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쵸우슈 한[長州藩]은 매년 1월1일이 되면 하기 성[萩城]의 가장 깊숙한 방에서 비밀 회의가 열렸다고 한다. 중신들이 번주(藩主)에게 신년 인사를 올린 뒤, 필두 가로가 앞에 나아가, “올해는 어떻게 할까요?”라 물으면 번주가 “아직 이르네”라 답하는, 아주 간단한 의식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의 진위여부는 확실하지 않으나,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때의 원한을 잊지 않고 복수전의 시기를 주종간에 문답한다는 것이 정말 쵸우슈우[長州]다운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세키가하라 전쟁에서 패하여 츄우고쿠[中国] 8개국[国][각주:1]이라는 거대한 영지에서 단번에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 2개국으로 감봉된 당사자 - 그것이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이다.
 테루모토
는 시대의 영걸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손자이다. 1563년 테루모토의 부친 타카모토[隆元]가 지 아비 모리나리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불과 11살의 나이로 가문을 이었다. 당연 어린 테루모토를 대신하여 모토나리가 실질적인 당주로 정무를 계속 보았고,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양 천[両川] ’이 모토나리를 보좌하는 체제가 성립되었다. 
 모토나리는 어려서 아비를 잃은 테루모토가 건강하고 예의 바르게 성장해 줄 것을 기도했다. 그리고 그 바람대로 무사히 테루모토는 15살의 봄을 맞이했다. 모토나리는 그 기쁨을 편지로 써서 테루모토의 모친에게  보낼 정도였다.

 테루모토는 위대한 할아버지에게 응석을 부리는 감이 있었다. 모토나리가 1567년 은거하려고 하자,
 “아버지 타카모토는 40살이 되어서도 뒤를 돌보아 주셨으면서 이제 막 15살이 된 저를 버리시려고 하시다니 뭐라 할 말도 없사옵니다. 그러니 저도 모우리 가문[毛利家]을 버리고 어디까지건 할아버지가 가시는 곳에 따라가겠습니다.”
 며 정말 아이처럼 우는 소리를 해댔다.
 모토나리는 이런 테루모토를 미덥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한편 귀엽다고도 생각했다.[각주:2]

 테루모토가 13살인 1565년.
 모우리 가문[毛利家]는
토다갓산 성[富田月山城]의 아마고 가문[尼子家]을 공격하였는데 이 때가 테루모토 전쟁터 데뷔였다. 4월 16일 테루모토는 모토나리에게 선봉에 서고 싶다며 자원하였다. 그러나 이날 적은 아마고의 주력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킷카와 모토하루,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모우리 가문의 당주가 데뷔전을 치를만한 상대가 아니라며 테루모토의 선봉을 막았다. 테루모토는 크게 불만을 품게 되었다. 어린 테루모토는 장수(將帥)의 역할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지 못했다기 보다 테루모토 자체가 격정적이고 저돌적인 성격이었던 듯 하다. 시간이 흘러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그런 테루모토를 ‘대장의 그릇이 아니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즉 테루모토는 정치적 감각이 결여된 인물이었던 듯 하다.

 예를 들면 1574년 빗츄우[備中] 미무라 사네치카[三村 実親][각주:3]의 키노미 성[鬼身城]을 공격하였을 때, 사네치카를 손녀사위로 둔 오우미 뉴우도우[近江 入道][각주:4]가 자기 가문만 살려 주면 사네치카를 잡아다 바치겠다고 하자, 테루모토는 그 더러운 수법을 절대 용서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략을 중시하는 다른 중신들이 오우미 뉴우도우의 내응을 받아들이도록 테루모토를 설득시켰다고 한다.

