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다 나가마사[田 長政]

1623년 윤8 4일 병사(病死) 55.

1568 ~ 1623.

쿠로다 요시타카[田 孝高]의 장남. 부친과 함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를 섬기며,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 공략 때 데뷔전[初陣]. 부젠[豊前] 나카츠[中津] 성주(城主)가 되어 조선 침공[朝鮮役][각주:1]에 종군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 공을 세워 치쿠젠[筑前] 52만석을 하사 받아, 후쿠오카 번[福岡藩]번조(藩祖)가 되었다.








모친과 처를 탈출시켜 준 것에 대한 은상(恩賞)


 1600 12 11일.
 쿠로다 나가마사는 부젠[豊前] 나카츠 성()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이 성은 너무 좁았기 때문에 다음 해인 1601년에는 후쿠오카 성[福岡城] 축성에 착수함과 동시에 영내(領內) 6개의 지성(支城)을 쌓아, 세키가하라[
ヶ原] 때 전공이 있던 중신들을 죠우다이[城代][각주:2]로 임명, 배치하였다.

 쿠라테 군[鞍手郡]의 타카토리 성[鷹取城]의 죠우다이에는 모리 타헤이[母里 太兵衛]가 임명되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에게서 명창(名槍) '니혼고우[日本号]'를 술내기로 따낸 일화로 유명한 타헤이는 세키가하라 때도 활약하였다.


 나가마사가 이에야스[家康]의 우에스기 토벌[会津征伐][각주:3]에 출진하자, 나가마사의 예언대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세력은 오오사카[大坂] 텐마[
満]의 쿠로다 저택을 포위했다. 타헤에는 밤을 기다려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 부인 코우엔[幸圓]과 나가마사의 부인인 네네[]를 가마니 안에 넣고, 두 개의 가마니를 바구니에 담아 긴 막대 끝에 걸쳤다. 그리고 상인으로 변장하여 그 막대를 어깨에 메고 뒷문 쪽에 있는 목욕탕의 벽을 뚫고 탈출, 쿠로다 가[黒田家]에 출입하는 상인 나야 쇼우자에몬[納屋 小左衛門]의 집으로 옮겨 숨겼다.


 부친 죠스이가 나카츠[中津]에서 파견한 배가 오오사카[大坂] 포구에 도착했지만, 이시다 측의 군선이나 작은 배들, 병사들의 경비가 심해서 타헤이, 쿠리야마 토시야스[栗山 利安], 미야자키 스케다유우[宮崎 助太夫]의 세 가노(家老)들은 당혹하였다.


 7 17일 밤.
 타마츠쿠리[玉造]의 하늘이 갑자기 붉게 물들었다. 이시다 쪽의 인질요청을 거부하고 자살한 호소카와 가라샤[細川
ガラシャ][각주:4]와 호소카와 저택이 불타오른 것이었다. 경비하던 병사들이 타마츠쿠리로 향한 틈을 타서 코우엔과 네네는 729일 본국인 나카츠에 무사히 도착했다.


 모친과 부인을 탈출시킨 그들의 공적을 마음 속 깊이 감사하고 있던 나가마사는 새로운 영지(領地) 후쿠오카 번()을 지배함에 있어서 지성 주둔 제도를 택하여 타헤이를 타카토리 성(), 쿠리야마 토시야스를 아사쿠라 군[朝倉郡] 마테라 성[左右良城]에 죠우다이로 각각 임명했다. 또한 가중 통제의 일환으로 '화내지 않는 모임[腹立てずの会]'이라는 것을 만들어, 중신부터 하급 무사에 이르기까지 자유로이 의견을 말할 수 있는 토론회를 열어 그들의 의견을 나가마사에게 전할 수 있게 하였다.


()의 미래를 생각하며……


 1623.
 55
세가 된 나가마사는 에도[
戸]에서 가슴에 통증을 느끼고 약을 복용했지만, 열격(噎膈)이 같이 생겼다. 쿄우토[京都]에 들리지 않고 후시미[伏見]에서 오오사카[大坂]로 이동. 치쿠젠에 귀국해서 몸을 돌보려 했지만, 이에미츠[家光] 3대 쇼우군[軍] 취임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서 결국 오오사카에서 2~3일 정도 머문 후 상경하여 호우온 사[報恩寺]를 숙소로 정했다. 상경한 히데타다[秀忠], 이에미츠도 나가마사에게 사자[使者]를 보내 병문안 하였다.


