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7월이 되어 이변이 일어났다. 12일 밤.
후시미[伏見] 도바[鳥羽] 부근을 진원지로 하는 대지진이 일어났다. 사상 유례가 없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대지가 갈라지고 하늘엔 달무리가 져 1 순식간에 후시미, 도바, 요도가와[淀川] 해안의 여러 마을이 무너지고, 후시미 성 밑 마을의 남녀 2천명이 깔려 죽었다.
다이묘우[大名]들의 저택도 예외는 아니었다.
근신중인 키요마사[清正]의 저택도 객관(客館=大書院)이 무너져 내리고, 마구간에서는
불을 뿜었다. 하지만 키요마사는 이런 아수라장에서도 행여 있을지도 모를 위협에서 히데요시를 지키기 위해 성에 오를 것을 결심하여
부하들에게 준비를 명했다. 그 자신 몸에는 하라마키[腹巻]를 입고 흰 명주에 주색(朱色)으로 남무묘법련화경(南無妙法蓮華経)이라 쓰인 겉옷[陣羽織]을 걸치고선 이마에는 주황색 머리띠를 둘렀다. 손에는 8척 2 길이의 봉(捧)을
들었다. 봉은 쓰러진 가옥을 일으키는 지렛대로 쓰기 위해서였다. 무사 30명, 일반 병사 200명에게도
봉을 들게 하여, 여진(餘震)이 계속되는 대지를 박차고 박차며 후시미 성[伏見城]에 당도하였다.
정문은 이미 무너져 쓰러져 있었다. 마츠노마루[松ノ丸]라 불리는 성곽의 망루(望樓)도 무너져 시체가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다. 키요마사는 서둘러 히데요시를 찾으려 하였다.
“혼마루[本丸]로 가자!”
키요마사는 목소리 높여 호령하면서 돌계단을 서둘러 올라가자 혼마루 내의 누각, 건물 등은 전부 쓰러져 있어 비명만이 여기저기서 들려올 뿐이었다. 히데요시가 벌써 깔려 죽었나? 하고 키요마사는 생각했지만 계속해서
등롱(燈籠)을 비추며 여기저기를 탐색하였다. 그러다 설마 하는 기분으로
더 안쪽으로 들어가 문 앞 작은 마당을 지나 문을 거쳐 정원에 들어서자, 정원 안에 쌓은 작은 동산의
잔디 위에 병풍을 둘러치고 카츠기[被布]를 뒤집어 쓰고 앉아 있는 상급 여관(女官) 20명 정도의 무리를 발견했다. 옆에 있는 소나무에 등롱이 걸려 있어 그 불빛이 닿는 곳에 히데요시가
웅크리고 있는 것을 키요마사는 발견했다. 히데요시는 이 이변을 틈탄 자객을 겁내서인지 여성의 의상을
뒤집어 쓰고는 그 화려한 옷 속에 몸을 감추고 있었다. 왕년의 히데요시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잔머리나 굴린 땜질이었다.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마츠노마루도노[松ノ丸殿] 3, 코우조우스(孝蔵主)도 있었다.
키요마사는 가까이 다가가 엎드려서는 코우조우스를 향해서 4,
“졸자는 카토우 카즈에노카미[加藤 主計頭]이옵니다. 타이코우[太閤=히데요시]님을 시작으로 타이코우님를 모시는 여러분들이 깔려 있으시기라도 한다면 이 지렛대로 들어올리고자 근신 자중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왔습니다”
고 큰소리로 말했다. 곧바로 네네는,
“토라노스케[虎之助]”
하고 말을 걸었다. 서둘러 히데요시 앞에서 칭찬을 해버리면 이럴 경우 키요마사의 행동이 공인 받아 히데요시도 그것을 승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잘 왔네. 정말 빨리 와주었구나”
네네는 계속 말했다.
“언제나 언제나 너의 장함과 공적을 든든하게 생각하고 있다네”
라는 네네의 목소리는 키요마사의 목소리보다도 더 컸을 것이다. 키요마사는
더 납작 엎드렸다. 땅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이어서
키요마사는 고개를 들었다. 작법대로 시선은 코우조우스를 향해 코우조우스에게 말을 거는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키요마사가,
“들으시게 코우조우스!”
