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용감하도다. 이번 생에서 그 용감함에 상을 줄 수는 없지만, 다음 생에서는 반드시 상을 내리겠다.
勇鋭と言うべし。今生で恩賞を与える事はかなわぬが、願わくば来世において授けようぞ

 
혼노우사의 변(本能寺の変)이 터졌을 때, 아버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곤경에 빠졌다는 급보를 받은 후계자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는 혼노우사에서 멀지 않은 묘우가쿠사[妙覚寺]에 머물고 있었다.
 
곧바로 구원에 나서려 했으나[각주:1], 도중에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각주:2] 발길을 돌려 황태자의 거처인 니죠우고쇼[二条御所]로 향했다. 노부타다는 황태자 일행을 안전하게 내보낸 후, 방어 시설조차 없는 이 고쇼에서 농성하기로 결심했다.
 
일부에서는 탈출을 권유했지만, 노부타다의 결심은 확고했다.
 
"이렇게 반란을 일으킨 자들이다. 분명 철저히 준비했을 것이다. 만약 도망치다가 잡병들에게 붙잡혀 후세의 웃음거리가 된다면 면목이 없다."
 
노부나가의 사망 소식에 노부나가의 상경에 따라 교토 각지에 흩어져 머물고 있던 노부나가의 친위대[馬廻衆]들은 주군의 후계자를 지키기 위해 니죠우고쇼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황태자의 거처였던 고쇼는 방어에 취약했고, 급히 달려온 병력 중 제대로 된 갑옷을 갖춘 이는 드물었다.
 
노부타다를 따르는 병력은 휘하 500~600명과 노부나가 친위대 약 1천 명, 도합 1,500여 명에 불과했다. 이에 맞서는 아케치 반란군은 1만 수천 명으로 병력적인 면에서 압도적 열세였다.
 
기록에 따르면 노부타다 군은 초반에 2~3차례 적을 물리치며 용감하게 싸웠지만,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검성(剣聖) 가미이즈미 노부츠나[上泉信綱]의 수제자인 히키타 분고로우[疋田文五郎][각주:3] 에게서 면허개전(免許皆伝)을 받았던 검호(剣豪) 노부타다는 전장의 맨 앞에서 홀로 적병 17~18명을 베어 쓰러뜨렸다고 전해진다.
 
전투가 절정에 달했을 때, 부하 시모카타 야사부로우[下方弥三郎]가 돌격해 싸우다 다리에 부상을 입고 옆구리를 베여 창자가 튀어나온 채로도 계속 싸우는 것을 본 노부타다는 이렇게 외쳤다.
 
 "참으로 용감하도다. 이번 생에서 그 용감함에 상을 줄 수는 없지만, 다음 생에서는 반드시 상을 내리겠다."
(勇鋭と言うべし。今生で恩賞を与える事はかなわぬが、願わくば来世において授けようぞ)
 
이 말을 들은 시모카타는 환하게 웃으며 다시 적진으로 돌격했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격전은 한 시간을 넘겨 이어졌고, 수적 우위에 서고도 노부타다의 강력한 저항에 당황한 아케치 군은 니죠우고쇼의 이웃인 코노에 저택近衛邸을 무단 침입하여 지붕에 올라가 높은 위치에서 노부타다군을 내려다 보며 철포와 활로 공격했다.[각주:4] 여기까지 이르자 철포와 화살에 여러 군데 상처를 입은 노부타다는 마지막 순간이 왔음을 직감하였다.
 