 나가마사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 온 것을 깨달았을 때, 부하에게,

 지금 죽을 때가 되니 안타까운 것이 세 가지 있다
 고 말했다고 한다(쿠로다 가문 족보[黑田家譜]).


 [첫째는 어머니 코우엔보다 먼저 죽는 불효를 저지른 것이며,
 
둘째는 적자(嫡子) 타다유키[忠之]가 아직 약관(21)임에도 뒤를 돌보아 주지 못하고 죽는 것.
  셋째는 휘하의 장졸들을 데리고 평소 훈련시키며, 전투에 임해서는 엄숙과 절제를 지키고, 내 수족과 같이 움직이고 싶었다. 이것을 정말 해보고 싶었다. 이 이외에 미련은 없다.]


 윤 8 4일.

 나가마사는 일어나 앉아서 타다유키에게,

 “위를 공경하고 아래를 자비롭게 대하거라. 절대 게으름 부리는 일이 없도록 하거라

 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사세구는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속세를 떠돌아다녔지만 이제는 돌아간다 극락정토의 하늘로

 此のほどはうき世の旅にまよひきて今こそかへれあんらくの空

  1. 임진왜란을 말함. [본문으로]
  2. 성주를 대신해서 성과 그 주변을 행정, 관리, 방어하는 직책. [본문으로]
  3.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다고 하자 상경하라고 명령하나, 카게카츠의 가로(家老)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의 편지에 빡쳐 정벌하러 간 사건. [본문으로]
  4.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의 부인. 이 글에선 자살했다고 하지만 그녀는 크리스천이었기에 가신에게 자신을 창으로 찌르게 하는 방식을 택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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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다 요시타카[ 孝高]

1604 3 20일 병사(病死) 59.

1546 ~ 1604.

()인 죠수이[如水]가 더 알려져 있다. 통칭 칸베에[官兵衛].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를 섬기며 타케나카 한베에[竹中 半兵衛]와 더불어, [하시바의 두 명의 베에(羽柴兵衛)]라 일컬어 졌다. 히데요시의 큐우슈우[九州] 제압 후 부젠[豊前] 나카츠[中津] 성주(城主)가 되었고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동군에 속하여 큐우슈우[九州]의 서군과 싸웠다.








천하인(天下人)에의 야망과 좌절


 1604 3 20일.

 야마시로[山城] 후시미[伏見]의 저택에서 쿠로다 요시타카는 59세의 생애를 마쳤다.

 세키가하라[ヶ原]로부터 4 늦은 봄의 이별이었다.


 요시타카가 세상을 떠날 때, 아들인 나가마사[長政]에게 유언으로 남긴 내용이 [무공담 모음집(咄聞書)]에 전해지고 있다.

 “나는 도박을 잘하지만 너는 못한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세키가하라[ヶ原] 이에야스 공[家康公]과 지부[冶部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100일 정도 서로 싸우게 냅두면, 그 동안 난 츠쿠시[筑紫[각주:1]]를 제압한 후 쿄우토[京都]로 올라가 천하를 잡을 수 있었을 터였다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가 하루 만에 끝나질 않고 이에야스와 미츠나리가 100일 간 싸웠다면 자신은 얼른 큐우슈우[九州]를 평정하여 승기(乘機)를 타 츄우고쿠[国]의 모우리[毛利], 우키타[宇喜田]의 서군 세력을 물리치고 쿄우[京]에 올라가 어느 쪽이건 승자와 대결하여 천하를 잡을 수 있었다고 - 죽기 직전에 나가마사에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10월 15일.

 세키가하라[ヶ原]에서 천하를 손에 넣은 이에야스는 오오사카 성[大坂城]에서 논공행상을 행하며 공이 있는 다이묘우[大名]들에게 영지(領地)를 배분했다.

