각함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도 강한 마사노리가 이시다 미츠나리를 너무 증오한 나머지 이미 천하에 대한 야심을 품고 있던 이에야스의 앞길을 크게 넓혀준 것이다.

 세키가하라 결전에서도 마사노리는 최전선에서 전투의 시작을 알렸고 맹렬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였기에 승리한 동군에서 가장 큰 전공을 세운 무장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것을 마사노리는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는지 전투 직후 어느 사건을 너무도 강인하게 해결하고자 하여 마사노리의 앞날에 중대한 화근을 남기게 된다.

 세키가하라에서 승리를 거둔 후 마사노리는 쿄우토[京都] 치안을 담당하게 되었고, 그러던 중 연락할 일이 있어 사자(使者)인 사쿠마 카에몬[佐久間 加右衛門]를 쿄우토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히노오카[日ノ岡]의 검문소를 점거하여 왕래하던 사람들을 조사하고 있던 토쿠가와의 직속 신하[旗本] 이나 즈쇼노카미[伊奈 図書頭] 휘하의 부하들과 말싸움을 하다가 이나의 부하들에게 사쿠마는 몽둥이에 맞고 쫓겨나 버린 것이다. 사쿠마는 마사노리에게 돌아와 사정을 보고하고 난 뒤, 마사노리의 허락을 받고 배를 갈라 자결하였다. 마사노리는 이때,
 “반드시 이나 즈쇼의 목을 자네의 무덤으로 가져오겠네”
 라고 눈물을 흘리며 사쿠마의 자결을 허락했다고 한다.
 마사노리는 이에야스에게 사쿠마의 목을 보내고선, 이나 즈쇼의 목을 달라며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를 통해 이에야스에게 재촉하면서 토쿠가와 측의 어떠한 타협안도 거부하여 결국 이나 즈쇼의 배를 가르게 하였다.

 어쨌든 마사노리는 세키가하라에서의 전공으로 아키[安芸], 빙고[備後] 2개 지역 49만8천2백석이라는 큰 영지를 얻게 되지만 이 단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시세가 변한 것을 깨닫지 못하였고, 이에야스가 막부를 연 뒤에도 오오사카의 토요토미 가문에 충성을 맹세하여, 1608년에 히데요리가 천연두를 앓았을 때는 급거 히로시마에서 오오사카로 달려가 막부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간호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이 일어나지만, 마사노리는 겨울과 여름 양 전투에서 에도 성 잔류[留守居]를 명령 받았기에 전쟁터에는 나가지 않았다. 물론 토요토미 가문을 소중히 여기는 마사노리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막부의 처치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토요토미 측이 은밀히 마사노리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마사노리는,
 “이에야스는 야전이 특기로 공성전은 잘하지 못한다. 오오사카 성[大坂城]은 돌아가신 타이코우[太閤] 전하[각주:5]가 세우신 천하제일의 성이니 이를 굳게 지키면 낙성되는 일은 없을 것”
 이라고 사자(使者)에게 말했다고 한다. 또한 오오사카에 있는 후쿠시마 가문[福島家]의 비축미(備蓄米)도 맘대로 쓰라고 했다 한다. 직접 도움을 줄 수는 없지만 내심 히데요리[秀頼]를 위하고자 했던 것이다.

 오오사카 공성전으로 토요토미 가문은 멸망하여 토쿠가와 정권의 기반이 강고히 다져지자, 토요토미 가문과 끈이 강했던 다이묘우들에 대하여 매서운 숙청정책이 시작되었다.
 1617년 마사노리는 법도(法度)에 따라 홍수로 파손된 히로시마 성[広島城] 보수공사를 해도 되는지 막부에 요청하여, 노중(老中)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각주:6]]에게,
 “뭐 조금 정도 보수하는 것이라면 괜찮겠죠”
 라는 구두 언약을 믿고서 정식 서류를 제출하지 않은 채 보수공사를 시작하였지만, 결국 이것을 ‘모반의 징조’라는 생트집에 잡혀, 1619년 시나노[信濃] 카와나카지마[川中島] 4만5천석[각주:7]으로 감봉되었다.

 더구나 마사노리가 죽었을 때 막부의 검시관을 기다리지 않고 그 유체를 화장하였다는 이유로 후쿠시마 가문은 모든 영지를 몰수당하였다.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1561년 오와리[尾張] 키요스[清須]에서 태어났다.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5000석을 하사 받았으며, 1585년 이요[伊予] 이마바리[今治]에 10만석, 1595년 오와리 키요스 24만석이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공적을 세워 히로시마 49만8천200석이 되었지만, 1619년 실각, 4만5천석으로 시나노[信濃] 카와나카지마[川中島]로 감봉. 1624년 죽었다. 64세.

