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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7.06.18 타카야마 우콘 - 신앙을 지키며 먼 마닐라에서 객사 4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

1586 5 4일 병사(病死) 52.

생년불명[각주:1] ~ 1586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겨 셋츠() 아리오카(有岡)()의 성주(城主)가 되었다. 후에 모우리(毛利)(), 혼간지(本願寺)와 손을 잡고 모반을 일으키지만 실패하여 도망쳤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시대가 되자, 센노 소우에키(千 宗易)에게 다도(茶道)를 배워, [利休七哲[각주:2]]의 한 사람으로 꼽힐 정도의 다인(茶人)이 되었다. (그림은 KOEI의 태합입지전V)






풍류의 자리에 있던 이외의 인물



 혼노우(本能)()의 변이 일어난 지 1 3개월 정도 지난 1583 9 16.

 아라키 무라시게는 죽은 오다 노부나가를 대신하여 쿄우토(京都)와 킨키(近畿)의 새로운 패자(覇者)가 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가 처음으로 개최한 [차 도구 전시회 = 御道具揃]에 참가하였다. 이미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道薰(도우쿤)]이라는 호를 칭하고 있었다. 참가한 면면(面面)을 보면,

구우나이쿄우(宮内卿) 호우인(法印[각주:3])[마츠이 유우칸(松井 友閑)]

소우에키(센노 리큐우 = 千 利休)

모즈야 소우안(万代屋 宗安)

텐노우지야(天王寺屋[츠다(津田)]소우규우(宗及)

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전부 노부나가의 풍류 취미와 관련된 스키샤(数奇者[각주:4])이며 사도우(茶頭[각주:5])였다.


더구나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케다 쇼우뉴우(勝入)[츠네오키(恒興)],

의사인 토쿠운켄(德雲軒)[야쿠인 젠소우(院 全宗)]

가 있었다. 츠네오키는 노부나가의 유형제(乳兄弟[각주:6])였으며, 토쿠운켄은 산몬(山門[각주:7])이나 조정에 연줄이 있는 승의(僧醫)였기에 둘 다 히데요시의 권력장악에 불가결한 사람들이었다.


 소우규우나 소우에키라는 당대 풍류의 세계를 둘로 나뉘고 있던 다도(茶道)의 거장들과 섞여 무라시게가 내 놓은 것은 [모모지리(桃尻)의 하나이레(花入[각주:8])], 못케이(牧溪)가 그린 걸개 그림인 [범귀회(帰絵)], [효우고(兵庫)의 오오츠보(大壷)] 어느 것이나 이름있는 명물이었다.


 주군(主君)의 복수전이 된 야마사키(山崎)의 싸움에서 이기고, 자기 입으로 일본 통치는 이제부터라고 한 시즈가타케(賤ヶ岳)의 싸움 및 키타노쇼우(北ノ庄)()의 싸움을 이겨 정청(政廳)으로 오오사카(大坂)()과 쿄우토(京都)에 저택을 짓기 시작한 히데요시의 면목을 살리기에 충분한 전시회가 되었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이상한 것은 이러한 장소에 어째서 무라시게가 있을 수 있었냐는 점이었다.


 무라시게라고 하면 1578 10월.

 혼간지(本願寺)에 딸을 인질로 보내어 법주(法主)인 켄뇨 코우사( 光佐)와 맹약을 맺고서는 주군인 노부나가에게 반역을 한 다이묘우(大名)가 아니었던가? 그 때문에 거성(居城)에서 쫓겨나 영지(領地)도 잃고 방랑의 몸이 되었던 인물이 아니었던가? 그런 무라시게가 하필이면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히데요시 밑에 있는 것은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확실히 무라시게는 셋츠의 이케다(池田)()의 부하에서 올라 온 토자마(外様[각주:9])의 신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셋츠의 국주(国主)로 발탁시켜 준 노부나가를 가장 중대한 국면에 배반하여 숙적인 혼간지(本願寺)와 모우리(毛利)()의 연합세력으로 달려간 반역자였기에 오다(織田)쪽에게 있어서는 용서할 수 없는 인물이었을 터였다.


다인(茶人)으로 여생을 보내다.


