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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토미노히데요리'에 해당되는 글 27건

  1. 2008.04.14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6- (9)
  2. 2008.04.07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5- (4)
  3. 2008.02.09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4- (6)
  4. 2008.01.12 금오중납언(金吾中納言)-6- (6)
  5. 2007.12.22 금오중납언(金吾中納言)-2- (3)
六.

 윤
7월이 되어 이변이 일어났다. 12일 밤.

 후시미[伏見] 도바[鳥羽] 부근을 진원지로 하는 대지진이 일어났다. 사상 유례가 없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대지가 갈라지고 하늘엔 달무리가 져[각주:1] 순식간에 후시미, 도바, 요도가와[淀川] 해안의 여러 마을이 무너지고, 후시미 성 밑 마을의 남녀 2천명이 깔려 죽었다.

 다이묘우[大名]들의 저택도 예외는 아니었다. 근신중인 키요마사[正]의 저택도 객관(客館=大書院)이 무너져 내리고, 마구간에서는 불을 뿜었다. 하지만 키요마사는 이런 아수라장에서도 행여 있을지도 모를 위협에서 히데요시를 지키기 위해 성에 오를 것을 결심하여 부하들에게 준비를 명했다. 그 자신 몸에는 하라마키[巻]를 입고 흰 명주에 주색(朱色)으로 남무묘법련화(南無妙法蓮華)이라 쓰인 겉옷[陣羽織]을 걸치고선 이마에는 주황색 머리띠를 둘렀다. 손에는 8[각주:2] 길이의 봉()을 들었다. 봉은 쓰러진 가옥을 일으키는 지렛대로 쓰기 위해서였다. 무사 30, 일반 병사 200명에게도 봉을 들게 하여, 여진(餘震)이 계속되는 대지를 박차고 박차며 후시미 성[伏見城]에 당도하였다.
 
정문은 이미 무너져 쓰러져 있었다. 마츠노마루[
丸]라 불리는 성곽의 망루(望樓)도 무너져 시체가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다. 키요마사는 서둘러 히데요시를 찾으려 하였다.

 혼마루[本丸]로 가자!”

 키요마사는 목소리 높여 호령하면서 돌계단을 서둘러 올라가자 혼마루 내의 누각, 건물 등은 전부 쓰러져 있어 비명만이 여기저기서 들려올 뿐이었다. 히데요시가 벌써 깔려 죽었나? 하고 키요마사는 생각했지만 계속해서 등롱(燈籠)을 비추며 여기저기를 탐색하였다. 그러다 설마 하는 기분으로 더 안쪽으로 들어가 문 앞 작은 마당을 지나 문을 거쳐 정원에 들어서자, 정원 안에 쌓은 작은 동산의 잔디 위에 병풍을 둘러치고 카츠기[被布]를 뒤집어 쓰고 앉아 있는 상급 여관(女官) 20명 정도의 무리를 발견했다. 옆에 있는 소나무에 등롱이 걸려 있어 그 불빛이 닿는 곳에 히데요시가 웅크리고 있는 것을 키요마사는 발견했다. 히데요시는 이 이변을 틈탄 자객을 겁내서인지 여성의 의상을 뒤집어 쓰고는 그 화려한 옷 속에 몸을 감추고 있었다. 왕년의 히데요시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잔머리나 굴린 땜질이었다. 키타노만도코로[政所], 마츠노마루도노[丸殿][각주:3], 코우조우스()도 있었다.

 키요마사는 가까이 다가가 엎드려서는 코우조우스를 향해서[각주:4],

 졸자는 카토우 카즈에노카미[加藤 主計頭]이옵니다. 타이코우[太閤=히데요시]님을 시작으로 타이코우님를 모시는 여러분들이 깔려 있으시기라도 한다면 이 지렛대로 들어올리고자 근신 자중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왔습니다

 고 큰소리로 말했다. 곧바로 네네는,

 토라노스케[虎之助]

 하고 말을 걸었다. 서둘러 히데요시 앞에서 칭찬을 해버리면 이럴 경우 키요마사의 행동이 공인 받아 히데요시도 그것을 승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잘 왔네. 정말 빨리 와주었구나

 네네는 계속 말했다.

 언제나 언제나 너의 장함과 공적을 든든하게 생각하고 있다네

 라는 네네의 목소리는 키요마사의 목소리보다도 더 컸을 것이다. 키요마사는 더 납작 엎드렸다. 땅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이어서 키요마사는 고개를 들었다. 작법대로 시선은 코우조우스를 향해 코우조우스에게 말을 거는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키요마사가,

 들으시게 코우조우스!”

 하고 큰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졸자는 조선에서 억울한 누명을 입었소. 조선팔도에 공격해 들어가 경성(京城)을 제일 먼저 함락시켰으며[각주:5], 조선 왕자 형제 두 분을 잡기도 하였고[각주:6], 나중에는 간도(間島)의 오랑캐 땅까지 쳐들어갔으며, 길주(吉州)에서는 10만기()[각주:7]의 적을 쳐부수고 대장을 잡아 죽였으며, 그 외에도 뼈가 부서지도록 일을 하였건만 되돌아 온 것은 억울한 누명밖에 없어소. 타이코우님께선 지부쇼우[冶部少=미츠나리]의 말만을 믿으시며 그것의 진실인지 거짓인지 조사조차 해 주시지 않으시오

 라고 말하였다. 네네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며 키요마사의 말이 끝나자,

 전쟁터에서의 피곤이 쌓였는지 토라노스케의 얼굴이 굉장히 힘들어 보이는구나

 라고 말하며, 키요마사를 위해서 히데요시의 동정을 자극해 주었다. 또한 히데요시에게,

 토라노스케에게 중문(中門)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다른 장수들의 모습은 여전히 볼 수가 없군요

 라고 말하자, 히데요시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 인해 키요마사의 근신을 풀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뒤 네네는 히데요시를 더욱 설득하여 키요마사를 위해서 변호를 하였다. 결국 히데요시는,

 토라노스케를 거시기... 그래 용서한다

 고 말했다. 네네는 곧바로 코우조우스를 중문으로 서둘러 보내 키요마사에게 그것을 알리게 하였다. 네네가 자신의 피보호자를 위해서 해 준 마지막 중재(仲裁)였던 것일 지도 모른다.

 이 해로부터 3년째의 초가을. 히데요시는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죽었다.
 
유언에 따라 오대로(五大老) 필두인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가 히데요리[頼]를 대신하여 조선에 있던 장수들을 철수시켰다. 조선에 있던 키요마사는 하카타[博多]에 상륙하여 후시미[伏見]로 돌아오자 복수를 선언했다. 지부쇼우를 죽이겠다고 하였다.

 나도 끼워 주게

 하고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쿠로다 나가마사[ 長政], 아사노 요시나가[ 幸長],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오와리(尾張) 파벌의 장수들이 너도나도 달려와서는 키요마사를 따르겠다고 하였다. 복수심에 불타는 키요마사와는 달리 그들에게는 단순히 미츠나리를 조금 미워했던 감정 외에도 히데요시의 죽음을 기회로 미츠나리와 그의 파벌을 모조리 쓸어버려, 토요토미 가문의 권세나 중심을 그들이 생각하기에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 놓고 싶다는 정치적인 충동이 일었을 것이다. 적어도 쿠로다 나가마사, 이케다 테루마사, 아사노 요시나가는 그런 쪽의 즉 정치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다.

 사태는 절박했다. 공연한 소란이 아니었다. 때때로 시가전(市街戰)까지 일어날 뻔 했다. 미츠나리,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쪽도 방심하지 않고 자기들 저택 주변에 바리케이트를 설치하고, 벽 구석구석에 망루를 설치하여 경계하였다. 이 사태를 이에야스는 이용하였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죽는 순간부터 히데요리의 정권을 빼앗을 궁리만 하였고, 그것만을 생각하며 신중히 그러나 민첩하게 행동했다. 이에야스는 이 토요토미 가문의 분열 소동을 관찰하여 철두철미하게 오와리[尾張] 파벌의 다이묘우[大名]들을 꼬셔서 그들의 위에 섬으로써, 결국에는 이시다 파벌을 뭉개고 요도도노[淀殿], 히데요리 모자를 밀어내고자 하였다. 이것 외에는 천하를 취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나이후(=이에야스)가 뒤에서 그들을 후원하고 있다

 고 미츠나리는 성 안에서도, 동료들 앞에서도 세차게 조목조목 따져가며 비난하였지만, 이에야스는 개의치 않았다. 우선 오와리 파벌들과 연을 맺어, 인척(姻戚)의 끈을 이어놓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죽을 때 남긴 법이 있었다. 히데요시는 자신이 죽은 뒤 사당(私黨)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여러 다이묘우(大名) 간에 결혼은 허락을 받은 다음에 할 것.
이라는 사사로이 멋대로 다이묘우 가문끼리 결혼하는 것을 금하는 법제를 남겼다. 이에야스는 그것을 무시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 혼자 무시한다고 하여도, 이에야스에게서 딸을 얻는 다른 다이묘우가 이를 꺼리면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그리 생각하여 이 일건에 대해서 키타노만도코로와 상담하기로 하였다. 키타노만도코로에게 허락을 얻는다면 그녀를 따르는 또는 그녀와 친한 여러 다이묘우들은 부담 없이 이에야스와 인척관계를 맺을 것이다.

 키타노만도코로의 마음을 잡고 그녀를 자기 쪽으로 오게 해 두지 않으면, 토요토미 가문에서의 공작은 무엇을 하건 하기 어려웠다. 이에야스는 쿄우[]의 아미다가미네 산봉우리[阿弥陀ヶ峰]히데요시의 묘소를 참배한다는 명목으로, 그 묘를 지키며 상복(喪服)을 입고 있던 네네의 거처에 몇 번이고 방문하였다. 선물도 보냈다. 사자(使者)도 파견하여 그 적적함을 위로하였다. 이 때문에 후시미[伏見]의 성 안에서는,
 
-
나이후 님과의 사이가 보통이 아닌 것은 아닌가?
 