결국 니죠우고쇼에 아케치 군의 침입을 허용하여 불길 속에 니죠우고쇼가 함락되자, 노부타다는 카마다 신스케[鎌田信介]에게 카이샤쿠[介錯]를 지시하고는 자신의 시체는 마루를 뜯고 그 밑에 숨기라 하고는 배를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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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들의 기록에서는 당시 노부타다의 활약에 대해,
 
“황태자의 저택에 모인 사람들은 엄선된 유력한 무사들이었기에 잘 맞써 싸웠지만, 1시간 이상 지나자 미츠히데 군쪽이 숫자가 많았고 잘 무장되었으며 철포도 많이 준비되었기에 그런 그들에게 대항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웠다. 그럼에도 후계자 노부타다는 굉장히 용감히 싸웠으나 철포와 화살에 여러 군데 상처를 입었다. 결국 우세하게 된 다수의 아케치 군세가 저택에 침입하여 불을 질렀기에 많은 자들이 불에 타 죽었다. 그들에 섞여 후계자 노부타다도 또한 그 외의 높은 신분의 무사들이나 병사들과 함께 같은 운명을 맞아하였다.”
 
나라奈良에 있는 승려들의 기록에서는 전해들었다며, 
 
“문 앞에서 3번 상대를 격퇴하였지만 상대는 수가 많았기에 결국 전사하였다.”
“죠우노스케 님[城介殿][각주:5] 비할 데 없는 활약을 하셨다고 한다.”
 
동시대의 전기작가 오오무라 유우코[大村由己]는 소우켄인도노추선기[総見院殿[각주:6]追善記]에서,
 
“마지막임을 깨달은 노부타다는 가장 앞서 돌격하여 달려드는 적병 17~18명을 쓰러뜨렸다. 노부타다를 따라 돌격한 부하들도 뒤쳐질 수 없다며 분전하여 적을 격퇴시켰다. 그때 미츠히데의 군에서 아케치 마고쥬로우[明智孫十郎], 스기우 산에몬[杉生三右衛門], 카나리 키요츠구[加成清次] 그 외의 강건한 무사 몇 명이 이름을 대며 달려들었다. 이를 본 노부타다는 그들의 한 가운데에 뛰어들었다. 평소 단련해 왔던 옛 검법과 지금의 검법에서 전해지는 비전의 초식, - 영걸일태도(英傑一太刀)를 극한까지 구사하여 상대하니, 아케치 마고쥬로우를 쓰러뜨렸으며, 스기우 산에몬, 카나리 키요츠구의 목을 베었다. 노부타다의 부하들도 있는 힘껏 싸워 나가 적을 물리치며 최후의 전투를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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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타다의 목을 벤 카마타 신스케[鎌田信介]는 어찌저찌 묘우가쿠사를 탈출하여 고우야 산高野山에 숨었다가,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의 부름을 받고 그의 가신이 되었다. 이후 동아시아 7년전쟁 때 조선으로 건너와 남원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한다. 이후 조선에서 사망.
 
노부타다에게 상찬받은 시모카타 야사부로우下方弥三郎는 이때 당시 29세. 어렸을 때부터 노부타다를 섬겼으며, 행정면에서 노부타다를 보좌하는 한편 무력면에서도 타케다 정벌전 때 크게 공을 세웠다고 한다. 

  1. 당시 직선거리로는 800~850미터, 길로 가면 약 1km, 도보로는 약 12~15분 정도, 급하게 말을 몰면 5분 이내의 거리 [본문으로]
  2. 전한 이는 무라이 사다카츠村井貞勝로, 당시 노부나가 정권하에서 쿄우토京都와 관련된 모든 행정 및 사법을 관장하는 쿄우토쇼시다이[京都所司代]에 일본 조정과 쿠게[公家]와 외교 창구이기도 했다 [본문으로]
  3. 덧붙여 히키타 분고로는 야규우 세키슈우사이[柳生石舟斎]와 세 번 대결하여 모두 이겼고 이에 야슈우 세키슈우사이가 노부츠나를 스승으로 삼았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였다. [본문으로]
  4. 이로 인해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힘을 빌려주었다는 의심을 산 코노에 사키히사[近衛前久]는 노부나가의 3남 노부타카[織田信孝]와 히데요시[羽柴秀吉]의 의심을 사 당분간 도망다녀야 했다 [본문으로]
  5. 노부타다의 관직인 아키타죠우노스케秋田城介] [본문으로]
  6. 오다 노부나가의 계명 [본문으로]