 당초 여러 방법으로 무라시게의 뜻을 돌릴 방법을 시도했던 노부나가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자 공격에 전념하였다.

 우선 무라시게에게 가담하고 있던 셋츠 타카츠키(高槻)()의 성주인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과 이바라키(茨木)()의 성주인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 清秀)등을 귀순시킨 후에 무라시게의 거성(居城) 아리오카(有岡)를 포위하였다. 1578 11월부터 10개월간에 걸친 장기 포위전을 전개 하여 다음 해 1579 9 2 무라시게가 처자식을버려둔 채 아리오카성()을 탈출하여 아마가사키(尼崎)()으로 도망치자, 노부나가 군세는 아리오카성을 함락시켜 무라시게의 처자식과 친척 36명을 쿄우토(京都)의 로쿠죠(六条) 강변(河原)에서 처형하였고, 가신(家臣)의 처자식 120여명을 성 아래서 십자가 같은 곳에 매달아 창으로 찔러 죽였으며, 510여명을 역시 성 아래 4개의 집에 쳐 넣고 불을 질러 죽였다.[立入左京亮入道隆佐記].

 그 비참함엔 구경하던 사람도 눈물을 흘렸고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여서 부처가 이 세상을 창조한 이래로 이러한 일은 없었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한다.


 이런 학살이 일어날 즈음. 무라시게는 아마가사키(尼崎)()에서 하나구마(華熊)()으로 피난하였지만 여기도 1580 7월 초 즈음에 오다 세력에게 공격받아 낙성(落城)되자 모우리(毛利)()의 영토로 도망쳤다.자신의 처자식뿐만 아니라 친척, 가신의 처자식마저 참혹한 죽음을 당하는 와중에 거성(居城)이나 일족(一族), 가신을 계속해서 버려가며 도망친 무라시게의 목적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무라시게가 주가(主家)인 이케다(池田)()를 쓰러뜨리는 하극상(下剋上)으로 몸을 일으키긴 했지만 노부나가에게 반역을 일으킨 것은 참언(讒言)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시야마(石山)()[本願寺]을 포위하고 있던 아라키 무라시게의 부대에서 매일 밤마다 작은 배를 이용하여 성()안으로 쌀을 팔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자 노부나가에게 변명을 하려 했던 무라시게를 측근인 나카가와 키요히데가 만류하여 어쩔 수 없이 반역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자세한 사정을 안 노부나가의 적남(嫡男) 노부타다(信忠)나 히데요시들이 무라시게를 굉장히 불쌍히 여겼다고 한다. [寬政重修諸家譜]


 이 때문인지 혼노우(本能)()의 변 후 머물던 빙고(備後) 오노미치(尾道)에서 다인(茶人)인 츠다 소우규우(津田 宗及)에게 사람을 보내는 등 해서 히데요시에 대한 알선을 의뢰한 듯하다. 히데요시에게서 셋츠인지 이즈미(和泉)에 조그만 영지(領地)를 받았다고 전해지지만 주로 다도(茶道)를 통해 섬겼던 듯하다. 모우리(毛利)()와 관계 개선을 꾀하려 하던 히데요시에게 무라시게라는 존재가 필요했을 것이다.


 1586년에 사카이()에서 죽었다.

 후반생은 하극상으로 몸을 일으켰던 효웅(梟雄)의 이미지와는 먼 일개의 스키샤(数奇者)와 같은 최후였다.

  1. 위키피디아와 KOEI 태합입지전 평전에는 1535년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2. 리큐우(=宗易)에게 배운 제자들 중 뛰어난 일곱 제자. 문서에 따라 다르나 주로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후루타 시게테루(古田 重然), 시바야마 무네츠나(芝山 宗綱, 세타 마사타다(瀬田正忠), 카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마키무라 토시사다(牧村利貞)를 지칭함. 아라키 무라시게의 경우 오다 우라쿠사이(織田 有楽斎), 리큐우의 아들인 센노 도우안(千 道安)과 함께 십철(十哲)로 꼽힌다. [본문으로]
  3. 승정의 최고위. [본문으로]
  4. 풍류인(風流人)을 말하나 주로 다인(茶人)을 지칭한다. [본문으로]
  5. 다도(茶道)의 자리에서 리드하던 사람. [본문으로]
  6. 같은 여성의 젖을 먹고 자란 사이. 높은 집안의 아이는 모친의 젖이 아닌 다른 사람의 젖을 먹는 풍습이 있었는데, 노부나가는 유모의 유두를 물어 뜯는 버릇이 있었지만 츠네오키의 모친의 젖만은 얌전히 먹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7. 보통은 '절'을 뜻하나 여기서는 히에이산(比叡山) 엔략쿠(延暦)사(寺)를 말함. [본문으로]
  8. 다도할 때 꽃을 꽃아 놓는 도자기. [본문으로]
  9. 대대로 섬긴 가문 아닌 새로 부하가 된 가문. [본문으로]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