라는 핑크 빛 억측이 돌 정도였다.

 물론 네네에게 그러한 감정이 있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히데요시가 죽은 뒤 누구보다도 이에야스의 역량과 성실한 듯한 인격을 신뢰하였다. 신뢰를 얻기 위해서 이에야스는 언동 하나하나 조심하면서 네네를 대했다. 네네는 결국,
 
토요토미 가문과 히데요리 님의 장래를 맡길 수 있는 것은 에도 나이후[ 府][각주:8] 이외에는 없다. 부탁을 하려면 나이후를 신뢰하고 오히려 모든 것을 맡기는 편이 좋을 것이다.’
 
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에야스라면 절대 나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이대로 미츠나리의 파벌이 요도도노 모자를 내세워 토요토미 가문을 농단(壟斷)하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위험하다.

 지금까지 네네는 이성(理性)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네네의 감정(感情)이 그것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미츠나리의 파벌과 그들이 내세우는 요도도노와 그녀의 늙은 시녀들에게 토요토미 가문을 넘긴다는 것 등은 네네의 감정이 참을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다. 질투가 아닌 - 히데요시를 도우며 이 가문을 세워 것은 네네이며 그들이 아닌 것이다. 또한 그들 파벌이 이기면 네네가 보호해 온 키요마사들은 멸망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네네는 최악의 사태까지도 각오하고 있었다. 정권이 이에야스에게 옮겨질 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이에야스라면 예전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의 후계자인 히데노부[秀信][각주:9]를 기후 츄우나곤[岐阜 中納言][각주:10]으로 만들어 보호한 것과 같이, 히데요리를 셋츠[津]야마토[大和] 근방에 성()을 주어 50~60만석의 다이묘우[大名]로 만들어서는 가계(家系)를 보호하고, 제사가 끊기지 않게 해 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조건으로 내걸어야 하나 하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이 각오도 네네에게 있어서 갑자기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오우미[近江] 아시우라[芦浦]칸논 사[音寺]의 성주이며 승()이기도 한 센슌(詮舜][각주:11] 이라는 자가 네네에게 은밀히 말한 것이기도 했으며, 이때도 네네는 냉정히 그것을 듣고 있을 수가 있었다. 듣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네네의 이성보다도 오오사카[大坂]에서 요도도노를 내세우고 있는 미츠나리 파벌에 대한 혐오가 그렇게 만들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여러가지 생각이 합쳐진 결과 네네는 이에야스를 신뢰하였다.

 혼인에 관한 것은 제 입으로도 토라노스케 등에게 말하겠습니다.”

 하고 네네는 이에야스의 사자에게 답했다. 곧바로 그리 되었다. 키요마사는 당시 홀아비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부하인 미즈노 타다시게[水野 忠重]의 딸을 양녀[각주:12]로 하여, 서둘리 준비해서는 키요마사에게 시집 보냈다. 거의 동시에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적자(嫡子) 마사유키[正之]에게 이에야스는 양녀를 시집 보냈다.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 家政]의 아들 요시시게()에게도 양녀를 시집 보내는 일을 진행시켰다. 미츠나리 등은,

 아미다가미네 묘소의 흙이 아직 마르지도 않았는데 백주대낮에 타이코우 님이 남기신 유법(遺法)을 어기고 있다!”

 고 이에야스나 키요마사 등을 규탄하였지만 키요마사 등은 그런 규탄을 묵살했다. 미츠나리가 요도도노 모자의 권위를 믿고 고압적으로 나오건 키요마사 등은 이미 키타노만도코로의 묵인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 마음 든든했으며 유법을 어긴다는 양심의 가책에서도 어느 정도는 벗어날 수 있었다. 더구나 키요마사는 네네를 내알(內謁)하였을 때,

 어떤 것이건 나이후를 따르렴

 이라는 은밀한 지시를 받고 있었다. 네네의 지시를 따르는 한 토요토미 가문에 대한 불충(不忠)이 아니라는 습성이 소년일 때부터 그들의 마음 속에 법칙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사후, 2년째에 소위 세키가하라 쟁란[ヶ原の役]이 일어났다. 난이 일어나 미츠나리가 주모자가 되어 오오사카[大坂]에서 거병하였을 때, 네네는 오오사카[大坂]에서 벗어나 쿄우[京]의 산본기[三本木]에 은거하며 히데요시의 명복을 빌고 있었다. 이때 네네는 자신의 조카인 와카사[狭] 키노시타 카츠토시[木下 勝俊]에게, 길을 잘 못 들지 마라, 에도 나이후를 따르라는 훈계를 하고 있으며 또한 그 카츠토시의 동생으로 네네에게 있어서는 양자 중의 한 명이기도 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에게는, 히데아키가 흐름 속에서 어쩌다가 서군에 참가하게 되어 버린 것을 알고는,

 나중에 나이후를 꼭 도와 주렴

 이라고 엄히 명령했다.

 키요마사큐우슈우[九州]에서 동군(東軍)이 되어 움직였으며 또한 세키가하라[ヶ原]에 있어서는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 네네가 어렸을 적 키웠던 무장들이나 친척들이 전부 동군의 이에야스 편에 서, 많은 활약을 하였고 결국 히데아키의 서군에 대한 배반이 승리를 결정지어 서군에 있는 요도도노의 파벌을 격파했다.
 
보는 방식에 따라서는 히데요시의 처첩이 각각 십 수만의 병사를 움직여 세키가하라 분지[ヶ原]에서 싸웠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그 틈을 타고 천하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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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가 네네의 여생(餘生)이 된다.
 
네네는 이 사태나 시세에 대해서 결국 한 마디의 발언도 하지 않았고 히데요시의 명목을 빌기 위해 불교에 전념하였다. 그것 말고는 다른 인상을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다. 세키가하라 쟁란
이 끝나고 몇 년이 지난 1605,

 절을 가지고 싶구나

 하고 이에야스에게 코우조우스를 파견하여 그 뜻을 전했다. 이에야스는 물론 그 뜻을 받들어 자신의 중신(重臣)인 사카이 타다요[酒井 忠世], 도이 토시카츠[土井 利勝]의 관할로 하여, 쿄우[]의 히가시야마[東山]의 산허리에 장대하고 화려한 사원을 조영 시켰다. 코우다이 사[高台寺]가 그것이다.

 그녀는 이 코우다이 사[高台寺]에서 히데요시의 위패를 지키며 또한 이곳에 살았다. 이에야스는 자신에게 천하를 가져다 준 이 여성을 존중하여 카와치[内] 내에 화장(化粧)을 하는데 쓰시라는 명목으로 13천석을 주어 정중히 대하였다. 네네가 비구니가 되어 살아가는 동안 1615년에 오오사카 성[大坂城]이 공격받아 요도도노 모자가 죽었다. 그 후에도 여전히 그녀의 수명이 이어졌다.

 에도 막부[江戸幕府] 3대 쇼우군[軍] 이에미츠[家光]의 시대가 된 1624 9 6. 76세의 나이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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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도 시대의 어떤 유학자(儒學者),

토요토미 가문을 멸망에 이르게 한 것은 키타노만도코로의 재기(才氣) 때문이다.
는 식의 말을 하였는데, 다소 빈정대는 듯하다. 그녀는 히데요시와 함께 토요토미 가문이라는 작품을 만들었고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스스로 칼을 꺼내어 그 뿌리를 끊었다. 다른 사람에게 건넬 수 없다는 호담함과 같은 것을 느낀다.

 그녀는 말년에 풍월을 즐기며, 그녀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여러 다이묘우들의 경애와 존경을 받으며 유유히 세월을 보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회한(悔恨)이라는 것을 전혀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1.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는 자주 관측된다고 하지만 과학적인 근거는 없다고 한다. 참고로 조선왕조실록에도 지진과 달무리가 병용되어 기록되어 있는 기사도 있다. [본문으로]
  2. 약 240cm [본문으로]
  3. 쿄우고쿠 씨[京極氏]로 거처가 이 후시미 성[伏見城]의 마츠노마루 성곽에 있었기에 이리 불렸다. 또한 이 당시에는 가장 총애를 받고 있었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4. 당시는 윗사람에게 직접 말하기 보다는 곁에 있는 부하 격인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이 예법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경성(한성)에 제일 먼저 도착한 이는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이다. [본문으로]
  6. 두 왕자(임해군과 순해군)를 잡았다기 보다는 함경도 방면을 담당했을 때 당시 병사 모집을 하러 간 왕자들이 함경도에 갔다 반란을 일으킨 국경인(鞠景仁)에게 잡힌 것을 건네 받은 것. [본문으로]
  7. 이런 말을 믿으면 진다. [본문으로]
  8. 에도는 현재의 토우쿄우[東京]. 이에야스의 본거지였기에 그의 관직명 나이후[内府]를 붙여 이리 불렸다 [본문으로]
  9. 노부나가[信長]의 후계자인 노부타다[信忠]의 아들. 즉 노부나가의 손자. [본문으로]
  10. 영지(領地)가 노부나가의 옛 본거지 기후 13만석에 관직이 츄우나곤이었다. [본문으로]
  11. 히에이잔[比叡山]의 서고(書庫) 세이쿄우보우[正教坊]의 주지였으며, 능력과 히데요시의 신뢰로 여러가지 행정관(奉行)을 역임하였다. [본문으로]
  12. 미즈노 타다시게는 이에야스의 외삼촌이었기에 자신의 외사촌을 양녀로 삼은 것이 된다. [본문으로]

五.