 카토우 기요마사[加藤 正]에게는 히고[肥後] 54만석, 나가마사에게는 치쿠젠[筑前] 50 2416석이라는 큰 영토가 주어졌지만 요시타카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없었다. 이에야스는 요시타카의가 천하를 손에 넣으려 했던 숨겨진 야망을 꿰뚫어 보았던 것은 아닐까?

 치쿠젠[筑前]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가 된 나가마사는 부젠[豊前] 나카츠 -그때까지의 영지 18 2천석 - 에서 치쿠젠[筑前] 나지마[名島] 입성하였다.


 나지마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 쌓인 요해(要害)였지만 원래는 타치바나 무네시게[立花 宗茂]의 영지에 있던 조그만 요새에 불과하였고 더구나 마을을 만들 땅이 좁아 성 밑 마을(城下町)을 발달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다음 해에는 나카 군[那珂郡] 후쿠사키[福崎]에 새로이 성을 만들어 쿠로다 씨[黒田氏] 발상(發祥)의 땅인 비젠[備前] 오쿠 군[邑久郡] 후쿠오카[福岡]의 이름을 따와, [후쿠오카]라고 이름을 붙였다.

 나지마 성[名島城]을 없애고 후쿠오카에 새로 성을 축성하기로 결정이 나자 요시타카는 은거하여 모든 것은 나가마사에게 맡기고, 나지마 성에서 나와 다자이후[太宰府[각주:2]]에 임시 거처를 만들어 거기로 옮겨 살았다.

 다자이후 텐마 궁[宮] 경내(境內)에 세워진 초가집에서 매일매일 풍류를 즐기며, 다도(茶道)와카[和歌], 렌가[連歌] 등의 소양을 쌓았다.


문인으로써의 풍류의 나날


 예전에 멀리 떨어진 조정[遠の朝廷=발음은 とおのみかど’]”라고 불렸던 다자이후.

 그곳의 초가집에서 풍류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던 요시타카는 렌가 사[連歌師]인 키야마 죠우인[木山 紹印]에게 땅을 하사하여 살게 해서는 예전에 융성했던 다자이후 렌가의 부흥을 꾀했다.

 또한 다자이후 덴마궁()2천석을 기부하여 아치형 다리(太鼓橋), 석등(石燈)을 만들어 받치고, 큰 칼[太刀] 외에 [텐진엔기 에마키[天神絵巻[각주:3]]] 세 권과 렌가를 봉납함과 동시에 궁 사무 책임자인(宮司務別) 오오토리이 신간[大鳥居 信岩]과 친교를 맺었다.


 1601 1 17일.

 오오사카[大坂] 텐마 궁[宮]에서 개최된 렌가회()에 오오토리이 신간과 함께 참여했다.

 이 모임에서는 중앙 렌가계()의 중심적 존재인 사토무라[里村] 일문(一門)의 총사() 쇼우하[紹巴[각주:4]]나 쇼우시츠[昌叱[각주:5]], 마에다 겡이[前田 玄以] 등이 자리를 함께했다.


 다음 해인 1602 1 16.

 다자이후 덴마궁()에서 아들 나가마사, 신간[信岩], 렌가 사[連歌師]인 키야마 죠우인[木山 紹印] 등과 렌가회()를 열어, 예부터 큐우슈우[九州] 문화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다자이후 문예의 부흥을 꾀한 것은 특필할만하다고 할 수 있다.


 다인(茶人)으로써도 뛰어났다.

 센노 리큐우[千 利休]와 친교를 맺고 그의 다도관을 몸에 익혔으며, 다이토쿠 사[寺]의 슌노쿠 화상[春屋和尙]을 참선(參禪)의 스승으로 삼아 다도에도 선()의 정신을 가미하여 깊이를 더해 갔다.


 1601 5월.

 이에야스가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개최한 잔치에 참가했던 요시타카는 그곳에서 가장 큰 차 가루를 넣어 두는 단지인 [葉茶壺]를 그냥 들고 나와 그 호방함에는 이에야스도 놀랐다고 한다[각주:6].