시마즈 효우고노카미 요시히로[島津 兵庫頭 義弘]! 무운 다하여 여기서 배를 가른다. 일본의 무사들이여! 너희들이 내 목을 베었다고 나중에 자랑하지 말지어다”


1600년 9월13일. 사츠마[薩摩] 카모우[蒲生]에 있던 쵸우쥬인 세이쥰[長寿院 盛淳]은, 소수의 병력[각주:1]으로 서군(西軍)에 참가해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의 동원령에 응하여 요시히로의 저택이 있던 쵸우사[帳佐]와 자신이 다스리던 카모우[蒲生]의 무사 70여명을 이끌고 8월 3일 출발하여 9월 13일 이른 아침 세키가하라의 난구우산 산[南宮山] 근방에 도착.

아침.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휘하의 병사 1000명을 파견하여 마중.  
길 양측에 도열해서는 앞을 지나가는 쵸우쥬인 세이쥰의 병사들에게 큰소리로,
"오시는 동안 많은 고난이 있었을 텐데 이렇게 무사히 오시다니 정말 군신(軍神)이 따로 없소"
라 외쳤고, 마중 나왔던 미츠나리는 금으로 된 지휘부채[軍配]를 주며 쵸우쥬인 세이쥰[長寿院 盛淳]의 노고를 치하.

점심.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가 주둔해 있던 오오가키[大垣]에 도착.
요시히로 문밖으로 달려 나와,
”쵸우쥬[長寿]구나! 자네가 가장 먼저 와 줄거라 믿고 있었네.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어”
라 기뻐하며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하사 받았던 흰 봉황이 새겨진 진바오리[陣羽織][각주:2]를 하사.

이틀 뒤인 1600년 9월 15일.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시작.

서군(西軍)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시마즈 부대의 본영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그 너무도 빠른 서군의 붕괴에 요시히로는 아직 갑옷도 완전히 입지 않은 상태였다.[각주:3] 서군의 좌익 이시다, 우익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는 이미 무너져 전장에 남아있는 서군의 부대는 시마즈 부대 뿐이었다. 앞으로 어느 쪽으로 탈출할 지를 놓고 토론하였다. 그때 세이쥰이 들어왔다.
”이때가 되어서도 한가롭게 말싸움이나 하고 있을텐가? 말로 다툼하는 대신 무공으로 다투고 싶은 사람은 나와 함께 여기에 남아 마지막 무명을 높이세”

막료들이 이러고 있는 동안 요시히로는 할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거기에 조카인 시마즈 토요히사[島津 豊久][각주:4]가 와,
“이제 정해진 천운(天運)을 바꿀 순 없습니다. 살아 장수를 누리는 것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희는 여기서 싸우다 죽으려 하니, 그 사이 큰아버지는 가신들을 이끌고 사츠마[薩摩]로 돌아가십시오.”
그래도 요시히로는 듣지 않았다.
“큰아버지의 몸에 시마즈 가문의 운명이 걸려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옵소서”
라고 외치자 그제서야 요시히로는 일어섰다.

그 대화를 보고 있던 세이쥰은 요시히로와 토요히사의 말이 끝나자 재빨리 요시히로의 갑주 쪽으로 가 자신의 무구를 벗은 후 요시히로의 것을 서둘러 입었다. 그것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알고 있기에 요시히로는 아무 말 없이 대신 세이쥰이 벗은 무구를 입었다. 이로 인해 세이쥰은 도착했을 때 요시히로에게 받은 진바오리와 요시히로의 무구, 거기에 미츠나리가 준 황금 지휘부채로 인해 오히려 요시히로보다 더욱 화려한 모습이 되었다.