 얼마 안가 츠루마츠[鶴松]가 죽었기에, 히데요시는 그 비탄(悲歎) 속에서 외정(外征)의 지령을 내렸다.

 - 원숭이 녀석 죽을 장소를 잃어서 미쳤나!?

 토자마[様][각주:1]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등은 어떠한 필연성도 생각할 수 없는 이 대규모 외정에 대해 뒤에서 그렇게 욕을 퍼부었다.

 대다수 다이묘우[大名]의 마음 속도 비슷했음에 틀림이 없다. 우지사토뿐만 아닌 거의 대부분의 다이묘우는 봉토(封土)를 얻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영민(領民)과는 아직 친숙하지 않았고, 또한 전란(戰亂)이나 검지(地)[각주:2]로 인해 받은 상처에서 백성들은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에 막대한 외정의 전쟁 비용을 어떻게 조달하라는 것인가?

 '봉행(奉行) 녀석들이 부추기고 있다.'

 라는 소문이 네네의 귀에도 들어왔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봉행들이 히데요시라는 노망난 독재자에게 슬픔을 외정으로 달래라고 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설마……’

 하고 네네는 생각했지만, 진실을 판단하기 위한 자료를 가지지 못할 정도로 그녀는 이미 토요토미 가문의 정치라는 곳에서 멀어져 버린 것이다. 지금은 미츠나리, 나가모리[長盛], 마사이에[正家]라는 오우미[近江] 사투리를 사용하는 재간꾼들이 히데요시를 자신들의 것으로 삼아, 그 무리가 토요토미 가문 내의 대소사, 인사, 천하의 형법(刑法)과 같은 것들을 집행하고 있었다. 이 현상을 네네 주위에 있는 여관(女官)들의 여자의 눈으로 보면,

 - 요도도노[淀殿]는 요즘 권세(權勢)가 있으시다.

 는 것이 될 것이다. 사실 그러했다. 근래 토요토미 가문은 오우미[近江] 사람들에게 독차지 당해 있었다. 네네가 돌봐주고 있는 오와리[尾張] 계열의 다이묘우들은 중앙에 대해서 아무런 발언권도 가지질 못하고 있었다. 토요토미 가문의 중심은 이미 키타노만도코로[政所]가 아닌 요도도노에게 옮겨가고 있었다.

 

 이것이 가문 내에서 자주 화제(話題)가 되었다. 매일 네네가 듣는 화제는 모두 이것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오우미 파벌에게 따돌림 당하고 있는 여러 다이묘우, 토요토미 가문의 직속 신하, 거기에 측실이나 여관들까지도 네네에게 와서는 울분이나 불만을 표하였다. 그들은 네네에게 매달리는 것 이외에 기댈 만한 곳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요도도노가 나쁜 것은 아니다

 히데요시에게 사랑 받고 있는 이 측실의 험담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네네는 이 점에 관해서만은 냉철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요도도노는 그 특출한 미모를 제외하면 어디를 보아도 평범한 자질을 가진 여성이며, 단지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 다소 권세욕이 있을지도 모르나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나서서 정치 세력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은 없었다.

 만약 나쁘다고 한다면 그녀의 주위에 있는 옛 아자이 가문[浅井家]에서 온 늙은 시녀들이었다. 이 무리들이 요도도노가 츠루마츠의 [생모]가 된 것을 기회로 정실인 키타노만도코로에게 대항하고자 하여, 이시다 미츠나리를 시작으로 하는 토요토미 가문의 봉행들과 적극적으로 결합하는 한편, 미츠나리 등도 요도도노를 추대함으로써 히데요시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토요토미 가문의 중추에 계속 자리잡고자 하고 있었다. 그런 소위 주변 인물들이 요도도노를 정치적 존재로 만들어 가고자 함에 틀림이 없었다. 네네는 그렇게 보고 있었다. 네네가 보기에 나쁜 것은 그들이었다.

 

 네네는 마음속 깊이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저 무리들은 히데요시님이 돌아가신 다음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 상상도 하고 싶지 않지만 히데요시가 죽은 뒤 츠루마츠와 요도도노가 이 토요토미 가문의 제일 윗자리에 앉아 미츠나리 이하 오우미 파벌의 다이묘우를 측근으로 거느린다. 자연히 키타노만도코로는 후퇴하고 그녀를 의지하고 있던 창업(創業)의 공신들은 힘을 잃어 갈 수밖에 없다. 네네는 그래도 상관 없지만 오와리 출신자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꿈에서도 신음 소리를 낼만한 미래상일 것이다. 물론 일이 일인만큼 모두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을 뿐, 누구도 이 두려운 미래에 대해서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1592 4.

 외정군은 조선에 상륙하였다.

 제1군은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2군은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를 선봉으로 하여 각지의 성을 함락, 앞을 다투며 북상하였다.

 당초는 파죽지세라 할만 했지만, ()나라의 대군이 정면의 적이 됨에 따라 진공(進攻)은 정체되고 각지에서 부대가 고립되어 때로는 고전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또한 유키나가와 키요마사는 사이가 나빠 서로 돕기는커녕 무엇이건 서로 으르렁거렸기에, 상대방도 그것을 알고 거기에 파고들어서는 반격하였고, 이 때문에 아군의 작전에도 자주 차질을 빚었다.

 

 이런 종류의 사태를 조절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기관으로 히데요시는 군감(軍監)이라는 자신의 대리인을 파견하였다.

 후쿠하라 나오타카[福原 直高], 오오타 카즈요시[大田 一吉] 등 작은 영지(領地)의 다이묘우들이었다. 이들은 전부 오우미 파벌이었으며, 그런 군감의 총책이라고 할 만한 존재가 이시다 미츠나리였다. 미츠나리는 조선에 상주(常駐)하지는 않고 전선을 시찰하고서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에서는 히데요시의 곁에서 현지의 군감들이 보내오는 보고서를 정리하여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이런 군감단(軍監)의 면면들은 이시다 당()이었기 때문에 유키나가에게는 좋고 키요마사에게는 냉엄했다. 때로는 키요마사의 언동을 무뇌아처럼 보고하였다.

 예를 들면 평화 교섭 단계에 들어갔을 때, 키요마사는 토요토미의 성()을 하사 받지 않았음에도 명나라 사자에게 보낸 공문서에 '토요토미노 키요마사[豊臣 ]'라고 서명하였다고 보고되었다. 또한 명나라 사자에게

 

 "당신들 대명인(大明人)은 코니시 유키나가라는 자를 일본국의 무사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저것은 무사의 무자도 모르는 사카이[堺]의 상인(商人)이다. 겁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키요마사의 언동이 조선에 있는 군사들을 혼란 시키며, 적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보고를 히데요시는 준공 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받았다. 히데요시는 분노하여 키요마사라면 그럴 것이다, 곧바로 불러들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곧바로 급사(急使)가 조선으로 건너가 키요마사에게 그 뜻을 전하였다.

 키요마사는 자신의 군단을 전선에 남겨두고 장교 50, 일반 병사 300명이라는 적은 수의 병사를 데리고서는 부산에서 배를 타고 세토 내해[瀬戸海]를 거쳐 오오사카[大坂]에 직행한 후 후시미에 도착했다.

 

 히데요시는 알현을 허락하지 않았다. 키타노만도코로에게라도 내알(內謁)할까 생각하였지만 히데요시의 노여움을 사고 있는 몸이기에 그것도 불가능하였다. 키요마사는 여장(旅裝)도 풀지 않고, 오봉행(五奉行)의 한 사람인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의 저택을 방문하여 성안의 사정을 듣고자 하였다.

 

 지부쇼우[冶部少=미츠나리]놈이 꾸민 참언(讒言), 덫일 것이다. 필시 그럼에 틀림이 없다

 

 고 키요마사는 굉장히 화가 났는지, 나가모리가 한마디의 설명을 하기도 전부터 고개를 흔들어대며 소리를 질렀다.

 군감(軍監)의 면면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후쿠하라 나오타카는 미츠나리의 친척[각주:3]이며, 오오타 카즈요시, 쿠마가이 나오모리[能谷 直盛], 카키미 카즈나오[垣見 一直] 등은 모두 미츠나리에게 알랑거린 덕분에 출세해 온 오우미[近江] 파벌 사람들로 당연 자신들의 파벌인 유키나가를 옹호하고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려 하고 있다. 이렇게 된 바에야 지부쇼우놈의 목을 뽑고 자신도 죽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나가모리는 서둘러 진정시킨 후,

 

 지금에 와서는 지부쇼우의 권세에 견줄 만한 자가 없네. 그러한데 무슨 말을 하시는 겐가? 그와 화해를 하시게. 하지 않으시면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일세. 우선 그 화를 가라앉히게. 졸자가 자리를 주선할 테니 내일이라도 지부쇼우와 만나시게

 

 라고 말하자, 키요마사는 무가의 신이시여!! 라고 갑자기 방바닥을 치며 노성(怒聲)을 터뜨리고는,

 

 신불(神佛)도 굽어살피소서.

 그자와는 평생 화해 따위 하지 않겠소. 졸자는 조선팔도에 쳐들어가 수십 번 싸워 대명(大明)도 물리치고 추위와 더위를 참았으며, 때로는 굶주림도 겪었소이다. 그에 비해 지부쇼우놈은 편안하게 성안에 있으면서 더구나 히데요시 전하의 총애를 내세워 우리처럼 전쟁터에서 일하는 자들을 멸하려 한다. 그렇게 좆 같은 녀석들하고 우리들이 화해를 할 수 있을까? 할 수 없소이다!”

 

 라고 말하였다. 이 때문에 모처럼 둘의 사이를 좋게 하고자 했던 나가모리도 발을 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때가 1596 1월이었다. 그대로 아무런 추가조사도 없이 키요마사는 근신을 명령 받아 후시미[伏見]의 자택에 유폐 당했다. 이후 아무런 기별도 없었다.