 또한 1578년에는 ‘양 천[両川]’이 목숨을 살려주자고 하던 아마고의 유신(遺臣) 야마나카 시카노스케[山中 鹿之助]를, 테루모토는 2번이나 살려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반항한 은혜를 모르는 놈이라며, 독단으로 시카노스케를 죽였다.[각주:5]

 1571년 모토나리의 죽음 이후에도 이런 성질 급한 테루모토가 큰 실수 없이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양 천[両川]’  중 하나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잘 컨트롤했기 때문이다. 모토나리가 죽은 뒤 모우리 가문은 과감한 킷카와 모토하루, 진중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모우리 가문의 양 기둥이 되어 모우리 가문의 안태를 지키고 있었다. 테루모토는 이 두 숙부 중 성격적으로는 모토하루에 가까웠지만 접촉의 기회는 타카카게 쪽이 많아 정치력이 탁월한 타카카게의 의견을 자주 따랐다.[각주:6]

 하지만 성격적으로도 대조적인 ‘양 천[両川]’은 1577년부터 시작되는 오다 가문[織田家]와의 전쟁 속에서 대응법을 둘러싸고 차츰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1582년 히데요시[秀吉]가 시미즈 무네하루[清水 宗治]가 지키는 빗츄우 타카마츠 성[高松城]를 포위하였을 때 킷카와 모토하루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대립은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때 킷카와 모토하루는 철저항전을,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강화교섭을 주장한 것이다.
 결국 천하의 정세에 밝은 타카카게의 주장으로 인해 사태는 시미즈 무네하루의 할복을 조건으로 강화교섭으로 이어졌다.
 이때 테루모토는 상기의 움직임 속에서 타카카게 노선을 따르기는 하였지만, 위험에 빠진 타카마츠 성의 구원을 주장하며 무네하루의 목숨과 바꾸어 강화교섭에 나서는 것에 세찬 거부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는 테루모토 자신의 의지와 반대되는 것이었다. 테루모토는 무네하루의 유족들에게 직접 위로의 말을 전하고 후히 대했다.[각주:7] 이보다 전에 ‘말려 죽이기[干殺し]’ 작전이 펼쳐진 톳토리 성[鳥取城]의 킷카와 츠네이에[吉川 経家]의 유족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했다.[각주:8]

 1582년 히데요시를 혐오하던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가 은거하고 4년 뒤에는 죽어, 모우리 가문은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 하에서 활로를 찾으려 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노선을 밟아가[각주:9], 1588년에는 테루모토가 히데요시에게 초청받아 타카카게, 킷카와 히로이에[吉川 広家, 모토하루의 아들]와 함께 상락(上洛)하여 쥬라쿠테이[聚楽第]와 오오사카 성[大坂城]에서 환대를 받고 임관의 영예[각주:10]까지 맛본 것이다. 즉 모우리 가문[毛利家]은 완전하게 토요토미 정권에 속하게 된 것을 의미했지만 그것이 테루모토가 바라는 방향이기도 했다.

 1597년. 모우리 가문의 기둥이었던 코바야카와 타카카케가 죽고 다음 해인 1598년에는 히데요시가 죽었다. 모우리 가문의 중추는 킷카와 히로이에[吉川 広家]로 옮겨져, 코바야카와 노선의 후계자는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恵瓊]와의 사이에 심각한 대립이 생겼다. 양자는 각자 놓여진 입장에 따라 킷카와 히로이에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무공파 다이묘우[大名]와 친했고, 안코쿠지 에케이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문치파와 손 잡았다.

 1600년 세키가하라 결전[関ヶ原の決戦] 때 테루모토는 안고쿠지 에케이의 요청에 응하여 서군의 총수가 되어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입성하였다. 히로시마[広島]를 출발할 때 중신 대부분이 반대했음에도 테루모토는 굳이 출마하였다고 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오대로(五大老)[각주:11] 중 하나로 선정된 은혜를 갚기 위함이었으나,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교활한 정권탈취를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던 것일지도 – 격정가(激情家)인 테루모토라면 양쪽 다 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리 데루모토[毛利 輝元]
1553년 출생. 히데요시[秀吉] 휘하가 되자 시코쿠 정벌[四国征伐][각주:12],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각주:13]에 참가하였고,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14]에도 참가. 1595년에는 오대로(五大老)의 한 사람이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총사령관으로 출진[각주:15].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패하여 120만석에서 수오우[周防], 나가토[長門] 36만석 9천석으로 감봉되었다. 1625년 4월 죽었다. 73세.