역할이 정해졌다.
토요히사는 시마즈 요시히로를 호위하며 탈출하기로, 세이쥰은 본진이었던 곳에 남아 요시히로의 영무자[影武者]가 되기로.

요시히로가 부하에게 물었다.
“어느 쪽 적의 기세가 가장 왕성한가?”
부하가 답했다.
“동쪽에 있는 적이 가장 기세 등등합니다.”
부하의 보고를 받고 요시히로는 말했다.
“그렇다면 그 기세를 향해 돌파할 것. 돌파하지 못하면 효우고 뉴우도우[兵庫入道][각주:5]는 할복할 뿐!”
부하들이 합창하듯이 답했다.
“말씀하신 두 명령. 받자와 메시겠습니다”

떠나는 토요히사에게 세이쥰이 다가가 말했다.
“이것으로 금생에서는 더 만나지 못할테니 지금 인사를 올립니다”
토요히사는 말했다.
“오늘은 아군이 약하기에 무공을 세우긴 힘들 것 같군요”
둘은 미소를 지으며 헤어졌다.

남겨진 쵸우쥬인 세이쥰 부대 200~300에 동군(東軍) 부대 700이 돌진해 왔다.
처음엔 본진에 적들이 난입하기 전에 철포로 물리쳤다.
두 번째는 난전이 되었다.
시마즈 부대의 암구호는 ‘자이[ざい]’였는데, 하필 상대도 ‘자이[ざい]’였다[각주:6]. 같은 편끼리 죽고 죽이기도 하였다. 개중에는 두려워 본진 뒤편에 파 두었던 해자[垓字]로 도망치는 자들도 있었다. 세이쥰은 노하여 외쳤다.
“사츠마까지는 500리나 된다. 설사 도망치더라도 멀어서 가기나 하겠나? 거기에 도망치는 놈은 얼굴 다 알려졌을테니 앞으로의 굴욕을 어떻게 감당하려 하나!”
몇몇이 해자에서 기어나와,
“잠시 동안이라도 미련을 가졌던 것이 정말 창피하옵니다.”
라 말했다.

난전이 된 두 번째 적의 파도을 제압한 세이쥰이 부하들에게 물었다.
“주군은 어디까지 가셨나?”
부하들은 모두 입 맞추어,
“적진을 돌파하였습니다. 이제는 아주 멀리 가셨을 것입니다.”
“축하할 일이구나. 이제 내가 주군의 영무자[影武者]로 죽는 일만 남았군”

적의 3차 돌격에서 세이쥰은 죽었다고 한다.
“시마즈 효우고노카미[島津 兵庫頭] 죽으려고 환장했으니 올테면 와라”
라 외치며 돌진하다 무수한 적의 창에 몸이 꿰뚫린 후 힘 다해,

“시마즈 효우고노카미 요시히로! 무운 다하여 여기서 배를 가른다. 일본의 무사들이여! 너희들이 내 목을 베었다고 나중에 자랑하지 말지어다”[각주:7]

외친 후 배를 열십자로 가르고 머리를 북쪽으로 향해 죽었다.

그때까지 남아 있던 283명은 그 모습을 보고 돌진하여 살아남아 도망친 자는 50명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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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토요히사[島津 豊久]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고 한다. 퇴각전 중 그가 타고 있던 말만 나타났다고 한다. 토요히사를 죽였는지 아니면 그가 죽어있을 때 갑주만을 벗겨 전공품으로 삼았는지 알 수 없지만, 토요히사가 입던 갑옷는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양자 후쿠시마 마사유키[福島 正之]의 부대에 꼽사리 끼었던 낭인[浪人] 카사하라 토우자에몬[笠原 藤左衛門]이 가져가 그의 자손이 대대로 소유했다고 한다. 후에 소문을 들은 토요히사의 6대손이 찾아가 살피자, 갑옷에는 창에 꿰뚫린 자욱이 두 군데 있었다고 한다.