 

 이보다 1년 반 전에 요도도노의 배에서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나, 때문에 이때까지 토요토미 가문 후계자였던 히데츠구[秀次]의 영향력은 저하되었다. 히데츠구는 앞날에 불안을 느끼고 난행(亂行)을 계속 저질렀기에 토요토미 가문은 그 정권이 성립된 이래 가장 어두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이미 왕년의 똑똑한 인물이 아니어서 사람이 변한 듯 노망이 나, 생각하는 모든 것이 히데요리의 앞날에 대한 것뿐이었고, 그 설계를 미츠나리 등에게 연구시켰으며, 미츠나리 등도 이 토요토미의 천하가 무사히 히데요리에게 상속되는 것만을 연구하여 히데요시에게 헌책하였다. 곧이어 히데츠구는 죽음에 이르지만, 이 키요마사가 귀국했을 때까지만 해도 아직 히데츠구는 살아 있었다.

 

 사실 미츠나리는 키요마사에 관한 놀랄만한 풍문이 조선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군감(軍監)의 보고로 알고 있었다. 명나라 쪽에서 키요마사의 무용을 두려워하여 그를 자기네 편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1593 5.

 키요마사가 울산 서생포에 주둔하고 있을 때, 명나라는 장군 유정(劉綎)을 통하여 키요마사와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때 유정이 보낸 사자(使者)의 입으로,

 

 "히데요시가 지금 일본 60여주를 다스리고는 있지만, 영걸(英傑)이라고 하여도 수명의 길고 짧음은 예측할 수가 없다. 그가 죽은 후 일본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또한 아무리 히데요시가 장수를 한다고 하여도 그는 당신을 미워하여 당신이 공적을 세우는 것을 싫어한다."

 

 고 말하게 한 후, 유정의 자필 편지를 키요마사에게 전하였다. 그에 따르면,

당신은 굉장히 뛰어난 인물이지만 일개 지방관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때가 되어 우리에게 온다면, 나는 맹세코 대명 황제 폐하에게 말씀을 올려 당신이 대관(大官)에 봉해지도록 보증을 서겠다. 어째서 이 좋은 일을 하지 않으려는 건가?
 라고 되어 있었으며, 또다시 사자의 입으로 넌지시 명나라와 힘을 합쳐 히데요시에게 반격을 하자고 암시하였다. 단 키요마사는 종군승에게 글을 쓰게 하여 이것을 거부하였다. 그 편지 속에서,

물론 당신이 말하고 있는 대로 나는 한가한 무리들에게 무고를 받고 있다[각주:4]. 그러나 나는 태합(太閤=히데요시)의 충신이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다.

라는 말을 덧붙여 보냈다.

 

 어쨌든 이렇게 명나라와 키요마사가 주고받은 편지의 대략적인 내용은 미츠나리의 손에 들어와 있어, 이 건에 대해서는 아무리 미츠나리라도 히데요시에게 보고하는 것을 주저케 하여 자신의 선에서 뭉갰다.

 하지만 미츠나리는 다른 측면에서 이것을 처리하였다. 키요마사가 이 이상 조선에서 큰 공을 세우는 것은 다음 세대인 히데요리에게 있어서는 좋지 않을 것이다. 외정(外征)을 하러 나간 장군이 무훈(武勳)을 세워 거기서 강대한 세력을 얻을 경우, 반대로 그 무력이 중앙 정권을 위험하게 하는 것은 멀리 당()나라의 현종(玄宗) 황제를 배신한 안록산(安祿山)의 예까지 갈 것도 없이 바로 가까이에 히데요시라는 예가 있었다.

 

 오다 가문[織田家]츄우고쿠[国] 방면 사령관이었던 히데요시가 거기서 노부나가[信長]의 급사를 듣고 병사를 되돌려 미츠히데[光秀]를 물리치고는, 그 무력으로 오다 가문의 남겨진 자식들을 압도하여 토요토미 정권을 세웠다. 키요마사에게 그 정도의 야심이나 정치력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그 무훈을 더욱 키워줄 필요가 없었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죄를 만들어 전쟁터에서 물러나게 한 것이다.

 

 하지만 네네는 거기까지 이 사태의 진상에 대해서 알지 못하였으며 알 필요도 없었다. 네네는 단순하면서도 직선적으로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었다.

 네네가 보기에 미츠나리는 네네를 보호자로 하는 오와리[尾張] 파벌의 무장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움으로써 네네의 날개를 꺾어 요도도노 모자(母子)의 권세를 강화해 가려고 하고 있을 것이다.

 필시 그럴 것이다

 네네는 그렇게 생각하였지만 키요마사를 구할 방도가 없어 시간만 보내었다. 키요마사는 반년간 유폐 생활을 하였다.
  1. 여기서는 직속 부하가 아니라 나중에 히데요시에게 항복하거나 군문에 들어온 다이묘우[大名]를 지칭. [본문으로]
  2. 정확한 수확량을 측정하여 세금을 낼 양을 정함. 그 전보다 더욱 많은 양을 내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불만이 많았다. [본문으로]
  3. 미츠나리 여동생의 남편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4. 예기(禮記)의 태학(大學)에 이르길 ‘소인은 한가하면(할 일이 없으면) 좋지 않은 짓을 하려고 한다(小人間居爲不善)’는 부문에서 따 온 것 같다…. 아마도… [본문으로]

.

 

 9월에 들어와서,

 "타이코우(太閤), 타계(他界)하시다"

 라는 경천동지할 소식이 성에서 새어 나와 그걸 들은 사람들이 사방으로 퍼트려 제후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 소문에 성 밑에 있던 저택마다 사람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뛰어다니며 소식을 전하는 사자(使者)들로 온 거리가 소란스러웠지만, 정작 히데요시는 아직 혼마루[本丸]의 깊숙한 곳에 살아있었다. 진상을 말하자면 극도의 쇠약에 때마침 발작이 더해져 침상에서 두 시간 정도 기절하여 인사불성이 된 것이 죽음의 오보(誤報)가 되었다. 그 뒤 다소 기력은 회복했지만, 히데요시는 이제 자신의 생명에 끝이 왔음을 각오할 수 밖에 없었다.

 

 히데요시는 자신이 죽은 뒤에도 토요토미[豊臣] 정권이 잘 굴러갈 수 있도록 운영 체제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시기까지 히데요시 정권에는 운영 상의 조직 같은 것 없이, 히데요시 자신이 독재(獨裁)하며 그 수족으로써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등의 비서관(秘書官)이 그때그때마다 명령을 행정화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을 바꾸어 그 비서관 다섯 명을 토요토미 가[豊臣家]의 행정관(行政官)으로 삼아 '오봉행(五奉行)'[각주:1]이라 칭했다.

 그 상부조직(上部組織)으로 다섯 명의 의정(議定官)을 두었다. '오대로(五大老=고다이로우(고타이로우))라 일컬어졌다. 대로 필두(筆頭)나이다이진[大臣]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이며, 히데요리[頼] 보좌의 수상(首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수상(副首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차석(次席) 대로인 다이나곤[大納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이다. 이어서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이다. 이 다섯 명에게 히데요리를 보좌함에 있어서 최고의 발언권을 가지게 하였다. 물론 석고(石高), 관위(官位)를 보아도 그들은 여러 다이묘우[大名] 중에서도 특출났다. 그러나 그 능력, 성격, 신망(信望)이라는 점에서는 커다란 격차가 있었다. 세간 일반의 평가로 말하자면, 카게카츠는 우직(愚直)했으며, 테루모토는 너무 범용(凡庸)했고 또한 우키타 히데이에는 단순한 애송이에 지나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그 새로운 조직을 병상에서 구술(口述)하였다.

 히데요시의 말을 받고 있던 것은 평소와 다름없이 이시다 미츠나리 이하 다섯 명의 행정관들이었다. 그 중에는 아사노 나가마사[野 長政]도 포함되어 있었다. 히데요시는 구술을 끝마치자 감상을 말하였다. 오대로에 대한 인물평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한숨이 섞인 감상을 아사노 나가마사는 붓으로 적어 자식에게 전했고 또한 후세에 남겼다.

 

 에도님[殿=이에야스]은 의로운 분이시다. 그 의로움을 나는 오랫동안 보아왔다. 그의 손녀를 히데요리와 맺어주고 싶다. 의로우신 에도님께선 히데요리를 잘 보필해 줄 것이다.”

 

 이것은 관찰이라기 보다는 히데요시의 희망이 너무 깃들어 있었다. 또한 이 말이 이에야스에게 전해졌을 경우의 효과도 기대하였을 것이다.

 

 카가[加賀] 다이나곤(마에다 토시이에)[각주:2]…… 나와는 죽마지우(竹馬之友). 그가 얼마나 의로운 사람인가를 나는 잘 알고 있다. 때문에 히데요리의 후견인으로 임명한다. 필시 히데요리를 위해서 잘 해줄 것이다.”

 

 카게카츠, 테루모토는 이 또한 의로운 사람들이다

 

 히데이에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그 아이는 어렸을 적부터 내가 손수 키워 온 아이다. 히데요리를 지키며 키우는 것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어떤 일이건 만에 한 가지 경우가 있더라도 도망치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대로(大老)이기는 하나 봉행(奉行)들 틈에 껴 착실히 직무에 힘써 너희들과 대로들간의 사이에서 공평히 주선(周旋)해 줄 것이다.”