 2년간의 다자이후 생활 후 일부 완성된 후쿠오카 성 세번 째 성곽[丸] 은거 저택으로 옮긴 요시타카는 부인인 코우엔[幸圓]과 소박한 생활을 보냈다. 평생 부인 한 사람만 사랑한 그는 경건한 크리스천 다이묘우[大名]이기도 했다. ‘돈 시메온이라는 세례명을 가지고, [SIMEONJOSUI]라 쓰여진 로마자 도장을 사용했다.

 유해(遺骸)는 쿄우토[京都] 다이토쿠 사[寺]에 매장되었고, 하카타[博多]의 소우후쿠 사[崇福寺]에도 분골(分骨)[각주:7]되었다.



  1. 큐우슈우(九州)의 옛 이름. [본문으로]
  2. 과거 일본 조정이 힘이 있을 때의 큐우슈우[九州]와 부속 도서(島嶼)를 관장하던 관직인 다자이[太宰]의 정무소가 있던 곳. [본문으로]
  3. 일본에서 학문의 신으로 받들고 있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 道真]'의 일생과 그가 죽은 뒤에 텐진[天神]으로 신앙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그림과 설명이 쓰여진 두루마기. [본문으로]
  4. 당시 렌가계(界)의 일인자. 여담으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가 혼노우 사[本能寺]의 반역을 일으키기 직전에 아타고[愛宕]에서 연 렌가회의 사회자로 참가했었다. [본문으로]
  5. 죠우하의 아들. [본문으로]
  6.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훔쳤다는 뜻. [본문으로]
  7. 유해를 두 개소 이상으로 나뉘어 매장하는 것.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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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다케요시[村上 武吉]

1604 8 22일 병사 72.

1533년 즈음(??) ~ 1604.

노시마[能島] 무라카미 씨[村上氏] 5대 당주. 가독(家督) 종가(宗家)에게서 가독을 빼앗았다. 세토 내해[瀬戸內海]의 수군(水軍)을 이끌었다. 이츠쿠시마 전투[厳島の戦い]에서는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편에 서 스에 하루카타[陶 晴賢]와 싸웠고 후에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지배 하에 들어가 치쿠젠[筑前], 부젠[豊前]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도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를 도왔다.








노시마[能島] 퇴거[退去]


 무라카미 타케요시가 선조 대대로 내려오던 수군성(水軍城) 노시마를 뒤로 하고 아키[安芸] 타케하라[竹原]로 자리를 옮긴 것은 1585년 가을이었다.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가 모우리 공략(빗츄우[備中] 원정)시에 3번에 걸쳐 항복을 권했지만 이에 따르지 않았고, 모우리 씨[毛利氏]가 히데요시에게 굴복한 뒤에도 히데요시의 사이카[
] 공략 요청에 응하지 않았으며, 1585 6시코쿠[] 정벌에도 협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자 히데요시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에게 명령하여 그를 본거지에서 쫓아낸 한 것이다.


 노시마[能島]는 쿠루시마[來島] 해협의 무시[務司], 나카토[中途]의 두 성()과 함께 노시마 무라카미 씨[能島村上]세토 내해를 항행하는 선박에게 세키제니[関銭 통행세]를 징수하기 위한 바다의 세관(稅關)이었기에, 이곳을 잃었다는 것은 해적중(海賊衆[각주:1])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된다는 의미가 되었다.


 더구나 3년 후인 1588 7 8일.
 히데요시는 해적 금지령을 발포하여 타케요시 부자(父子)가 이 금지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둘을 죽이려고 하였다. 다행히 이때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와 히데요시의 복심(腹心)인 토다 카츠타카[
田 勝隆]의 주선으로 사형은 면하게 되지만, 그 대신 아키[安芸] 타케하라에서도 쫓겨나 아카마가세키[赤間 시모노세키[]]부터 동쪽 - 즉 세토 내해에서의 거주를 금지 당한다.


 타케요시는 어쩔 수 없이 이요[伊予]에서 치쿠젠[筑前]으로 전봉()을 명 받은 타카카게를 따라 치쿠젠[筑前] 나지마[名島]로 거처를 옮겼고, 곧이어 부젠[豊前] 미노시마[箕島]로 이주 당한다. 부젠[豊前] 미노시마는 히데요시의 복심인 쿠로다 칸베에 요시타카[黑田 官兵衛 孝高]의 영지(領地) 위험 분자 타케요시를 칸베에의 감시하에 두고자 하는 히데요시의 노림 수였다.


