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2007/11/28'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7.11.28 위키피디아 일본판에 나온 이명박 전 서울 시장 2
  2. 2007.11.28 시마즈 요시히사 7

출처: http://ja.wikipedia.org/wiki/李明博

이 명박(1941년 12월 19일 ~ )은, 한국의 정치가. 전 서울 시장. 신장 173Cm, 체중 70Kg. 혈액형은 B형. 식민지 시대에 있던 창시개명 시의 일본명은 츠키야마 아키히로(月山 明博)(~1945년까지). 호는 일송(一松). 별명은 [컴도저(컴퓨터 + 불도저)], [따스한 남자].

현대 건설 사장, 국회의원(한나라당) 등 요직을 역임했다. 2002년에 서울 시장이 되어, 20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청계천 복원 공사를 실시했다. 또하 한국 대통령 선거(2007년 말)의 전초전인 한나라당 예비선거에서 박근혜 후보에게 승리하여, 대통령 선거의 당 공인 후보가 되었다. 대통령 선거에 있어서의 각종 여론 조사에서는 모두 1위, 2위이다.

인물상

-태어났을 때는 굉장히 가난하여, 중학교 시대에는 영양 실조로 쓰러진 적도 있지만, 졸업할 때의 성적은 전교에서 2위였다고 한다(가장 낮았을 때라도 3위였다). 집이 가난하여 인문계 고교에 진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야간 상고를 다녔다. 참고로 성적은 입학부터 졸업까지 매번 학년 1위였다.

-병역은 입대 후에 기관지 확장증에 의해 제대가 되었다.

-존경하는 인물은 안창호, 간디.

-정계에 입문하기 이전은 경제인으로 유명하여, 중소기업에 지나지 않았던 현대 건설에서 정주영의 가르침 속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36살에 사장에 취임하여 한국 톱 기업으로 상승시켰다. [현대의 한국을 창조한 50인]에 선정되는 등, 한국에서 샐러리맨 신화의 대표적인 인물로 인식되고 있다.

-별명은 [불도저]. 건설업 출신이라는 것도 있어 개발 정책이 특기로, 시장 시대에는 청계 고가도로의 철거와 청계천 복원을 실현했다. 또한 차기 대통령 선거에는 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한반도 대운하(내륙 운하) 프로젝트] 구상을 주요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박정희 정권 시, 한일기본조약 체계의 사전 단계인 한일 회담 반대 투쟁(6.3사태)를 고려 대학 학생회장으로 주도하여, 체포되었다. 대법원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복역 6개월)의 판결을 받았으며, 이 일로 인하여 박정희의 딸이며, 같은 한나라당 차기 대통령 선거 후보 라이벌이었던 박근혜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다고도 한다(출전이 필요)

-한국 정치가가 대부분 그렇듯, 시국에 맞춘 반일적 성향을 때때로 보인다. 예를 들면 일제 강점기 시대에 세워진 현 서울 시청을 태극기로 덮는 이벤트를 개최하거나, 일본 역사 왜곡 교과서 채택 저지를 위해 기부금 1억 3200만원을 모은 것이나, 서울 남산에 세워진 유스 호스텔에 일본인 수학 여행을 유치하여 독도 영유권이나 일제의 잔혹성에 대해서 학습할 기회를 만드는 계획이나, “이시하라 신타로우(동경 도지사)는 4류, 5류인 정치인”이라고 발언, “경제 대국인 일본의 전후 처리는 독일의 그것과 비교하면 구두쇠” 등의 주장이나 활동이 있다.

그러는 한 편 2006년 1월에 세계 경제 포럼에서는 “일부 아시아 정치 지도자들은 과거의 역사에 묶여, 국가 간의 긴장을 높여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며 노무현 정권을 비판하는 발언을 하여, 정부 여당인 열린 우리당에게 [친일 발언]이라고 비판당하거나, 같은 해 11월에 일본에 와서, 아베 신조우(당시)와 회담했을 때에는 “한국 국민의 3대 현안(역사, 독도, 야스쿠니 신사)을 미래지향적인 해결을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부탁하고 싶다”고 직접적인 표현을 피하는 발언을 하는 등, 안과 밖에서의 언동을 나눠서 사용한다.

또한 현대 건설 시대의 경험으로 인하여, 일본의 재계에 인맥이 있다고도 한다([사피오[각주:1]] 2007년 1월 4일판 “세계의 [반일수괴 vs 친일거인(世界の’反日首魁vs親日巨人’)]"에서

-일본어와 영어가 뛰어나다.

-현재 국회 부이장인 이상득은 실제 형이다.

-출생지는 경상북도 포항이라고 했지만, 후에 자서전에서 일본의 오오사카라고 밝혔다. 또한 당시 부친이 [츠키야마(月山)]이라는 성을 창씨하여, 본인도 그 성을 사용했었다고 형인 이상득이 말하고 있다.