 

 히데요시는 또한 오대로, 오봉행을 시작으로 여러 다이묘우들에 대하여 자신이 죽은 후에도 토요토미 가문의 법도와 체제를 지켜 히데요리에 대한 봉공(奉公)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뜻의 서약서를 쓰게 하여 거기에 혈판(血判)을 찍게 하였다. 한 번뿐만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쓰게 하였다. 그 중에서도 이에야스의 서약서는 히데요시가 공손히 받으며,

 

 이것만은 관에 가지고 들어가 명토(冥土)로 가져 가겠다

 

 라고 까지 말하였다. 하지만 허무했다. 그의 사후(死後), 아미다가미네[阿弥陀峰] 산봉우리에 있던 히데요시의 묘소는 이에야스에 의해 파괴되었다. 물론 직후가 아니라 오오사카 전쟁[大坂の役]가 끝난 다음의 일이긴 하지만.

 

 히데요시는 죽기 한 달 전 즈음 제후들에게 자신이 쓰던 옷이나 무구(武具) 등을 나누어 주었고, 자신이 죽은 후 법률이 될 수 있게 치밀한 유언을 써 남겼으나 아직 숨은 있었다. 죽은 15988 18일 전전날, 오대로를 병실로 불러 들였다. 한번 더 히데요리에 대한 것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다섯 명 중 우에스기 카게카츠만은 자신의 영지(領地)로 돌아가 있어 부재중이었기에 토쿠가와 이에야스 이하 네 명이 얼굴을 나란히 하였다. 베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가 주어졌다.

 

 어느 얼굴이건 심각하고 비통한 표정을 만들고 있었지만 히데이에만은 아랫입술을 악물고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히데이에 만은 병상에 있는 히데요시를 보고 그러한 정치적 얼굴 표정을 만들 수 없을 정도의 타격을 받았다. 이제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앙상해져 눈을 감을 때마다 배 곪아 죽은 사람의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살아있었다.

 이 모습이…… 타이코우이신가?’

 라 생각하자 히데이에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때로는 너무 격하여 중요한 히데요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히데요시는 눈동자만 히데이에를 향해 움직인 후 희미하게 말했다.

 

 하치로우~”

 

 라고. 모두 귀를 세웠다.

 

 지금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단다. 좀 조용히 해주지 않을래?”

 

 쇠약으로 인하여 의식이 희미해진 탓인지, 마치 어린 아이에게 타이르는 듯한 말투로 히데요시는 말하였다. 그 말투와 목소리가 히데이에를 한층 더 슬프게 하였다. 어렸을 때 히데요시 곁에서 다른 꼬마 시동들과 장난 등을 쳤을 때의 꾸짖었던 그 목소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이어서 말했다.

 내용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단지 히데요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오, 부탁 드립니다, 의로우신, 의로우신 등으로 애처롭게 호소할 뿐으로, 살아 남은 측의 잘난척하는 입장에서 보면 우스운 망탄(妄誕)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과 같은 정경(情景)을 이미 8살 때, 죽은 아비의 머리맡에서 체험했던 히데이에에게 있어서는 다른 세 명과는 전혀 다른 정념(情念) 속에 있었다. 당시 자신이 지금의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이며, 죽은 나오이에[直家]가 히데요시였다. 당시 하시바 치쿠젠노카미[羽柴 筑前守]였던 히데요시는 온 몸에서 광망(光芒)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모습으로,

 

 안심하시길…… 하치로우님에 대한 것. 반드시 뜻하시는 바대로 받들겠습니다.”

 

 라고 나오이에의 귓가에서 말하였다. 그 말대로 히데이에는 히데요시의 손아래서 성인이 되었고 이제 20대 중반을 넘었으며 영지(領地)도 나오이에 때보다 커졌다. 임종(臨終)의 약속이 지켜진 증거가 지금 여기에 있는 히데이에의 존재 그 자체인 것이었다. 히데이에는 만약 히데요시가 자기 혼자 여기에 있게 해주었다면 목소리 높여 이불 자락에 매달려서는 히데요시에게 안심하라고 외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작법(作法)에 따라 이 자리에서는 상석자(上席者)가 응답해야만 하였다. 상석자인 이에야스가 곧바로 무릎걸음하며 응답을 하였다.

 

 부디 안심하시길 바랍니다

 

 목소리는 차분함 함께 목 끝에서 울리며 나와, 누가 들어도 신뢰감이 있을 듯한, 거의 장중(莊重)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음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들은 히데요시는 혼신의 힘을 담아서 미소 짓고 턱을 당겨 희미하게 끄덕였다.

 

 다다음 날 심야. 히데요시는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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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데요시의 죽음은 그 다음날부터 후시미[伏見]의 정계(政界)를 바꾸었다.

 이에야스는 딴 사람이 되었다. 이미 세키가하라[ヶ原]를 상정(想定)하여, 그 목표에 따라 행동하였다. 히데요시가 유언으로 만든 법의 금지사항을 아무렇지도 않게 어기며 제후들의 마음을 취하기 위해서 여러 방법으로 접촉을 하기 시작했다. 히데요시의 법을 무시하여 자기 멋대로 제후들과 인척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이것이 봉행 이시다 미츠나리를 자극했다. 이에야스는 미츠나리 혹은 마에다 토시이에를 화나게 만들게 만들어 그들이 거병(擧兵)하게 한 후 그것을 토벌함으로써 정권 교체의 매듭을 짓고자 하였다. 이 목표를 향해서 이에야스는 치밀하고 더구나 대담하게 움직였다. 그런 이에야스의 동향을 보고 나름대로 추측한 토요토미 가의 제후들 대부분은 자기들이 나서서 이에야스에게 접근하였다.


 이 즈음. 우키타 가[宇喜多家]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이 소동도 히데요시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았다.

 히데요시가 지적했듯이 히데이에게 결여되어 있던 것은 정치 능력이었을 것이다. 특히 히데이에는 가문을 다스리는데 어두웠고, 자신의 본거지에서 영지를 다스리던 중신(重臣)들과 친분이 얕았다. 이 때문에 중신들과의 정치에 관한 연락에는 나카무라 교우부[中村 刑部]라는 측근을 중용하였고 이를 총애하고 있었다.

 

 교우부는 원래 우키타 가문의 가신이 아니었다. 카가[加賀] 사람이었다.

 고우히메[姫]에 딸린 부하로써, 카가 마에다 가[前田家]에서 우키타 가문에 편입되었다. 원래 마에다 가에서 오오사카 성[大坂城]과의 창구 역할을 하고 있던 인물로 사교(社交)에 뛰어났다.

 

 지로우베에[兵衛 교우부의 통칭]는 꽤 쓸만하군

 

 하고 히데이에는 무심코 이를 어떤 일이건 시켰고 그러던 중에 정치 관련의 연락도 담당하게 하였다. 연락이라는 것은 오오사카[大坂] 비젠지마[備前島]주재(駐在)하는 필두 가로인 오사후네 키이노카미[長船 紀伊守]에 대한 심부름이었다. 그러던 중 교우부는 오사후네에게 아첨을 하여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차츰 이 카가 사람은 히데이에와 오사후네 쌍방을 농락하게 되어 얼마 안가 히데이에, 오사후네 둘 다 이 남자가 끼지 않으면 서로의 뜻이 통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기에 나카무라의 눈치를 살피는 강대한 세력이 만들어졌다. 토요토미 가문의 이시다 미츠나리와 닮은 존재일 것이다. 히데이에는 이 교우부에게 2천석을 하사하여 가로의 말석에 앉게 하였다.

 

 벼락 출세한 놈이 우리들에게 지시를 내린다고?”

 

 라는 불만이 가문에 팽배해졌다.

 특히 이 악감정은 히데이에의 본거지에서 더 심했다. 오오사카 저택에서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라는 명령이 본거지로 온다. 본거지에 사는 가신들은 궁핍했지만 명령 받은 만큼 금과 쌀을 오오사카로 보내야만 하는 수동적인 입장이었기에 평소부터 감정이 편치 않았다.

 거기에 필두 가로인 오사후네 키이노카미는 원래부터 인망이 없어 모든 것에 강압적이었고, 정치에 있어서도 한 쪽만 편드는 일이 많았다. 오사후네에 대한 원한은 장년(長年)에 걸쳐 쌓였던 만큼 교우부가 가로에 임명되기 이전부터 본거지에서는 오사후네를 죽인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 점 히데이에도 모르지는 않았다.

 

 예전 조선에 있을 때 망부(亡父) 때부터의 노신(老臣)인 오카 부젠노카미[岡 豊前守]라는 사람이 진중(陣中)에서 병이 들어 부산에서 죽었다. 그 임종 전에 히데이에는 병 문안을 가 오랫동안 자신을 보좌해 준 공로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며,

 

 마지막으로 나를 위해서 해 줄 말은 없는가?”

 

 하고 물었다. 부젠노카미는,

 

 보람도 없을 것이지 말입니다

 

 라고 말하고선 입을 다물었다.

 말해도 효과가 없다는 의미였다. 히데이에가 거듭 청하자,

 

 아닙니다. 말씀 드렸다고 하여도 들어주실 턱이 없지 말입니다

 

 라고 부젠노카미는 말했다. 또 히데이에는 바랬다. 그러자 부젠노카미는 알았다며,

 

 오사후네 키이노카미는 대악인(大惡人)이지 말입니다. 저 인간을 계속 사용하신다면 가문에 난이 일어나지 말입니다. 불길한 말입니다만 결국에는 멸문하게 될 것이지 말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오카 부젠노카미는 죽었지만 그 예언대로 히데이에는 그 말을 쓰지 않았다. 무엇보다 오사후네 키이노카미는 망부 때부터 노신이며, 히데요시에게서 하시바[羽柴][각주:3]라는 성()을 하사 받고 있었다. 히데요시를 존중하고 있던 히데이에의 성격으로는 히데요시를 무시하는 듯이 이 노인을 정무(政務)에서 추방한다는 생각 같은 건 할 수 없었다.

 또한 본거지의 반() 오사후네 파()도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때는 하시바 성[羽柴姓]인 오사후네에 대해서 공공연히 적대하는 것을 삼가고 있었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죽음이 그들을 활성화시켰다.