 1591년.

 히데요시는 분로쿠의 역[の役[각주:2]]을 앞두고 타케요시를 나가토[長門] 오오츠 군[大津郡]으로 이주 시켰다. 이 곳은 모우리 씨[毛利氏]의 영지로 주어진 석고(石高) 1만석이라고 하지만, 예전에 본거지였던 세토 내해와는 멀리 떨어진 한국 동해(東海)측의 벽지(僻地)였다. 이럴 정도로 히데요시는 무라카미 타케요시라는 존재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재기(再起)를 꿈꾼 야망(野望)


 타케요시가 나가토 오오츠 군에서 아키[安芸] 타케하라로 돌아 온 것이 1598년 가을. 이해 8 18일에 타이코우[太閤] 히데요시가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타카카게는 그 전해인 6 12일 미하라 성[三原城]에서 병으로 죽었기 아키[安芸] 타케하라는 모우리 테루모토의 영지가 되어 있었다.


 이때 타케하라의 친카이잔 성[海山城]에서 살고 있던 타케요시는 아들인 모토요시[元吉]와 함께 이요[伊予] 노시마로 복귀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세토 내해 중앙부의 지배권을 회복하여 예전의 영광을 되찾고자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천하 형세는 그런 타케요시의 바램과는 반대 방향으로 흘러갔다. 히데요시의 죽음에 의해 생긴 절호의 기회를 모우리 테루모토가 놓쳤고, 그의 우유부단으로 인하여 천하는 수군을 적대시(敵對視)하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의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1600년 여름.
 천하를 판가름하는 전투를 눈 앞에 두고 타케요시의 몸은 장시간 잠들고 있었던 바다 무사의 피가 들끓어 오르고 있었다. 그의 계획은 무라카미 수군의 온 힘을 다해서 오오사카 만[大坂灣]으로 출동. 오오사카 만()에서 이세 만[伊勢灣]에 걸친 해역을 봉쇄해서 동군을 견제하고, 예전의 라이벌이었던 쿠키[九鬼] 수군[각주:3]과 협력하면서 서군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군의 총수(總帥) 모우리 테루모토는 그런 무라카미 수군에게 이요[伊予] 마사키 성[松前城] 공략을 명했다. 그 때문에 무라카미 수군 세력은 둘로 나뉘어 오오사카로의 출동은 빗츄우[備中] 카사오카[笠岡]의 무라카미 카게히로[[각주:4]]과 타케요시의 둘째 아들 카게치카[景親]가 담당하고, 타케요시 자신은 장남인 모토요시나 인노시마[因島] 무라카미 수군의 무라카미 요시타다[村上 吉忠] 등을 이끌고 이요[伊予] 미츠카하마[三津浜]로 출동한 것이다.


고난 속에서 죽다.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다.
 오오사카로 출동한 수군 부대는 거의 기대했던 만큼의 성과를 올렸지만, 이요[伊予]에 상륙한 무라카미 수군의 육전대(陸戰隊)는 부대장이며 타케요시의 장남 모토요시를 포함하여 후루미츠[古三津]에서 전멸 당하였다. 항복한다고 속임수를 쓴 적의 야습에 당한 것이었다.

우치노뉴우[內入] 겐세이 사[元正寺]에 있는 타케요시의 묘(墓).

 때문에 타케요시는 세키가하라[ヶ原]의 패배에 따라 영지(領地) 대부분을 잃은 모우리 씨를 따라, 스오우오오시마[周防大島]로 떠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주한 곳은 스오우오오시마 동부의 우치노뉴우[]였다. 한 때 일본 최강의 해상군단(海上軍團) 총수(總帥)로 천하인(天下人) 히데요시에게조차 공포심을 안겼던 바다의 효장()도 지금은 불과 120명의 부하를 거느린 늙은이에 지나지 않았다.