  1.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이후 토쿠가와 가문의 부하가 된 다이묘우. [본문으로]
  2.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을 일으켜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죽인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와 히데요시가 싸운 전투. [본문으로]
  3. 1583 년 오우미[近江]에서 히데요시[秀吉]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싸운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4.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넷째 아들. [본문으로]
  5. 히데요시를 말한다. [본문으로]
  6.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의 아들. [본문으로]
  7. 이 중 에치고[越後] 우오누마 군[魚沼郡] 2만 5천석은 아들 타다카츠[忠勝]의 영지. [본문으로]

시티헌터 엔딩곡 - get wild

동영상 2009. 12. 27. 22:38 Posted by 발해지랑


각 에피소드 마지막과 이어지는 음악이 절묘.



요건 좀 긴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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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economy.hankooki.com/lpage/economy/200912/e2009121318055597490.htm
https://m.sedaily.com/NewsView/1HR58NY109
에 실린 글을 보면서….

☞ 한문에 링크 걸린 곳은 일본어 위키로 점프합니다.
☞ 칸안에 굵은 글씨는 본문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주신구라(忠臣藏).' 연말연시면 으레 일본의 TV에 등장하는 특집극 소재다. 내용은 주군을 잃은 사무라이 47인의 복수극.

 

 

적어도 신문처럼 영향력이 있으면 표기법을 따라주었으면 좋겠습니다[각주:1]. 국립국어원의 일본어 표기법에 따라 ‘ちゅうしんぐら’이니 ‘주신구라’로 해야 하지요.
풀네임을 따지자면 ‘충신 오오이시 쿠라노스케[忠臣 大石 内助]’이니 [충신 쿠라]이라고 하는 편이 좋을 듯도 싶으나, 역시 문학 작품의 고유 명사이니 [주신구라]인 편도 좋을 듯.

 

시골의 다이묘(영주) 아사노가 수도인 에도에서 다른 다이묘인 기라에게 상처를 입혔다.' 아사노가 분개한 이유는 술수에 빠져 격식과 예법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게 돼 위신을 잃었다고 판단했기 때문. 아사노는 술책을 꾸민 기라의 얼굴에 칼자국을 남겨 무사로서 위신을 세웠으나 '할복' 명령을 받았다. 쇼군 앞에서 칼을 뽑았다는 이유에서다.

 

 

1701년에 반슈우[각주:2] 아코우 번[播州 赤穂藩] 5만석의 영주 아사노 타쿠미노카미[浅野 内匠頭][각주:3]가 키라 코우즈케노스케[吉良 上野介]에게 상처를 입힌 것은 맞습니다만, 키라는 다이묘우[大名]가 아닙니다.

 

키라는 막부 직신 즉 하타모토[旗本]로 그의 영지는 다이묘우의 기준인 1만석에 미치지 못합니다.
가문 대대로 미카와[三河] 키라[吉良]라는 곳에 4200석, 그에 더하여 직책이 코우케키모이리[高家肝煎][각주:4]였기에 봉급으로 2000석을 더하여 총 6200석의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말이 길어졌는데 한마디로 다이묘우가 아니었단 말입죠.

 

참고로 코우케[高家]란 막부(幕府]의 예식(禮式) 담당으로, 쇼우군[将軍]의 대리인이 되어 쿄우토[京都] 조정에 사자로 파견되거나, 반대로 쿄우토 조정에서 칙사가 왔을 시에는 칙사를 접대하는 향응역의 지휘와 지도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그 지휘와 지도 아래서 조정의 칙사들을 접대하는 직책으로 향응역[饗応役]이 있었습니다. 향응역에는 보통 5만석 전후의 토자마 다이묘우[外様大名][각주:5]가 임명되었습니다.

 

지도를 하는 키라 코우즈케노스케[吉良 上野介]와 그 지도를 받는 아코우 번주 아사노 타쿠미노카미[浅野 内匠頭]는 서로 반목했다고 합니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키라가 원했던 아코우 번의 염전기법을 알려주지 않았다던가, 당시 코우케가 향응역을 지도하면 사례금을 받는 것이 통례였지만 아사노가 키라에게 준 사례금이 겁나게 적었다거나, 성질 급하고 한번 폭발하면 가슴에 통증이 생기는 병을 가진 아사노의 성질이 더러워서라던가…. 어쨌든 먼저 아사노의 뒷따마를 깐 것은 키라라고 합니다.[각주:6]

 