  1. 나가토[長門], 스오우[周防], 이와미[石見], 아키[安芸], 이즈모[出雲], 빈고[備後], 빗츄우[備中], 호우키[伯耆]. [본문으로]
  2. 여담으로 이때의 생활을 1613년 테루모토가 모우리 히데모토[毛利 秀元], 후쿠하라 히로토시[福原 広俊]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11살 때부터 부모님 곁을 떠났고, 13살에 시마네[島根]로 불려가 19살 때까지 할아버지(모토나리)에게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채 지냈다. 모든 것을 할아버지 의견에 따라야 했으며 때로는 엄청나게 맞은 적도 있다"고 하였다. [본문으로]
  3. 이 당시는 우에다 이에자네[上田 家実]의 딸과 결혼하여 양세자가 되었기에 우에다 사네치카[上田 実親]로 불림. [본문으로]
  4. 우에다 이에자네[上田家実]의 아비 [본문으로]
  5.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의 명령이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6. 앞서 언급한 편지에서 테루모토는 이에 대하여 “나는 할아버지에게도 맞았지만 타카카게, 모토하루에게도 엄하게 교육받아 이래서는 몸이 견뎌나질 않겠구나 하고 생각하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7. 테루모토는 그의 아들 시미즈 카게하루[清水 景治]를 중용하였고, 카게하루는 세키가하라 이후 감봉으로 인해 힘든 모우리 가문의 재정상황을 재건하는데 힘썼다. [본문으로]
  8. 츠네이에의 아들 츠네자네[経実]는 이와쿠니 번[岩国藩] 킷카와 가문의 사숙노[四宿老]의 한 명이 되었다. [본문으로]
  9. 여담으로 킷카와 모토나가와 형 모토나가[元長]까지 죽어 킷카와 가문[吉川家]의 당주가 된 히로이에는 이런 타카카게를 '타카카게는 히데요시 밑으로 들어간 결단을 자신의 가장 큰 공적이라며 자랑했다'며 빈정댔다. [본문으로]
  10. 토요토미 씨[豊臣氏]가 되어 토요토미노 테루모토[豊臣 輝元]라는 이름으로 종사위하(従四位下) 지쥬우[侍従]에 임명되었고. 같은 날 산기[参議]가 됨. [본문으로]
  11.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12. 1585년 히데요시가 시코쿠[四国]의 쵸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 元親]를 공격한 전쟁. 테루모토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를 1진, 킷카와 모토나가[吉川 元長]를 2진으로 출진시켰을 뿐 참가하지는 않았다. [본문으로]
  13. 1586년~1587년 사이에 히데요시가 시마즈 가문[島津家]에 공격당하던 큐우슈우[九州]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의 구원요청에 응하여 일으킨 전쟁. [본문으로]
  14. 테루모토는 쿄우토[京都]를 수비하는 역할을 맡아 칸토우[関東]에는 가지 않았다. 대신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모우리 가문의 군세를 이끌고 히데요시 주변을 지켰다. [본문으로]
  15. 테루모토는 정유재란 때 병으로 참가하지 않았다. 참가한 것은 테루모토의 대리인[名代]으로 우군(右軍) 사령관이 된 모우리 히데모토[毛利 秀元]였다. [본문으로]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시대에서도 이나바[因幡] 톳토리 성[鳥取城] 농성전만큼이나 인간성이 극한으로 몰린 것은 드물 것이다.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의 대규모 포위작전으로 인해 성은 완전히 아귀지옥으로 떨어져 사람 고기를 먹는 미증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었다. 당시의 기록은 그 모습을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전략)… 벼 베고 남은 그루가 최고의 먹을 것으로 나중에는 이조차 떨어져 말과 소를 먹었으며, 서리와 이슬을 맞고 약한 자는 아사(餓死)…(중략)… 말라 뼈만 남아 걷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남녀가 성의 책(柵)에 달라붙어 포위군을 향해서 살려주소~하고 울어도 그것에 용서 없이 공격군의 철포가 집중되었다. 맞은 자가 아직 숨이 붙어있는데도 성안의 사람들이 손에 칼을 들고 모여들어 다투어가며 그 살을 떼어 먹었다. 몸에서도 특히 머리가 맛있다고 하여 머리를 서로 뺏어가며 도망 다녔다…(후략)…

