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카와 가즈마사 (石川 数正)

1592 12월 병사? 연령 불명

? ~ 1592 ?

토쿠가와(德川) 후다이(譜代)의 가신으로 이야야스를 섬기며 외교, 내정에서 활약하지만,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의 합전 후 갑자기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로 달려가, 시나노(信濃) 마츠모토(松本) 10만석에 봉해진다. 분로쿠의 역(文禄の役[각주:1])에서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으로 출진하지만 이 곳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림은 태합입지전 V>







오해 받아온 역사


 이시카와 이즈모노카미(出雲守) 카즈마사(후에 야스마사(康正))는 처음에 토쿠가와 이에야스를, 후년에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를 섬긴 무장이다.

 이에야스에게서 히데요시로 말을 갈아탄 이유가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변절자와 같은 오해를 주기 때문인지 일반에게는 그다지 인기가 없다. 토쿠가와 바쿠후(幕府)의 관리나 학자의 저서에서도 가벼운 취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에야스가 인질이 되었던 시기부터 그를 위해 힘쓴 공적은 크며 또한 토쿠가와 가문의 일익을 담당한 중요한 중신(重臣)이었던 것만은 틀림 없다.


 태어난 해가 확실치 않지만 이에야스보다도 10살 정도 연상이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이에야스와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동맹을 성립시킨 것을 시작으로 외교, 내정 양쪽에서 수 많은 공적을 올렸고, 노부나가가 죽은 혼노우(本能)()의 변 때는 이에야스를 지키며 이가 도피행(伊賀越え[각주:2])을 함께 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가 가족과 일족을 이끌고 이에야스의 진영에서 빠져나와 히데요시의 가신이 된 것은 1585년 11월 13 이었다.

 당시 그는 이에야스를 대리해서 미카와(三河) 오카자키(岡﨑) 성을 지키고 있었다. 그 전해인 12월에는 자신의 장남인 야스나가(康長)와 차남 야스카츠(康勝)에게 명하여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는 이에야스의 차남 오기마루(於義丸 히데야스(秀康))를 보호하여 히데요시에게 보내는 역할을 맡겼다. 이렇듯 이에야스의 절대적인 신임를 받던 카즈마사가 이에야스에게 한계를 느끼고 떠날 것이라고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듯 하다. 코마키-나가쿠테 전투 후의 평화 교섭을 담당하는 등 히데요시와 접할 기회도 많았던 카즈마사를 히데요시가 많이 꼬드겼을 것이다.


 히데요시의 진영으로 말을 갈아탔을 당시 그는 50세 전후였다고 추정된다. 사망한 것은 그로부터 7년 후인 1592년이기에 이미 말년에 해당한다. 히데요시 휘하에서도 처음부터 중신의 대우를 받으며 통 크게 이즈미(和泉) 내에 10만석의 소령(所領)이 주어졌다(소령의 크기에는 이설 있음). 그리고 큐우슈우(九州) 평정이나 오다와라(小田原) 호우죠우(北条)() 공략에도 참가했다. 그 공적에 대하여 4년 후인 1590년에는 시나노 마츠모토 10만석(실제는 8만여석)에 봉해진다.

 연령은 50대 중반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편안한 은퇴 생활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마츠모토 성 주변은 그때까지 이에야스의 영지, 적지 한가운데에 던져진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카즈마사에 대한 적개심이 강한 주민을 다독거리면서 본거지인 마츠모토 성을 개축하는 것도 급선무였다. 은거는 커녕 지금보다 더 정력적으로 자신의 새로운 영지를 돌아다니며 정무에 몰두했다.


확실치 않은 죽음의 전후


 그러나 새로운 영지에서 차분히 통치를 할 틈도 없이 히데요시에게 중대한 명령을 받았다. 히데요시는 예전부터 꿈꿔왔던 명국 정벌의 제 일보로써 1592년 정월 조선으로의 출병을 결심하며 카즈마사에게도 출병을 명령한 것이다.

 명령을 받은 지 2개월 후인 3월 하순. 카즈마사는 5백명의 병사를 이끌고 큐우슈우(九州)로 내려가 히젠(肥前)의 나고야에 도착하였다. 카즈마사의 옛 주군인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1 5천 명의 대군을 동원해 온 것은 격이 다르니 그렇다 치더라도 같은 시나노(信濃)의 다이묘우(大名)인 센고쿠 히데히사(仙石 秀久)도 천 명을 인솔해 왔다. 그에 비하면 카즈마사의 군단은 작았다.

 그 이후 전국에서 동원된 여러 다이묘우(大名)는 자신의 군세를 이끌고 계속해서 바다를 건넜다. 그러나 카즈마사가 조선으로 건너갔다는 기록은 없다. 히데요시의 신변을 경호 또는 군의(軍議)를 주제하는 참모로서 나고야에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는 히젠 나고야에 있던 중에 병에 걸려 그것이 원인이 되어 죽은 듯 하다.

 무슨 병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일설에는 복어를 먹다가 잘못되어 죽었다고 한다. 정확한 사망일도 알려져 있지 않은데 나고야(名護屋)에 있던 1592년 늦은 시기 - 12월 즈음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같은 해 12 14일에 쿄우()의 시치죠우 강변(七条 河原)에서 장례식이 행해졌기 때문이다.


 카즈마사는 나고야에서 병이 나 치료를 위해서 쿄우까지 돌아왔다가 죽었다고도 한다.

 다른 한편으론 출정 중인 것도 있어 나고야의 진중에서 죽어 유체는 같은 곳에서 화장되고, 유골만이 쿄우토로 옮겨졌다는 설도 있다. 일년 후인 1593년이 되어서 죽었다는 설도 있어, 카즈마사의 말년의 모습과 죽음의 전말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점이 많다. 인품이나 사상도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카즈마사는 히데요시에게 냉우(冷遇)받았다는 설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가 이에야스를 배반하고 히데요시에게로 달려간 것을 안 좋게 생각한 사람도 있어 그것이 이러한 기록 말소나 혼란을 초래한 듯하다.

  1. 일본에서 임진왜란을 지칭하는 말 [본문으로]
  2. 이에야스가 사카이(堺)에서 본국으로 돌아가는 도중 이가(伊賀)라는 지방에서 죽음을 각오할 정도로 고생했다는 것을 말함.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