이야기나 연극의 세계에서는 저 불화로 키라가 아사노를 괴롭혔다고 합니다.
칙사를 맞이하는 방의 병풍을 화려한 것으로 하면 안 된다고 키라가 말했기에 아코우 번은 수묵화로 된 병풍을 준비했더니 나중에는 이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쪽을 준다거나, 예복으로 다이몬[大紋]이라는 복장을 해야 하는데 키라는 나가카미시모[長裃]를 입고 나오라고 해서 쪽을 준다거나, 준비해야 할 요리도 반대로 알려주고, 타타미[畳]도 교체해야 하는데 알려주지 않았다던가…하는 이야기들이 나와 그럴 때마다 아코우 번사들이 임기응변으로 그런 난관을 헤쳐나가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만…

 

실제로 아사노 타쿠미노카미와 아코우 번은 이 일이 일어나기 18년 전인 1682년에 조선통신사 향응역에 임명된 적이 있었으며, 이번 칙사 향응역에 앞서서도 5년 전 칙사 향응역이었던 아사노 타쿠미노카미의 마누라의 친정 미요시 번[三次藩]의 기록도 조사했으며, 바로 전년 향응역이었던 시바타 번[新発田藩]의 기록도 살폈다 하기에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고 합니다. 어디까지나 이야기 속에서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한 장치겠지요.

하단에 있는 하늘색 옷이 다이몬[大紋], 상단에 있는 인물들이 입고 있는 옷이 나가카미시모[長裃].

 

서울경제의 편집위원께서는 쇼우군[将軍] 앞에서 칼을 뽑았다고 하는데, 물론 아닙니다. 칼을 뽑은 장소는 외측 복도로 벽에 소나무가 그려져 있다고 해서 ‘마츠노오오로우카[松の大廊下]’라 불리는 복도에서 입니다. 성안에서 칼을 뽑는 것도 물론 금지입니다.

 

소나무가 그려진 복도[松の大廊下](모형). 사건은 쇼우군 앞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복도에서 일어나죠.

 

어쨌든, 키라는 이 복도에서 막부 루스이[留守居][각주:7]들을 총괄하는 오오루스이[大留守居] 카지카와 요소베에[梶川 与惣兵衛]와 이야기 하던 중, 아사노 타쿠미노카미가 키라의 등뒤로 다가와 “여태까지의 원한 잊지 않았겠지!”라며 차고 있던 예식용 칼[殿中差]로 한 번 휘두르지만 헛스윙, 그 외치는 소리에 뒤돌아 본 키라의 이마 한가운데에 약 11cm, 그 상처에 놀라 도망가는 키라의 등 오른쪽 견갑골에 18cm 정도의 상처를 남기고, 곁에 있던 카지카와 요소베에에게 제압당합니다.

 

사건을 일으킨 당시만 해도 무사의 위신 세웠다기 보다는 ‘미친놈 별지랄 다하는구나’라는 인식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아사노가 칼 들고 설치며 자기를 공격하는데도 성안이라는 장소를 분별한 키라는 무죄석방 되었습니다. 싸움을 하면 양쪽이 다 벌을 받던 무가의 관습법 ‘다툼 시 쌍방 처벌[喧嘩両成敗]’에 어긋났기에 약간의 동요가 있었습니다만, 조사 결과, 때와 장소를 분별치 못하고 원한이 있었기에 칼질 했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젊은 영주 아사노와 장소 분별한 늙은 키라와의 차이는 그 후의 처분에서도 나타납니다. 아사노는 당일 할복 & 번 폐쇄, 키라는 무죄석방.

 

아사노가 죽자 로닌(浪人·떠돌이 무사)이 될 처지인 가신 300여명이 모였다. 우두머리 격인 오이시는 '당장 기라를 치자'는 사무라이들을 만류하고 은거에 들어갔다. 적의 감시에서 벗어나고 끝까지 함께 갈 동지를 가려내기 위해서다.

 

 

저 300명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군요....This is Akou!?
에도[江戸]에서의 급변이 아코우 성[赤穂城]에 전해지자, 필두 가로 오오이시 쿠라노스케[大石 内蔵助]는 아코우 영내에 있던 번사(藩士) 200여명을 성안에 모이게 하여 농성을 할 것인지, 개성을 할 것인지를 협의하게 됩니다. 막부가 번 폐쇄를 명했으니 따르는 것이 순리였지만, 아코우 번사들에게는 자신들의 주군이 할복하고 번까지 폐쇄 당했는데도, 키라는 무죄 석방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다툼 시 쌍방 처벌[喧嘩両成敗]’였으니까요. 관습법으로요.