약력

* 1941년 – 오오사카부 나카카와치군 카미촌(현 오오사카시 히라노구(大阪市平野区)에서 출생

* 1961년 – 고려 대학교 입학

* 1965년 – 현대 건설 입사

* 1977년 – 현대 건설 사장 취임

* 1988년 – 현대 건설 회장 취임

* 1992년 – 제 14대 국회의원 당선(민자당, 전국구)

* 1996년 – 제 15대 국회의원 당선(신한국당, 서울 종로구)

* 1998년 – 제 15대 국회의원 사임

* 2002년 – 제 32대 서울특별시 시장 취임

* 2006년 – 서울 특별시 시장 퇴임

===========================================================================================================================
졸자가 아는 일본인들은 대부분 이명박 전 서울 시장이 당선되길 바라고 있더군.
  1. 일본 보수 잡지, 세계의 반일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전을 가지고 있다. [본문으로]

시마즈 요시히사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7. 11. 28. 17:50 Posted by 발해지랑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

1611 1 21일 병사(病死) 79.

1533 ~ 1611.

시마즈 씨[島津氏] 16대 당주(). 오오토모 씨[大友氏], 류우조우지 씨[造寺氏]를 격파하여 영토를 확대하지만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항복하고, 가독(家督)을 동생인 요시히로[義弘]에게 물려준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 후에 시마즈 가문[島津家]이 카이에키[改易][각주:1]의 위기에 빠지자,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와 교섭하여 영지(領地)안도(安堵)받았다.

 

 



히데요시가 내린 은거 명령

 

 1595 6.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는 시마즈 씨[島津氏]에게 영지안도장(領地安堵)을 발급하였다.

 시마즈 가문[島津家]이 점하고 있던 영지에 행해지던 태합 검지[각주:2]가 종료되어 산출된 57 8천 여석의 영유(領有)를 승인한 것인데, 그 영지안도장에 쓰여진 이름은 시마즈 가문당주 요시히사가 아닌 동생 요시히로[義弘]로 되어있었다. 이것은 토요토미 정권에 비협조적인 요시히사에게서 시마즈 가문의 가독을 몰수하고, 친 토요토미 적인 요시히로를 시마즈 가문 당주로 삼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동시에 요시히사는 시마즈 가문이 대대로 거성(居城)을 삼고 있던 사츠마[薩摩]카고시마[鹿児島]에서 물러나라는 명령을 받아, 오오스미[大] 토미쿠마[富隈]에 있는 토미쿠마 성[富隈城]으로 자리를 옮겼다. 또한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가 끝난 후인 1604년에는 오오스미[] 코쿠부[国分]에 마이즈루 성[舞鶴城]을 신축하여 거성으로 삼았다.

 

 단지 요시히로의 가독 계승은 토요토미 정권이 요시히사나 시마즈 가신단의 의향을 무시하고 멋대로 결정한 것이었기에 실권은 여전히 요시히사가 계속 쥐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실권을 누구에게 물려주는가에 대해서 강제로 은거를 당했던 요시히사를 끊임없이 고뇌하게 만든 것이다.

 

세 딸과 두 명의 후계자 후보.

 

 요시히사에게는 세 명의 아이가 있었지만 모두 여자였다.

 

 첫째 딸인 오히라[御平] 1551년생으로, 삿슈우 가문[薩州家][각주:3]의 시마즈 요시토라[島津 義虎]에게 시집갔다.

 요시토라의 부친 사네히사[久]와 요시히사의 부친 타카히사[貴久][각주:4] 예전에 종가(宗家)의 가독을 쟁취하려고 계속 다투어 왔던 사이였기에 요시토라도 겉으로는 요시히사에게 복종하고는 있었지만 그 본심은 알 수 없었다.

 1585년. 요시토라가 병으로 죽어 오히라가 낳은 타다토키[忠辰]가 그 뒤를 이었지만, 그 타다토키도 진심으로 복종한 것이 아니었기에 틈만 나면 본가를 탈취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1592년. 조선 출병 시[각주:5]에 요시히사의 휘하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멋대로 행동하다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다음 해인 1593년 카이에키 당하여 처지를 한탄하다 병으로 죽었다.

 또한 오히라는 타다토키 외에 타다키요[清], 타다히데[栄] 등의 아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삿슈우 가문 카이에키 후 히고[肥後] 반국()를 영유(領有)하고 있던 코니시 가문[小西家]로 보내져 유폐되어 있었기에 요시히사의 후계자로 삼기 힘들었다.

 

 둘째 딸(이름 불명)[각주:6] 1563년생으로, 타루미즈 가문[垂水家] 시마즈 테루히사(島津 彰久)의 부인이 되었다.

 타루미즈 가문은 타카히사의 동생 타다마사[忠昌]를 시조로 하는 가문으로, 테루히사는 3대째 가주(家主)였다. 테루히사는 1594 7월 조선에서 병으로 죽었지만, 1585년 그와의 사이에서 둘째 딸이 타다나오[忠仍]를 낳았었다.

 

 또한 셋째 딸 카메쥬[亀寿] 1572년생으로, 처음엔 요시히로의 세자(世子)인 히사야스[久保]에게 시집갔지만, 1593년 조선에서 히사야스가 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그 동생인 타다츠네[忠恒]와 재혼했다.