 

 '타이코우가 죽었다. 그렇다면 이제 오사후네의 운명도 끝이다! 각각 수하들을 이끌고 카미가타[上方]로 밀고 올라가 오사후네와 일전(一戰)을 치루고 벼락 출세한 나카무라 교우부라는 놈과 함께 목을 따버리자!'

 

 라며 떠들썩하던 중에 당사자인 오사후네 키이노카미가 갑자기 병이 나 오오사카 저택에서 죽었다. 한번 해보자며 들고 일어난 기세가 있었던 만큼 본거지의 반대파들은 실망했지만,

 

 '어떻게 하긴~ 아직 나카무라 교우부 놈이 살아있다!'

 

  며 일부는 교우부를 죽이기 위해서 이미 철포()를 준비해서는 본거지를 출발했다고 한다. 그것을 오오사카에서 전해 들은 교우부는 곧바로 야밤에 배를 타고는 후시미[伏見]로 와 히데이에의 저택으로 도망쳐 왔다. 히데이에는 저택에 있지 않았고 후시미 성에 있었다. 교우부는 저택에서 기다리다 참지 못하고 성에 입성하여 히데이에를 배알(拜謁)하고자 하였다.
  1. 이시다 미츠나리, 나츠카 마사이에,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마에다 겡이[前田 玄以],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를 지칭. [본문으로]
  2. 토시이에의 거성이 카가[加賀]에 있었기에, 토시이에의 관직과 합쳐 카가 다이나곤[加賀大納言]이라 불렀다. [본문으로]
  3. 히데요시가 토요토미 씨[豊臣氏] 이전에 쓰던 성(姓).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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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데요시[秀吉]의 사후(死後), 쟁란(爭亂)이 일어났다. 1600 5월 여름. 미츠나리[三成]가 거병하였다. 간적(奸賊) 이에야스[家康]를 토벌한다고 하였다. 미츠나리에게 있어 모든 것은 히데요리[)]와 요도도노[淀殿]를 위해서였으며 이 남자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였다. 자신 말고는 토요토미 정권을 지키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비장한 각오로 임했다.

 천하의 제후는 동서(東西)로 나뉘었다.

 이러는 사이, 키타노만도코로는 히데요시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쿄우[京]에 있었으며,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이후 코우다이인[高台院]이라 불렸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이에야스를 후원하며, 이에야스의 힘으로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을 보존하고자 그녀의 영향 아래 있던 여러 무장들에게 권하여 이에야스 측에 가담시키려 하였고 거의 성공하였다. 단지 그녀는 히데아키[秀秋]의 우둔함이 두려웠다. 서군(西軍)의 달콤한 말에 넘어갈 위험이 있어 히데아키의 깃발이 어느 쪽으로 향할 지, 이 젊은이에 한해서는 예측할 수가 없었다. 코우다이인은 그를 쿄우로 불러,

 에도()[각주:1]은 당신의 은인입니다. 결코 방향을 틀리지 마시길

 하며 정성 들여 타일렀다. 히데아키는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
 하지만, 히데아키는 이미 그 몸이 오오사카[大坂]에 있었기 때문에 주변엔 온통 서군 뿐이라 서군 측에 설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에 미츠나리는 히데요리의 이름으로 싸움에 이기고 난 후 100만석 영지를 준다는 뜻을 전해왔다. 히데아키는 다소 동요했다.
 
서군에 붙을까?’
 그러나, 칸토우[東]에도 사자(使者)를 보냈다. 그러는 한편 서군에 붙어 동군(東軍)의 소부대(小部隊)가 수비하는 후시미 성[伏見城] 공격에 참가하여 성을 함락시키고 말았다. 도대체 히데아키는 어느 쪽에 붙어있는 것인가? 더구나 그 후 서군의 지시에 대해서 굉장히 애매한 움직임을 보였다. 예를 들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오우미[近江]의 타카미야[高宮]라는 곳에 틀어박혀서는 군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미츠나리는 히데아키의 거동을 의심하여,
 
아군에게 큰 해가 된다. 아예 죽여버리는 것이 좋겠다
 고 생각. 히데아키를 불러들여 몇 번이나 그 기회를 만들고자 했으나 히데아키는 응하지 않았다.

 미츠나리뿐만 아니라 칸토우[東]에 있던 이에야스도 히데아키에게 믿음을 주는 것을 두려워해,
 
뭐라 해도 좆병진이다. 어느 방향으로 튈지 알 수가 없다
 고 생각하여 히데아키의 밀사(密使)가 왔어도 만족스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이에야스가 에도를 출발하여 전장(戰場)으로 향하던 도중, 토우카이도우[東海道] 오다와라[小田原]에서 또 다시 히데아키의 밀사가 이에야스가 머무르는 곳으로 왔다. 그것을 이에야스의 부하 나가이 나오카츠[永井 直勝]가 응대하여 이에야스에게 만날 의향이 어떤지 물었다. 용건은 '서군을 배반하고 싶다'는 것이라고 한다.

 만날 필요 없다

 고 이에야스는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했다. 이에야스는 이 즈음 서군에 가담한 여러 무장들을 와해(瓦解)시키고자 온 힘을 다하여 뒷공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막료(幕僚)들은 이런 이외의 태도에 놀랐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는 서군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대부대(大部隊)를 거느리고 있으며 그 머릿수는 얕볼 수 없었다. 더구나 이쪽에서 꼬시는 것도 아니고 저쪽에서 내응(內應)하겠다고 자청하고 있는데, 그걸 만나지도 않겠다는 것은 어쩌자는 것일까?

 애송이 놈의 말, ()을 주기에 부족하다

 라고 이에야스는 그 이유를 말했다. 만약 함부로 응했다가 막상 그 때가 되어서 내응하지 않았을 경우 애송이의 잔머리에 넘어간 꼴이 되는 것이다. 이에야스로써는 승패 이상으로 명예가 걸린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5
일 후, 이에야스가 시라스카[白須賀]에 도착했을 때 히데아키의 세번째 밀사가
진중(陣中)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부하에게 시켜 적당히 응대하게 하였다.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 1600 9 15일 아침부터 벌어졌다. 하지만 히데아키는 여전히 서군에 속하여있었으며 더구나 계속 군을 움직이지 않았고, 분지(盆地)의 서남부에 있는 표고(標高) 293미터인 마츠오 산[松尾山]의 산꼭대기에 진()을 치고 아래쪽의 전황(戰況)을 관망(觀望)하고 있었다.

 킨고[金吾]는 도대체 어쩔 생각인가?”

 그 산을 올려보는 동서 양군의 어느 누구던 그런 의혹을 가졌다. ()은 마치 저 먼 하늘에 있는 듯했다. 당연히 아래서는 그들의 움직임을 알 수 없었고 싸울 의지가 있는지 어떤지조차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죽은 히데요시가 킨고를 위해서 붙여준 히라오카 이와미[平岡 石見], 이나바 탄고[ 丹後] 두 명은 이미 이 전날 밤 동군의 쿠로다 나가마사[ 長政]를 통해서 내응을 약속하고 있었다. 이에야스도 나가마사가 그 책임을 지는 형식으로 히데아키의 신청을 승낙했다. 더구나 단순히 입으로만 하는 약속이 되지 않게 토쿠가와 가문에서 오쿠다이라 사다하루[平 貞治], 쿠로다 가문[黒田家]에서는 오오쿠보 이노스케[大久保 猪之助]가 각각 연락과 감시를 위해서 히데아키의 진중에 가 있었다.

 한편, 서군 측도 될 수 있는 만큼의 회유(懷柔策)은 쓰고 있었다. 미츠나리는 싸움이 일어나기 직전에,

 히데요리님을 위해서 입니다

 라 히데아키를 설득하여 전의(戰意)를 불러일으키고자 하였다. 단순한 충절론(忠節論)만으론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히데아키에게 거대한 이익을 약속하였다. 이익이라는 것은, '히데요리님이 15살이 되시기 전까지 킨고님에게 천하를 다스리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관백[白]추대(推戴)한다는 뜻일 것이다. 이 조건에는 히데아키도 적잖이 마음이 흔들렸다.

 이 좁은 세키가하라 분지에 동군 약 7, 서군 약 8만의 군세가 대치하였다.
 아침. 전날 밤에 내린 비가 갬과 동시에 교전 상태가 되어
정오(正午)가 가까워짐에 따라 전황이 격렬해졌다. 더구나 서군의 주력 부대인 이시다[石田],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부대 등이 사력을 다해서 싸웠기 때문에, 밀린 동군은 기세가 눈에 띌 정도로 저하되었다. 이어서 오전 11시가 넘자 동군의 일부에서는 패색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히데아키는 여전히 8천의 군사를 움직이지 않은 채 산꼭대기에서 내려올 기색조차 없이 동서 어느 쪽에도 붙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히데아키는 산 아래의 전황이 뜻밖이었다. 아군인 서군이 진다고 예상했기 때문에 적인 동군에 내응을 약속하였는데 산 아래의 전황은 서군이 유리했다. 산꼭대기에서 히데아키는 이 남자 나름대로 계산을 하였다. 이대로 상황을 봐서 이기는 것이 결정된 쪽에 붙으면 이보다 좋은 것은 없을 터이다.

 한편 이에야스에게 있어서도 이시다 쪽의 분전은 더욱 뜻밖이었을 것이다. 전투가 시작된 후 몇 번이나 마츠오 산을 올려다보며,

 킨고는 아직인가? 아직 내응하지 않는 건가?”

 하고 몇 번이나 중얼거렸단 말인가? 하지만 산꼭대기에 빽빽하게 세워져 있는 코바야카와 가의 깃발은 움직이질 않았고 그 거취도 알 수 없었다. 히데아키의 거동은 이에야스가 예측했던 대로가 되었다. 결국 정오 전의 이에야스는 그가 낭패(狼狽)했을 때의 버릇인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해,

 애송이에게 속다니…… 분하구나 분해!”