1615 1 6일 병사(病死) 63

1552~1615.

셋츠(摂津) 타카츠키(高槻)성주(城主).

세례명 유스토(Justo).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를 섬기며 시즈가타케(賤ヶ岳)의 싸움 등에서 공을 세웠다. 히데요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의 기독교 금교령(禁敎令)으로 인하여 영지를 몰수당하고 국외로 추방 당하여 마닐라에서 병사하였다.








평화로운 생활을 깨트린 추방령


 토요토미노 히데요시에게서,
 [
()을 따르겠느냐? 다이묘우(大名)로 남겠느냐?]라는 힐문에 주저없이 다이묘우(大名)의 지위를 버린 기독교 무장 다카야마 우콘은 카가(加賀) 마에다 가문(前田)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우콘은 카나자와(
)의 해자(垓子)이시가키(石垣) 등의 개수(改修)를 지휘하였고 타카오카 성(高岡)의 건물 위치나 배치(縄張)도 정했다.

 마에다 가문이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편을 든 세키가하라(ヶ原) 전쟁 호쿠리쿠(北陸) 방면의 전투에서도 크게 활약하여 이에야스가, "우콘의 부하 천 명은 다른 무장의 1만 명에 필적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우콘의 정확한 영지는 불명이지만 2만석 전후라 여겨지며 마에다 가문의 역대 당주()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었다.


 우콘은 카가, 노토(能登)를 비옥(肥沃)한 신앙의 땅으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여 예수회에 의뢰해서 수도원을 세우고 선교사를 초대하여 커다란 성과를 올렸다. 2대 번주(藩主) 토시나가(利長)는 그러한 우콘의 좋은 이해자였다.


 우콘은 또한 센노 리큐우(千 利休)를 스승으로 삼아, [리큐우 칠철(利休七哲)[각주:1]]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다인(茶人)이기도 하였다. 리큐우가 히데요시에게 죽음을 선고 받아 쿄우()에서 사카이()로 향하는 배를 타고 떠날 때도, 히데요시를 두려워한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와 함께 둘이서만 배웅했다. 우콘은 와비챠(わび[각주:2])의 극한에 이른 다인으로 '난보우(南坊)'라는 다인호(茶人號[각주:3])를 자칭했다. 신앙과 다도(茶道)…. 카나자와에서의 말년은 평화로웠다.


 그러나 토쿠가와 정권은 오오사카 성(大坂)의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가 에도 바쿠후(江戸幕府)와의 결전을 앞두고 낭인을 소집하고 있으며 또한 이들 중에 많은 기독교 무사가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1612 12 바쿠후(幕府)는 선교사의 국외 추방(バテレン追放令)과 기독교인 명부의 작성을 명령하였다.


 62세인 우콘에게 힘겨운 새해가 찾아왔다.

 바쿠후에서 우콘그의 동료인 나이토우 죠안(内藤 如安[각주:4]) 그리고 그 가족들을 즉각 추방하라는 명령이 마에다 가에 전해졌다.

 친구들은 우콘에게,

[60세를 넘긴 당신은 괜찮지만 손자들이 불쌍하다. 개종(改宗)한 척을 하면 어떻겠나?]하고 설득했지만 우콘은 이를 거절했다.

 우콘은 3대 번주인 토시츠네(利常)에게 앞으로 섬길 수 없음을 사과하고 그 해의 연공에 해당하는 황금 60매를 헌상. 은거하고 있던 토시나가에게도 황금 30매 상당의 다기(茶器)를 보냈지만 이별을 슬퍼하며 받지 않고 오히려 여행에 쓰라며 돈을 더해서 돌려주었다.