 히데요시의 ‘굶겨 죽이기. 칼도 창도 필요 없다’는 장기 포위공성전[兵量攻め]의 전형이 이 톳토리 성에 대해서 행해진 것이다. 장기 포위공성전의 이점은 아군 병사의 손해 없이 상대의 자멸을 기다리는 것에 있다. 단지 시간이 걸린다. 이 공성전은 1581년 7월에 시작되어 낙성을 보기까지 반년을 요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츄우고쿠[中国] 방면사령관으로서 출진한 히데요시는 하리마[播磨], 타지마[但馬]를 정복한 뒤 산인[山陰] 방면으로 더 진출하여 톳토리 성을 포위하였다. 그런데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진귀한 현상이 일어났다. 성주인 야마나 토요쿠니[山名 豊国]가 단 혼자서 히데요시에게 항복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모우리[毛利] 측에 마음이 기울어져 있던 가신들은 원군을 킷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에게 청하였다. 그래서 파견된 이가 킷카와 일족의 킷카와 츠네이에[吉川 経家]였다. 츠네이에는 성격이 우직하며 남다른 각오로 톳토리 성에 입성한 것을 알게 된 히데요시는 대규모 포위작전을 전개하였다.

 히데요시는 톳토리 성 멀리 3리(里) 사방부터 포위하였다. 그 포위한 진영은 산과 들의 형태를 바꿀 정도로 철저한 것이었다. 성밖 타이샤쿠산 산[帝釈山]의 정상을 깎아서 본진을 세웠고, 연장 2리(약 8km)에 이르는 포위선에는 흙으로 된 보루를 쌓고 책(柵)을 둘러 참호를 팠다. 약 1km마다 삼 층짜리 작은 성과 같은 망루(櫓)에 사수 100명씩을 두었고 또한 500m마다 초소를 만들어 사졸 50명씩 두었다. 밤에는 하늘까지 태워버릴 정도로 화톳불을 활활 피워서는 파리가 드나들 틈도 없을 정도로 엄중하게 경계를 섰다. 거기에 더해 히데요시는 이 진영에서 축제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시장을 만들어 여러 지역의 상인을 불러 모았고, 종을 치고 북을 때려 시끌벅적함 속에 유녀(遊女)들까지 불러들였다. 전투라기 보다는 관광유람에 가까웠다.

그러는 한편 히데요시는 이미 주변지역의 쌀과 보리 사재기에 빈틈없는 손을 쓰고 있었다[각주:1]. 시가 이상의 가격으로 쌀과 보리를 사들였기에 톳토리의 농민들은 앞다투어 팔았다[각주:2]. 톳토리 성 주변에서는 차츰 식량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킷카와 측이 모우리에 부탁한 식량선도 오는 족족 히데요시의 수군으로 인해 격침되어 버렸다. 히데요시는 성안이 굶어가는 것을 기다릴 뿐이 되었다.