 라고 자기도 모르게 몇 번이고 말했다. 이에야스는 비상수단을 택했다. 위협이었다. 곧 철포대의 일부를 전진시켜 히데아키가 있는 마츠오야마의 기슭으로 보내 산꼭대기를 향해서 이에야스의 분노를 표출하는 듯이 연달아 발포하게 하였던 것이다.

 히데아키라는 남자에게는 이 발포가 무엇보다도 큰 효과가 있었다. 산꼭대기의 히데아키는 놀라 두려움에 허둥거리듯이 서군을 향해서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것이 정오였다. 8천의 코바야카와 군세는 산을 내려와 아군의 진지로 내달렸다. 전세(戰勢)는 이 순간 역전되었다.

 싸움에 이긴 후 분지 서쪽의 이에야스 진지에 여러 무장들이 모여들어 축하가 이어졌지만 이 싸움에 승리를 가져다 준 최대의 공로자인 히데아키만은 아직 자신의 진지에서 비를 계속 맞고 있었다.
 
이에야스에게 혼난다
 는 공포가 있었고 또한 자신이 연기했던 역할이 얼만큼이나 거대한 것이었는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듯했다. 조금 시간이 지난 뒤,

 킨고님은 아직 오시지 않은 듯하군

 하고 이에야스가 말하여 전령(傳令)인 무라코시 모스케[村越 茂助]에게 맞이해 오도록 명했다.
 
저 좆병진에게는 여러 번 손이 가는구먼
 이라고 이에야스는 생각했다. 곧이어 히데아키가 왔다. 쿠로다 나가마사가 부축하는 형태로 이에야스의 진지로 데리고 들어왔다.

 이에야스는, 히데아키에게만은 예()를 취하여 우선 자리에서 내려와, 투구의 턱끈만 풀고 말하길,

 츄우나곤님. 오늘의 전공(戰功)이 아주 크시니 앞으로 원한을 가지지 않겠소

 라며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히데아키는 놀라 앞으로 자빠지듯이 절을 하였다. 원래의 태생으로 돌아간 듯 마치 백성과 같았다. 이런 인물이 토요토미 가문일문(一門)이었다. 그 보기 흉한 모습에 그곳에 있던 토요토미 계()의 여러 무장들 역시 창피해져 모두 눈을 돌렸다. 쿠로다 나가마사가 참지 못하고 옆에 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에게 소곤거렸다. 마사노리는,

 당연한 것. 참새가 매에게 까불었던 것이네. 그렇다면 저렇게 될 수밖에 없겠지

 라고 말했다. 하지만 마사노리 자신도 아직 사태를 충분히 이해하질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말하는 참새가 몇 시간 동안 역사의 열쇠를 쥐고 있다가 결국 공포에 떤 나머지 뛰쳐나가 이에야스에게 천하를 쥐게 만들었다. 이에야스만이 그 낌새를 눈치채고 있었다. 지하(地下)의 히데요시도 이 양자(養子)가 토요토미 가문을 망하게 만드는 일을 할거라고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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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야스는 히데아키의 전공을 칭찬하며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에 50만석을 하사하여 그 공적에 보답하였다. 하지만 그 후 히데아키는 매일 밤 광란(狂亂)하며 음란(淫亂)에 빠졌고 적은 양의 술을 마시곤 취하여 곧이어,

 세키가하라의 전공 일등은 내다!”

 고 시녀(侍女)들을 모아서는 칼을 뽑아 들고 전쟁 흉내를 내었다. 보좌하던 노신(老臣)들도 그 광포함을 두려워하여 주요한 자는 대부분 그가 살아있을 때 뿔뿔이 흩어졌다. 곧이어 머리에 병을 얻어 세키가하라 전투로부터 2년 후인 1602 9월 오카야마 성[岡山城]에서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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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었다고?”

 쿄우[]의 코우다이인[高台院]은 이 조카의 부고(訃告)를 들었을 때 이렇게 말하였을 뿐이었다. 계명(戒名)도 물어보지 않고 그렇게 지나갔다. 그녀가 만든 이 양자는 토요토미 가문을 망하게 하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을 이 세상에서  완수하였다.

=======================================================金吾中納言,======================
  1. 이에야스. 이에야스의 거성이 에도에 있었기 때문이 이렇게 불렸다. [본문으로]

二.

 조선 출병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16살의 곤츄우나곤[権中納言]은 이미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로 내려간 히데요시를 뒤따르기 위해서, 새로 하사 받은 탄바[丹波] 카메야마 성[亀山城]에서 준비 중이었다.
 
참고로 히데요시는 이 행군에 특히 총애하던 요도도노[淀殿] 한 명만을 데려갔다. 많은 측실 중에서 특히 요도도노가 선택된 것은,

 “저번 오다와라 공략전[小田原の陣[각주:1]] 때 요도[淀] 녀석과 함께 하여 바라던 대로 승리를 얻었다. 요도 녀석은 이젠 전장(戰場)의 길례(吉例)이다”

 며 다른 측실의 질투를 막고자 하는 의미도 있어 그렇게 말은 했지만, 요도도노에게서는 자기 자식을 낳을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히데요시가 접한 수 많은 여성들 중 요도도노만이 히데요시의 아이를 낳았다. 츠루마츠[鶴松]였다. 이 츠루마츠는 안타깝게도 일찍 죽어지만 다시 한번 임신할 수도 있는 법. 이 희망이 히데요시에게 요도도노를 함께 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히데아키는 다음 해인 1593년 3월에 히젠 나고야로 향하였는데 오오사카[大坂]를 출발함에 앞서 양어머니인 키타노만도코로에게 인사를 올리기 위해서 성으로 갔다. 17살 때였다.

 “수고하는구나”

 키타노만도코로는 그렇게만 말하고 말았다.
 누구를 만나건 계속 미소를 띄우는 이 여성이, 킨고츄우나곤 히데아키에 대해서만은 미소를 보이는 것 자체가 드물었고 이때도 역시 입술을 조금만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녀는 히데아키가 가진, 살아있는 생물의 추잡함이 배어 나오는 끈적끈적한 얼굴을 보는 것조차 싫었다.
 그런 주제에 히데아키에게는 뻔뻔함이 없었다. 두꺼운 얼굴로 양어머니에게 비위를 맞추면 좋을텐데, 그녀가 안 좋은 기분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자 갑자기 겁먹은 강아지마냥 꼬리를 말고 불쌍한 표정을 만들어 내었다. 이 표정이 반대로 키타노만도코로의 비위를 더욱 더 상하게 만들었다. 애처롭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얼굴에 힘이 들어가 더욱 더 찡그리는 얼굴을 만들어 버렸다.

 옆에 있던 히데아키의 수하는 조마조마했다.
 이 즈음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토요토미 가문의 가신(家臣) 중 한명인 야마구치 겐바노카미 마사히로[山口 玄蕃頭 正弘]가 스승을 겸한 부속 가로(家老)가 되어 있었다. 야마구치 마사히로는
오우미[近江] 출신으로, 히데요시가 오우미 나가하마 성[長浜城]의 성주를 하던 때부터 섬겼으며 전쟁터에서도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백성을 다스리는데도 밝아 히데요시의 가장 중요한 토지 정책이었던 소위 태합 검지(太閤 検地[각주:2])의 실무 담당자로서 이름을 높였다. 백성을 잘 다스렸던 만큼 세상 물정에 밝았고 처세에 능했다.
 앞으로 나가서는,

 “키타노만도코로님. 실례입니다만 킨고님에게 여행 떠나는 석별(惜別)의 말씀이라도 받고자 합니다”

 라고 히데아키를 대신하여 말했다. 당연히 그래야만 할 것이다. 토요토미 가문의 자식이 전쟁터로 떠난다고 하는데 양어머니가 이래서만은 안 되었다.

 “그런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히젠[肥前]에서는 마시는 물에 신경을 쓰시길”

 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당연히 이런 경우라면 통례인 여행길에 쓰라고 주는 선물도 없었다. 히데아키는 면목을 잃은 채 성을 나섰다.

 히젠 나고야에 도착한 것은 3월 22일이었다.
 히데아키는 화려한 갑옷을 입고 나고야 성에 입성하여 양아버지인 히데요시를
알현(謁見)했다.
 히데요시는 히데아키가 몸에 건친 갑옷의 화려함에 대단히 만족하였다.

 “출발에 앞서 어머니에게 이것저것 받았나 보구나”

 라고 기분 좋은 듯 물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받지 못했습니다”

 라 하였다. 히데요시는 어느 정도 그것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곧바로,

 “기분은 어떠시던가?”

 하고 야마구치 마사히로에게 물었다. 마사히로는 정직히 그 모습을 전했다.

 “허허~ 길 떠나는 자식에게 두 마디뿐인가”

 히데요시는 웃으면서 끄덕거렸지만 내심 당혹스러웠다. 히데츠구[秀次]에게 만일의 일이라도 있을 시에는 히데아키를 토요토미 가문의 후계자로 세워야 하는데도 양어미라는 처의 태도가 좋지 않았다.
 -당신은 잘못했네
 하고 질책하는 뜻을 담은 편지를 곧바로 오오사카(大坂)의 처에게 보냈다.

킨고는 22일에 나고야에 도착하였소.
수하들도 많이 동원해 왔으며, 거기에 행장(行裝)도 화려해서 나는 칭찬을 해 주었네.
히데아키가 오오사카에 고별 인사를 하러 갔을 때, 당신은 기분이 나쁜 듯한 표정을 지었고 필요한 도구들도 준비해서 주지도 않았다고 하더군. 왜 그러하였는가?
당신에게는 자식이 없네. 저 아이를 귀여워하지 않고 어느 자식을 귀여워하려고 하는가?
킨고가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느냐에 따라 나는 저 아이에게 나의 은거료(隱居料[각주:3])를 주려고 생각하고 있네.[각주:4]
그 정도로 이 히데요시가 생각하고 있을 정도이니까, 당신도 너무 구두쇠 같은 행동을 해서는 안 되오.
라 써서 보냈다.