하고 큰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졸자는 조선에서 억울한 누명을 입었소. 조선팔도에 공격해
들어가 경성(京城)을 제일 먼저 함락시켰으며 5, 조선 왕자 형제 두 분을 잡기도 하였고 6, 나중에는 간도(間島)의 오랑캐 땅까지 쳐들어갔으며, 길주(吉州)에서는 10만기(騎) 7의 적을 쳐부수고 대장을 잡아 죽였으며, 그 외에도 뼈가 부서지도록
일을 하였건만 되돌아 온 것은 억울한 누명밖에 없어소. 타이코우님께선 지부쇼우[冶部少=미츠나리]의 말만을 믿으시며 그것의 진실인지 거짓인지 조사조차 해 주시지 않으시오”
라고 말하였다. 네네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며 키요마사의
말이 끝나자,
“전쟁터에서의 피곤이 쌓였는지 토라노스케의 얼굴이 굉장히 힘들어 보이는구나”
라고 말하며, 키요마사를 위해서 히데요시의 동정을 자극해
주었다. 또한 히데요시에게,
“토라노스케에게 중문(中門)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다른 장수들의 모습은 여전히 볼 수가 없군요”
라고 말하자, 히데요시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 인해 키요마사의 근신을 풀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뒤 네네는 히데요시를 더욱 설득하여 키요마사를 위해서 변호를 하였다. 결국 히데요시는,
“토라노스케를 거시기... 그래 용서한다”
고 말했다. 네네는 곧바로 코우조우스를 중문으로 서둘러
보내 키요마사에게 그것을 알리게 하였다. 네네가 자신의 피보호자를 위해서 해 준 마지막 중재(仲裁)였던 것일 지도 모른다.
이 해로부터 3년째의 초가을. 히데요시는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죽었다.
유언에 따라 오대로(五大老) 필두인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히데요리[秀頼]를 대신하여
조선에 있던 장수들을 철수시켰다. 조선에 있던 키요마사는 하카타[博多]에 상륙하여 후시미[伏見]로 돌아오자 복수를 선언했다. 지부쇼우를 죽이겠다고 하였다.
“나도 끼워 주게”
하고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등 오와리(尾張) 파벌의 장수들이 너도나도 달려와서는 키요마사를 따르겠다고 하였다. 복수심에 불타는 키요마사와는 달리 그들에게는 단순히 미츠나리를 조금 미워했던 감정 외에도 히데요시의 죽음을 기회로 미츠나리와 그의 파벌을 모조리 쓸어버려, 토요토미 가문의 권세나 중심을 그들이 생각하기에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 놓고 싶다는 정치적인 충동이 일었을 것이다. 적어도 쿠로다 나가마사, 이케다 테루마사, 아사노 요시나가는 그런 쪽의 – 즉 정치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다.
사태는 절박했다. 공연한 소란이 아니었다. 때때로 시가전(市街戰)까지
일어날 뻔 했다. 미츠나리,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쪽도 방심하지 않고
자기들 저택 주변에 바리케이트를 설치하고, 벽 구석구석에 망루를 설치하여 경계하였다. 이 사태를 이에야스는 이용하였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죽는 순간부터 히데요리의 정권을 빼앗을 궁리만 하였고, 그것만을 생각하며 신중히 그러나 민첩하게 행동했다. 이에야스는 이
토요토미 가문의 분열 소동을 관찰하여 철두철미하게 오와리[尾張] 파벌의
다이묘우[大名]들을 꼬셔서 그들의 위에 섬으로써, 결국에는
이시다 파벌을 뭉개고 요도도노[淀殿], 히데요리 모자를 밀어내고자 하였다. 이것 외에는 천하를 취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나이후(内府=이에야스)가 뒤에서 그들을 후원하고 있다”
고 미츠나리는 성 안에서도, 동료들 앞에서도 세차게 조목조목
따져가며 비난하였지만, 이에야스는 개의치 않았다. 우선 오와리
파벌들과 연을 맺어, 인척(姻戚)의 끈을 이어놓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죽을 때 남긴 법이 있었다. 히데요시는 자신이 죽은 뒤 사당(私黨)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키타노만도코로의 마음을 잡고 그녀를 자기 쪽으로 오게 해 두지 않으면, 토요토미 가문에서의 공작은 무엇을
하건 하기 어려웠다. 이에야스는 쿄우[京]의 아미다가미네 산봉우리[阿弥陀ヶ峰]의
히데요시의 묘소를 참배한다는 명목으로, 그 묘를
지키며 상복(喪服)을 입고 있던 네네의 거처에 몇 번이고
방문하였다. 선물도 보냈다. 사자(使者)도 파견하여 그 적적함을 위로하였다. 이 때문에 후시미[伏見]의
성 안에서는,
- 나이후 님과의 사이가 보통이 아닌 것은 아닌가?