 패사(敗死)한 장남 모토요시의 뒤를 이은 것은 불과 7살의 손자 모토타케[元武], 둘째 아들 카게치카가 자신의 부하 300명을 이끌고 모토타케를 보좌했지만, 모우리 씨에게 하사받은 영지는 다 합쳐서 3000여 석에 지나지 않았기에, 농부가 되어 밭을 가는 것 말고는 생활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에 절망한 부하들은 계속해서 새로 취직할 자리를 찾아 섬을 떠났다.


 이런 고난 속에서 타케요시가 노시마의 바다를 추억하며 죽은 것은 1604 8 22.

향년 72(79세라는 설도 있다)였다.

  1. 일반적인 해적질을 목적으로 하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바다의 용병집단이라는 성격이 강했다. [본문으로]
  2. 임진왜란을 말함. [본문으로]
  3. 과거 모우리 가문[毛利家]과 오다 가문[織田家]이 다툴 때, 오오사카의 혼간 사[石山本願寺]에 병량을 반입시키기 위해 싸운 키즈 강 입구 전투[木津川口の戦い]에서 싸웠던 사이이다. 여담으로 두 차례 수전이 일어났는데, 1차는 무라카미 수군의 승리. 2차는 철갑선을 앞세운 쿠키 수군의 승리. [본문으로]
  4. 타케요시의 사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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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나카 시게하루(竹中 重治)

1579 6 13 병사 36

1544 ~ 1579.

통칭 한베에(半兵衛). 사이토우 타츠오키(斎藤 龍興[각주:1])의 신하였으나, 오다 가문(織田)으로 배를 바꾸어 탄 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의 요리키(与力[각주:2])가 된다. 아자이(浅井)씨 공략이나 나가시노(長條) 합전 등에서 공을 세웠다. 노부나가(信長)츄우고쿠(中国) 지방 공략의 선봉으로 출진하지만 하리마(播磨) 미키(三木)성을 포위하고 있던 중에 진영에서 죽었다.










이나바야마(稲葉山)성 탈취극


 타케나카 시게하루는 통칭인 '한베에(半兵衛)'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외견은 아름다운 부인(婦人)과 같아 전장에서도 용맹함이 느껴지지 않으며, 말 가죽으로 둘러싼 투구와 목면의 하오리(羽織[각주:3]), 이치노타니(一ノ谷)의 갑옷을 입고 조용했다는 것이 [상산기담(常山紀談)]이 전해주는 이미지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삼고지례로 맞이한 천재 군사라는 이야기는 [絵本太閤記]의 기술로 시게하루가 섬긴 것은 어디까지나 오다 노부나가이며 노부나가에게서 요리키라는 형식으로 히데요시에게 협력한 것이다.


 시게하루가 군략가로써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가 그 군략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이름을 알린 것은 1564 2로 20살 때의 일이었다.

 시게하루는 인질로 이나바야마성에 있던 동생 시게노리(重矩)의 병문안을 핑계로 불과 16명을 이끌고 성에 들어가 사이토우 타츠오키의 측근 사이토우 히타노카미(斎藤 飛騨守)[각주:4] 이하 6명을 죽였다. 거기에 호응하여 한베에를 사위로 둔 안도우 모리나리(安藤 守就)가 카가미시마(鏡島)성에서 병사를 보내어 타츠오키를 쫓아 내고 성을 점령한 것이다. 그러나 이 쿠데타는 대의명분이 없었기 때문인지 사이토우씨에게 비판적인 카이센 쇼우키(快川 紹喜)조차도 쪽팔림도 모르고 의도 모르는 놈들이 타케나카, 안도우 패거리들이다고 할 정도였다. 이러는 동안 오다 노부나가는 성을 건네라고 자주 사자(使者)를 시게하루에게 보냈으나 시게하루는 여기에 응하지 않았고 8월 즈음에는 요시타츠에게 성을 되돌려 주었다.


 그 후 시게하루는 잠깐 오우미(近江)의 아자이(浅井)() 아래로 몸을 피했으나 다음해는 미노(美濃)로 돌아왔다고 한다. 1566년 쿠리하라(栗原) 산에 칩거하고 있던 시게하루를 히데요시가 세번 방문하여 꼬셨다라고 하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 [絵本太閤記]의 기술인데 실제로 노부나가를 섬긴 것은 안도우 모리나리가 노부나가에게 내응했던 다음해 8월 이후일 것이다.