 이리하여 1월이라는 가장 춥고 눈도 많은 계절에 우콘은 부인인 쥬리아, 가노(家老)의 집에 시집갔었지만 우콘을 따르기 위해 이혼하고 온 딸, 죽은 장남의 아들인 손자 다섯을 포함한 8명과 죠안의 가족 10명들과 함께 카나자와를 출발하였다. 평소도 넘기 힘든 호쿠리쿠의 산길을 그리스도의 수난을 생각하며 쌓여있는 눈을 손으로 헤쳐가며 걸어서 넘었다.


고난의 마닐라 항해



 나가사키(長崎)의 행정관(奉行)은 우콘 일행에게 국외 추방을 선언하였고 우콘은 존경하는 호레몬 신부가 마닐라로 향한 것을 알고 마닐라 행의 배에 몸을 실었으며 친구인 죠안도 이에 따랐다. 그 배는 너덜너덜한 정크선[각주:5]으로, 1614 11 8 나가사키 항구 밖의 키바치(木鉢)의 항구를 출항했다.


 배에는 350명이나 되는 인원이 꽉 들어차 계단뿐만 아니라 갑판에도 사람이 넘쳤다. 순풍을 만나면 10일이면 도착하지만 계절은 최악으로 1개월이 지나도 여전히 바다 위에 있었다. 위생상태도 나빴고 더구나 마닐라로 들어가기 직전에 폭풍우를 만나 돛대가 부러져 어선에 발견되기 전까지 4일간 바탄 반도의 앞바다를 표류하였으며 이 때문에 배 안에서 4명이 죽었다.


도착 직후에 객사


 그러나 선교사의 보고로 우콘 등이 얼마나 독실한 신자였는지를 알고 있던 스페인 현지 총독 후앙 데 실바는 표류하는 배를 구원하여 성벽도시 인트라므로스의 해안으로 견인하였다.


 일행은 요새에서 발사되는 축포로 환영 받으며 마닐라에 첫발을 내딛자 교회의 종들이 일제히 울렸고 의장병과 시민들의 환호를 받았다. 총독은 국빈 대우로 우콘을 맞이하여 신앙의 스승으로 앞으로도 오랫동안 머물기를 바랬다.


 그러나 이때 이미 우콘의 몸은 배에서의 열악한 환경, 거기에 마음의 피로가 겹쳐 병마에 침식당하고 있었다. 마닐라에 상륙한지 44일 후인 1615 1 6(서력 2 3), 가족과 죠안이 보는 앞에서 63세로 죽었다.

총독관저의 거실로 옮겨진 관 속의 우콘은 무인을 상징하는 갑옷과 다인을 의미하는 쥬우토쿠(十徳) 두건을 쓴 모습으로 마치 살아있는 듯이 보였다 한다.


 우콘의 관은 총독을 시작으로 재판관, 수도사, 시회 의원, 유력자 등이 바꿔가며 메었고 700미터 떨어진 산 타아나 교회로 이어져 그 교회의 주제단에 가까운 곳에 관구(管區)의 어른들이 영면을 취하고 있는 관들 사이에 놓였다.

 이 교회는 지진이나 폭격으로 파괴되어 지금은 존재하지 않으며, 유골은 이곳 저곳을 떠 돈 끝에 현재는 케손 시티 교외의 노바레체스 수도원의 합동묘에 죠안과 함께 잠들고 있다고 여겨지고 있다.

  1. 리큐우 휘하의 뛰어난 제자 일곱 명.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후루타 시게테루(古田 重然), 시바야마 무네츠나(芝山 宗綱)), 세타 마사타다(瀬田正忠), 카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마키무라 토시사다(牧村 利貞))을 이름. [본문으로]
  2. 말하자면 화려함 보다는 간소함을 찾는 다도(茶道)형식. [본문으로]
  3. 다도의 세계에서 쓰는 호를 말함. [본문으로]
  4. 우리나라에는 '소서비(小西飛)'로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5. 중국식의 배를 말함.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