 

막부 역시 행여라도 아코우 번이 개길까 싶어[각주:8] 수성사[収城使]의 정사로 5만3000석의 타츠노 번[竜野藩]의 번주 와키사카 아와지노카미[脇坂 淡路守], 부사로 2만 3000석의 아시모리 번[足守藩]의 번주 키노시타 히고노카미[木下 肥後守]의 병사 4500여명이 아코우 성을 향하였고, 주변 오카야마 번[岡山藩]은 600명을 번경에 배치하는 것을 시작으로, 히메지[姫路], 톳토리[鳥取], 바다 건너 시코쿠[四国]의 마루가메[丸亀], 토쿠시마[徳島] 번도 만일을 대비하여 경계 병력을 준비시켰습니다.

 

당연 비둘기파와 매파가 생겼습니다.
비둘기파는 성을 넘기고 막부의 명에 순순히 따르자는 파였고, 매파는 이대로 물러나서는 너무 억울하니 농성하며 키라의 처벌도 상소하고자 했습니다. 5만석 영주의 성으로는 너무도 방어력이 뛰어나고 훌륭한 편이었던 아코우 성[赤穂城]을 내세워 농성하자는 것이었죠.

그리고 어느 시대건 비둘기파는 비겁한 놈들이 되고 매파는 지조와 절개의 사나이가 되는 법.
비둘기파의 수장이던 차석 가로 겸 번 재정담당 오오노 쿠로베에[大野 九郎兵衛]는 매파의 협박과 욕설에 견디지 못하고 밤중에 튀게 됩니다. 얼마나 급했는지 손녀를 놓고 도망갈 정도였습죠.

 

매파도 둘로 나뉘는데 매파 중 강경파는 아시가루 부대장[足軽頭] 하라 소우에몬[原 惣右衛門][각주:9]  등 다수로 그들은 농성하다 죽자고 주장. 매파 중에서도 온건파는 필두 가로 오오이시 쿠라노스케를 중심으로 우선 성은 내주더라도 막부에게 할복한 아사노 타쿠미노카미의 동생 아사노 다이가쿠[浅野 大学]를 새로운 번주로 삼아 가문을 재흥과 동시에 키라에게도 벌을 내려달라는 청원을 하자는 쪽이었죠.

 

…이야기가 길어지니 어쨌든 성을 내주게 됩니다. 오오이시는 끝까지 농성하자던 강경파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후일을 위한 혈판 서약서를 쓰게 하였습니다. 그 혈판 서약서를 쓰며 아사노 가문 재흥을 맹세했던 자들 중 끈이 있는 자들은 그런 끈을 의지하여 흩어지고, 능력 있는 자들은 능력을 살려 제 갈 길들을 갑니다. 능력 없고 빽이 없어 남겨진 쭉정이들은[각주:10], 번주를 죽게 만들고 자기는 살아남은 키라를 당장 죽이자는 파와 막부의 최종판결을 기다리자는 파로 나뉘게 됩니다. 오오이시는 막부에게 청원했던 아사노 다이가쿠의 번주 취임과 아코우 아사노 가문 재흥을 기다립니다만…. 막부의 최종판결은 아사노 다이가쿠의 영구 칩거였습니다.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자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키라에 대한 복수뿐이었습니다.

 

오이시가 고른 47명은 '주군과 의리를 저버린 자'라는 수모 속에서 시간을 기다렸다. 군자금을 마련하려 행상에 나서고 가족을 버렸다. 어떤 로닌은 여동생을 원수인 기라에게 하녀 겸 첩으로 바쳤다. 

 

47이란 숫자는 키라 저택에 쳐들어 간 숫자로 쳐들어 가기 전만 해도 몇 명이 더 있었습니다[각주:11]. 가령 ‘여동생을 원수인 기라에게 하녀 겸 첩으로 바쳤다’는 낭인은 가장 마지막에 탈맹한 모우리 코헤이타[毛利 小平太]를 말하는 것으로, 그가 여동생을 하녀 겸 첩으로 바쳤다는 것은 후세의 창작입니다[각주:12]. 모우리 코헤이타가 키라의 저택에 직접 들어가 하인으로 일하며 가장 정확한 정보를 가져다 주었기에 후세의 작가가 그런 식으로 창작을 하였나 봅니다.[각주:13]

 

복수에 성공한 로닌들은 쇼균의 할복 명령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영원히 살아 있다.

 

 

이 복수극에 성공한 로우시[浪士]들은 막부에 자수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처분을 두고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츠나요시[徳川 綱吉]는 고민하게 됩니다.