미키(三木)성 포위중에 죽음


 아네가와(姉川) 전투 후 히데요시가 요코야마(橫山) 성주가 되자, 시게하루가 히데요시 부재시에 성을 맡는 일이 많아져 아자이 세력(勢力)의 빈번한 습격에서도 성을 지켜냈다. 1577 히데요시의 츄우고쿠 지방 공략이 시게하루 최후의 무대가 되었다.


 1578년.

 아리오카(有岡)성의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가 모반을 일으켰을 때, 히메지(嬉路)성주 쿠로다 요시타카(黑田 孝高)는 무라시게 설득을 명령 받았지만 반대로 무라시게에게 잡혀 유폐되어 버렸다. 요시타카도 배반했다고 생각한 노부나가는 히데요시의 나가하마(長浜) 성에 맡겨 두었던 인질 처형을 명했다. 처치가 곤란해 하고 있던 히데요시에게 시게하루는 하나의 계책을 알려 인질을 자신의 본거지인 이와테(岩手)[각주:5]에 감추었다.


 1579 10월.

 아리오카 성이 낙성되어 요시타카도 구출되었고 인질도 요시타카에게 돌려주었다. 이 인질이 후의 쿠로다 나가마사(黑田 長政) 나가마사는 죽을 때까지 시게하루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았다고 한다.


 1578 3월.

 벳쇼 나가하루(別所 長治)가 지키는 미키 성을 히데요시가 공격하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이곳을 성급히 정면 공격하지 않고 주위에 많은 수의 진지로(陳城[각주:6])를 세워 장기 포위전을 하기로 하였다. 긴 전쟁터 생활로 건강을 헤친 시게하루가 병으로 쓰러진 것은 포위 중이던 다음해 4월이었다.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시게하루는 쿄우토(京都)에서 잠시 휴양했지만 병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죽는다면 전장에서 죽는 것이 무가의 바램이다"라며 비장한 결의를 한 시게하루는 부하의 걱정스러운 말을 뒤로하고, 하리마(播磨) 히라야마(平山)로 돌아왔다. 6 13 시게하루는 36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한창 일할 나이의 죽음이 이 글 초반에 언급한 [常山紀談]과 같이 천재지만 여성적이며 선이 가는 이미지를 시게하루에게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코우야(高野) 칩거의 꿈


 시게하루의 장남 시게카도(重門)가 기록한 [토요카가미(豊鑑)] 히데요시의 한 없는 슬픔을 [제갈 공명]을 잃은 [유비]에 비교하고 있다. 또한 시게하루 죽은 뒤에도 군사 회의를 할 때마다 히데요시는 반드시 시게하루를 언급했다고 한다.([寬永諸家系図伝])


 한편 다음과 같은 견해도 있다.

 노부나가나 히데요시는 시게하루가 큰 뜻과 야망을 품고 있는 것을 알고서 결코 마음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시게하루에게 따로 영지를 하사하지 않고 고생만 시키며 그의 위세를 꺾으려 했다고 한다. 그것을 깨달은 시게하루는 미키성을 함락하면 코우야 산에 올라가 은퇴하여 세상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살려고 결심하고 있었다 한다.([竹中家譜])


 시게하루의 유골은 미키성이 보이는 장소에 묻어졌다. 죽어서도 아군을 고무하며 전군을 지휘하려고 했을 것이다. 미키성이 낙성된 것은 시게하루가 죽은 반년 후인 1580 1월이었다.

  1. 사이토우 도우산(斉藤 道三)의 손자. [본문으로]
  2. 조력자...를 말한다. 주군이 부하에게 도움이 될 부하를 파견하는 것으로 격을 따지자면 동격임. [본문으로]
  3. 갑옷 위에 입는 조끼와 같은 덧옷 [본문으로]
  4. 성 탈취의 원인은 이 히타노카미가 시게하루에게 오줌을 쌌기 때문. [본문으로]
  5. 보다이야마 성(菩提山城)의 별칭. [본문으로]
  6. 합전 혹은 공성용으로 임시적으로 세워두는 주둔용 요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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