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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12.02 사토미 요시타카
  2. 2004.12.02 오오타 도우칸

사토미 요시타카(里見 義堯)

1574 6 1 병사(病死)


1507 ~ 1574.

호우죠우(北条)씨의 원조를 얻어 숙부 요시토요(義豊)를 무너뜨리고 아와(安房)를 장악하였다. 후에 카즈사(上総)에 진출하여 쿠루리(久留里)성을 본거지로 삼았다. 바다를 건너 카마쿠라(鎌倉)미우라(三浦)를 침공하는 등 호우죠우(北条)씨와 대립. 미후네야마(三船山)합전(合戰)에서 승리를 거둠으로 카즈사(上総)를 확보했다.

(그림은 태합입지전 V에서)






호우죠우(北条)씨에 철저항전


 센고쿠(戦国) 초기의 칸토우(関東)의 무장들 사이에는 [카이도우히칸(海道被官)]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호칭이 있었다.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이 원군을 요청 받아 에치고(越後)에서 곧잘 코우즈케(上野), 무사시(武蔵), 사가미(相模)등 칸토우(関東)로 진공(進攻)해 오면 호우죠우(北条)씨를 따르고 있던 무장들도(領內)를 통과하는 동안만은 켄신(謙信)에게 신종(臣從)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것을 카이도우히칸(海道被官)이라 했다.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나 우지마사(氏政)도 켄신(謙信)과 직접 무력 충돌을 일으키는 것을 피하여 퇴각하는 일도 많아 결국 켄신은 커다란 수확을 올리는 일 없이 에치고(越後)로 돌아갔다. 그 후 칸토우(関東)는 다시 원래대로 호우죠우(北条)씨의 세력하(勢力下)에 두어졌다. 이것이 몇 번이나 반복되어졌다. 그러한 주변 정세 속에서 어디까지나 호우죠우(北条)씨에게 끝까지 항전을 계속 한 것이 보우소우(房総 아와(安房)과 카즈사(上総)의 양지방을 이름)의 센고쿠 다이묘우(戦囯 大名) 사토미 요시타카(里見 義堯)였다.


 그런 요시타카(義堯) 1534년 부친 사네타카(実堯)의 원수인 숙부 사토미 요시토요(里見 義豊)를 물리치고 사토미가()의 당주(当主)가 되어 아와(安房) 일국(一国)의 통치자가 되었을 때는 호우죠우 우지츠나(北条 氏綱 우지야스의 부친)의 원군에 의지했었다.


 그러나 3년 후.

 호우죠우(北条)씨가 보우소우(房総)에 탐욕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뒤로는 약 40여년에 걸쳐 일관돼게 호우죠우씨를 적대하며 싸웠다.

 호우죠우씨는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진공(進攻)을 경계하면서도 뒤로는 언제나 사토미 요시타카의 공격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사토미 요시타카가 적자(嫡子) 요시히로(義弘)에게 가독(家督)을 물려준 것은 1561년으로 요시타카 55, 요시히로는 32살 때였다. 이 해의 3 우에스기 켄신은 호우죠우 우지야스의 오다와라(小田原)성을 2개월간에 걸쳐 포위하였는데 사가미(相模)를 제외한 칸토우(関東) 7개국의 무가(武家) 250여 가문이 참가하였고 그 중에는 요시타카를 대신하여 참가한 요시히로도 있었다. 보우소우(房総) 사토미(里見)씨의 통솔자로서 대외적인 요시히로의 데뷔 무대였지만 사토미씨의 실권은 이후로도 카즈사(上総) 쿠루리(久留理)성에 있던 요시타카가 장악하고 있었기에 평온한 은거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투를 벌이는 사토미(里見), 호우죠우(北条)


 요시타카는 호우죠우씨와 몇 번이고 싸웠다.

 그중에서도 중대한 전투가 세번있었다. 1538년과 1564년 두번에 걸친 시모우사(下総) 코우노다이(国府台)의 싸움에서는 두번이나 대패하여 아와로 도망쳐 돌아왔다.

 두번째 때에는 우지야스()이 카즈사(上総)까지 공격해 들어와 한때는 요시타카의 거성(居城) 쿠루리성도, 요시히로의 사누키(佐貫)성도 점령당했다. 그러나 2년 후에는 세력을 되찾는다.


 호우죠우 우지야스는 사토미씨의 숨통을 끊어 놓기 위해 카즈사로 침공하여 1566년 미후네야마(三船山)에 요세를 쌓았다. 요시히로의 사누키성에서 북쪽으로 불과 4킬로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다음해 우지야스는 우지마사(氏政), 우지테루(氏照)에게 3만의 병사를 주어 사누키성, 쿠루리성의 공격을 명했다.

 요시타카는 쿠루리성에서 아들인 요시히로에게 기동전(機動戰)을 명했다. 8천의 병력으로 선수를 쳐서 미후네야마(三船山)의 호우죠우군()을 남과 북에서 협격했다. 호우죠우군 3만은 산 위에 있었기에 잘 움직이질 못하고 밀려 무너지는 형태로 서쪽의 쇼우지(障子)계곡으로 내려갔으나 그곳은 땅이 물렁물렁해 발이 빠져 전투태세를 취할 수가 없는 상태에서 사토미군의 맹공을 받았다. 호우죠우군은 2500여의 사상자를 내고는 패주했다.