시간을 두었다가 나중에 살려주자는 막부의 평정소[각주:14], 그러나 평정소의 보고를 받은 노중[老中][각주:15]들의 결론은 조직폭력배같은 놈들이니[각주:16] 참수를 하자고 주장[각주:17], 이 상반된 의견에 곤혹해진 츠나요시의 최측근 야나기사와 요시야스[柳沢 吉保]는 자신의 브레인 오규우 소라이[荻生 徂徠]에게 의견을 묻자, 그들의 명분을 인정해주는 명예로운 할복[각주:18]. 야나기사와 요시야스는 오규우 소라이의 의견이 가장 타당하다고 여기고 쇼우군 츠나요시에게 여쭙니다.

 

 츠나요시는 그럼에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다음 해 2월 1일 신년 인사를 하러 온 우에노[上野] 칸에이 사[寛永寺]의 코우벤 법친왕[公弁法親王]에게 의견을 묻자, 그들은 이미 목적을 달성했으며 충신인 그들은 목숨을 살려주더라도 다른 주군을 모시지 못할 것. 그러니 지금 그들에게 명예 있는 죽음을 언도하면 그 이름을 영원히 남길 수 있다 – 고 츠나요시에게 말하여 할복이 결정됩니다. 그리고 법친왕의 말대로 그들은 이후 충성의 대명사로 일본인에게 영원히 남습죠. 또한 연말연시가 되면 어느 방송국 중 하나는 반드시 저 츄우신쿠라[忠臣蔵]에 관한 드라마를 방영하지요.

 

호전적 일본과 집요하게 기술을 개발하고 시장을 개척하는 일본기업에도 '주신구라'라는 공통의 인자가 담겨 있다.

 

 

이 말은 사족인 것 같습니다. 저도 사족을 달아보자면, 전투국가 한국은 집요하게 기술 개발과 시장 개척을 안 한답니까? 그럼 우리 기업에도 ‘주신구라’의 인자가 있나요?

  1. 저처럼 표기법을 전혀 따르지 않는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지만, 전 듣보잡 블로거고 신문은 그렇지 않으니까요! [본문으로]
  2. 하리마[播磨]를 말합니다. [본문으로]
  3.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가신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의 현손. 즉 손자의 손자. [본문으로]
  4. 코우케를 통솔하는 직책 [본문으로]
  5.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이후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의 부하가 된 다이묘우 [본문으로]
  6. 키라 저택에 침입한 47명 중 한 명인 호리베 야헤에[堀部 弥兵衛]가 쓴 '堀部弥兵衛金丸私記'에는, "칙사가 머무는 저택에서 키라 코우즈케노스케님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욕을 하셨지만, 맡은 임무가 막중한 것을 알기에 아사노 타쿠미노카미님은 계속 참으셨다" [본문으로]
  7. 에도성 안채[大奥]를 감찰, 성 출입증서 관리, 쇼우군이 에도성에서 외출했을 때 에도성 수비의 임무를 가진 직책. [본문으로]
  8. 사실 이런 사태에 병력 파견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실제 아코우 번도 7년전인 1694년 빗츄우[備中] 마츠야마 번[松山藩] 미즈타니 가문[水谷家]에 후계가 끊겨 번 폐쇄가 되었을 때 3500명을 이끌고 가서 성을 접수한 적이 있었습니다. [본문으로]
  9. 여담으로 2000년도 작 영화 '기묘한 이야기 – 사무라이의 휴대폰편'에서 자주 오오이시에게 보고하며 귀찮게 하던 동글동글한 아저씨가 바로 하라 소우에몬입니다. [본문으로]
  10. 큰일을 벌이고 명성을 높여 다른 가문에 취직하고자 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실제로 거사를 벌일 후에 낭인들은 4가문에 각각 나뉘어 유폐 당했는데, 그 중 쿠마모토 호소카와 번[熊本細川藩]의 번주 호소카와 츠나토시[細川 綱利]는, 거사를 벌인 충성이 기특하다며 나중에 잘 되면 자기네 번에 취직시켜주겠다는 말을 하여, 낭인들을 희망에 부풀게 만듭니다. [본문으로]
  11. 최종적으로 맹약서를 서명한 사람은 1702년 음력 7월~8월 사이에 55명이었고, 그 수가 점점 줄어 사건이 벌어진 1702년 음력 12월 14일에는 8명이 빠진 47명이 되지요. [본문으로]
  12. 쿠니에다 칸지[邦枝 完二]의 여첩자[女間者]. [본문으로]
  13. 참고로 모우리 코헤이타는 거사가 일어나기 3일전인 12월 11일에 탈맹합니다. 이 모우리 코헤이타가 빠지면 그렇잖아도 소심한 오오이시 쿠라노스케가 마음을 돌릴까 두려워, 호리베 야스베에[堀部 安兵衛]는 비밀로 하고 정문 침입조에 배치한 계획서를 오오이시에게 제출할 정도였습니다. 오오이시도 그가 있는 줄 알고 나중에 모우리 코헤이타를 포함시켜 보고할 정도였습죠. [본문으로]
  14. 막부의 최고사법기관. 막부의 최고 직책들이 모여 회의. 단 이때 노중(老中)는 없었음. [본문으로]
  15. 막부의 수상들 [본문으로]
  16. 특히 밤 중에 무리지어 활까지 쏘며 공격한 것은 불한당이라며. [본문으로]
  17. 당시 무사에게 참수는 불명예스러운 죽음이었다고 합니다. [본문으로]
  18. 할복은 무사다운 죽음이었다 합니다. [본문으로]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가 들어선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즈음, 가신들을 이끌고 말에 올라 에도[江戸]의 대로를 가로지르는 히고[肥後] 54만석의 다이묘우[大名] 카토우 키요마사의 위풍당당한 모습이 에도 시민들 사이에 화제를 되었다.
 키요마사는 신장이 6척[각주:1]을 가볍게 넘고[각주:2]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 얼굴에 입이나 턱 주위에는 수염이 무성하게 덮인 대장부였다. 허리에는 1m7cm의 큰 칼[大刀]을 차고, 어깨높이가 180cm 넘는 괴물같이 거대한 말에 올라타 있었다 한다. 무엇보다 당시의 말은 어깨높이 120cm가 보통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키요마사에게서 고(故) 타이코우[太閤]
히데요시[秀吉]의 직속 장수, 무공이 뛰어나 ‘칠본창[각주:3]’이라는 이명을 얻은 무장, 임진왜란 시 일본의 맹장에 걸맞은 보습이라 보고 나중에는 유행가까지 만들었다.