라는 핑크 빛 억측이 돌 정도였다.
물론 네네에게 그러한 감정이 있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히데요시가
죽은 뒤 누구보다도 이에야스의 역량과 성실한 듯한 인격을 신뢰하였다.
신뢰를 얻기 위해서 이에야스는 언동 하나하나 조심하면서 네네를 대했다. 네네는 결국,
‘토요토미 가문과 히데요리 님의 장래를 맡길 수 있는 것은 에도 나이후[江戸 内府] 8 이외에는 없다. 부탁을 하려면 나이후를 신뢰하고 오히려 모든 것을 맡기는 편이 좋을 것이다.’
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에야스라면 절대 나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이대로 미츠나리의 파벌이 요도도노 모자를 내세워 토요토미 가문을 농단(壟斷)하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위험하다.
지금까지 네네는 이성(理性)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네네의 감정(感情)이 그것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미츠나리의 파벌과 그들이 내세우는 요도도노와 그녀의 늙은 시녀들에게 토요토미 가문을 넘긴다는 것 등은 네네의 감정이 참을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다. 질투가 아닌 - 히데요시를 도우며 이 가문을 세워 것은 네네이며 그들이 아닌 것이다. 또한
그들 파벌이 이기면 네네가 보호해 온 키요마사들은 멸망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네네는 최악의 사태까지도 각오하고 있었다. 정권이 이에야스에게 옮겨질 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이에야스라면 예전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의 후계자인 히데노부[秀信] 9를 기후 츄우나곤[岐阜 中納言] 10으로 만들어 보호한 것과 같이, 히데요리를 셋츠[摂津]나 야마토[大和] 근방에 성(城)을 주어 50~60만석의 다이묘우[大名]로 만들어서는 가계(家系)를 보호하고, 제사가 끊기지 않게 해 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조건으로 내걸어야 하나 하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이 각오도 네네에게 있어서 갑자기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오우미[近江] 아시우라[芦浦]의 칸논 사[観音寺]의 성주이며 승(僧)이기도 한 센슌(詮舜] 11 이라는 자가 네네에게 은밀히 말한 것이기도 했으며, 이때도 네네는 냉정히 그것을 듣고 있을 수가 있었다. 듣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네네의 이성보다도 오오사카[大坂]에서 요도도노를 내세우고 있는 미츠나리 파벌에 대한 혐오가 그렇게 만들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여러가지 생각이 합쳐진 결과 네네는 이에야스를 신뢰하였다.
“혼인에 관한 것은 제 입으로도 토라노스케 등에게 말하겠습니다.”
하고 네네는 이에야스의 사자에게 답했다. 곧바로 그리 되었다. 키요마사는 당시 홀아비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부하인
미즈노 타다시게[水野 忠重]의 딸을 양녀 12로 하여, 서둘리 준비해서는 키요마사에게 시집 보냈다. 거의 동시에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적자(嫡子) 마사유키[正之]에게 이에야스는 양녀를 시집 보냈다.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 家政]의 아들 요시시게(至鎮)에게도 양녀를 시집 보내는 일을 진행시켰다. 미츠나리 등은,
“아미다가미네 묘소의 흙이 아직 마르지도 않았는데 백주대낮에 타이코우 님이 남기신 유법(遺法)을 어기고 있다!”
고 이에야스나 키요마사 등을 규탄하였지만 키요마사 등은 그런 규탄을 묵살했다. 미츠나리가 요도도노 모자의 권위를 믿고 고압적으로 나오건 키요마사 등은 이미 키타노만도코로의 묵인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 마음 든든했으며 유법을 어긴다는 양심의 가책에서도 어느 정도는 벗어날 수 있었다. 더구나 키요마사는 네네를 내알(內謁)하였을 때,
“어떤 것이건 나이후를 따르렴”
이라는 은밀한 지시를 받고 있었다. 네네의 지시를 따르는
한 토요토미 가문에 대한 불충(不忠)이 아니라는 습성이 소년일
때부터 그들의 마음 속에 법칙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사후, 2년째에 소위 세키가하라 쟁란[関ヶ原の役]이
일어났다. 난이 일어나 미츠나리가 주모자가 되어 오오사카[大坂]에서 거병하였을 때, 네네는 오오사카[大坂]에서 벗어나 쿄우[京]의 산본기[三本木]에
은거하며 히데요시의 명복을 빌고 있었다. 이때 네네는 자신의 조카인 와카사[若狭] 키노시타 카츠토시[木下 勝俊]에게, 길을
잘 못 들지 마라, 에도 나이후를 따르라는 훈계를 하고 있으며 또한
그 카츠토시의 동생으로 네네에게 있어서는 양자 중의 한 명이기도 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에게는, 히데아키가
흐름 속에서 어쩌다가 서군에 참가하게 되어 버린 것을 알고는,
“나중에 나이후를 꼭 도와 주렴”
이라고 엄히 명령했다.