 

 이 때문에 둘째가 낳은 외손자 타다나오와 셋째 카메쥬의 남편이며 사위 겸 조카인 타다츠네. - 이 둘이 요시히사의 후계자 후보가 된 것이다.

 

제비뽑기로 정해진 후계자

 

 요시히사가 은거했던 1595년. - 타다나오는 11, 타다츠네는 20살이었다.

 요시히사는 자신의 피가 흐르는 외손자 타다나오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싶었던 듯하지만 너무 어렸다.

 

 타다나오의 혈통을 이어받은 신죠우 시마즈 가문[新城 島津家]의 족보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다.

 요시히사는 사위인 타다츠네로 할지 외손자인 타다나오로 할지 고민했지만 결국 결심하지 못하였고, 쇼우하치만 궁[正八幡宮] 현 카고시마 신궁(鹿 神宮)에서 후계자를 정할 제비뽑기를 하였다.

 그 결과. 타다츠네를 후계자로 하는 제비가 뽑아져 요시하시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고 한다.[각주:7][각주:8][각주:9]

 이 제비뽑기의 이야기는 '신죠우 시마즈 가문 족보[新城島津家家譜]' 이외의 사료에서는 확인할 수 없지만 필시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요시히사는 타다츠네와 카메쥬 사이에서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남자 아이가 태어나길 기대하고 있었다. 타다츠네는 이 외손자가 가독을 이어받을 때까지의 징검다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요시히사의 기대와는 반대로 둘 사이에서는 아들이 생기질 않았다. 카메쥬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아이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낮아지자, 요시히사의 머리 속에서는 타다나오를……’이라는 생각이 갈수록 짙어져만 갔다.

 이리해서 가독 계승문제가 다시 문제가 되어 요시히사와 요시히로-타다츠네 부자(父子)간의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또한 가신들도 타다츠네 파()와 타다나오 파()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그러던 중 요시히사는 병이 나 1611 1 21.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향년 79.

 요시히사의 사망으로 인해 가독 계승문제는 잠잠해져, 타다나오를 지지했던 가신 일부가 숙청되는 것을 끝으로 가문 분열의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마즈 가의 가독은 타다츠네에서 타다츠네의 측실(側室)이 낳은 미츠히사[光久]에게로 이어졌다. 이 측실의 부친은 코니시 가문으로 유배를 갔던 삿슈우 가문의 시마즈 타다키요 - 즉 요시히사의 첫째 딸인 오히라의 아들이었다.

 종가(宗家) 적류(嫡流)에 자신의 피를 남기고 싶어했던 요시히사의 꿈은 외손의 혈통이 이어가는 것으로 현실이 되었다.

  1.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줄임. [본문으로]
  2. 타이코우 켄치(太閤 検地)라 읽음. 태합[太閤] 히데요시가 통일된 규격으로 논밭(영지안의 산과 숲은 제외)의 생산량을 계산하여 세금, 부역을 산출 혹은 할당하게 한 것. [본문으로]
  3. 삿슈우는 사츠마[薩摩]의 별칭. 시마즈 가문의 분가(分家), 당주가 대대로 사츠마노카미[薩摩守]를 자칭했었던 것이 이름의 유래. [본문으로]
  4. 사츠마의 이사쿠[伊作] 지역를 영유(領有)하고 있던 시마즈의 분가 이사쿠 가[伊作家] 출신. [본문으로]
  5. 임진왜란을 말함. [본문으로]
  6. 타마히메[玉姫]라는 설이 있음. [본문으로]
  7. 일본은 예전부터 중요한 일을 정하는 제비뽑기를 신의 뜻이라 여겼기에로 정했기에 아주 어처구니 없는 일은 아니었다. [본문으로]
  8. 무로마치 막부[室町 幕府]의 6대 쇼우군[将軍]인 아시카가 요시노리[足利 義教]는 3대 쇼우군 요시미츠[義満]의 셋째 아들로, 별칭이 [제비뽑기 쇼우군]라 한다. 형인 4대 쇼우군 요시모치[義持]의 아들인 5대 쇼우군 요시카즈[義量]가 아버지 보다 먼저인 19살의 나이에 죽고, 3년 뒤에 요시모치도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채 죽었다. 그 때문에 당시의 칸레이[管領 – 무로마치 바쿠후의 수상 격] 하타케야마 미츠이에[畠山 満家]는 3대 요시미츠의 아들들 사이에 누구를 쇼우군[将軍]으로 할지 이와시미즈하치만 궁[石清水八幡宮]에서 제비뽑기를 한 결과, 당시 중이었던 기엔[義円]을 환속시켜 쇼우군[将軍]으로 추대하였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9. 또한 현대에 이르러서도 각종 선거에서 동수의 표를 얻었을 경우에는 제비뽑기로 당선자를 정한다. 2007년 11월 27일만 하더라도 오키나와[沖縄]의 나고 시[名護市]의 시장은 제비뽑기로 정해졌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