에도 깡패 모가리에게 거칠 것은 없겠지만 밤색 제석만은 피하시오
江戸のもがりにさわりはすとも、よけて通しゃれ帝釈栗毛
 ‘에도 깡패 모가리[江戸のもがり]’는 당시 에도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공갈 깡패를 말하며, ‘밤색 제석[帝釈栗毛]’는 키요마사의 애마를 말한다. 안하무인인 깡패라도 키요마사가 타는 말에는 대적할 수 없다는 말이리라.

 키요마사는 센고쿠[戦国] 무장 중에서도 일화가 많은 사람인데, 특히 조선에서 호랑이 퇴치는 널리 알려져 있다. 십문자 창을 휘둘러 호랑이의 숨을 끊었는데 그때 호랑이는 창의 한쪽 날을 물어서 뜯었다는 이야기인데[각주:4], 이는 에도 시대 말기의 창작으로 처음 실린 책에서 키요마사는 철포를 쏘아 호랑이를 잡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키요마사의 통칭은 토라노스케[虎之助]로  범 호(虎)자가 들어간다.

 키요마사는 히데요시와 같은 오와리[尾張] 나카무라[中村] 태생이라고 하며, 전하는 바에 따르면 키요마사의 모친은 히데요시의 모친(오오만도코로[大政所])과 사촌지간이라고 한다[각주:5]. 그런 연으로 키요마사는 어릴 적에 당시 나가하마 성[長浜城]의 성주였던 히데요시에게 맡겨졌다. 이때부터 문자 그대로 히데요시가 직접 키운 가신으로서의 키요마사 생애가 시작되는 것이다.
 히데요시 자신도 노부나가[信長]가 아니었다면 출세할 수 없었을 정도로 미천하였기에, 친척이나 히데요시 가문을 대대로 섬긴 가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기에 키요마사와 같이 조금이라도 핏줄이 닿는 사람을 교육시켜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려 하였다. 그런 만큼 키요마사의 출세도 빨랐다.

 1576년 15살 성인식이 있던 해에 170석을 받았으며[각주:6], 1581년 6월 20살에 톳토리 성[鳥取城] 공성전에서 데뷔전[初陣]을 치르게 되는데 키요마사는 정찰 나갔다가 공을 세웠고, 이후 히데요시를 따라 각지를 전전.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칠본창(七本槍)라 일컬어지는 전공을 세워 일약 3000석[각주:7]이 주어진다. 지위도 철포 150정, 히데요시가 파견하는 무사[与力] 20명을 휘하에 둔 중급 장교[物頭]로 승진하였다. 이 정도되면 당당한 무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이례적인 출세에는 히데요시의 덕도 있었겠지만 그 이상으로 키요마사 자신이 무장으로서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 후도 키요마사는 히데요시를 따라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役], 큐우슈우 정벌전[九州の役] 등에 참전하여 1588년에는 일거에 히고[肥後] 절반이 주어져 드디어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나머지 반을 하사 받은 것이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이다.