쵸우쥬인 세이쥰[長寿院 盛淳] 1548년~1600년.
盛淳을 일본 위키피디아의 해당항목이나 일본 일반 웹에서는 ‘모리아츠’라고 읽으나 세이쥰은 승려에, 그의 스승이 ‘다이죠우인 세이큐우[大乗院 久]’였기에, 스승의 이름자 하나를 물려 받았을 터이니 ‘세이쥰’이라 읽어야 할 듯.
어렸을 적부터 불문에 들어갔다.[각주:8] 처음 입문한 곳은 시마즈 가문[島津家]이 기도를 올리는 사원인 다이죠우인[大乗院]. 그 후 키이[紀伊]의 네고로 사[根来寺], 코우야[高野]에서 수행 후 사츠마[薩摩]로 돌아와 안요우 원[安養院]의 주지가 되었다. 그 후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의 부름으로 환속하여 시마즈 가문의 국정에 참가. 후에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의 휘하 가로가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요시히로의 동원령에 호응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가하였다 요시히로의 영무자(影武者)가 되어 전사. 향년 53세.

  1. 약 200명 이하. 여담으로 1600년 8월 토요토미 정권이 정한 시마즈의 재경 주둔병(在京駐鈍兵)은 7000명이야 했다. [본문으로]
  2. 조끼처럼 생긴 갑옷 위에 덧 입는 옷. [본문으로]
  3. 이를 고쿠소쿠[小具足]라 한다. 갑옷의 내피만 입고 외피를 입지 않은 상태. 요시히로는 당시 60대 중반의 나이였기에 체력 온존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본문으로]
  4. 시마즈 토요히사는 시마즈 4형제의 막내 시마즈 이에히사[島津 家久]의 아들. [본문으로]
  5. 뉴우도우[入道]는 불문에 입도한 사람에 붙는 말. 요시히로는 히데요시가 죽자 그의 명복을 빈다며 중이 된 상태였다. – 단 머리는 밀지 않았던 듯 당시 몇몇 종군기에는 머리 묶는 끈에 대한 묘사가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6. 당시 전투방식으로, 무사들끼리 대치하면 우선 자기 부대의 암구호를 대어, 상대방도 맞으면 다른 적을 찾아 나서고, 다르면 싸우는 식이었다. [본문으로]
  7. 내가 스스로 죽었는데도 나를 죽이고 내 목을 베었다고 무공을 자랑하지 말라는 말. [본문으로]
  8. 이에 대해선 그의 부친 하타케야마 요리쿠니[畠山 頼国]가 “우리 집안은 원래 아시카가 쇼우군[足利将軍]의 중신이었지만 시대를 잘못 만나 서국의 벽지(사츠마[薩摩])에 오게 되었다. 내 자손을 미천하게 키우고 싶지 않으니 불문에 보내고 싶다”고 하여 불문에 보냈다는 설이 있다…카더라. [본문으로]

“나는 예전 노부나가[信長]님의 흑색 화살막이[黒母衣]였던 사람이다. 이 목은 니가 죽을 때까지 세운 무공 중 가장 큰 공적이 될 것이다. 너는 정말 운이 좋구나. 어서 나를 죽이고 수훈을 세우거라”


1569년. 1월 3일.
토쿠가와 이에야스
[徳川 家康]는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의 마지막 거점 토오토우미[遠江]의 카게가와 성[掛川城] 공략을 위해 8000의 군사를 이끌고 오카자키 성[岡崎城]을 출발.

이에야스는 토오토우미를 가로질러 가며 호족들의 토지 소유권을 인정. 같은 달 17일 카게가와 성 북쪽에 진을 치고 공성 시작.

18일. 우지자네 부하이며, 노부나가의 미노[美濃] 침공으로 고향에서 쫓겨난 미노 출신 히네노 빗츄우[日根野 備中]의 급습으로 이에야스 측 전선기지 중 하나인 카나마루 요새[金丸山砦] 함락. 이에야스는 지원군으로 이마가와를 배신하고 자신에게 붙은 토오토우미의 호족 오가사와라 우지오키[小笠原 氏興], 본거지 미카와[三河]의 군사들까지 보냈으나 다 패배하고 퇴각함. 이에야스 이에 엄청 분노.