 하지만 그날부터 2개월도 지나지 않았을 때 토요토미 가문의 사정이 변했다. 요도도노가 임신을 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미칠 듯이 기뻐했다.
 이 기쁨을 곧바로 오오사카의 키타노만도코로에게 써 보냈지만 내용이 미묘했다.

요즘 감기에 조금 걸려서 붓을 들지 않았네.
지금은 나아져, 이 편지는 나아서 처음 붓을 들어서 쓰는 것이네
 즉, 붓으로 뭘 쓸 때도 키타노만도코로에게 보내는 편지를 제일 먼저 쓴다는 것을 말하며 배려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 그리고……
라고 덧붙여서 쓰는 듯이 히데요시는 썼다.
니노마루도노[二の丸殿=요도도노]가 임신했다고 들었네.
고 남 이야기하는 듯 말했다.
경사스러운 일이긴 한데 이 히데요시는 아이가 필요하지 않네. 정말 필요하지 않아. 당신도 그런 생각으로 이 타이코우[太閤]를 이해해주시게.
하긴 이 하데요시에게 아이는 있었지. 츠루마츠[鶴松]라는. 그건 다른 집에 주었지.[각주:5]
그러니 이번 아이는 히데요시의 아이가 아니네. ‘니노마루도노’만의 아이이네
히데요시는 키타노만도코로의 마음을 헤아리며 이런 말돌리기를 하였지만 물론 본심이 아니었다. 다만 이 이상한 논리의 뒤에는 당시의 미신과 관계가 있다.
- 내 아이가 아니다. 주워온 아이다
 이러면 아이가 건강히 자란다고 한다. 죽은 츠루마츠가 태어났을 때의 이름을 버린 아이라는 뜻으로 ‘스테[捨]’라고 하였다. 이번에 태어난 아이는 머지않아 ‘히데요리[秀頼]’가 되지만, 태어났을 때는 주워 온 아이라는 뜻으로 ‘히로이[拾]’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 미신을, 즉 요도도노 한 사람만의 아이라는 것을 신불(神仏)에게 강조하기 위해서 히데요시는 요도도노를 나고야 성[名護屋城]에서 내보네 야마시로[山城]의 요도 성[淀城]으로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오오사카 성[大坂城]의 두번 째 성곽[二の丸=니노마루]로 거처를 옮겨 남자 아이를 낳았다. 이해의 8월 3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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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데요시는 기뻐서 사람들이 ‘이제는 미치신 건가’하고 걱정할 정도로 날뛰었다.
 이 천재도 이 즈음부터는 누구의 눈으로 보아도 노망기(老妄氣)가 들기 시작했다.
 바다 건너 원정군의 지휘를 내던져둔 채 나고야 성을 나와 오오사카로 돌아왔다. 그 사이 키타노만도코로에게 편지를 보내어,

쌓인 이야기라도 함께 하세
라고 써서 보냈으며 요도도노에게도,
거듭거듭 말하지만 히로이에게는 젖을 잘 먹이거라. 젖이 많이 나오도록 너도 밥을 많이 먹어라. 또한 여러가지 신경을 쓰면 젖이 잘 안 나오니 신경 쓰지 않도록 해라
라 써 보냈다. 거기에 한 번 더,
건강을 위해서 을 받거라. 단, 히로이에게 뜸은 필요 없다. 엄마(요도도노)가 해 주어도 안 된다.
라는 편지도 보냈다.

 히데요시가 기뻐 날뛰면 날뛴 만큼 킨고츄우나곤의 존재는 희미해져 갔다.
 ‘이래서는 토요토미 가문에 언젠가 큰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닌가?’
 라고 내다본 것은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였다.

 죠스이.
 통칭 칸베에[官兵衛]. 관(官)은 카게유노사칸[勘解由次官].
 히데요시가 천하를 쥘 즈음부터의 꾀주머니였다. 계략, 책략을 굉장히 좋아했다. 단지 기묘할 정도로 사리사욕이 없었다. 그에게 책모(策謀)란 사욕을 위한 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주객(酒客)이 술을 사랑하는 것처럼 책모를 좋아했으며,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에게서 일종의
선풍도골(仙風道骨)까지 느끼곤 하였다. 오오사카[大坂], 후시미[伏見] 등지에는 죠스이에게 호의적인 사람들도 많았고, '타이코우님이 세우신 공(功)의 절반은 저 절름발이님(죠스이)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쨌든 토요토미의 천하가 되어서 죠스이가 얻은 것이라고는 불과 부젠[豊前] 나카츠[中津] 10여 만석으로 보잘 것 없었다.

 여담이 되겠지만 어느 사람이 히데요시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히데요시는,

 “농담하지 마라”

 라며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저 절름발이에게 100만석이라도 쥐어주면 나중엔 천하를 손에 넣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비슷한 이야기를 다른 장소에서도 말했다.

 어느 날 밤 측근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하였다. 화제가 제후(諸侯)의 품평이 되었다. 히데요시가 갑자기,

 “내가 죽으면 누가 천하를 손에 넣을까?”

 라고 물어보았다. 물론 좌흥(座興)을 돋우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을 말했지만 히데요시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그건 절름발이다”

 라고 말했다. 모두 납득할 수 없었다. 왜냐면 쿠로다 죠스이는 기껏해야 10여 만석의 신분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런 조그만 영지(領地)로는 많은 병사를 모으기도 힘들다. 그렇게 이의(異議)를 말하자 히데요시는, '아니지~ 아니지~' 하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저 절름발이의 굉장함을 너희들은 알지 못한다. 나는 옛날에 그와 거친 전쟁터에서에서 함께 생활한 적이 있다. 나만이 그의 굉장함을 알고 있지”

 라고 말했다.
 

 죠스이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히데요시가 자신의 재능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 이외라 할 수 있는 야박한 처우에 대해서 조금도 불평하는 낌새를 보이지 않았으니까.
 뛰어난 공적을 많이 세워 자신의 주군을 떨게 하는 사람은 해를 입는다고 한다. 죠스이의 지식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옛 공을 내세워 은상을 많이 바라면 죠스이의 몸은 파멸할 것이다.
 히데요시는 천하를 손에 넣자 죠스이를 중요한 자리에서 멀어지게 하였다.
 ‘죠스이라면 나의 두려움도, 진심도 알아줄 것이다’
 라는 죠스이의 총명함에 기대는 부분도 있었다. 대신하여 문관(文官)들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들이 토요토미 가문의 집정관(執政官)이 되었다. 때때로 그들은 토요토미 가문의 공로자들을 거북하게 여겼기에, 히데요시와 그들 사이를 멀어지게 하였다. 죠스이는 그것에 불만을 표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한 사람의 인간은 하나의 시대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을 이 남자는 알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 후 죠스이는
보신(保身)을 위해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은거를 결심. 가문도 성도 영지(領地)도 아들인 나가마사[長政]에게 물려주었다. 아무리 히데요시라도 이때는 놀라,

 “영지(領地)로 돌아갈 생각은 마시게. 쿄우[京]에서 내 상담상대가 되어 주게”

 라 말하며 쿄우에서 생활할 수 있게 500석을 주었고 이어서 2000석으로 가증해 주었다.
 그 죠스이가,
 ‘토요토미 가문의 평온을 위해서’
 라며 계책을 세웠다.
 취미나 오락 같은 것이다.
 선조 대대로 두터운 은혜를 받아 왔던 가신(家臣)이 아니기에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쨌든 죠스이는 히로이 – 히데요리[秀頼]의 출생으로 인해 관백 히데츠구가 위험해질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히데츠구의 행패는 천하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명목으로 살해당할 것이다. 죠스이는 항상 히데츠구의 바둑 상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넌지시 몸조심할 것을
간언(諫言)하였으며 또한,

 “자진해서라도 원정군의 총지휘를 맡고 싶다고 하십시오. 타이코우[太閤] 전하는 그런 모습을 가련(可憐)히 여기실 것입니다.”

 라고 말했었지만 히데츠구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 때문에 죠스이는 히데츠구에겐 가망이 없다고 단념하여 그의 저택으로의 발길을 끊었다. 다음은 킨고 히데아키였다.
 ‘히로이님이 태어난 이상, 킨고는
폐물(廢物)이 될 뿐이다. 킨고를 어떻게든 해 드려야지..'
 라고 죠스이는 생각했다.
 쓸데없는 참견이라는 것이었다.
 죠스이는 더이상 히데요시의 꾀주머니도 아니었으며, 또한 토요토미 가문에 대한 것을 신경써야 하는 역할도 주어져 있지 않았다. 거기에 토요토미 가문의 사람들이 죠스이를 특별히 의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어디까지나 이 남자만의 취미였다고 할 수 있다.
 죠스이는 그 재능을 표할 수 있는 장소가 없어 매일매일이 심심했다. 너무 심심했던 나머지 쓸데없는 참견에 나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칸토우[関東]의 호우죠우 씨[北条氏]를 정벌한 전쟁. [본문으로]
  2. 히데요시[太閤]가 통일된 규격으로 논밭(영지안의 산과 숲은 제외)의 생산량을 계산하여 세금, 부역 등을 산출 혹은 할당하게 한 것. [본문으로]
  3. 은거한 사람에게 주는 쌀 또는 그 만큼의 이익이 나는 영지. [본문으로]
  4. 다른 부분은 관백(関白) 히데츠구에게 주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본문으로]
  5. ‘죽음’이라는 말을 쓰지 않기 위해서.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