 1592년 조선 침략[각주:8]에서 키요마사는 코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선봉에 임명되어 서로 경쟁해 가며 파죽지세로 진격하였지만, 곧바로 의병(義兵)이 일어나고 명나라가 원군을 파병하자 전황이 악화되었다. 거기에 전쟁정책에 관해 대륙정복론자인 키요마사와 화평론자인 코니시 유키나가 사이에는 자연스레 반목이 생겨, 결국에는 작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원래 둘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소위 무공파와 문치파로 대립하였다. 그리고 그 때문에 키요마사의 신상에 위기가 생긴다.

 조선에 가 4년째인 1595년.
 갑자기 히데요시에게서 귀국을 명령 받은 것이다. 그것이 히데요시의 분노를 나타내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귀국명령은 일본군의 감찰[軍監]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이 작성한 키요마사의 행동보고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시다의 보고는 전부 키요마사의 방자한 말과 행동을 비난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명령에 따라 키요마사는 후시미[伏見]로 돌아왔지만, 히데요시는 면담을 허용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키요마사는 다섯 행정관[五奉行] 중 한 명인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에게 히데요시의 화를 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하지만 나가모리는 미츠나리와 화해하기만을 권할 뿐이었다. 이렇게 되자 키요마사는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냐며,
“하치만[八幡][각주:9]도 굽어 살피소서, 지부[治部][각주:10]놈과 평생 화해 따위 하지 않겠소. 그 놈은 조선에서 한 번도 싸우지 않은 주제[각주:11]에 남의 뒤따마만 까며 끌어내리려고만 하는 더러운 놈이다. 아무리 소인이 타이코우[太閤[각주:12]]에게 용서를 받지 못하고 배를 가르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지부 놈과는 화해는 하지 않겠소.”
하며 분노하였다고 한다.

 키요마사의 근신생활은 반년 정도 이어졌다. 그러던 1596년 7월. 킨키[近畿] 지방에 큰 지진이 일어났다 . 속설에 따르면 키요마사는 근신 중인 자신의 처지도 잊고 수하 200여를 이끌고 후시미 성에 와서 히데요시를 보호하며 성을 수비하였다. 이것을 안 히데요시도 노여움을 풀고 키요마사의 죄를 용서했다고 한다[각주:13] [각주:14]. 후세 연극 등에서 ‘지진 카토우[地震 加藤]'라 불리게 되는 명장면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키요마사의 명성은 한층 더 높아지게 되었다.

 1597년. 조선으로 재침공. 즉 정유재란이 시작되자 키요마사는 또다시 출정하여 이 해의 막바지에 가장 치열하고 처참한 전투를 치르게 된다. 유명한 울산성(蔚山城) 농성전이다.
 엄동의 12월[각주:15]. 4만4천이라는 명나라 대군의 포위 속에서도 키요마사는 철저항전 하였다. 성 안의 식량은 이미 바닥을 들어내고 있었다. 더구나 명의 전법은 장기 포위전[兵糧攻め]이었다. 성 안에 있던 오오코우치 히데모토[大河内 秀元][각주:16]는,
 “매일 행전(行纏)[각주:17]이 흘러 내렸다. 처음엔 고쳐 맸지만 나중에 뭔가 이상하여 행전을 떼어 보자 다리에 살이 하나도 없이 뼈와 가죽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고 기록하였고, 명나라 기록에도 - 일본군은 종이를 먹고 오줌으로 갈증을 해소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듯이 성 안 일본 병사들은 굶주림과 추위로 인해 동상에 걸리는 사람, 얼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이러한 지옥 속에서 키요마사도 죽음을 각오했는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 등 여러 장수들에게 보낸 편지에,
 “만약 낙성된다면 이런 모습들을 타이코우[太閤] 님에게 보고해 주길 바란다”
 고 썼다. 모우리[毛利], 나베시마[鍋島], 쿠로다[黒田] 등 여러 장수의 구원이 제시간에 도착하여 조선과 명의 군사들은 포위를 풀고 철퇴하였다.

 고군(孤軍)이면서 항전을 계속한 키요마사에게 적인 명나라 측도,
 “오랑캐[酋] 중에서는 가장 사납고 굳세다”
 “재능은 유키나가보다 몇 배나 뛰어나다”
 며 절찬하였다.