 그리하여 성안의 식량난은 날이 갈수록 도를 더해 가 결국에는 기아(飢餓) 상태로 빠져버린 것이다. 그 뒤는 지옥이었다. 이 공방전의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성안의 사졸들은 싸우지도 못하고 무너져 간 것이다. 적은 철포보다도 무서운 배고픔이었다. 이대로 포위가 계속 된다면 전원이 성안에서 굶어 죽을 뿐이었다.

 츠네이에는 결심했다. 히데요시에게 사자(使者)를 보내어 ‘츠네이에가 배를 갈라 책임을 지겠으니 성병의 목숨만은 살려주길 바랍니다’고 청원한 것이다. 일족인 킷카와 모토하루의 셋째 히로이에[広家]에게 보낸 편지에 ‘오다와 모우리가 싸우는 일본에서 가장 화려한 전쟁터에서 배를 가르는 것, 후대까지 명예라고 생각한다’고 써서 각오가 어느 정도인지를 나타냈고, 부친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렇듯 훌륭한 최후를 맞을 수 있게 된 것은 킷카와 일족의 명예라고 생각합니다’는 심경을 적어 보냈다. 히데요시는 츠네이에의 담백함에 감동하여 될 수 있으면 목숨을 구해주고 싶다고 생각한 듯, 처음에는 목숨을 바꾼 항복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엔 츠네이에의 바램을 인정하였다. 그 뒤 츠네이에는 성의 병사들과 이별 잔치를 벌이고 싶다며 술과 안주를 요청했다. 히데요시는 이에 응하여 술 10상자, 그릇 10상자, 안주 다섯 종류를 보냈다.

 마지막 모습을 전하는 것으로써 시동(小姓)으로 마지막까지 지켜본 야마가타 나가시게[山県 長茂]의 보고서가 남아있다. 츠네이에는 목욕으로 몸을 깨끗이 한 뒤 녹황색의 의상을 입고 주연에 참석하여 껄껄거리며 웃는 등 쾌활하게 행동하였다. 그리고 배를 가를 때가 되었을 때 갑옷상자에 앉아서는 큰 목소리로 “연습 같은 것도 해 본 적 없을 테니 필시 서투를 테지”하고 카이샤쿠닌(介錯人[각주:3])에게 말을 걸었다고 한다.

 다른 기록은 더 세세하다. 와키자시[脇差[각주:4]]를 배에 꽂고는 기합과 함께 휘저었고 한번 칼을 뽑고는 다시 찔러 심장 아래까지 그어 올린 다음 배꼽 밑에까지 밀어 내리고선 와키자시를 배에 꽂은 채 무릎 위에 양 손을 올려 머리를 내밀었다… 츠네이에가 배를 가를 때 야마나 가문의 중신 몇 명도 뒤를 따라 배를 갈랐다.

 이리하여 성병의 대부분은 구원을 받게 되지만 생각하지도 못했던 사태로 인하여 많은 성병들의 목숨이 사라져 버렸다. 극심한 기아를 겪은 후엔 어떻게 먹느냐가 중요하다. 기아상태인 사람은 위나 내장이 쪼그라들어 있기 때문에 한번에 많이 먹으면 급사한다고 한다. 그 때문에 시간을 들여 조금씩 먹으라고 지시를 하였지만 그것을 지키는 사람은 적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모처럼 도움 받은 목숨을 잃게 된 것이다.

[킷카와 츠네이에(吉川 家)]
이와미[石見]의 호족 킷카와 가문[吉川家]의 분가 출신이다. 본가는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차남 킷카와 모토하루[元春]가 이은 가문이다. 톳토리 성[鳥取城]에서 자해하였을 때 츠네이에 35세였다.

  1. 이나바의 근린인 와카사[若狭]의 상인들을 시켜서. [본문으로]
  2. 성병들 조차 돈에 눈이 멀어 성 안의 쌀을 팔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3. 할복하는 사람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뒤에서 목을 베어주는 사람. [본문으로]
  4. 일본 무사들이 차는 칼 두 자루 중 작은 칼을 이름.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