 사토미 요시히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병선(兵船)을 보내어 미우라(三浦) 반도의 키쿠나우라(菊名浦)까지 계속 항해하여 호우죠우 츠나시게(北条 綱成)의 수군(水軍)을 물리쳤다. 호우죠우씨의 사토미 공략은 대패로 끝나 번 다시 보우소우(房総)로 침공하지 않았다.


무너진 호우죠우 협격책(挾擊策)


 미후네야마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요시타카는 이미 61.

 계속해서 호우조우씨 토멸(討滅)에 의욕을 보이며 시모우사(下総)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1569 지금까지 함께 호우죠우씨를 협격하고 있던 우에스기 켄신이 호우죠우와 동맹을 맺어버렸다. 타케다 신겐의 스루가(駿河) 침공과 서진(西進)에 따른 결과였다.


 요시타카는 호우죠우씨를 칠 절호의 기회를 잃었고 켄신의 배반에 격노하며 반대로 신겐과 동맹을 맺어 호우죠우씨 협격을 계속했다. 그러나 2년 후 호우죠우 우지야스는 켄신과 절교하며 타케다 신겐과 재동맹을 맺었기에 요시타카, 효시히로 부자는 다시 우에스기 켄신과 반()호우죠우의 공투(共闘)동맹을 맺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상경(上京)으로 인하여 여러 다이묘우들의 행동이 크게 변화할수 밖에 없던 것이 보우소우(房総)의 사토미 요시타카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1574년 6월 1일.

 요시타카는 카즈사(上総), 시모우사(下総)의 산과 들이 내려다 보이는 쿠루리성에서 반()호우죠우의 불길을 계속 지펴온 68년의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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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타 도우칸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4. 12. 2. 06:19 Posted by 발해지랑

오타 도칸[太田 道灌]

1486 7 26 모살(謀殺) 55


1432 ~ 1486.

이름은 스케나가[資長]. 오우기가야츠 우에스기 씨[扇谷 上杉氏]씨를 섬겼으며, 에도[江戶]에 성을 축성하여 거성으로 삼았다. 오우기가야츠, 야마노우치[山內]의 양 우에스기 씨간의 대립에서 주가(主家)를 위해서 무공을 세웠지만, 주군인 우에스기 사다마사[上杉 定正]에게 살해당한다. 학문, 문예를 좋아했으며, 와카[和歌] 또한 뛰어났다











잠깐 동안의 평화


 오오타 도우칸은 1485 9월 반리 슈우쿠[万里 集九]를 에도 성[江戶城]으로 초대하였다.

 반리[万里]는 린자이 종[臨濟宗] 소우코쿠 사[相国寺]()의 승려로 한시인(漢詩人)으로 높은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오우닌의 난[応仁の乱]을 피해 미노[美濃]에 살고 있었다.

 도우칸은 이때 54세였다. 반리[万里] 4살 연상인 58세로 두 사람은 마치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인 것처럼 약 10개월간 마음을 열고 이야기하면서 서로 시가(詩歌)를 함께 만들었다. 도우칸에게 있어서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였을 것이다.


 도우칸은 24살에 아버지 도우신[道真]에게 가독(家督)을 물려 받은 이래 30년간 오우기가야츠 우에스기 씨[扇谷 上杉氏]의 가재(家宰[각주:1])로써 정무와 군사로 쉴 틈 없는 세월을 보내왔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1454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각주:2]] 우에스기 노리타다[上杉憲忠]가 카마쿠라 쿠보우[鎌倉 公方[각주:3]] 아시카가 시게우지[足利 成氏]에게 모살(謀殺)되었고 이후 코가 쿠보우[古河 公方[각주:4]]가 된 아시카가 시게우지와 칸토우칸레이 우에스기 아키사다[上杉 顕定]칸토우[関東]의 무사들을 둘로 나누어 25년간 싸웠다.

 1476년에는 우에스기 아키사다의 중신(重臣) 나가오 카게하루[長尾 景春]가 아시카가 시게우지와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켜 도우칸은 30차례가 넘는 야전, 공성전을 사가미[相模], 무사시[武蔵], 코우즈케[上野], 시모우사[下総]에서 전개하여 쿄우토쿠의 난[享德の乱]을 종결시켰다.


 이즈[伊豆]에서는 호우죠우 소우운[北条 早雲]이 태두하여 호시탐탐 사가미, 칸토우[関東]평야를 노리고 있었다. 칸토우의 무가(武家)들 사이에서는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 우에스기 아키사다[上杉 顕定]나 오우기가야츠 우에스기 사다마사[扇谷上杉 定正]에게 실망을 느끼는 반면 그에 비례해서 오오타 도우칸[太田 道灌]의 명망은 높아만 갔다.


 그리고 칸토우에 겨우 평화가 방문했다. 도우칸은 코가 쿠보우[古河 公方]와의 싸움에서 최전선기지이며 당시 비할대 없이 견고한 성이었던 에도 성[江戶城]성에서 반리 슈우쿠[万里 集九]를 맞이한 것이다.