 1598년 8월. 히데요시가 죽어 길었던 조선에서의 싸움도 끝났다. 키요마사에게 남겨진 것은 두 번에 걸친 전쟁 중에 한층 더 깊어진 이시다 미츠나리, 코니시 유키나가 등에 대한 증오뿐이었다. 이런 키요마사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이시다 미츠나리의 편을 들 이유가 없었다.
 키요마사는 큐우슈우[九州]에서 동군 측에 서서 싸워, 코니시 유키나가의 거성 우토 성[宇土城]과 속성 야츠시로 성[八代城]을 공략. 전쟁 후 히고[肥後] 전부를 하사 받았다[각주:18]. 천하의 명성 쿠마모토 성[熊本城]의 축성에 임한 것은 다음 해인 1601년이었다.

 토쿠가와의 시대에 들어서도 키요마사의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없었던 듯, 토요토미 가문 존속을 위해, 1611년 히데요리[秀頼]를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대면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후 쿠마모토로 돌아가던 도중 병에 걸려 귀성한 뒤 얼마 지나 죽었다. 그 죽음이 너무도 급작스러웠기에 독살설도 유포되었다고 한다.

[가토 기요마사(加藤 清正)]
1562년 오와리[尾張] 에치 군[愛智郡] 나카무라[中村]에서 태어났다.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合戦] 후
오우미[近江], 야마시로[山城], 카와치[河内]에 조금씩 3000석을 하사 받았다.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에 종군하여 히고[肥後]의 반인 25만석을 영유하였다[각주:19].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동군에 속하여 히고 54만석을 하사 받았다. 축성, 치수, 간척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였다. 1611년 6월 24일 죽었다. 51세.

  1. 6척3촌. 약 191cm. [본문으로]
  2. 5척3촌(161)이라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3. 1583년 오우미[近江]에서 히데요시[秀吉]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싸운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4. 때문에 키요마사의 동상에 있는 창은 십문자창이 아니라 "ㅓ"자형 창이다. [본문으로]
  5.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의 번한보[藩翰譜]에는 그렇게 실렸다 한다. [본문으로]
  6. 문서로 남아 있기로는, 1580년 히데요시에게서 하리마[播磨] 내에 120석을 받은 것이 초견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7. 오우미[近江] 내에 1800석, 카와치[河内] 내에 1097석, 야마시로[山城]에 50석...으로 약 3000석. [본문으로]
  8. 임진왜란. [본문으로]
  9. 무가(武家)의 수호신 [본문으로]
  10. 지부쇼우유우[治部少輔]. 이시다 미츠나리의 관직명. [본문으로]
  11. 행주산성에 참전하여 부상당했다. [본문으로]
  12. 타이코우[太閤]는 칸파쿠[関白]직에서 물러난 사람을 이르는 경칭. 즉 히데요시. [본문으로]
  13. 당시 키요마사가 히데요시의 안부를 묻는 편지가 있기에(직접 지켰다면 안부 편지 같은 것은 안 쓸테니), 실제로 달려가지 않았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14. 실제 키요마사 근신이 풀리는 데에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주선 덕분이라 여겨지고 있다. [본문으로]
  15. 음력. [본문으로]
  16. 일본측에서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전말을 기록한 "조선 이야기[朝鮮物語]"의 저자. [본문으로]
  17. 정강이에 차는 각반....(저는 행전보단 각반이 익숙합니다만 '행전'으로 쓰라고 하네요) [본문으로]
  18. 단 후에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乱]의 무대가 되는 아마쿠사[天草] 섬 등은 기독교도들이 많았기에 막부에 부탁하여 옆 지방인 붕고[豊後]의 세 개군(郡)과 교환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19. 19만~25만석까지 다양. 개인적인 추측으로 19만석은 키요마사에게 주어진 것이며, 3만석은 키요마사 편제 하의 히고 지역 호족[国人], 거기에 히고[肥後] 안에 있던 히데요시 직할령[蔵入地] 3만석을 키요마사가 대관(代官)이 되어 관리한 것을 포함하여 25만석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본문으로]

에반게리온...인가...

동영상 2009. 12. 14. 22:39 Posted by 발해지랑


근래 블로그계를 진동시키고 있는 에반게리온 파..??
그렇게 재미있고 감동적인가 보더군요.
그런 잔치에 동참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쉽기도 하고 약간 억울하기도 하고...
여태까지 전 에바 시리즈를 본 적이 없거든요.

한창 에바가 동북 아시아를 휩쓸 때,
제 관심사는 야구였습죠.
당시 낮에는 동대문 야구장에서 그 땡볕에 땀 뻘뻘 흘리며 스코어 북 쓰고 있었고, 저녁에는 잠실...이라는 식으로 생활 전부가 야구 구경이었던지라...

덕분에 지금 이 열광에 동참 & 동감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쉽기도, 약간 억울하기도 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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