키요마사는 큐우슈우[九州]에서 동군(東軍)이 되어 움직였으며 또한 세키가하라[関ヶ原]에 있어서는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 네네가 어렸을 적 키웠던 무장들이나 친척들이 전부 동군의 이에야스 편에 서, 많은 활약을 하였고 결국 히데아키의 서군에 대한 배반이 승리를 결정지어 서군에 있는 요도도노의 파벌을 격파했다.
보는 방식에 따라서는 히데요시의 처첩이 각각 십 수만의 병사를 움직여 세키가하라 분지[関ヶ原]에서 싸웠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그 틈을 타고 천하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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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가 네네의 여생(餘生)이 된다.
네네는 이 사태나 시세에 대해서 결국 한 마디의 발언도
하지 않았고 히데요시의 명목을 빌기 위해 불교에 전념하였다. 그것 말고는 다른 인상을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다. 세키가하라 쟁란이 끝나고 몇 년이 지난 1605년,
“절을 가지고 싶구나”
하고 이에야스에게 코우조우스를 파견하여 그 뜻을 전했다. 이에야스는
물론 그 뜻을 받들어 자신의 중신(重臣)인 사카이 타다요[酒井 忠世], 도이 토시카츠[土井
利勝]의 관할로 하여, 쿄우[京]의 히가시야마[東山]의 산허리에 장대하고 화려한 사원을 조영 시켰다. 코우다이 사[高台寺]가 그것이다.
그녀는 이 코우다이 사[高台寺]에서 히데요시의 위패를 지키며 또한 이곳에 살았다. 이에야스는 자신에게 천하를 가져다 준 이 여성을 존중하여 카와치[河内] 내에 화장(化粧)을 하는데 쓰시라는 명목으로 1만3천석을 주어 정중히 대하였다. 네네가 비구니가 되어 살아가는 동안 1615년에 오오사카 성[大坂城]이 공격받아 요도도노 모자가 죽었다. 그 후에도 여전히 그녀의 수명이 이어졌다.
에도 막부[江戸幕府]도 3대 쇼우군[将軍] 이에미츠[家光]의
시대가 된 1624년 9월
6일. 76세의 나이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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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의 어떤 유학자(儒學者)가,
그녀는 말년에 풍월을 즐기며, 그녀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여러 다이묘우들의 경애와 존경을 받으며 유유히 세월을 보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회한(悔恨)이라는 것을 전혀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는 자주 관측된다고 하지만 과학적인 근거는 없다고 한다. 참고로 조선왕조실록에도 지진과 달무리가 병용되어 기록되어 있는 기사도 있다. [본문으로]
- 약 240cm [본문으로]
- 쿄우고쿠 씨[京極氏]로 거처가 이 후시미 성[伏見城]의 마츠노마루 성곽에 있었기에 이리 불렸다. 또한 이 당시에는 가장 총애를 받고 있었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 당시는 윗사람에게 직접 말하기 보다는 곁에 있는 부하 격인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이 예법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 경성(한성)에 제일 먼저 도착한 이는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이다. [본문으로]
- 두 왕자(임해군과 순해군)를 잡았다기 보다는 함경도 방면을 담당했을 때 당시 병사 모집을 하러 간 왕자들이 함경도에 갔다 반란을 일으킨 국경인(鞠景仁)에게 잡힌 것을 건네 받은 것. [본문으로]
- 이런 말을 믿으면 진다. [본문으로]
- 에도는 현재의 토우쿄우[東京]. 이에야스의 본거지였기에 그의 관직명 나이후[内府]를 붙여 이리 불렸다 [본문으로]
- 노부나가[信長]의 후계자인 노부타다[信忠]의 아들. 즉 노부나가의 손자. [본문으로]
- 영지(領地)가 노부나가의 옛 본거지 기후 13만석에 관직이 츄우나곤이었다. [본문으로]
- 히에이잔[比叡山]의 서고(書庫) 세이쿄우보우[正教坊]의 주지였으며, 능력과 히데요시의 신뢰로 여러가지 행정관(奉行)을 역임하였다. [본문으로]
- 미즈노 타다시게는 이에야스의 외삼촌이었기에 자신의 외사촌을 양녀로 삼은 것이 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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