반리 슈우쿠(万里 集九)와의 시가(詩歌)


 도우칸은 어렸을 적에 카마쿠라[鎌倉] 고잔[五山[각주:5]]에서 학문을 배워 학자로서도 전도가 유망했다. 그 후 무사(武事)에 골몰하는 날들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책을 가까이 두며 시가(詩歌)를 만드는 즐거움을 잊으려 하지 않았다.


 반리 슈우쿠[万里 集九]를 맞이한 다음해 봄.

 55세를 맞이한 도우칸은 카마쿠라에서 켄쵸우 사[建長寺], 엔카쿠 사[円覚寺]의 시승(詩僧)들을 초대하여 반리[万里]와 함께 수미다 강[隅田川]에 몇 척의 배를 뛰어놓고 시가(詩歌)의 연회를 개최하였다. 도우칸은 또 6월에 반리와 함께 무사시[武蔵] 오고세[越生]의 산촌에 칩거하고 있는 부친 도우신[道真]을 방문해 몇 일을 함께 보냈다.

 도우신[道真]은 예전 카와고에 성[河越城]에 소우기[宗衹], 신케이[心敬]를 초대해서 렌가회[連歌会]를 열어 [河越千句]를 남길 정도인 무장 가인(武将 歌人)이었다. 은거소(隱居所) '지토쿠켄[自得軒]'에서 도우칸 부자와 반리는 렌가회[連歌会]를 열어 시로 서로의 마음을 통하였다.


 다음달인 7월.

 반리 슈우쿠와 여전히 문()의 세계를 즐기고 있던 도우칸은 주군 우에스기 사다마사[上杉 定正]에게 초대를 받게 되었다. 도우칸은 아무 의심도 없이 에도성을 출발하여 26일에는 사가미[相模] 카스야[糟屋]에 있는 사다마사의 저택을 방문하였고 거기서 암살당했다.


주군(主君)에 의한 모살(謀殺)


 도우칸의 죽음에 대해서는 살해 장소도, 이유도 여러 가지가 전해지고 있는데 반리 슈우쿠 14일 후의 기일(忌日)에 기록한 제문(祭文)에는

도우칸 공()은 사가미 카스야에 있는 주군의 저택에서 칼로 인해 쓰러졌고, 혼은 날라갔다.
 고 기록되어 있어 방문한 당일 우에스기 사다마사[上杉 定正]에 의해 살해 된 것을 알 수 있다.


 후년(後年).

 도우칸[道灌]의 손자의 손자인 오오타 스케타케[太田 資武]가 오오타 가및 널리 전해지고 알려진 것들을 기록해 놓았는데 거기에는,

죽음에 대한 정설(正說)은 목욕탕 건물의 입구로 나왔을 때 소가 효우고[曾我 兵庫]라는 자가 휘두른 큰 칼[太刀] 맞았고, 쓰러지면서 '당가멸망[当方滅亡]'이라고 마지막에 외쳤다.

 도우칸이 주군의 계략에 빠져 [당가멸망]이라고 최후에 외쳤다는 것을 보면 도우칸이 평소부터 주군을 의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년 후. 우에스기 사다마사[上杉 定正]가 소가 붕고노카미[曾我 豊後守]에게 보낸 편지에서,

도우칸은 에도, 카와고에성을 굳건히 하며 종가(宗家)인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아키사다[山內 上杉 顕定]를 쓰러뜨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꾸짖었으나 결국 역심을 일으켰기에 주살하였다.
고 자기 변호하고 있다.


 도우칸이 죽은 후 오우기가야츠[扇谷], 야마노우치[山內]의 양 우에스기[上杉] 세력은 리더쉽의 결여로 인하여 칸토우[関東]의 여러 무장들의 지지를 잃었고, 이즈[伊豆]에서 침공해 온 호우죠우 씨[北条氏]에 위해 도우칸의 말대로 쇠망하게 된다.

  1. 가신(家臣) 중 No.1 [본문으로]
  2. 카마쿠라 쿠보우(鎌倉公方)를 보좌하는 신하 필두. [본문으로]
  3.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가 칸토우(関東)를 관리하기 위해 만든 자리. 대대로 아시카가(足利) 일족이 맡았다. [본문으로]
  4. 카마쿠라 쿠보우는 바쿠후에 개김성이 짙었기에 바쿠후는 이때 스루가[駿河]의 이마가와 노리타다[今川 範忠]에게 시게우지 정벌을 명하였고 당시 시게우지가 다른 전투로 본진 카마쿠라를 비워두었던 틈을 타 점령. 이후 돌아 갈 곳이 잃은 시게우지는 코가[古河]로 자리를 옮겼다. [본문으로]
  5. 카마쿠라에 있는 절 중 가장 격이 높은 다섯 곳을 말함. 서열은 차례대로 - 켄쵸우 사[建長寺], 엔가쿠 사[円覚寺], 쥬후쿠 사[寿福寺], 죠우치 사[浄智寺], 죠우묘우 사[浄妙寺]. 당시 칸토우 학문의 본산이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