20일. 이마가와 측. 또다시 성밖으로 나와 개김. 오가사와라 요격하러 나섰으나 패퇴. 이에야스 다시 미카와 군세를 파견하여 농성군을 패퇴시켜 성 안으로 몰아넣음.

22일 저녁. 이마가와 측. 토구가와 진영에 야습을 가하나, 토쿠가와 측은 미리 알아채고 매복을 펼쳐 큰 승리를 거둠.[각주:1]

23일 새벽. 패퇴하는 이마가와 야습군을 뒤쫓아 토쿠가와 군 성내로 돌격. 혼전.

혼전 속에서 많은 상처를 입고 다 죽어 가던 이토우 부헤에[伊藤 武兵衛] 앞에 무쿠하라 지에몬[椋原 冶右衛門]이라는 이에야스 부하가 다가와 창을 들이대자, 앉아 있던 부헤에는 벌떡 일어나,

“나는 예전 노부나가[信長]님의 흑색 화살막이[黒母衣]였던 사람이다. 이 목은 니가 죽을 때까지 세운 무공 중 가장 큰 공적이 될 것이다. 너는 정말 운이 좋구나. 어서 나를 죽이고 수훈을 세우거라”

라고 외치며 칼을 던져버리고 목을 길게 내밀어 죽음을 맞이하였다.


같은 해 같은 달 6일.

이토오 부헤에가 죽는 순간까지 인정받았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던, 미노[美濃] 기후 성[岐阜城]의 성주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이 옹립한 15대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가 머무는 혼코쿠 사[本圀寺]에 미요시 삼인중[三好三人衆]이 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신들에게 동원령을 내리면서 자신은 단기(單騎) 출격하였다.


카게가와 성은 그 후에도 버텨 같은 해 5월 6일 우지자네의 안전을 조건으로 개성. 이마가와 우지자네는 장인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가 있는 사가미[相模]로 향했다.


이에야스의 직속부하[旗本]였던 무쿠하라 지에몬은 후일 토쿠가와 사천왕의 한 명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에게 파견된 가로[御附家老][각주:2]가 되어 대대로 이이 가문[井伊家]을 섬겼다. 상기의 이야기는 대대로 후손에게 전해진 선조의 무공담이라 한다.


이토우 부헤에[伊藤 武兵衛]. ?~1569.
武兵衛는 ‘타케베에’, ‘무헤에’라고도 읽는 듯.
사가미[相模] 출신이라고 한다. 일찍부터 노부나가를 섬기다 그에게 인정받아 엘리트 친위부대인 ‘흑색 화살막이 군단[黒母衣衆]’에 발탁되었으나, 동료를 죽이고 오다 가문[織田家]을 떠나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를 섬긴다. 1569년 1월 23일. 카케가와 성[掛川城] 전투에서 토쿠가와의 무쿠하라 지에몬[椋原 冶右衛門]에게 죽었다.

  1. 여담으로 이때 공적을 세운 사람 중에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노부나가를 섬기기 이전에 속해 있었던 마츠시타 카헤에[松下 嘉兵衛]도 포함되어 있다. [본문으로]
  2. 다이묘우[大名]에게 막부에서 파견된 가로[御附家老]로, 격으로 따지면 동격이었다. 가문에 따라서는 막부가 파견한 감시역이기도 했다. 때문에 후대로 갈 수록 다이묘우와 동격이라 우기는 파견가로와 자신의 가신이나 마찬가지로 여기는 다이묘우[大名] 간에 불화가 생기기도 하였으며, 직접 막부에 주청하여 벗어나길 바라는 파견가로 가문도 있었다. [본문으로]